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노정


선지자선교회 1982년 2월 25일 목새

 

 본문 : 창 13:1-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지난밤에 신앙 노선에 대해서 우리가 증거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증거를 지나간 한 역사의 한 토막으로 이렇게만 보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신앙의 표본입니다. 믿음의 조상입니다. 롯은 믿는 자로서 실패하는  노선의 표본입니다. 롯은 믿음에 실패한 자의 조상입니다. 이 두 사람이 걸은  길은 신앙의 노선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말씀은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얻는 이 믿음의 본질과  본성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가려고 하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는 것을 보여 주시는 믿음의 성격을  가르친 것입니다.

 어제 증거한 이 노선에 대해서 세 가지, 또 하늘나라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에 대해서 한 가지, 이렇게 네 가지를 오늘 아침에 다시 말씀을 할 때에 잘  기억하기를 부탁합니다.

 롯과 아브라함은 정 대조의 길을 걸었습니다. 대조의 길을 걷는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고 롯에게는 어떻게 하신 것을 밝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도 내나 그 하나님 그 분이시요, 또  그때에 유혹하는 마귀가 지금도 유혹하고 있는 것이요, 또 그때에 택한 자나  지금 택한 자나 은혜 역사가 조금 차이만 있는 것뿐이지 꼭 같습니다. 그때도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지마는 실은 예수님의 공로를 다 미당겨 입었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가 이미 설정된 지나간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미당겨 힘 입었고 오늘은 이미 베풀어 놓은 지나간 공로를  우리가 힘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과 꼭 같습니다.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롯의 노선을 걸으면  롯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심과 같은 그 역사를 하시고 아브라함이 걸은 노선을  걸으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심과 같은 그런 역사를 그 사람에게 하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버리고 유익을 본 사람입니다. 유익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유익을 빼앗긴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 자기의 형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형편을 그다음으로 생각하다가 그만  롯이 날래게 서두른 바람에 손해를 봤습니다. '네 앞에 좋은 곳이 있으니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겠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다음에 생각하다 보니까 그것을 먼저 주장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좋은 곳을 몰라 그런 것 아닙니다. 소돔 그 들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자기가 그것을 먼저 취할 수가 없으니까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겠다' 했는데 그만 롯이 그만 좋은  곳을 차지해 버렸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다가 손해를 봤습니다. 롯은  하나님보다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뒤에 생각하다  보니까 롯은 빼앗았고 아브라함은 뺏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주시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구하지 아니하면 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제대로 됐지 주시지는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손해본 것은 여러 배 백 배를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 때문에 손해본 것은 당신 때문에 손해본 것을 그렇게  눈감고 모르는 척하고 계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도 인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 때문에 누가 손해보는 그런 일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방어를 합니다. 만일 자기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하면 그 일은 자기  힘이 있는 한 그것을 보상해서 빚을 지지 아니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빚지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자기 때문에 손해본 그것을 자기가 보충해 주지 못했을 때에는 죽는 날까지  그게 해결되기 전에는 빚진 무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일을  보지 않도록 합니다. 그저 내가 어떻게 됐으면 줬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손해를 봄으로 그로 인해서 내가 유익을 본 그것을, 갚을 수 있으면 고맙게 갚되  하나에 하나를 갚아 주면 그 사람이 나에게 후대한 데 대해서는 사건적으로는  무슨 물질로나 그런 것은 내가 갚았지마는 그 사람이 내게 대해서 후대한 것은  내가 빚이 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손해를 봤으면 하나는 하나로  물질의 그 빚을 갚고 하나는 그가 나에게 후대한 그 후대의 빚을 갚기 위해서  하나 갚을 때에 둘을 갚는 것이 그것이 우리 인격자의 행위입니다.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하여 손해본 손해는 반드시 그보다 더 많이 갚아  줍니다. 여러 배 백 배라 이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나와 내 도라 말은  진리를 말하는데 "나와 내 도를 인하여 무엇이든지 손해본 자 빼앗긴 자는 여러  배 혹 백 배 주겠다" 여러 배 준다 말은 하나 손해 봤으면 하나 주면 물질면은  하나님께서 다 갚으셨지마는 그에게 섬기는 그 면은 하나님이 빚이 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여러 배를 주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나 물질이나 가정이나 사업이나 가족이나 뭐  어떤 것이든지 사건이든지 그것을 자기가 먼저 생각하고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지' 하여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것을 생각해서 처리하는 이 길이 있고,  또, 그러면 그걸 닥치니까 그것을 하나님은 어쨌든지 내비두고 '이게 어찌  되나?' 하고 그것부터 먼저 생각을 하고 하나님은 그다음으로 자기가 그것  생각해서 거기에 대해서 할 대로 해 놓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참 어떠냐? 하나님이 섭섭해 하느냐 기뻐하느냐?'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순서로 롯은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부터 먼저, 그 일이 급하지요. 사건이 생기니까 급합니다.

사람이 중얼거려 쌓아니까 급합니다. 또 자기의 업체가 독촉을 하니까 급합니다.

또 자기 가족들이 자꾸 이렇게 호소를 하니까 형편의 어려움을 닥쳤으니 대단히  좀 시급합니다. 이렇지마는 그것을 둬두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서 '하나님 이  일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하나님부터 먼저 찾아보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의논을 하고 그다음에 바빠도 그 다음으로 그 일을 착수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에 동행을 해 주십니다. 그 일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떤 사건이든지 그 사건을 뒤로 두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  만나고 의논하는 자, 하나님을 앞세우는 자 이자의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동행해  주십니다. 그 일부터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다음으로 생각하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지를 아니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어떤 것이든지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자기 단독이 되겠다고, 자기 단독이 '이것이야 내가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  또 하나님에게는 기도하지 않고 자기 혼자 그 일을 하는 것,  롯은 그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토지 좋고 조건 좋고  사람들만 단합하면 된다고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오. 하나님에게 기도 없이 한  것이 그것이 롯의 걸음입니다.

 이 걸음을 걷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방어를 모든 협조를 하지 않습니다.

모든 방어를, 그것을 와서 해하려고 멸하려고 오는 것이 그 원수가 천천만인데  오는 원수를 하나님이 막아 주지 않습니다. 막지 않소. 모든 해를 방어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습니다. 롯은 그 길을 걸었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구하여 모든 일을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들어 주시되, 들어 주시되  그것을 감당할 만한 실력에 따라서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은  실력을 따라서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에게 구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주면 마치 어린아이가 칼 달라 할 때에  칼을 주면 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책임한 일을 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가 뭐인지도 모르고 옆에 발간 물이 있으니까 그걸 달라고  하는데 그것 먹으면 지금 즉사하는 독약을 지금 풀어 놨는데 그 독약을 마시고  싶다고 자꾸 달라 한다고 '그래, 네가 달라 하니 한 그릇 먹어라' 이렇게 퍼  주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서 유익이  되고 해가 되지 아니할 그 면을 하나님께서 먼저 조성하시고 그다음으로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간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한 번 말했다고  하나님이 못 들으신 것 아니오. 한 번 말해도 못 듣지 않으시고 다 한 번만 해도  다 들었습니다. 주십니다.

 그런데 과부의 이 기도하라고 과부의 열심있는 계속하는 그런 기도의 방편을  가르친 것은 하나님에게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차차  차차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감당할 만한 그 성화가 이루어지는 그 역사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세 가지, 하나는 하나님에게 간구하면 그 간구하신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맨뒤에 와서 설교 다 하고 난 다음에 오면 뭣 하는고? 오늘 나한테  한번 와요. 저 ○집사님) 자기가 하나님에게 간구한 것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금은 이것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게 아니라 지금은 내게 주시면  내게 도리어 해가 되기 때문에 안 주시니 받을 만한 실력이 되도록 나를  반성하면서 내가 성화돼야 되겠다' 요 면을 생각하는 게 좋겠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왜 안 듣습니까? 들으시지마는 내가 감당할  만한 실력이 있다고 하면 지금 주는 것보다 더 줘서 좋을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장소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장소와 그런 시기와 그런 종류의  때 그런 사건의 때에 당신이 주시려고 머물러 있구나 하는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간구하지 않는 그 일에는 그저 저 혼자 했지 하나님은 돕지 않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또, 그러기에 자기에게 해하는  것이 오는 것을 하나님이 방어해 주지 않습니다. 또 그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구하지 않은 걸 주면 제가 잘나서 제 힘으로 됐다고 더 자기주의 자가 될  것이고 구하지 않은 걸 줘 놓으면 누구의 덕택이라 누구의 덕택이라 무슨  덕택이라 해서 점점 불거져 나갈 터이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게 롯의  길입니다.

 하나님에게 간구할 때에 하나님은 단번이라도 그 기도 다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주시지 않고 지체되는 것은 자기가 그것을 받을 만한 그런 자격이 없는 자요 또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자꾸 하라고 이렇게, 계속해서 하라고  부탁하신 것은, 남의 집에 무엇을 얻으러 가도 처음에 그 집에 얻으러 갔으면 그  주인의 성미가 어떤지 그 집 형편이 어떤지 전혀 모릅니다. 모르지마는 한번  가니까 '아직까지 형편이 안 되니까 혹 뒤에 와 보십시오.' 이러니까, 한 번 가  보니 그 집 형편을 분위기를 알겠고 그 주인의 성미를 알겠고 두 번 가 보니까  알겠고 차차 차차 가니까 주인과 자기와 사람이 통합니다. 사상이 통합니다.

정신이 통해요. 이러니까 주인과 자기와 차차 서로 마음이 통해서 비위가  맞습니다.

 그럴 때에는 이제 주인이 시험해 보고 '이 사람에게는 이 돈을 빌려 줘도  떼이지 않겠다. 또 이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내가 한 번 협조해 줘도 뒤에 내가  큰 낭패를 당하지 않겠다.' 자꾸 그래 되는 것이라 말이오. 그것 뭐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나 사람과 사귀는 것이나 꼭 같습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은 기도로 무슨 일을 해 나간 사람이고 요것이 제일 말단, 또  하나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 것, 그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럴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일에 동행해 주십니다. '야,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도도 해 주시고 또 '이러면 네가  이런 낭패를 당한다. 앞으로 이런 애로가 있다.' 이렇게 미래사를 알려도 주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그보다 하나 더 남은 것은 주님 때문에 손해본 것, 주님 때문에 손해본 것,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 그걸 생각했는데 롯이  재빨리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주님을 먼저 생각하다가 주님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됐습니다. 주님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됐어.

 손해볼 때에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 배  줬습니까 백 배나 줬습니까? 아마 여러 배 백 배나 된 것 같애요. 자기 집에  파수하는 사람이 삼백열여덟 명이나 된 것 보면 상당히 거부가 된 것입니다.

삼백열여덟. 요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따라 나갈 때에 무엇이든지 그것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을 먼저 만나십시오. 주님을 먼저 만나야 됩니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다가  아브라함처럼 롯과 같은 사람이 재빨리 서둘러서 그만 집어채면 어짤라고?  그러면 더 좋지. 그러면 더 좋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있을 때에 '야, 이것 가정 문제냐 하나님이냐?' 생각할 때에  가정 문제를 먼저 자기, 자기 속에 그것을 보다 더 크게 여기고, 앞서 생각한다  말은 크게 여기고, 먼저 생각하고 그게 더 중요하고 그런 것이 하나님보다 앞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롯의 길입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부터 먼저  생각하고,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더 중요하고, 아무리 큰 일이라도  하나님이 더 크고, 이것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 기억하고 있는데 거창읍교회 원 집사님이라고 원용봉  집사님이라고 있습니다. 원용봉 집사님이지, 이름이? 서봉월 집사님 있습니까?  손 들어보소. 서봉월 집사님? 원용봉 집사지, 구두방 하는 사람? 원용봉 집사의  간증하는 말을 한 마디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계를 맡고 있었는데 자기  경험으로서는 꼭 자기가 써야 될 그 일이, 돈에 대해서 자기 집에나 자기  사업에나 써야 될 그 일이 딱 생기고 난 다음에는 재빨리 이어서 교회에 쓸 일이  있답니다.

 이런데 자기가 회계를 맡았는데 교회에 재정은 없고 자기에게 있는 돈이  자기에게 쓰면 딱 들어맞겠는데 이 돈을 또 교회 쓰면 딱 들어맞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꼭 그렇게 자기 경험으로서는 둘이 함께 나선다  그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그렇지마는 교회에 쓸 돈이 지금 없는데 이걸 안 쓰면 교회 일이  안 되는데 내 일 되도록 하려고 내게 쓰고 교회 안 되도록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인제 교회 빌려 입체해 놓으면 갚기는 갚는 것이니까, 교회서. 그럴 때에는  '어라, 내 일부터 먼저 할 수야 있겠느냐?' 자기 일을 버려두고 교회 일 꼭  하고,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교회에서 그것도 마련해서 받게 되고 받고 나서  보면 그 뒤에 자기 일 그 일도 잘되는데 그 일을 돈을 교회 먼저 쓰지 않고 자기  일을 그때 먼저 봤으면 그 일이 뒤에 가서 보면 꼭 안 되고 낭패될 만한 그런  일이 있었다.

 자기는 교회 회계 집사를 맡아 가지고 하면서 신기한 일을 자기가  본 것을  봉산교회 간증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봉산교회서 그 간증을 했어요  모두 간증하는 시간에 그걸 간증을 원용봉 집사님이 간증을 했어요. 그때 내가  간증을 들을 때에 '네가 신앙을 바로 잡았다. 저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갖는데  뒤를 보자.'  이래서 제가 여기 부산 오고 난 다음에 한 칠팔 년 됐는지 그때에 거창 사람  하나 만나 가지고 '원용봉 집사님의 형편이 어찌 됐느냐?' 하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물어보니까 그 사람이 그때 내가 묻는 데는 뭐 아주 그거는 귀한  사업인데 운수 사업도 하고 뭣도 하고 뭐 과수원도 있고, 그때는 재산이  없었는데 아주 부자가 됐다고.

 그 부자가 지금까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다음에 신앙이  변해지면 땅의 것은 변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이 변해지면 하나님이 그에게  대해서 하시는 일도 변해집니다. 제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이든지 아브라함의 걸음은 급하거나 큰 일이거나 아무리 급해도 그 급한  것보다 하나님 만나는 게 더 급하고, 아무리 큰 일이라도 그 큰 일보다 하나님이  더 크고, 이래서 하나님을 앞세워 먼저, 이것이 제일 일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러면 이 급한데 이것부터 생각 안 하고?'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 만나는 게 더 급해. '이것 지금 큰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 벼락보다 하나님 벼락이 더 커, 하나님을 앞세우고 먼저 생각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해 준다 했습니까? 어떻게 해 줍니까? 그것 오늘 기억하라  했는데 어떻게 해 주지요? 그것 모르면 안 돼요. 뭣이든지 그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해 준다고 했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동행해  줘. 그것에 대해서 동행을 해 주십니다. 함께 해 주셔.

 의논도 함께 하고, 모든 사고 날 것도 함께, '야, 이것 사고 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도도 해 주시고, 또 힘으로 돕기도 해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나님 먼저 생각하다가 그만 날쌔게 날뛰는 옆에 사람 때문에  낭패가 당했습니다. 그게 낭패를 당했어. 하나님 먼저 생각하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낭패를 당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하지요,  저 뒤에? 모르면 안 돼. 요게 우리 생활에 척도인데, 잣대인데, 요 잣대로 딱딱  재어가며 살아야 되는 데 이것 모르고 그냥 흐리멍텅한 그런 신앙 걸음 가지고  안 됩니다.

 하나님 먼저 생각하다가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손해를 봤습니다. 손해를 봤을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요? 여러 배! 백 배!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그 사람이, 공연히 나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래도 그 사건에서 그보다  나를 생각해야 되고 나한테 의논을 해야 되고, 일 해 놓고 뒤에 의논하는 것  '이것 보고 안 하면 방해지길라? 섭섭해 할라? 삐꿀라?' 해서 사후 고하는 것,  사전에 고하는 것, 사전에 고하되 '위급한데 언제 그때 고할 여가가 어데  있는가?' 위급한데 당신 먼저 찾을 것. 네, 당신은 예민하십니다. 우리 인간보다  예민하십니다. 그저 넉넉하게 뭐 당신부터 먼저 의논하고 그다음에 해도 될 만한  그런 일, '다급한데 그때 언제 하나님 찾을 여가 어데 있노?' 그럴 때에 당신  찾는 것 당신 아십니다.

 뭐 급하다고 하나님께서는 공간 전부 활동계 다 당신이 주권하고 계시는데 칼을  들고 요래도 그만 더 이상 못 나가구로 딱 중단해 버리면 요래 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요래 가지고 있게 되는 것인데 당신이 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데 이분을  아는 분은 먼저 그분에게 의논합니다.

 그분을 먼저 생각하다가 손해 안 가고 그 일대로 있으면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고, 먼저 생각한 그것 때문에 손해 갔으면 주님이 여러 배 백 배로 갚아  주시고, 두 가지.

 당신에게 기도하면 당신이 당장 들으시고 그에게 주고 싶지마는 줘서 도리어  역효과가 날 때에는 '야, 내가 주기는 주는데 네가 이것을 받아 가질 수 있는  때가 되면 주지마는 지금은 아직까지 이르다. 지금 주면 네게 손해가 되겠다  네가 받아서 가질 만한 그런 실력도 있다마는 때와 장소가 지금보다는 요다음에  더 좋을 때가 있다. 더 좋은 장소가 있다. 또 네가 지금 간구하지마는 그게  뭐인지 모르고 네가 간구한다.' 그러니까 한 번 두 번 이렇게 간구하는 데에서  주인이신 하나님하고 자꾸 접촉을 하니까 자꾸 사람이 달라집니다.

 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교훈보다 그 사람을 접촉하는 것이 제일 빠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뉘 집에든지 가정부로 들어가서 석 달만 있으면 그만 그  가정에 주인과 보통 생활에는 같은 수준입니다. 대학 교수하고 무식한 사람하고  같이 이렇게 한 서너 달 살면 눈치있는 사람은 일반적인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언어도 같은 고등 언어를 쓰고 고급 언어를 쓰고 이제 모든 견해도 그러하고  태도도 그러하고 당장 따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접한다 말이오. 하나님을  접하니까 그만 잠깐 하나님 따라서 하나님같이 돼 버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질  만한 시기가 왔고, 자격이 됐고, 벌써 자기의 생활 분위기가 됐다 말이오.

 그런고로 하나님 먼저 생각하는 것, 그럴 때에, 먼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고, 먼저 생각하다가 손해봤을 때에는 반드시 여러 배 백 배 보상해  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자기에게 적절하게 유익하도록 참 그것을 갚아  주시고, 롯은 그렇지를 않았어. 하나님보다 그것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하고 먼저 취했어. 이랬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 버렸어. 과거에는  롯이 하나님을 잘 섬겼던 사람인데 자기 때문에, 가족 때문에, 가정 때문에,  자기와 사귀고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친한 사람들 때문에, 자기의 사업 때문에  하나님 버렸어. 하나님 버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걸 멸해 버리고  말았어. 완전히 멸했습니다. 당장 멸하지 않았지만 서서히 다 멸하고 말았어.

 자기는 망하는 것을 데리고 가족들이 좋아서, 그다음에는 롯은 참 기분이 안  났고 기가 차서 실쭉하게 했을 것이고 롯의 아내는 뻔합니다. '아이고,  여보시오.' 이래 쌓아면서 맛있는 것 해다가 '여보, 이것 잡숴 보십시오. 오늘은  양이 어떻소. 뭐 소가 어떻소.' 좋은 소식도 짜다라 이래 전해 쌓았지마는  롯에게는 기분이 안 났을 것이라. 그뒤에 보면 롯이 풀이 죽어 가지고 기분이  나지 아니한 것이 환하게 보이고 있어.

 그분이 천사가 갔을 때도 보니까 성어귀에 갔어. 성어귀에 거기 뭐한다고  섰겠소? 성어귀에 거기서 앉았는지 섰는지 거기 턱 퍼대고 앉았습니다. 그게  뭐이요? 삼촌한데 가지는 못하고 거기 지금 사람이 그리워서 자기 마음에 좀  요기를 해 좀 주고 갈급을 면해 줄 만한 그런 의인이 그리워서, 의인이 그리워서  거기 가서 기다리고, 그저 가다 오다 이런 사람 만나면 이 사람하고 말 한마디나  들어보고 '뭐 어떨까?' 갈급해서 그래 있다가 천사가 가니까 말을 들어보니까  다르거든. 만류해 가지고 죽자껏 만류했다 말이오. 롯의 형편을 보면, 또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험해 봐도 그래.

 그러니까 목축업이고 가정이고 무엇을 저거는 좋다고 이래 하지만 롯은 기분은  안 났고 하나님의 동행이 없었어. 하나님의 동행이 없으니까 그 일이 뭐이  되겠소? 하나님이 동행 없이 하나님이 방어해 주지 않지, 해가 오는 것을 방어해  주지 않지 그 일에 축복하지 않지 이러니까 뭐이 되겠소?  롯은 먼저 취했다가, 취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버렸소. 그것 때문에 하나님  버렸다가 망했고, 그걸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다음으로 생각하니 하나님은  동행해 줄 수가 없어서 그것이 사업이나 모든 일이 잘되지를 못했고, 이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무슨 체면이 있어?  우리는 이상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기도가 썩썩 나옵니다.

하나님께 기도가 나오요. 자기 먼저 생각하고 자기에게 주로 인해서 어려움  당하는 그것 당하지 않고 그걸 피해서 자기 위해서 유익된 걸 생각하고 와  가지고 하나님에게 암만 기도하려고 엎드려 뭐라고 해도 기도가 안 나옵니다.

그것이 신앙 양심입니다. 그게 영감이오.

 내가 저녁으로 혹 가 보면 반사들은 오면 그만 오던길로 무엇이, 똑 하나님은  저 혼자 독차지한 것 모양으로 오면 그만 '주여! 어쩌고' 이래 가지고 그만  기도가 나옵니다. 또 나오면 그만 뭐 우는 사람은 울고. 반사들은 오면 당장  기도가 돼. 그렇지마는 그날 생활한 사람 가운데에 여기에 기도하러 와도 기도가  안 되는 사람 있을 거요. 기도하러 와도 기도문이 열리지 않고 그냥 하기는  하지만 힘이 나지 않는 그런 사람 있고, 있을 것입니다.

 꼭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래야 신앙 양심이 일어나고 그래야  주님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롯은 기도가 안 됐을 것이오. 롯은 그 후에는 그는  기도를 했지마는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는 자기의 인격이 기울어지는 그런  기도가 되지를 않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롯의 길입니다.

 (여기에 ○○○권찰님 구역인가, 뉘 구역인가 몰라. 어데 미국 갈려 하는 사람  여기 와 앉았네. 정신차려.)  아브라함의 노선을 걸어갈 거냐 롯의 노선을 걸어갈 거냐 어느 거냐 그말이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저와 한학년,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동창생인데 그분이 참 저를 아주  좋아하고 자기딴에 나는 그럴 사람도 아니었는데도 아주 존경을 하고  따랐습니다. 그분은 본과생이오. 나는 별과생, 별과생은 원어 공부 못하고  본과생들은 다 원어 공부하고 모두 어학 공부들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분이  어학을 안 했더라면 좋을 뻔했어. 어학을 한 그것이 그만 낭패가 됐어.

 저 송정교회 있을 때에도, 내가 그때 신학교에 입학을 하기 전인데, 신학교  왔다가 그만 신학교 버리고 가 버렸는데. 나와 좀 접촉해 보고 나를 청해서 그  집회를 했고, 집회를 하고 그분이 가서 말했지. 이약신 목사님이라고 그때  총노회인데 총노회장이 신학교 가서 야단을 쳤어. 송정교회 집회 하는 데  가라고. '신학교 암만 다녀야 무슨 소용 있노?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된다.'  이래 놓으니 그 학생들이 몽땅 다 올라왔어, 그때. 송정 집회 때. 그분이  송정교회 시무할 때에 또 뒤에 청하고 청해서 집회를 했습니다.

 이랬는데 그분이 그만 이 고신과 나와 나눠지고 난 다음에 내 접촉이 없었어.

접촉이 없었는데, 접촉이 없어지니까 자연히 그 사람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그  사람을 버리면 은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도 같이 버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버리고 은혜는 내가 가지지' 어림도 없소. 그것 누가 한 건데? 하나님이  하셨는데. 계통이 있는 것인데.

 그러다가 그 사람이 그만 어학 공부를 하고 이러니까, 믿음 없지 어학 공부  했지 이러니까 미국에 가고 싶어 어떻게 어떻게 이민으로 가서 어째 갔는지  이민을 가 버렸어. 그다음에 말을 들으니까 그분이 이민갔다 이랬는데 이민가  가지고 1년인가 지나고 나니까 저한테 편지가 왔었습니다.

 '아이구 목사님, 내가 지금 오고 보니까 후회가 막심합니다. 이래서,-그때 도로  오면 되는 건데 뭐.-도로 갈 수는 없고 마음에 가책이 돼서 우리 이민 온  목사들이 선교 협회라고 선교회를 지금 조직을 해 가지고 이 선교비를 마련해서  우리가 못 하는 것 돈을 보내 가지고 한국서 선교하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해서 선교비를 보내는데 암만 보낼려 해도 누구에게 보내야 될까 할, 보내서  드릴 만한 사람이 없어서 목사님에게 보내 드리겠으니까 이것을 좀 잘 돌봐  주십시오.' 하면서도 그때 자랑삼아 주는 자로, '주니까 이것 받아서 참 받아서  전도에 이용하십시오' 하는 그걸로 주지 '이것 써 주십시오' 하는 간청이라는  것이 그때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청은 보이지 않고 조금 간청같이 말하지만 속은  아니라.

 그래 그것 배수윤 목사님에게 '목사님, 편지를 하십시오. 이 편지를 보고 편지  답을 하십시오. 백목사님은 이 선교비를 안 받으려 합니다. 이 선교비 아니라도  사람 없어 일 못 하지 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고 안 받으려 합니다. 이러니까  이 선교비를 저한테 부탁하니까 저한테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이것을  관리를 하겠습니다.' 그래 배목사님한테 편지를 하라 했어, 편지를 하라 했는데  그다음에는 그만 답이 없습니다.

 그랬는데 며칠 전에 내가 ○장로님 사위의 그 안부를 물으면서 내가 어느  편에던가 물어보니까 ○○○목사님이 그만 죽어버렸어, 그 자리서. 죽었어.

여기에 안 죽고, 여기에서 있어도 난리 나기 전에 아직, 뭐 죽는 때까지 난리도  안 났는데 여기서 죽어도 죽었을 터인데 죽을까 싶어서 그리 피난을 갔는데  여기에도 아직까지 난리도 안 났는데 거기 가서 먼저 죽어버렸다 그말이오.

 죽었으면 여기에서 복음 위해서 '주여, 공산주의 오면 나도 진리와 함께 죽고  주님 박해당할 때 나도 같이 박해당하고, 주님과 진리와 나와 함께 고생하고  함께 죽겠습니다.' 이러다가 죽었으면 좋을 것 아니겠소? 뭣 때문에 그렇게  갔던지?  우리는, 오늘 아침에 봉독한 그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면 하늘나라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간구한 것은 다  들으신다. 들으시는데 안 주면 더 좋은 것 줄려고 안 주신다 또 안 주시면 더  좋은 시기에 줄려고 안 주신다. 하나님은 내게 약속한 것보다 더더 더더 더 좋게  더 좋게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좀 적게, 감해서,  해롭게, 조금씩 내게 대해서 사랑과 은혜와 모든 역사가 줄어져 가지 않는다. 더  많아져 가고 커져 가지 작아져 가지 않는다 적어져 가지 않는다. 요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라,  가나안 줬지마는 평생 안 줬어. 안 주니까 진동치 아니할 영원히 터가 있는 그  나라를 줄 것을 바라봤어, 하늘나라를 바라봤어, 이게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그것을 엉뚱이같이 여기다 떼다 붙여서 어떻게 할 건가? 어떻게 그 해석을 할  건가?' 그 해석이 여기 포함돼 있습니다. 왜? 가나안을 말씀하시면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의 수와 같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말한 것 아니라. 육적  자손 얼마 안 됩니다. 얼마 안 돼요. 그게 신앙의 자손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자손 신앙의 조상된 것은 순전히 하늘나라 소망의  자손입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이 세 가지 길을 걸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 일에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다가 손해봤을 때에는 하나님이 배상해  주시고,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들어 주셔.

 소돔 고모라 성 조카가 있을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기도했음으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롯 보고 간 것 아니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서 롯을 구출했지마는 요 길 걸어간 것이 그때는 구출됐지마는 결국은  망하고 말았어. 그러기에 롯의 걸음은 비참합니다. 롯의 걸음은 비참해.

 요새 미국이, 미국 사람들 여기 온 사람들 '너 이러면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 하면 막 발벌 떱니다. 그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참  특수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하나님이 기뻐하셔. 이러니까 하나님  다음으로 목사를 존경합니다. 목사라 하면 하나님 다음으로 뭐 정치가보다 제일  존경하는데 요새는 미국에서 목사 중에도 한국 목사라 하면 신용을 전혀 안 해.

한국 목사라고 하면 어떻게 천하게 보는지? 아주 천하게 봐요.

 이러니까 목사면 다 천하게 보는가? 한국 목사라 하면 이거는 일반적으로는  천하게 보고 '이건 또 귀한 목사인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그 사람들이 좀  구별해요. 그때 레이건 대통령 취임할 때에 조용기 목사님을 초청한 것 보면  거기서도 목사를 크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이렇지마는 목사가 말하면 아예 그만  듣지 않아. 어떻게 거짓말 많이 하고 여기서 다 전부 하나님 배반하고 간 롯의  걸음을 걸은 그 목사들이 갔기 때문에 그렇게 천해졌다 말이오.

 여기 일하던 사람, ○○교회서 아주 그 사람 유력하게 일한 사람입니다. 아주  고려신학교에서 유망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로스엔젤스에 그때  가고 싶어, 어쩌든지 가고 싶어 갔는데 미국은 못 가고 브라질인가 뭐 거기  갔어. 거기 가서 있는데 내가 말 들어 보니까 교인 한 사십 명 되는데 이것  교인에게 종질 다 해야 되고 사정 다 부려야 되고 참 비참한 목사가 돼 가지고  있어. 여기에 있었으면 적어도 그 사람 한 아마 육칠백 교인은 거느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롯의 걸음으로 피난을 가고 강대국으로 망명을 가고 도피를 가고 롯의 걸음으로  어데가 좋은고 싶어서 이사를 가고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롯의 걸음과  아브라함의 걸음을 똑똑히 알고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소. 안  변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는 자에게 무슨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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