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19:13
세상은 어떻게 살고 갈까
1987. 9. 16. 밤 (수)
본문: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 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 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지난 주일도 유치반 중간반에서 이 공과를 가르쳤고 또 닥쳐오는 이번 주일에도 이 공과를 가르칠 것입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다 외우도록 그렇게 힘쓰고 또 외우고 자기가 많이 눈 감고 묵상하면서 새김질하고 스스로 은혜를 받도록 그렇게 힘을 씁시다.
제목은 ‘세상은 어떻게 살고 갈까?’ 하는 것이 제목입니다. 이런 제목도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정신 없이, 나서 오륙 세 될 때까지는 그저 자기 환경에 있는 가족들과 어린 동무들로 더불어 그저 거게 따라서 이렇게 살다가 또 조금 자라면 유아원이니 유치원이니 하면서 또 거게 갔다가 또 좀 자라면 국민학교 갔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또 거게 공부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내가 취직을 하며 출세를 해서 밥먹고 사느냐 하는 이것만 생각하고 이 길이 자기로서 마땅히 걸어갈 정로인 줄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만이면 만 천이면 천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이 도를 받기 전이라도 인생이 조금 생각해 보면 그러면 그렇게 사는 것을 총 결론지워 보면 나 가지고 그저 먹는 재미 입는 재미 세상 물건만 다 썩후고 마지막에는 송장되어서 썩어져 가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안 믿는 사람들도 인생에 대한 비관과 허무와 또 만물 중에 불행이라 하는 것을 더욱 느끼고 삽니다. 왜? 사람은 그만치 모든 존재 중에 그 지능이 광활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많으니까 생각하는 것이 많고 또 거기에 느끼는 것이 많으니까 결국은 ‘인생이 만물보다 불행하다. 또 인생 중에는 지혜 있는 사람이 제일 불행하다. 그만 짐승처럼 먹을 것 있으면 족한 줄 알고, 입을 것 있으면 족한 줄 알고, 내일 일도 모르고 자기 좁은 지역 외에 것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복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게 번민과 고민을 주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인생으로서 생각지 안하고 ‘났으니 살아보자.’ 또 이미 자라가고 있으니까 ‘배워보자.’ 또 배워보고 나니까 `모든 사람을 정복하고 남 위에 올라가보자.’ 이 조부라운 참 짐승같은 그저 일직선에서 살고 끝마치는 그런 사람은 소위 말하기를 철학이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좀 궁구성이 없다. 뭣을 깊이 좀 생각하는 궁구하는 궁구성이 없는 그저 직감 직견에서 살고 있는 아무런 짐승같이 인간에게 철학이 없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철학이 있다 하는 것은 보이는 데에서 보이는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좀 궁구해 가지고서 미루어 생각해 보는 것이 그것을 가리켜서 인간 철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제목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그러면 세상을 살고 가는 사람이 참 구름같은 간증자들이 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는데 그 모든 사람들을 볼 때에 이 사람은 이게 옳다고 분발하고 저 사람은 저게 가는 가장 복있는 길이라고 분발해서 제각각 다 분발하고, 전도서 1장에 말씀하신 그대로 모두 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는데 제가 당하는 일은 다 새 것인 줄 알고 그렇게 날뛰고 있지마는서도 참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헤아릴 수 없다 말한 대로 그렇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고 가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고 가니 종교도 심히 많고, 또 학도 많고, 또 영광도 많고, 권세도 많고, 뭐 과학도 복잡하고 이러니까 어떻게 살고 갈까? 인생이 내가 어떻게 살고 가나 하는 그것을 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 좀 인생을 탁월한 사람이라 그렇게 좀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제로 전도를 받았고 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어쨌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 됐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됐으니 참 지식으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우리가 다 이 지식을 배우고 가졌지마는 우리가 믿지 안하니까, 믿지 안하니까 모르는 사람이나 별 우리에게는 자극이 없습니다.
알면 이 지식에 대한 굉장한 충격과 그 자극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애가 좌우될 터인데 아무런 그런 것이 없는 그저 하나의 그 짐승들이 무슨 소리 듣는 것처럼 뜻 없는 그만 소리로 예사로 듣고서 지내가는 감각 없는 이런 목석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런 제목만 가져도 ‘그러면 나는 어떻게 그라면 살까? 내가 어떻게 살고 갈까? 어떻게 살면은 이거 가치 있는 생활 할까?’ 이런 것을 좀 생각해서 따져보면은 이 세상이라는 세상 이 홍수 속에 파묻히지는 안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게 좋다’ 하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막 그리 몰려간다 할지라도 그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것의 결과는 무엇이며 나는 죽는 사람이요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니까 세상을 떠난다면 그건 또 뭐하는 거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부활이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하면 그거는 뭘하는 것이냐? 그거 어떻게 해당되느냐?’ 믿지 안 할지라도 이 성경 지식을 자기가 배워서 기억하고 있다면은 그 세상 모든 분주 복잡한 살이에 대해서는 좀 평가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그만한 다 사색의 머리는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세상을 떠날까? 어떻게 살고 갈까?’ 거게 대해서 그저 듣기는 많이 들었지마는 생각해 보는 사람은 그 수가 많지를 못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갈까? 이 천천만도 넘은 갈래길이 많아서 이 사람은 이 길로 저 사람은 저 길로 분주하게 다 달리고 있는데 이 길 가운데에 나는 어느 길을 택해서 갈까?’ ‘나는 이렇게 걸어가고 있으면 이 걸어가는 길에 마지막 종착은 뭐이 되겠느냐? 종착은 죽음이지.’ ‘그러면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면 그때에 나는 이렇게 살고 간 생활이 그때에 돌아볼 때에 그것이 비판하고 평가하면 무엇이 될까? 그때는 내 일생 동안 삶이 가치는 어떠하며 결과는 어떠하며 또 그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생각을 가지고 무엇인가 좀 눈 감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실은 몰라 그렇지 하나님이 밥 먹을 사람은 밥 먹게 정해 놨고 죽 먹을 사람은 죽 먹게 정했기 때문에 그 예정대로 먹고 살지 그 예정에 추호도 범위를 벗어나서 부자되고 가난해지는 사람 없습니다, 몰라 그렇지. 다 그 길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좀 우리는 명상하는 시간이 좀 많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명상하는 시간이 무엇보다도 많이 있는데 그 명상하는 시간에서는, 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좀 사람에 대해 ‘사람은 무엇이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사람의 현재는 어떠하며 사람의 죽음은 어떠하며 사람의 이 죽은 사후에는 어떻게 되나?’ 이런 것을 좀 생각하고 생각이 있어서 사는 우리가 돼야 되지 짐승 모양으로 자꾸 닥치는 대로, 닥치면 거머대고, 닥치면 먹고, 닥치면 싸우고, 닥치면 정복하고, 자기 싫은 것은 다 제거하고, 자기 좋은 것은 다 탐하고 이렇게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속에 흉측한 그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거 그거 따라서 그대로 달려서,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늘은 헤헤 웃고, 그것이 안 되면 또 뿔퉁하고, 또 그걸 이룰라고 분발하고, ‘네가 분발해서 이루어지면 뭣하며 그것이 또 네 소원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하면 그것의 결과가 무엇이냐?’ 이렇게 좀 생각을 가져야 될 터인데 우리가 이 생각을 쓰지 안하기 때문에 악마의 마귀는 우리를 얼마든지 유린합니다.
서론에 ‘시발인’ 이 시발이라 말은, `시발인' 그 말은 인생 시발이라 말입니다, 인생 시발. 인생으로서 출발하는 지금 그걸 말합니다. 어머니의 뱃 속에서 해산된 그때부터가 이 세상 시발이요 출발입니다. ‘이 시발인 세상은’ 그때부터 시발하는 것이 이 세상에 시발하고 있는데 이 시발은 그게 시발인데, ‘시발인 세상은’ 그말은 세상이 시발이라 하는 말이니 세상이 시발이라 하는 말은 이 말에는 벌써 뭐이 들어 있습니까? 이 말에는, ‘시발’ 하는 것은 인생 출생 시발을 말하고 또 ‘시발인 세상은’ 하는 말은 세상은 인생에게 영원 무궁이 있는데, 영원 무궁이 있는데 영원 무궁에 비추어서 이 세상살이는 출발하는 생활이라 그말입니다.
‘세상은 짧기는 하지마는’ 뭐 세상은 하루밤 나그네와 같이, 우리 이 시대에는 백 세 먹는 사람이 많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저 인간 칠십, 많으면 팔십, 구십, 혹 백 세, 요새는 뭐 백삼십 세 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지마는서도 ‘세상은 짧기는 하지만’ 세상은 참 짧은 세상입니다.
‘짧기는 하지마는 영원을 좌우하는’ `영원을 좌우하는' 영원 무궁을 지금 결정지우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을 좀 생각해서 참 자기가 믿는다면 ‘이 세상은 세상만 보고 살 게 아니라 이 세상은 영원 무궁을 지금 좌우하는 그것을 지금 이 세상에서 마련키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는 이걸 좀 생각하면 뭣인가 좀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고, 깨닫는 게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무슨 인간맛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그런, 일반 피조물에 참 영장이라고 하는 그 가치가 있을 것인데 그걸 생각지 않으면 우리는 짐승과 꼭 같이 됩니다.
영원 무궁을 결정지우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박윤선 목사님이 ‘지극히 작은 의는, 지극히 작은 의는 천하보다 귀하다. 왜? 영원 무궁의 원인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의는 천하보다 귀하다. 또 지극히 작은 의 그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무엇의 원인으로 쓸란지 모른다. 그것을 무엇의 원인으로 써서 그것의 보응으로 영원에서 어떤 것을 우리가 갚음 받을란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의를 적다고 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한다는 그런 뜻의 말을 한다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영원에 가장 중요한 토막은’ 인생의 영원이라 말은 이 세상만 아니라 인생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인생은 무상이라 하는 그 말은 자꾸 변해가는 것을 말해 가는 것이지 인생은 불멸의 존재라 하는 걸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인생은 멸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뭐 다른 만물은 다 그것이 형체로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형태가 다 풀어지면 그때 다 풀어지고 맙니다. 인생은 영원히 풀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중요한 토막 움싹 같은 세상이다’ 움싹 같은 세상이라 말은 이 식물에 대해서 움트는 거, 그 움트는 그것이 그 움 트는 거게서 이거는 감나무 움이다, 이거는 뭐 사과나무 움이다, 이거는 대추나무 움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움 그대로 자라서 큰 나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거 모양으로 이 세상 이대로 인생은 영원히 그대로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우리 사람들은’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전무식이다’ 누구나 여게 대해서는 똑똑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무식이다’ 공자도 ‘생부지 사부지라. 사람의 나는 것도 모르고 또 죽는 것도 모른다. 죽고 나는 날도 모른다. 어데서 왔는지도 모른다.’ 석가모니는 여게 대해서 자기의 추상과 추론을 말했지마는 그것은 하나도 안 맞습니다. 그래서 공자니 하는 그런 분들은 도덕가라고 할 수 있고 양심가라 할 수가 있고 석가모니 그런 사람은 하나의 그저 추상론을 꾸며댄 하나의 그저 무책임한 철학자라 그렇게 우리가 논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모르는데 ‘목적을 가지시고 세상을 지으신 주님만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시는 그대로 우리에게 성경에 나타내 줬습니다. 이 성경에 가르쳐서 세상이 참으로 이렇게 중요한 세상, 영원 무궁을 좌우하는 세상, 결정지우는 세상, 이 세상에 짧은 한 토막의 그 생애가 영원 무궁의 어떤 그 보응이 될란지 보상이 될란지 어떤 승패가 될란지 하는, 이 인생이 이 세상이라는 짧은 토막이 이것이 영원을 좌우하고 있는 영원의 원인이 된다는 이 사실을 깊이 깊이 생각하면은 이 세상 살이 한 시간에 대해서, 한 시간에 대해서 억만 년이 거게 해당됐는지 억천만 년이 해당됐는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 살이라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존귀하고 참 우리가 삼가야 될 이런 것이지마는 우리는 ‘뭐 새털같이 많은 날, 오늘 가면 내일 오고, 또 있고 또 있고’ 이래 가지고 완전히, 세상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은 굉장한 원인을 가졌고, 굉장한 복잡을 가졌고, 굉장한 가치를 가졌고, 굉장한 영원의 보응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이지마는 여게 대해서는 다 그만 도매금으로, ‘이 세상은 그저 먹고 입고 사는 것으로만 다 된다. 나 가지고는, 나 가지고 많이 먹든지 적게 먹든지 그저 먹고 입고 살다가 그만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러게 간단하게만 생각하니까 인생에 대해서 억억억억만 분의 일도 느끼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이래 산다는 것이 이거 기막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에 그 모든 유대인들이 우는 걸 보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신 것은 나사로 죽은 데 우신 것 아닙니다. 나사로 죽은 데 우신 게 아니고 인생들이 마귀란 놈이 이렇게 눈을 가리워서 까마득히 어두워 가지고서 이제 있다가 죽으니까 이것만 보고서 슬퍼하고 울 줄 알지, 이것만 보고, 눈에 보이니까 괜찮다 하고 안 보이니까 그만 섭섭하게 요렇게만 이 단순하게, 인간의 복잡하고, 복잡하고 영원하고 무한함을 품고 있는 인생이건마는 이거는 까마득히 다 잊어버려 버리고 그저 눈에 안 보니까 없어졌다 하는 요것만 단순히 알고 죽었으니까 뭐 울고 모두 다 섭섭하다 하는 요런 외부 외부, 피상 피상,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에서 인생들을 살도록 하는 이 마귀에게 대해서 분해서 울분해서 우신 것입니다.
본론에, ‘이 세상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베드로후서 3장 6절로 7절에 보면, 세상은 이것이 언제든지 있을 세상이 아니고 이 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다 가려내서 경건한 사람을, 뭐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 내서, 온전한 경건한 자, 경건치 않은 자, 경건 조그매 섞인 자, 이 경건에 그 양과 질의 차이라 하는 것은 수없는 차이가 있는데 차이 있는 대로 당신의 계획대로 그 일이 다 완료되면 이 세상은 불사뤄 버립니다. 당신의 구원의 계획이 끝나면 이 세상은 불사르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경건과 불경건의 구원과 멸망의 연습을 만드는 세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에게는 이런 것도 주시고 저런 것도 주시고, 뭐 그러면 우리 현실을 닥치는데 현실이 천태 만상으로 변해 나갑니다. 또 우리 환경에 사람들도 변해 나갑니다. 수많은 것들을 우리가 다 접촉합니다.
이는 공간에도 많이 있고, 또 자연 속에도 많이 있고, 모든 이 피조물 여러가지 속에 가득 차 있는 이런 것을 우리가 이 접할 때에는 그것을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아름다운 것은 다 끌어당겨서 네것 만들어라, 맛있는 게 있으니까 얼마든지 많이 먹어라, 아름다운 게 있으니까 많이 입어라, 입기 좋고 먹기 좋고 보기 좋은 것은 있는 대로 다 거머닥쳐서 창고에 모으고, 모자라면 창고를 헐고 새로 짓고, 또 짓고 또 모으고 또 모으고 자꾸 이렇게 해라.’ 하는 이것이 세상에 자기가 살 것인 줄로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기를 ‘그런 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네것이 아닌데 다만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런 것 저런 것을 하나님이 필요하신 대로 네게 닥치게 하니까 닥치는 그것은 네가 먹는 그것도 그게 첫째가 아니고, 입는 그것도 첫째가 아니고, 끌어당기는 것도 첫째가 아니고, 그것을 네가 접해서 거게서 거룩 연습과 경건 연습 해 가지고서 이거 숙달하는 세상이다.’ 돈이 왔느냐, 많이 왔느냐? 거머당기라가 아니다. 돈이 많이 왔느냐? 거게서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별하고 구별해서 깨끗한 거룩을 차지하고, 또 네가 거게서 너를 위하느냐, 하나님 위하느냐, 네 가족 위하느냐, 네 친구 위하느냐, 뭘 위하느냐? 그 하나 하나 닥치는 데서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고 이번에 실패했으면 요다음에는 또 새로 닥쳤을 때는 ‘지난번에 실패했으니까 이번에는 그것을 바로 해야 되겠다’ 거룩과 경건을 잘못 됐으면 연습하고 또 바로 됐으면 감사하고 이래서 거게서 네가 닥치는 데에 천인 만인이 제대로는 다 제게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이 있어서 현실을 닥치는데 그 현실을 거게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주신 법칙을 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 이 두 가지를 두고 거게서 ‘내가 하나님이냐 내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 하나님이냐 어떤 인생이냐,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네가 뭘 위하고 있노? 네가 뭣을 지금 위하고 있노, 여게서?’ 거게서 무엇을 위하는 그것이 영원한 보응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는 그게.
이러니까 ‘거게서 너는 돈을 위했지? 너는 네 자신을 위했지? 너는 가족을 위했지? 너는 의식을 위했지 너는 행락을 위했지? 너는 모든 정욕을 위했지? 음욕을 위했지? 모든 미의 탐심을 위했지?’ ‘너는 보이지 않는 너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위했지? 너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이 법칙대로 네가 구별해서 너는 보이는 대로 쏠리지 안하고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서 네 닥치는 거게서 구별을 만들었지? 거룩을 만들었지? 경건을 만들었지?’ ‘너는 마구잡이로 욕심을 달성시켰지?’ 이것을 조물주는 낱낱이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거게 대해서 영원은 지금 하나 하나가 결정돼서 나가고 있는 이 비밀을 알지 못하고 마구 닥치니까 거머당기고, 있다가 가니까 울고 섭섭해 하고, 그것을 어떤 인간이 좀 없애버리니까 원수를 삼고, 어떤 인간이 그걸 좀 많게 해 주니까 막 좋아서 감사하고 야단이고, 얘! 너는 그것을 네가 그렇게 취급하라고 한 게 아니라 거게서 거룩과 경건, 거게서 네가 하나님의 주시는 법칙을 가지고서 네가 구별하면은 ‘여게서는 밀어야 되겠다 당겨야 되겠다, 이것은 보아야 되겠다 보지 안해야 되겠다, 이거는 끊어야 되겠다 이어야 되겠다, 이거는 취해야 되겠다 취하지 안해야 되겠다.’ 거게서 자기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거룩을 만들라고 경건을 만들고 보니까 그래 그래 진합태산으로, 티끌 모아 태산 되기로 그래 그래 현실에서 만들고 만들고 가 보니까 세상 떠나서 무궁세계에 가 보니까 하나님과 자기와 모든 언행심사와 희로애락과 지정의와 모든 것이 같이 동하고 정해.
이래서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 그말은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한다 그말인데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한다 말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깨끗하심과 같이, 거룩하심과 같이 이렇게 된다.” 그말입니다.
이런 이 지극히 큰 비밀이 우리 세상이라는 이 세상에 담겨 있건마는 이것을 모르고 배암 그놈에게 홀켜 가지고서 어짜든지 권세는 잡아닥쳐 가지고서 올라가야 좋고, 수치는 벗어나야 좋고, 세력은 부려야 좋고, 돈은 많이 가져야 좋고 고기덩어리는 그놈의 고기덩어리는 건강해 가지고 죄를, 고기덩어리 그게 병이 들면 죄 안 지을 터인데 고기덩어리가 건강함으로 죄를 지어도 고기덩어리 이거는 건강해야 좋고, 이거 전부 제 자율의 그 일방적 지식 가지고서 망하는 것인데 여게서 거룩과 경건을 만들라고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그거 모르고 마구 이걸 거머닥치는 이런 걸로 살고 있으니까 이거 참 비참하다 그말이오.
셋째로는, ‘세상을 거주지로 알고’ 세상을 자기가 살 곳인 줄 알고, 세상은 살 곳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는 살 준비 하는 것은 다 헛일입니다. 세상은 전부 떠날 준비 해야 됩니다.
자기가 지금 생활비가 없는데 한 달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직장에 가 일을 합니다. 일을 해도, 일을 하면서도 하는 데에 자기 중심이나 소원은 세상 떠날 준비, 떠나서 무궁세계 가 가지고도 후회 없을 그 준비, 월급을 받아도 ‘이거 먹어야 또 한 달 우리 가족들이 이사갈 준비하겠다’ 전부 이사입니다. 일하는 것도 이사 준비, 월급 받아 가지고서 지금 먹는 것도 이사 준비, 생활도 이사 준비, 전부 이사 준비라 말이오.
이런데 이걸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여게 거주지로 알고 여게서 제 마음대로 물을 헤치듯이 헤치고 마음껏 사용하는 그것으로만 복된 줄 알고 뜻없이 사는 그것도 다 악마에게 눈이 가리워져 가지고서 소경된 생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과 구원이 중심에 불붙지 안할 때에는’ 거룩과 경건의 중심이 우리에게는 불이 붙을 때 있고, 이 거룩과 경건 뭐 죽어도 거룩 죽어도 경건, 죽음 가지고 거룩 만들면 지체하지 안하고 대번 만들라고 달라들고, 죽음 가지고 경건 만들면은 ‘이 죽음 가지고야 경건 안 만들겠다’ 이렇지 안하고 죽음을 죽어도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경건이 된다 하면은 지체하지 안하고 다 만드는 것이 성도들이라 말이오.
이런데 우리는 이렇게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고 아무 여게 대해서 갈급해 불이 붙지 않는 그것도 이거 벌써 우리의 그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은 병들어서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두 번 없는 이 세상을 성공으로 살고 갈라면은 어떻게 할까?’ 하는 데 대해서 우리는 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로 11절에 보면은 이 모든 천태만상이 모든 형체는 다 풀어집니다. 사람이라는 것도 풀어지고 짐승도 풀어지고 전부 풀어집니다. 일단 다 풀어져 버립니다. 의인들은 남아 있지마는 나머지기, 영은 풀어지지 안하지마는 영 외에 이 모든 죄악된 거는 다 풀어진다 그말이오.
모든 체질은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인간들의 그 행한 소행은 이것만, 배암이 죽고 나면은 살은 썩어버리고 배암 가시가 엉덩그리하게 이렇게 있는데 그 무섭습니다.
배암 가시가 엉덩그리하게 있는데 거게 만일 그 가시에 찔리면 그만 그거는 도려내야지 안 도려내면 그 살이 그만 썩어 들어가 버립니다.
이거 모양으로 인간들의 그 굉장한 행동 그걸 눈을 감고 좀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이 번들번들 가죽 껍데기에다 싸 가지고서 이래 있기 때문에 이렇지, 이거 뭐 너 아니면 나 못 살고 너는 나 아니면 못 살고 이렇게 제가 사랑한다 이래 쌓지마는 속에 그 심보가 뒤에 환하게 드러날 때에는 다 놀래서 기함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흉측한 마음을 가지고서 나한테 대한 줄을 몰랐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그렇게 좋은 것 같아도 이중 삼중 다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없소. ‘저래도 속에 뭐 있지’ 벌써 추상이라 추측이라 추론을 자기 혼자 발표를 안 해도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그 온갖 생애가 그 행동은 하나도 없어지지 안하고 남아 있으니까 그거 볼 때에 참 굉장할 것입니다. 눈을 감고 ‘인간들의 그 행위가 다 그대로 하나도 가리워지지 안하고 드러나고 있다면은 그보다 더 더럽고 흉측한 건 없을 것이다.’ 송장이 죽고 가죽이 뭐 다 썩어내리고 뼉다구만 남아 있는 거. 아니, 배암과 독사의 모든 그런 것들이 다 살이 썩고 그 뼈만 엉더그리 남은 거 같은 그거 참 굉장하게 그때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모두 인간의 행위는 다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같이 조물주와 피조물 앞에 우리는 드러날 이 참 무시무시할 그때를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야 되겠는데, 그때를 생각하고 살아야 될 터인데, ‘오늘 이 일이 바쁘다’ 아침에는 일어나기 전에 일이 바쁘고, 낮에도 바쁘고, 밤에도 바쁘고, 늦게까지 바쁘다 보니까 또 자야 되겠고, 그 이튿날 또 바쁘고. 바빠서 이 분망에게 홀켜서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래 우리는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참 우리 믿는 사람은 명상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래도 믿는 사람은 눈감고 좀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눈 감고 생각함이 없는 이 사람은 그 사람 참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입니다. 완전히 마귀가 그거 제것을 만들어 가지고 이거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오.
그러기에 세상에 최종의 날, 우리가 최종의 날을 언제든지 기억해야 됩니다, 최종의 날. 최종의 날은 어떤 게 최종의 날이냐? 인생의 최종의 날이라 하는 것은 죽음이라 하는 그것도 최종의 날이요,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도 최종의 날이요, 우리가 이다음에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 부활도 최종의 날이오. 한 번 부활이지 두 번 부활이 없습니다. 그것도 최종 부활이오.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그것도 최종 심판이오. 한 번 받고 두 번 받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행한 대로 영원히 갚음을 받는 그것도 한 번입니다. 한 번 갚음이 영원히 계속 됩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좀 생각하고 여게 대해서 좀 심각하게 생각해서, 이게 참 중요하고, 우리가 세상에 못먹는다 해도 그거 떠나 버리면 그만인데 이런 이 중요한 일을 생각해서 거기에 내가 자극되고 충격되고 감동되고 거기에 이 충격이 되어지는 것이 미친 충격이 아니라 거게 충격이 돼져 가지고 그래도 우리가 거게 맞추어서 사는 생활을 살고 가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데 대해서 도무지 생각지 않는다는 거 이거 짐승 생활입니다. 이게 없으면 생각 안 하는 사람이 편치요.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공연히 번민과 고민을 가지기 때문에 이것이 불쌍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이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있습니다.
있는데, 이렇게 중대한 일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그날 그날 자꾸 이렇게 하루 하루 먹고 사는 데만 끌려가니 먹고 살면 뭐할 겁니까, 이 문제를 냅두고.
이래서 우리는 전소망을 그 날에 둬야 됩니다, 전소망을 그 날에. 그 날에 무슨 날? 이 다섯 가지 말한 그날에 둬야 됩니다, 전소망을.
‘보자’ 나는 최종이 죽는 날이니까, 최종이 죽음이니까 죽을 때 그때에 후회가 없어야 되겠고, 그때에 손해가 안 가야 되겠고, 그때에 실패를 안 해야 되겠고, 그때 죽을 그때에 생각할 때 ‘내 일생 살이는 잘 살았다. 죽음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았지마는 이 죽음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내 생활은 과연 다행스럽게 살았다.’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전소망은 죽음이라는 거기에 우리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죽음의 날 그 날에 우리의 성공이 내 성공이고, 그 날에 승리가 내 승리고, 그 날에 다행이 내 다행이지 그 안에 죽음 안에 있는 다행 그까짓 거는 다 없어져 버립니다. 죽으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오.
그 날을 목적으로 하고 마음과 뜻을 이 날에 두고 이 날의 것을 목적한, 이 날의 것을 목적한 계획도 해야 되겠고 경영도 해야 되겠고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다 헛일입니다. 왜? 마지막은 내가 거기 가기 때문에, 종착은 거기기 때문에 종착인 그것을 생각하고 계획도 하고, 경영도 하고, 시작도 하고, 계산도 해야 되겠습니다.
‘보자’ 장사하는 사람이 오늘 많이 나가고 들어가고가 아니라, 나가고 들어가고 막 바쁘기만 바빴지, 많이 팔려 나가고 많이 사 들어오고 수입 지출이 많이 됐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결산 댈 때에 뭐 수입이 있어야 되지 결산 댈 때 수입 없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생활이 아무리 세상에서 뭐 이 동양에서 어떻다 뭐 영광스럽다 해도 나는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 그 날에 남아 있지 안하는 영광이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 날에 남아 있지 않는 지위나 권세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이런 것을 이 시간에도, 이 자리에서도, 이 사건에서도 우리는 마련해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도 이거 생각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ㅡ전연히 잊어버리고 거게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도 안 하고 일생 동안 생각 안 하고 사는 것이 온 세상인데ㅡ항상 생각하고 거게 맞추어 살면 세상 사람이 그 사람을 미쳤다 하겠소 안 미쳤다 하겠소, 저 ○ ㅡ 미쳤다 해. 누가 미쳤는지 모르지. 미쳤다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 인생 살이를 바로 하는 사람이요, 인생을 바로 아는 사람이요, 세상을 바로 아는 사람이요, 세상은 영원 무궁의 원인이 되는 움싹이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평가하고 바른 계획에서 바른 건설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데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우리는 뭐 괴롭든지 즐겁든지 뿍뿍 걸어가서 흠점이 없이 평강 가운데서 주 앞에 나타나기를 우리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는 이게 우리 나라 아닙니다. 우리 영주처는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의 나라는 땅에 있지 않고 우리 나라는 하늘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든지 여관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관 생활이요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1장에 말씀하시기를 “나그네와 행인으로 지내는 너희들은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왜 두려움으로? 나그네로 지낼 때를 그게 저거 집인 줄 알고 거게 살 준비만 하지 나는 오늘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 떠나는 데 대해서 생각지 않기 때문에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지낼 때를 그것을 네 영주처로 오산하고 착각하고 사는 그런 망령된 자가 될까 두려워하라 말씀했습니다.
셋째로, ‘오산과 오판의 원인은 실패의 원인이다.’ 오산, 계산을 잘못하고 판단을 잘못한 ‘오산과 오판은 실패의 원인이다.’ 우리는 남 돈 주고 받을 그런 것은 계산에 오산이 안 될라고 애를 쓰고 이런 무슨 물리 계산하는 데는 오산이 안 될라고 또 오판이 안 될라고 이렇게 애를 쓰지마는 자기 인생 일생, 자기 인생 일생, 자기 영원 거게 대해서는 참 오판이면 이거는 대오판이요 오산이면 대오산입니다.
이러니까 이 자기의 인생이라는 여게 대해서, 세상 영원을 준비하는 살이에 대해서 여게 대해서 정확한 계산을 하고 정확한 비판을 할라고는 생각을 가지지 안하고 여게 대해서는 까마득히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일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참 우리가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래도, 세상이 다 그래 사니까 그것이 정상인 줄 알지 여게 대해서 지금 거룩과 경건을 두고서 정당한 자기 생애의 계산을,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갈 때 어떻게 나타날 그 심판 계산을 정확하게 해 볼라고 하는 여게 대해서는 생각을 아직 안 가진다는 것이 우리가 마귀에게 홀켜서 공연한 일에 분망해 가지고서 여유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기도하면은 마귀가 들어오면 그렇습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아이고, 이 일이 바쁜데 이 기도하면 어찌 되느냐? 일은 바쁜데 기도하다 보면은 그만 시간 다 보내고 안 되겠다.’ 이리 돼집니다.
그이가 이름을 내가, 스펠존인가 그이 뭐인고 내가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분은 말하기를, ‘그 날에 일이 복잡하거든 기도를 많이 해라’ 그거 성자입니다.
그것은 해 본 사람은 압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이상하게도 자기가 명철해집니다.
명철해져서 일은 다른 날 몇 배를 했는데 시간도 남고 힘도 남고 남습니다, 어찌 했는지? 시간도 허비가 되지 안하고 힘도 낭비가 되지 안하기 때문에 할 것이, 다를 때는 모르는 거, 모르는 그런 거 다른 날 몇 배나 생각해 가지고서 일을 했는데도 시간이 남고 일도 안 하고 논 거 같고 일한 계산을 대면 굉장히 많이 했고,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하는 거.
명철한 지혜와 총명을 주니까 이거 기도 안 하고 할 때에는 그걸 가지고서 하나님의 성령이 오면은 한 십 분 동안이면 할 수 있는 걸 그걸 자꾸 이라고 저라고 이라고 저라고 이래 가지고 또 헛일 하고 이래 자꾸 이라니까 하루 종일 분주해 봤자 전부 헛일만 되고 말지 옳은 일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의 명철한 지혜와 총명이 오기 때문에 지혜와 총명이 오니까 모든 것을 전지하니 술술, 소견 없는 사람이 자꾸 뭐 하는 그런 것보다 익숙한 사람이 하면 얼마나 수월합니까? 얼마나 일이 잘 됩니까? 못난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해 주시니까 전능자가 와서 하니까 척척 척척 일이 잘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바쁘거든 기도를 많이 해라’ 그분이 성자의 말입니다.
‘우리는 생애의 계산은 정확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의 계산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다소,’ 많아졌다 적어졌다, 강해졌다 약해졌다, 얻었다 잃었다, 높아졌다 낮아졌다, 귀하다 천하다, 이런 것만 전부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까짓 거야 안 해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만 그것만 보고서 계산합니다. 그거는 계산 안 해도 좋아. 틀려봤자 문제 없어.
‘전부를 삼아서는 안 된다. 이도 중하지마는 이는 껍데기다. 오늘에 삶이 어찌 되었나 계산은,’ 오늘의 삶이 어찌 되었나? 오늘 하루 산 것이 어찌 되었나? ‘오늘의 삶의 계산은 그 날의 계산이다.’ 그 날이라 말은 내 죽는 날, 예수님의 재림 날, 부활 날, 심판 날, 영원히 갚음 받는 날 그날을 생각하면서 그 날을 두고서 계산해서, ‘갚음 받는 그 날로 생각하니 오늘 수입이 있다. 갚음 받는 그 날로 말하면 오늘은 영 진공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니까 이제 거기서 합격이다. 거게서 정죄다. 이 부활에 보니까, 부활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홍포 입은 부자가 일생 동안 재물 벌어 날뛰었지마는 부활에 보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의 재림에도 소용 없다. 죽는 날에도 소용 없다.’ 이걸 가지고 계산해서 죽는 날에 수입이냐 실패냐, 재림에 대해서 수입이냐 실패냐, 부활에 대해서 수입이냐 실패냐, 심판에 대해서 수입이냐 실패냐, 영원한 갚음을 받는데 그때에 대해서 그 날에 대해 보면은 수입이냐 실패냐 거게 두고 계산해야 된다. 그 날의 계산이라야 된다. 그 날의 계산이라야 된다. 이거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그 날의 계산이라야 한다. 대주재 조물주는 우리에게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점점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것을 공짜로 쓰고’ 우리가 전부 그분의 것 공짜로 쓰지 않습니까? 전부 공짜로 쓰지 않소? 뉘가 뭐 대금을 냅니까? 대금은 인간들에게, 인간들이 받아먹고 인간들에게 주는 것이지 다 공짜입니다.
인간들이 쌀 한 되를 만드는데 저거 수공 들이지만 저거 수공 들이는 건 다 받아먹소. 인간들의 수공 그거 가지고서 쌀이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백의 구십구라면 인간이 하는 것은 백의 일밖에는 안 되는 것이오. 하나님이 하시는 건 다 공짜배기라. 돈 한 푼도 안 받아. 고기도 하나님이 기른 거는 당신은 돈 한 푼도 안 받고 인간들이 잡은 삯, 운반하는 삯, 보관하는 삯, 또 나눠 주는 삯 그거 받지.
‘공짜로 쓰고 있는 우리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잠시 후면 서게 될 것입니다.
멀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그분인 주님을 만나집니다. 우리는 그분과 그 날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은 어찌 하든지 우리는 정신을 똑똑히 차려서 달려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밤에 이 공과를 모두 세 번씩 다 좀 읽도록 그렇게 할라고 생각했는데 혹 안 가져온 분이 있을까 싶어 그랬으니까 가서 자꾸 읽어요. 여러 수백 번 읽으십시오.
읽는데, 여게 문법적으로 말하면 이거 볼 게 없습니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내가 생각한 대로 자꾸 이래 썼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말하면 맞지도 안하고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더 안 맞고, 그러나 그 가운데 있는 진리는 맞습니다. 그 진리를 찾아서 수십 번 수백 번 읽어 가지고서 여게서 내가 참으로 요 사실을 믿고 바라보고 요게 대한 충격으로 인해서 내 생활이 여게 소속해서 여게 피동되는 생활이 되도록 우리는 힘써서 실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광고합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도록 합시다. 그것이 자기 일생 동안에 큰 보배를 마련하는 것이 됩니다.
그라고 기도록에 등록 안 한 사람들은 등록하도록 합시다.
어짜든지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여러분들이 지금 오늘에 지금 말할 때 나와야 되지 시기 놓치면 안돼요. 어짜든지 새벽기도에 나오도록 노력을 합시다.
또 지하철 공사 지금 여게 철판을 벗기고 거게다가 흙을 채우는데 내가 저 아래는 가서 채우는 데 보니까 전부 자갈을 채우고 모래를 채우고 마사를 채우는데 여게는 얄궂은 뭐 쓰레기 다른 데 진토 그런 걸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뭐 그 사람들한테 모르는 사람이 가서 말해야 소용도 없겠고 또 내치 권위 있게 일하던 분이 있고 이래서 오늘 내가○ ○ ㅡ 그 얘기를 하고 올 때 좀 돌아보고 거기서 좀 말 좀 하고 그렇게 좀 일을 좀 보라고서 그렇게 내가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면 변동 없고 이거 또 무너져 버리면 이거 떡 갈라지면, 갈라지면 여기 쭉, 갈라지기만 갈라지면 여기 예배 못 봅니다. 겁이 나 어찌 보겠소? 못 보면 어데 가, 이 많은 사람이 어데 가 앉겠소? 이 예배당 지을라 하면 우리는 거러지 금탈부어 오듯이 하나씩 둘씩 이래 모아 놨기 때문에 이거 잘못 살기는 잘못 살아 돈이 없지마는, 이거 지을 만한 돈이 없어요. 이러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있기는 있어야 되지 이거 헐고 짓지도 못하는데 이거 봇짱이나 뚝 뿔라지면 큰일 납니다. 이러니까 위해서 기도를 해요.
기도를 하는데 나이 많은 분들은 기도를 안 해. 이 주일학생들은 막 쉬지 않고 하루 수십 번 기도한답니다. 그게 기도하는 소리나 들을까? 오늘도 지하철 위해서 기도한 사람 손 한번 들어 볼까요, 몇이나 되는고, 정직하게? 오늘 지하철 생각하고 기도한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기도한 사람만? 저기는 모두 치여 죽을라고 모두 기도 안 했는가배, 치어 죽을라고? 손 놔요. 치어 죽어도 좋구만.
그라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