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5:04
세 인물 평가
본문:사무엘상 16장 13절~14절 사무엘이 기름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세 인물이 하나님 앞에 등용을 당하는데, 당하게 된 그 동기가 각각 차이 있습니다. 발표된 대로 사울은 그의 가졌던 것은 그 용모가 준수하게 생긴, 아주 체모가 잘생긴 그것이 그의 자체였고, 또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길 그때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서 왕이 되게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아니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어린 자이지만 엘리 제사장이 죽고 난 다음에 그 뒤를 이어서 사사가 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그가 양 치러 다니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하지 못했고 그저 하나님의 선포하신 약속이며 교훈이며 예언인 하나님이 선포하신 이 말씀과 이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래서 양을 칠 때에 그 맹수들이 와도 이 힘 가지고 두렵지 않게 그런 것들을 다 처리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가진 것이, 외모 준수한 그것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별 유익이 없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외모를 보고 자기를 과대 평가하기 때문에 그것이 도리어 위험한 것이 되어졌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은, ‘나는 부족한 자라’ 하는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등용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만 자기가 자기 보기에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에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자기는 작은 자인지 큰 자인지 그것을 생각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저 그분은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모시고 사는 그것이 자기 생활이기 때문에 자기 주관이라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았고, 일편단심 그저 하나님만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려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별로 그에게 뛰어난 그런 역사들이 없었지만 그 결과가 다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선지 학교를 세울 그때도 그것이 무슨 세상적으로는 유력하게 보여지는 그런 역사가 아닌데 뒤에 보면 큰 일이 됐고, 또 그가 제일 실수함이 없었습니다.
다윗도 그 실수가 있었고, 사무엘은 실족하는 일이 없기를 그만한 사람이 성경 계시 인물 중에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항상, 하나님 앞에서 항상 사는 그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니까 하나님도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은 자기가 하나님을 붙들 때는 붙들고 놓을 때는 놓고 이랬었습니다.
다윗은 부름을 받을 때에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본다’ 하는 이 말씀이, 그 중심이 여호와로 채워졌다 말입니다, 여호와로. 여호와가 만족할 수 있는 다윗이 됐다 그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버렸다’ 말씀하시고,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하는 말씀은 그 중심이 여호와에게 합당하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것이 없어서 버림을 당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니까 그는 목축을 할 때도 능력있는 일을 했습니다. 사자가 올 때에 손으로 사자를 찢고, 아무 맹수라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이 신념에서 능한 일을 했고, 또 골리앗 대장을 쳐서 죽일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블레셋 그 군대를 이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 역사면에 제일 그분이 장점이 있었고, 사무엘은 자기는 항상 하나님과 같이 계시는 이 사람으로 사는 그것이 장점이 있었고, 사울왕은 자기의 부족점을 생각하는 그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점의 종류가 각각 다릅니다.
그 장점의 종류와 그 다음 사울이 아말렉을 정복하고 난 다음에 자기의 기념비를,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승리의 기념비를 세운 것이라든지, 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었다는 말을 들으면 사울이 죽일 터이니까 겁을 낸 그런 모든 것이라든지, 또 그 뒤에 그가 패망할 때에 하는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을 때의 그 동기와 종류가 다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그가 여생을 사는 것이 꼭 잔잔한 물이 흘러가듯이 별 그런, 아주 좀 번창한 그런 활동성이 없으나 그의 하는 일의 모든 것이 형통하고 다 평강이 있었던 것도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준비한 그 준비와 같은 그 동질의 연관성이 있습니다.
또 다윗이 준비한 그 준비가 그가 유력해 가지고 유명해졌고, 또 한번은 대 실수를 했고, 또 실수하고 난 다음에 그가 다시 돌이킬 때에 등용을 받은 그런 것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준비한 그 준비에 다 성질이 같이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준비하되, 자기는 어떤 종류의 것으로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어떤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하는 그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자기에게는 어떤 위험성과 염려성이 있다 하는 것도 추론할 수가 있고, 추측할 수가 있어서 자기를 고쳐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는 데에는 제일 좋은 준비가 사무엘의 준비이고, 또 제일 안전한 그 생애를 이룬 사람도 사무엘이 제일 나았고, 그 다음에는 다윗이 준비한 그 준비가 사무엘만은 못해도 좋은 준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울 왕의 그 준비는 그것이 주관적이었고 객관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의 준비가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우리의 준비에 필요한 것이나 거기에서 제일 우리가 주력해야 되는 것은 사무엘의 준비를 주력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 이차적으로 다윗의 준비한 그 준비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고, 삼차적으로 사울이 준비한 그 준비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또 버림을 당한 것을 보면, 사울 왕이 버림당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앞선 그것이 그만 사울왕의 버림받은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울왕은 그 신앙이 언제나 주관적이었습니다. 주관적인 그 신앙은 결국은 버림을 받기 마련입니다. 버림받은 그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하지 아니하고 취득물에는 급급했다 이러는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는 것보다 자기 소원을 행하는 그것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는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버림을 당했다고 해서 그 왕직을 그만 빼앗긴 것은 아닙니다. 왕직은 계속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 왕직이 복되지를 못하고 왕직이 그에게 불행 중에 제일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그 왕위는 그 왕위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그를 천하게 만들었고 그를 마지막에는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왕위라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는 그렇게 좋은 것을 가졌지만, 사울 왕이 그렇게 좋은 것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버리니까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이 전부 자기에게는 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버리면 그것이 좋은 것이 변해서 자기에게는 화로 이루어집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권세도 자기에게 화가 됐고 지위도 화가 됐고 이름도 화가 됐고 영광도 화가 됐고 전부가 화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버릴 때에는 자기의 가진 것이 전부가 다 화가 되고, 또 하나님이 다윗을 등용하실 때에는 모든 것이 다윗에게 유익됩니다. 마귀도 다윗에게 유익, 남의 병든 것도 다윗에게 유익, 모든 사람들도, 어린 사람들도, 또 중직에 있는 남의 신하들도, 마귀도, 물질도, 다윗왕이 수금을 잘 탔지마는 수금이 자기 출세에 하나도 필요없을 수 있고, 잘못 그것이 응용되게 되면 그 수금 그것 때문에 자기가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전쟁이, 블레셋 나라와 전쟁한 그것이 결론을 맞추어 보면 다윗 하나를 위해서 있었습니다, 다윗 하나를. 다윗을 유명하게 유력하게 하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오. 또 사울왕의 모든 형편 사정 그 전부가 결론적으로 보면 다윗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스물 두 번인가 계획한 그것도 결과를 보면 전부가 다윗 위한 것이오. 다윗을 유명하게 했고, 유력하게 했고, 의인으로만 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을 받도록 만들어서, 그 공기나 공간이나 종별이나 모든 움직임이나 모든 피조물 하나님 전체가 하나님이 그를 도우실 때에 막 돕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버리실 때에 모든 것이 막 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은 좋다. 가난은 안됐다. 건강은 좋다. 병은 안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일방적 세상 지식입니다. 일방적 세상 지식이오.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또 세상 지식으로서도 전체 지식은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화를 꾸미기를 ‘인간 만사가 북방옹이라’ 그렇게 말해서, 북방에 말 먹이는 그 첨지의 일과 같다. 화가 됐는데 뒤에 보니까 화가 복되고, 복이 됐는데 뒤에 보니까 복이 화가 됐고, 이러니까 무엇이 복인지 무엇이 화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통계 맞춘 것이 그것이 세상에서도 일방적 지식이 아니고 쌍방 지식이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주님 안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좋은 것,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다 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좋은 것이 그것이 가장 화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는 어떻게 나쁜 그것이라도 그것이 변하여 결과적으로는 그이에게 없어서는 안될 큰 보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 나에게 유익된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를 위해서 선택할 건가? 또 무엇이 자기에게는 해가 된다고 자기를 위해서 그것을 버릴 건가? 취하고 버리는 취사 선택을 뭘 가지고 할 건가? 그것에게 어떤 그 자체, 어떤 종류 그것에게 내 이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 평가와 비판은 아닙니다.
사울왕이 왕위가 얼마나 좋습니까? 한때는 왕위가 좋아서 그를 참 사무엘도 높였고 백성도 높였고 하나님도 높였고 굉장히 높인 그 일국의 제일 높은 그 왕위의 자리이지만 그 왕위가 자기에게는 가장 큰 화가 되어서 밤낮 고민이 왕위 때문에 고민이 됐고 고생했고, 마지막에 죽은 것도 왕위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러니까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은 나에게 유익될 것이라’ 해서 그것을 좋아하고 탐을 내고 ‘이것을 마련해야 된다’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것만은 나에게 유익되니 이것은 마련해야 되겠다.’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 사람들에게 다 이것만큼이야 좋고 해로울 것 없다.’ 하는 그것도 그것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때에 자기에게는 해가 됐습니다.
다윗의 그 씩씩한 건강이 그에게 큰 해를 이루어서 마지막에는 피골이 상접하기까지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다 나를 하나님과 함께 위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할 때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마귀까지도, 원수까지도 결과적으로는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 요긴한 사람, 요긴한 물건, 가장 좋아하는 것, 가장 자기에게 가까운 것 그것까지도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이 세상살이를 살아갈 때에, 모든 객관을 접할 때에 그 객관이 나에게 유익된 객관인지 해가 된 객관인지? 거기에 대해서 유익될 객관도 하나도 없고 해가 될 객관도 하나도 없습니다. 또 유익이 안될 객관도 하나도 없고, 해가 안될 객관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할 때에는 모든 객관이 다 나와 함께 해서 결과적으로 나를 돕고 위하는 것이 되어지고, 하나님과 나와 떨어져서 하나님이 날 위하지 않고 하나님이 날 버리실 때에는 어떤 객관이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날 버려서 해하는 것만 하지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이 주권하고 계시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등용하시는 데에 세 가지 종류로 등용하시는 것을 이 본문에서 배웠고, 또 등용하시되 세 가지 종류와 각각 그 결말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배웠고, 등용당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버림을 받았는가? 그것을 또 여기에서 배웠습니다.
버림받은 것, 버림받은 것은 딴거 없습니다. 버림받는 것은 꼭 같습니다.
사울 왕도 버림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하다가 버림받았습니다. 사무엘도 잠깐 버림받았습니다. 그가 이새의 큰 아들을 보고 ‘아, 훌륭하다. 하나님이 기름부을 자를 여기에 예비해 놨구나!’ 그가,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그 객관의 은혜에 속하지 아니했고 잠깐동안 자기 주관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실수했습니다.
다윗도 그 뒤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여호와가 자기 안에 계셨는데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우리아의 아내의 체미를 본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어왔고 여호와가 자기 마음을 주장하는 그것이 잠깐동안 없어졌음으로 실수해서 그다음에 죄가 죄를 만들어 가지고 자꾸 그렇게 했습니다.
요즘 신문에 보니까 ○○○이든가 그 사람의 그 범죄한 것, 학교 교사가, 그 아이 이름이 뭐이지? ○○이가? 그걸 처음에 내가 신문을 보고 ‘그 사람이 그렇게 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가 죄를 짓는 법인데 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옆에 다른 사람들하고 앉아서 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신문을 보지 않고, 왜? 그 아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달래도 우니 입을 막아야 되겠고, 자기 맡은 일이 있으니까 시간에 가기는 가야 되겠는데 이것을 가만히 두면 살았으니까 무슨 말이든지 소문이 나겠고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서 그를 죽이지는 않고 아마 단단히 해 가지고 소리 못나게 해 가지고 가둬 놓은 것이 죽었을 것이고, 죽고 나니 뻣뻣하이 기다란 것 처리 못하니까 간편하게 그것을 장만했을 것이라 그 말이오. 죄는 죄가 죄를 자꾸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왕 그런 분들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왕이 하나님에게 버림당한 그 기간은 길었고 끝까지 버림을 당했고, 사무엘은 잠깐 버림받았고, 다윗은 사무엘보다도 장기간을 버림받았고, 버림받은 것은 꼭 같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 것을 버렸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그 시간입니다. 그 세 사람이 다 길고 짧은 것뿐이지 버림은 받았는데 받은 원인이 꼭 같습니다. 종류가 꼭 같습니다.
또 하나님에게 등용받은 것도 준비의 기간은 다르지만 꼭 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등용받는 것, 버림받는 것, 환하게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가 핑계하지 못합니다. 등용을 받고 나니 자기만, 하나님만 생각할 때에 등용받았고, 등용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만 생각하니까 계속 하나님에게 쓰여져서 동행했는데 그만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제 일 생각하는 거기에서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않고 제게 유익된 것, 교역자들도 ‘어떻게 하면 내게 유익될까?’ 그것이 삯군이오. 양떼를 자기에게 유익되도록 붙이는 그것이 이리입니다. 도적이오. 주의 양떼로 삼지 않는 것.
그러기에 사람이 어디까지 높은 자리에 있었든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즉시 멸망받는 짐승과 같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떠나서 제 수단 방법 그 지능을 가지고 하면, 하나님을 제가 이길 것입니까?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만 그리 되면 그 다음에 뭣 들어옵니까? 하나님의 성령 떠납니다. 하나님 버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하는 것이 당신의 뜻으로 우리에게 접선합니다.
뜻 버리면 하나님 버리는 것이고 뜻 영접하면 하나님 영접하는 것이오. 하나님 버리면 마귀 신 들어올 수밖에 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사울왕을 떠나시니까 즉시 악신이 사울에게 들어왔습니다. 악신이 사울에게 들어오고 보니까 사울왕은 그 생애가 단순치 않고 번뇌했습니다.
번뇌했어. 머리가 복잡했어. 이것 저것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들어와 가지고 복잡해서 견디지를 못했어. 머리가 아파 복잡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번뇌해서 머리가 아파 버렸어.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데.
이렇게 악신이 들어오고 보니까 사울왕이 하는 일이, 생각하는 생각이 전부가 자기 해할 것, 자기 망칠 것, 그 생각밖에 안 나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악신이 사울왕에게 들어오고 보니까 사울왕의 크고 작은 복잡한 생각이 전부 자기를 위하는 생각인데, 자기를 위하는 생각인데 자기 위하는 생각 그 전체가 자기를 해하지 아니한 생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걸 살펴보십시오.
성령이,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들어오면 자기는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이 객관을 버리고 주관으로 행동했어도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책임지시고 다시 돌이켜 주셨습니다. 자기 주관으로 했지 악령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동기로, 하나님을 위한 목적으로 ‘이 사람이 기름부을 사람이구나!’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 위하지 아니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이 날 위하고 이것이 상대법입니다. 상대를 해서, 우리가 제일 두려워할 것은, 악신이 그에게 들어오면 모든 생각이 자기 딴에는 선택해서, ‘생각 중에도 이 생각이 제일이다.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데 그 생각이 전부 자기를 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무엇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종류이기 때문에? 그 생각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쉽소.
하나님이 함께 하면 모든 피조물이 전부 함께 합니다. 그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그것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일생동안 수금을 암만 거머쥐었다 할지라도, 악기를 다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따 이것만 하면 잘된다’ 싶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죽는 사람도 될 수 있어. 하나님이 위하니까 마귀고 뭐고 모든 만물이 다윗을 위했습니다.
다윗을 위하려고 위했습니까? 사울왕은 다윗을 죽일려고 스물 두 번이나 계획한 것이 결국은 다윗왕을 유명하게 만들었고, 거룩한 왕을 만들었고, 참 빛나는 왕을 만들었고, 모든 백성이 감화 감동 받고 그 역사를 본 사람들이 다윗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그래 만들었어.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자기에게 결과적으로 유익이 돼요. 마귀도 되지. 자기를 해하는 것 중에는 죽이는 해보다 더 큰 게 뭐 어디 있습니까? 죽이려고 하는 죽이는 해도 자기에게 결과적으로 유익이 돼 버렸다 말이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모든 것이, 원수든지 대적이든지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위함이 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아무리 요것만큼은 내게 유익이 되겠지’ 하는 자기를 위해서 한 그 일도 전부 자기를 망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날 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어. 무섭기는 하나님이 날 버리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없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날 위하게 할 수 있소. 하나님이 날 버리게 할 수 있소.
그것이 우리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주권입니다. 우리가 주권됐어.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현실 범위에서는 자기가 주권이라 말이오.
내가 하나님 안 버리면 하나님이 나 안 버립니다. 내가 하나님 버리면 하나님이 나 버리고, 내가 하나님 위하면 하나님이 그 일로 날 위하고, 내가 날 위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 위하고 나를 위하지 아니하시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