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전투


선지자선교회 1986년 5월 25일 주일오전

 

본문 : 마태복음 13장 1절∼9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기 씨 뿌리는 비유에 `좋은 땅에 떨어지매' 이렇게 번역된 것이 과거에는 `옥토에 떨어지매 '이렇게 번역이 됐었습니다. 성경 번역하는 사람들이 옥토라고 하면 중국의 한문 글자 음을 따서 한 것이니까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 이래 가지고 좋은 땅이라 이라는데 말이라는 것은 어떤 나라 말이든지 그 나라 말이 내 나라에 들어와 가지고 모든 사람이 공통 의식을 해서 공통으로 다 쓰는 말이 됐으면 그 말이 자기 나라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새삼스럽게 고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번민을 주는 것은 하자들의 할 일이 아니고 그거는 어리석어서'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모두 다 옥토에 뿌린 씨라 하는 것은 기독자라면 어린 아이까지 다 아는 걸 뭣 때문에 `좋은 땅에 떨어지매' 좋은 것이나 옥토나 우리가 다 그래 알고 있는 것인데 우리 한글 학자들은 이상하게도, 다 모두 알고 있으면 그것이 우리나라 말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새로 꼭닥스레 가르쳐 봤자 뭐 또 정권 바뀌면 다 이리 돼 버리고 저리 되는 것인데 그 언제 그것을 자꾸 그래 할 것이 없고 그저 인식되고 있는 그 말은 그립을 보는 것 한 가지니까 말을 알면 그 말 가지고 무슨 새로운 문화나 뭣을 자꾸 개발할라고 하지 안하고 엉뚱한 데다 그래 가지필요 없는 복잡성을 자꾸 가하고 맙니다.

기독자들도 필요 없는 새 말을 지어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는 복잡하지 안하고 분주하지 안하고 조용히 고요하게 단순하게 모든 참을 알아서 구원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씨뿌리는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받을 때에 이 도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에 원수 셋을 여게 지적했습니다. 길바닥에 뿌린 씨, 돌밭에 뿌린 씨, 가시떨기 위에 뿌린 씨, 이렇게 세 가지로 원수를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룰려면 이 세 가지 원수를 완전히 정복해서 박살을 내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힘쓸 거는 어디다가 힘쓸 것인가? 옥토에 뿌린 씨 여게다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우리가, 받은 도리는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은 그런 씨가 되어져야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여기에 가리킨 것은 생명의 도를 말씀한 것인데 이것은 곧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고 하니 여러분들이 잘 들으면 어린 아이가 제일 잘 알아 듣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식한 사람이 둘째로 잘 알아듣습니다. 제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 잘못 알아듣습니다. 제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세상 모든 광문 다학한 세상 지식으로 가뜩 차 있는 그 사람이 못 알아듣습니다.

아는 거는 잘 알지만 아는 것은 행할 수 있도록 아는 것이 아는 것이지 행할 수 없게 아는 그것은 하나의 생명 없는 녹음 테이프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도리를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의인들은 믿음으로 산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어떤 게 하나님의 의인고 하니 영원 자존하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시기 전에 염려하신 일이 셋이 있었고 원하시는 일이 셋이 있었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크게 염려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이 그대로 셋이 나타났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에 세 가지 큰 난제가 생겨졌습니다.

염려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 셋은 어떤 것인고 하니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이 도리를 어기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제일 걱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한 마디 어겨 가지고 사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어긴 그것은. 하나님이 걱정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은 어기면 당신이 큰 힘 들여서 지어놓은 모든 피조물들이 다 멸망을 받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고 노여워하시고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노여워하시고 염려하시는 것은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순종으로 살아야 그것이 완전하고 행복되고 영생을 하는 것인데 피조물이 저거 마음대로 저거 중심으로 저거 위주로 사는 이것으로써 멸망받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일 또 노여워하시고 염려하신 것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영계 것이나 물질계의 것이나 어떤 피조물이든지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이렇게 친밀히 결합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그게 행복되는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로 더불어 사는 그런 일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에게 제일 근심거리요 또 분노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노여워하시는 것과 근심하는 것이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리켜서 죄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세 가지를 죄라고 말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삐뚤어졌다 그말입니다. 삐뚤어진 값은 사망입니다. 망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고통이었는데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이 세 가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았고 우주는 다 저주를 받아서 사망 아래에 있게 됐습니다.

이것을 구출하시는 데에는 삐뚤어진 값인 이 사망에서 구출해야 되니까 삐뚤어진 것을 다시는 달리는 고칠 수 없고 삐뚤어진 것을 없애는 데에는 삐뚤어진 값인 그 사망의 형을 받아야 죄가 없어지는 것이지 형받는 그 외에는 죄를 없애는 길은 없습니다.

죄 없는 한 사람이 이걸 대신 담당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이 담당하면 담당한 사람이 이 형으로 영원히 죽어야 되고 한 사람밖에는 담당 못 하는 것이니까 아무리 해 봤자 항상 그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고는 사람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또 무한하신 하나님이 이제 인성과 한 격위를 이룬 신인양성일위가 되셔 가지고, 이 피조물들의 대표자인 인간이 세 가지 범죄함의 값으로서 만물이 다 저주 아래에 있었는데 이 형을 대신 신인양성일위가 형을 받으셨습니다.

대신 형을 받으시고 형을 받으심으로써 이 모든 잘못된 값을 다 신인양성일위가 무헌하신 분이 받았기 때문에 이 삐뚤어진 값을 받았으니까 삐뚤어진 것은 완전히 다 도말돼 버리고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설정하신 사죄의 공로입니다. 대형으로 사죄된 사죄의 공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된 것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입법해 놓은 지공 지성의 전지자의 입법에, 무한함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신인양성일위가 다 죽기까지 순종을 하셔 가지고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입법에 완전 이행함으로써 율법에 만족을 이루었습니다. 율법 요구에 만족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중에 하나입니다.

또 한 의는 하나님과 원수되어서 마귀하고 하나된 거기에서 예수님이 그 형을 죽음으로써 다 그것은 없애 버렸고, 원수된 것은 죽음으로 없앴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다시 화친하기 위해서 당신의 신인양성일위의 전부를 다 바쳐서 화목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과 비로소 화친이 되어져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밀접한 화친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친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또 서로 내주하는 이런 화친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 가지요 하나님의 노여워하시는 세 가지를 없앤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그 심판에서 이는 만점이라, 이는 완전 무결이라, 이는 털끝만한 흠과 점이 없는 정죄할 것이 없는 완전자라 하는 그 완전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로 인정하신 그것은 논리로만 한 것이 아니고 신인양성일위이신 권리로 가지고 한 것 아니고 강제로 한 것 아니고 실제로 대형을 해서 이 죄를 없앴고 대행을 해서 의를 건설했고 대신 완전한 화친을 해 가지고 실상으로 실제로 화친을 해 가지고 화친의 이 생명을, 공로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인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말씀하시고 이 하나님의 의는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위해서 이 의를 행하신 것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요 당신은 인성 가졌으나 죄 없는 언성인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다 완전인데 할 필요 없습니다. 없는데 신인양성일위가 이렇게 세 가지 노를 푸신 대형으로 이루신 것과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 가지 의를 대행으로 칭의를 이루시고 대화친으로 화친을 이루신 이 여섯 가지 문제를 해결을 완전히 지워서 하나님의 공심판에도 이는 완전이라 인정받고 통과한 이 공로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 하는데 이 하나님의 의는 당신 위해서 하신 것 아니고 택한 자들을 대신해서 이 의를 설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이 만족하신 의를 설정하신 이 의는 곧 택자들 하나하나를 대신해서 설정허기 때문에 이 대신 설정한 것을 택자들이 다 받았습니다. 택자들이 받는데, 두 가지로 받는데 하나는 영이 받고 하나는 육이 받습니다. 영은 주격이요 심신으로 된 이 육은 소유격인데 영육이 다 죽었기 때문에 그 자체에게는 이 은혜를 받을 만한'그 존재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순전한 객관 역사로써 죽은 영에게 이 공로를 입혀 가지고 완전히 이 영을 영생하는 영으로 살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우리 영은, 우리 영이 알기도 전에, 죽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 하나님의 의를 이 영에게 입혀서 영을 의롭게 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연결시켜 가지고 산 영이 됐습니다. 우리의 영은 영생으로 살았습니다.

살고, 우리의 심신으로 된 이 육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완전한 의,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심판을 완전 통과한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 영은 제것인 줄 알고 이제 제것으로 받아 가지고 이 의를 제 것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은 아무도 해하지 못하고 이는 완전이 됐지만 우리의 심신은 이 의를 제것인 것을 인정해야 될 터인데, 제것인 것을 인정해야 되고 또 인정하면 인정하는 표시는 뭐인고 하니 이 의를 가진 자로 살고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인정한 표는 그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심신이라는 이 육은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이 이 완전 의를 건설했기 때문에 이 건설된 이 의는, 완전 의는 내 것입니다. 주님이 나 대신 건설했기 때문에 이 의는 내것입니다. 이 의는 내것이 되는 동시에 `값을 내고 사라'는 말씀이 있는데 `값이 안 돼도 값을 내고 사라' 하는 말씀이 있으니 주님이 내 대신 이 의를 완전 건설하셨기 때문에 그 의가 내것 되니 나는 나 대신 이 의를 건설할라고 죽으신 그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댓가를 내라 말은 나는 당신의 것이 되고 당신의 완전 설정한 이 의는 내것이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이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완전히 여섯 가지를 행하신,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완전한 의, 하나님의 의는 빠진 게 없이 완전히 설정해 놨는데 요것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빠짐없이 완전히 설정해 놨는데 이 설정해 놓은 이 의 그대로, 그대로의 것을 우리에게 가져와 가지고 전달하는 것이 있으니, 그대로의 것을 전달하는 것이 있으니 곧 그것이 성신의 감화 감동입니다. 영감입니다. 영감은 주님이 실상으로 건설해 놓은 의 그대로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비유로 해야 될까?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돈을 만일 천 원짜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 원짜리 가지고 있으면 돈 그 천 원이 천 원짜리 가치있는 것은 천 원 이면에. 그 지화 밑에 금화로 그 천 원 가치있는 금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금화를 하나 표시하는 것으로써 천 원짜리가 나왔기 때문에 그 천 원은 어디든지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천 원이라는 그 돈을 은행에다가 내가 예치를 하면 천 원짜리 수표를 하나 끊어줍니다. 그러면 수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수표는 돈 아니오. 천 원 짜리 지화도 돈이 아니지만 수표 그 근거에는 돈 천 원짜리가 예금되어 있고 돈 천 원짜리 그 근거에는 천 원 가치 있는 금화가 예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서 이렇게 권리 있고 실력 있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완전 대속의 이 하나님의 의를 완전 설정해 놓은 그 설정 그대로 우리에게, 마치 수표와 같이 그대로의 것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전해 줘서 가져 왔으니까 그게 뭐이냐 하면 성신의 감화입니다. 성신의 감화, 성신이 우리에게 뭘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설정한 그 의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보혜사 성신이 오면 내것을 가지고 증거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의 의를 그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하나도 빠지지 안하고 가감도 없이 그대로, 꼭 마치 어떤 실물이 있는데 필림에 촬영하면 그대로 박혀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우리의 대속하신 공로 그대로를 꼭 가지고 우리에게 온 것이 성령의 감화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화는 또 우리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 그대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이 신구약 성경의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 그 근거에는 영감이 들어 있고 영감 근거에는 예수님의 대속의 실상이, 공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공로가 영감으로 나타났고, 꼭 그대로 나타난 영감, 영감이, 그대로에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 가지고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곧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의 공로가 그대로 나타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하지 안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형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준, 대형으로 사죄 주신 그 사죄를 내가 벗지 안하고 사죄를 내가 입고 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성경에 하지 말라는 걸 안 하면 내가 사죄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걸 내가 최할 때에는 사죄를 내가 벗는 게 돼 버리고 맙니다.

또, 성경이 하라고 하는 것을 내가 할라고 애를 쓰고 할라고 하면 박해가 있어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대행으로 칭의 주시고 대화친으로 화친 주신 이 의를 내게 입혀 줘서 내가 행하지 안했는데도 예수님이 대신 행했기 때문에 나는 의로운 자요 나는 하나님과 화친된 자인데 이 화친된 그것이 영감으로 나왔고 영감으로 비추어 나온 것이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에 나왔고, 이 신구약 성경에 나왔는데 우리가 성경에서 하라 하는 대로 그대로 하는 것을 우리가 칭의를 받고 화친을 받고 그것을 보존하고 칭의받은 대로 살고 화친 받은 대로 살아서 의로운 자로 사는 것이오.

의로운 자가 사는 것이요 의인이 사는 것이요 그것을 우리가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하면 의인이 의인 생활을 벗어 버려서 변질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은 주님이, 우리가 안 해야 될 일을 했음으로써 정죄받아 가지고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됐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죽기까지 형벌을 받아 가지고 우리가 안 하여야 할 그것들을 한 그 재를 저지른 그 값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대신 영원한 사망을 받았고 무한한 사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대형했습니다.

이 받아 가지고 우리에게, 이것을 해결한 사죄를 입혀 주셨으니까 이 사죄가 성경에 나왔습니다. 나와서 신구약 성경에 하지 말라는 이것은 사죄를 우리에게 보내 준 것입니다. 이 사죄를 보내 준 건데 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안 하는 것은 이것은 사죄를 내가 입고 있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걸 내가 하면 사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신구약 성경에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칭의와 화친이 그것이 성경에 나왔습니다. 성경에 나온 것이, 실상이 영감으로 나왔고 실상이 영감으로 나온 것이, 실상이 영감과 성경으로 우리에게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것이 이 성경에서 하라는 것을 하는 그것이 곧 예수님의 대속을 실상으로 내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 영은 받았고 우리 육체가 예수님의 사죄를 실상으로 받는 게 뭐인가? 그 실상이 성경에 나왔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사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죽어도 안 하면 내가 사죄를 입고 다시는 사죄를 벗지 않는 것입니다.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행의 칭의와 대화친의 이 생명을 내가 받았으니 이 생명을 빗기지 않는 것은 이 성경에 하라는 것을 뺏기지 안하고 하는 것이 이 칭의를 내가 벗기지 안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화친의 생명을 했기지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실상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이, 대속의 실상이 어디 와 있느냐? 영감은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그 실상이 영감으로 나타나 가지고 있습니다. 영감으로 나타난 그 실상이, 예수님의 대속의 실상이 영감으로 나타난 그 실상이 진리의 이 말씀으로 나타나 가지고 있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으로 나타난 이 신구약 성경의 진리 말씀은 곧 우리에게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세 가지 대속이 실상으로 내게 와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속에는 종류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사죄에 속한 것이요 하나는 칭의와 화친에 속한 것인데 칭의와 화친은 그대로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고 대속으로 사죄된 것은 이미 사죄됐기 때문에 다시는 그것을 안 해야 되는 것이고.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는 이 사죄를 입혔으니까 이 사죄를 입었으니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라. 사죄를 입었기 때문에 이 사죄를 벗지 안하고 사죄를 입고 사는 것이 다시는 이 삐뚤어진 일을 하지 안하는 것이요 또 칭의를 입고 사는 것은 옳은 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요대로 하고 사는 것이 그것이 칭의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한 말씀 한 말씀은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이 내게 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실상으로 내가 내것으로 받아 입고 있느냐 이 대속을 벗어버리느냐 하는 것이 우리 현실에서 이 문제가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말씀 한 말씀을 들어서 길바닥에 뿌린 씨 이것을 벗어나야 되겠고 돌밭에 뿌린 씨를 벗어나야 되겠고 또 덤불 위에 뿌린 씨를 벗어나야 되겠고 옥토에 뿌린 씨의 생활을 하게 되면 어찌 되느냐? 그 결과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백 배는 인간수의 만수입니다. 인간은 하나 둘 열 하면 또 열 하나, 또 스물 하면 또 스물 하나, 이렇게 인간의 만수는 십 수를 인간의 만수로 고 또 마귀의 만수는 여섯으로 마귀의 만수로 셉니다. 여섯, 하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새로 시작합니다.

또 하나님의 만수는 뭐이냐 하면 삼위일체, 셋으로 했습니다. 했기 때문에, 결실을 맺는다 그말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에게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 실상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있는 건데, 말씀으로 보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한 실상이라 말이오.

실상인데 이 실상을 내가 내것 삼고 뺏기지 안하는 것이 이것이, 실상인 이 말씀이 왔는데 내가 이 말씀을 뺏기지 안하고 이 말씀을 내가 보수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이 구원을 내가 보수하고 뺏기지 않는 것입니다. 뺏기지 않는 것은 곧 하지 말라는 거는 안 할 때에 뺏기지 않는 것이고 하라는 것은, 다, 죽어도 할 때에 그것이 뺏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말씀이 왔는데, 이렇게 이 원수 세 가지에게 뺏기지 안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이 실상이 신구약 성경에 나타났는데,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대속의 실상인데 이 실상 그 속에 뭐이 배경이 있는지? 사람이 수표를 가지면 수표 그까짓 거 종이쪼가리 무슨 소용 있습니까? 종이 쪼가리는 가치가 없지만 이 종이쪼가리 그 근거에는 돈이 현금이 저축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화 그까짓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지화 거게는 그 속에 금화라는 실제 그만한 가치 있는 것이 배경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금화 그까짓 게 뭐이요? 그거는 그 나라의 모든 재력의 실력이라 하는 것이, 온 세계 공통적으로 그만치 인정해 주는 그 실력이 그 배경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화가 이게 종이쪼가리 그까짓 거 불에 넣으면 아무것도 없는데 지화 그걸 주면 천 원짜리의 물건을 주는 것은 뭣 때문이냐? 그걸 보증하고 있는 뒤에 금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또 그보다도 더 허무한 종이쪼가리 수표를 주면, 수표 주면 물건을 주는 거는 뭐이냐? 그 속에 실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영감대로 하면, 영감대로 왜 할라 하느냐? 영감대로 하는 것은 영감의 실상인 예수님의 나를 대신한 대속이 있고 또 성경 말씀은 이 실상인 그 예수님의 대속을 성령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곧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이라. 대속의 실상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의라.

이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에 왔는데 이 말씀을 내가 받을 때에 이 구원의 실상인 것을 깨닫고 이 구원의 실상을 빼앗기지 안해야 되겠는데 이 구원의 실상을 뺏을라고 하는 원수가 세 놈이 있습니다. 원수가 세 놈 있어. 이놈을 죽여야 됩니다. 이놈을 죽이지 못하면 제가 죽습니다. 이놈을 죽여야 됩니다.

죽여야 되는데 이놈을 죽이면 어찌 되느냐? 이놈을 죽이면 옥토에 뿌린 씨가 된다 이랬습니다. 옥토에 뿌린 씨가 된다 그말은 옥토에 뿌린 씨는 돌이 이 뿌린 씨가 먹을라 하는 땅의 지기를 돌도 방해하지 못하고 덤불도 방해하지 못하고 길바닥의 딴딴한 것도 방해하지 못하고 아 씨가 그 밭의 영양을 솔빡 다 먹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는 바의 이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실상이기 때문에 내가 곧 하지 말라는 거 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죄를 내가 입고 있는 것이요, 다시 정죄받을 것이 없는 사죄를 입고 있는 것이요, 또 내가 하라는 걸 그대로 내가 하면 내가 칭의받고 화친된 사람이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 뭐 칭의를 만드는 게 아니고 화친을 만드는 게 아니라 된 그것을 내가 기지 안하는 것이라. 뺏기지 안하면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어떤 결실을 맺을 수가 있느냐? `백 배를 맺을 수가 있다' 그말은 인인 관계에 완전 무결의 만점을 이룰 수가 있다. `백 배를 맺을 수 있다' 백 배는 인간 만수에 만수를 한 것이 백인데 십에 십을 곱하는 것이 백인데 인인 관계에 만만을 이를 수가 있다. 인인 관계에 흠과 점이 없는 만점을 이룰 수가 있다.

또 `육십 배를 맺는다' 마귀란 놈이 우리를 꼬와 가지고 별일을 하지만 마귀 상대에 내가 조그마치라도 흠과 점이 없이 마귀 상대에 완전을 이룬다 마귀 상대에 털끝만치도 흠이 점이 없이 완전을 이룬다. 이것이 "육십 배", 육의 십 배면 육십 배입니다. `육십 배의 결실을 맺는다' `삼십 배의 결실한다 삼십 배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만점을 이룬다.

우리가 받은 바의 요 씨만 빼앗기지 안하면, 씨만, 이 씨를 빼앗기는 게 아니고 이 씨를 이것을, 씨가 먹을 양분을 빼앗기지 안하면 이렇게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이루게 된다. 인인 관계에도 영원 만점, 모든 악령과의 관계에도 영원 만점, 신인 관계에도 영원한 만점, 이라니까 모든 피조물과의 완전한 만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우리 현실에 지금 이게 문제이다. 이걸 세상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돈을 보고 탐하고 가고 뭐 권세보고 탐하고 가지만 우리는 이 비밀을 알기 때문에 땅에 것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배설물로 여긴다, 똥 오줌과 같이 여긴다, 모든 쩌꺼기로 여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을 우리가 이루는 데에는 우리 적이 셋인데 하나는 길바닥에 뿌린 씨는, 길바닥에 뿌린 씨는 사람들이 밟았기 때문에 땅이 단단하니까 씨를 뿌려 봤자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 세상 거짓말 인간 무책임한 말 거짓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내 대가리에 꽉 들었어. 내 머리에 이 세상 인간 말이 거짓말 참말 뭐 별별 말들이. 마귀가 꾀우는 것이 꽉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게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지를 안한다 말이오. 하나님 말씀이 이해가 안 되고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런 말은 석가모니도 했는데 공자도 했는데 노자도 했는데 이런 것은 톨스토이도 했는데' 이렇게 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은 하나님 말씀은 없는 가운데에 우주와 영계 것을 창조했고 인간의 말은 지음을 받은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한 것이니까 지은 자와 지음받은 것들이 말한 거와 그 차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살리고 인간의 말은 죽이고 죽는 거 아닙니까? 결정에 이 세상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전부 죽을 운동밖에 안 했지 산 거는 하나도 없다 말이오.

이런데, 이 세상 인간들에게 너무 시달려서, 세상 인간들에게 우리 마음이 다져지고 다져지고 굳어지고 굳어지고 거기에 미혹되고 미혹돼 가지고 우리 마음들이 강퍅해져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이 말씀은 천지보다 중량이 크다. 이 말씀은 전능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천하 인간 지식을 똘똘 뭉쳐도 이 한 절도 당하지 못한다. 이렇게 정상적인 평가를 가지는 이 평가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걸 죽여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과 이 세상 말의 이 판이한 것을 이걸 깨닫고, 하나님 말씀은 천지는 변동시켜도 하나님 말씀은 획 하나도 변동을 시킬 수 없는 이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우리, 영감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이걸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세상 인간의 말과 같이 예사롭게 여기는 요 강퍅을 우리가 죽여 없애야 되겠고 둘째로는. 돌짝 밭에 뿌린 씨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행할라 하는데, 행할라고 하다 보니까 고 밑에 조금 들어가니까 돌이 들어 있습니다. 그거 무슨 비유인고 하니 요 말씀대로 듣고 행할라고 하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는 고놈이 들어와 가지고, 하다 보니까 자기 위주 자기 중심 고놈이 가로막아 가지고 요 말씀대로 실행을 못 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자기를 부인해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고놈을 완전히 죽여야 됩니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놈을 죽이기 전에는 절대 천국은 제가 이루지 못합니다. 기본구원은 이뤘지만 건설구원은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싸움이 쉬운 게 아니야. 세상 인간들의 그 말에 다져지고 굳어진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은 천하에 있는 모든 말의 전부보다 이 말씀은 중량이 크다.

이 말씀은 천하 인간의 모든 말을 다 주워 모으면 큰 태산만치 클 터인데 그 전부보다 어 말씀의 한 획이 더 크다 하는 요것이 믿어지지 않는 이것을 우리에게 이 강퍅을 죽여야 되겠다 말이오. 이게 쉽지 안해요. 이거 죽여야 되고 말씀대로 행할라고 하니까 내 중심 내 위주라는 이놈이 속에 들어 가지고 말씀대로 하면 내 위주 내 중심이 깨지니까 내 중심 내 위주가 반대를 해 가지고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뭐입니까? 내 가정 때문에, 내 몸 때문에, 내 모든 명예 때문에, 내 지위 때문에, 내 권세 때문에, 내 직장 때문에, 내 상관 때문에, 내 부하 때문에, 내 모든 사업 때문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게 전부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 그놈을 죽이기 전에는 안 된다 말이오. 이놈 죽이기가 쉽지 안해.

이놈을 죽여야 옥토가 되지 이놈 죽이지 안하면 옥토 안 됩니다.

이놈을 죽인다고 옥토가 됩니까? 그래도 옥토 안 돼. 이제 덤불 밑에 뿌린 씨를 예수님이 해석을 하시기를 세상 재리와 염려라 말했어. 하나님 말씀대로 요대로 살라고 하니까 세상 염려가 들어와 가지고 그만 이 사람이 들어 가지고 이 염려를 가지고 오고 저 사람이 저 재리 문제를 가지고 오니까, 재리 문제와 염려 문제 때문에 요 말씀대로 실행을 못 하고 중단을 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받아 가지고 요 말씀에게 내 마음을 다 들이고 정성을 다 들이고 몸을 다 들이고 목숨을 다 들여 요 말씀대로 실천할라 하는 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전부 다해서 요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요 말씀대로 살라고 하니까 방해 자가 누굽니까? 내 중심 내 위주가 방해합니다. 요놈을 죽여야 되겠고. 세상 염려와 재리 요것이 방해하니까 세상 염려와 재리를 다 포기해야 되겠고 이래야 이 말씀대로 사는 옥토에 뿌린 씨가 된다 말이오. 이 말씀에다가 내 전심 전력과 생명을 다 기울여서 살수가 있습니다. 이래야 옥토에 뿌린 씨가 됩니다.

이래야 악령에 대해서도 완전 승리 인간에 대해서도 완전 승리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완전 승리, 이래서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만점, 하나님도 `오, 너와 나와의 관계는 만점이다.' 마귀에게도 하나도 흠점 없이 `이는 만점이라' 인인 관계도 만점. 이래야 이것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싸울 싸움을 싸우지 안하니까, 이 군병이 전쟁을 해야 힘이 드는 것인데 전쟁하는 것을 잊어 버려 놓으니까, 지금 전쟁은 붙어 있는데 전쟁이 붙어 있는 이 전시라는 것을 모르고 전시 체제를 가지지 안하고 전쟁할 자들이 지금 저 뒤판에 가 누워서 잠자고 지금 춤추고 앉았습니다. 그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군인의 힘이 뭐 있겠습니까? 우리 싸울 힘을 왜 싸우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힘이 다 빠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반사들이 힘이 없으며 왜 이래 권찰 힘이 없으며 왜 제직들이 장로들이 왜 목사들이 힘이 없느냐? 없는 거는 싸울 싸움을 싸우지 안하기 때문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뭐입니까? 우리의 싸움은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 적을 죽여야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인간 말과의 이렇게 판이한 것을 이것이 믿어지지 안하니까 내 마음에 강퍅한 마음을 금식을 하든지 산에 가 기도하든지 기도해서 내 마음이 자꾸 회개가 되져 가지고 과연 하나님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주님이 하진 말씀이 성경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 말씀 아닙니까? 이게 에누리가 있습니까? 이렇게 믿어지는 것이 그게 정상인데 믿어지지 않는 내 병의, 심령의 강퍅하고 완패하고 이 세상에서 부패해진 이 마음을 변화시켜야 되겠다 말이오.

이게 우리 싸움이라. 변화시키는 거.

이 말씀대로 행할라 할 때에 내 중심 내 위주 이놈이 들어 가지고, 내라는 놈이 들어 가지고, 내게 걸리면 안 돼. 이 말씀대로 살라고 하다가도 제게 거리끼면 그만 말씀을 집어 던져 버립니다. 나를 죽여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를 부인하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자기입니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나를 죽인 원수 그놈이기 때문에 원수 옛사람 그놈을 죽여 버려야 된다 말이오. 이거 죽이는 게 우리 싸움이라. 죽이는 것이 돌발에 돌을 뽑아내고 옥토를 만드는 것이라 그말이오.

또, 이 세상에 물질이니 재리니 그 모든 나오는 거 그거 다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포기하고, 그러면 세상의 물질이니 염려니 다 포기합니다. 세상 재리와 물질을 다 포기해. 포기하고 어짜라고? 포기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사장노릇하고 시키시는 대로 이제 대통령노릇하고 시키시는 대로 장관노릇하고 시키시는 대로 종노릇하고 시키시는 대로 직공노릇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하면 세상은 내것이라. 그보다 더 잘 될 수가 없어. 바로 될 수가 없어. 이것이 세상을 바로 점령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 싸움이 세 가지니 이 싸움, 자기가 세 가지라는 이걸 깨닫고 이 싸움을 싸워야 될 터인데 싸우지 안하니까 일선의 현역 군인이 그만 뒤에 돌아가서 후방 군인 되면 그만 죽습니다. 정년 퇴직하면 그만 죽습니다. 정년 퇴직하면 그만 죽어요. 그만 느리하이 그만, 다 용기 다 잃어버립니다. 정년 퇴직해서 안 죽을라고 이러면 그보다 못한 다른, 그거만 못한 직분이라도 취해 가지고 나도 이제 정년 퇴직 안 하고 이제 지금 평생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그 일을 취해 가지고 뿍뿍 이래 나가는 사람은 산다 그말이오.

현역 군인이 후방 군인되면 그만 늙어 죽습니다. 정년 퇴직한 사람 보십시오.

시들시들해 가지고 그만 죽어 버립니다. 이러니까 정년 퇴직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그 일을 잡아서 할라고 이렇게 지혜있는 사람들은 날뛴다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싸울 싸움을 싸우지 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힘이 없어.

신앙 걸음은 자전차 걸음이라. 두 발통으로 되어 있는 자전차 걸음은 달리면 힘이 있어요. 섰으면 넘어가요. 섰으면 넘어가고 달리면 힘이 있어요. 달리면 힘이 있어요. 두 발통으로 가는 것을, 우리가 그전에 장난삼아 어릴 때 시험을 해 봤어.

저 가는데 네가 옆에서 한번 발로 차 봐라' 그거 차다가 걸리면 큰일 날 건데 우리는 그때 무서운 줄 모르니까 저 세게 달릴 때 옆에서 발로 가지고, 오는 거 보고 콱 암만 차도 끄덕거리고 바로 가 버립니다. 안 넘어가요. 발로 차도 안 넘어 가요. 이렇지만 섰으면 가만히 안 건드려도 넘어가 버리고 말아,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라. 힘을 내서 순종을 하고 하면 힘이 나고 가만히 안 행하고 섰으면 죽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싸움이 세 가지입니다. 우리 싸움 세 가지. 요거 기억해요. 요거 쉬운 거 같아도 쉬운 게 아니요, 쉬운 게 아니라 여러분들 지금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 이것이 막바로 예수님아 죽으심으로 대형하신 이 사죄, 대행으로 칭의, 또 대화친으로 생명 얻은, 예수님이 이 세 가지 큰 공로를 설정했는데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공심판에서 완전이라 하고 하나님의 의라 결정하는 이 완전 공로를 설정한 것이 내가 직접 받아서 누릴 수 있고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앞에 와 가지고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하는 요것을 가지십시오.

이것을 지금 듣고 나가면 바깥에 가면 많은 목사들이 반대할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을 바로 말하면 그들이 다 이해를 하지.

이러니까 이 진리를 굳게 잡고 오늘은 여러분들이 이 세 가지 전투를 발견합시다. 발견해서 세 가지 전투를 해야 됩니다.

이래서, 옥토에 뿌린 씨는 그 씨가 돌짝밭에도 방해받지 안하고 덤불에도 방해받지 안하고 길바닥에도 받지 안하고, 옥토에 뿌린 씨는 옥토의 지기를 다 빨아먹지 않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 먹어야 되지 우리 마음을 십분지 구만 먹어도 안 됩니다. 우리 십분지 십을 다 먹어야 돼요. 우리 마음을 이 말씀이 다 먹어야 되고 우리 생각을 다 먹어야 되고 우리 뜻을 다 먹어야 되고 우리 힘을 다 먹어야 되고 우리 목숨을 다 먹어야 이 말씀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래도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배풀어 주신 이 구원을 공짜배기로 받는 방법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들이지 않고는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 구원이 실실 뭐 놀면서 제 욕심 다 부릴 대로 다 부리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저 볼일 다 보고 나머지기 찌꺼기 찌꺼기 그까짓 거 가지고, 예배당에 가서 `오전에 한번만 슬쩍 참여하지' 또 다 지나다가 성경 먼지가 보얗게 이래 놓고 `보고 싶으면 한번 보지' 그따위로 해 가지고 건설구원되는 줄 압니까? 안 돼.

기본구원은 있지만 건설구원은 절대로 그런 자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자에게 건설구원을 줍니다.

건설구원은 뭐인데? 기본구원은 하늘나라 다 가서 있는 거는 있`는 거고 하늘나라 간 사람으로서 권세와 영광과 존귀와 지위와 대우와 실력에 그것이 하늘에 영광 차이 있는 것인데 그 차이는 오늘에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하는, 요 실지로 제가 행함으로써의 건설구원되는 요 건설구원 여기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뭐 하늘나라 가서 영원히 뭐 천물 될라면 가만히 놀아요. 예배당에 안 와도 좋아요. 기본구원 천국가는 것은 택자들은 다 갑니다. 예배당에 한번도 안 와도 갑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라도 예수 믿는다 하고 죽으면 갑니다. 뭐, 간 그거는 기본구원은 꼭 같애요.

기본구원은 꼭 같은데 하늘나라에 가서 기본구원 얻은 자와 기본구원 얻은 자의 그 영광의 차이와 권세의 차이와 지위의 차이와 부강의 차이와 환영의 차이와 실력의 차이 있는 그게 문제 아닙니까? 사람이 사람 아니라서 천해집니까?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의 그 실력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실력 차이에서 영광 존귀 있는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상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서 불쌍합니까? 사람인데 사람으로서 실력과 영광과 존귀가 없기 때문에 불쌍한 자가 아닙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가기는 갔지만 거기서 실력과 영광과 존귀가 차이 있기 때문에 그래.

이 세상에도, 없어질 하룻밤에,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하루 밤의 영광도 막 좋다고, 차이도 좋다고, 하룻밤에 수치도 수치라고 하룻밤 천대도 천대라고 하는 인간들아, 영원한 천대를 보라. 이 세상에서 짤막한 하룻밤 천대도 천대라고 하는 인간들아, 영원한 천대를 보라. 이 세상에서 짤막한 천대로써 영원한 아대를 보라.

이 세상에 짤막한 영광과 존귀의 실력을 가지고 영원한 영광과 존귀가 기다리고 있는 이 사실을 깨달아라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깨야 됩니다. 너무 어리석습니다. 아무나따나 이래 믿어도 구원이 되는 줄 아는 어리석소. 안 됩니다. 오늘에 너무도 교회들은 부패해졌습니다. 너무도 인본주의입니다. 너무도 세상주의입니다. 너무도 실행이 없습니다. 안 믿습니다.

믿으면 실행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부 거짓말로 여기고 있소.

(기도) 잠시 잠깐 후면 세상이 부인하고 있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선포하신 이대로의 종말과 심판이 이를 것인 것을 저들이 압니다. 이러나 저희들은 여게 대해서 공연한 악령의 유혹으로 헛된 것에 분주 복잡하여 이렇게 저렇게 우리 마음이 헷갈려서 흐려지고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강퍅하고 어두운 저희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것을 진실로 감사합니다.

주님이 영영하신 하나님의 의로 인정한 완전 구원을 이루신 것을 오늘 우리 앞에 갖다 놓고 현실 현실에 이 구원을 착착 네것으로 완전히 삼으라고 말씀하신 이 중대한 일에 저희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이런 저건 미혹에서 예사롭게 여기는 저희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주셨사오니 이 자리에 있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이 말씀이 저희들 속에서 역사하여 주시사 다 옥토에 뿌린 씨가 되어져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로서 주님이 오늘 구름 타고 오실지라도 부끄럽지 않게 주님을 영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이 대속해 주신 이 완전 구원을 저들이 믿고 버리지 안하면 되는 이 사실을 굳게 잡고 오늘에 놓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것으로 일찍 돼 있지만 세상에 악령의 미혹으로 찾지 못해서 어두워졌었습니다. 이제 주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하여서 주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았사오니 감사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피로 구속하신 것들이며 주님이 영원히 사랑할 주의 것이며 주님의 보배로 항상 손바닥에 놓고 기르는 저희들인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깨닫게 하사 주님의 사랑과 이 은혜를 `믿음으로 범사를 주님에게 의논하여 주님의 도와 주심으로 이 악하고 인정 없고 사나운 거짓된 세상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주님의 은혜 속에서 무럭무럭 연한 순같이 자라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속에 불이 붙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에도 이 말씀으로 완전히 사람병이 고쳐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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