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목적,하나님을 찾아가는 것

 

1983. 4. 15. 토새

 

본문: 요한일서 3장 1절∼8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육체도 생명이 있고 모든 지체가 있습니다. 생명이 끊어지면 외부의  지체나 내부의 그 모든 각 기관이나 그런 것이 아무리 건전하고 구비하고  깨끗하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 작용을 하지 못하는 시체가 됩니다. 또 그  사람에게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안팎 육이 그것이 건강치 못하면 그 사람의  생명은 결국 끊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하여 지체가 온전해지고 또 활동할 수 있고 또 지체가 온전해짐으로  그의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육으로 말해도 그 사람의 생명과 그  사람의 지체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이로써 저가 튼튼해지고 저로써  이가 튼튼해지는 그 안팎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육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인격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또 우리의 모든 가려 있는 육체의 기능 이런 것은 그 생명의 지체가 되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생명의  지체인 모든 기능들이 이것이 바로 정리도 되고 정비도 되고 또 바로 모든  정상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기능이 바로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튼튼하고 또 생명이 튼튼하면  그 기능이 튼튼하고, 그 기능은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이 바로 되면 그 기능이 바로 되고, 행동이 튼튼하게 되면 기능이  튼튼하게 되고, 또 행동이 잘못되면 기능에 고장이 나고, 기능에 고장이 나면  생명에 고장이 납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 말씀은 우리의 이 모든 활동하는  활동에 등불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활동을 해야 되느냐 하는 데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활동해야 되는 것을 알려 주는 빛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육십육 권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걸어갈  길을. 바로 알려 주실 때에 알려 주신 그대로 바로 걸어가게 되면 우리에게 있는  기능은 차차 튼튼해지게 되고 또 이 기능이 튼튼해지면 우리 안에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차 튼튼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육신의 건강이나 생명이나 그것을 잘 조심하고 잘 보존하고 또  활동을 바로 잘해서, 운동하는 것도 활동이요 자기가 일하는 것도 활동인데  활동을 잘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육체의 위 생이라, 위생 주의를 한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위생 주의가 이것이 잘되면 그 몸도 튼튼해지고 또  그 수명도 튼튼해집니다.

 자연 조건은 시골에 있는 사람들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마는 위생에 대한  주의성이 모자라서 시골 사람과 도시 사람의 전 통계를 한다면 오히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수명이 더 높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령한 내 신앙 인격, 신령한 내 신앙 인격도 육체의  위생 주의를 하는 것과 꼭 같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선천적으로  좋은 체질을 타고나고 또 아직까지 생명을 많이 가진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위생 주의를 하지 못해서 아주 공기 나쁜 데 가서 일을 한다든지 또  자기의 육체에 위험한 그런 데에 일을 한다든지 자기 그 지체가 바로 활동할 수  없는 그런 병들기 쉬운 그런 자리에 활동하면 그 사람 몸은 차차 약해질 것이고  병들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생명까지도 위험한 것입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자기가 행동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행동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지고 먼저 자기의 모든 활동을 이것을 정리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활동을 안할 것은 안 하고, 할 것은 하고, 또  이렇게 활동할 것은 이렇게, 저렇게 활동할 것은 저렇게 활동을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정리를 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이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리 정돈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육체의 기능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정신이 깨끗해집니다. 그것이 신앙 인격의 힘입니다.

 그래서 차차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강건해지면 그 마음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 다음에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쉽고, 또 찾아갈 마음도 생기고, 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가 알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활동과 자기의 생활, 이것이  제일 껍데기인데. 자기 활동과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잘 말씀대로  그대로 하나씩 둘씩 말씀과 일치되게 그렇게 정리 정돈을 하게 되면 자기 속에  힘이 생겨집니다.

 그러면 그 힘이 무엇이냐? 그것이 신령한 힘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것이 마음의  힘입니다. 이 마음의 힘이 강건해지면 마음의 힘이 강건해진 그 마음의 힘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들 표시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힘이, 양심이 강건하게  되면 그의 육체는 마음의 힘에 속하게 되고 마음의 힘은 육체를 다스리게  됩니다.

 바울이 마음에 매여 예루살렘에서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지마는 그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것은  '내 마음에 매여서 붙들려 매여서 내가 꼼짝 못하고 그리 가게 된다'고 그렇게  표현한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의 힘이요 인격의 힘인 그 힘이 곧 양심의 힘인  것입니다.

 육체가 건강해지는 것처럼 이렇게 이 신령한 마음의 힘이, 이성의 힘 이,  생각의 힘이 이렇게 강건하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이 또 튼튼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성의 힘이 강건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이성 위에 탁월하고 있는  양심의 힘이 강건하게 되고, 그리되면 하나님을 차차 알아가게도 되고 하나님이  보여지고, 하나님이 보여지고 또 하나님을 차차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어 보여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는데 차차 마음의  힘이 강건해저면 마음의 눈이 밝고 마음의 힘이 강건해서 하나님을 볼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을 찾아갈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힘이 강건해집니다. 그러면 생명의 그 모든 기능 작용이,  생명의 작용이, 기능 작용이 그 육체의 각 기능을 움직이고 육체의 각 기능이  고기덩어리 수족과 이 모든 지체를 움직여서 이제 건강한 사람으로 활동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하게 되면 이제는 그분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만나는 것이 우리가 눈이 밝아야 되고 힘이 있어야 그분을  만나는 것인데 그것이 뭐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케  해야 된다" 하는 이것 외부 깨끗입니다. 외부가 깨끗해짐으로 그 내부가 차차  깨끗해지고 또 내부가 깨끗해짐으로 외부가 깨끗해집니다. 그러면 안팎의  깨끗해지는 것이 이것이 다 하나입니다. 그러나 논리적 순서나 또 실지의 활동적  순서로 말하면 외 부가 이렇게 깨끗해지면 이것이 자기 속에 있는, 없는 생명을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이 차차 튼튼해집니다.

 그 사람이 속에 여러 해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지마는 마구 추운 데 가 가지고  사지가 얼어서 오그라집니다. 사지가 얼어서 오그라지면 처음에 이래 생명의  활동이 외부의 그 수족에 뻗쳐가지를 못할 것이고, 수족에 뻗쳐가지를 못하면  차차 차차 그 생명력이 이렇게 축소되고 막히워져서 마지막에는 심장만  빨딸빨딱거리고 하다가서 마지막에는 생명이 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자기가 얼어서 절단난 그 지체가 차차 차차 그것이 풀려지면  풀리는데 따라서 생명력은 마지막에 자기의 손끝에까지도 그 생명의 역사가  번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령한 믿음의 신령한 사람도  안팎이 있는데 안에는 생명이요 겉에는 모든 신령한 지체의 힘입니다. 그 힘은  생명에서 나오고 생명의 힘은 그것을 통해서 활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외부에 지체의 튼튼은 생명을 보호하고 또 생명은 온갖 지체를  새롭게 하고 튼튼케 하는 것과 같이 우리 신앙 인격, 신앙 생애, 신령에 속한 이  신령한 신앙의 사람, 신령한 사람, 이 신령한 사람도 안팎이 있어서 외부를  튼튼히 함으로써 속에 생명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속에 힘있게 역사할 수가  있고, 또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또 우리의 이 모든 신령한 지체인  우리의 각 신앙 행위가 튼튼해짐으로 또 그 생명이 힘있게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나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서 요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법칙은 자기가 지켜 행하지마는 그것은 생명을 북돋우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요 율법에 속한 사람이지 이  은혜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신령한 사람의 지체가 되는 우리에게  있는 이 신령한 사람의 지체인 모든 우리의 인격의 기능을 우리가 튼튼케 하는  것이고 기능을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인데 그 말씀대로 하는 그것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 우리에게 생명이신 하나님의 중생 시킨 내재하시는 능력이  신령한 사람의 기능인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에게 튼튼케 하려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 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신령한 사람의 그 기능을 튼튼케, 마치  사람, 육체의 사람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이렇게 하는  것이 그 몸을 튼튼케 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처음에는 우리의 활동을 차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화하고 또 그러면 그것이  종합돼 가지고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말씀 화되고, 그러면 우리 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영,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의 주가 되신 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가 있고 그 기능이 이렇게 여러 종별로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결이 없이 우리의 육체는 본능적으로 이 몸이 튼튼하면 생명이  튼튼하고 이것은 떨어질 수 없고 끊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이래 되어 있지마는  우리의 신령한 생활은 그것이 우리의 마음의 작용을 가지고 활동을 가지고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감각에 우리가 알고 그것을 힘을  쓰는 가운데에서 비로소 그 일이 차차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목적이 첫째는 내 행동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하늘나라에  가는, 하늘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그 사람의 행동이 되려고 애를 쓰고, 또 그  행동을 애를 쓰는 것은 하늘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그 사람의 기능이 되려고  기능 변화를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활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고, 활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면 또 우리의 기능이 하나님 말씀대로 변화됩니다. 기능이 하나님  말씀대로 변화되는 것은 차차 하나님의 속성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일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말로 말하기 위해서 신앙  양심이라, 착한 양심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그 사람의 생활에서 가꾸어지게 되고, 나무를 심어놓고 나무를  잘 가꾸는 것처럼 양심은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가꾸어지고, 그 사람의 생활은  그 사람의 활동 속에서 가꾸어지고, 그러면 그 활동과 생활 속에서 가꾸어진  그것이 곧 양심이라 착한 양심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화된 그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속 성화된 마음인데 하나님의 속성화된 그 속에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이 거게서 내주 하셔 가지고 역사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목적이 어데 있느냐? 말씀을 지키는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 하나님을 만나려는 것이, 하나님을 알려는 것이,  하나님으로 동행하려는 것이, 하나님에게 접촉 연결되려는 그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 행동 한 행동 이것을 고치게 되면 그 생활이 그  속에서 변화가 되고, 생활이 변화가 되면 그의 곧 신령한 기능이 변화되는,  기능이 신령한 기능으로 변화되는, 신령한 기능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속성화됩니다. 하나님의 속성화되면 이제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고, 하나님을 원할 수 있고, 하나님 찾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모든 그 역사가,   우리의 생활 말단까지 다 발휘돼 가지고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영감이라 이렇게도 말을 합니다. 우리가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뭐 필요하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뭣 때문에 연구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모든 그  조건들을 구비하고 그 실력을 구비하려는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활동을 잘 조사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활동이 되어지는 그것만으로써  끝을 삼는 것이 그것이 하나의 기독교 도덕주의로서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상고해 가지고 이 말씀대로 하는 것은 그 목적이 어데  있느냐? 그 목적이 생활을 우리가 변화하려고 하는 것이고, 생활을 변화하려는  그 목적이 어데 있느냐? 우리에게 기능이 변화가 되려고 하는 것이고, 그 기능  변화를 하려는 그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의 속성화, 하나님의 형상화되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화되려고 애를 그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결합이 되려는 그 목적을 가지고 그걸 소망해서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지켜 묵상함으로 그 모든 것이  형통해졌다, 또 열매 맺는다 하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 말은 이 말씀을 앉아서 읽는 것 생각하는 것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이 말씀을 가지고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이것이 말씀을 가지고 모든  그것을 시정하고 조정하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서,  "주야로 묵상한다" 그 말은 그 말씀을 자꾸 생각하는 것 아닙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 그러기에  성경에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 방편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이요, 또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이러면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박아놓은 사진관과 같은 것이 성경이라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생활을 고치려고 하는 것  좋지마는 그것만하면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그 최종의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서 하나님과 나와의 결합되려는  그것이 최종의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처음에는 하나님의 그 외부적인,  하나님의 활동이 나와 있는, 하나님의 활동이 널리 퍼쳐서 나와 있는 하나님의  그 활동을 내가 잡고 차차 차차 찾아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의  활동 범위를 찾아서 자꾸 향하여 찾아가는 그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행동을 자꾸, 내 행동 그대로 가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그 말씀은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분의 행정 범위, 그분의 은혜  역사 범위, 그 범위를 찾아서 그 범위 안으로 살살 들어가려고 차차 차차 애를  써서 그분의 은택의 범위 안으로 들어가면 그분의 활동을 접하게 되고, 그분의  활동 안에서 내가 역사 하게 되면 그분의 그 기능화 그분의 속성화 돼지고,  그분의 속성화가 되어지면 이제 하나님을 접해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그 방편이라  그렇게 우리가 알고, 성경 말씀을 뭣 때문에 읽고 연구하느 냐?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편을 알려고 읽는 것이요, 또 성경 말씀을 행하는 것은 뭣 때문에  행하느냐? 내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요, 그러면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그 행동을 하려는 것이요 행동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요 내가 차차 사람이 되어짐에  따라서 하나님을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으면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 유케 한다'  하는 그 모든 순위가 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 없이 하나님을 찾아 만나려고 하는 것 대단히 위험해서  다 탈선합니다. 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이 말씀으로 자기가 이 말씀을 상대해서 은혜를 입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일종의 지식주의 율법주의자가 돼 가지고 또 헛일합니다. 또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그 일만 하는 사람도  위험해서 마지막에는 잘못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연구를 해도 자기가 실행을 해 보면 다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앉아서 그 사람에게 '네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칩니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을 선생님이 '네가 얼음을 스케이트를 탈 때에는  요렇게 타라 조렇게 타라' 말을 해도 그 사람이 말하는 그것이 아무리 세밀히  말한다 할지라도 실지로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을 탈 때에 그때에 당한 그  사실과는 다르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다 발표할 수 없는 거게 세미하고 구비한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하는 방편이다. 그  방편인데 이것이 말씀을 자기가 지식적으로만 연구해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는 그것은 성글어서 하나의 논리적이요 그만 지식만 돼 버리고  맙니다. 지식만 돼 버리고 말면 그 사람의 그 지식의 결과로 말미암아 교만만  마련하지 아무 소용이 없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가지고 그대로 말씀 가지고 껍데기로부터 행동을  말씀대로 고치고 또 자기의 생활을 고치고 차차 자기의 속성이 고쳐지고 하는  데에 이 목적을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려는, 하나님의 그 속성화 되려는  이것만 자기가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자존자이시며 지극히 크신 완전자이시며  인격자이신 이 하나님을 자기가 찾아 만나려고 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 인격 대  신격으로 이 생존하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요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생활  변화가 되고 자기의 인격 속성 변화가 돼도 거기 생명 역사는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그 사람이 결국은 인본주의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 목적부터 잡아야 돼요.

목적은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이신, 우리의 모든 소망의 전부이신 우리의 구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거하려는 것이요 동행하려는 것이요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그분은 나의 생명이시요 생명의 힘으로 수족이 움직이고  생명의 힘으로서 전신 전체 안팎 수족이 움직이고 그 수족의 힘으로서 모든 몸  밖에 있는 생활이 다 이렇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찾으려는 그 목적, 우리 신앙 전부의 목적이  하나님 향하여 찾아가서 하나님 만나는 것이오. 하나님과 하나돼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오.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을 찾아 만나서 동행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서 동거 동행하는 그 방편은 뭐이냐?  그 방편은, 방편을 지도하는 것은 성경 말씀인데 그 방편은 성경 말씀으로  자기의 활동을, 동하고 정하는 활동을 그것을 그 말씀대로 바로 잡고, 그  다음에는 그러면 자기의 모든 생활이 그 말씀대로 바로 되고, 그러면 그 속에  내라는 인품의 인질이 그 말씀 화되어서 변화가 돼지고, 그러면 이제 차차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내 자체가 되어져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편은 말씀, 말씀대로의 행동, 말씀대로의 생활, 이런 가운데에서  자체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집니다. 변화 받아 뭐하려고?  하나님 만나려고.

 그러기에 우리의 전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오. 그 방편은 말씀, 말씀으로 행동을 말씀과 일치 시키고, 생활을  일치시키고, 그런 가운데서 내 인질 인성이 말씀과 일치되면 그것이 차차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그 묵상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기의 명상, 마음과 정신의 노력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만 가지고 안 되고 기도해야 된다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가려켜서 기도라 하고, 기도할 때에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을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고 만나고 교제하는 그 유일의 법칙이신, 법칙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요 법칙을 가지고 그래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제일 외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모든 생활을 이것을 말씀으로써 바로 잡는 것이요, 그러면 행동이라면  자기의 그 욕심의 행동이라든지, 취미의 행동이라든지, 습성의 행동이라든지,  물질에 대한 행동이나, 도덕에 대한 행동이나, 신앙에 대한 행동이나 모든  행동이 그것이 차차차 고쳐지는 그것은 잘못하면 우리가 그 고치는 그것으로써  우리의 목적 달성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멈추기 쉽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잡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요 신구약 성경 말씀은 생명이신 주님이  어떠하신 주님인 것과, 또 그분을 찾는 방편인 그분의 뜻을 우리가 아는 것과,  또 그분의 뜻을 아는, 그분의 행동을 아는 것, 그래 가지고 차차 차차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 우리의 생 명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또  우리가 그를 향하여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놓은 것이, 간단 명료하게  가르쳐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목적은 하나님께 두어야 하고,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목적을 거게 두지 않은 그 생활은 그것은 다 죽은  생활입니다. 그건 생명이 없는 생활 생활이오. 하나님에게 둘 때에 우리에게는  생명이 비취어 올 수 있고 생명의 그 은택과 생명의 그 능력의 역사가 우리에게  발휘되어서 우리에게 비추어 올 수 있는 빛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 분 기도 후에 사층에서 권찰회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심방을 가면서도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것을 바꾸기  쉽다 말이오. 그게 우상입니다. "손으로 만든 우상" 그것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사업이 하나님을 향할, 하나님을 향할 마음을 그 사업이 내 마음을 뺏으면 그  사업이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상이오.

 또 자기가 반사로서 학생을 찾아간다 할지라도 학생을 찾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없이 학생만 찾아가 가지고 학생에게 전하려고 하다가 보면  학생하고 자기하고 단둘이만 해서 하나님을 향할 마음을 학생에게 향해지는  그것이 뭐냐? 그게 우상이오.

 그게 바로 음녀같이 주를, "주를 사모하고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있으랴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가 없다"고 없다고 말씀하고 그 다음에 "음녀같이  주를 떠나는 자" 그것 뭐이냐? 하나님을 향하는 그 향하는 마음,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향하는 그 마음 그것을 잘못하면 우리가  만난 사람에게, 만난 물건에게, 만난 사건에게, 이렇게 그 현실에게 자기가  현실하고만 접하고 하나님 버리게 된다 말이오.

 그게 뭐냐 하면 그 행동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음녀같이, 음녀같이,  자기 남편 두고 음녀같이 이러는 것, 그와같이 지금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말이오. 음녀같이.

 그러니까 우리가 요것을 잘 생각하고 언제든지, 우상 만드는 것이나 또 자기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 찾지 못하면 결국은 어디로 돌아가느냐? 결국은 자기에게  돌아갑니다. 결국은 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요새는 그만 지식주의, 성령을 너무, 이용도 목사님 같은 그런 목사님  아주 그때 거석했는데 완전히 매장을 시켜서 이래 해 버렸어. 이러니까 그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찾으면 '아, 저것 불건전한 신비주의다. 신비주의다.'  신비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신비 없으면 기독교 아니오.

 신비의 근본이신 자존하신 하나님, 그래서 그분과 나와의 위치를 잡아.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분은 어떤 분인지? 그분은 자존하신 분이다. 지극히 크신  분이다. 원인이 없으신 지극히 크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시는  분이시다. 저 태평양도 그분이 지었다. 이 우주의 거리가 얼마나 크며 넓은가?  이것도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분을 차차 차차 멀리  소개를 받습니다. 멀리 소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향하여 찾아갑니다.

 그러기에 내가 성경 말씀만 가지고 암만 소개를 받아도 내가 실지로 행동할  때에, 행동할 때에 내 자체가 변화됨으로써 그를 아는 것과 다르다 말이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 자체가 변화된다 말이오. "그러면  진리를 안다" 진리를 행함으로 내가 변화되고 내가 변화돼짐으로써 진리를 알고,  진리를 앎으로써 내가 또 변화되고 내가 변화됨으로 진리를 알고, 그럼으로  하나님이 차차 보여지게 되고 가까워지게 되고 밀접하게 되어지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생명이, 생명에서 우리 전체의 모든 것이 이래 생명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분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는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러기에 심방 갈 때도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잘못하면 그렇기 쉬워. 제  마음에는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내가 며칠 전에도 말했지마는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근심하는 것이 자긍하는 것 교만 하는 것, 나에게 교만을 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징계도 하고 또 자긍, 자긍은 제 자랑하는 것이오.

 이것이 잘 나오고 또 이 교만이 잘 나오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동행하다가 보면  그만 사람 만나면 하나님은 저버리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사람하고 단둘이 야단지기고, 일 만나면 그렇고 물건 만나면 그렇고, 이러니까  그것이 내게 대해서는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이요 내가 저질러 놓은 우상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심방을 가도 잘못하면 학생보고 그저 주님 안 보기 쉽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자기가 거리가 어떤 사람은 시내산 발치에 있거라, 어떤 사람은 시내산  중턱에 올라오라, 어떤 사람은 시내산 꼭대기에 와 가지고 주님을 같이 만나라  하는 것이 달랐다 그거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 일 사십 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 데에서  자기의 얼굴 껍데기가 변화됐다 그랬어. 그래 다른 사람이 보 기를 두려워해서  수건을 가리웠다 그렇게 말했어.

 그러면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키든지 심방 하든지 무슨 활동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이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오. 전도도 그것  위해서 하는 것이요, 뭐 심방도 그것 위해서 하는 것이요, 성경 읽는 것도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요, 내가 행동을 고치는 것도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요, 내  모든 생활 고치는 것도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요 그런 가운데서 내가 차차차  변화되는 것도 변화되면 변화돼 뭐하려고? 변화 암만 돼 봤자 하나님 만나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

 그런고로 우리는 뭣을 하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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