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4:38
세 가지 순종의 근거와 결과
1982. 6. 25. 금야
본문:요한복음 5장 5절~13절 거기 삼십 팔년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38년된 병자가 낫게 된 이 표적은 우리 신약시대의 교우들의 실상을 나타내 보이는 하나의 계시입니다. 우리들은 실상이요 여기에 나타난 표적은 실상인 우리를 나타내서 보이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그 울타리에 문이 있는 그 양문을 들어가면 양문 곁에 솔로몬의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각종의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심한 환자인 38년된 환자가 거기에 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들에게 찾아가시되 제일 먼저 38년된 병자가 제일 중한 병에 걸렸고 또 오래 된 것을 아시고 이 38년된 환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거기에 있는 환자들이 처음부터도 구걸하기 위해서 온 환자들도 있었겠고 또 병낫기 위해서 온 환자들도 있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 환자들의 마음은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오고 가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어서 유익을 얻어 구걸을 잘해 가지고 그래도 좀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만 여기에 다 기울어졌습니다. 병낫는다는 그런 생각은 별로 가지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병이 낫고저 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말은 제삼자들이 들을 때에 무슨 저런 정신없는 말 할까?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왜? 아, 그렇게 중한 병이 들어 있는 사람이 병 낫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낫고 싶었지만 낫지 않아서 그렇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런 어데 말 같지 않는 말을 묻고 있다 그렇게 생각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환자들에게 가셔 가지고 제일 먼저 그 환자들에게 하신 일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잘못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또 바로 비판하지를 못하셨거나 또 쓸데없는 말을 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고 바로 보셨고 또 바로 판단하셨고 또 저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요긴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런 욕망으로 저런 욕망으로 모여든 각양의 환자들이 있었지마는 그만 세월이 하루 이틀 지나가는 데에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순전히 구걸해서 좀 제대로라도 잘살아 보자 하는 그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부 ‘어떻게 하면 좀 조금이라도 낫게 잘살아 볼까’ 하는 그 욕망 그 소망만 가졌고, 또 그들은 무슨 노력을 해서, 농사나 무슨 공업이나 이런 것을 해 가지고 잘 살려는 그것보다도 모든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입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얻어 가지고 잘살아 볼려고 하는 구걸에 집중됐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이 구걸하는 거지야, 네가 구걸하는 이 거지가 된 그 원인은 네가 병이 들어서 이러하지 병만 나아 건강한 사람이 됐다고 하면 뭣 때문에 이 가련한 처지에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구걸해 가지고, 구제받아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유익을 얻어 가지고 잘살아 보겠다 하는 그런 거지 생활 구걸 생활을 하겠느냐? 이것은 암만 해 봐도 항상 병신으로 거지로 남의 구제받다가 죽는 것뿐이다. 그러나 네가 병이 낫는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남에게 거지 신세가 되지 않을 것이고 구제받는 불쌍한 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도와 가면서 대우받는 그런 사람으로 살 것이 아니냐? 이러기 때문에 네게 제일 급선무가 병 낫는 것이요, 또 제일 필요한 것이 병낫는 것이다. 병만 나으면 다 해결된다.’ 하는 이 말씀을 주님이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때에 거기에 있는 환자들에게 더 이상 좋은 말이 없고 필요한 말이 없고 요긴한 말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의 진상을 바로 파악하고 그 모든 잘못된 욕망과 잘못된 의뢰를 완전히 깨뜨려서 회개케 하신 것입니다.
이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한 것이 분명히 보여집니다.
그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오고 가고 하는 그 사람들을 의뢰해서 그 사람들에게 덕봐 가지고 병신으로 그래도 좀 잘 먹고 잘 살려 하는 이 욕망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주고받고 하는 그 대화 가운데에서 38년된 병자는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하나는 오고가고 하는 인간 의뢰, 인간에게 덕볼려는 인간 의뢰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렸어. 그때는 뭐 어떤 옷 잘입은 사람이 와도 눈에 뜨이지 않았을 것이요 자기 동무 환자에게 어떤 부자가 큰 돈을 내 준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눈이 뜨이지 아니하고 이분이 오셔 가지고 병을 낫아 주실려고 하니까, 그만 병낫는 데 대해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나니까, 구제받아 봤자 그 까짓 거 병신노름, 그 모든 원인이 병든 그것 때문에 그런 거니까 병나아야 된다는, 병 고칠 이 소망으로 소망을 척 바꾸고 보니까 이제는 인간 의뢰해서 구제받는 그런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 그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리고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의 어떤 은혜로서 자기는 병이 나아야 되겠다 하는 이 소망에 그 환자의 마음은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이것이 거기에 있는 모르는 인간들이 지금 생각해 볼 때는 ‘아, 저 병신이 여기에 점잖은, 돈많은 손님들이 많이 지금 성도들이 지나가니까 한 푼이라도 구제나 얻을 일이지 어떤 정신없는 사람 같은 분이 하나 와 가지고 너 낫고자 하느냐? 그말 하니 고만 그말에 쏠려 가지고 저렇게 지금 많이 구제해 줄 사람에 대해서도 그만 떨궈 버리고, 돈 한 푼이라도 더 구걸받아 가지고 잘살 터인데 그만 잘살 수 있는 그 모든 수입도 다 버리고 저런 어리석은 노릇을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아마 속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니까, 38년된 병자는 이제까지의 의뢰하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 한 분을 의뢰했고, 구걸해서 의식주 잘해 보려는 그런 소망을 버리고 병 낫기를 원하는 소망으로 바꾸었을 때에 그 결과가 어찌 됐는가?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어리석다 허무하다 했지마는 결과는 38년된 병자가 나았습니다.
그 병자가 그 시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았으니 병자의 신세는 어찌 됐습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제일 비참한 그 신세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제일 주목의 대상이 됐고, 인기 대상이 됐고,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기쁨이 그의 것 됐고,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비교할 수 없는 감사가 가득찼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가졌겠지마는 그 사람들보다 뛰어난 이제 소망으로 충만했습니다.
몇 가지입니까? 자, 인기 집중, 모든 주목의 대상, 제일 기쁜 자, 제일 감사한 자, 제일 희망이 넘친 자. 이것을 가진 자가 거기에서 제일 인간의 행복에 이 다섯 가지를 이 사람이 그 중에 제일 많이 가진 제일 행복된 사람이 됐습니다.
이 다섯 가지가 어떻게 해서 그의 것이 됐습니까? 어떤 부자가 돈 뭉치를 갖다 줘서 됐습니까? 어떤 잘난 사람을 서로 관계를 맺어서 됐습니까? 아니오. 자신의 실력이 생겨짐으로 됐습니다. 자기가 병신이 온전한 자가 되어짐으로 됐소. 이 다섯 가지가 뭐 시집 잘가 된 것 아니오. 장가 잘가 된 것 아니오. 어떤 부강한 자의 배경을 만나 가지고 된 것 아니오. 횡재를 만나 가지고 된 것 아니오.
자신이 온전해지고 실력있게 됐고 영광스럽게 존영하게 돼서 자신이 온전해짐을 인해서 이 다섯 가지 인간 행복을 구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38년된 병자를 데리고 ‘얘, 너 낫고저 하느냐?’ 이러니까 ‘돈이나 뭐 좀 참 한푼 더 주십시오’ 하면서 오만 병신 노릇 다 했을 것이라.
‘아야야야. 한푼 더 주십시오. 아야’ 엄부레이를 쓰면서 뭐 아픈 중에도 더 그랬을 것이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여기 기록은 안됐지마는 ‘네가 이런 가련이 병신된 그것이 원인인데 병만 나으면 지금도 누구 부럽지 않게 행복된 사람으로 다른 사람 도울 수 있는데, 병낫는 길이, 병낫는 길이 있으면 병낫는 것이 중요하지,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하나 둘 도와 달라고 구제나 받아 가지고 좀 넉넉히 살아 보겠다는 그런 허무한 소망을 가졌느냐?’ 많은 설명을 했을 것이오. 설명을 안 했으면 성신의 감화가 다 알게 했을 것이오.
이러니까 이 38년된 병자가 ‘아이구, 과연 내가 병낫는 데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했구나.’ 병낫는 걸 생각하니까 구제주는 사람도 의뢰하는 것도 다 간곳이 없었고, 남을, 인간을 의뢰해 가지고 뭐 덕볼려 하는 그것도, 그 소망도 간곳 없고, 앞에 있는 상대되어 있는 이분을 새로 맞이해 가지고 이분과 함께 자기 병낫는 여기에 전체가 다 집중됐던 것입니다.
이것이 38년 동안이나 그 자리 누워 가지고 있던 병신이니까 어떤 분이 한 분 와 가지고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말하는 분도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는 말 같지 않은 말이고, 이 말 듣고 지금 구제즐려 하는 분 두고, 다른 사람은 구제를 받는데 가만 있으면서 뭐 낫겠다는 이 말만 듣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환자도 어리석은 사람이고 몸에 보기에 심히 답답하게 봤을 것입니다.
이렇지마는 마지막에 결과로 보니까 제일 천한 인간이 제일 존귀한 인간 됐어.
모든 사람에게 제일 멸시받던 자가 제일 우러러 보이는 자 됐습니다. 하나의 인기도 없던 자가 마구 인기는 독점했습니다. 이렇게 항상 가련한 신세에서 탄식하던 자가 제일 기쁜 자 되어졌고 제일 원망 불평하던 자가 감사의 사람이 되어졌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가 그때 이 사람이 제일 희망이 넘쳤을 것이오.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실상은 우리인데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은 분명히 자기를 의인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거룩한 행위 의로운 행위로 이렇게 자신과 행위를 성화시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고, ‘땅의 것은 생각지 말아라. 이런 것들을 구하지 말아라.’ 그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 너희들이 구할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지마는 자신들도 모르게 예수 믿는 사람이 소망은 전부 세상, 오늘이라도 떠나면 아무 소용 없는 땅에 있는 소망에만 가득차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 믿는 신자들입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로 땅의 것은 생각지 않고 위에 것을 찾아 죽음 넘어 소망을 가지고 이 소망을 이룰려고 내가 하고 있는지, 항상 계획이나 욕망이나 포부나 잘났다고 크다고 하는 자라도 그 전체의 욕망과 소망이 세상 떠나면 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이 소망을 가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38년된 병자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38년된 병자와 같이 이렇게 병신되어 이 병신의 욕망 같은 이 어리석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이 사실을 이 표적 계시로서, (여러분들 기도해야 돼요. 마귀가 대발동을 하고 있어. 이 아이들 제 마음대로 못 합니다. 마귀라는 놈이 달려들어서 못 견디게 하는 거라. 기도해요. 설교 안 하겠어. 가만히, 기도하고. 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마귀라는 놈이 지금 여기에 마구 생명 운동이 일어나니까 이놈이 지금 야단쳐. 이제 그것까지 물리침을 받아야지.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기도해요.)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인애함을 항상 찬송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히 죽음 너머 소망을 이 세상에서 이룰려고 살고 있지 세상 소망을 이루어 가질려고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지마는 주님이 예정하시고 보신 것은 신약교회의 성도들이 땅의 소망만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란다 바란다 하지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말하는 것이나 꿈꾸는 모든 것이 전부가 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익을 볼까?’ 아내는 어떻게 하면 저 남편 덕을 볼까, 남편은 어떻게 하면 아내 덕을 볼까, 시집갈 처녀들도, 장가갈 총각들도, 사장도 ‘어떻게 하면 이 직공들을 어떻게 부려 가지고 직공들로 말미암아 유익을 볼까?’ 직공들도 아래 사람들도 위에 사람들도 뭐 관민을 막론하고,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부가 인간 의뢰로서 인간 혜택 볼려고 하는 이 구걸 성질, 이 구걸 인품 인질 이것인 것을 우리에게 이 형식으로, 이 표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이 38년된 병자가 제일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회개하고 난 다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 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이오. 제일 무식해도 상관없고, 제일 가난해도, 제일 무능해도, 제일 병신이라도, 제일 재를 많이 저질러 놨어도, 제일 낭패가 많이 졌어도, 일어날 수 없이 다방면으로 첩첩이 함정에 빠진 자와 같이 매장이 되어 있어도 이 두 가지만 회개하면 자기의 사회에서 회개하지 아니한 모든 자보다 뛰어난 행복된 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약으로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허무하지마는 그 결과는 이루어졌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러기에 무식한 자가 유식한 자를, 가난한 자가 부자를, 병신이 강건한 자를, 인간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십니다.
땅에 속한 것을 소망하는 이 소망을 자기를 의인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자기의 인간의 병 이 병을 깨닫고, 병은 생각지 못하고 구걸에만 급급해서, 병은 생각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구걸이나 좀 많이 할까 여기에만 집중됐던 이 병신이 이제는 제 병도 생각하고 병나을 것도 생각해서 병 나을 소망으로 소망을 옮긴 거와 같이, 어떻게 하면 인인관계에서 내가 좀 성공을 해 볼까 이것이 구걸하는 병신이요 거지입니다. 구걸하는 거지입니다.
이것이 인간 의뢰자요, 이것이 땅의 것을 소망하는 자입니다. 이자가 이제는 땅에 있는 소망,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할 것이지 너희들의 구할 것이 아니니라. 너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너희에게 독생자 주신 아버지가 아시느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하물며 이런 것들을 은혜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것은 다 이방인이 걱정하는 것이다.’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니까 땅에 있는 모든 소망을 버리고 자기를 온전한 사람으로 이루겠다는, 이 인간병을 고쳐서 참 거룩한 사람으로, 의인으로, 성자로, 성녀로, 누가 볼 때도 기념하고 칭찬할 만한 깨끗한 거룩한 생애, 이 두 가지의 욕망을 가지는 이 욕망으로 바꾸는 것과 인간을 의뢰하는 이 의뢰를 이제는 우리를 모든 데에서 구출하러 오신 주님 한 분을 의뢰하는 이 의뢰로 바꾸는 것 이 두 가지만 바꾸면 할 수 없는 38년된 병자 같은 우리들이 그 중에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이 된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다 바꾸어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금생과 내세에 뭣 때문에 고생을 합니까? 인간병 때문에 고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그 사람 성질 하나가 병이 들어 가지고, 못쓸 성질병 하나가 들어서, 성질이 하나 병들어 가지고, 모든 면은 구비하지마는 그 사람의 모든 구비한 마련한 행복은 성질 하나가 더러워 가지고 그 성질이 산산히 다 부숴 버리고 가련한 사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참 그 사람은 아깝고 좋은 사람인데 가져서는 안될 못쓸 나쁜 욕심 하나 가진 그 욕심 때문에 그 사람 일생동안 신세는 갑니다. 사람도 좋고 부지런하기도 하고 기술도 있고 능력도 있고 열심도 있고 건강도 하고 다 그런데 못쓸 욕심 하나 가졌다 그말이오, 못쓸 욕심 하나.
안 가져야 될 나쁜 욕심 하나 그거 가지고 일생을 망쳐. 어떤 사람은 못쓸 취미, 그 취미는 일생동안 한 번도 안 들여도 될 수 있는 그 취미인데 못쓸 취미 그거 하나 가지고 그것 때문에 일생과 자기 집안을 망치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 모든 게 깨끗한데 가다가는 미치괭이 모양으로 마음이 나쁜 마음 하나 가지고, 그 마음, 잠깐 그 마음을 잘못 써 가지고 감옥에도 가고, 잠깐 그 사람이 그 마음을 잘못 써 가지고 도장 하나 꾹 찍고 그만 거지돼 버리기도 하고, 인간에게 이런 모든 인간병이 들어서 인간이 비참해지는 것이지, 인간병을 고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입어 그리스도의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동하고 정하는 이런 사람만 된다면 영계와 물질계는 그 사람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자가 땅에 있는 욕망을 사람과 행위의 욕망으로 바꾸고 인인관계에서 덕볼려고 하던, (가만 있어. 저게는 그 아이들을 예사로 두는데 못써. 아이들이 망합니다. 뭐하는 사람들이오, 다? 저 뒤에 저 누가 어떤 사람이오? 아이를 서이나 낳아 놓고. 아이 임자 데려가요, 저기. 자기 임자 찾아가. 요새 아이 둘만 낳고 서이만 낳으면 직장을 안 줄려 하는 이 시대에 서부교회에서 아이 많이 낳으라 많이 낳으라 하니까 뭐 아이 낳는 그게 예배당에 와서 예배보는 것도 방해하고 그래도 아이 많이만 낳으면 되는가? 그러면 젖 먹이는 여인에게 화가 있어. 예배를 잘 보고 복을 받아야 되지. 저 아이 저거 임자 찾아가십시오.
아이를 한 무더기 뭉쳐 놓고 야단이라. 아이 임자 빨리 나와요, 지금. 가서 데려와. 한 부인이 아이를 저렇게 많이 낳았는가요? 예사라, 거기에는. 이제 이번에 집 지으면 저리 유리 해 가지고 그 안에 갖다 넣어 놓고 소리 하나도 안 들리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끼리야 거기서 뭐 울든지 짖든지 어쩌든지)
이렇게 요것이 쉬운 것 같으나 어렵습니다. 인간의 덕 볼려고, 인인관계에서 무엇을 성공을 가져올려고, 유익을 가져올려고, 행복을 가져올려 하는 이것을 주님은 싫어합니다. 이것을 주님 한 분을 의뢰하는 것으로 딱 바꾸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소망을 ‘내가 모든 면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참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 한번 되겠다’ 하는 이 욕망, ‘아무 앞에라도, 하나님 앞에 가도 부끄럽지 않는 이런 행위로 고쳐 가지고 가겠다.’ 이 참 성도가 가질 욕심, 성도가 가진 소망 이 두 가지 소망으로 소망을 바꾸고, 피조물 의뢰하는, 다른 사람 의뢰하든지 자기 실력 의뢰하는 인간이나 물질 의뢰하는 인간이나 뭐 기업체 어떤 것 의뢰하는 것 그것이 다 인간 병신입니다.
인간이 병이 들어서 그렇지 병만 안 들었으면 하나님 한 분 의지하지 그런 것 의지하지 않습니다. 정함이 없는 것들인데 오늘 어찌 될지 압니까? 이래서, 의뢰를 바꾸고 소망을 바꾸고 이 두 가지만 바꾸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일하실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정반대로, 제일 천한 것이 제일 존귀한 것이 된, 제일 신세 가련한 자가 제일 행복스러운 자가 된, 이렇게 변해지는 것이 누구든지 기독자라면 다 되는데 이 두 가지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회개해서 주님을 의뢰한다면 의뢰하는가 안 하는가, 주님을 의뢰해서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하다가 자기 보기에 될 듯 하면 시키시는 대로 하고 이러면 안 되겠다고 많은 사람이 말하든지 제 경험이든지 체험이든지 해 볼 때에 ‘이것은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하다가는 낭파된다’ 싶을 때는 안 하는 것은 주님을 의뢰하지 않는다는 것, 조건부로 의뢰하고 제한적으로 의뢰하고 한계적으로 의뢰하는 것이지 끝없는 의뢰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뢰를 가지고 하나님이 일할 수가 없어서 안 이루어지는 것이지 정말로 소망을 바꾸고 의뢰를 바꿀 때에 주님은 일하실 수 있습니다.
‘주여! 내가 낫고자 합니다. 낫아 주십시오. 낫고자 합니다.’ ‘얘, 저기 구걸주러 왔다.’ ‘아이구 구걸이고, 나으면 되지 내가 그거 눈에 안 보입니다.
낫게 해 주옵소서.’ ‘얘, 저 사람이 지금 부자인데, 옷 잘입고 왔는데 돈 좀 그거 많이 줄 것이다.’ ‘아이구, 돈이고 뭐 귀찮스럽습니다. 낫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두 가지로, 두 가지가 완전히 바꾸어져서 전환됐을 때에 주님이 ‘그러면, 이제는 구걸도 보이지 않고 이것 가지고 먹고 살 것도 보이지 않고 네가 낫고저 하느냐?’ ‘예, 낫고저 합니다. 낫고저 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고?’ ‘나는 인간 중에 제일 희망이 없는, 제일 가련하고 천하고 제일 못나고 제일 가련하고 천하고 제일 망했고 제일 희망이 없는 아주 제일 못쓸 자입니다. 나는, 이 가운데에 병신이 많지마는 나 같은 병든 자는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되겠습니까?’ 이것으로 인해서 절망을 가졌습니다.
절망을 가졌을 때에 주님이 ‘그런 낙망 하지 마라. 네가 인간 중에 제일 가련하다는 가련한 그것을 인해서 네가 낙망하지 말아라.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앞에서는 그런 것이 문제가 없다. 그런 낙망은 포기해라.’ ‘예’ 그 낙망을 포기했습니다. 주님과 말씀을 인해서, 주님으로 인해서 그 무서운 낙망을 포기했소.
‘이렇지마는 선생님, 내게 뭐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줄 압니까? 나는 구불지도 잘 못합니다. 앉은뱅이 누운뱅이만도 못합니다. 누운뱅이는 뚜굴뚜굴 구불고 앉은뱅이는 손으로 질질질 끌면서 가지마는 나는 앉은뱅이 누운뱅이보다도 나는 힘이 없는 자입니다. 무능한 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게 되겠습니까?’ 자기의 무능으로 낙망하는 이 낙망을 주님 앞에 말할 때에 ‘내 앞에는 그런 것이 문제가 없으니 낙망하지 말아라. 내가 있지 않느냐? 나로 인한 은혜는 네 유능 무능이 상관이 없다. 무능으로 인한 낙망을 버리라.’ 버렸습니다.
‘선생님 그렇지마는 나는 돕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인덕을 못 봅니다.
나는 아무 덕도 보지를 못하고 항상 손해만 봅니다. 나를 돕는 자가 없습니다.’ 자기를 협조해 주는 자가 없다는 무협조에서 절망하고 낙망한 이것을 주님 앞에 말할 때에 주님이 ‘내가 있으니까 내 앞에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 협조자가 하나도 없어도 좋다. 협조자 없는 것으로 낙망되는 그 모든 낙망을 다 포기해라.’ ‘예, 포기합니다. 이 낙망 포기하고 당신으로 소망합니다.
무능으로 낙망한 낙망을 포기하고 당신으로 소망합니다. 제일 비참한 비참으로 낙망한 이 낙망을 포기하고 당신으로 소망합니다. 나를 방해하는 자가 이렇게 많습니다. 모든 방해로 인하여 낙망된 낙망을 당신으로 인하여 소망으로 이 낙망을 다 포기합니다.’ 이렇게 이 네 가지 낙망을 예수님으로 인하여 포기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소망과 바꾸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38년된 병자의 제일 가련한 신세 그것이 예수님을 먼저 끌었습니다. 알겠습니까? 38년된 제일 비참한 가련 그것이 모든 환자 중에 예수님을 먼저 끌었소. 꾸부렁거리지도 못하고 제일 무능한 그것이 예수님의 은총을 먼저 끌었습니다. 돕는 자 없는 그것이, 다른 사람은 먼저 벌떡 물에 들어가 가지고 물 동할 때에 병 낫게 된 방해가, 이것 때문에, 이 네 조건 때문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이오. 여러분들.
오늘 우리가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바꾸어서 돌아섰을 때에 우리 생각으로서는 네 가지로 인한, 이 네 가지로 인한 이것은 참 절망될 만하고 낙망될 만하고 희망이 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마는 이거는 우리 단독의 생각이요, 주님은 말씀한 것도 그러하고 실상도 이 네 가지가 들어서 주님의 은혜를 먼저 끌어왔고 많이 끌어왔고, 이 네 가지가 들어서 주님의 은혜를 끌어오는 역사가 됐지 이 네 가지가 주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방해하는 역사가 안됐습니다, 여러분들.
우리의 무능은 절대로 주의 은혜를 받는 데 방해되지 않습니다. 무능이 방해 아니라 능력있다고 잘난 그것이 방해입니다. 나를 협조하는 자가 없는 게 방해가 아니라 공연히 사돈팔촌까지 협조한다 하는 인간 협조 그것이 하나님 은혜를 받는 데 방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나가는 데에 아무 방해없이 형통해질 때에는 사고입니다. 형통해질 때에는 사고요. 주님을 따라갈려고 할 때에 딱딱 맞추어서 한 자욱을 옮기지 못하고 딱딱 방해할 때에 ‘으샤’ 하는고 믿음으로 확 나가니 태산이 팍 눌러지고 그 다음에 새 세계가 나오고 하는 것 이것이 신앙세계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완전히 전환을 해서 바꾸었고 네 가지 절망을 주의 말씀 듣고 보니까 이 네가지 절망이 오히려 자기에게는 당신의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됐고 실력이 됐고 당신의 긍휼은 더 많이 오게 된 이 네 가지인데 마귀의 생각으로 생각할 때에는 이것이 다 절망을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래서 주는 이 절망 네 가지 이놈을 주로 인하여서 완전히 더 큰 소망으로 바꾸어 여섯 가지가 딱 구비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됩니다. 그만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만 일어섭니다. ‘일어서라!’ 그만 일어섭니다. 이 여섯 가지가 되고 나니까 그만 일어서. ‘자리 들어라’ 뻐뜩 드니까 들립니다. ‘걸어가라’ 걸어가니까 걸어가집니다.
기독자는 요 두 가지를 바꾸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바꾸지 아니하면 주님과 대화는 끊어집니다. 주님과의 상관은 끊어집니다. 이 두 가지를 바꾸었을 때에 주님은 꼼짝 못합니다. 주님은 못 갑니다. 이 두 가지를 바꾸는 자에게는 주님이 떠나지 못합니다. 당신을 의뢰하고 당신으로 인하여 이 두 가지를 소망하는데, 의인 되고 의로운 행위 이것 때문에 피흘려 구속하셨는데, ‘내가 의인되고자 하는 욕망과 의로운 행위 욕망 이 두 가지 욕망을 당신 의뢰해 가지고 당신 은혜로 이것 하겠습니다. 해 주십시오’ 하는 자는 당신이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신과 끊어질 수 없는 그물장은 쳐집니다. 여기에서 끊어질 수 없는 관계는 가집니다.
관계를 가지고 나니까 거기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네 가지 문제가 일어났는데 이 네 가지 문제를 인간 지식으로 판단하고 보니까 절망이 되어졌는데 주님을 만나서 주의 말씀으로 주로 인해서 판단해 보고 나니까 이 네 가지는 주님의 긍휼을 독점하게 되었고 주님의 도우심을 끌게 됐고 자신은 주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됐던 것입니다.
여섯 가지가 되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일어서는 것 자리들고 걸어가는 것 이것밖에는 안 남았소. 일어서라 하니까 일어서져. 이 네 가지가 되고 난 다음에, 일어서는 것이 무엇이 일어서는 것이냐? 이것은 표적이오. 물론 그 병신도 일어설 때에 찰나에 휘떡 서지 못하고 뻐들뻐들 뻐들뻐들거리며 차차차 이래 일어났을 것이오, 이래. 이래 일어났을 것이라 말이오, 낫을 것.
이 여섯 가지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우리 현실에서 주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신 주의 법도대로의 쉬운 것부터 한 마디 두 마디, 내 현실 생활을 주의 말씀대로 한 가지 두 가지 하는 이것이 38년된 병자가 이제까지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노릇, 일어서는 것을 한 번도 못해 봤소. 눕고 앉고 하는 이것만 했지 일어서는 일은 한 번도 못해 봤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은 일생동안 한 번도 못해 봤던 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 하니까 그만침 일어섰고 둘 하니까 그만침 일어섰고 셋 하니까 그만침 일어섰고, 자기가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시작해서 하나 하니 그만침 일어서고, 새로 시작하는 이것이 일어서는 것이요, 시작을 다 했으면 다 일어서는 것이요, 이렇게 일어선 걸 시작했으니까 일어섰지. 새 생활 시작했지.
새 생활 시작한 것을, 이 현실에서 시작한 생활을 고 다음 현실이 와도 이 생활 버리지 않고 그대로, 내일이 와도 그대로, 모래가 와도 그대로,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기로 시작한 이 생활을 시간이 지나가도 그 생활 그대로 하고 장소가 지나가도 형편이 지나가도 말씀대로 행하는, 말씀을 따라 행하는 요 행위를 요동치 아니하고 그대로 계속하니까, 일어선 자가 장소 바꾸어지면 걸어간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일어선 자가, 여기에서 일어선 자가 저게 가 있습니다.
그러면 걸어간 게 아니고 뭣이겠소? 걸어갔든지 뭐 업고 갔든지 간 것 아니겠소? 이 현실에서 시작한 생애를 그 시간과 그 장소와 그 현실이 바꾸어져도 그대로 계속 그대로 행하고 사는 그것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
걸어가고, 자리를 들고 가라. 이제까지는 자기 38년된 병신 노름 하던, 항상 자기 현실에게 얹혀서, 자기 현실에게 파묻혀서, 현실에게 속해서, 현실에 피동되어서 이렇게 살던 생활을 이제는 현실을 자리 한장 모양으로 똘똘 걷어서 딱 거머쥐고 어깨에 착 둘러메고 지금 걸어갑니다. 이제는 자기 현실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현실을 똘똘 뭉쳐 집니다. 현실을 다스립니다. 현실을 지배합니다.
현실을 내 자유대로 합니다. 자리에게 얹히고 속한 것이 아니라 자기 보금자리의 그 자리를 자기가 들고, 자기 자유대로 지금 들고 가요.
이제는 환경의 소산이 되지 않고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환경에 속화되지 않은 거라. 환경을 주의 말씀 인도 따라 그 환경을 다스리고 환경을 지배하고 환경을 내 자유 자제하고 하는 이 믿음을 지키는 것, 내가 이제까지 행해 보지 아니한 믿음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아, 요 말씀은 한 번도 못 지켜 봤다.’ 안 지켜 본 하나님 말씀을 하나 지키면 그만침 일어섭니다. 또 둘 지키면 그만침 일어선 것입니다. 지킨 것 하나, 지킨 것 그것 포기하지 말고 지킨 것을 계속 지키면 걸어가는 것입니다.
계속 순종을 해라. 시작하는 순종 해라. 계속 순종해라. 네 환경의 마찰에 꺾어지지 말고 환경에, 환경의 마찰에 삼켜지지 말고 환경을, 네가 환경을 통치하는 요 순종으로 걸어가라. 시작의 순종을 해라. 시작한 것을 계속하여 걸어가라. 네 환경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순종으로 걸어가라.
요 세 가지 순종만 네가 하면 열흘이 걸릴런지 십년이 걸릴런지 반드시 네가 걸어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목되는 그 단계가 될 때에는 네가 이렇게 나와 같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몇십억 몇백억이 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사람보다 너는 뛰어난 가치있는 사람이요, 행복스러운 사람이요, 인기 주목의 사람이요, 존귀한 사람이요, 희망을 제일 크게 가진 사람이요, 감사에 넘치는 사람이요, 욕망에 충만한 사람이라.
네가 이렇게 여섯 가지를 구비하고 세 가지 종류의 순종을 계속하면 너는 반드시 조만간에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가 되느니라, 영광스러운 자가 되느니라.
천하 인간이 다 울어도 너는 웃고 살 수 있느니라. 천하가 다 너를 슬프게 만들어도 너는 기쁘고, 절망케 해도 너는 소망에 넘치고, 천하가 와 가지고 들이 볶아대도 너는 감사에 넘칠 자가 되리라. 인기 주목자가 되리라. 제일 행복스러운 자가 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에 이걸 실지로 바꾸어야 돼. 알고 우리가, 이 표적으로 보인 이 표적 이것의 실상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표적의 실상이 되어야 됩니다.
두 가지를 바꾸고, 의뢰하는 것 바꾸고 소망 바꾸고, 네 가지 절망 이것이, 주님을 상대하고 보니까 절망될 네 가지 이 절망될 원인이 오히려 주님에게 대해서 소망이 넘칩니다.
이러기 때문에,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절망 저런 절망 절망거리를 주느냐? 이거는 주님을 만나는 유일의 넘치는 소망의 원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식해서 그렇지 주님은 절망으로 주신 그 절망이 아니요 소망으로 주셨는데 인간 생각으로 절망이지, 인간 평가로 비판으로 절망이지.
네 가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세 가지 종류의 순종, 세 가지 종류의 순종.
한 가지 종류의 순종은 일어서는 것, 한 가지 종류의 순종은 걸어가는 것, 한 가지 종류의 성질은 자리 드는 것. 자리 드는 것.
여러분들! 우리는 현실을 다스려야 됩니다. 현실을 다스려야 됩니다. 동산을 다스리라! 동산을 지키라! 우리는 환경의, 환경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환경의 피동자가 아닙니다. 환경을 하나님께 피동된 나에게 그를 피동시키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피동으로 그 뜻대로 할 때에 그들이 와 가지고 칼로 가지고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피동된 것 아니고 그들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데 그들이 피동됐기 때문에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피동됐으면 칼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러면 한 사람 두 사람 보는 사람마다 주목이 될 것이요 인기가 집중될 것이요, 그들이 보든지 말든지 두말할 것 없이 이 사람은 기뻤을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기뻤을 것이오. 38년된 병자가 나아서 일어섰으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감사의 부자 됐고 기쁨의 부자가 됐고 희망에 넘치는 희망의 부자가 됐고 인기 부자가 됐고 모든 사람들의 주목의 부자가 됐으니 이만하면 행복스럽지. 이것이 병신에게 왔습니까? 자체가 온전해짐으로 왔기 때문에 행복이라 그말이오. 구걸로 온 것 아닙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