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5 16:41
신앙도둑놈 생활
본문 : 요한복음 14장 1절∼6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근심은 하늘의 근심이 아니고 땅의 근심입니다. 하늘의 근심은 하나님의 성경 지식이 나를 근심케 하는 것이오.
'회개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으로 인해서 내가 근심되는 것이 하늘의 근심이요, 땅의 지식으로 인해서 뭘 먹을까. 뭘 입을까 뭐 어떻게 할까 하는 그런 건 다 땅에 속한 근심입니다. '그런 근심을 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지식하고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이 발라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이 바르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일입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을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그대로 내가 하나님을 지식하는 것이 믿는 것이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면 거기에서 올바른 행위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이렇게 하나님은 보니까 좋고 참 그분 한 분이면 다 되겠는데 다리가 있어야 건너가지? 다리가 없으니까 건너가지 못해. 하나님에게 우리가 나아가 건너가지를 못해요. 이런데 '또 나를 믿으라'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 될 수 없는 그 절단되어 있는 그 점을 이어 주는 중보자십니다.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 아버지 집은 뭣을 말하는고 하니 하나님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중에 제 이위 예수님의 그 신성이신데,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의 신성 그 단독으로가 아니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도성인신해서 구세주로 역사하도록 그렇게 보내신 하나님의 근원을 가리켜서 아버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근원에는 예수님은 안 들어가느냐? 네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근원이시오.
예수님의 신성하면 대속을 맡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면 성자를 대속을 위해서 파송 했고 성령을 대속의 완료를 위해 파송한 하나님의 그 본체를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거기에는 거할 곳 많다 하니까, 살 곳 많다 하니까 면적이 넓어서 많다. 그런 면적 넓은 것도 들어 있기는 있습니다만, 거할 곳이 많다 그 말은 세상으로 비교할 수 없이 모든 것이 세상보다 심히 초월한 그런 세계다 그말입니다. 거기에는 억만 년 가도 권태나치 안하고. 또 억만 년 가도 날마다 새 것이고 새롭습니다. 이러니까 배울 것도 많고 본받을 것도 많고 감동 받을 것도 많고. 기념할 것도 많고, 칭찬할 것도 많고, 기쁠 것도 많고, 즐거울 것도 많고. 소망도 한정 없이 많고, 평안도 많고, 또 가치있는 일도 많고, 귀한 생애도 많고 생명도 많고,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모든 면이 심히 탁월해서 다 완전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그 세계를 한 말로 말해서 거할 곳 많다 그렇게 발표한 것입니다. 거할 곳 많다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아 거기에는 살 곳이 하나도 없더라. 거기 가서 나 살 곳은 하나도 없더라.
거기에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더라.' 자기 살 곳이 없더라 그말은 자기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없다는 그말입니다. '거기는 사람 살 곳이 못 되더라' 그 말은 장소가 나쁘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는 사람에게 도덕적으로나 생명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소유적으로나 모든 행위적으로나 또 향상적으로나 성장적으로나 전진적으로나 아무런 희망 없는 곳이더라 그말입니다. 거할 곳이 많다는 말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가 이 세상에 비해서 무한히 탁월한 그런 완전한 세계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거할 곳이 많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만일 그곳이,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 너희들에게 이 세상뿐이요 무궁세계가 없고 좋은 세계가 없고 이 세상뿐이 기 때문에 어쩌든지 네가 세상에서 평강을 누리고 세상에서 잘 살도록 그런 말 할 것인데 왜 세상을 무궁세계를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하라 말하느냐? 왜 세상을 영원 무궁을 위해서 투자하라고 말하느냐?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서 살지 말고 세상은 영원 무궁의 원인이 되는 세상으로서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서 영원 무궁이 결정되는 이 세상인데, 그 나라는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고 무궁하고 다 생명과 평강이 넘치고, 죽음도 슬픔도 아픔도 죄악도 시비도 모든 의심도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영원을 위한 투자물로 삼고 이 세상을 네 목적으로 삼지 말라고 내가 한 것이다 하는 그말입니다.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그곳에 갈 수 있는 그런 모든 준비를 구비시키는 것이요,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또 그곳에 갈 것을 모두 다 구비시키는 것이요 또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마리아가 잡을라고 하니까 '아직까지 나를 잡지 말아라 내가 아직까지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간지를 못했으니까 나를 지금은 잡지 말아라.' 잠시 부활 후 승천하시지 안 하고 부활 후 잠깐 고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다시 나타나셔 가지고 '마리아야, 도마야, 내 옆구리와 손자국을 만져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벌써 지성소 법궤 위. 하나님의 법을 초월한 완전하신 법을 초월한 하나님과의 관계인 하나님 밑, 모든 피조물 위 하나님의 뜻인 그 법칙과 동행하는 그 위치를 예수님께서 점령하시고, 곧 아버지 우편을 점령하시고 그렇게 다시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이제 그래서 교회의 위치는 자존하신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위 그 중간에 중보되는 그 위치가 교회의 위치인데 그 교회의 위치, 만물의 머리가 되는 만물의 머리가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는 이 위치를 마련해 놓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들을 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 말씀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그 위치를 하나님 아버지 우편이라고도 표시했고 또 만물은 발등상이요,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했는데 그 위치를 완전히 마귀로 더불어 싸워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만족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지공법이 찬동하고 지성법이 찬동하고 하나님이 만족하셔서 평가적으로 이렇게 하나님 다음 피조물 위인 이 위치를 점령한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위치를 만물의 중보 위치, 모든 피조물의 중보 위치, 예수님이 중보자 되셨는데 예수님만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택한 자들도 이 중보 위치를 다 마련해 놓고 내가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도록 내가 영접하겠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가 바로 그날 새벽에 다시 오셔 가지고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래 와 가지고 우리를 데리고 가는 일을 사십 일동안 했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일을 사십 일 동안 부활하신 후에 주일마다 나타나셔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주시고. 또 그 사이로도 늘 동행하면서 자주자주 제자들의 그 위기에 오셔 가지고 깨우쳐 주시는 그런 일을 하시고 그 다음에 사십 일 후에 갈릴리에서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오순절에 온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요, 오순절에 다시 오셔 가지고 당신이 있는 곳에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에 우리도 있게 할라고 오순절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 가지고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우리를 중생도 시키시고 성화시키시고 변화시켜 가지고 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자 격을 만들어 가지고 그 나라로 인도해서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주님에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러면, 예수님이 계시는 그 세계에 우리도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지금 데리고 가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계시는 곳은 어떤 곳인데? 죄가 없는 곳입니다. 의로운 곳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곳입니다. 영생만 있는 곳입니다. 사망이나 고통이나 그런 것이 없는 곳입니다. 꼭 하나님의 형상들만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속성이 같고 지식이 같고 모든 소원이 같고 그 신성과 같이 인격성이 같고 모든 속성들이 같고, 모두가 다 하나되어 거기에는 하나님과 이색 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색된 것을 하나도 없고. 하나님과 다른 다를 이(異)자, 바탕 질(質)자. 다른 바탕은 하나도 없는 꼭 동질 동성 그런 것들만 있게 되는데 그렇게 만드는 것이 지금 주님 계시는 곳에 우리도 가서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같이 새지만 술집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없는 데는 못 옵니다. 또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노름 없는 곳은 못 옵니다. 허랑 방탕한 사람은 허랑 방탕이 없는 곳에는 못 옵니다. 모든 추접하고 더러운 사람은 추접하고 더러움이 없는 곳은 못 옵니다. 굼뱅이나 지렁이나 그런 모든 구데기나 그런 것이 깨끗한 그 비단 요 이불 자리에 놓으면 말라죽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나라의 국민성, 그 나라의 모든 본질과 본성 그런 자로 변화되는 걸 가리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또 거룩하게 성화된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시편 17편에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 가지고 잘 먹고 잘 입고 남은 것은 자기의 혈통 자녀에게 넘겨 주면서 '내가 이거 널 위해서 유산으로 준다' 그렇게 하고 저 먹고 나머지기 그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넘겨 주는 것으로써 만족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주님과 꼭 닮은 거, 모든 게 주님과 닮아서 주님과 이색되지 안해서 주님과 다른 세계에는 살 수 없고 주님과 다른 사상 속에 살 수 없고, 주님과 다른 지식 속에 살 수 없고 주님과 다른 그 속성 속에 살 수 없고, 주님과 다른 사상 속에 살 수 없고 주님과 다른 성질 속에 살 수 없고, 주님과 다른 사랑 없는 세계에 살수 없고 주님과 꼭 같은 그 사랑 세계에, 화친 세계에, 인자와 긍휼의 세계에 거기에만 살 수 있는 그런 자가 되어져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데리고 갈라고 우리를 뭐 가속도로 자꾸 지금 치장해서 뭐 우리를 연단을 시킵니다. 거기 가서 오히려 이 세상보다도 그 곳이 재미있도록 이렇게 우리의 그 악령과 악성과 악습을 쏙 잡아 빼버리면 우리가 그 나라의 성품에 딱 맞는데 악령과 악성과 악습 이것을 뽑기 전에는 그 나라의 국민성에 맞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너희도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곳에. 내가 가고 있는 곳에 길을 알리라 내가 가는 곳에 길을 알리라. 내가 가는 곳을 지금 말하는 것이고 '내가 가는 곳에 길을 알리라' 너거도 데리고 가고 나 있는 곳에 너거도 같이 있도록 하는데 내가 가서 살 그곳에 지금 가고 있는데. 그 가는 길을 너희들이 알리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길을 알리라' 이라니까 '도마가 가로되' 이 도마는 항상 과학자라. 도마는 과학자입니다.
도만 과학자야. 도마는 꼭 육안으로 봐야 인정하고, 자기의 이성 판단이라야 인정이 되고. 또 자기 주관 지식에 맞아야 인정되지 도무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맞추는 거는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라기 때문에 이 사람은 복이 적어요. 이래서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지 안하고는 못 믿겠다' 이라니까 주님이 보이시면서 '이제 보았느냐?' '이제 믿습니다.' 네가 보고,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어라, 그러나 보지 안하고 믿는 자가 보고 믿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 이랬습니다. 그런데 도마도 인도에 가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인도 그 철봉에 달려 가지고 곤봉에 맞아서 온전신이 다 깨져서 피투성이가 돼 가지고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순교해 가지고, 인도에는 도마 교파라 하는 교파가 있어서 인도에 그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참 거기서 일생을 바쳐서 이렇게 살았으나 그 도 전한 것이 극히 협작하고 빈약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거 참 극히 큰 능력입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꼼꼼이라. 내나 '거기서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해 놓고 난 다음에는 나 있는 곳에 너희들도 있도록 내가 와서, 다시 와서 너희들을 데려 가겠다.' 이렇게 말해도 '가는 곳에 그곳을 모르는데 어떻게 길을 알겠습니까?' 그래 말했습니다.
그라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는, 그러면 예수님의 가신 길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가신 길이 어떠합니까? 고생하는 고생의 길입니까? 고생하는 길입니까 죽는 길입니까?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 고생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잘못 알았습니다. 죽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잘못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다 되도록.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다 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다 되고, 또 그 생명을 지키는 것이 다 되는 그것이 아버지 집에 가는 길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 그 길은. 그 길은 뭘로 가는가? 천분지 일이. 천분지 999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거 자기를 사랑하고, 천분지 일을 사랑했으면 그 아버지의 집에 가는, 아버지의 나라에 가는 걸음을 천분지 1인 한 자국을 떼놨습니다. 또 만일 자기의 그 자체가, 자기의 영은 다 그렇게 돼졌는데 영은 그렇게 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영이 됐지만, 영의 병을 요번에 가서 우리가 단단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영의 병은 무슨 병입니까? 영의 병은 무슨 병이라고 배웠지요? 무능병입니다. 영은 주격인데, 영이 자기의 마음과 자기의 몸을 완전히 통치해서 영의 명령에 따라 그 마음이 다 복종하고 몸 이 복종해서 영의 명령애 따라서 복종하지 안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어서 영의 명령에 마음과 몸을 복종시켜서 하나 둘 차차차 복종시켜서 하나도 없이 다 영의 명령에 마음과 몸이 다 복종하면, 다 복종하면 이제 그 걸음을 다 갔습니다. 다 복종하면 다 갔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는고 하니,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백분지 일이 됐으면 백분지 일을 걸어갔고, 백분지 오십이 됐으면 백의 오십을 걸어갔고, 또 백의 99를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됐으면 그 백의 99를 걸어간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에 가시는 데 이제 그 문에 들어가서 그 문에 썩 들어가면서 그 길을 다 가서 아버지의 집에 완전히 문을 열고 척 들어가 가지고 문을 딱 닫고 다 들어가면 어떻게 하는 것이 다 들어가는 것이 되겠습니까? ○○○교회 ○장로님.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 집에 다 들어간 게 되지? 다 드리면. 어쨌는데? 어디다가 드려서? 어디다 드려놨는고? 하늘에 드렸어? 하늘에 드렸어? 광주리에 들여놨는가 어디다 들여놨는고? 네, 맞기는 맞는데 표현을 잘 못 하는 모양이라.
이제 그 전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다 돼 버렸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다 돼 버렸고, 남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뭐입니까? 그게 뭐이지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오. 예수님은 그래서 그 길을 다 갔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길을 알리라' 하는 말씀은 내가 가는 거와 같이 너희들도 너희들의 그 마음과, 영은 주격인데 아직까지 그 마음과 몸을 그렇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영은 무능이 돼 가지고 있고, 이러니까 영은 그 바 음과 몸을 완전히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과 또 순종하는 마음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몸과 또 순종하는 몸과 이렇게 됐는데, 그래 가지고, 그러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과 몸이 지금 그렇게 하는데 지금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거, 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 할 일인데. 주님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이 가는 걸음이요. 우리는 이제 우리의 대표자 주님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그것이 아버지의 나라에 가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의 마음과 몸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지금 언행 심사가 주님을 사랑하는 언행 심사하고, 또 우리의 그 모든 마음이나 몸 전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일을 꼭꼭 다 하고 있습니다. 안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고 있습니다.
다 했으면, 다 했으면 다 간 것이 되겠습니까, 아직까지 갈 것이 남아 있습니까? 살아 있으면 아직까지 더 사랑해야 될 것이 남아 있고, 그 계명 지켜야 될 요소가 남아 있는 것입니까, 다 된 것입니까? 자 그러면 살아 있으면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써 전부이 언행 심사가 다 지킵니다.
다 지키는 마음이요 다 지키는 몸입니다. 그런데 다 지키는 마음으로 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 지키는 몸으로 다 사랑하고 다 지키는 마음과 몸으로 그렇게 하고 살아 있으면 이제 다 사랑하고 다 가지고 사랑하고 다 가지고 지키고 다 가지고 자기의 전부를 가지고 사랑하고 지킨 것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봅시다. 안 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봅시다. 네, 안 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써 생명이 끝났으면, 이제 사랑하고 지키는 것으로써 생명이 끝났으면 이제 자기의 심신은 주님을 다 사랑하는 심신이요, 또 다 순종하는 몸이라. 그러면 그, 심신은 주님을 다 사랑하는 심신이 된 것입니까 또 남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길인데, '내가 가는 그곳을 너희가 알리라' 이라니까 도마가 있다가 뚱딴지같이 '가는 곳을 모르는데 어찌 그 길을 알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 가는 길,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은 뭘로 가느냐? 우리가 가는 길은, 우리가 가는 길은 목적이 어디, 목표가 어딘고 하니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다 되는 것이. 우리의 종착점이요 목표인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그것은. 우리가 그 걸어가는 그 걸음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집에 가는 걸음입니까? 우리의 언행 심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 아버지의 집에 가는 걸음입니다. 가는 걸음. 그러면,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그 심신으로 하루 살고 이틀 살고 한 시간 살고 두 시간 살고 이래 사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언행 심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언행 심사로 살아가는 것은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가 우리 목적지에 종착에 우리가 도달이 된 것입니까,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자, 도달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걸어가는 도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걸어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걸어가는 도중에 있는데 가다가 탈선될란지도 모릅니다. 가다가 탈선되면 그만 떨어져 버리면 그만이오.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안심은 안 돼. 안심은 안 되다가서 이제는 다니엘이 그라면 사자 구덩이 들어갔다가서 사자 구덩이에서 거기서 살아나올 때에 근심을 가지고 살아 나 왔겠소 이제는 됐다, 할렐루야를 부르고 살아나왔겠소, 걱정을 하고 살아 나왔겠소, 다니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나왔을까? 그거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근심 걱정 가지고 살아 나왔어, 왜? 지금은 이겼지만 몰라. 어찌 될지 몰라. 그만 그렇게 지킬 때에, 그렇게 지킬 때에 딱 생명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때는 뭐 국기 배례에 대해서도 뭐 참 공산주의나 뭐 저 왜정 신사 참배나 그런 거 문제없이 이랬지만.
그때 그래 하다가 그만 세상을 딱 떠났으면 완전 성공이 되는 건데. 그라지 안하고 남아 있으니까 그때는 그랬지만 뒤에는 망령을 부려 가지고 어찌 될란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래 지금 고통이야.
'내가 가는 곳에 길을 알리라' 그런고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영육의 요소가 되고 우리 행위가 되고, 이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과 행위와 지식으로 이렇게 완전히 변화되는 요것이 아버지 집에 걸어가는 걸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의 걸음이요. 회개의 걸음이요, 개조의 걸음이요, 썩을 것이 썩지 안 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이렇게 변화의 걸음인 것입니다. 변화가 잘됐든지 못 됐든지 이제 변화의 남은 과정이 없이 끝났으면 이제는 안심이요. 뭐 그거는 큰 구원이나 적은 구원이나 끝나 버렸지만 아직까지 아무리 좋은 구원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미결로 있는 게 있으면 아직까지 다 간 거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 집에 가는 것은 아버지화, 하나님 화되는 것이요. 하나님화되는 거 하나님의 지식화되는 거, 하나님의 능력화되는 거, 하나님의 움직임의 화되는 거, 이러니까 하나님은 능동이요 우리는 피동. 하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그 모형되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에 가는 걸음입니다. 걸음이요 그 길은 주님 사랑하고 그 계명 지키는 것이 그 길을 가는 것이요. 그렇게 화되는 것이 그것이 걸어간 것이라 말이오. 화된 그것이 그만치 천국 시민권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지금 이루어졌다 그겁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그러니까 그들이 모르지요. 알 리가 없지요.
'모르나 내가 가는 길 너희들이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가는 길' 주님이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가시는 길이 주님의 가시는 길이 무슨 길이지요? 요한복음 4장 30절에 보면 그런 말씀했습니다.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그이가 와 가지고 내게 이렇게 저렇게 침노하고 이렇게 하면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할 것 뿐이라'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그가 그 길을 어떻게 갑니까? 그 길이 무슨 길입니까? 이래서 그거는 예수님이 걸어가는 길을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면서 그들에게 '너희들이 걸어갈라 해도 걸어가지 못한다. 걸어가지 못하는데 걸어가도록 내가 길을 만들어 주마.' 이랬어. 걸어가는 길은 어떻게 걸어가느냐? 걸어가는 길은 어찌 가는고 하니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만 걸어갑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한 자국 떼 놀고, 주님에게 그 순종함으로 또 한 자국 떼 놓고 사랑함으로 한 자국 떼 놓고, 또 순종함으로 한 자국 떼 놓고 이렇게 걸어가는 건데. 길이 있어야 걸어가지? 길이 있어야 걸어가지요? 걸어갈 수가 없어.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 그래 묻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다' 말씀하면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 공로를 베푸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건너가는 돌다리, 아주 튼튼한 다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자존자, 창조주에게 가는 길이 없습니다. 못 갑니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이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아버지에게 있는 온갖 좋은 것을 다 받으러 가는 길. 또 가지고 누리러 가는 길 그 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진리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진리라 말은, 진리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진리라 그말은 내가 천상 천하 영원 전으로 영원 후까지의 모든 피조물은 나로 인하여 구원을 얻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결정해 놓으셨다 그말입니다. '진리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외에는 천하에 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27절 끝에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러면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인쳤다 말은 아버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 본체를 말하는 것인데 본체가 모든 창조를, 만물을 창조해 놓고, 모든 피조물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중보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은 영원히 구원 얻도록.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영원히 받아 살도록 그렇게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내가 진리요' 그말은 내가 구세주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중보의 구주가 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 것이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리요' 또 '생명이니' 생명이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하나님과 너거 피조물과의 연결시키는 연결이다 그말입니다. 생명이라 말은 하나님과, 피조물이 창조주와 연결되면 생명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연결되면 생명이고. 피조물이 창조주와 끊겨지면 사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생명이라 그말은 내가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연결이다. 그러면 예수님 없이 연결이 안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연결되는데. 예수님 없으면 연결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가 밧모섬에서 보니까 안팎으로 쓴 두루마리 책을 인봉해 놨는데 그 인봉한 것을 아무도 하늘에서나 땅에서 아무도 그 인봉한 것을 펴거나 인봉을 떼거나 펴거나 보거나 읽을 자가 아무도 없어서 크게 울었습니다.
그 인봉은 모든 것이 범죄로 인하여 완전히 끝이 맺여져 버리고 완전 멸망으로 다시 미래에 전개라는 것이 없논 걸 말해요. 전개가 없이 완전히 인봉됐는데 그걸 아무도 전개할 자가 없더라. 그라니까 천사가 와 가지고 '요한아 울지 말아라. 일찍 죽임을 받은 어린 양이 이 인봉한 책을 능히 펴고 읽고 하리라.'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써 이제 그 인봉이 완전히 개봉돼 가지고 이 역사와 우주에 미래의 전개라는 전개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다시 전개가 시작된 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생명이라.' 그러면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재연결이라, 만물의 대표된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끊어져서 사망이 돼 버렸는데 사망된 이걸 재연결을 누가 했는가? 둘째 아담이 도전해 가지고 끊은 마귀로 더불어 싸워 가지고 마귀를 승리해서. 어떻게 승리했는가? 마귀는 예수님께서 다시 도전하니까 이제 이 마귀는 또 둘째 아담으로 더불어 안 싸우면 안 됩니다. 둘째 아담도 싸워 가지고 범죄케 하면 할렐루야 하고 승리할 터인데 둘째 아담을 하나님에게 범죄하도록 할라고 이렇게 애를 써서 자꾸 뭐 못을 박고 또 창을 찌르고 이라면서 죽일라고 한 거는 아니요. 그래 가지고 지금 하면서 항복할까 항복할까 하고 자꾸 고문과 고행을 도수를 높여서 도수를 높여도 암만 높여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을 요동치 아니하니까 자꾸 될까 될까 해서 자꾸 이라다가 딸칵 숨이 넘어 갔습니다. 딸칵 그만 숨이 넘어갔다 말이오. 이제는 마귀란 놈이 더 시험할 수가 없어. 이제는 뭐 더 시험할 수가 없이 완전히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나 버렸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예수님께서 '할렐루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그 연결되는 그 연결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자기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예수님을 힘입지 않고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기도 못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신령한 데 들어가는데도 자꾸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길로 삼아야, 예수님의 공로를 밟아야 건너가지 예수님의 공로를 밟지 안하면 못 건너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죄를 자기가 해석하면서 나를 대형해서 주님이 대형해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사죄를 주셨으니 이제 이 사죄는 나를 대형했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 하는 것을 믿습니다. 또 나는 다시 죽어도 죄를 지을 수가 없다 하는 것을 믿습니다.
자꾸 예수님의 그 대형을 새김질하면서 자기 속에 새로 깨달아짐이 일어날 때에 아버지와 점점 가까와집니다. 대행을 새김질하고 대화친을 새김질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힘 입었을 때에 아버지에게 건너가는 길이 생겨집니다.
이래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좁은 생명 길에 우리는 담대히 나아간다' 이랬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생명길이 뭐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그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그 휘장이 쭉 찢어지지 안했습니까? 그 하나의 모형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공로를 자꾸 생각해야 이 길이 쭉 나선다 말이오. 예수님의 공로를 생각해야 아버지와 나와 그 사이에 가는 길이 대로가 환하게 열려진다 말이오.
그러고 또 '진리라'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 구세주로 딱 정해 놨기 때문에 이분을 내 구세주로 정했기 때문에 이분만 모시고 가면 문제없어. 이부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그러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주십시오. 이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주십시오. 성령도 예수 이름으로 주십시오.'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인을 탁 쳐 놨기 때문에 예수의 도장만 받으면, 예수님만 모시고 가면 뭐이든지 다 됩니다.
그래서 '진리라' '생명이라'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만 생각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인치신 내 구주라. 이거 가서 자꾸 예수님을 새김질하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살을 이라 같이 자꾸 먹고 양식으로 삼아 먹고 마시니까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영생하는데. 그 피와 살은 뭐이라 했습니까? 피와 살은 참 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피와 살을 먹는 자에게는 그 속에 뭐이 있다 했습니까? 그 속에 영생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꾸 주님만 사모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이 됩니다.
주님만 사모하면 자꾸 연결된다 발이오. 주님만 생각하면 자꾸 연결됩니다.
주님의 대속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생각하면 주님과 나 사이는 길이 환하게 날 것이고 구불러가도 가고 누워가도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구주로 하나님이 인쳐 놨기 때문에 주님만 모시고 주의 이름만 딱 거기다가 꺽어 놓으면 뭐든지 다 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주님 알면, 주님 알면 아버지 압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나타내서 우리에게 보여 줬습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몰랐어. 예수님을 보고 아는 사람은 알았는 데 모르는 사람은 몰랐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알았고 시므온과 안나도 도성 인신해서 예수님이 나사렛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을 때에 시므온과 안나도 강보에 쌓인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이신 구세주가 온 것을 알았고, 또 목자들도 알았고 그 나다나엘도 알았고 다 그분들은 알았습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알았는가? 그분들은 주님을 보는 눈이 있어서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법사요 제사장이요 대제사장이요 서기관들이요 이렇지만 그분들은 주님을 보는 눈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래 알았는데 빌립은 예수님을 보고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본 사람 도 있었고 못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본 사람들과 못 본 사람들이 어째 서 못 봤는가? 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보는 눈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도 가지지 못했고 하나님 보는 귀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눈과 그 귀를 가졌으면 좋을 것인데,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듣지만 귀 없는 자는 못 듣습니다. 그눈이 밝은 자는 보지만 눈이 안 밝은 자는 못 봅니다. 그러면 거기에 눈이 뭐입니까? 그 눈이 뭐인지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이소. 다 몰라요?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이 학생들이니까 배우면 좀 겸손히 좀 순종해서 배워야지. 그러면 그 눈이 뭐인지 아는 사람? 여기는 아는데 저 뒤에는 모르는구만. 눈이 뭐입니까? 신앙 양심이 눈입니다. 신앙 양심 없는 사람은 바리새 교인도 몰랐고 서기관도 몰랐고 대제사장도 몰랐고 다 몰랐습니다. 아. 예수님이 오셨지만 몰랐어. 그런데 그 신앙 양심에 눈 있는 사람들은 양심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다 벌써 들었고, 들어서 알았고, 목자들도 저 성 밖에서 양 먹이다 듣고 와서 경배했고, 또 동방 박사들도 저게 외국에 가 있었지만 또 보고 와 가지고 경배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 양심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또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간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신앙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앙 양심 행위가 없으면 신앙 행위는 천리 만리 멀고 천부당 만부당하고 어림도 없습니다. 신앙 양심 행위면 신앙입니까? 아니오. 신앙 양심 행위와 신앙 행위는 다릅니다. 신앙 양심 행위는 인적 요소 그 인적 요소의 신앙 양심 행위를 할 때에 성령이 보시고 다 구비하게 됐을 때에 인정하는 인친 표.
성령의 인친 표를 받습니다. 성령이 인정을 할 때에 그때 영감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도 구비치 안할 때는 성령은 동참하지를 못합니다. 동참하지는 못하고 안타까와서 자꾸 사람들을 통해서 이리저리 깨우치도록 이래 하는데. 그때 깨우치면 즉시 성경이 그이에게 인정해서 동행해 주실 때에, 그것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명중됐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뜻에 맞을 듯 맞을 듯 했지만 아. 요쪽에서 오니까 삐끄러져, 지금 북쪽으로 삐그러졌는데, 북쪽으로 삐끄러졌는데 차차 오니까 주님은 좋아서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들어가면 네가 지금 한 가운데 과녁을 명중한다.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자꾸 인제 명중된다.
명중된다 하는데 픽 지나가 버렸다 말이오. 그만 이래 그만 남쪽으로 식 지나가 버려. 남쪽으로 지나가니까 이제 또 틀렸다. 이제 남쪽으로 지나갔으니까 북쪽으로 좀 옮겨라. 자꾸 이라니까 또 쑥 지나가 버렸어. 이래 놓으니까 안타깝다 말이오. 요라다가 하나님의 뜻에 딱 명중됐을 때에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오. 그것이 영감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이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기 주관 가지고 뜻에 맞춰 할라고 하는 그것은 지금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뭐 세상에 이런 것을 소망하고 저런 것을 소망하고 다른 사람을 꾀울라고 다른 사람에게 인기 올라갈라고 별별 마귀란 놈이, 하나님 찾는 데도 이거 저거 딴걸 소망 두면 그만 삐뚤어졌다 말이오. 그러면 그거는 신앙 양심 행위가 아니오. 그건 신앙 양심 행위가 아니요 외식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외식하는 신앙 행위요, 외식하는 신앙 행위요, 신앙 양심 행위는 진실한 신앙 양심 행위인데, 그 신앙 양심 행위라 말은 자기가 자기를 볼 때에 거짓이 없이 진정 자기가 자기를 볼 때에 자기 진심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옳게 할라고 애를 쓰는 고 마음이 신앙 양심 행위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를 했지만 심령이 어두운 사람, 또 아직까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신앙 양심 행위를 했지만 그걸 몰라서 모르니까 또 요리 삐끄러지고 조리 삐끄러지고 자꾸 삐끄러지요. 요 삐끄러지니까 삐끄러지니까 세월이 오래 걸린다 말이오. 그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은 오래 안 걸려. 성경을 많이 본 사람 요리 삐끄러지니까 아 요거다. 요래요래 가지고 빨리 영감 행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성졍을 모르는 사람은 영감 행위에 나아가기가 좀 어렵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은 영감 행위에 나아가기가 좀 쉽습니다. 영감 행위에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았을 때에 들어맞았으면 그게 죄가 아니요. 죄가 아니요 들어맞았으면 의가 되는 것이고 삐뚤어졌으면 그게 죄입니다. 암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써도.
이라면 딱 명중되면 성령이 인정합니다. '됐다' 인정할 때에 성신의 인친 표를 받습니다. 이래서 요한계시록 7장에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기까지 기다려라' 이 인을 맞기까지 여기 인을, 하나님의 도장을 꾹 찍어 맞기를 기다려라. 그러면 그 인이 자꾸 하나하나 행위에서 자꾸 이래 가지고 자꾸 인정 인정돼 가지고 인정되는 것인데, 개별 행위에는 그것이 인정이 될 때에 성령이 인정해 주면 영감 행위가 됩니다. 그 영감 행위는 신적 요소입니다.
영감 행위가 되면 그게 막바로 뭐이냐? 그것이 온전한 믿음 행위니 온전한 믿음 행위는 뭐인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능치 못할 것이 없고, 그것이 사데 교회에 말하기를 너의 행위에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하는데 그것이 온전한 행위입니다. 고 온전한 행위가 뭐이냐면 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것이 성화가 되는 것이요 건설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하는 데는 뭐이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 하고 뜻을 다해 자기 요소를 거기에다가 다 기울여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고럴 때에 비로소 그 영생이 된다 이래. 영생이 된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그러면 영생이 된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가 성화라든지 영생이라든지 이거 능치 못함이 없는 그런 지극히 큰 능력의 믿음이라든지 이런 거는 다 이렇게 성경에 분명히 말하는데 사람들이 에누리 해 가지고 근방에 가지도 안하는 거 이거는 신앙 양심 생활도 되지 못하고 신앙 주관 생활, 신앙 외식 생활. 신앙 도둑놈 생활, 이 도둑질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외식적으로 이렇게 해재끼는 그것도 자꾸 신앙생활이라.
이러니까 뭐 순교자라고. 언제 순교자 유가족의 뭐 어떻다 하기 때문에 나 돈 안 줘요. 주기 싫어. 왜? 순교자 유가족이라 하는데 순교자 유가족이라는 것을, 그 전에 우리 6.25지나고 난 다음에, 6.25전인가? 6.25지나고 난 다음에 우리 한국에서 순교자 유가족에 대해서 그 일을 보고 고 일을 누가 봤느냐 하면 ○○○목사님과 여기에 ○○○권사님과 그 두 분이 그 일을 맡아 봤습니다.
그분들도 탄식하기를 이 순교자라고 다 이름을 기록해 놨지만 참말로 순교자는 별로 없는데 이거 다 모두 세상 정치하다가 죽으니까 그거도 순교자라고 그만 그래 하딴 우리가 똑똑히 모르니까 그 뭐 순교자라고 내비 둬라' 이라는 것이지 그런 거는 정치 운동하다가 하나님 앞에 벌받아 죽은 것이지 순교자 아닌 것입니다. 순교자는 살았을 때 순생이 없으면 순교가 안 됩니다. 순생은 주를 위해서 항상 죽음의 생활을 걸어가는 그것이, 생명 내 놓고 걸어가는 그것이 순생 생활인데 순생 생활의 그 결과가 순교가 되는 것이지 순생 생활 하나도 없고 제 좋은 대로 다 사는 사람이 무슨 순교가 되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똑똑히 하나하나, 이제 요한복음 14장 절로부터서 7절까지는 배웠으니까 잊어버리지 말고, 또 가서 익히고. 자꾸 배운 대로 자꾸 익혀서 이라면 하나님도 재미있고. 그라니까 나 역시 자꾸 가르쳐 줄 것이고, 또 나도 가르치기 재미있고, 이라지만 안 믿고 뭐 쓸데없는 말로 자꾸 이래 듣고 하니까 새로 듣기만 원하고. 하나도 믿지도 안하고 행하지도 안하고 듣기만 원하니까 그러니까 주님도 가르칠 재미없고 나도 가르칠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과를 요번에는 처음으로 했는데, 처음으로 했지요? 요번에 처음으로 가르쳤지? 요 다음에 두 번째 가르칠 터인데. 처음으로 가르친 거,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으로 산다. 그거 뭐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사람이 두 종류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그것이 사람이 두 종류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일생 동안 세상 학문 다 배운 것보다도, 다 배우고 이거 모르는 것보다 다 몰라도 이거 아는 것이 더 지식이 그거보다 억억만 배 낫습니다. 억억만 배 낫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으로 건설돼 나간다 아, 이거 아는 것이 천하에 있는 지식 다 똘똘 뭉쳐 봤자 그 근방에 가지도 못해.
이런데, 이 지식을 가르치는 데는 부모네들이 '야, 그거야 뭐 새벽 기도 가나 안 가나 어쨌든간에 오늘 학교 빠지면 안 된다.' 예수 믿는 부모네들이 그 따위 행사한다 말이오. 그거 못 써요. '야. 새벽 기도 나가면 좋고 성경 읽으면 좋기는 좋지만 너 공부 있지 안하나? 공부를 해야지. 그러니까 그만 새벽 기도 좀 냅두고 숙제 많을 때는 숙제해라.' 또 내일 시험친다 하니까 '오늘 주일날 공부해라' 이렇게 말해 가지고 자꾸 망친다 말이오. 자기 자손을 누가 망칩니까? 그 부모가 망치지 다른 사람은 망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얼마나 가르쳤는지? 그 학생들에게 이 두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과 그 사람들은 과학과 근검 절약 가지고 살고, 우리는 하나님 사랑하고 그 계명지키는 것 가지고 살아. 그 허무한 것같지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나타나거든요.
녜, 어짜든지 아는 데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아는 데에서 믿음이 나와 알고, 그 다음에는 인정해야 돼요. 인정하고, 실행하면 사람 변화됩니다. '이미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행한다 그말이오.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화 된다 말입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뭐 많든지 적든지 성화돼요. '진리를 알지니' 그라고 나면 진리를 새로 깨닫게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짜든지 새벽 기도 나옵시다. 새벽 기도 나오는 사람 신앙과 나오지 않는 사람 신앙과 세상을 이기는 것과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 다릅니다.
앞으로 하루 30분 기도 안 한 사람 이제 앞으로 큰 일 닥칠 때 그때에 죽을 욕 볼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기도한 사람은 그때에 유유하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서 간절히 작정하는 기도해요. 우리 속에 도둑놈이 들어 있어요. 우리 속에 도둑놈이 들어 있어, 안 믿으며 믿는 체 하는 고거 거짓부리 그걸 잡아 죽여야 돼. 그게 뭐이냐 하면 성경에 로마서 6장에 잡아 죽이라 이랬어. 고 옛사람은 죽여 버리라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