신앙양심생활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13일 새벽(목)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구약에 있는 모든 표적들은. 구약에 있는 모든 표적들은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있는 모든 표적들은 신령한 이스라엘의 그림자와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림자에게는 실상이 있는 것처럼 구약 성도들에게 이루어진 그 모든  표적들은 그림자와 같고 그 실상은 신약 교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이적들이 나타난 그 이적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시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역사들이  나타날 때는 이스라엘 신령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육체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  하나님을 참 믿고 바라보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분을 의지해서  순종할 때에 모든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이래서,  어느 시대에 있는 사람이든지 자기 이전 시대에 있는 일 또 자기가 현재 듣고  보는 일 그 모든 것은 다 자기의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요. 또 자기에게 증거를 보이는 것이니까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 말이 좀 범위가 넓어서 고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도를 깨닫지  못하면 그 도를 표시할 때에 표시하는 것이 사람들의 말로는 다 표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과학의 것 같으면 그것을 인간의 술어로 거의 다 표시할 수가  있지만 신령한 것은 더우기 그런 것보다 더 복잡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 방언 가지고는 충분한 발표가 안 됩니다. 사람의 말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20세기의 문화의 언어라고 해도 그 언어라 하는 것은 실상 요량하면 종류가 몇  가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체의 눈 속에 마음의 눈이 있고. 또 우리의 이성 속에. 이성  속에 또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또 이성과 양심 곧 그 속에 중생된 영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육체의 생활은, 육체의 생활이라 하면, 요거  삼분설이 되면 좋은데 또 삼분설이 되면 오히려 복잡할 때가 있어서 또 이분설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분할라고 하면 몸의 생활은 마음의 생활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 것이고 또 마음의 모든 생활은 내나 마음 생활이지만  양심생활의 지도를 받아야 되고.

 그러면 양심은 마음 부분에 속, 마음의 요소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인도자가  되어 있고 마음의 최고로 광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사람들의  빛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자연의 빛이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양심은 진리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양심은 진리의 인도를 받아야 되고 진리는  영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영감에서 나왔고 영감이 하나님  본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향방이 어디인고 하니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여 지극히 크신 하나님은  머리가 되고 우리는 그의 몸이 되어 가지고 영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불쌍한 사람인고 하니 마음과 관 없는  그몸의 움직임을 가진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서 정신  이상자라고 혹은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관계가 없는 몸뚱이의 행동만 하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고, 또 그 다음으로 고보다 좀 불쌍하지만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마음과 같이 행동을 도 양심과 같이 행동 안 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음과 그 몸이 같이 행동을 하는 것은 모든 악을 행하는 자들도 마음과 몸이  같이 행동합니다. 뭐 사기를 하고 협잡을 하고 횡령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또  간교를 붙이고 이간을 붙이고 토색을 하고 협잡을 하고 온갖 더러운 것을 행하는.

악을 행하는 그런 몸은 마음과 그 고기덩어리와 둘은 합작돼 가지고 행동을  하지만 양심은 거기에 참가를 하지 안했습니다. 양심은 분명히 그런 사람들은  양심이 말할 때에 '양심 이놈이 들어 가지고는 우리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겠으니까 양심 이놈을 죽여야 되겠다 해 가지고 양심을 구렁텅이에 쳐박아  가지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역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무실에 직원들이 있는데 그 직원 중에, 모든 직원은 다 한  마음 한 뜻이 돼 가지고 이렇게 무슨 사기나 뭐 횡령이나 이런 죄를 범하니까  그때에 수입이 들어오고 참 돈이 생겨지는데 거기에 올바른 직원 하나가 있으면  그 직원이 들어서 방해가 됩니다. 직원이 그 일을 못하게 하는 그런 직원은  적극성 있게 못 하게 하는 직원도 있을 것이고. 못 하게 해 봤자 그들이 하기는  할 것이고 공연히 자기만 희생되고 안 될 때에는 그 직원이 못 하게 그렇게  대적하지는 안하지만 자기는 거기에 동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동참하지  안하면 그 직원들이 '우리는 다 단합이 돼 가지고 이와 같이 도적질을 하지마는  저 하나 저것이 동참하지 안 하니 아무래도 위험스럽다 이래 가지고 그 사람을  동참을 시키려고 애를 쓰다가 동참을 하지 안하면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떨어  버려서 어짜든지 무슨 티를 뜯어 가지고 그것을 감원을 시켜 버릴려고, 거기서  없애 버릴라고. 거기서 그만 나가도록 그렇게 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이것이 제일 어리석습니다. 몸이 제일 어리석고, 몸보다는  마음이 지혜롭습니다.

 그러면 마음하고 몸하고 둘이 합작돼 가지고만 하고 양심은 참가하지 안하는 그  사람은 순전히 악인입니다. 그 사많은 불량자요 그 사람은 죄만 짓는 행동하는  자입니다. 또 마음과 몸이 둘이 합작되지 안하고 몸만 행동하는 사람은  미치괭이입니다. 미치괭이라 그 사람은 아무 계획도 없고 그거는 벌로 날뛰는  자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아주 우매 무지한 것입니다. 아주 무지하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이나 평가나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몸만으로써  행동하는 사람은 아주 그 사람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 가운데도 그 사람이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이는 사람은 좀  지혜가 있는 사람이요, 마음은 조그매 따라 움직이고 고기덩어리가 앞서 움직이는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닐지라도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그 사람은 아무런  인간의 가치있는 일이나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음 다 하고 몸하고 합작을 해 가지고 이렇게 움직이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세상에서 영웅들이라, 영웅이라, 세상의 실력있는 사람들이라. 또 악인이라.

불량자라, 영웅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람이 마음의  여러가지 요소 이성과도 동행하고 또 모든 감각과도 동행하고 정서와도 동행하고  또 그 모든 욕심과도 동행을 하고 그 몸이 다 그런 마음들, 마음의 여러가지  요소가 있는 데 그 요소들하고 그 마음이 동행을 하니까 그 사람의 하는 일이  아주 누구보다도 능률 있고 앞서고 지혜있고 슬기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양심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양심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양심은 아무리 마음 전부가 몸뚱이하고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불의 한 길을  할라고 해도 양심은 거기에 동참하지를 아니합니다. 아니하는데. 그 양심이라는  것도 절대성을 가졌으면 하지만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양심을  마음의 온갖 정서가. 욕심이 감정이, 모든 애정이, 사랑이, 욕망이. 소원이.

취미가, 성품이 이런 것들이 똘똘 뭉쳐 가지고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그 양심을  정복을 시킬라고 할 때에 그 양심은 차차 차차 그것들에게 끌려 가지고 그것들의  하자 하는 대로 하는 그런 양심이 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화인 맞은 양심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마음과 몸이 하나로 역사하나 양심이 같이 하지 안해 줄 때에  그 양심을 그만 아주 매장시켜 버리는 그런 수가 있습니다. 대개는 양심을  매장시킵니다. 그래 그 양심이 매장이 돼서 이제는 뭐 양심이 입도 벌리지도  못하고, 만일 양심이 뭐 벌리면 욕심이라는 그 요소가 있다가 주먹으로 양심 입을  쥐 박아 버리니까 양심 입에 피가 나오고 양심이 꼼짝을 못 합니다. 또 양심이  무슨 뭐 하면 인간의 그 감정이라는 그런 것이나 이런 것이 들어서 쥐 박으니까  그만 양심이 꼼짝을 못 하는 그것은 양심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양심을  죽입니다. 죽였습니다  양심을 죽였고, 그 양심을 어찌 됐든지 살살 달래 가지고 양심을 깨워 가지고  이제는 그 양심이 자기의 양심이 됐습니다. 양심이 자기를 위주로 해 가지고,  자기, 자기를 위주로 해 가지고, 위주로 해 가지고 모든 사리 판단을 가지는 그  양심이 됐을 때는 자기라는 화인을 맞은 양심안 됐고 또 그 양심이 돈의 양심이  돼 가지고 이제는 돈 위주로 판단하게 되면 그 양심도 벌써 병든 양심이요. 그  양심이 생명있는 양심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양심이  돈의 양심이 되고 권세의 양심이 되고 또 무슨 의식주의 양심이 되고 영광의  양심이 되고 이런 양심이 되면 그만 그 양심은 그것을 위주로 해서 모든 사리  판단을 하게 되기때문에 그의 사리 판단은 다 그 양심의 주인의 소원대로 양심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을 그것을 꺽지도 안하고 죽이지도 안하고 양심을 가꾸어서  양심과 같이 이제 그 사람이 행동을 합니다. 양심하고 마음하고 몸하고 씻과 같이  행동을 하면, 셋이 같이 행동을 하면 불교인으로서는 불교인으로서 제일 최고의  길을 걷게 되고, 유교인이라면 유교인으로서 최고의 길을 걷게 되고 또 고 사람이  무슨 다른 어떤 공산주의라면 공산주의로서 최고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양심 마음 몸하고 같이 살아도 그것이 다 땅의 것이요. 구원  얻을 거는 하나도 없고 하나님 심판에 가면 전부 정죄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양심이. 이 양심을 가리켜서 죽은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죽은 양심은  어떤 것이 죽은 양심인고 하니 죽은 지식만 가지고 그 지도를 받아서 움직이는  그 양심이 죽은 양심입니다. 산 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들이 산 양심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 양심은 어떤 것이 산 양심인고 하니 이제는 세상의 인간의 지식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 왜? 인간의 지식은 그것이 다  편벽되고. 다 편벽되고 일방적인 지식이요 일시적인 지식이다. 그것이 원만한  전체적인 지식이 아니고 영원한 지식이 아니라, 이러니까 오늘은 그 지식이 모두  맞다. 이랬는데 시대가 바꿔지니까 그 지식이 또 달라지더라 그거요. 또 그  지식이 이 지역에서는 이 동양에서는 그 지식이 옳다. 했지만 또 서양에 가니까  또 그 지식이 틀렸더라 그거요. 그것이 다 그 지식이 쪼부라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기 때문에, 인간 지식은 다 부인하고. 이래서,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보다 먼저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 이랬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니 이들은 다 양을 잡아 삼킬라고 온 자들이 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온  자라 말은 곧 먼저 온 사람들이라 해도 괜찮고 먼저 온 사상이라도 해도 괜찮고  먼저 온 지식이라고 해도 괜찮은 것인데. 그것을 널리 말해서 총괄적으로 한 말로  말하면 첫째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다 사람을 죽일려고 왔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 아담이 속한 거는 다 자체가 죽었고 또 모든 것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이제는 거기에서 모든 인간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선포해 주신 신구약 성경  지식만이 참되지 다른 지식은 다 거짓부리다. 이래서 인간 지식을 다 부인하고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지식만 참되다 해서 요 지식만 인정하고 요 지식의 인도를  따라서 살라고 하는 고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하면 신앙 양심이요. 산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 양심은 기독자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자에게라도 그 하나님의 지식만을 참된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양심은 죽어 있습니다. 아직 살아나지를 못했습니다. 이제는 세상 모든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되고 완전하고 영원하다 하는 이것을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은 고 사람의 양심이 신앙 양심이 됐고, 신앙 양심이 됐기 때문에  고 양심이 살아난 양심이 됐습니다.

 그래서, 기독자들이 자기가 언행심사. 말이나 행동이나 마음이나 생각이나  소원이나 모든 언행심사를 자기가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요 말씀을  준해서 말씀에 맞도록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는, 하나님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는 고 사람이 신앙 양심 생활을 할라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신앙 양심 생활을 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신앙도 넓은 범위인데. 그러면, 언제는 신앙이 안 된다 하더니만 또 신앙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러기 때문에 사람 말로 발표하기가 어렵습니다. 고  신앙 양심이라 말은 하나님을 딿은 양심이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따를라고  애를 쓰는 양심이라, 하나님을 따를라고 애를 쓰는 양심이라고 해 가지고,  하나님을 따를 양심은 다릅니다. 따를라고 애를 쓰는 양심과 따른 양심과  다릅니다. 따른 양심은 이미 따라져 가지고 돼 가지고 있고. 따를 양심은 지금  미래에다 두고 따를라고 애를 쓰는 양심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신앙 양심 생활을 할려고 애를 쓰면 신앙 양심 생활이  되어집니다. 신앙 양심 생활 할라고 애를 써야 신앙 양심 생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 보아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실 것이라' 하는 그것은 우리가 그만 기도로만 생각하지만 그거 아닙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는 것은 기도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지 만 자기가 또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는 그것은 더 구하는 것입니다. 또 노력하고 애쓰는 그것보다도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데에는 이제 내가 노력만 하고 애만 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시고저 하는 사람이 돼져야 되겠다.

 누가 뉘한테 돈 빌리러 갈 때에 돈을 빌려 달라고 자꾸 들이 조아 댄다 고  그사람이 돈을 빌려 주겠습니까? 못 이겨서나 빌려 줄란지 몰라도 아 빌려  줍니다. 그랄수록 도리어 헛일이라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이 뉘한테 돈 빌리러  가기 위해서 벌써 그걸 그 사람이 돈을 빌려 줄 수 있도록 잘 연구를 해 가지고  가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연구해 가지고 가는 사람은 이 사람에게 내가  가봤자 신용 못할 터이니까 아무 것이 그 사람이 내게 대한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소개해 주도록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신임을 할 것이다. 또  그것보다도 '네가 그 돈 가지고 무엇 할려나?. 그 돈 가지고 투자하는 그 일에  대해서 투자하는 일을 그에게 이렇게 이렇게 말을 하면, '아,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해서 안 되는 것은 '이렇게  막고 이렇게 해서 안되는 것은 이렇게 막고 이렇게 해서 안 되는 것은 이렇게  막고! 보니까, 그 사람이 와서 말하는 것 보니까 안 될 것이 거기에 많이 있는데  안 될 것은 전부 다 미리 알고 안 될 것을 다 방어하고, 방어하고 난 다음에 될  것을 딱 말하니까 그 사람의 하는 일은 백 프로 성공이 되겠다 그거요. 그러면  지혜있는 사람이 돈을 빌려 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하되, 하나님께 구하되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사람이 될라고  애를 쓰고 구하는 것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 양심 생활 할라고  애를 쓰면 신앙 양심 생활이 됩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되면 그 신앙 양심이 되는  그 신앙 양심 생활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살려는 사람이지만,  (저 ○선생 속잠들었는데, ○○○씨 이제 일어나길 시작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그냥 보고 지나가들 안해. 자꾸 깨우쳐. 이제 살아날라고 하니까 살리고, 살려  가지고 그게 정 가짜가 돼서 죽어 버리면 죽어 버리고 살릴라고 애를 쓰고  이라다가 안되면 뭐 살든지 죽든지 무슨 끝장을 낸다 그거야. 그라면 안돼)  이제는 신앙 양심 생활이 됐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데,  하나님을 따라서 내가 마귀 따라가지 안하고 세상 따라가지 안하고 돈 따라 가지  안 하고 내가 내 맘대로 나 따라가지 안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리켜 서  다 신앙이라 이랍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됐다 하나님을 따라 갈려고, 그가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자기대로는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선택해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이 신앙 양심 생활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은 그것은 신적 요소이냐 인적 요소이냐? 그것 은 인적  요소가 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신적 요소가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되면 이제는 그 신앙 양심 생활은 뭘 하고 있느냐? 신앙 양심 생활은  자기가 신앙 양심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볼라고 애를 쓰는 동시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가지고 뭐 할라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영감 동행하기를 원한다.

영감대로 살기를 원한다. 이래서 신앙 양심 생활이 되면 그 양심생활은 영감  생활을 할 희망성이 있습니다. 영감 생활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영감  생활은 아직 아니지만 영감 생활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마치 요새도 그 제도가 계속하는지 모르지만 대학에 입학할 때 뭐 예비고사라고  예비고사인가 있는데, 나는 살필 사(査)자라고 알고 있는데 시험할 시(試)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거는 아마 살필 사(査)자나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예비고사라고 있는데 거기 합격이 돼야 이제 대학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습니다.

예비고사가 있고 그 다음에 아마 정고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  다음에 정고사 있어? 없어? 예비 고사가 그러면 다라? 그러면 예비고사 그 말을  고쳐 버려야 됩니다. 대학의 입학고시라 이래야 될 것입니다. 학력고시?  학력고시라 하면 다 돼 버리지요. 그래서, 아마 예비고사도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아마 뉘든지 예비고사를 다 치를 수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비고사를 치를 만한  그런 자격이 또 구비돼야 될 것입니다. 무슨 뭐 뭐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했는데 어느 정도의 성적을 가진 사람이라 이래야 되지 뉘든지  마구 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한 또 수험 자격이 있다. 그 시험을 받을 수  있는 수험 자격이 있어야 그 다음에 시험장에, 수험장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신앙 양심 행동은 영감 행동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격을 가져 가지고 또 그러면, 자격  가졌으니까 이제는 거기서 합격이 되면 신앙 영감 생활이 됩니다. 신앙 양심  생활은 영감 생활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이제 영감 생활에 합격이 되면,  고 영감 생활에 합격이 되면 그것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온전한  신앙생활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온전한 믿음이라. 온전한 믿음 생활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온전한 믿음 생활이 됐으면 온전한 믿음 생활은 그것은 인적요소냐?  그거는 그 행동하는 것이 신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이 돼 가지고 역사하는  그 신앙 행위입니다. 이제는. 신앙 양심 생활은 인간이 주체가 돼 가지고 인간  힘으로 해 볼라고 애를 쓰는 것이 신앙 양심 생활이요 신앙 양심 생활에서  영감에 합격이 되고 난 다음에는 이제 성령이 주격이 돼 가지고 그 사람을  붙들고 일하게 됩니다. 그래 신앙 양심 생활은 자기가 주체가 돼 가지고 날뛰는  것이고, 신앙 영감 생활이 될 때에는 성령이 주체가 돼 가지고 그 사람을 붙들고  일하게 됩니다. 이래서 처음에는 제가 하나님을 붙들라고 애를 쓰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저를 붙들고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아직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제가 앞서 날뛰면서 야단지기는  것과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하나님이 앞서서 이와 같이 나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온전한 믿음 생활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온전한 믿음 생활이  되면 그 믿음 생활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느냐? 그거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실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또 능력으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실력을 가졌고  지혜로서는 어떤 실력을 가졌느냐? 그 실력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이루어지는,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되는 그 지혜를 가졌습니다. 지혜를 가져서,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네가 내 안에 있다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쓰고 이제는 하나님 말씀이 자기를 주장하게 됐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원하는 대로 그라고 난 다음에는 영감 생활이 됐다 그 말이오. 영감 신앙이  됐으니까. 영감 생활이 됐으니 영감 생활이 된 것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영감  생활. 말하자면 영감의 소원은 뭐이든지 구해라 영감의 소원은 다 이루어집니다.

영감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감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이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양심 생활을 할라고 애를 쓰고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이 이루어지면 신앙 영감 생활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돼서 신앙  양심 생활이 이제는 영감 생활에 나아갈라고 힘을 쓰면 그때에 신앙 영감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신앙 영감 생활이 이루어지면 그 때는 이제 나는 완전히 성령에게  자유를 박탈당하고 성령이 나를 주관하고 나는 성령에게 붙들려서 성령이 나를  주장하고 나는 성령에게 피동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신앙  영감 생활한다 신앙 영감 생활하면 이것이 이제는 온전한 신앙이 됐다. 온전한  신앙이 됐다. 온전, 신앙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이 온전한 신앙은 다 보배로운  신앙이라 이거는, 참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요 주님은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요. 그의 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이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우리들인데.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우리들이 첫째로 애쓸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애쓸 것이  뭐입니까? 영감 생활입니까 온전한 신앙생활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구원을 이룰라고 애쓰는 것 첫째 애 쓰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애쓰는 것이 영감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봅시다.

신앙 양심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봅시다. 네 신앙 양심 생활입니다.

신앙 양심 생활부터 돼야 됩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되면 신앙 양심 생활은 어떤  자격을 가지느냐 하면 영감 생활에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자격을 갖췄습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이 이제 다 됐다 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영감 생활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이제는 자기가 처음에 신앙  양심 생활 할때에 애쓴 거와 같이, 신앙 양심 생활이 이제는 신앙 양심 생활이 그  영감 생활 될라고 영감 행동 할라고 애를 쓰면 영감 행동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영감 행동이 되어지면 그것을 가리켜서 온 전한 믿음이라, 온전한 믿음이라.

그래서 '믿음이 행함과 더불어 함께 일 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 하는  그런 것이 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이래서, 온전한 믿음 생활이 되면 고 믿음  생활은 전지 전능입니다. 고 믿음 생활은 전지 전능입니다. 고 믿음 생활은  전지자요 전능자입니다.

 고 믿음 생활이 전지 전능인데, 고 믿음 생활이 전지 전능인데, 그러면, 전지  전능인 그 전지라는 그 지혜가 자기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네. 하나님의 것입니다. 전지 전능, 전지라는  지혜도 하나님의 것이요 전능이라는 능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에게 자기가 들어붙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들어붙어서 하나님과 연결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이 지식하는 그것을 이래라 하면 그대로 따라 하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혜가 자기에게 시키시는 대로 자기가 따라 움직이니까 그  지혜가 하나님의 전지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체가 전지의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전능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우리가  구원받아서 이루어져 나가는 그런 것은 믿음이 그 방편인데 믿음 가지고 무엇  하느냐? 믿음 가지고. 믿음은 하나님을 딿는다 그 말이오. 하나님을 딿되  하나님의 지혜에 딿고 하나님의 능력에 딿고 하나님의 사랑에 딿고 하나님의  진실에 딿고 하나님의 거룩에 딿고 하나님의, 하나님의 온갖 완전한 속성에 내가  붙어 가지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지체가 되는 것은 우리가. 내가 종을 이래 들고 싶으면 내 마음이 들고  싶은 것을 손이 들어서 이 종을 들고 손이 이래 뚜드리지 않습니까? 손이 아니면  못 한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이 소원하시는 것을 나를  거머쥐고 다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지체라 하나님의 몸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신앙 양심 생활을 시작하지 안하면 그  사람은 평생 가도 못 합니다. 신앙 율법 생활이 있습니다. 신앙 율법 생활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서 성경 말씀대로 삽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나 양심생활은 얼마든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양심생활은 거짓부리가 없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그 목적이 어디 있느냐? 영감 생활을  자기가 목적하고 그와 같이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 생활인데 양심은 쓰지 안하고,  양심은 쓰지 안하고 사람 눈만 속이려고, 사람의 눈만 속이고 사람의 귀만 속이고  사람이 입만 막을라고 이와 같이 지금 껍데기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그것을  우리가 다 볼 수 있다 말이오. 똑똑히는 못 보지만 보고 또 잘 보는 사람은 거의  다 봅니다. 뭐 속에나 겉에나 거의 다 봅니다. 서로 다 사람들이 다 말을 안 하고  있어 그렇지, 말을 안해 그렇지 뭐 자기에게도 흠점이 있고,  이래서, '남의 눈의 티를 보고 네가 뺄라고 하지 마라 먼저 네 눈에 있는 들보를  찾아라' 성경이 이렇게 말씀해 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모든 흠점을 가지고는  어디다가 이용하겠느냐? 남의 흠점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발견한 흠점을  어디다가 이용해 먹을래? 그 흠점을 고 사람을 정죄하는 데에 이용하는 수도  있고 고 사람을 멸시하는 데다 이용하는 수도 있고 고 흠점을 가지고 자기 속에  그와 같은 흠점을 찾는 거기에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성경은  거기에 이용라 했다 말이오. 거기 이용해라 했기 때문에 서로 알아도 고걸 보고  '내게 그외 같은 흠점이 그 사람의 몇 백 배 더 큰 흠점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걸  찾자.' 이러니까 다른 사람의 흠점을 보고, 그것으로써 자기에게 있는 더 큰  흠점을 찾는 그것이 성경이 권고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할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의 흠점을 말을 안 하고 다 함구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모르는 건 아닙니다.

우리 영물이라 하는 것이, 영물이 돼서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 사람은 참 신앙 양심 생활하고 있다, 저 사람은 신앙 양심  생활이 아니라 신앙 이성 생활하고 있다. 이성 생활이라 말은 남녀 이성 이  이성이 아니고 그것도 이성이지만 여기 이성이라 말은 이치 이(理)자 성품  성(性)자, 사람에게는 이치를 따지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 말합니다. 저 사람은 이성 생활하고 있다, 저 사람은 신앙 의지  생활하고 있다, 그 사람이 한번 떡 뭘 하면 고대로 꼭 계속해서 밀고 나가는 신앙  의지 생활하고 있다, 저 사람 신앙 정치 생활하고 있다 저 사람은 신앙 사회주의  생활하고 있다. 저 사람은 신앙 도덕 생활하고 있다, 저 사람은 세상 경제 생활  하고 있다. 뭐 여러가지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다 헛되고 자기 속이는 일이요,  자기 속이는 일이요. 누구한테 속았습니까? 그게 다 자기 속이는 일인데 누구한테  속았습니까? 자기 누구한테 속았는지만 사람 대답해 보이소. 자, 한번 대답해  봐요. 또 틀리면 더 기억 퍼지. 그거 누구에게 속았습니까? 네, 옛사람 자기에게?  성경에 말해 놨는데. 예? 뭐? (보자. 너 이름이 뭐꼬? 엊저녁에 너 왜 예배 보러  왜 늦게 왔어? 일찍 왔어? 안 보이던데? 내가 나가니까 그때 들어오데? 일찍  왔어?)  아, 예. ○○이가 대답했어 미혹의 욕심. 자기 속에 욕심 그놈이 꼬우는 욕심의  이름을 미혹의 욕심이라고 여러번 내가 여러 수십 번 가르쳤습니다. 미혹의 욕심  고놈에게 끌려 가지고, 미혹의 욕심, 명예욕, 생의 애착욕, 정욕, 또 혈육욕,  가족욕. 또 이거 모든 물질욕 이런 욕심 그놈이 들어 가지고 자꾸 양심을 꼬아  가지고 그 사람을 꼬아 가지고 그 생활하게 한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신앙생활 해도 저 사람은 이성적 신앙이다, 의지적 신앙이다, 저 사람은  사회주의적 신앙이다, 도덕주의적 신앙이다, 또 윤리주의적 신앙이다. 저거는  가정주의적 신앙이다 뭐 신앙이다, 신앙이다 다 있는데, 저 사람은, 그래도 양심  신앙은 아닙니다. 저 사람은 신앙 양심 생활이다, 저 사람은 양심의 신앙이다.

 그러면, 양심의 신앙이 그 중에 제일 희망이 있습니다. 양심의 신앙이 제일  희망이 있지만 양심의 신앙이 희망 있다고 해 가지고 양심 신앙 그거 가지고  되느냐? 내가 양심 신앙생활에서 영감 신앙에 나아가지 못하면 그거나 물욕  생활이나 꼭 같은 것이지 뭐 하나도 나을 게 없습니다. 다만 자격은 있는데 이  자격 가지고 지금 이 자격을 할용해 가지고 향상을 해야 돼. 승격을 해야 돼.

합격이 되야 돼. 그게 뭐냐 하면 그것이 곧 신앙 영감 생활입니다.

 신앙 영감 생활에 나아가면 이제 거기에는 자기가 완전히 부인됐고 하나님이  자기를 주장했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도 주장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시고 나는 하나님에게 복종되는 자가 됐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예수님의  피를 바로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 나는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주의 종이라, 나는 주님의 성전이라. 주님의 지체라.

주님의 몸이라 주님의 상대자라, 주님의 나라라. 백성이라. 주님의 제사장이라  주님의 선지자라, 주님의 왕이라. 주님의 영광 위해 사는 주님의 영광이라. 주님의  형상이라. 자꾸 이래 가지고 이러니까 자기는 완전 죽어버렸어. 자기는 아무것도  없어. 자기는 죽어 버렸습니다. 자기는 죽어 버렸는데 뭐이 죽었습니까? 옛사람이  죽었고, 새사람은 뭐입니까?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은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의 것이 완전히 됐으니까 하나님은 완전히 자기 하나님이 돼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신앙 양심 생활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은  뭐 몇십 년 믿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 소용없어.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했고, 신앙 양심 생활이 되지 안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하는 말이 자꾸 틀리요. 이렇게 말했는데 또 달라. 그렇기 때문에. 자기 지도자가  말할 때에 지도자가 말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반대했는데 이번에 잘 됐거든.

지도자가 말하는 것을 그걸 가만히 오래 있다 보니까 고대로 딱 들어맞았다  말이오. 이러면 그때는 안 맞지만 나중에 가 보면 그대로 맞아졌다 하는 그것이  이제 지도자의 권위입니다. 또 그 사람의 생활한 계획한 것이 나중에 가 보니까  하나님이 그대로 다 이루어 주셔서 다 이루어진 사람 있고, 자기 한 것이 다  산산이 파괴되는 사람이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죽을 때까지 사니까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이 다 성공이 이루어져서 점점 성공이 돼지는 사람이 있고, 죽을 때까지  가니까 모두 다 파괴돼서 육체가 늙어지니까 신앙도 늙어지고 자기의 모든 게  늙어져 가지고 다 파괴되는 그런 사람도 되어지는 그것은 순전히 육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신앙생활은 제일 시작이 신앙 양심 생활이요,  신앙 양심 생활은 신앙 영감 생활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니까 고  자격 가지고 다 됐다 하지말고 신앙 양심 생활에서 신앙 영감 생활에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면 무릇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뭐 주시나? 신앙 영감 생활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다' 그말은 뭐이냐?  신앙 양심 생활했다 말입니다. 신앙 양심 생활했지만 탄식을 했습니다. '내 마음에  자책할 것을 내가 찾지 못하나 이로 인해서 고통한다 뭐? 왜 고통해, 양심생활  했는데?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갈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내 양심에 자책되는 것은 없지만 그분에게 걸리는 게 있는가 두렵다 해서  그분에게 걸리는 게 있는가 두렵다 해서 그분에게 걸림이 없도록 그분의 영감  생활이 되는 그것을 만족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엉감 생활에  도달하고야 만족했지 영감 생활 도달하지는 안하고 신앙 양심 생활에서 '됐다'  하는, 신앙 양심 생활에서는 지금 아직까지 미결이 있으니까 영감 생활에  나아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기에, 영감 생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것은 '내 마음으로  말한다. 내가 믿는 마음을 가지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렇게  구별했습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거는 하나님 명령은 아니나 내 맘에  이게 옳은 줄 알기 때문에 말한다' 그렇게 자기가 양심으로 판단해 가지고 하는  말과 영감의 명령으로 하는 말을 구별을 지워서 말씀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그것이 간단하게 잘 나타나 가지고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은 좀 많이 나왔는데, 어쨌든지 나와서 배워야 되지 아는 것, 이것이  힘입니다. 알아야 되지 모르면 헛일입니다.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거는 참으로 소경 놀음이오.

 지난 밤에는 장로님 아홉 분, 장로님들 기도하러는 오셨는데 새벽기도 안  나옵니다. 이제 또 새벽기도 나와야 돼요. 새벽기도 나오도록, 구역장들은 좀  새벽기도 나오도록 좀 권면해요 찾아가요. '오늘 아침에 새벽기도 장로님  나오셨습니까 안나왔습니까' 이래 찾아 가지고 권면해서 길러야 되지. 자꾸  길러야 되지. 뭐 장로라고 다 된 줄 압니까? 지금 길러야 돼요. 장로님이 바로  장성해지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장성해지면 주일학교 반사합니다. 주일 학교  반사해요. 아직까지 주일 학교 반사 할 용기가 안 나지고 '장로가 들어서 반사를  해?'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스스로 된 줄 알지 된 사람은 아니오. 반사를 안  할라면 아주 남권찰 노릇이라도 똑똑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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