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5 16:57
신앙양심
본문 : 출애굽기 20장 4절∼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리는 죄를 두려워해야 됩니다. 죄의 값은 망하는 것과 죽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자기가 망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두려워하고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는 심령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망하는 거와 죽는 것보다 죄가 먼저 있고, 죄만 있으면 그는 필연적으로 망하고 죽습니다. 죄가 없는 데에는 어떤 그 멸망과 사망이 온다 할지라도 그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하고 미워해야 됩니다.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하고 미워해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삐뚤어지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하고 또 멀리하고 미워해야 됩니다. 삐뚤어지면 무엇이든지 망하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자에게는 하나님이 오시면 멸망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삐뚤어진 것은 하나님 언제든지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 모로 성경은 어떻게 하면 삐뚤어진다, 어떻게 하면 바로 된다. 어떻게 하면 삐뚤어지지 안한 것이라도 삐뚤어진 것을 향하여서 찾아가는 일이 된다.
이래서 삐뚤어지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지 제 마음에 주관적 위로나 평강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비슷한데 삐뚤어졌으니까 자기 딴에는 옳은 거 비슷하니까 옳은 줄 알고 안심하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또 아주 옳은 것은 대적이 많기 때문에 행하기가 힘들지만 옳은 것 같으면서 조금 삐뚤어져서 이래 나아가는 것은 마귀는 벌써 알기 때문에 대적을 하나도 안 합니다. 잘한다.
잘한다. 네가 그리 가면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안심하고 삐뚤어진 데로 달리도록 하기 때문에 옳은 것 같으면서 삐뚤어진 그 길이 제일 위험합니다. 왜 그 길은 대적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 길이 빨리 진행됩니다. 또 본인이 안심하고 힘쓰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 헛일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666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도 제이 계명이 우리에게 생활에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전 생활에 중요한 계명은 사계명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이 계명이 중요합니다. 사 계명을 지키지 안하면 다른 계명은 다 지킬 수가 없고, 사계명을 지키면 그 다음에 이계명 지킬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이계명을 지키면 그 다음에 차차 깨끗해져 가지고 일계명도 지키고 다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계명에 말씀하시기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무엇이든지 너를 위해서 만들지 말아라 하는 그것을 주의를 시켰습니다.
혹 심방 갈때에 목사님들이나 혹은 권사님들이나 권찰님들이나 참 자기가 지금 그곳에 가서 그 가정에 인도를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될 터인데 무엇을 전할까 해서 걱정을 가지고 묻는 사람에게는 저는 언제든지 그만 대개는 이계명을 말해 줍니다. 이계명을 가서 증거하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이계명을 증거하면 모든 위험로를 위험한 길을 다 피할 수가 있고 또 복된 길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에 늘 이계명을 증거해 주라 이렇게 말합니다.
뭐 그런 것 없이 가면 신구약 성경 66권인데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어디든지 이 말씀이나 저 말씀이나 아무래도 뭐 다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사람은 말할 필요 없고. 그런 사람 보면 마구잡이입니다. 빌립보 2장 1절 이하에 보면, 무슨 권면이나 위로나 사랑이나 지도나 모든 책망이나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의 형편이 변하지 안하고 있으면 그 형편 그 사정 그 처지를 가진 그 사람에게는 열 사람이 가도 꼭 같은 위로, 같은 권면. 같은 칭찬, 같은 책망, 같은 지도가 있어야 될 터인데 이 장로는 와 가지고 이렇게 말하고 집사는 와서 저렇게 말하고 목사는 와서 저렇게 말하고 또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 사이비한 거짓말이요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분명히 옳은 말과 옳은 지도는 하나뿐이지 둘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인 그것을 찾을라고 이거 잘못하면 큰일나겠다, 또 잘못하면 이를 찾지 못하겠다. 이렇게 조심되는 사람은 좀 주의를 하고 힘든다 해서, 이거 내가 뭘 할까 이렇게 염려를 해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될까 거기에 제일 주력하지만, 거짓부리된 자는 그것은 뭐 어떤 말이든지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그 선택하는 것이야 다 성경 말씀이니까 뭐 상관 있는 이 선택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안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옳게 증거할라고만 애를 쓰는데 거기에 주력을 합니다. 거기에 주력하는 사람은 거기 주력하니까 그래도 성경을 가르치니까 유익은 있기는 있지만 그렇게만 하는 사람들은 실은 탈선이 많이 됩니다. 또 그렇게 적극적인 그런 효력은 받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첫째는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전할라고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떨면서, 잘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선택을 자기가 해도 그거는 자기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장소에 따라서 다르고 형편에 따라서 다르고 사람에게 따라서 다르지 꼭 같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이계명에는 간단하게 주의 주는 것이 뭐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자기 위해서 하지 마라 하는 그것을 첫째로 말해 놨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위해서 하지 말아라. 자기 위해서 하는데 고 다음에 말씀이 자기 위해서 뭐이든지 만들지 말아라 이랬습니다. 만들지 말아라. 자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만들지 말아라. 만들지 말라는 것은 그라면 믿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만들지 안하면 건설 없이 그냥 지내란 말이냐? 아닙니다. 만드나 그것을 자기 위해서 만들지 말아라. 자기 위해서 만들면 뭐이 나쁜데? 자기 위해서 만들면 그것이 우상되기 쉽습니다. 자기 위해서 만들면 우상되기 쉽습니다. 우상이라 말은 자기를 위해서 만들면 마지막에는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고 자기에게 필요하고 자기를 돕고 자기에게 유익을 주리라고 자기는 그거 덕택으로 살 수 있다 하는 이런 사람이 된다 그거요. 자기를 위해서 만들면 그것이 우상되기 쉽고 우상이 되면 그 다음에 어찌 되느냐? 그것을 섬기는 자 됩니다.
모든 거 없어도 나는 이 기술만 있으면 된다, 모든 것 없어도 나는 의학 기술이 있으니까 의학 기술만 있으면 된다. 모든 것 없어도 나는 어떤 과학자가 돼 있기 때문에 이 기술만 있으면 된다, 나는 모든 것 없어도 이런 지식이 있으니까 된다, 나는 모든 거 없어도 설교를 잘하니까 설교 이것만 하면 된다, 나는 모든 것 없어도 이 어학을 잘하니까 어학 하나면 된다, 나는 모든 것 없어도 내게 모든 사교술이 있으니까 사교술 하나면 된다, 나는 이 기업체 하나면 된다.
이거면 된다, 인제 그것 있으면 그저 자기로서는 부족할 것이 없이 그렇게 복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뭣 됐습니까? 우상됐오. 그게 우상됐오. 무엇이든지 자기 위해서 하면 우상된다 말이오. 공부를 해도 공부를 할 때에 내가 이 공부하는 것은 나 위해서 뭐 호의 호식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하는 공부라. 주님을 위해서 하지 안하고 자기를 위해서 공부를 떡 하고 나면 나중에 무슨 결과가 맺느냐 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집니다. 요거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요걸 또 깨달을라면 여러분들이 많이 힘을 써야지 그렇게 쉽게 깨달아지는 것 아니라. 믿는 사람이 뭐이든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거 저런 걸 부지런히 해야 되지 믿는 사람은 게을하면 안 돼요. 부지런해야 돼요. 열심히 해야 돼요.
열심히 하나 주의할 것 뭐이냐? 자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돼요. 주를 위해서 해야 돼요.
주님을 위해서 한다면 그 말속에는 뭐이 들었는고 하니 주님 위해 한다면 주님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주님을 위하는 것 되지 주님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이야 주님 위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주님을 거슬리고 반대하는 일이야 주님을 위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죄되는 일이야 주님을 위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무엇이든지 할 때 주님이 어떻게 하라 하는고 주님의 꼭 지도를 받아 가지고 하는 그걸 해야 주님 위함이 됩니다. 그래 주님을 위해서 해야 되고, 이라면 거기에 다 포함됐다 말이오. 무엇이든지 믿는 사람은 부지런히 하되 주님을 위해서 해야 된다. 주님을 위해서 하지 안하면 뭐 어떤데? 주님을 위해서 하지 안하면 나중에 그것이 자기 위해서 하다 보면 그것이 나중에 가서는 하나님 대신이 되는 우상이 되고 만다. 이래서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도 이제 그거 섬겨요. 그 사람은 하나님 의지하는 것보다도 나는 이만치 재산이 있으니까 재산 의지한다. 하나님 의지하는 것보다도 나는 이만치 기술이 있으니까 기술을 의지합니다. 나는 하나님 의지하는 것보다도 이만치 재벌이 있으니까 재벌 의지합니다. 이상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지 안한 것은 결국은 그것이 우상이 되고 만다 이거요. 우상이 되면 그만 그것 섬기는 자 됩니다. 섬기는 자 된다 말은 이거 가지고는 된다, 이것만 하면 된다.
보면 알아. 저거는 지금 무슨 우상을 가지고 있다. 모르거든 나한테 와 물어요.
내가 가르칠 터이니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우상은 잘 몰라도 여러분들 우상은 또 잘 압니다. 그렇지 안해요? 자기 낯에 있는 검정은 몰라도 상대방 낯에 있는 검정은 잘 알 수가 있다 그거요. 그것 모양으로 알아요. 그러니까 자기 우상 아는 사람이 참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우상 아는 데에는 얼마나 알기가 힘이 들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자기 우상을 말해 주면 감사히 받고 얼른 고쳐야 될 일이지 자기 우상 너 우상 섬긴다 한다고 듣기 싫다고 욕질하면 그 사람은 희망이 없어. 그 안 믿는 사람들 말에 '성은 희문과라'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희문과라' 자기의 허물 듣기를 좋아한다. 허물과(過)자. 기쁠 희(喜)자 들을 문(問)자. 기뻐 듣는 것이 자기의 허물이다. 자기의 허물 듣기를 좋아하지만 희망 없는 사람은 자기의 장점만 말해서 치켜올리면 좋답니다.
이러니까. 너를 위해서 하면 우상되고, 우상되면 그거 섬기게 되고 그거 섬기게 되면 거기에 굴복한다. 그게 그는 대로 가게 된다. 너는 네가 암만 주일을 지키고 싶어도 안 된다. 너는 암만 새벽 기도 나오고 싶어도 네 직장이 끌어서 너는 새벽 기도 못 나온다. 너는 아무리 작정을 해도 네 몸뚱이 그 안일주의가 끌어서 너는 새벽 기도 못 나온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은 부지런히 하되 자기 위해서 하지 말고 주를 위해서 해라 자기 위해서 하면 그것이 우상되고 우상되면 그거 섬기는 자 되고 그거 섬기다가 보면 그것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자 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삼사 대까지 다 그 삐뚤어진 값을 받도록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고,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천대까지 주신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세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천 대까지 주신다 그말은 뭐 햇수로 천 년이나 이래 간다 말이 아니고 천이라 말은 끝없는 그 무한을 가리켜서 성경에는 천이라고 그렇게 표시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 대 수라 말은 대 수라 말은 저만 아니라 아들 손자, 또 믿음의 아들, 손자 모든 인연의 아들, 손자, 이러니까 통털어 결론을 말하면 자기와 관련 가진 자 자기에게 속한 자 전부에게 그 혜택이 가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앞에 필요한 것이 마구 구비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앞에 꽉 놓여 있습니다. 있으나 그 사람에게 눈이 어두우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백 가지 천 가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가득 쌓여 있다 할지라도 눈이 어두우면 하나도 안 보이니까 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라 그 사람에게는 하나도 소용이 없어. 안 보이니까 어떻게 가질 수 있소? 지금 눈이 어두운 것도, 요새와 같이 생각하면 안 돼요. 나는 눈이 없어도 다른 사람 눈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눈뜬 혜택을 본다 그 말이오. 그래서 어떤 다이나젝스 라는 사람은 소경이 등불 들고 다니라 했오 소경이 눈 밝은 사람이야 등불 들 것 없이 환하게 돌아다니지만 소경이 등불을 들고 다니라 했어. 뭐 할라고? 소경이 등불 들고 다니면 등불 들고 다니니까 눈 성한 사람들이 다 보고 이리저리 피해 가고 부딪히지 안하거든. 그 소경이 등불 들고 다니라고 눈이 어두우면 자기 앞에 필요한 것이 천 가지 만 가지가 필요한 것이 앞에 가득히 있다 할지라도 눈이 어두우면 하나도 안 보이니까 자기에게는 하나도 소용이 없다 그거요.
또, 자기에게 필요한 복된 소리가 꽉 찼습니다. 너 그리 가면 죽는다 거기가면 지금 보배가 있다, 아주 자기에게 필요하고 요긴한 소리가 많이 있지만 귀가 어두워 놓으니까 그 사람은 하나도 필요가 없어. 귀 어두운 사람에게는 아무리 자기에게 유익된 소리가 많이 있고 자기의. 멸망을 피하는 그런 참 중요한 소리가 많지만 귀가 어두우면 하나도 없는 거와 같이 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효력이 하나도 없다. 그리 가면 죽는다. 말하면 귀가 어두우니까 못 들었으니까 그리 죽는 곳으로 뻑뻑 갈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귀가 있으면 그리 가면 죽는다 하는데 들으니까 그만 그리 안 가고, 또 지금 뭣이 너에게 지금 오는데 저 위험한다, 저 지금 집이 무너지니까 어서 이리 바깥으로 나오라 이랬지만 바깥으로 나가라고 하지만 귀가 어두우니까 그리 못 듣고 거기 떡 편하게 앉았다 말이오. 또 바깥으로 나가라고 하는데 나갈라고 하지만 이거는 눈이 어두우니까 어디로 갈지를 모르니까 벽으로 자꾸 갈라다가 이라다가 그만 거기 치어 죽을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소리가 많이 있어도 귀 없으면 소용없고 자기에게 중요하고 보배가 아무리 놓여 있다 할지라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의 눈이 되고, 인격의 귀가 되는 것은 뭣이라고 배웠지요? 양심. 신앙 양심. 양심 없으면 소용없어. 양심 없으면 신구약 성경 말씀을 막 통달해서 아무리 외운다 할지라도 신학 박사가 된다 해도 양심 없으면 자기에게는 안 들리요. 양심 없으면 자기에게는 그것이 들리지 안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어. 아무리 수많은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있다 할지라도 자기에게는 필요 없어. 양심 없으면 자기에게는 안 들립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은혜가 자기에게 아무리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 소망이 좋은 소망이 많이 있고 위험한 일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양심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양심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양심이 없으면 듣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 양심 없는 자에게 신구약 성경 공부 암만 해봐야 소용없다 그말이오. 요새 지금 양성원에서는 조직 신학을 공부하고 있지요. 조직 신학이 중요합니다. 중요하지만 양심을 안 쓰면 조직 신학 아는 조직 신학 박사라도 소용없어.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런고로. 신앙 양심이 없으면 눈이 어두운 자기 때문에 소경에게는 자기 앞에 아무리 귀한 보배가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소용이 없고, 자기 앞에 아무리 위험성이 있다 해도 그것도 자기는 피할 수가 없고 자기에게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그 길이 있지만 피난 길이 있지만 눈이 어두우니까 소용이 없고, 또 아무리 필요하고 중요한 소리가 있지만 자기 귀가 어두우니까 한 마디도 못 들으니까 소용이 없다 말이오. 자기에게 어떤 좋은 것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눈 어둔 자에게 소용없고 자기에게 필요하고 요긴하고 생명되는 그런 말씀이 아무리 있다 할지라도 귀 어두우면 소용없어.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믿는 사람이 자기 신앙 양심을 쓰지 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신앙 양심은 간단해요. 신앙 양심은 뭐인가?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불교 양심은 불경을 가지고 불경대로 어떻게 하면 이 불경에 딱 맞도록 할까? 불경대로 바로 옳게 바로 할라 하는 그것이 그 불교의 양심이요, 우리의 신앙 양심이라 말은 신구약 성경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로 하나 옳게 하나 이렇게 성경말씀대로 영감대로 바로 할라고 옳게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그만 신앙 양심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거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 그거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성경 알아도 소용없어. 성경은 좋은 음성 아닙니까? 이렇지만 성경을 아무리 자기가 눈으로 읽고 귀로 암만 읽어도 양심을 쓰지 안하면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육체로써 앞에 아무리 중요하고 요긴한 소리가 말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귀가 어두우면 그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고 아무리 자기 앞에 보배가 많이 있다 할지라도 위험한 것이 암만 많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의 망할 것이 앞에 있고 자기 행복될 것이 앞에 있다 할지라도 눈 어두우면 보지 못하면 소용 있습니까? 듣지 못하면 소용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신구약 성경에는 한없는 보배가 있지만 자기가 양심 쓰지 안하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전체가 생명이요 영생이 되는 복음이요 이렇지만 양심 쓰지 안하면 하나도 자기에게는 들리지 안해. 자기에게는 효력이 없다 말이오. 다른 사람에게는 성경을 가르쳐 가지고 유익을 줄지라도 자기 본인에게는 아무 효력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