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20:08
소금과 빛
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 : 새찬송 471장을 찬송하신 후 말씀 '이 세상 떠나갈 때 곧 영생 얻으리' 이거 우리가 깨달은 교리와는 다르다 그거요 그러니까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교리에 대해서 깨닫는 그 면이, 서로 차이도 있고 또 각각 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 다 은혜 생활하면서 은혜로 이렇게 이런 좋은 찬송을 지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떠나갈 때 그때 영생한다는, 제가 OO신학교 다닐 때까지도 세상을 떠나는 그때 다 영생 얻는 줄 알았지 중생된 그 때부터, 그 시간부터 영생을 가졌다는 것을 성경에 얼마든지 말했지만 영생은 지금은 이 생명 가지고 살다가 그때에 이제 세상 떠날 때에 영생을 새삼스럽게 얻는 줄로 다 그렇게 교리가 돼 가지고 있었고, 모든 세계의 교리가 다 그래 돼 가지고 있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랬으나 그 지금은 아마 온 세계가 다 깨달은 것이 현재 우리가 중생 될 때에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영생으로,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 수도 있고 죽을 생명으로 살 수도 있다. 영생하는 사람, 영생하는 자기로 살 수도 있고, 이제 죽을 자기로 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죽을 자기로 사는 것은 죽을 자기기 때문에 그거는 없어질 것이고 이별할 것이기 때문에 헛일하는 것이고, 영생을 가진 자기로 살면 그 사는 것은 '하나도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나 또 설교를 들을 때나 저 듣는 것이, 우리가, 교리라 말은 깨닫는다는 뜻인데 우리가 저 깨달은 것과 저 분들이 깨달은 거와 같으나 다르나 해서 만일 다를 때는 그 다른 점을 그걸 가지고 자기가 성경 가지고 대조하면서 깊이 상고를 해서 만일 자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잘못됐다 하면 자기 가지고 있는 것이 잘못됐다고 해서 고칠 때는 자기 생활이 고쳐지는 것이고, 사상이 고쳐지는 것이고, 자기의 전 인격이 고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벌로 그것을 고쳐서는 안 됩니다. 심히 대조하고 심사 숙고 해 가지고 그것을 자기 혼자 벌로 고치지 말고 그 신앙 동지들에게 말을 해서 그렇게 아주 심각하게 그 교리를 고쳐야 되지 그래 벌로 휘떡휘떡 고치면 안 됩니다.
또, 여기서 배운 것과 다른 데서 배운 것과 틀릴 때는 반드시 그것을 심각하게 대조를 해 가지고 참을 찾아야 되지 뭐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 다 하는 그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게 아니라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하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된다 하는 그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자기 깨달음이 이렇게 깨달아도 되고 저렇게 깨달아도 된다고 하는 그말이 바로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된다 하는 그 말이오. 그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구원은 구원이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하는 그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그말이 이해가 됩니까? 그걸 이해가 만 되면 헛일이야.
자꾸 이거 한 말을 거듭하니까 이 서부교회 교인들은 저 자리가 헐헐하게 비어져 그건 못 알아 듣는 거라, 귀가 먹어서 못 알아 들어. 들을 귀 가 있는 자가 복이 있는데 들을 귀가 없어 그러니까, 복이 없으니 그 저주 속에 있으니까 저주 속에 있는 것을 벗어날라고 애를 써야 되지 그 아무나따나 그렇게 쉽게 듣는 게 아니라 이 설교를 다른 데 가서 들으면 몰라요 제가 OO신학교 다닐 때에 송도에 있는 OO교회를 OOO목사님이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OOO 목사님 계시는 그 OO교회 가 가지고 금 요일날 밤부터, 금요일 밤, 토요일 아침, 토요일 낮, 토요일 저녁, 주일 아침, 주일 낮, 주일 저녁, 월요일 아침 이렇게 여덟 집회를 해도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그들이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암만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그때 그분도 조사인데, 전도 사인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유력한 우등생 조사인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뭐 이래 혹 물어 보면 한 마디도 몰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몰라 이라다가 그 뒤에 환도해 가지고 OOO목사님한테 가서 삼 년을 배우 그 난 다음에 비로소 '아, 그때 그 백 조사님이 가르치는 것이 지금 생각 하니까 이 비슷한 이말인데 우리가 한 번 다시 들어보자 그래 가지고 환도 한지 삼 년만에 저를 청해서 제가 OOO교회에 집회를 갔었습니다. 집회 인도하러 갔는데, 그때 OO교파에 다니는 목사들 중에도 좀 진리대로 살라고 하는 그런 진리를, OO파를 위주로 하는 게 아니고 좀 진리를 찾을라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 목사들은 거기 다 모였읍디다 다 모였었는데, 그 집회를 하는 도중에 저희들이 모여 가지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제 살 길을 잡았다. 한국에 제일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옳은 지도자 둘을 만났으니 이 지도를 받아 가지고 어짜든지 이 진리로 한국 교회를 참으로 개혁해서 살려야 되겠다.' 인제 그라면서 그때 뭐 전체가 단합돼 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그러니까 그분들이 나한테 시험해. 나는 그때 OOO목사님을 알지도 못 하는 때입니다. 말하기를 자, 요 성경 해석은 뭘로 어떻게 합니까?' 자꾸 물어, 그 물어서 내가 그걸 알았지 '아마 OOO목사님하고 일치가 되는가 안 되는가 그거 물을라고 하는가 보다' 해서, 나는 뭐 그분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요것도 맞습니다. O목사님이 요래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심지어, 그래서 나는 서로 교훈을 교류하기 위해서, 그분이 나를 청해서 OOO교회 집회를 인도했으니까 나도 또 그 사람에게 있는 게 뭐 있는가 알아 봐야 되겠다 해서 그 서부교회다 청해 가지고 그때 집회를 했습니다.
강사로 와 가지고 그때도 물어. 그때 묻기를, '천국 가서도 우리가 자라갑니까? 안 자라갑니까?' 그걸 물어. '천국 가서도 영원히 자라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 자라가는데 영원히 자라가도 다 자란 끝이 없고 자라가고 자라가고 영원히 자라가고 영원히 우리는 점점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서 종자를 받은 것은 영원히 자라가지만 종자 못 받은 것은 새로 종자는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생활은 종자를 받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종자를 받는 생활입니다.' 그 종자는 다시 못 받아요. 터는 다시 새 터는 닦지 못해요. 닦아 놓은 터에는 영원히 가서 건설합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종자 못 받으면 다시 그 구원의, 구원의 종자가 여러 수만 종자도 넘은데 그거 종자를 받은 것은 영원 무궁토록 자꾸 그 종자를 길러가지만 종자가 없는 자는 길러가지 못해.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그 구원의 차이가 많습니까 세상에서 구원 차이가 많습니까? 하늘나라 가서 차이가 많아, 하늘나라는 어떤 자는 하루 하나가 자라 가는 데 어떤 사람은 하루 만 개가 자라간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거 뭐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걸 말하니까 '아, 그 OOO목사님도 이렇게 말씀을 하는데 그것도 같습니다.' 하며 자꾸 같은 것 아마 그걸 볼라고 애를 써.
그래 가지고 얼마 동안 지나고 난 다음에는 무슨 귀신이 들어갔느냐 하면 아 OOO목사님 지금 이렇고, OO교회도 그때 제일 크고 했는데 OOO목사님이 후계자가 내가 돼야 될 터인데 아무래도 이 백 조사님이 들어왔으니까 백 조사님이 그 후계가 되기 쉽겠다, 이래 가지고 마귀란 놈이 '네가 후계되지 못하고 그가 후계된다' 시기 마귀가 들어 와 가지고 시기심을 딱 했다 말이오. 나는 그 후계하라 해도 안 합니다. 나는 거기서 배운 게 아니고 나는 하나님에게 직접 배웠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자기네들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뭐 전적 다 배웠는가, 배운다고 하는 것은 거게 다니며 배운 거는 뭐이냐 하면 자기를 만들어야 된다 하는 그거 내가 특별히 내가 하나 배운 거 있어요. 자기가 그래 가지고 고마 그때 가서 OOO목사님에게 이런 말 저런 말 해 가지고 나하고 이래 벌어트려 버렸다 말이오. 벌여트려 가지고 그 어른이 살아 있을 때에 나한테 대해서 교만하다 하고 자꾸 이렇게 말을 했었는데, 그걸 내가 뭐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지만 OOO교회라고 OOO교회, OO교회라 하는 지금 OOO가서 집회할 때에 오전 공부를 하고 난다음에 마치고 나서 내가 전송할라고 나오니까 나를 불러 가지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만 '조사님, 내가 오늘 오전에 말씀한 대로 내가 그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시기를 해 가지고 조사님을 목사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잘못 소개한 것이 있었는데 그거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공연히 후계니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가 나한테 그렇게 말을 했으니까 알지 그리 아니면 모를 거라 말이오. 이 설교록을 OOO목사님이 자기가 또 거기서 언제가 볼 지 모르니까 보면 자기가 알거라 말이오. 그래 거짓말을 하지 안해요 이 설교록에 나가기 때문에 그것이 다 뒤에 가서 다 알려진다 그거야 그래 '그러면, 무궁토록 자라가니까 그 성구를 어디를 근거해 가지고 그랍니까?' 그래 나한테 그걸 물어.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절, 13절이 그 근거다.
거게는 소망도 영원하기 때문에 소망은 현재의 것을 소망하지 안하고 미래에 있는 것을 소망이라 하기 때문에 소망도 영원히 있을 것이라 하니까 소망은 이루어지는 것이요, 믿음은 또 뭐이냐 하면 소망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라 그 말이오 믿음도 영원하고 소망도 영원하니까 영원 무궁토록 자라간다는 것을 그 성경에 말해 놓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때 그분이 아, 그러냐고 이라면서 이랬는데 그만 지금은 이래 나눠졌어 나눠졌으니까 아마 지금은 서로 만나면 틀리는 것이 심히 많을 것입니다. 틀리는 것이 좀 많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 안했지? 그래. 자, 기도합시다.
주님, 이 시간도 주님의 피의 능력과 피로 말미암은 성령님의 능력과 피로 말미암은 진리의 능력이 저를 붙드시고 친히 증거해 주시고, 듣는 자들에게도 이 세 능력이 붙들고 깨닫는 은혜와 소망하는 은혜와 이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시옵소서. 이리 하여서 주님의 형상과 영광의 찬미가 이루어져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5장 13절, '마태복음 5장 13절' 이러니까 찾을 때에 벌써 '아이구, 또 이제 들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그러니까 나중에 가서 한 소리 또 하니까 잔소리 되고 만다 말이오 '아이구 또 잔소리 이거 또, 또 어찌 듣나?' 그 귀가 없어 그래 귀가 없어 그러니까 들을 귀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해요. 그 못 알아 듣고 하는 거라. 못 알아 듣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보다 더 많이 깨닫지야 못했지, 그리. 나도 자꾸, 또 말은 그말이지만 또 깨닫고, 또 이거 또 깨달으니까 또 말해야 되겠고, 또 말해야 되겠고, 그것이 자라가는 증거입니다. 자라가는 증거. 그거 한 번 듣고 두 번 들을 것이 없는 것이 그게 자라가지 않는 증거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버지에게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면 이만하면 다 된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앞에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됐으면 그 사람은 영광의 찬미가 된 사람이라 다 된 사람이라. 완성이 된 사람이라.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완성된다는 그말입니다.
이 소금은 우리를 가리켜서 소금이라 말했고 소금 속에 들어 있는 맛은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가리켜서 맛이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랬는데,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은 언제 내것을 삼을 수가 있으며 내가 언제 진리의 것이 되고 영감의 것이 되고 예수님의 대속의 것이 되는가? 그것이 내것되고 내가 그것의 것이 되기를 언제 되는가? 요것은 현실에서만 되지 다른 데는 되지 않는 것을 지난 밤에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천하에 제일 교리와 신조를 제일 광대하게 알고, 많은 증거를 해서 많은 제자를 내고, 제일 위대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 가르치는 것 가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가지고, 아는 것 가지고 제것 된 것은 절대 아닌 것입니다.
요거는 언제 하느냐? 언제? 자기 현실에 보다 요것보다 조거냐, 조거 보다 요저냐 그 세상하고 비중을 달 때, 그때 이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함으로 그때에 그 진리를 내가 모신 것도 되고, 영감을 모신 것도 되고, 예수님의 대속을 모신 것도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세 가지 대속인데 세 가지 대속은 내가 가지는 게 아니고 그 대속은 나를 살린 지극히 큰 능력이요, 지극히 큰 공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속도 내가 모시고 있는 것이고, 진리도 모시고 있는 것이고, 영감도 모시고 있는 것이지 내 소지품같이 내가 가지는 거는 아닌데 사람 말로 알아 듣도록 하기 위해서 영감을 뭐 가지고, 진리를 가지고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을 받으라니까 우리가 물건 받듯이 그래 받는 줄 압니까? 성령 받으라 그말은 뭐이냐 하면 성령의 것이 되라 그 말이오. 성령에게 점령을 당해라. 성령의 것이 되라. 성령의 것이 되면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것이면 그는 다른 것이 손을 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현실에서만 이 자기 것을 삼을 수가 있는데, 이 현실에서 우리 심신의 기능이 요 세 가지를 잊어버렸으면 잊어버린 그 기능은 이 세 가지를 다시 찾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다시 찾지 못한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그 기능은 어찌 되느냐?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린 기능은 어꺼 되느냐?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그 기능은 첫째로 피가 없기 때문에 죽습니다. 심판을 이기지 못합니다. 심판에 정죄받아 가지고 죽습니다. 또 그거는 영감과 진리가 없기 때문에 참된 능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전에 늘 말하기를 그 능력 아닌 것을 능력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힘 아닌 것을 힘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 힘은 이 돈이니 뭐 돈, 물질의 힘이니 과학의 힘이니 그 사람의 행동의 힘이니 생활 건축의 힘이니 하는 그런 건 다 힘이 아니다. 힘은 우리에게 이 세 가지뿐이가 우리의 힘이다 하는 것을 늘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내게 있는 내 기능이 현실에서 한번 잊어버린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다시 짜게 하지 못한다 다시 찾지 못한다 이 간을 잃어 버렸으면 다시 찾지 못한다 그러면 다시 찾지 못한 그 기능은 어찌 되는가? 그 기능은 영원히 죽었습니다. 영원히 죽습니다. 죽으니까 내 팔이 떨어져 나가 죽고, 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 죽고, 지금은 모르지 팔이 한목 뚝 떨어져 나가지 안해 그렇지 팔의 백분지 일이 뻘어져 나가 죽었고, 또 자꾸 죽으니까 나중에 가서 십분지 일이 떨어져 나가 죽었고, 십분지 오가 떨어져 나가 죽었고, 십분지 십이 다 죽었으니까 이게 팔뚝은 있기는 있지만 이게 온전한 영생하는, 불변하는, 참 무궁토록 내게 쓰여질 수 있는 이 팔의 기능은 없어져 버렸다 말이오. 완전히 죽었다 말이오.
이러나 사람들이 그 눈을, 심령이 어두워서 이 참, 이 세상의 이거 고기덩어리의 힘 그거는 이건 아무리 있다고 해 봤자 이거는 마지막에는 다 없어질 것이니까 썩어질 것이지만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바꾸어지는 이 무한한 기능은 없는데 이 기능 죽은 거는 못 본다 그 말이오. 심령 이 어두워 놓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밥을 뺏들어 가는 거는 뺏들어 가는 도적인 줄 알지만 자기에게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뺏들어 가는 것은 이것은 손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심령이 어두워서 그렇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 현실에서 우리가 이 기능을 잊어버린 기능은, 내 기능이 이 셋을 잊어버린 기능은 다시 그 기능이 이 셋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능은 영원토록 사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만 둘째 사망의 해로서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 버리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합니다. 다시는 내 팔이 하나 끊겨 사가고, 팔의 백분의 일이 끊겨 나갔든지 십분의 일이 끊겨 나갔든지 끊겨 나갔고, 다리의 뭐 그 십분의 일이 끊겨 나갔든지 백분의 일이 끊겨 나갔든지 끊겨 나가 버렸고 내 마음의 그 기능, 마음의 의지라든 지 각오라든지 또 깨달음이라든지 총명이라든지 지혜라든지 이성이라든지 감각이라든지 기억이라든지 이런 게 우리 마음의 기능들인데 이 기능이 다 요래 죽고 조래 죽고 다 죽어 버려서 나중에 보니까 아무 감각 없는 인간이 됐고, 아무런 이성 비판 없는 인간이 됐고, 그 아무 의지 각오가 없는 그런 인간이 되고 말았다 말이오. 그러면 그 의지가 없어질 건가? 그 의지가 진리로 된 의지, 영감으로 된 의지, 예수님의 대속으로 된 의지기 때문에 그거는 영원한 의지입니다. 그거는 영생입니다. 우리 의지가 영생으로, 그래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한번 잊어버린 진리는 다시 내가 찾지 못합니다. 한번 잊어버린 진리는 다시 찾지 못합니다. 아, 내 기능은 잊어버린, 이 세 가지 잊어버린, 소금의 맛을 잊어버렸으니까 그 기능은 영원히 울면서 유황불 구렁텅이로 가서 타러 가 버립니다. 내가 끊어내 버렸습니다. 내 주체가, 주체인, 주격인 내가 그걸 끊어내 버렸습니다. 내 손을 제손을 제가 자꾸 끊어내버리요.
제 발을 제가 자꾸 끊어내 버리요. 마음의 참 필요한 그 기능들을 자꾸 제가 끊어내 버린다 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실물로 가지고,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귀신 들린 자는 자기 몸을 돌로 쳐서 상하고, 자기 좋은 집도 냅두고 가족들도 냅두고 저 송장 있는 곳으로 자꾸 가 가지고 무덤으로 기어들어가는 게 뭐이냐 하면 귀신 들린 자가 그렇다 말이오. 우리가 모두 다 이 귀선이 들리면 자기 팔을 자기가 끊고 자기 눈을 자기가 빼고 다 같은 눈은 뻐끔하게 있지만 눈의 기능 다 뺏기 때문에 그는 보지를 못합니다.
눈의 기능, 이 고기덩어리의 기능은 내가 눈이 또록또록한데, 고기 덩어리의 기능 그까짓 거는 언제 썩어도 썩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때 썩어도 썩습니다. 이러나, 이제 썩을 고기덩어리의 눈의 기능, 눈의 기능이, 그것이 현실을 통해 가지고 진리로 제 기능을 삼았고 영감으로 기능을 삼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기능을 삼았기 때문에 이는 참으로 진리대로 모든 것을 보고 영감대로 모든 것을 보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모든 것을 접하니까 이는 말할 수 없는 눈이 밝은 기능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 잊어버린 진리는 다시 찾지 못 한다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한번 잊어버린 기능은 다시 찾지 못한다. 한번 잊어버린 이 소금의 맛은 다시 찾지 못한다. 한번 잊어버린 진리는 다시 찾지 못한다. 한번 잊어버린 영감은 다시 찾지 못한다. '아, 또 오늘도 영감 있는데' 그 영감은 딴 영감이요, 딴 영감이오. 한번 잊어버린 영감은 다시 찾지 못한다는 요것을 못을 박아서 강하게 자꾸 느끼고 느끼고 새김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잊어버린 진리, 다시 찾지 못합니다. 내가 한번 잊어버린 그 진리는 다시 찾지 못합니다.
한번 잊어버린 기능은 다시 찾지 못합니다. 한번 잊어버린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는 다시 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또, 어제 엊어 버렸지만 오늘 또 있지 않느냐?' 아니오, 그게 아니라는 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요게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하는 요걸 이 이단자들은, 이게 참 이단자요, 이게 참 귀신이 들렸소 '이 다시 짜게 하리요 하는 이거는 한 번 잊어버린 것 말이오 한번 잊어버린 것, 전부 다 잊어버린 걸 그것을 말했는데' 아, 부분적으로 오늘도 잊어버렸다. 내일은 또 있는데 또 내일도 잊어버렸다. 이렇게 토막토막으로 잊어버려 가지고 전체를 다 잊어버린다는 이 주장을, '뭣 때문에 그렇게 가르느냐? 이거는 마지막으로 잊어버린 걸 말하기 때문에 이거는 오늘 잊어버렸다 해도 다 잊어버린 게 아니고 그게 또 내일 찾을 수가 있다' 요래 마귀란 놈들이 유혹을 해 가지고 이제 오늘 잊어버린 건 다시 못 찾습니다.
여러분들, 이 현실에, 이 현실, 요 시간 현실에 내가 배반한 진리는, 배반한 영감은, 배반한 예수님의 대속은 다시는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다시는 찾을 수가 없다는 요것을 똑똑히 가져야 합니다.
요래 깨닫는 것이, 요것이 영감이요 바로 깨닫는 것인데, 두리뭉성이로 '자꾸 뭘, 그 백 목사는 뭘 자꾸 쪼개고 나누고 그게 틀린다. 구원도 쪼개는 그것이 틀린다.
또 사람도 옛사람 새사람으로서 그 나누는 것이, 그것이 틀린,다. 자기를 이렇게 자꾸 나누는 것이, 영이면 영, 몸이면 몸, 마음이면 마음 그것 다 합해서 내인데 나를 쪼개 가지고, 나를 쪼개 가지고 이거는 뭐 자꾸 쪼개서 영이라, 이거는 또 쪼개서 마음이라, 이거는 쪼개서 고기덩어리라 이렇게 자꾸 백 목사는 쪼개는 일이 그게 틀렸다. 구원도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이와같이 쪼개는 것이 그게 틀렸다. 또 현실에 죽은 기능이 있고 아직까지 죽을 기능이 있다. 그러기에 죽은 기능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왜 그거는 쪼개느냐? 쪼개지 말고 한덩어리로 해라.' 한덩어리로 하는 것이 그거 마귀란 놈이 지금 사람을 삼키는 대 술책입니다. 이것을 천하 사람이 반대해도 다 요대로 섭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요것대로 서지요. 성경에 또 그래 해 놨다 그 말이오. '남은 바 죽에 된 것' 했으니까 그 죽은 것이 있고 남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왜 성경을 다, 부인하느냐 그 말이오. 관념이, 선입적 관념이 돼 놓으면 그 관념이 주장을 해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보지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석을 보지 말라 그말은 시기해 가지고 남의 주석을 보지 말라는 말 그말 아니오. 내가 말하기를 '주석을 보지 말아라. 주석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니까 네가 성경 보고 깨닫고 요런가 조런가 자꾸 깨달을 대로 깨닫고 난 다음에 이제 그라고 나서 많이 깨달아서 요거다 그렇게 네가 확실히, 네 속에서 있는 영감이 깨닫게 해 주시거든 깨닫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뭐라 하는고 보자 그 다음에, 참고해라. 네가 연구도 안하고, 영감이 네게 와 가자고 너를 가르쳐 줄 터인데 너에게 가르쳐 주기도 전에 다른 사람 하나 깨달은 그것만 보니까 그 깨달음대로 쭉 다 따라가 버리고 나니까 제 깨달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자기가 읽고 깨달은 대로 실행하고, 읽고 깨달은 대로 실행하고, 요 사람은 영감이 와 가지고 깨닫게 하는 대로 또 깨닫는 거는 하나님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깨닫게 하시는 그 방법대로 깨닫는 것이고 요거는 다른 사람이 쭉 끄니까, 이거는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말이지 다른 사람 이 앞에 가니까 앞에 가는 사람만 쭐쭐 따라가면 그 사람 잘못 갔으면 다 죽는 것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교회들이 마구 무너지고 마구 절단이 나고 아무 능력이 없다 그거요.
그래서, 주석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요렇다 깨닫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주석을 보면 '아, 나 깨달은 것이 요랬는데 깨달은 것, 다른 사람 깨달은 걸 보니까 참고는 되기는 된다만 하나님이 내게 깨닫 게 준 거와 다르다. 내게 깨닫게 해 준 것은 백 점이라면 이거는 오십 점밖에 안 된다. 오십 점이라도 그게 참고는 된다' 이렇게 하지 남 깨닫는 데 쭉 따라가지는 말라 그 말이오 왜? 성경에 말하기를 네 속에 기름 부음이 너에게 옳게 바르게 가르쳐 주니까 그분의 가르치는 것을 자꾸 배워야 될 터인데 이거는 남 가르치는 남 배운 것 거게 쭉 따라가 버리니까 이거는 전부 도매금이 돼 버리고 말고 도무지 자기 속에 성령이 할 일이 없다 그 말이오 그 사람 인도는 사람이 인도하지 성령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교리서도 쭉 그걸 보면 다른 사람이 깨달아서 그랬으면 깨달은 그대로 내가 따라가기 쉬워. 사람이라는 것은 길이 없는데는, 길이 없는데 제가 길을 낼 때에는 제가 머리를 써 가지고 아, 요게 요 지형이 요래 됐으니까 요 길을 요리 뚫고 나가야 되겠다, 조리 뚫고 나가야 되겠다 자기가 길을 새로 뚫어야 된다 말이오. 뭐 불룩하게 좋아 가지고 속에 이 진리가 속에 능력으로 역사해 가지고 그 능력 가지고 사람에게 전해야 내가 전하는 게 아니고 진리가 전하는 것이고 영감이 전 하는 것이고 피가 전하기, 때문에 그 귀신들이 도망을 쳐 버리고 다 되는 것이지 고기덩어리만 가지고 자꾸 전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안돼. 이렇게 길으 낼라 할 때, 그러면 제가 이래 생각해 보고 아무래도 요리 내는 게 좋겠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만 싸른 사람이 길 내놓은 것을 만일 가 본다고 한다면 꺼꾸로든지 옳게든지 다른 사람 길 내놓은 걸 자꾸 그리 따라갑니다. 사람들이 다 그리 따라가고 있지 않소? 그거 따라가듯이 그만 이 교리와 신조도 남 내놓은 대로 그대로 자꾸 따라갑니다.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문제라 그거요.
저는 그래 교리서 하나도 보지 안하고, 처음에 산골짝에서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고, 믿는 대로 실천하고 이래 자꾸 깨달으니까 깨달은 것을 성경 보고 깨닫고, 또 기도하면서 깨닫고, 설교하면서 깨닫고, 실행하면서 깨닫고 요렇게 깨달아서 요래 거석하니까 내가 깨달은 것을 거창서 그때 불이 일어났다 말이오. 그 불이 일어났어, 막 불이 일어나 가지고 야단이 났는데, 그라니까 여기 부산에 있는 OO신학교서 자꾸 그때, 거게도 연락이 있으니까 연락이 있어서 하나가 또 내려가면 이 사람이 또 물고 간다 말이오. 그걸 또 가져가 물고 가면 OO신학교서 이단이라 정죄해서 올라오고, 정죄해서 올라오고 난 다음에는 또 내가 말하는 것은, 거기는 대가리고 여기는 꼬랑댕이 새끼니까 거기서 말한 게 학자들이 말한 게 옳지 이래 가지고 그게 옳다 하고 이건 틀렸다 이라니까 시비가 난다 말이오. 시비가 나도 나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그거는 틀렸다, 이래 자꾸 이 말하는 데도 나중에 시비 있다가 얼마 지나가고 나면 이제 아무 말이 없어서 이게 서 버리고 그때 말한 게 다 섰습니다. 지금 그때와 지금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강도, 한 편 강도가 구원 얻은 강도는 그것이 순교적인 그 신앙이다고 이라니까, 강도가 순교적인 신앙이다 한다고 OO신학교서 논단이 여러 달 동안 나 가지고 시비가 나면서 '이거 참 큰 이단자가 나왔다' 이렇게 모두 욕을 하니까, 시골 사람이 압니까? 신학교면, 신학교라면 다인 줄 아는데, 그랬는데 그때 그거는 누가 해결 지워졌냐 하면 OOO목사님이 해결 지웠어. 그래 OOO목사님이 있다가서 '그게 그거는 한 편 강도는 불택자를 말하고 한 편 강도는 택자를 말한 것인데, 그렇게 지금 가르친 것인데, 예수님이 중앙에 섰고 이러니까, 아, 순교자도 그 반렬에 들었지 안 들고 뭐 어디 있다 말이냐?' 그래 내가 들렸어.
OOO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다 그런갑다 했는데 실은 고말이 맞다 그 말이오.
순교자가 뭐인데? 순교자가 자기가 창에 찔려 죽어 가면서도, 죽어 가면서 지금 숨이 칼딱깔딱 넘어 갈라 하는 그렇게 창에 찔려서 지금 고통당하는 그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은 구주다. 나라로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분은 죄가 없다' 이만치 증거했으니까 순교자 아니오? 순교자가 이만치 멋진 순교자가 없습니다. 이렇츰 똑똑히 증거하고 죽은 순교자가 없소.
그래.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따라 가지 말고, 여러분들은 여게 배워도 또 자기가 자꾸 생각해서 자기가 자기 속에서 가르쳐 주는 영감이 자기를 바로 옳게 가르쳐 주는 요 가르침을 받도록 애를 써야 되고, 이 가르침을 받은 것이 바로 됐나 틀리게 됐나 하는 그것을 재심사하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재심사가 바로 됩니까? 재심사는 어떻게 해야 바로 되지요? 저 OOO조사님, 순종 말은 그럴 때는, 순종은 순종인데 실행이라 하면 더 좋아. 순종이라 말이 맞기는 맞지만 실행이라 하면 맞아요. 그 실험은 실행해 봐야 알아. 최종의 아는 심사는, 최종 심사는 실행으로 심사하면 딱딱 들어 맞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행하는 사람의 설교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의 설교가 다릅니다. 실행하는 사람의 설교는 실행하는 사람이 들으면 딱딱 들어 맞아서 줄줄 딿고, 실행하지 않는 거짓부리는 실행하지 않는 설교라야 들어야 시원하고 재미가 있지 실행하는 것은 그만 꼭닥스럽고 잔소리 같아서 그만 귀찮스러워서 듣기가 싫고 그만 속에 구역질이 올라옵니다.
소금은 우리를, 우리 주격체 나를 가리켜서 소금이라고 말하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합해서 소금이라고 말하고, 소금은 내라는 주격 나를 가리켜 소금이라고 말하고, 맛은 이 세 가지 지극히 큰 능력을 가리켜서 맛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맛을 잃으면, 현실에서 맛을 잃은 것은, 맛 잃은 기능은, 이 맛을 잃은 기능은 영원히 죽었고, 다시 복구 못 해서 영원히 죽었고, 그러면 내 지체가 죽었고 또, 지체의 주격이 되는 나는 어떻게 되느냐? 나는, 나는 살아 있지 대번 죽지 안했으니까. 내 현실에서 기능의 개별은 즉시 죽고 영원히 죽어 버렸고, 이 기능의 전단체라는, 기능의 단체라는 이 단체는 부분적이 죽어도 단체는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지만 그 단체는 이 세 가지 기능을 빼앗겼기 때문에,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만치 가난합니다.
그러니까, 내라는 내가 이 사기능을 자기에게 할당된 것이 그라면 자, 하나 천씩 삼천이라 합시다. 삼천인데, 삼천이 내가 이 시간에 하나 잊어 이 시간에 셋 잊어버렸고, 요다음 시간에 셋 잊어버렸고, 셋 잊어버렸고 열 번 잊어버렸으면 서른이고, 백 번 잊어버렸으면 삼백이고, 천번 잊어버렸으면 삼천이고, 또 만 번 잊어버렸으면 삼만이고 자꾸 잊어버리니까, 잊어버리니까 내라는 그 나는 가지고 있지만, 나는 있지만 자꾸 잊어버리니까 나중에 가서 그 사람에게는 진리의 능력은 하나도 없고, 영감의 능력도 하나도 없고, 대속의 능력도 하나도 없고 그 기능은 그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기능은 다 죽어 버렸고, 기능은 없다 말이오.
우리의 기능이 뭐입니까? 없고, 형체만 살아서 부활합니다. 형체만, 모양의 외형의 형체만 부활합니다. 이러니까 자, 우리의 힘이, 우리의 힘이 뭐입니까? 우리의 힘이 뭐이요? 무슨 힘이요? 과학의 힘이요, 지식 의 힘이요, 고기덩어리의 힘이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쓸모 있는 힘, 만에게 쓸모 있는 힘, 모든 것에게 다 필요한 힘, 이 참 필요하고 영원토록 참 완전한 그 실력, 완전한 그 실력, 쓸모 있는 그것은 뭐입니까?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뭐이요? 우리에게 쓸모 있는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만이 우리의 힘이오. 이 진리가 우리의 능력이요, 영감이 우리의 능력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의 능력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가서 사람을 살리면 삽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만물에게 줄 때에 많물이 삽니다. 이 세 가지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중보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번 잊어버린 진리는 다시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있으니까 어리석게 '아직까지 내가 있는데, 뭐 내가 진리 알고 있는데.' '야, 이 등신아 너는 잊어버린 건 다시 찾지 못 하고 앞으로 잊어버릴 것 있다. 잊어버릴 것 있고 앞으로 안 잊어버리면 안 잊어버리고 이제 잊어버린 건 다시 찾지 못하고, 앞으로 남아 있는 것은 잊어버리면 다시 찾지 못하는데 그것을 안 잊어버리면 안 잊어버린 그거는 네가 가질 수가 있다.' 그 말이오. '남은 바 죽게 된 것' 남은 바라 하는 건 다 죽어 버리고 남아 있다 말 아닙니까? 이래서, 우리는 이것을 자꾸 새겨야 됩니다. 아, 참 진리는 말할 수 없는 능력이요, 진리는 천지를 창조한 능력 아닙니까? 만물을 창조한 능력 아닙니까? 만물을 창조한 능력인데 만물을 창조한 이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자, 만물은, 만물은 내 믿에 있겠소 내 위에 있겠소? 만물을 창조한 능력을 내가 가졌으니까 만물이 나를 밟겠소 내 밑에 있겠소? 예? 내 밑에 있지. 또 이 진리가 창조한 것들에게 뭐이 필요합니까? 저희들을 창조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저희들을 창조한 진리가 필요해서 이 진리는 이 진리가지는 것들에게 영원히 영원히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는 존재는 진리가 창조했는데 진리를 무 엇이 지금 명령했습니까? 영감이 명령했습니다. 영감은 진리보다 더 필요합니다. 영감이 만들어 놓고 영감이 더 필요한 것들에게 내가 영감을 가졌으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쓸모 없는 게 아니라 쓸모 있는 게 됐다 그 말이오. 또 예수님의 대속은 더 필요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이 없으면 진리가 우슨 필요 있고 영감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대속 없으면 진리는 죽이는 것이 되고 영감은 죽이는 것이 되는데 대속이 있기 때문에 제것이 돼서 제 생명이 됐지 그리 아니면 소용이 없다 말이오.
그러므로,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은 내 생명만 될 뿐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도 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쓸모 있다 그 말이오. 하나님께서 영원히 소생시키시고 자꾸 하는 것에, 하나님 아버가 진리 가지고 일하기 때문 진리의 내가 됐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일할 수 있고 하나님께도 쓸모 있고 피조물들에게도 쓸모 있고, 하나님께도 필요하고 피조물들에게도 필요하고, 이러기 때문에 쓸데 입는 반대의 이제 쓸모 있다 그 말이오 이렇게 영원히 쓸모 있는 이 진리를 내가 한번 잊어버렸으면 다시 찾지 못한다는 것, 내가 이 현재라는 요 현재에 이 진리를 잊어버리면 나는 이 진리를 다시 찾지 못한다는 걸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됩니다. 다시 찾지 못해, 그러면 찾지 못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니까 나중에 가서 능력 없는 자가 돼 버리지. 아무리, 부활의 기능은 뭐이 부활의 기능이오? 부활의 기능은 진리의 기능이 부활의 기능이요, 영감의 기능이 부활의 기능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기능이 부활의 기능인데 부활해야 이 세 가지 기능은 아무것도 없고 고기덩어리 이거 윤곽만, 이 형체만 이래 부활했으니까 그거는 아무 힘이 없어. 아무 힘이 없어.
아, 이러니까, 나는 몸은, 체중은 젊을 때보다 휠씬 뚱뚱해요. 힘이 없어 힘 없는데, 저 양산동에 천막을 쳐놓고 매일 한 번씩을 꼭 가는데 주일날도 꼭 갑니다. 가는데, 올라갈라면 그 OO집사의 손을 거머쥐고 끌 어라고 하고 나는 끌려 올라가, 끌려 올라가는데, 이제 끌려 올라가는 데 그 급한 있어서 뭐 딴거 하느라고 못 오니까 오때는 살살 기어 올라 간다 말이오. 살살, 안 끌려 올라가고 살살 또 기어 올라가니까 이 기어 올라갈 수가 있어. 기어 올라가는데 이제는 어북 혼자 올라가도 올라가. 그 래서 내가 가만히 재어 보니까 15분이면 밑에서 거기까지 올라가. 또 칠 분이면 또 거기서 집까지 내려와. 그러니까 22분이면 왕복할 수 가 있다 그거요. 인제 힘이 좀 생겼어요. 힘이 좀 생겼는데, 내가 열 아홉 살, 스무 살이니 뭐 할 그때 힘으로 말하면 그 뭐 나는, 그 어북 소나 무가 멀어도 여기서 훌쩍 뛰면 저 소나무 가지 푹 거머쥐고 건너가고 뭐 어북 새 모양으로 이렇게 뛰돌아다녔는데 그만 힘이 없으니까 이 몸뚱이가 소용이 없어.
힘이 없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이오.
그 모양으로 부활은 해서 뚱뚱하게, 부활은 했지만, 윤곽은 있지만 속에 이제 부활의 능력이 없다 말이오. 부활의 능력. 부활하는 능력이 아니오. 부활한 자의 능력이라 그 말이오. 부활의 능력. '예수님의 그 부활의 능력에 참여 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분발한다' 그것을 빌립보 3장에 말씀하신 부활의 능력,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이것이 참 가치 있기 때문에 과거에 이 도리를 깨닫기 전에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문벌, 학벌, 이제 그 모든 시민권 이런 것 다 모두 배설물로 똥으로 여겼다 이랬다 말이오. 똑똑히 깨닫고 보니까 이 세상에는 배설물도 있고 진짜도 있다 하는 걸 깨달았다 말이오. 그러면, 현실에서, 현실에서 얻는 진짜는 뭐이냐 하면 이 세 가지 능력을 얻는 것이 진짜요, 또 뭐 겉으머리 이 세상 이런 생활, 저런 생활 이런 회사 저런 회사 하는 이것은 찌끼고, 찌꺼기고 그 속에 알맹이는, 그 찌끼인 현실 생활에서 이 세 가지를 자기 것 삼는 것이 그것이 알맹이라. 그러면 찌꺼기 이 깻묵은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사장이라 뭐이라고 하는 이런 것은 다 깻묵이고, 속에, 알맹이 기름은 이 세 가지 이 능력이 기름이라 그 말이오. 그것이 뭐이냐 하면 부활의 권능이라. 주님의 부활의 권능에 나도 참여하기 위해서, 주님같이 부활의 권능이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힘쓴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현실에서 자기가 진리 하나 잊어버린 것 그거는 얼마나 봤느냐? 그 진리 하나 잊어버린 거는 자기가 생명보다도, 생명을 뺏기는 것보다도 더 손해로 봤다 그 말이오.
또, 예수님은 어떻게 봤느냐? 내가 현실에서 자기를 빼앗기든지 잊어버리든지 하는 그말은 뭐이냐 하면 자기의 기능을 잊어버리니까 자기의 자기 진리를 잊어버렸고 영감을 잊어버렸고 예수님의 대속을 잊어버렸으니까 말하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했으면 네 가 무엇이 소용 있느냐?' 너는 큰 손해 갔다 그 말이오. 그러면 예수님은 단 자기 현실에서 빼앗겨지는 진리, 잊어버린 영감, 또 잊어버리는 예수님의 대속은 네가 세상 것을 탐해 가지고 그거 탐하기 위해서, 그거 얻기 위해서 이라지만 온 천하를 얻어도 너는 손해 갔다. 이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뺏기지 안하고 얻는 이 능력은 천하보다 가치가 크다. 왜? 이것은 천하의 주인공이요, 천하를 통치할 것이요, 천하의 왕노릇할 것이요, 천하를 모두 다 먹이고 입히고 살릴 수 있는 기능이기 때뭣에 천하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한번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또, 이제 빛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가 이래 믿으나 저래 믿으나 아무나 따나 믿어도 다같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자기 믿은 대로 보응되는 것을 변동 못 합니다.
믿은 대로 보응되는 것이 당대에 되든지 이 대에 되든지 삼사 대까지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한 대로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느냐 백분지 일을 믿었느냐, 천분지 일을 믿었느냐, 십분지 일을 믿었느냐, 백의 백을 다 믿었느냐? 이제 예수를 믿고 안 믿은 그것은 너희들이 예수를 믿고 안 믿은 그게 대한 정당한 댓가인 정당한 보응 정당한 보상, 복수와 보상이라는 그것은 인간들이 가룰래야 가루지 못한 다 절대 못 가룬다. 숨기지 못한다. 가루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활하는 그것은 반드시 그대로 세상에서 나타난다 그 말이오. 세상에. 자기 믿는 것이 무궁세계에서 물론 나타나지만 이 세상에도 정확한 표시가 된다. 그 표시를 가리켜서 삼사 대까지라고 말을 했다.
또 천 대까지라고 말을 했다. 정확한 표시가 나타난다는 것, 아무나따나 저래 믿어도 되는 게 아니라 네 눈이 어두워 그렇지 자세히 봐라. 자세히 보면 요래 삐뚤어진 거는 그렇게 삐뚤어진 댓가가 그래 나오고, 조렇게 옳은 것은 조렇게 옳은 것의 그렇게 보상이 그렇게 나타났고 역력히 나타났는데 이 나타났는 걸 마귀란 놈이 보지 못 하게 하기 때문에, 그걸 보면 가슴이 따끔따끔하고 아, 내가 이거 자살행위를 하고 내가 지금 이 손해를 줬다 이라지만 그걸 못 보게 하기 때문에 이 마귀란 놈이 혼돈시켜 못 보게 하니까 우리가 그걸 안 보니까 이 고기덩어리 돈이나 없어지는 걸 알고 지위나 떨어진 걸 알고 직장 떨어진 거나 알지 거게 지금 손해간 거는 모른다 그 말이오. 이래서 네가 그 보응은 없앨래야,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다.
그러고, 이제 그 주인이 또 높이 동경 위에 두지 말 아래 두지 않는다. 네가 가진 그 진리는 '내가 구원 운동을 자꾸 일으키는데, 구원 운동을 일으키는데, 아무것이 그것이 들어서 미혹을 해 가지고 안 된다. 우리 교회 아무것이가 들어서 미혹을 해서 안 된다.' 이렇게 알면 우리가 답답하요 그런 꼴을 여러분들이 많이 느끼지 않습니까? 하, 조게 와 가지고 사람 만들라고 하면 그게 와서 똑 방해를 한다, 방해를 한다, 자꾸 방해한다 말이오. 그 방해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만 생각하면 낙망한기 쉽다 말이오. 내가 가 가지고 실컷 권면해 놓으니까 다른 것이 가 가지고 그만 미혹을 시켜 가지고 또 끌어 붙여 버린다 말이오 내가 살려 놓으면 또 죽인다 말이오. 살려 놓으면 죽이고 자꾸 이라니까 마음에 애가 터져서 그 방편으로 그래 하니까 나중에 가서는 무슨 시비가 일어나느냐 하면 육박전까지 난다 말이오. '왜 네가 가 가지고 이렇게 하고 이 사람을 죽이느냐?' 이랬는데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그거요.
말 아래 숨겨 두지 못한다. 인간들이 덮어 가룹니다. 내가 생명 운동을 하면 자꾸 방해를 합니다. 이래서 '생명은 너희에게 역사하고 사망은 내게 역사한다.' 그말은 나는 생명을 주는데. 다른 것들은 자꾸 사망으로 생명을 꺼 덮는 것을 하는 것을, 그것을 바울이 탄식을 했다 그 말이오. 이러나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왜? 주인이 둥경 위에 둬 버린다. 주인이 등계 위에 두기 때문에 이제 네가 증거한 진리는 귀 속에 증거해도 지붕 위에 드러난다. 네가 말한, 숨어서 은밀히 말한 것이 다 환하게 드러난다. 은밀히 한 것이 드러나지 안할 것이 하나도 없다 드러나기 때문에 네가 방해물에 대해서 염려하지를 말아라 38년된 병자가 와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좀 나보다 경한 자가 있기 때문에 먼저 가서 방해합니다. 나를 돕지 않습니다. 나를 방해하고 나를 도와 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보다 중합니다.' 예수님이 다 부인했다 말이오. 그따위 소리 하지 말고 믿기만 해. 일어서 걸어가 하니까 일어서 걸어가니까 되지 안했습니까? 이런 것도,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자기와 주님과 이제 진리와 영감과 이것만 들어 붙지 나하고 주님하고 진리하고 영감하고 주님은 예수님의 대속이라 말이오 이것만 하나가 되면 다 됩니다. 천하가 다 방해해도 상관없어. 이제 나를 높이 드는 것이 주인이라. 등경 위에 둬. 등경 위에 두기 때문에 이제 진리는 가루지 못한다. 네가 바른 길 걸었으면 가루지 못한다 네가 옳은 주장을 했으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네가 옳은 주장한 것은 옳은 깨달음 가지고 주장한 거는 언제 들어나도 온 세계에 들어나고야 만다 그러기 때문에 뭣이 들어서 방해한다고 헛된 충격을 받아 가지고 시기심의 마귀에 홀켜 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아라.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뭐 OO노회에서 그렇게 노회적으로 그렇게 결의를 해 가지고 이단이라고 말했지만 거게 대해서는 그들에게 밝혀서 알려 주기 위해서 우리는 증거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중 거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다시 투쟁할 필요가 없어. 다시 말할 필 요가 없어. 말하지 안해도 벌써 OO노회서는 그것이 아마 반수 이상이나 그리 아니면 삼분지 이 이상이나 벌써 인식돼 나갔을 거고, 그게 다 그 결의한 것은 틀렸다는 것이 될 것이고 얼마 안 가서, 죽을 때 되면 죽을 때되는 사람들은 다 그게 틀렸다는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요 말에서 우리가 큰 위로를 받고 담력을 얻어야 됩니다.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또, 그라고 이제 "등경 위에 두나니" 등경 위에 두니까 그 불이 환하니까, 불이 환하니까 이제 방이 환하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모든 사람이 다 환해졌지. 환해지는데 이제 모든 사람을 환하게 되는 것은, 네 게 속한 다른 사람을 점점 예수 잘 믿구로 만드는 것은 이 등불의 도수를 돋구는 것밖에 없어.
등불의 도수를 돋구는 것밖에 없어. 등불의 도수를 돋구는데, 다시 말하면 네게 있는 빛을 돋구는 것밖에 없어. 빛을 돋구면 어떻게 돋굽니까? 빛을 언제 돋굽니까? 자, 한번 물어 봅시다.
빛을 언제 돋궈야 돋궈집니까? 현실에서 빛을 돋굽니다. 현실에서 빛을 돋구는데, 그러면 이 빛은 뭣이 빛입니까? 진리와 영감과 대속 이것만 빛입니다.
이러면 내가 진리를 하나 더 차지해서, 진리가 하나 더 많아졌고, 영감을 하나 더 차지했고, 예수님의 대속을 하나 더 차지했고, 차지한 건 현실에 요 현실에 차지했으면 또 그만치 많아졌고, 또 차지하면 그만치 많아졌고, 이래서 진리로 충만하고 영감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점점 충만하고, 어떤 사람은 대속의 부자가 되고 영감의 부자가 되고 진리의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돈 부자지만 이 세 가지 보배는 하나도 없는 거지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것만 놀궈라. 자꾸 등불의, 광명의 그 광명만 자꾸 돋궈라. 자꾸 이 빛이 강하도록만 만들어라. 강하게만 만들면 이제 저거는 저절로 환해진다 .말이오. 강하게 만들고, 이 빛 꺼지면 저것도 꺼져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도자가 꺼지면 온 교인이 다 꺼져 버리고, 지도자만 살아나면 온 교인들이 살아나고, 지도자가 충만해지면 온 교인들이다 충만해진다 하는 이것으로써 우리에게 이제 담대히 일해라. 모든 문제는 너 하나에게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자체의 구원을 비유해서 소금으로 말했고 자기에게 속한 맡은 자의 식구들을 구원하는 것을 비유해서 빛으로 말했기 때문에 요 진리를 자꾸 새겨서 가지자 그 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자꾸 듣고 듣고 자꾸 들으십시오. 이제 누가 자꾸 듣구로 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 지금은 아직 해 주지만 나중에 해 줄 사람이 없다 말이오. 내인들 내 자꾸 해줍니까? 또 딴거 해야지, 이러니까 자기 혼자 자꾸 새김질을 해서 백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이래 가지고, 그래도 몰라요 실행을 해 봐요. 실행해 보고 또 자기가 자꾸 익혀 보고 새김질해 보고, 이라니까 기도 가운데에서는 자기 마음으로 실행해 보고, 또 현실에서는 실지로 실행해 봐서 현실에 실행하는 그 실행이라야 마지막에 완전히 결말을 지운 것이지 그 전에는 결말을 지운 게 아니고 다 미결이야. 그거는 미완성품이라.
이래도 봐 새벽 기도 이만치 안 나온 것, 이것 다 뭐 어디, 귀신에게 다 끌려 가지고 이래 못 나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