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양심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12일 삼일밤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 본문은 지난 주 오전 오후에 설교를 했고 다음주일 유치반 중간반 일부 이  부의 공과로 정한 본문입니다. 공과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제 13공과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로 22절  제목 : 신앙 양심  요절 :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베드로전서 3장 22절)

서론.

 양심은 마음 부분에 속한 요소인데 심신으로 된 육의 빛이다. (우리 육이라는  것은 마음과 몸이 둘로 가지고 돼 가지고 있는 육입니다.) 인생의 양심은 동일한  양심 이었으나 변질되어 심히 수많은 양심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양심이 꼭 같은 양심이었는데 인간 타락 후에 양심의 종류가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양심은 자기의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기 지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자기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뱀의 유혹으로 타락 후 사이비한 인간 지식은 (사이비한 인간 지식이라 말은 꼭  옳은 것 같은데 실상은 옳지 않는 그런 인간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에 양심의 수도 많게 되었다. (사람들의 지식의 종류 수가 많으니까 양심의  종류의 수도 때게 되었습니다. 왜? 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지식을 따라서  양심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지식의 수가 많으니까 양심의 숫자도 많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을 믿지 못한다. (이래서 뭐 양심대로 한다. 양심생활이면  된다. 그 사람은 양심을 쓴다 안 쓴다 이렇게 해서 오늘도 양심을 사람들의  양심을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죽은 지식은 죽은 양심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산  지식은 하나님 하나님의 지식 뿐입니다. 그런고로 양심은 하나뿐이니 곧 신앙  양심이다. 신앙 양심은 산 양심이지만 신앙 양심이 아닌 양심은 다 죽은  양심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은 기독자라고 다 가진 것은 아닙니다. 진실된  신자만 가진 양심이 산 양심인 것입니다. 산 양심은 참사람, 산 양심은 참사람 곧  새사람의 눈이요 또 귀가 되는 것입니다. 영감 만나 성령과 동행하고 (산 양심은  영감을 만나게 되고 영감 만나서 성령파 동행하고), 또 성령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 중에는 (육체 중에는 하는 말은 영은 빼놓고  말입니다.). 이 마음과 몸 심신 중에는 양심이 제일 보배이요 그 외에 온 사람  영육의 사람의 전체의 주격은 사람의 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양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첫째 신앙 양심은...

 네째. 양심을 매장하면 안 됩니다. 양심을 매장하는 것은 양심이 알리 고  알려주고 호소하는 것을 묵피하는 것이 (잠자코 그만 슬그머니 덮어서 모르는 체  하고 지내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매장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양심을 북돋워야 합니다. 양심을 북을 돋워서 가꾸어 줘야 합니다.

양심을 북돋우는 것은 양심을 등장시켜 (양심을 등용한다 말입니다) 양심을  등장시켜 양심의 지휘를 받을려고 애쓰는 것이 양심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또, 양심을 잘 길러야 합니다. 양심을 기를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양심의 판정이  내렸을 때는 자기에게 이해나 기타 생사나 어떤 것이라도 불고 하고(돌아볼 고  자.) 단행 불변의 행위 하는 것이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일곱째, 성장하고 능력 있는 양심은 자기의 소유와 행위와 몸과 마음과 생명을  주권하는 양심이 성장된 양심인 것입니다.

 여덟째. 양심 행위와 신앙 행위는 아주 판이합니다. 양심 행위는 (인격이 아니고  인적입니다. 인적요소, 인격이 아니고. 인적 요소요. 신앙 행위는 인적 요소의  행위를 성령님이 인정하여 동행하여 주심으로 능치 못함이 없는 전능의 신앙  행위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다 빼앗겨도 양심 행위만 가지면 신앙 행위 곧  영감의 전능 행위가 이루어지나니 세상을 이기는 행위가 됩니다. 아홉째. 모든  지체로 일하는 것보다 양심 행위로 일하는 것이 낫고 양심 행위 보다 영감  행위가 제일 능률이 높은 것입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돼 있는데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  영입니다. 하나님의 꼭 모형입니다. 하나님과 꼭 같이 지음 받은 것이 사람들의  영입니다. 그러기에 천군 천사나 그런 모든 어떤 피조물과 달리 탁월한 그  탁월성을 가지고 특수 창조함을 받은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사람의 영은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또 모든 피조물을 다 통치하는 그 통치권을 가진 것이  영입니다.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을 다 정복하고 통치해서 하나님의 대리의  역할을 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있습니다. 육이 있는데 성경에는 영과 육이라고 영육이라고  그렇게도 발표해 놨고 영과 혼과 몸이라고 그렇게도 발표를 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영과 혼과 몸이라고 그렇게 성경에 기록한 것은 사람을 셋으로 나눠져  그것을 가리켜서 삼분설이라. 석 삼(三)자 삼분설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영육이라  하는 것은 이분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삼분설도 성경적이요 정통이요 이분설도  성경대로요 정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분설의 장단점이 있고 이분설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분설의 단점은  육이라 하니까 그만 육은 이 고기 덩어리만이가 육이라고 생각해서 이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은 마음이라 육은 고기 덩어리라 이래 가지고 외나 주격인  영을 빼먹어 버렸습니다. 이래서 지금 세계의 교회들이 다 영이 뭐인지를 모르고  마음이 영이라, 양심이 영이다, 육은 고기 덩어리다 그렇게 하는 그것이 큰  단점이요 폐단입니다. 그러나 삼분설은 영은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고 또  고기덩어리 따로 있어서 영과 혼과 몸이라 이렇게 삼분설로 구별해서 한 그것은  영에 대해서 확실히 나타내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장점이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양심에 대해서 자기 신앙 체험한 사람들은 양심을  가리켜서 이것은 인적 요소가 아니라 신적 요소다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사람에게는 그렇게 밝은 그 현철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이래서  현철하니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그 사람의 양심은 그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자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  양심을 보내 가지고 그 사람을 조사를 하고 있고 그 사람을 지도하고 있다  이래서 양심을 신적 요소라고 그렇게 까지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신적 요소는 아니고 사람의 마음 요소에 속하여 있는 그것이  양심인데, 양심은 그 몸보다도 밝고 마음의 모든 요소보다도 다 현철해서  양심이라는 것은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찾아 행할려고 하는 고 요소가 인간에게  있는데 고 요소를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일  양심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무런 진가를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은 독단으로 행동을 하지를 못합니다. 이 양심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그 양심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을 법전으로 삼아 가지고  그 지식 중에서 제일 옳고 바르고 참된 것으로 행할려고 하는 그것이 사람들의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그 사람의 지식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랬는데, 사람이 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타락 후에는 사람의 지식이  한갓되지를 안하고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어두워진 사람이기 때문에  어두워진 마음 가지고 자꾸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 때문에 사람의 지식은 어두운  지식이요 어두운 지식이 그 종류가 천도 만도 넘습니다. 만 명이라면 만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땅위에 있는 많은 지식이 있는데 그 인간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요 타락한 지식이요 산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만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지식 이 사람에게 온 그 지식은 신구약 성경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이요 산지식입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이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은 그 사람의 양심은 산  양심이 되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삼지 안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옳고 바른 것을 찾는 그 양심은 다  죽은 양심이요 산 양심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사람들의  양심의 수가 지식의 수가 늘어 가는데 따라서 늘어났습니다. 세상에는 산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 뿐이기 때문에 산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을 표준하는 양심만  산 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산 양심은 누가 가졌는가? 신자가 가졌습니다. 신자가 가지 믿는  사람이 가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가졌다면 기독자는 다 이 산 양심을  가졌는가? 아닙니다. 기독자라고 산 다 양심을 가진 것이 아니고 기독자로서도 산  양심 가진 사람이 그 중에 있고 대개는 모두 죽은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기독자가 죽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기독자가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가지고  성경 말씀대로 이래야 저래야 어떻게 하면 옳으냐 하는 것을 성경 말씀을  법전으로 삼아 가지고 찾아서 성경대로 바로 할라고 하면 그 양심이 살아나고 산  양심이 되겠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 하지만 성경 말씀대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지 안하고 인간 자기 생각. 자기 지식. 자기 주관이 세상 지식대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사고하고 하기 때문에 기독자도 다 대개는 죽은 양심을  가지고 있고 산 양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산 양심은 어떤 양심이 산 양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을 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대로 어떻게 하면 옳게 하고 바로 하고 참되게  하는 것인가 해서 하나님에게나 사람들에게나 자기에게나 모든 사물들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면 바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그대로 할려고 하는 그 양심이 산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산 양심은 새사람 참사람의 귀도 되고 눈도 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말씀하시기를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고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은 거 와 같이  네게 있는 빛이 밝으면 온 생활과 인격이 밝고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모든  인격이나 행위나 생활 전체가 다 어두워진다' 그렇게 말씀하신 그 빛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마다 말씀하시기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여러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면 귀, 육신의  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 귀라고 말하는 것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은 주격이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것이기 때문에  영이 제일 귀하고, 영은 벌써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기 때문에 영은 털끝만치도  잘못함은 없습니다. 삐뚤어짐은 없습니다. 다만 영에게는 병이 무슨 병인고 하니  자기가 소유하고 관할하고 있는 자기의 마음과 몸을 그 영이 통치력이 모자라고  지배력이 모자라서 영이 자기의 마음과 몸을 자유 자재로 통치하지 못하는  무능성의 그 약점이 영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신으로 된 육에게는 제일  선봉장이 뭐인고 하니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몸이 둘로 된 것을  가리켜서 육체라 이렇게 말했는데 육체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양심이요, 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그 역사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제일 귀한 것이 영이요 그 다음으로 귀한 것은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에 대한 지식을 바로 가지고 양심을 잘 가꾸어서 양심을 권위있게 만들어야  됩니다.

 이래서, 양심이 권위 있는 양심은 어떤 양심이 권위 있는 양심인가? 우리가  양심을 어디까지 권리 있는 실력 있는 양심을 만들 것인가? 실력 있는 양심을  만드는 것은 실력 있는 양심은 그 양심이 자기의 소유도 양심이 다 주권하고 또  그 행동도 양심이 주권하고 몸도 양심이 주권해서 양심이 감옥에 들어가라 하면  몸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양심이 권리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몸을 감옥에  들어가라 해도 감옥에 들어가면 그 몸이 고생스러우니까 안 들어 갈라고 하면  그러면 안 들어가는 그 사람은 양심을 꺾어서 죽였습니다. 그러기에 권위 있는  양심은 자기의 소유와 행위와 몸과 마음과 생명을 이 양심이 주권을 가진 그  양심이 이제 장성한 양심이요 실력 있는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양심은 어떤 일을 하는가? 이 양심은 자기 몸과 마음의 제일  선구자가 되고 선구자(先驅者), 먼저 선(先)자, 몰 구(驅)자, 자기 몸을 몰고  마음을 몰고 인도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이 양심이 자기의  몸과 마음을 인솔해 가지고 성경 지식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서 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성경 지식대로 따라가면 어디를 향해 가는가? 따라가기를  성경 지식의 인도를 따라서 성신의 감화를 찾아갑니다. 성신의 감동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성신의 감화를 찾아가서 성신의 감화를 만나게 되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하고 영감하고 이 양심하고 서이 만나서 하나가 되면  이제는 중생된 영이 거기에 같이 있습니다. 중생된 영은 성령하고 같이 있습니다.

이래서 이 착한 양심이 착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찾아가면 중생된 영을 만납니다. 중생된 영을 만나면 이제 이 착한 양심이 진리의  인도를 따라서 중생된 영을 만나고 중생된 영을 만나니까 그 사람이 이제 영육의  참사람이 되었습니다. 만나 가지고 그 다음에 영육으로 된 그 자람이 성령을  만날라고 갑니다. 성령을 만납니다. 성령을 만나 가지고 성령과 동행할 때에  이것을 가리켜서 뭐라고 하는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것은 양심생활이요 양심생활이 그것이 성장해서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동행해 가지고 이렇게 하면 성신의 감화를 만나게 돼 가지고 성신의  감동을 받은 영감 생활이 됩니다. 영감 생활이 되면 그 영감 생활인 성령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감 생활이 뒬 때에 그 생활은 전지 전능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써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행동했으면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 생활이라 합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라 합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은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까 있습니까? 그거는 아직 안 됩니다. 그  진리대로 사는 양심생활 그 양심생활은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양심하고  진리하고 둘이 합작이 되어 가지고 진리대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양심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양심생활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은 입었지만 그것은 다  인간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적 요소, 인간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었고 또 성경 말씀을 은혜로 받아 가지고 자기가 성경  말씀을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상고 할 수가 있고. 그러나 영감은 받지  안했습니다.

 이런데, 그러면, 이 양심생활이 신자의 양심생활이 성경 말씀을 보고 성경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사는 생활이 그것이 신자의 양심생활입니다. 그러면  양심생활은 그것은 신적 요소에 속했느냐 인적 요소에 속했느냐 인적 요소에  속했습니다. 아직까지 인적 요소에 속했습니다. 인적 요소에 속했는데, 그와 같이  양심생활을 하면 이 양심생활은 뭐 하느냐? 하나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영감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양심생활을 하면 양심생활이 영감을  만납니다. 양심생활이 영감을 만나 가지고 영감 생활을 할 때에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라.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능입니다. 믿음은 전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 생활에 나아가는 것은 기독자의 양심생활이요 양심생활이 성공을  하면 성령을 만나 가지고 영감 생활 곧 믿음 생활이 됩니다. 믿음 생활이 되면  이거는 아주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요거 좀 어려운 말인데,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인간 힘으로 해 가지고 영원 불멸의 완전의 불변의  영생하는 그 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완전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불변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영생을  만들지 못합니다. 못 하는데. 그러며 못 하는 이 생활을 가리켜서 기독자의  양심생활이라 합니다. 그러면 양심생활은 아직까지 그 양심생활은 영생도 만들지  못하고 영원도 만들지 못하고 불변도 만들지 못하고 완전도 만들지 못하는  아직까지 미성의 미완성의 이, 양심생활입니다.

 그러면 양심생활 하면 그 양심생활이 무엇을 찾아가느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여기 말하지 안했습니까?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이러면 찾아가다가 만납니다. 그러면 기독자의 양심생활이  찾아가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 만난다는  말은 성령님을 만납니다. 성령님을 만납니다. 성령님을 만나면 만나기까지는  양심생활이요 만나고 난 다음에는 무슨 생활입니까? 영감 생활인데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의 구원은 신앙생활이 되고 난 다음에 구원이  되는 것이지 신앙생활이 되기 전에는 구원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이 되고 난  다음에 구원이 된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신앙생활이 돼야 전능하신 그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우리를 붙들고 완전한 것. 영원한 것 불변한 것. 영생한 것,  이것을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하나라 갈 때에 가지고  가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 만든 것과 또 첫째  아담에게 속해서 저주 아래 있는 것을 이제 성령님이 와서 새로, 개조를 한 것과  개조한 것을 가리켜서 썩어질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라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변화된다는  것은 성령님이 와 가지고 이렇게 완전히 만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불로 연단하듯이 연단한다 그 말은 믿는다고 해도  영감으로 믿는 믿음이 있고. 아직까지 양심생활이 있고. 양심생활도 아닌 제  욕심대로 살면서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사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름만 가지고 제 욕심대로 사는 사람이 제 욕심대로 사는 사람이 성공을  하면 무슨 생활이 됩니까? 제 욕심대로 사는 욕심대로 사는 그 욕심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욕심대로 신앙생활 하다가 이제 옳게 바르게  성공을 하면 성공한 그 생활을 가리켜서 무슨 생활이라고 말합니까? 여기 양성원  학생들, 양심생활 그것이 기독 자의 양심생활입니다. 그러면 양심생활이  양심생활이 또 성공을 하면 무슨 생활입니까? 신앙생활 곧 영감 생활입니다.

신앙생활 영감생활입니다. 영감생활이 신앙생활이요 신앙생활이 영감 생활인데  영감 생활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전능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이 그저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이름만  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고 그저 예배당에나 왔다 갔다 하고 이 세례나  받고 학습이나 받고 또 성찬식이나 하고 교회에서 세워 놓은 의식, 의식 행위,  의식 그것이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의식만 해서 형식적 예수 믿는 사람이지  아직까지 양심 생활 안 한 사람 양심 생활 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양심 생활은  어떤 게 양심생활인가? 기독자의 양심 생활은 신구약 성경 지식 하나님의 지식을  법전으로 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참되게 살라고 하는 고  마음이 기독자의 양심이요 그렇게 살았을 때에 기독자의 양심 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양심생활이면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양심생활만으로서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알아 들었는가?  기독자들이 양심생활만으로서는 아직까지 건설 구원은 하나도 되지 못한다고  그렇게 아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이것 잘 알아. 이라면 신학박사라.

신학박사도 이것 다 몰라요. 이것 중요합니다. 그러면 기독자의 양심생활이  거기에서 애를 쓰면 그것이 무슨 생활로 승격이 되고 무슨 생활로 전진 향상이  되느냐 하면 기독자의 양심생활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고 말한  그대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성령을 만납니다. 그러면 영감 생활이 됩니다.

이제는 양심생활이 영감 생활이 됩니다. 영감 생활이 되면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게 신앙생활, 그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순종하는 생활이지. 양심생활도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도 그게 뭐 남을 꼬아 먹을라고 말씀대로 사는 것도 있고, 장가 갈라고  말씀대로 사는 것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제 사람 만들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도 있고 이 정치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도 있고 모든 사업적으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 있고 이 전부 하나님과 말씀을 이용해 먹을라고 외식적으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 만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들은 속습니다. '아. 저 사람은  예수 잘 믿는다. 장로도 줘야 되겠고 목사도 줘야 되겠고 뭐 집사도 줘야 되겠고,'  다 이라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속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까지 기독자의  양심생활을 안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자의 양심생활 하는 사람은 그저 성경  말씀대로 옳고 바른 것을 찾아서 행할라고 할 때에 그때 자기에게 어떤 그  손해나 어려움이나 이런 고난이나 그런 일이 있어도 그것을 양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옳고 바른 것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행할라고 애를  써서 나가는 그것이 양심생활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고 양심생활로 그렇게 나가면 고 양심생활이 무엇을 만나느냐?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이 보시고 됐다, 이제 됐다 할 때에 도장을 꾹 찍습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마에 성령의 인 맞기까지 기다려라  이랬습니다. 우리 지금 성령의 인 맞을라고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옳다 인정하는 것은 그때부터 성령이 동행하십니다. 성령이 동행하면 누가  동행하는 것입니까? 성령이 동행하는 것이, 성령 동행이 하나님 동행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네, 잘 알아, 이만하면 이거 뭐 뭐 성자도 되고 천국을 다  얻겠는데 인제 핑계 못 해요. 네, 내나 하나님 동행입니다. 하나님 동행이니까  하나님 동행 누가 했습니까? 에녹이 하나님 동행해서 죽지 안했습니다. 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해서 온 천하가 멸받을 때 구원 얻었습니다. 또 엘리야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라. 다니엘 그런 사람도 다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러니까, 양심 생활을 그것을 버리는 것이 양심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생활대로 요대로 할라고 애를 쓰다가 너무 닥치는 일이  큽니다. 아, 양심생활 할라 하면 사업이 휘뜩 뒤비지겠고 양심생활대로 할라 하면  가정에 큰 환난이 일어나겠고 양심생활대로 할라 하면 직장이 뚝 벌어지겠고  양심생활 할라 하면 감옥에 갇히겠고 양심생활 대로 고대로 할라 하면 모가지가  끊겨지겠고 순교를 죽음을 당하겠고 이래도 그때에 양심생활을 버리지 안하고  나갈 때에 그때에 성령이 인쳐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떨 때는 생명 버려야  인쳐 줄 때 있고 어떨 때는 자기의 욕심 버려야 인쳐 줄 때 있고, 자기에게 무슨  큰 희생이나 적은 희생이나 적은 희생은 적은 십자가이고 큰 희생은 큰  십자가인데, 이제 자기가 자기에게 희생이 돼도 양심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할  때에 그만큼 성령 이 인을 쳐 주십니다. 그만큼 성령이 인쳐 주십니다. 인쳐  주시면 그거는 참 성령의 인을 치되 아주 조그만한 요만한 그 권리의 인을 맞는  것도 있고 이런 권리의 인을 맞는 것도 있고 이런 권리의 인을 맞는 것도 있고,  그러면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과 또 자기의 몸 자기의 모든 이 전부가 다 절단  나도 양심생활을 양보하지 앉고 양심생활 그대로 단행할 때에는 그 때는 성령이  인을 쳐 주되 같이 성신의 인을 받았지만 최고의 인을 받는 것입니다. 최고의 인,  다니엘 그런 사람들이 다, 그리 최고의 인을 척 받고 나니까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데 무슨 사자가 뭣 어떻게 할 것이며 불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양심생활도 시작 안 한 자가 건설 구원을  이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양심생활을 시작하지 안한 자에게 하나님이  축복해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리라 하는 그 뛰어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양심생활 찾아서  양심생활 해 가지고 양심생활을 양보하지 안하고 양심생활을 계속하면 성령이  인치고 그러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축복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모든  것, 그라면 우리가 당장 부자도 다 될 것이오. 그렇게 하면 부자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양심생활에서 영감 생활 믿음 생활로 나아감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모든 일이 되도록 이렇게 해야 될 터인데 축복일랑 받지 안하고  깍쟁이 노릇 해 가지고. 막 엉크리고 성을 내 가지고 막 주먹을 내 가지고 피를  흘리고 다투고 싸우고 시비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얻을라 하기 때문에 그게  성도의 얻는 것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쫓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암만 싸워 봐야 소용없어.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 받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슬슬슬 자꾸 돼지고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 없어. 하나님이 축복하는 자를 방해하면 방해하는 그자를 죽여  버립니다. 방해하는 자를 집어 던져 버립니다. 방해하는 자가 나중에 이용  당하구로 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자를 아무도 방해 못 해요. 방해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요 양심을 살려 가지고 양심을 살려야 양심 이  강건해지지 양심이 어리고 양심이 벌써 죽어 있으면 뭐 됩니까? 그러기 때문에  죽어도 양심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양심을 살려서 길러 가지고 양심생활이  장성해서 양심생활이 장성해서 양심생활이 성공하면 무슨 생활됩니까? 자. 영감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영감 생활됩니다. 영감 생활  돼요. 영감 생활되면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 생활은 능치 못할 것이 없고  천하 모든 민속 위에 뛰어나는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축복으로 잘되는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덕을 세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깍쟁이  노릇하고 이와 같이 해 가지고 되는 그것은 신자의 축복이 아닙니다.

 이러니까 뭐 시간 많이 지나갔는데 이제 오늘 저녁에 그만하고. 지난 주일에 고  일곱 가지를 말했습니다. 양심을 죽여서는 안 되고, 또 양심을 매장해도 안 되고,  또 양심을 북돋워야 되겠고, 양심을 길러야 되겠고, 양심을 장성한 앙심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진리 지식을 알아야 구원이 이루어지지 모르고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알아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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