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19:18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1987. 9. 20. 주일오후
본문:베드로전서 1장 13절∼19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우리는 만물 가운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상하나 영원 불멸의 존재입니다. 영질과 물질의 양성으로 지음받은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 하나뿐입니다.
사람은 인생으로 출발한 이 세상이라는 세계와 또 낙원이라는 세계와 천년왕국이라는 세계와 영원 무궁한 세계를 우리들이 다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출발하는 토막이요, 그 다음 우리의 세계는 낙원 세계요, 그 다음 세계는 천년왕국 세계요, 그 다음 세계는 무궁세계입니다.
낙원 세계는 잠깐 정리하는 휴식 세계요, 천년왕국은 재연습 세계요, 무궁세계는 영원한 보응을 받는 세계입니다. 그중에 세상이라는 이 토막은 가장 중요한 토막입니다. 이유는 영원의 움싹과 같은 세상입니다. 영원의 터가 되는 세상이라고 말씀하시고, 영원의 원인이 되는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영원 무궁을 심으는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하루밤과 같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지마는 영원을 가진 우리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토막입니다.
세상에 있는 이 일반적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여게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자들에게는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이 비밀의 영원을 우리에게 필요 있는 대로는 다 지식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과 개인이 체험하고 경험한 자기 지식 이 세 가지로 세상은 살아나가고 하루 하루를 돋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생각하여 무식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살아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시작하는 이 한토막 살이를 잘 하면 영원히 잘 되고 이 한토막의 생애를 잘못 하면 영원한 실패자 비참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이약신 목사님이라고 고신 총노회 때 총노회 노회장을 지냈고, 또 고신으로 갈라지기 전에 조선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이래 있을 때에 장로교가 제일 컸었는데 장로교의 총회장으로 여러 차례 지낸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그 목사님이 마지막에 책 한 권을 내 가지고, 얼마나 판매가 됐는지는 모르지마는 제게 그 책 한 권이 왔는데 내가 보니까 거게 책 이름이 그렇게 쓰여 있습디다.
‘어떻게 살고 갈까?’ 어떻게 살고 갈까 하는 그 명사가 그 책 이름으로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한 마디에 저는 많은 깨달음을 가지고 그 책을 내용을 다는 훑어 보지 못했지마는 거튼거튼 훑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분이 그 책을 낸 지 후 일 년이 못 되어서인가 똑똑히는 모르지마는 세상을 떴습니다. 아마 갈 때가 가까우니까, 이 세상에서 뭐 외국에 유학도 했고 참 최고의 지식을 가졌다고 또 권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영계도 대단히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우니까 자기 생각에 가득 찬 것은 땅위에 있는 이런 거 저런 것을 취욕하려는 것보다도 이거 참 이 세상살이 한 것을 돌아보니까 너무 기막혀서 내가 남은 때를 어떻게 살고 갈까 하는 그런 뜻으로 그 책 이름한 것을 봤습니다.
1장 24절에는 보면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하신 말씀이 베드로전서 1장 24절로 25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고 갈까? 이 세상이라는 이 한 토막을 어떻게 살고 갈까? 우리는 가는 사람입니다. 거게 있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첫째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구원하고 또 멸망될 사람이 멸망의 사람으로 판정이 나는 이 작업이 끝나면 끝나는 즉시로 모든 것은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하여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은 언제든지 이대로 있을 세상이 아니고 불살라져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에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하는 그 성구와 그러면 배치성이 있지 않느냐 생각을 가지겠습니다. 예, 땅은 영원히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이런 피조의 원소들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원소는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체질이 녹아져서 다 원소화되어지고 천태만상의 모든 형태와 색깔들은 다 풀어진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첫째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구원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안하여 멸망되고, 구원 받는 데도 천층 만층의 차이가 있고 또 구원을 대적하는 데도 수많은 층어리가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작업들이 다 끝나면 즉시 세상은 다 불사른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세상인가, 어떠한 세상인가? 이 세상에 대해서 착각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세상을 우리가 자기 살 곳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루를 자기 살 세상으로 착각했으면 그만치 자기는 영원을 손해보게 됩니다. 세상은 일 년을 살든지 백 년을 살든지 세상은 언제나 떠날 준비하는 나그네 세상이지 세상에 살 곳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영원을 향하여 나는 갈 세상이다, 이사 갈 준비를 할 세상이다, 영원을 향하여 떠날 준비 그곳에 가서 살 준비 하는 세상이지 세상에 있을 세상도 아니요 세상에 있을 준비를 하는 날이 아니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자기의 거주처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오판하면 안 됩니다. 잘못 판단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이런 환경 저런 환경 참 별별 그 현실들을 자기도 닥치고 다른 사람들의 닥치는 모든 별별 종류의 현실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자기가 살 곳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눈물도 나고 한숨도 나고 교만도 생겨지고 자기 자랑의 자긍도 생겨지는 것이지 이것은 내가 살 곳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에 닥쳐진 이 현실은 다 지나가나 내가 이 현실을 상대해서 행동한 것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래서 베드로후서 3장에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형태가 다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모든 일들을 드러난다” 이랬습니다. “모든 일들은 드러난다” 모든 일들이 드러난다 그말은 인간의 행위는 하나도 없어지지 안하고 다 그대로 남아 있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현실은 과거되고 미래는 현실되는데 현실에서는 일방적 지식 가지고서 현실만 좋도록 맞추어 살고 그것이 과거가 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약력이나 혹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대해서 자기의 생애를 역사 위에 드러냈을 때에 자기의 과거가 너무 흉해서 그 역사가 너무도 원통하기 때문에 그 역사를 변경할라고 해서 ‘이것을 고쳐 달라. 이 역사를 이것을 고쳐 달라. 내가 너무 그때는 잘못했는데 후세에 부끄러우니까 이것을 고쳐 달라.’ 해서 역사에 흉한 페이지를 고쳐 달라고 돈으로 매수하고 또 권세로 위협하고 이래서 참된 역사가들은 다 이 권리가들이 과거를 새롭게 고쳐 달라고 하는 그 요청을 들어 주지 안하다가 진실한 역사를 기록한 사학자들은 생명 바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너무 지나간 때가 흉하기 때문에 그게 원통해서 고쳐 볼라고 애를 쓴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전에 자기 담화 발표하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말하기를 ‘나는 역사에 내가 오점을 두지 안할라고 나는 하고 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그 모든 행위를 듣고 보고 기록한 것을 알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야 알든지 모르든지 어쨌든지 세월이 지나가면 다 비밀은 드러나기 때문에 비밀이 드러날 때에 그때에 인간들에게 부끄러울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 하는 그런 말을 발표하는 것을 제가 언제 라디오에서인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면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그들의 생애를 조심해서 참 큰 실수를 범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물론 정권을 잡고 할라 하니까 별별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마는 어쨌든지 그 부부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부부가 다 순국을 했습니다. 그래서 순국한 국부요 국모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대항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지나갔으나 그분들은 국모요 국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승만 대통령도 그는 국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어떤지 아직까지 죽고 난 다음이라야 알지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이 세상살이는 모든 만물이 다 불타서 형태와 본질이 다 녹아져서 하나의 원소로 돌아가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에 다시 그 종별대로 천태 만상의 새로운 형체를 가지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만물이 새롭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이렇게 말을 했지마는 요한계시록에는 보면은 이것을 가리켜서 “성도들이 입고 있는 옷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었으니 그것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베라는 것은 날과 씨로서 결어가지고서 베가 되는 것인데 그 날 중에 한 오라기가 빠지면 얼이 나서 흉하고 또 씨 중에 하나가 빠지면 흉한데 비유컨대 어떤 사람은 다 벌거벗고 실내끼 한 내끼를 둘둘 감고서 있는 그런 사람도 있지 않느냐? 어떤 사람은 그저 한 몇 내끼로써 이렇게 엉것엉것하이 전부 흠점이고 온 전신이 가룰래야 가룰 수 없이 그렇게 흉하게 돼 가지고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겠다.
또 고린도후서 5장에 말하기를 “이렇게 내가 힘을 쓰는 것은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이렇다” “내가 무궁세계에 벌거벗은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힘쓴다” 또 말하기를 무궁한 세계에 영광은 자기의 모든 행위를 입고 다니는데 자기의 행위는 자기의 영원한 의복과 같다고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이를 닥치는 대로 거머당겨서 많이만 가지면 제것인 줄 알고 많이 먹고 많이 쓰면은 복된 사람으로 이래 알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는 그대로 자기 행위는 일생이라는 그 자기 세월에 하루 이틀이라는 그런 자기 이력으로써 의복을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영원을 위해서 결어나가고 있는 세상이다.
이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7장에는 말씀하시기를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많이 쓸라고 하지 말아라” 이랬습니다. “과도히 쓰지 말아라. 쓰는 자는 쓰지 않는 것같이 하고 쓰지 못하는 자는 쓰지 못하지 않는 것같이 해라. 써도 별것 없고 못 써도 별것 없기 때문에 못 써도 못 쓰는 거기에서 너 할 일 따로 있고 쓰게 되는 거게서 너 할 일 따로 있기 때문에 너 할 일을 생각하지 많이 쓰면 복 있다 적게 쓰면 불행스럽다 그렇게 하지 마라.”
우리가 하루 하루의 생활에서 모든 형편과 만물을 접촉해서 내 현실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것은 그것을 좋은 거는 내가 취하고 나쁜 거는 뱉고, 좋으면 기뻐하고 나쁘면 싫어하는 그런 네가 착각을 가지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이 네가 원한다고 주는 게 아니라, 네가 노력한다고 부자된 거 가난해진 거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해 놓은 것으로 그대로 정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다만 그것을 주시는 것은 그것 가지고 경건을 연습하도록 주셨다. 거룩을 연습하도록 주셨다.
이 세상 것도 연습하면은 숙달되는데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세에 유익이 크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게 비유가 될란지? 이 가을이 오면은 모두, 나는 큰 학교는 안 가 봤습니다.
국민학교 요 뒤에 있기 때문에 내가 내려다 보면 보입니다. 또 우리가 국민학고 다닐 때에 잘 봤는데 달음질을 할 때에, 달음질하는 데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장애물을 거쳐서 달음질 하는 것도 있고, 또 들고 가는 데에 조심 있게 들고 가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이제 누구를 만나 가지고 가도록 그런 것도 있는데 그것은 다 그 자리에서 연습해서 너는 어느 정도 숙달됐느냐 하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거게서 자기는 연습해서 구멍으로 나가는 것이면 그 구멍으로 나가는 연습을 해서 그게 필요하기 때문에 능숙하게 숙달할라고는 아니하고 그 구멍으로 나가는 그것을 제것 만들 것인 줄 알고 그놈을 꺼멍꺼멍 걸머지고서 저거 집으로 가면 어짭니까? 암만 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꼭 그와 같이 이 세상 수많은 형편을 우리가 만나는 것은 거게는 단지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는 데에 쓰이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서 거룩이 연습되고 경건이 연습됩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의 법칙으로 주신 그 법칙을 지키는 것을 거룩이라 하고 경건은 대주재 이분을 위하는 것을 경건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너는 거룩이 몇 점이며 경건이 몇 점이냐? 거룩과 경건만 그때 가치로 나타나지 나머지기는 다 불살라지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 만날 때에, ‘요게서는 하나님의 법칙을 요렇게 하면 하나님 법칙을 지키는 것이다. 조게서는 조렇게 하면 법칙을 지키는 것이다.’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그 현실을 통과하는 그것만이 자기 할 일인데 이 법칙 이것을 뺏기지 안하고, 이 법칙을 지키는 것이 거룩인데 이 거룩을 뺏기지 안할라고 우리가 성경에 잘 아는 사람 중에 다니엘 같은 사람은 이 자기에게 주신 자기 법칙을 뺏기지 안할라 하니까 사자구덩이에 집어 넣을라고 왕이 하루 종일 사정을 했습니다, 하루 종일.
‘내가 몰라서 이놈들에게 이 간신들에게 꼬여 가지고 이러니까 네가 이 법칙을, 내가 내놓은 이 법칙을 지키지 안하면 이 사자구덩이 들어가는 것이니까 이 법칙을 지키라 해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법칙을 지켜야 거룩이 되지 그걸 어기면 거룩이 안 되기 때문에 그 거룩을 안 뺏길라고 하루 종일 왕으로 더불어 신강하다가 마지막에는 왕이 할 수 없어서 사자구덩이 집어 넣을 때에 사자구덩이 묶여 들어가면서도 그 거룩을 놓지 안하고 거룩을 잡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이런 것은 어떠한 그 혹독한 정치나, 혹독한 가족이나, 혹독한 자기의 동역자의 이 관계라도 어떠한 혹독을, 어떠한 그 잔인한 그런 것을 만나도 거룩을 뺏기지 않고 경건을 뺏기지 않는 그것이 우리가 건설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것만이 가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전지 전능자로서 만들어 놓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모자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나라에서는 필요한 실력이 뭐이냐? 하나님이 주신 생애 법칙 그것을 준행하는 그자만이 하나님께 필요하고 또 경건은 그분을 위하는 거. 그분 중심 가지는 거, 그분을 위하는 거. 그분을 위하는 것만 가치로 삼고 실력으로 삼습니다.
영계는 오만 것이 다 구비돼 있는데 거게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칙을 절대 지키는 자, 당신의 법칙을 지키는 실력이 있는 것 그만치 일을 맡기시고 등용하십니다. 또 하나님을 위하는 그 중심이 있는 것만치 그 나라에서는 등용됩니다. 그 나라에 무궁세계 그 나라에 실력은 하나님 법칙을 지키는 거룩과 하나님을 위하는 경건 이 두 가지만이 실력이고 그 외에는 실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모든 성도들을 교회사에서 성경 역사에서 볼 때에 이해 못 하는 일들이 많으나 그들이 다 거룩과 경건을 자기의 존재의 목적으로, 재세의 목적으로, 자기들의 수입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고 보면은 그 모든 게 다 이해가 다 환하게 됩니다.
이래서 우리는 세상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제가 훔쳐서 뺏들어서 많이 가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오. 암만 가져봤자 저는 그것으로써 거룩 다 팔았지 경건 다 팔았지 그것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다 원수가 되는 그 없어지지 않는 그런 것만 만들어 놨지 백해 무익입니다. 백해 무익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에 거리끼는 거, 경건에 거리끼는 거,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거 해 가면서 땅위에 취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거 다 완전히 변질된 정신 이상자의 생활이지 정상적인 인간 생활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착각을 우리가 아주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내가 먹고 입고 쓰는 것도 목적이 아니요 또 취하는 것도 나의 목적이 아니요 그것은 그날 그날 먹고 입고 현상 유지만 되면 됩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해 놨어. “먹을 것과 입을 거 있으면 족하다” 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너는 억만금이 오니까 이 돈이 많이 오니까 거룩을 파는구나. 또 너는 많이 가난해지니까 거룩을 파는구나.’ 여게서 후회하고 연습해서 이제는 많이 와도 거룩을 변동 않고, 아무것도 없어서 “환난이냐 곤고냐 기근이냐 적신이냐” 기근이라 말은 굶어 죽는다 말이요 적신이라 말은 빨가벗어 죽는다 말입니다. “환난이랴 곤고랴 기근이랴 적신이랴 위험이랴 칼날이랴? 그 어떤 것이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그분의 생애 법칙을 내가 변동할 수 있느냐? 내가 어떤 것으로써 나를 선택해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하는 이 경건을 내가 변동할 수 있느냐?” 그것이 우리가 가져가는 우리의 행실입니다.
우리 행위입니다.
사람 만날 때에 우리는 거룩 뺏기기 쉽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 만날 때 거룩 뺏기기 쉽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만날 때 거룩 뺏기기 쉽고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거 거룩을 경건을 완성시켜서 견고케 하기 위해서 천태만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볼 것입니다.
천태만상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들이 변해져서 요렇게 조렇게 자꾸 변해지는 것을 그에게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그 속에 두고서 연단시켜서 연성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나 할 일은 거게서 거룩 연습이요 경건 연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거게서 웃는 것도 비정상, 우는 것도 비정상, 어떤 현실이나 내게는 꼭 같고, ‘목적도 같고 수입도 같고 가치도 같다. 내게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현실을 줬기 때문에 이 현실에도 내가 필요해서 여게서 내 거룩과 경건을 만드는 데 필요해 줬다.’ 우리 현실에서는 어떤 것이나 가치가 꼭 같고 내게 효력도 꼭 같고 내게 수입도 같고 내가 할 일도 꼭 같으니 거룩과 경건만이 나 할 일이라 하는 이것이 정상이요 이것이 아닌 것은 다 벌써 환경에 피동된 것이기 때문에 그만치 생명이 빈약한 것입니다.
아무리 홍수가 들이 말려도 생명 있는 것은 피라미 새끼라도 제 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생명이 약하면 산 고기라도 물에 실실 떠내려가서 피동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환경에 피동된다는 것은 벌써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생명이 없는 증거라 말은 우리 생명이 무엇입니까? 우리 생명은 절대자이신 조물주 대주재와 나와 연결이 생명입니다. 그분과 연결이 빈약하면 환경에 휘말려서 피동됩니다. 그분과 나와의 연결이 강하면 모든 피조물을 다 제어하고 능가할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착각하지 맙시다. 이 세상 다가 제것 아니라 자기 현실만이 자기 세상입니다. 자기 현실은 무엇입니까? 귀로 듣는 거, 눈으로 보는 거, 라디오에 듣는 것도 자기 현실이요, 보고 듣고 접촉하는 거 느끼는 거 그 모든 것이 다 현실이니 거게는 천태만상의 것이 있어서 백 현실을 만났으면 그 사람은 백 번 연습하고 백 가지 연성했고, 만 가지를 만났으면 만 번 연습했고 만 가지를 연성했고 만 가지를 실패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치 않는 일관된 자기의 일생을, 깨달은 사람들은 원치 않습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는 향기만 날린다” 그저 이런 현실 저런 현실 자꾸 교체해 와서 우리는 가다가서 참 이걸 잊어버리면 답답해서 ‘이 어짠 일일까?’ 하고서, 다른 사람이 보는 대로는, 다른 사람이 아는 현실은 그거 한 가지 두 가지지마는 그 사람의 지혜가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은 하나의 현실을 닥쳤지마는 지혜가 만일 한 백 개 된다면은 한 현실에서 다른 사람 보지 못하는, 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백 가지 지혜를 가진 사람은 백 가지 면을 보기 때문에 백 가지 면에 시험이 들어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지식이 많은 자는 번뇌도 많다” 이랬습니다.
“번뇌가 많은 자는 투쟁도 많다, 투쟁이 많은 자는 승리도 패전도 많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안팎에 눈이 가득 차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볼 수 있는 면 보지 못하는 면, 현재의 면 영원 무궁의 면, 어떤 존재는 종류도 하나밖에 모르니까 하나에게만 맞춰 살지마는 어떤 존재는 종류를 억만도 더 광범위하게 보고 거게 맞춰서 사는 것이니,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 맞춰 살 만한 머리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간단 명료한 법칙을 줬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법칙을 줬기 때문에 이 법칙은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는, 이 법칙대로 하면은 거룩과 경건이 되고 이 법칙을 어기면 거룩과 경건이 안 되니 이 법칙을 네가 삼가 가질 것과, 그 다음에는 이 법칙인데 그 법칙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 법칙을 가졌지마는 이 현실에서는 이 법칙을 적용해야 되나 저 법칙을 적용해야 되나? 거게 적용되는 법칙이 열 가지로도 볼 수 있고 백 가지로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이 여게 대한 법칙인가? 그것은 기름 부음이 너에게 가르쳐 준다. 영감이 가르쳐 준다.
영감이 가르쳐 주지 안하고 그 법칙대로만 사는 사람은 율법주의자라. 아직까지 그 사람은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 법칙은 윤곽 법칙이기 때문에 하나의 울타리에 지나지 못하고 범위를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다만 그거는 규범이라는 것이고 그 안에서 중앙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맞추는 것은 “너를 중생시킨 성령이 너를 옳고 바르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대로 살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착각하지 맙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거머닥쳐 보겠다고서, 곰발같이 거머닥쳐 보겠다고.
사자같이, 아예 웃는 안면 닥치면 안 될 터이니까 미리부터 ‘저놈 독한 놈이기 때문에 저놈은 가까이 안 가야 되겠다’ 할 만치, 일생 동안 엉크려 놓으니까 나이가 많아져 갈수록이 얼굴이 귀신 얼굴 같습니다. 흉측합니다.
그렇게 사자 모양으로 표범 모양으로 곰 모양으로, “시기하고 싸우고 피를 흘리고 해도 너희들이 더 얻어지는 것 아니다, 속지 말아라.”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착각했던 여게서 깨어나야 됩니다. 세상은 내가 그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주신 것도 아니요, 내가 먹고 쓰기 위해서 주신 것도 아니요, 그것에 대해서 현상 유지로 그 날을 유지할 수 있는 먹을 것과 입을 거 있으면 족하고, 내가 쓰는 것은. 그 나머지기는 거게서 내가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라.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라.
‘내게 지금 비참한 일이 왔다. 여게는 뭐인가? 비참하니까 울 건가? 기쁜 일이 있으니까 내가 웃을 건가?’ 웃는 것도 너 할 일 아닌 것, 우는 것도 너 할 일 아닌 것, 너 할 일은 거게서 거룩과 경건만이 너 할 일이라. 거룩과 경건만이 너 할 일이라.
이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자기의 거주지로 생각하는 이런 착각을 우리가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 살이는 나그네 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관에 자는 것이니까 여관에 오늘 떠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하루를 살아도 떠날 준비한 그 사람이, 무궁세계 가서 살 그 준비 한 사람이, 그 준비 하루 하고 떠난 사람은 후회 없고, 백 년 살아도 항상 그 준비 하고 떠난 사람은 후회 없고, 땅위에 살 준비 한 것은 하루 살고 가도 저는 그만치 헛일, 백 년 살고 가도 그만치 저는 헛일.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나의 거주처가 아니다. 거주처로 착각하지 말아라.
물론 영주처로야 생각지 않습니다, 다 죽는 줄 알기 때문에. 이러나 ‘내가 여기 지금 내가 살 곳이다’ 거주처로 생각지 말아라. 너는 여게서 영원을 준비하는 나그네의 생활이기 때문에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행인 같은 너희들이니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래서 세상을 자기 거주처로, 세상에 있는 것을 자기 것 삼는 것으로, 자기가 다 써야 자기 것 되는 것으로 그렇게 세상을 착각하지 말고 다만 그것은 내가 세상에 물질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먹어야 입어야 유지되니까 먹을 거 입을 거 그것으로 족하고, 먹는 것도 그날 지나가면 다 헛일, 입는 것도 그때 지나가면 다 헛일, 다만 너는 영원을 접촉되는 모든 데에서 연습해라. 거룩을 연습해라.
처음에 닥쳤을 때에 거룩을 실패했으면 두 번에는 실패하지 안하고 거룩을 성공하고, 세번째는 경건을 성공하고,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에, 두 번에 안 되면 세 번에 자꾸 이렇게, 왜 하나님께서 꼭 같은 현실을 자꾸 줬다가 뺏들었다가 줬다가 뺏들었다가 이렇게 바꾸느냐? 그것은 그 현실에 일차에 실패했으면 이차, 이차에 실패했으면 삼차에 자꾸 이렇게 교체해 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든지 재연습 재연습으로써, 마치 요새 재수 학생들 모양으로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셔서 하는 것인데 이거는 모르고, ‘먼저 내가 취하지 못했으니까 요번에 취해야 되겠다. 지난번에는 내가 반밖에 못 취했으니까 요번에는 다 취해야 되겠다.’ 이 어리석은 자야! 취하라고 주는 게 아니다! 먼저도 거룩과 경건을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재연습하라고 보내는 것인데 왜 세상을 착각하고 있어! 우리는 이 세상을 착각한 데에서 완전히 돌아서야 됩니다. 세상을 오판한 데서 우리는 돌아서야 됩니다. 이거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이제는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네 선봉장으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어떻게 걸어서 유일하신 조물주의 다음 제이위의 보좌에 앉았느냐? 너도 이기면 그 자리 앉는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편에 앉는 것이 그는 본야 하나님이시지마는 우편에 앉는 것은 피조물인 인성이 하나님 우편에, 창조주 다음, 모든 피조물 위 그 자리를 취한 것이 예수님의 생애와 인성이 같이 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세상에서 오산하면 안 됩니다. 정확한 계산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오산하면 안 됩니다. 오산이라 말은 네가 오늘 하루 생활에서는 네 수입이 얼마며 네가 수입할 것을 수입 못 해서 손해가 얼마냐, 수지가 어찌 되느냐, 그 계산을 정확하게 하고서 살아라 말하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맏아들은 서른세 살만 살겠다 하고서 서른세 살에 공산주의자에게 잡혀가서 순교했습니다. 그분은 아주 신앙 생활을 참 주기철 목사님 꼭 체를 받아서 그렇게 살았는데 그분은 매일 생활하기를 시간표를 만들어 놓고 생활하면서 시간표를 만들어 생활하니까 그 꼭 시간표에 맞춰서 사니까 그만 기계적인 인생이 되는 것 같고 자기 속에 성령의 감화에 피동된 영감 생활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똑 기계 생활이 되는 것 같아서 재미 없다 그라다가 또 그 생활 치워버리고 자기가 명상 기도 가운데서 깨달아지는 대로 살고 이렇게 살고, 여러번 해 보다가 마지막에 말하기를,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시간을 정해 놓고 사는 그것이 마지막 계산할 때는 수입이 낫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서른세 살까지 살지마는 주님 부르실 때까지 그때까지 나는 시간표를 정해 놓고 나는 수지 계산을 맞추면서 살겠다.’ 그렇게 살았다는 말을 제가 우리 친구 김정덕 목사님에게 하루밤 달밤에 저게, 아따 거기가 지금 서울대학 있는 데 거기가 뭐입니까? 그 산이 뭐이요? 관악산. 관악산 거게서 둘이 솔밭 사이에서 누워서 생각하면서 얘기할 때 그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 사람들은 자기 생활에 그 표준을 가져가지 못할 것, 또 영원히 있지 못할 것 그런 거 가지고서 표준해서 수지 계산을 맞추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모든 것이 풀어지고 이 모든 것이 다 녹아지고 불에 타서 다 체질에 녹아지나 너희들은 이렇게 되니까 어떠한 사람이 돼야 되겠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라 말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라 말이니 곧 우리 개인의 죽음의 날입니다. 곧 우리가 죽었다가서 이다음에 부활할 때에 그 부활의 날을 말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심판의 날을 말하고, 행한 대로 영원히 그대로 보상받는 그날을 두고서 가리켜서 하나님의 날이라 말해.
하나님의 날은 이게 다 하나님의 정한 날입니다. 우리가 정한 날 아니오.
하나님이 정한 날이오. 우리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이 정한 날이요, 재림의 날도 하나님이 정한 날이요, 우리의 부활의 날도 하나님이 정한 날이요, 우리가 심판 받는 날도 하나님이 정한 날이요, 영원한 갚음을 받는 날도 하나님이 정한 날이니까 그 날을 두고 계산해라.
이래서 모세는 말하기를 “주여 나에게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했어.
‘날수 계산하는’ 그말은 자기가 하루 하루 생애를 하는데 오늘 생애는 수지가 어찌 된다, 손해가 얼마다 수입이 얼마다 하는 그 수지 계산을 따져가면서 사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위대한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에게 구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산하지 말고 정확한 그 결산에서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정확한 결산. 정확한 결산. 뭘 두고 결산할 건가? 우리는 하루 온 세상 것을 다 가졌다가 내 줬다가 뭐 오고 가고 많은 무역하는 것도 그것도 자기 수입은 아닙니다. 온 세계를 다스리는 것도 자기 수입은 아닙니다.
제가 웅천교회 집회 갔을 때에 강단 옆에 판때기가 하나 있는데 거기 쓰이기를 ‘나는 세계를 다스리는 것보다 주를 위해 죽겠노라’ 하는 그런 표어가 하나 거기 기록돼 있어서 내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이 표어가 이거 어짠 표어냐?’ 이라니까 ‘녜, 이것이 주기철 목사님이 자기가 이 교회에서 나 가지고, 이 교회서 나 가지고서 이 교회서 전도사 돼 가지고서 나갈 때에 자기가 이 표어 써놓은 것이 이것이 주기철 목사님의 필적입니다.’ 그렇게 말해서 제가 그때에 다시 봤습니다.
그분은 ‘세계를 다스리는 것보다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그말은 거룩과 경건에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주를 위해서 사는 것 주를 위하는 경건, 주를 위하는 경건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깨달았기 때문에 이것을 위해서 자기는 생명 투자하겠다 하는 벌써 그때부터 싹수가 달라서 그분은 우리 한국 교회에 참 생명을 아주 광채 있게 밝게 전하고 갔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루 종일 살면서 계산할 것은 그 날을 두고서 계산하는 것이 이것이 지혜 있는 일입니다. ‘오늘’ 그 날에 없어질 것이면, 수많은 재물을 취해도 그 날에 없어질 것이면 ‘오늘 나는 완전 실패다.’ 자기는 그날 있는 것을 다 뺏겼다 할지라도 그 날에 수입이 됐으면 ‘나는 오늘 대승리를 하고 수입을 가졌다.’ 이라니까 들어오는 것도 그 날을 두고 계산하고, 나가는 것도 그 날을 두고 계산하고, 자기 몸이 있는 것도 그 날을 두고 계산하고, 몸이 상하는 것도 그 날 두고 계산하고, 요이불 자리에 눕는 것도 그 날 두고 계산하고, 자기가 감옥에 드는 것도 그 날 두고 계산하고, 그 날을 두고 계산하기 때문에 먹는 것도 주를 위해서, 굶는 것도 주를 위해서, 자는 것도 주를 위해서, 노는 것도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주를 위해서, 주님 위한 것이 아니면 무슨 가치 있습니까? 당신이 나에게 성별의 법칙으로 준 그 생의 법칙을 어겼다면은 그 어기고 뭘 취하면 우리에게 유익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그 날을 두고 우리는 계산을 해야 됩니다. 그 날을 두고 계산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낳은 아이와 같다”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늘 이렇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순교하는, 감옥에서 순교할 그 마지막에 그가 발표하기를 “나는 이제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거룩한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내가 남은 것은 주님 앞에 승리 받을 것뿐이다.
면류관 받을 것뿐이다. 이제는 싸울 싸움 다 싸우고 승리했다.” 그분은 그렇게 모든 것을 정확한 계산을 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되지 맙시다. 세상은 참 중요한 토막입니다.
무궁세계보다 세상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중요한 토막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경건을 위해서 쌓아 두다가 없어질 세상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착각하지 맙시다. 세상살이에서 오판하지 맙시다. 오산하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전부가 주님 앞에 면류관 받을 그 일을 준비하는 거게에 다 매진하고 주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젊어도 모릅니다.
서 목사님은 젊지마는서도 갔습니다. 그분은 과연 잘 살았습니다. 참 나는 그분이 참 부럽습니다. 그분은 꼭 요걸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은 이해 못 할 생활을 했습니다.
그분이 서울대학에 법과를 졸업했고 내가 누구한테 말 들으니까 학교 다닐 때에 그분이 참 천재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분이 여기 와 있구나 하는 것을 나는 ○○○장로님한테 내가 들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이 말한다고서.
이랬는데, 그분은 요걸 알았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는 가난한 데서 공부시켰으니까 이제는 졸업하면 그만 뭐이 돼서 이제 가정의 어려움을 면하겠다 했는데 졸업장 딱 받고 삼십 분 거게 있다가 출발했습니다. 삼십 분 거기 있다가 출발해 가지고서 이 서부교회 와 가지고서 노동하고 또 국수 먹어 가면서 국수 장사 해 가면서, 국수 만들어 팔아 가면서 그래 가지고서 생활 했습니다.
그분하고, 내가 ‘너 공부했으니까 좀 고시 시험 좀 준비해라’ 어짜는고 볼라고.
그때 그 청년들이 많이 했는데 그 사람 하나만 통과했습니다. 몇 달의 다급한 공부에서 그 일차 고시 통과했습니다. 그 사람 일차 고시 통과하면 이차 고시는 더 쉬울 사람입니다. 그 본질이 그렇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차 고시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이차 고시를 볼라 하는 것을 내가 그때에 ‘하지 말아라’ 왜? 네가 했다고 해 가지고서 판검사로 나가지는 안하지마는 하면은 네가, 다른 사람이 너를 저 사람은 저렇다 해서 올려 주니까 네게 손해고, 혹 네가 꿈에라도 ‘나는 이거 고시에 합격했는데’ 혹 다른 사람한테 대화할 때 네가 잘못하면 법 자랑하는 사람 될 터이니까 네게 유익이 없다 이랄 때에 중단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뭐 서울대학에 다른 과가 많지만 그때는 법과가 제일 천재입니다. 이랬는데 이 계산을 보고 이걸 알기 때문에 그분은 딴거 보지 안했어. 그저 그 시간까지 진리 배우고 진리 자랑하고 그라다가 떴어.
광안동교회도 일해 놓은 것을 그것을 가 보면은 아주 참 그 이상 더 할 수 없을 만치 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우리가 살고 갈까? 우리는 잘 살고 가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잘 살고 가야 됩니다.
세상을 잘 살고 가는 것은 이 세상은 영원의 원인과 종자와 같은 이 세상이기 때문에 이걸 알고 오늘에 생애가 낙원에도, 천년왕국에도, 무궁세계에도, 심판에도 다 유익되고 수입이 되는 그걸 해야 잘 살고 가는 것이지 뭐 지위 있고 권세 있고 잘 먹고 잘 입고 제 욕심대로 살면 잘 살고 가는 겁니까? 우리가 이런 것도 다 오판이라 그말이오.
세상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거주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떠날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세상을 정판하고 오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생애 하루 하루를 정확히 계산하고 살아야 되지 오산하면 안 됩니다. 헛된 수입을 제 수입으로! 제 수입 제 손해를 정확하게 따져서 알고 가는 우리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