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4:27
세 가지 방편
1986. 12. 10. 밤 (수)
본문:누가복음 2장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성구는 모두 요절로 대개 외우고 있는 줄 압니다.
벌써 성탄 연하장들이 많이 다니고 또 벌써 성탄 예물들도 오고 가고 하고 있고 교회마다 성탄 축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신불신자간에 모두 축하하는 그 장식도 하고 이렇게들 해서 참 예수님의 성탄을 온 세계가 다 기쁨으로 축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탄 이 축하를 할 당사자들이요 또 주체자들입니다.
잘 알고 있지마는 성탄 축하에 대한 가장 요절이 되어 있는 누가복음 2장 14절에 있는 요 간단한 뜻을 다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는 말은 높은 곳에라고 한 것은 이 영계, 하늘나라를 말하는데 지극히 높은 곳이라 그말은 하늘나라에서부터 그 이상이 없는 모든 가치적으로 존귀하고 또 모든 도덕적으로 사랑적으로 가장 높은, 가치면으로나 권세면으로나 지위면으로나 또 성결면으로나 온갖 도덕면으로나 사랑의 봉사면으로나 그런 종류들의 높은 평가의 그 모든 위치들을 말을 해서 지극히 높은 곳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공간적으로 높은 것은 지금 우리 이 땅보다 열 길도 높으고 뭐 몇천 것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이겁니다, 이거요.
이래서, 알미니안주의라든지 루터주의라든지 하는 그런 것은 이 칼빈주의를 위해서 있소. 그것 때문에 칼빈주의가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뭐 자꾸 말세에 이런 것들이 자꾸 일어나고 또 우리 교회서는 한참 판을 한번 쳤습니다.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라고, 나는 냉장고에서 뭐 사흘 동안 있었다더나 냉장고에 들어 가지고서 이 냉동실에 저 시체실 냉동실 아닙니까? 얼지 안해요? 거기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또 나와 가지고 뭐 말한다고 이래 가지고 그 테이프를 내가 가져오라 해서 나한테도 가져왔어요.
또 죽어서 무덤, 뭐 죽어 가지고서 얼마를 있던 사람이 나왔다고 죽은 송장이 일어나 가지고 말한다고 이래 가지고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이래 가지고 마구 판을 칩니다. 이래 놓으니까 그것도 냅두면 다 죽어 버려, 그만. 그것도 냅두면 거게 안 죽고 살 사람이 우리 서부교회도 몇 사람 안 돼. 그렇츰 가르쳐도 옳은 말은 안 들리요. 땅에 속한 말은 잘 들리지마는 하늘에 속한 말은 잘 들려지지를 안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늘에 속한 말씀을 하지마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라 하다가 마지막에 죽이지 안했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알고 마귀가 그렇게 세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조심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돼요.
우리 어제 장로 투표할 때 내가 설교를 어떤 설교 했느냐 하면은 민수기 16장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는 뭐이냐 하면은 모세하고 아론하고 한 편 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또 인제 그 사람들하고 이 두 편으로 이래 했는데 이래 가지고서 그 한 것이 거기 잠깐 나오고 있어요.
이제 그것을 읽어서 말하기를 이렇게 되어지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우리 교회에 장로들은 이래 두 편이 돼 가지고서 싸우는 이 한 편은 멸망하고 한 편은 구원 얻는 이런 자리에 있지 말고, 이 일곱 교회 가운데 한 교회만 하나지 여섯 교회는 둘이기 때문에 지상 교회는 이래 두 편 되는 것이 필연성이다, 이거는.
필연성이기 때문에 이래 되나마 내가 이 성구를 보고 향하는 것은 이래 생각하다가 내편 네편 생각지 말고 어느 말이, 네가 암만 동편에 섰을지라도 동편이 옳으나 서편이 옳으나 봐서 서편이 옳거들랑은 아예 이제까지 인정 사정 다 약속 다 싹 끊어 버리고 옳은 편으로 돌아서라.
그러기 때문에 옳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그른 것을 다 뭐 혈육이고 친척이고 뭐 부자간이고 친구간이고 다 삐뚤어진 거는 싹 끊어 버리고 옳은 데로 돌아서는 이것을 재빨리 재빨리 너희들이, 깨달아 주실 때에 옳은 데로 돌아서는 걸 네가 재빨리 해야 되지 그거 뭐 이런 정실 저런 정실에 걸려 가지고서 또 ‘사람이 한번 약속한 거’ 그 썩은 약속 그까짓 거 했으면, ‘사람이 그래도 도리가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이 한번 작정했는데 그럴 수가 있나?’ 그따위 썩은 마귀 인격 치워 버리고 빨리 재빨리 옳은 데로 돌아서서 너희들이 멸망을 피하라 하는 그런 뜻으로서 장로 장립 때 설교를 그 설교하고 나중에 선거할 때는 뭐 다른 거는 하지도 안하고 그래 선거를 했습니다.
선거를 해서 세 사람이 당선되고 일이삼만 그래 하고 나머지기 다섯 사람인데 다섯 사람도 다 전부 삼분지 이로 하면 합격될 자격이 그게 되어 있지마는, 삼분지 이입니까, 점수가? 얼마입니까? 장로 투표는 몇분지 얼마가 돼야 됩니까? 반수 이상이 돼야 됩니까 삼분지 이가 돼야 됩니까? 그것도 그런 건 좀 젊은 사람들 그 머리 안에 좀 넣어 놔요. 녜, 삼분지 이. 삼분지 이가 돼야 되는데 그래 우리 교회서는 세 사람만 그래 일이삼등만 하고 나머지기 안 하기로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이단이 많이 들어오니까 이단이 와야 진리가 나옵니다. 이단이 나와서 하나 ‘이단이라’ 하면은 그 진리가 진리 같으면 아주 진리가 바로 솟아오르고 또 이단이 됐으면은 거기 그만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어데까지 가도 진리라 하는 것은 영원히 가도 그 꺾어짐이 없고 자꾸 바로 일어서야 돼지는 것이고 성경에 바로 해석된 것은 성경을 들이대, 모든 성경을 들이댈수록이 더 옳고 더 바르고 더 곧고 더 참되고 더 돋아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이단이 많은 때에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굳게 잡지 안하면 언제 마귀 밥이 될란지 모릅니다. 그거 암만 제 혼자 ‘내가 열심히’ 열심 있는 그까짓 거는 소용 없어.
제가 그때에 그런 말을, 지금은 많이 안 합니다마는 고신에 있을 때에는 제가 그때 한창 서로 나뉘어지고 할 때 그런 말을 제가 많이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기가 뭐 뛰기를 한 길 뛰어오르고 아주 그게 힘이 굉장히 많다, 아주 강건하다 할지라도 이놈 그물을 널리 푹 싸 버리면 그물 안에서도 저는 저거 세계인 줄 알고 얼마든지 뛰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물이 이래 떡 싸이면서 할 때는 나중에 가서 자기는 나중에 가 잡혀 올라가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눈을 널리 뜨고서 그물을 봐라. 그물을 봐서 크게, 뭐 사상이라 이랄 때에 그물을 널리 봐야 돼. 그때 제가 무슨 때 그런 말 했느냐 하면은 이 고신에 있을 때에 ○○에 그때 가입할라 하고서 ○○를 그때 아주 정통으로 이래 가지고서 굉장히 말했습니다. ○○가 정통이라 한 그것은 지금 고려신학교에 있는 ○○○목사님이 그것을 많이 주장을 하고서 아주 그 사람 이래 가지고 뭐 정통편에 섰다고서 이래 가지고서 많이 주장하고 했는데 그걸 그 볼 때에 조금만 널리 보면은 사상적으로 조금 정치성이 띄어 가지고 있어서 좀 염려를 하고 우리는 주저를 했었습니다.
주저를 했는데 그때 그걸 반대하고서 그 사상을 반대한 그런 사람들은 한부선 목사님이 거기 대해서 반대를 했고 반대한 사람들은 그때 제가 알기에는 별로이 없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그때 한상동 목사님이 ○○에 갈라 하는 것을 모두 반대를 했고 거기서 박사 학위 얻어 가지고서 오시고 난 다음에 그말 듣고서 하도 기가 차서 내가, 오시던 길로 내가 바로 갔습니다. 그말 듣고 나서 바로 가 가지고서 한상동 목사님하고 나하고 둘이 있으면서 ‘목사님 우리가 지금 시작한 것이 영감과 진리 요것만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 외에 뭐 그게 뭐 학위가 무슨 필요 있습니까? 자꾸 올라갈라고 국제 무대에 나서서 어떻게 ○○의 이거 학위를 받아 가지고 왔습니까?’ 참 그때 오래 됐습니다. 옛날 얘기요.
이라니까 한상동 목사님이 그래 나한테 손을 잡으면서 ‘형님, 나도 그걸 안 받을라고 이랬는데 어째 그래 됐습니다. 행사만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어렵지 쉽겠습니까?' 그라고 서로 나뉘었습니다. 나뉘었는데 그 말 하는 그게 또 ‘그런 말 한다’ 하는 그 얘기를 하니까 그 밑에 사람들이 ‘그래요?’ 이렇게 하지 안하고서, 고거 때문에 내가 미움받은 거 중에 또 하나 더 또 미움받았습니다. ‘뭐 학위받은 게 뭐 나빠서 그럴까보냐?’고 이래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그 날은 그때 한상동 목사님하고 나하고 이렇게 됐었는데 그만 그다음에는 그만 이렇게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거 때문에도.
제가 그때 고독해 가지고 아무도 나를 안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없었었는데, 안 해 줄라 했는데 그 ○○노회가 그때 보류노회로 돼 가지고 있으면서 나와 하나가 좀 돼 가지고 나와서 ○○노회에 내가 그때에 가입을 해 가지고 장립을 받을라고 ○○노회에 가입을 신청했습니다.
○○노회 가입 신청할 때 그때 같이 간 사람 여기 있습니까? 간 사람들 더러 있습니까? ○○노회 내가 가입해 가지고 장립 받을라고 할 때에 그때 같이 간 교인들 여기 더러 있었는데. 없습니까, 아무도? 예? 간 사람 아무도 없어? 그때 많이 갔는데, 열 몇인가 갔는데? 이러니까 다 이거 그만 귀신이 들어서 망각성을 자꾸 이래 주니까 잊어버려. 옳은 것은, 외나 참 보배는 잊어버리요, 큰 거는.
그래 가 가지고서 가입 청원서를 했는데 나중에 그 회의 진행하는 데 보니까 ○○에 가입을 할라고 그때 ○○ 시찰회에서 ○○와 하나가 돼 가지고 있는데 그래 ○○에 가입을 할라고 ○○○목사님이 그때 그 회장인가 됐는데, 보류노회 노회장인가 됐는데 거게서도 ○○에 가입을 할라고서 그때 다 결의가 다 됩디다.
이래서, 거게서 내가 ‘ ○○에 가입하면 나는 이 ○○에 가입한 이 노회에는 내가 가입할 수가 없다.’ 그래 가지고서 빨리 그때 철회 청원서를 써 가지고서, 제가 빨리 나가서 철회 청원서를 써 가지고서 ‘○○에 가입하기 때문에 나는 이거 이 보류노회에는 가입할 수가 없다.’ 그래 가지고, 보류노회는 고신에 있는 노회인데 고신과 정치를 같이 하지 안하고 찬성하지 안하고 우리는 지금 보류하고 있겠다 해 가지고 그래 되어진 것이 보류노회입니다. 보류노회가 그때 고신 노회 가운데에서 자기네들 그때에 좀 사상이 맞지 않는다고 해 가지고서 그때 좀 깨끗하게 하겠다고 해 가지고서 한 것이 보류노회였습니다. 이런 건 역사 모르면 어느 구석에 삼킬란지 모릅니다.
그 철회 청원서를 내니까 그들은 좋다 말입니다. 이래 백 조사가 들어오면 이거 굉장히 이거 큰 문제가 일어나고 우리 맘대로 못 하고 지금 이 까다로울 건데 이거 잘됐다 싶어서, 그라니까 그거 그만 자기네들이 의논해 가지고서 ‘그러면 청원한 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래서, 내가 그때 요청을 했습니다.
‘보류노회에서 내가 가입 청원해서 자기네들이 가입 허락을 했으니까, 가입 허락했으니까 나도 가입은 되기는 됐다. 됐는데 자기네들이 여기 ○○ 보류노회에 노회 회의록에다가 백영희 조사가 여게 가입 청원을 해서 가입 청원에 허락이 됐으나 ○○에 이 노회가 가입할라고 하기 때문에 다시 가입한 것을 철회해 달라 하는 철회 청원서가 와서 이제 철회한다 그것을 노회의 회의록에 기록하면 내가 여기서 탈퇴를 하겠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거 내가, 이 사람들이 모두 망각성이, 산 사람이 증거가 있어야, 우리가 그때 거기 갔다가 내가, 여관에 나와 가지고, 몇이 나와 가지고서, 같이 여기 서부교회 간 사람 데리고 나와 가지고 그걸 써서, ○○○권사님 거기 안 갔어요? 왜 손 안 듭니까, 그라면? 주를 위해서, 십자가가 뭐이야? 주를 위해서 생명 버려? 주를 위해서, 진리가 주님이오. 주님하고 진리하고는 둘이 아닙니다. 주님이 진리요 진리가 주님입니다. 진리 운동 위해서 자기에게 꼭 명예가 거석해질 상바르면 자기 위신이 거석해질 상바르면 탁 꺾어 버려. 그까짓 게 무슨 순교? 어림도 없습니다! 순교는 그런 자를 받지 않습니다! 이게 백 목사 제 자랑 아니오. 이거 진리 자랑이오. 주님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거 아니면 다 모둘때기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서 그라니까 그 사람들이 뭐 좋아서 ‘예, 그래 하지요.’ `그러면 그래 기록한 것을 나에게, 기록한 것을 여게 노회 석상에서 회의록을 읽어 주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내 보내기를 좋아했는데 그라니까 뭐 뭐이든지 그때 요청하면 다 받는다 말이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뭐 청구하면 주듯이.
그래 그라니까 회의록에 기록해 가지고서 내용으로 ‘이래 백영희 조사가 우리 보류노회에 가입 청원을 해서 허락을 했다가 ○○에 가입을 하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서 이제 가입을 다시 탈퇴해서 철회 청원서를 냈기 때문에 우리가 이와같이 지금 탈퇴를 허락하고 철회해 줍니다.’ 그것을 똑똑히 명문으로 써라 해 가지고 명문 써 가지고 그걸 읽었습니다. 고거 여럿이 있는데 내 앞에서 고거, 그때 내가 읽어 보지는 안했어요. 보지는 안했으나 자기네들이 읽으라 하니까 그래 읽어서 그렇게 하고 했는데, ○○노회의 그 회의록에 지금 그것이 남아 있는지 그때도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이거 뭐 냅둘 게 뭐 있느냐?’ 찢어 없애 버렸는지 남아 있는지? 없어도 하나님 앞에는 그 회의록이 그대로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면 그 회의록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그 ○○○는 그는 정치 사상이라 해 가지고 그때 내편이 아무도 없었고 ○○○목사님 하나가 있었습니다. 왜 ○○○목사님 있었더냐 하면은 그때에 그 강원도, 맥킨타이어씨의 그 주장하는 거게 같이 가 가지고서 가서 그리 갈라 하고 말하면서 그리 가겠다고서 거기 가서 지금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나한테 연락이 왔읍디다. 그때는 전화가 없어서 편지로 연락이 와 더딥니다.
연락이 왔기 때문에 내가 속히 편지하기를 ‘거게는 이 정치 사상으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정치주의의 일이 있기 때문에 거기는 우리가 나가는 그 진리는 아니다.’ 이랬기 때문에 그분이 그 말을 듣고서 그 선입적 지식을 가지고서 가 가지고 참석을 해 보니까 과연 그렇다 해 가지고서 거기서 가입을 안 하고 나왔었어.
그러니까 보류노회 그때 ○○의 그 사상을 반대하는 것은 나와 ○○○목사 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 내편이 그래도 ○○○목사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나가 있었고 그래서 ○○○목사님도 그때 그것 때문에 나와 함께 거게서 탈퇴를 해 가지고서 그 뒤에, 나는 그 즉시 탈퇴했고 그다음에 ○○○목사님도 그 뒤에 그 싸우면서 그것을 반대하다가 자기가 안 되니까 할 수 없어 거기서 그만 탈퇴해 가지고서 나와서 그래 ○○노회에서 ○○○목사님 난리 나 가지고서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이게 역사가 없으면 그거 뭐인지? 역사는 조그만한 게 나가 가지고 자꾸 이 크게 번지는데 그 근본을 모르면 여러분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 하는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백 목사 제 자랑할라고, 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이 말 함으로 욕 얻어먹소.
지금 여게서도 이 말 하니까 ‘아이고 또 뭐 듣던 말 또 그말 한다’ 해 가지고서 여기 내가 퇴장하는 사람을 내가 다 누구 누구를 알고 있습니다. 귀에 맞지 않다 말이오. 예수 잘 믿으시오, 도적질 하지 마시오, 착한 사람 하십시오, 구제 하십시오, 자선 하십시오, 이런 말이나 제게 쏙쏙 들어가지 여게는 이 생명이 죽고 사는 이것이 있는 것인데 거게 대해서는 모르거든. 이러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 그물입니다, 큰 그물.
그거 그때 내가 말하기를, ‘큰 그물이라. 그물 만일 지금 태평양을 다 싼 그물이라고 하면은 그물 속에서도 그 고기가 평생 왔다 갔다 해도 그물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물에 든 것은 마지막에 그물을 들면은 다 올라간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눈을 널리 떠 가지고서, 하나 옳다 그르다는 그것만 말할 게 아니라, 교훈과 우리 교리에 넓은 범위를 보고서 그 범위 속에 그물 속에 안 들어가야 된다. 큰 그물 속에서는 평생 가도 그 고기가 그물 밖에를 그 그물 구경도 못 한다. 그러나 그물 속에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물 속에 잡혀서 그거는 생명이 다 죽어지고 만다.’ 하는 그것을 그때 비유로 제가 큰 그물을 두고서 많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 이걸 알아야 되지 그거 자, 냉장고 와 가지고 거기 유혹 받았지, 또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서 또 그렇게 유혹받지 그거 때문에 내가 상당히 기름을 뺐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몇 시간을 몇 번을 그걸 자꾸 말하니까, 말해서 이거 설득하고 이걸 또 조사를 해 가지고 다 이러고, 그런 말 하면 잘 들려지거든.
자, 여러분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어 가지고서 무덤 속에서 삼 년을 있다가, 삼 년을 있다가 그 사람이, 동리 사람들이 ‘그 사람은 무덤 속에 삼 년 그 들어 있었는데 하마 썩었을 터인데 거기서 나왔다.’ 삼 년 무덤 속에서 나왔다고 온 동네 백여 호 천 여호 되는 동네에서 ‘그 사람은 과연 이 동네 아무것이고 죽은 지 삼 년인데 무덤에서 삼 년 만에 나왔다’ 하고서 그 사람이 나와서 말하면 그 사람의 하는 말을, 하는 말을 백프로 옳다고 들을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말해도 성경에 안 된 말 하면 한 마디도 안 듣고 성경에 맞은 말 하면은 뭐 성경 보고 믿지 그 사람 말 믿을 건가? 그 사람을 그 사람 말한다고 그 사람 말을 듣고서 더 자기 믿음을 소생시키고 이렇게 그 사람을 인정하고서 할 그 조그마치라도 인정 안 할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못 들어, 여러분들. 인정 안 하지 못해요.
성경에 그게 없어. 이래 가지고서 죽은 자가 그렇게 살아난 게 없다 하니까 그것 때문에 뭐 ‘나사로도 살아났고 뭐 나인성 과부 아들도 살아났고 뭐 어짜고’ 들어 주 대는데, 그것은 살아났다가 도로 죽어 버렸어. 그것은 다 우리에게 계시 이용하기 위해서 했고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세 번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 택자의 부활, 불택자의 부활, 이거 생명과 심판의 부활, 이 셋 부활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 계시 이용으로 한 그 하나님의 큰 뜻을 깨달아야 되고 어데 그렇게 뭐 죽은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리지 안한 그 외에 살아난 게 어데 있습니까? 예수님이 살려내지 안한 데에 죽은 자 살아난 게 어데 있습니까? 그거 뭐 뭐꼬 바울이 하는 그런 거는 엘리사도 그래도 그런 것은 하나 계시 기관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것도 다 또 예수님의 권능으로 살아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 살아났지 달리는 살아나지 안했어.
그분들도 다, 구약 그렇기에, 요거 요긴한 것 중요한 거 하나 있는데 구약 성도들은 신약 성도의 중생과 다릅니다. 중생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 중생이 됐고 구약 성도는 중생이 아닙니다. 중생 아니고 다 예약적 중생, 예약적 중생을 하고서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는 받아 가지고서 성령의 생활은 하기는 했지마는 그때 영감은 밖에서 외재 영감이고 지금 우리에게 영감된 것은 안에 내주하는 내재 영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 중생이 다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다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무덤이 열린 거는 그로써 사망의 세력이 깨진 걸 가리켜 말하고, 사망의 세력이 깨져. 세력 깨졌다고 새로 살아난 건 아니라. 사망의 세력이 깨진 걸 말하고, 자던 성인들이 일어났으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행동했다 그말이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이 생명의 소망을 가졌고 사망은 깨어졌고 거게서 다 헤어나왔지마는 산 자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행동했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인들이 일으났으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무덤에서 나와 가지고서 많은 성인들이 예루살렘에 같이 들어갔다가” 이제 그다음까지는 기록 안 했어. 같이 들어갔는데 무덤으로 도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부활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은 세 번뿐이라. 요것도 변동이 없습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도 구약 영감과 신약 영감이 다르고 또 중생도 구약 중생과 신약 중생이 다르다는 거 이런 것을 좀 가져야 됩니다. ○목사님 어떻습니까? 중생이 구약 중생과 신약 중생이 다르고 영감도 구약 영감과 신약 영감이 다르다는 것이 그 시대 영감이 내 말이 맞습니까? 그래 생각해. 우리 저 보배, 그래 내가 교리학 교회학을 하라 했어요. 이게 맞습니다. 뭐 세계가 반대해도 맞아요.
이러니까 이거 얼마나 우리가 지금 이거 조심해서 믿어야 될 것인지? 이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라고 하고 있는데 그 교리 신조가 잘못되면 제까짓 거 열심있는 거 소용 어데 있어? 고래가, 고래 그놈이 힘이 나 가지고 막 공중으로 뛰고 힘이 있습니다. 힘 있는 그게 뭐 있소? 그물 속에 들어갔나 안 들어갔나 하는 게 문제요. 그물 속에 들어갔으면 암만 힘 있어도 나중에 그물 홀치면 죽는다 그말이오. 혼자 열심 암만 있어도 소용 없소. 혼자 열심과 선과 봉사와 뭐 그뭐 어떻게 한다고 해도 마귀 그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소용 없어, 교리와 신조가 그 속에 들어 있으면 마지막에는 홀치면 다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종교 통일 이제 종교 연합 이게 힘을 쓰고 있고 거게 대해서 그래도 ○○○박사가 한번 반대했다가 혼났습니다. 이게 지금 물질 세력이라.
이러니까 이거 오늘 기독교가 지금 뭐 연합하자, 기독교 연합이라, 기독교 뭐 연합이라, 단일이라 이래 가지고, 교리와 신조가 달라 가지고 된 것이 그 합한 것은 좋아지는 게 아니오.
이렇게 화합이 좋지마는, 화합이 좋지마는 화합보다 더 좋은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로 화합이지 진리 버리고 화합되는 그거는 다 사망입니다. 알겠습니까?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이 많이 기록됐습니다. 율법의 행위라 하는 것은 겉만 보면 육체의 이스라엘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아니하고 과거 예수님의 그 대속을 예약하고 예표한 구약의 모든 속죄 구원의 그 제도와 그 의식을 행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으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아무도 없고 다만 거게서도 예약된 예수님의 대속을 바라봄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용납함을 받는, 의로 인정함을 받는 것이고 율법을 가지고서 저희들이 의롭게 될라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 헛되다 하는 것을 많이 말해도 그들은, 지금도 그 유대인 가운데서는 고집하고, 구약 의식과 제도 그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을 소망하는 하나의 예약 예표의 그림자와 같고 예수님의 대속은 실상인 것인데 늘 그 어두움을 벗지 못하고 구약 의식 제도에 매여 가지고서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그렇게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절기를 지키고, 이런 짐승의 피를 가지고 이래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지 않는 그 행위를 사도 바울이 이것을 회개시킬라고 많이 애를 쓰고 그거 때문에 박해를 당했었습니다.
이래서, 만일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헛되다. 또 너희들이 구약의 의식 제도, 또 예약 제도, 그 예표 제도, 하나의 모형적이요 실상을 소망하는 그림자와 같은 그것을 버리고 실상을 믿지 안하면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돼 버린다 이렇게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 말을 했습니다.
이래서, 잘못하면 구약 유대교를 믿는 그런 사람들에게 관해서만 율법 아래 있다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이렇게 알고 오늘 신약 교회에 성도들이 율법 아래 있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은 우리에게는 다 무익함이 되고 맙니다.
신약 교회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인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대로에 있는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비유컨대 새로 지음을 받은, 새 창조함을 받은 자요 그거는 완전히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완전히 죽어 버렸고, 완전히 죽었고, 죽어서 장사지낸 것같이 완전히 죽었고 이제 살아 남아 있는 이것은 예수님의 것이 살아 남아 있는, 예수님의 것이 살아 남아 있기 때문에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나의 이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됐고, 나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됐고, 또 내 정과 욕과 육체 그런 것은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거기에 나는 죽은 셈이 되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대속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이 돼서, 과거에는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주장해서 내 주장도 있었고, 감정도 있었고, 사상도 있었고, 또 소욕도 있었고, 무슨 취미 그 마음의 작용 또 몸의 작용 그런 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해서 곧 내것이 있었다, 내 마음이요 내 몸으로 이렇게 작용하고 활동했지마는 이제는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예수님의 것이 돼서 내가 사는 데에는 내 마음의 움직임이나 내 몸의 움직임의 그 움직임은 순전히 주님이 내 마음을 주권하고 당신의 수족으로 이래 쓰시는 것이지 내 주장이나 내 뭐 주관이나 그런 것으로서의 움직이는 거는 하나도 없고 그거는 십자가 못박아 죽여 버렸다 그렇게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갈라디아서를 읽어 보면 ‘은혜 아래 있다, 율법 아래 있다.’ 하는 그것을 많이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 제가 저대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율법 아래 있다 했고, 제가 제대로 사는 사람은 제가 다시 말하면 제가 죄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고, 제가 또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고, 또 제가 마귀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고, 또 제가 하나님의 그 무한한 율법을 해결할려고 하고,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해결할려고 하는 사람이요, 또 그 사람은 자기가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니 자기를 자기가 담당하고 책임지고 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니 그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이 약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이루지 못하는 그것을 이제 신인양성일위이신,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예수님이 그 일을 내 대신 다 이루셨다. 내 대신 다 이루셨는데 그 이루신 것은 인성뿐이라면 그 인성이 나 하나밖에는 담당 못 하지마는 무한하신 신성이 일위가 됐기 때문에 그는 유한한 인간 숫자를 다 담당하고도 무한히 남음이 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사람은 이 일곱 가지에 대해서 내가 행하는 게 아니고 일곱 가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내 대신 행하신 그것을 내것 만듦으로써 나는 이 일곱 가지 죄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과 이 원수됨에 대해서, 또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대로의 영원히 사는 이 일에 대해서 자기가 행할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평생 계속해서 행해야 되고, 행하는데 율법 하나라도 범하면 죽고 온 율법을 하나도 범하지 안하고 계속 행하면 그 행하는 것과 앞으로 행하는 것과 또 과거에 법을 다 자기가 완전히 행한 사람이라야 되어지는데 이미 범죄한 것을 인해서도 안 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자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산다 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 속에 가둬서 아무도 이 율법을 이긴 자가 없고 이 율법에게 정죄를 받아서 이 율법 정죄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이 정죄에 가둔 일만 했지 그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왜 그러냐? 율법은 무한한 율법인데 이 사람의 이 심신을 가진 것은영은 말하지 안합니다. 영은 지금 구속 받았기 때문에.심신을 가진 것은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행할 자가 하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내것 삼은, 공짜배기로 내것 삼는 요것을, 자기 것 삼은 것을, 자기 것이 되어 있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가 되고 자기는 예수님의 대속을 나 대신 대행, 대화친, 또 대형, 형을 대신 받고 이래서 대신 했기 때문에 나만 이것만 예수님에게 드려 버리고 예수님의 그 대속을 내것 삼으면 이거는 의가 된다.
그러면 내것은 이것만 믿어서 내것 삼고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나는 이거 예수님의 것을 드려서 예수님의 것 됐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걸 가지고서 이래 살든지 저래 살든지 뭐 당신이 어짜든지 이렇게 해서, 이게 만일 예수님에게 드려 가지고서 주의 것으로 사는데 이게 살다가 만일 죄를 범하면 예수님의 것에 맡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이냐?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은 아니고 내가 그때 그것을 다시 내것으로 도로 찾은 그것이니까 그걸 다시 예수님에게 드려서 드리면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행하셨기 때문에, 그걸 나를 줘서 나도 가지고 있고 예수님도 행하셨기 때문에, 행하셨으니 마치 비유컨대 옥이 진흙에 들어가면 진흙이 묻었지마는 옥이 진흙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거 묻었으면 그만 그거 썩 닦아버리면 깨끗해진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으로 내가 믿고 내 남은 모든 것은 산 제사로 드려서 예수님의 지체요 예수님의 몸으로 내가 드렸을 때에 이것은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깨끗해졌고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내가 주님에게 드려 주님의 것 됐기 때문에 이것도 깨끗하다.
나도 깨끗하고 이것도 깨끗하고 깨끗했는데 이것이 악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다가 죄를 범하는 더러운 일이 있다. 그것은 더러운 이 죄를 범했으나, 죄를 범했으나 그 죄가 나도 더럽히지 못한다. 왜?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 됐기 때문에 나를 더럽히지 못한다. 또 이것은 깨끗하신 온전한 행위를 이루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또 이것도 더럽히지 못한다. 요거 잘 알아야 됩니다. 나도 더럽히지 못하고 주님도 더럽히지 못한다.
그러면 더럽히지 못하는데 죄 지은 것은 뭐이냐, 그거는? 그것은 내가 지은 죄가 아니고 주님이 지은 죄도 아니고 내 속에 죄 그놈이 들어서 그와 같이 행동한 것이지 죄 그놈이 그랬기 때문에 죄 그놈에게 책임 있지 믿는 자에게는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또 주님의 것이 됐으면 주님의 것된 거는 가까이 오지 못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죄 그놈의 작용이라. 그러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행한 것이라” 하는 것을 로마서 7장에 말씀하신 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리고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깨끗이 옳게 살아 가지고서 구원을 이루어 갈라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제가 하나님을 향하여서 의롭게 깨끗하게 살라고 하는,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고 자기 행함을 가지고 무엇을 할라 하는, 자기가 이 모든 원죄 본죄의 과거가 있고 또 현재와 미래가 있는데 여게 대한 하나님의 그 모든 무한한 법이 다 입법되어 가지고 있는데 이 입법을 과거에 자기의 그 모든 잘못되어 있는 것이나 또 그 현재에 자기가 모든 당해 가지고서 할 일이나 앞으로 할 일 그 일을 자기가 담당할라고 하는 그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걸 우리가 잘 구별해 가지고서, 율법 아래 있으면은 그 사람이 아주 천하에 제일 의인으로 잘 살았다 할지라도 나중에 가서 보면은 그는 완전히 용납할 수 없는, 건설구원기본구원은 영은 순전히 객관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중생을 시켰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의 주권 능력으로 중생을 시켜서 사람의 요소는 하나도 관계하지 안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 중생 이거는 완전히 됐지마는 지금 심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는 심신의 이 성화구원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고, 대부분이 그 말씀이고 근본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돼서 구원 얻는다 하는 그 말씀 기록한 그 성구는 몇 성구 안 됩니다.
이런데,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이것은 제가 담당한다는 것이니 유대인들이 다 그와같이 돼 가지고 있고, 그와같이 하고 있고 오늘도 예수 믿는 사람이 다 그와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유대인들에게 대해서, 대개 학자들이 말하기를 ‘유대인들에게 대해 했기 때문에 이거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 이거는 신약에는 상관없는 거라’ 이렇게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학자들이 그런 이들이 많소. 왜? 번연히 성경에 유대인들을 두고 자꾸 말했거든.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나 오늘 신약 교회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전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자기로서는 아예 이거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사활의 대속하신 것을 내것 삼고, 내것 삼고 나는 주님의 것 삼았고 주님의 것 됐고, 내것 삼았고 주님의 것 됐고, 이제 그라면 남은 행위는 어쩌느냐? 남은 행위는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된 거는 변동 없고 내것을 주님에게 드려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붙들고 살아야 되는데 망령되게 살지 안하고 혹 주님의 것을 제것으로 도로 찾는 일이 있다.
도로 찾는 그것은 나는 찾기 싫기 때문에 나는 찾지 안할라 해서 나는 찾지 않는데 찾은 그런 결과 내는 것은 내가 한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죄 그놈들이 한 것이다. 그래서, 거게서 잘 구별을 가지고 많이 논란을 했습니다.
로마서 7장 20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거 하면” 이것이 나는 주님의 것 된 나를 말합니다. “하면”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가 아니요, 이거, 이거는 주님의 대속을 내것 삼았기 때문에 주님의 것 되어 있는 나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것 되어 있는 나를. 이렇기 때문에 여기 내라는 말을 이걸 잘 구별하지 못하면 아주 그만 혼돈돼 버리고 맙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거는 주님의 것 된 나를 말합니다.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주님의 것 되어 있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라는 속에, 내라는 전체 속에 아직도 악령과 죄 그놈이 지금 남아 있는데 나와 적이 돼 가지고 있고 나와는 상관없는 그놈이 내 속에 이 패잔병이 있어 가지고 나를 자꾸 괴롭히고 있다. “죄니라”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님의 것이 됐으니 주님의 것이 사는,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것이 사는 요것이 내 생활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 사는 요 일을 할라고 하는 나에게,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이 주님으로 살라고 이렇게 이것을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거는 나와 아주 원수인, 내가 아닌 딴것이 있다.
이래서, 모두 다 악이나 죄나 마귀나 예수님의 대속이나 또 예수님의 것이나 이 전체가 자기라는 뭉텅이, 자기라는 뭉텅이 속에 들어 있다. 자기라는 뭉텅이 속에 들어 있으나 그 뭉텅이 속에서 이렇게 구별을 해 가지고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별을 해 가지고서.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그것도 자기 안에 있는 내나 “내 속 사람으로는” 그거는 뭐냐 하면은 주의 것 되고 주님의 것은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으로서 이제 새로 지음받은 이 새것 된 사람은 말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지체 속에서” 이거는 아직까지 습성이, 악습이 싹 빠져 나가지 안했고 악습 이놈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악습이 남아 있으니까 남아 있는 것만치 마귀는 제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악습 속에서 이놈이 작용을 하고 자꾸 이렇게 하고 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그러면 “마음의 법과 싸워” 나와 싸워 그말이오. 내 마음과 싸워, 나와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나는 그걸 원치 안하는데 내 속에 있는 습성 그놈이 들어서 퍼뜩퍼뜩 자꾸 이래 가지고서 실수하게 돼, 습관 말이요, 버르징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를 이기는 데에는 제일 악령, 악성, 악습 이 세 가지가 옛사람인데 그 중에 우리에게 제일 덤벼드는 것은 악습입니다. 악습 이놈이 제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 악습에게 유혹받는 일이 제일 많고 이것이 우리를 많이 넘어뜨립니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속에 있으니까 이제 뭐이냐?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됐고 또 나는 예수님의 것 됐고 이제 사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야 되는데 예수님이, 예수님의 지체로 이 지체는 당신이 써야 되고 마음도 몸도 당신이 써야 되는데, 당신이 써야 되는데 당신이 쓰게 하지 안하고서 도로 제가 도로 찾습니다. 도로 자꾸 찾지 안할라 하는데 찾아졌다, 도로 내가 주장하지 안할라 했는데 내가 주장하게 됐다. 주장하게 된 것은 이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죄가 그래 했다.
곤고한 거는 왜 곤고하냐? 이것을 내가 입었고 벗었고, 예수님의 대속은 내가 입었고, 또 모든 악령 악성 악습의 것 옛사람은 벗었고 주님의 것은 됐고 하는 이것이 고정이 돼야 될 터인데 이것이 자꾸 이래 고정되지 안하고 자꾸 흔들리기 때문에 곤고하다 하는 걸 말해.
곤고하나마 “그것은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행했다” 이래서 그 속을 구별해 가지고서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은 자기가 속에서 자원하는 고의적인, 자기가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가 원치 안하는데 그런 일들이 되어진 그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입은 것도 변동을 안 시키고, 변동 안 시킬라고 애를 쓰고, 그 변동 안 시키는 것이 이것이 자기 그 마음으로 변동 안 시키는 것입니까 이런 무슨 고정체, 무슨 고체 모양으로 그렇게 그런 것으로써 변동하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자기 마음으로 고정을 시키는 것입니까 무슨 형체로 물체로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뭘로 고정시키는 것입니까? 뭘로 고정을 시키지요? 마음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에 고정시킨 것이나 안 한 것이나, 시켜도 금방 보기에 또 이래 돼 버리고 자꾸 변동이 잘 된다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정을 시켰는데, 고정을 시켰는데 이 고정시킨 것이 변동이 없어야 될 터인데 고정시켜 놓은 것을 무엇이 퍼뜩 와 가지고서 이것을 다시 제것으로 이용을 해 버렸으니까 그걸 말하기를 “나는 속속들이 내가 그걸 원치도 안했고 또 나는 하기를 싫어했고 했는데 그것이 악습 속에 들어 있는 게 들어 가지고서 그놈이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내 지체 속에 내가 그 버르징이 들어 있는 것을 봤다. 그러면 그놈이 했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이래서, 요 로마서 7장에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기 속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 예수님의 대속은 자기 것 됐고 대속을 입었기 때문에 자기의 남은 그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내 대신 행했기 때문에 이거는 내 대신 행한 그건 내것 만들었으니까 내 남은 것은 당신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 된 것, 이러니까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망, 마귀, 하나님과 불목,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이거는 완전히 벗어버렸다 말이오.
이거는 입었고 벗었고, 내것 됐고 주님의 것 됐고, 이러나 이것이 뭘로 되는 것이냐? 이거 무슨 못을 박아 되는 것같이 뭐 나무로 각목으로 탕탕 짜서 뚜드려 박은 것같이 이게 아니고 말이지, 이거 믿음으로 되는 거라. 믿음으로 되니까 믿으면 돼 버렸고 또 이 의심해 버리면 그만 확 깨져서 아무것도 없고, 믿으면 됐는데 믿으면 된 그것도 잡을라 해야 잡을 것도 없고 형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거는 참 무형의 존재인데, 무형의 존재요 또 믿음을 헐어서 부숴버린 것도 또 그거 무형의 존재라 말이오. 이러나 믿으면 전지 전능의, 그 피조물이 하나님 되는 것이고, 말하자면. 피조물이 하나님이 아닌데 피조물이면서 피조물이 하나님 되는 것이고, 믿을 때에 하나님 되고 믿음을 버릴 때에 이는 완전히 지옥물이 되어진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속하신 하나님의 공법에서는 다 돼 가지고 있지마는 실제로 우리가 행동해서 예수님의 것이 살아야 되겠고 또 나는 이걸 벗지 안해야 되겠고 나는 어데서든지 일곱 면으로 완전자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에게도 대해야 되겠고, 만물에게도 대해야 되겠고, 마귀와 죄에도 대해야 되겠고 이라면 자유하는 자가 되어지는 것인데, 이게 마음의 작용에, 마음의 운동에 믿음으로 되기 때문에 이걸 이게 믿음으로 마음의 작용에 믿음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이 무슨 고체인 물질로 되는 것보다 더 여물게 견고한 것이지마는 이게 또 무를라 하면 한정 없이 무르고 여물라면은 한정 없이 여물고 이것이 강할라면 한정 없이 강철보다도 강하고 이거 또 흐려서 무를라면 이거는 물보다도 더 무르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요동치 안할라고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 “이 사망의 몸에서” 이러니까 이 지체 속에 있다는 말과 사망의 몸이라 하는 이 몸과 꼭 같은 것입니다. 몸에는 이거 우리에게 습성이 다 꽉 들어 있는데 습성 이놈이 지금 그라지 이 자기 중심으로서는 이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기를 싫어하고 이런데 이 지체 속에 있는 거 이 몸 속에 있는 거 이 습성 이놈이 들어 가지고 자꾸 그렇게 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자꾸 말로 자꾸 하고 마음으로 자꾸 하고, 마음으로 예수님의 그 일곱 가지 대속을 자꾸 내가 말을 하고 또 생각을 하고 내가 또 인정을 하고 또 믿고 또 자기가 그 행동으로서도 자꾸, 예수님의 이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이제 그 모든 옛사람 첫째 아담의 것은 완전히 벗어버린 거, 또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이 사는 거 이것이 아주 허무한 거 같습니다. 이 말뿐이니까 허무한 거 안 같습니까? 말뿐이니까 허무한 것 같으나 이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보이지 안하기 때문에 그까짓 거 허무한 것 같고 사람이 이렇게 뭐 행동해 놓은 것은 뚝 나타났기 때문에 행동한 건 여문 거 같고 큰 거 같고 강한 거 같고 그러나 마음으로 한 것은 그것은 약한 거 같고 허무한 거 같지마는 실은 그 육체로 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하는 게 더 강하다.
또 마음으로 행한 그거보다도 영으로 행한 것은 더 뭐 흐미해서 그거는 있다 해도 그거 거짓말같이 아무 보이지 안하지마는 영으로 행한 것이 더 강하다.
또 영으로 행한 것보다도 하나님으로 행한 것은 그뭐 누가 다 부인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는 거 같지마는 그게 더 강해서 모든 존재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있다.
이 사람들이 심령이 어둡기 때문에 이 신령한 것의 실력과 오묘의 이치를 모르니까 이래서 할 수 없어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강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왔고 보이는 것은 차차 없어질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자꾸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자꾸 이 구원 이룰라 하면 육체로 돌아갑니다. 자꾸 안으로 기어 들어가지 안하고 자꾸 밖으로 나가요. 이렇게 성령으로 거석한 것을 자기 마음으로 나가 버리고, 자기 마음이 육덩이로 나가 버리고, 육덩이로 나간 것이 끄트머리 무슨 이 사물과 접촉을 해 가지고 사물로 되어진 그거라야 견고한 줄 알고 그게,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과학을 위주하는 것은 그거는 이 껍데기로 나가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거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이고 그거는 심령이 어두워서 그런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자가 절대자이신 이 자존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소행으로 이 모든 과학의 오묘가 나왔다 하는 것을 발견해서 이 보이는 것을 넘어 자존자를 발견한 그 과학자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믿습니다.
왜 잘 믿느냐? 그거는 이 모든 보이지 않는 자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들이 나타난 그 오묘의 그 범위가 굉장한데 그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타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이 나타난 이걸 가지고서 좀 더 세밀히 알 수 있지마는 과학을 모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그분의 작용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그것을 많이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많이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외나 과학을 알수록 예수님을 참 잘 믿는 사람이 되어지고 보이는 이것을 중하게 여기다 보면은 보이지 않는 그분으로 말미암았는데 그분은 무시하고 자꾸 보이는 걸 위주한다 말이오.
그거, 미국에서 있는 모든 과학 노벨상 받은 그 모든 사람들이 이 천지 창조를 부인하는, 성경 창조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것은 기독교들이, 예수 교인들 그 모든 하나님 믿는 유대교나 그런 사람들이 종교적 그 교리에 불과치 못하지 그걸 그 실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과학자 저거는 보여야 되니까. 뭐뭐 몇억억만 배의 돋보기라도 봐야 되지 보이지 않는 건 다 부인하다 보니까 그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이 된다 말이오.
그거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분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이 나왔다는 그 과학자는 그 과학자가 돼 갈수록 하나님의 오묘의 하나님의 그 무한 능하심을 자기가 알 수있지마는 그분을 부인한 과학자들은 그거는 다 사망자들입니다. 사망자들이요 그거 보면 불쌍하고 가련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이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라고 예수를 먼저 말했습니다, 여게는.
그리스도를 먼저 말한 데도 있고 예수를 먼저 말한 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했는데 여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먼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제사장, 선지자, 왕을 이게 영원한 우리 천직인데, 영원직인데,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가진 자가 이제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중보자가 되는 이 제사장, 또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피조물을 충만케 하는 복을 주는 이 선지자, 또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의 단일 통치로 이 모든 것을 통일 통치, 단일 통치라 말한 것은 한 분의 통치라 말이요 통일 통치라 말은 모든 존재들이 다 그 단일 통치에 복종된 통치를 가리켜서 통일 통치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께 감사한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써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해결된다. 이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이겼다,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자본을 삼아 가지고서 이 자본을 자기 것 삼은 요 자는 자체가 완전자 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 천상 천하 영계와 물질계에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 그 사이에 중보자가 돼 가지고서 영원히 역사한다.
중보자라 하는 것은 그것은 한 편만을 위하는 것이○○○! 못 알아들어? 졸아? 이거 못 들으면 헛일이다. 이거 못 들으면 예수 헛 믿는다고. 이게 지금, 내가 보니까 처음부터 이거 잘 못 알아듣는데 이거 못 들으면 예수 암만 믿어도 헛일입니다. 생명 내도 아무 헛일입니다. 여러분들, 그거 알아야 돼요.
그뭐 자기가 어떤 지식을 통달하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거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위해서 순교하는데, 교회를 위해서 순교를 하는데 또 그 뭣을 이방에서 하는 거 그거 냅두고, 이제 그거는 예수 믿는 사람 말해 놨소. 자기 몸을 주어서 불사르는 거 그거 순교 아닙니까? 그보다 더 순교자가 어데 있소? 순교해도 소용 없다 그거 무슨 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예수님의 대속, 자기가 바꿔지지 안했으면 아무 소용 없다,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다 하는 그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요.
이러기 때문에 제가 여기 첫시간에도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전하는 것은 말에나 지혜로움에 있지 안하고서 그 믿음이 성령과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를 원해서 전한다 하는 것은 그거는 자기가 전하는 게 아니요. 완전히 바꾸어져 가지고서, 바꾸어져 가지고서 주님이 그와같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한 도를 뭘 전합니까? 이러기 때문에 지금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서 요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완전히 바꾸어서 가진 요것이 아니되고서 얼마든지 성자 노릇 하고 성녀 노릇 할 수 있고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고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지마는 나중에 가 보면은 그것은 다 멸망이라.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요 은혜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지 않으면은 생명이라 하는 건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요거 모르면 안 돼요. 이걸 모르기 때문에 지금 옛사람이 들어서 막 강단을 뚜드리고 야단을 지기고 지금, ‘너 망하는 짓 말 잘한다. 네 자살하는 행위 많이 잘하고 다른 사람 죽이는 살인 행위, 자살 행위와 살인 행위 많이 하고 있다.’ 그거 가 들어 보면은 자살 행위와 살인 행위를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생명이 없는 그 역사를 하고 있는 거, 고린도전서 13장에 말하지 안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라” 생명 없다 그말이요, 여게는. 생명이 없다 말입니다. 생명은 고기덩어리 생명 이거는 생명이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여기 생명이라 하는 것은 영원히 어떤 존재에게도 멸해지지 않는 실력을 가리켜서 여기 생명이라 말합니다. 어떤 존재에게도 멸해지지 않는 실력, 이거 능력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말하는 건데,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이것도, 이거 가지고 자랑하는데 이것도 아무 소용 없다 말이오. 천하에 대신학자, 천하에 제일 대신학자, 또 천하에 그 신학으로서 제일 일등이고 지식으로 일등이고, 뭐 아무리 일등해 봤자 천사만 하겠습니까? “예언하는 능이 있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는 능이 있다 말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말이오.
예언하는 능이라 말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서 전한다 그말이오.
“예언하는 능이 있고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이게 이거 뭐 굉장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 그러면 믿는 지식 안 믿는 지식, 신구약 성경 다 외우고 뭐 대주석가 대신학자, 대주석가 대신학자 대예언가 뭐 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미래사도 모든 거 다 바로 말하고 이거 뭐 여게 하나도 빠진 게 없습니다.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러면 이 믿음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고 뜻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고 모든 거 다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생활 하고, 이 말을 가리켜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의 최고입니다. 믿음의 최고가 있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여기 또 사랑을 말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이 사랑이 뭐입니까? 요거 모르면 헛일이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이 사랑을 이라니까 이 사람들이 껍데기로 얼마나 그거 껍데기 말합니까? 이래 가지고 정욕 사랑, 동류 사랑, 또 혈통 사랑 저거 친구끼리 ‘오차 한잔 먹으시오. 오늘 주일이지마는 모처럼 왔는데 이라십시오.’ 자꾸 이래 뭐 친절하게 하고 손잡고 떨고 사랑하고 뭐 이렇게 화목하고 부드럽게 관용하게 유하게 관대하게 뭐 이렇게 하는 거 그게 다 사랑인 줄 아는데 그게 전부 죽이는 사랑이라 말이오. 요 사랑과 사랑을 구별한다는 이 말을 예사로 압니다. 사랑이 들어서 지금 교회를 다 죽이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봐라, 사랑이 제일이라 안 했나?’ 이 사랑을 바꿔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안하고 인간 사랑을 말하다 보니까 이거는 사람을 왕창 죽여 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요걸 구별하지 못하면 헛일이오.
왜 강단에 지금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가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의 대속은 자기 것 된 이걸 지금 그 바꿔서 이게 바꿔 돼 가지고 할라고서 바울은 죽자껏 애를 썼는데 이거 없이 뭐 어떤 죄를 짓고라도 이렇게 뭐뭐 그 말씀만 증거하면 되고 그 시간에 사람들만 설복을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거는 참 얼마나 하룻강아지 범을 모르고 말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이거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보다 더한 거라, 이거는.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일이라. 이제 가 보면, 하늘나라 가면 별별 일이 많이 있을 거라. 이래 가지고 하다가 나중에 멸망되는 거, 멸망받을 게 얼마나 많아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이거 얼마나 잘 믿는 사람이요?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면 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이렇게 이 모든 것보다 나은 사랑이 뭐이겠습니까? 나은 사랑이 인간들이 동류 사랑, 정욕 사랑, 혈육 사랑 이런 것이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그게 아니고 이것은 “사랑은 여게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독생자를 보내 가지고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됐다” 하는 그건 예수님의 대속의 한 토막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활의 대속으로 완전히 이 일곱 가지 난제를 해결지워서 예수님의 대속을 받고 대속을 받은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주님이 영원히 내 대신 영생하는 그 영생은 내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 돼 가지고 하는 대로 하고 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벌써 시간 많이 갔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뭐이냐? 완전히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되고 대속을 받은 나는 주님의 것 되고 이제 주님은 사활의 대속을 가지고 내게 장가왔고 나는 이 사활로 대속한 그것이, 이 더러운 그것이 주님에게 시집갔고 주님과 나와 둘이 합해 가지고서 이제 예수의 것으로 사는,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이제 주님의 것이 되어서 나는 껍데기고 주님은 알맹이로서 주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나는 그 성전이 됐고 그 지체가 돼 가지고 사는 이것이 믿음으로, 이거 무슨 뭐 그 어떤 이런 공작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이거는 믿음으로 되는 거라. 요 사실을 믿으면 돼요. 믿으면 되는데 요 믿음이 없으면은 아무것도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거 그런데, 사활의 믿음을 믿어야 되는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이거 마귀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향하여 믿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믿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지마는 아무리 나타나고 이란다 할지라도 자기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과 이 서로 바꾸는 거, 교환하는 거 요게 안 되면 그거는 사망뿐이지 생명의 역사는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목회하는 것도 꼭 요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되고 나는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주님의 그 지체가 역사하는 거게서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그리 안 하면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교사 한부선 목사님이 그 어른이 참 믿음이 좋은 어른입니다.
일본에 하천풍언씨가 그때 세계 성자라고 유명했고 아주 뭐 굉장했었습니다. 그 사람의 내가 저서를 얼마를 내가 좀 읽어 봤는데 세계에서 성자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 보고 보니까 항상 그 저서 가운데에 예수님의 이 대속이 기록이 안 돼 있어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고조하지 안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 이래 나는 의문을 쥐었어.
그 사람의 뭐 ‘사선을 넘어서’라든지 `태양을 쏜다'든지 하는 그런 뭐 책은 그 아주 좋은 책인데도, 그 사람 책은 참 읽기 시작하면 그만 잠이 안 와요. 언제든지 읽기 시작하면 그만 그 책이 끝 나 버립니다. 뭐 자꾸 연속해 어떻게 연속미가 있는지 읽기 시작하면 그만 재미가 붙어서 끝을 봐야 말지 끝을 보기 전에는 안 놓는다 말이오. 이렇게 했지마는 어짠지 거기 예수님의 대속이 없어요. 대속을 이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성자로.
대속이 없는데, 그래 그 의문을 가졌는데 그 의문을 가져서 언제 내가 한부선 목사님에게 ‘하천풍언씨를 압니까?’ 이라니까 녜 안다고 이래서 `하천풍언씨가 저서한 걸 이래 봤는데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이라니까 ‘그분은 그 모두 다 성자라고 이라는데 그분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요 정치주의자지 그 사람은 신자는 아닙니다’ ‘뭘 보고 신자 아니라 합니까? 그 사람 성자고 예수 잘 믿는다 하는데.’ 만주 가서 설교할 때에 보니까 ‘예수님의 피는 지금 살아 있다. 예수님의 피는 살아 있는데 이 살아 있는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들어와 가지고서 역사한다.’ 예수님의 피는 죽어서 우리를 대속했는데 예수님의 피의 대속에 대해서 확실히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을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때 그말 하고 나서 나도 해결을 받았습니다.
미터도 몇만 미터도 높은 그런 것은 공간적으로 높은 것인데 그런 공간적인 그런 높음을 말하지 아니하고 여게는 가치적으로 권세적으로 제일 높은 곳, 또 영광적으로 성결적으로 도덕적으로 사랑적으로 봉사적으로 무슨 화평적으로 그런 종류들의 가치와 권위의 높은 곳을, 높은 것을 가리켜서 지극히 높은 곳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봉사를 하나 예를 든다고 하면은 그 봉사가 아주 봉사 없는 그곳에서는 작은 봉사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봉사를 높이 존대하고 귀하게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봉사의 역사들이 많고 높은 봉사들이 있는 그런 위치에서는 그런 뭐 사소한 봉사 그런 것은 그렇게 가치로 여겨서 모든 사람들이 놀랠 만한 그런 존귀한 대우를 해 주지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격의 높은 것을 가리켜서 지극히 높은 곳이라 이랬습니다. “높은 곳이라” 높은 그 모든 위치를 말합니다.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는 것은 이 하나님에게 모든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영물들이 다 ‘하나님 참’ 놀랠 만한 `이거 어데 이럴 수가 어데 있나? 하나님이 어데 이렇게, 하나님이지마는 이렇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모든 천군 천사도 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놀래고 모두 다 영광과 존귀를 돌리고, 또 하늘의 온갖 성결도 많이 있고 봉사도 많고 희생도 많고 그런 무슨 참 가치 있는 사랑의 역사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 모든 것들도 다 ‘어데 이렇츰 이럴 수가 어데 있느냐?’ 하는, 영광을 제일 높이 돌리고 제일 큰 이 가치의, 사랑의, 봉사의, 희생의, 성결의, 도덕의 이 역사가 되는, 제일 영계에서도, 모든 선한 세계에서도, 사랑의 세계에서도, 또 그 도덕 세계에서도, 화평 세계에서도, 희생의 세계에서도 제일 높이 평가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하는 그런 것을 여게 표시한 것입니다.
‘어데 하나님이 이럴 수 있겠느냐?’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거게 넓게 말하면 수가 많지마는 우리가 알고 기억하기 쉽게 세 가지 하신 일을 모든 영계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영계에 있는 이런 저런 다 굵닥굵닥한 그런 사랑의 역사, 봉사의 역사, 희생의 역사, 관대의 역사, 또 성결의 역사의 그런 단체들이 많지마는 그 모든 것보다 뛰어난 이 역사가 하늘에서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린다 이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요, 또 창조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시요, 주권 모든 개별 섭리하시는 제일 높으시고, 제일 존귀하고, 제일 영광과 존귀와 부요와 권세가 많으신 분입니다. 제일 많으시고 제일 높으신 분이십니다.
이런데 이분이 당신을 대항하고 배척하고 스스로 제 행한 행동으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 가운데에 빠져 있는 이 멸망하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을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보고 놀래서 제일 높이 평가해서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자체가 어떻게 잘 되어 있는 자체의 광채가 아니고, 자체의 그 광채, 광이 아니고, 자체의 광이 아니고 자체가 그 상대방을 위한 그 역사의 광채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 그렇게 합니다.
지극히 완전하시고 존귀하시고 부요하시고 주권의 그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멸망 가운데 있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심으로 멸망하는 죄인들을 구원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느라고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당신이 가난해지시고, 또 낮아지시고, 천해지시고, 또 아무런, 그 전능 주권자가 권세가 하나도 없는 완전히 실나끈 하나만큼의 권세도 가지지 못하도록 다 내놔서 권세와 지위에 아주 제일 거지가 되었고, 지위와 권세에 제일 거지 됐고, 또 영광과 존귀에 제일 영광 없고 존귀 없는 천한 존재가 됐고, 지위와 영광에 대한 제일 거지가 됐고, 아무것도 없는 자가 돼 버렸고, 모든 소유에 대해서 하나도 가지지 못한 소유적으로 아주 거지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거지된, 이 세 가지 부자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 가지 거지된 이것을 하늘에서 이 일 한 그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 그것을 가리켜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에게 영광이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선도 많이 있고, 사랑도 많이 있고, 봉사도 많이 있고, 희생도 많이 있고, 성결도 많이 있지마는 모든 것보다 뛰어난, 모든 것보다 뛰어난 성결, 뛰어난 사랑, 뛰어난 봉사, 뛰어난 구원 이것을 평가적으로 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다 돌렸다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 그러면 이렇게 하는, 멸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하나님이 제공한, 이 멸망 가운데 있는 멸망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놓은, 제공하고 다 내놓고, 당신이 제일, 땅에 있는 암만 사람이 거지라 해도 그만치 거지된 이는 없고, 천해도 그만치 천한 이는 없고, 또 아무리 무능하다 해도 그렇츰 무능한 이는 없는, 땅에 있는 인간 중에, 하늘에는 다 모두 부자지마는 땅에 있는 모든 이 정죄 저주받아 가지고서 천해지고 가난해지고 거지된, 거지된 이 피조물들 이 거지 중에도 제일 부자가 거지가 됨으로, 거지됨으로 죄인을 구원하려는 그 댓가낸 댓가의 혜택으로, 당신이 그 모든 것을 부요한 자가 내어놔서 거지됨으로, 거지되기까지 내어놓은, 거지되기까지 내어놓으신 그것을 이 멸망자들이 받아서 그것을 은혜로 받아 가지고 이 은혜 받은 자들이 “기뻐하심을 입었다” 그러면 이러니까 그분이 이렇게 해 가지고서 멸망받을 인간들이 멸망에서 구원되니까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뻐하는데, 그러면 그거는 멸망받을 인간들이 이렇게 하늘의 부요자가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부요를 내어놓으신 그것을 이 멸망자들이 보고 감사해서 ‘이 참 이렇게 내놔서 우리를 구원했다’ 감사해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 모릅니다. 기뻐하는 거 그저 그들은 모르고 기뻐합니다.
모르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주를 제하시고 악령의 쉬지 않고 탄압하는 악령의 세력을 꺾으시고 또 모든 사망의 세력을 꺾고 죄의 세력을 꺾어, 완전히 꺾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완전히 꺾으셨지마는 벌써 이 모든 것이 다 꺾어지기 시작해서 예수님이 탄생하심으로 말미암아 벌써 강한 악령의 세력이 그것이 시들시들하게 됐고, 사망의 세력이 시들시들하게 시들어져 가고 있고, 또 죄악의 세력이 시들어져 가고 있으니까 그 모든 세력에 자체도 모르게 한없는 멸망의 탄압을 받고 있는 이 사람들이 그 세력이 시짐하게 조그매씩 시들어져 가지고 쇠잔해져 가니까, 이 세 가지 세력에게 눌려 있고 하나님의 공심판의 이 공격의 저주를 받고 있는, 이 안팎으로 온갖 그 압력을 받고 있고 모든 세력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이거 참 비참하고 가련하게 된 것이 그것이 이 원 세력이 예수님이 벌써 이것을 멸하기 위해 가지고서 모든 것을 내놓고 땅위에 오신 이 큰 대속을 인해서 그들은 어째 그런지 모르지마는 기뻐합니다.
어린아이가 여러가지, 무슨 뜨겁든지 차든지 또 배고프든지 또 기저귀가 추져서 하든지 어쨌든지 뭐인지 모르나 그 불쾌하게 있다가서 그 어머니가 와 가지고 그런 것을 다 정리해서 배고픈 데 젖 주고 또 추진 기저귀 갈아주고 또 더운 것을 옮겨 주고 이렇게 해 주니까 이 아이는 뭐 어째 그런 줄도 모르지마는 그때부터는 평안해서 잠도 소록소록 잘 수 있고 또 기뻐서 한숨 자고 나면은 발을 두둥거리면서 그때 저 혼자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사람들이 땅에서는 저희들이 모르지마는 기뻐하심을 입는다.
그뭐 그런 것이 다 겨울이 오면은 이 전부 식물이고 곤충들이 그 참 말할 수 없는 추움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가서 봄이 슬슬 돌아오면은 그게 뭐 봄 오는 줄 압니까? 봄 오는 줄 모르요. 곤충도 봄 오는 줄 모르고 모든 그 식물들도 봄 오는 줄 모르지마는 이렇게 차차 차차 모든 기후가 다 따뜻해지니까 그 모든 것들이 다 봄을 만날 때는 생기를 얻어 가지고서 어째 그런 줄도 모르게 그저 기쁘고 움나고 또 새싹 트고 또 얼어서 붙었던 얼음 돼 있던 모든 곤충들은 거게서 다 그 헤어나서 발동을 하고 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이 이 모든 부요를, 영광과 존귀를, 또 지위와 권세를 이렇게 다 우리 위해서 쏟아서 대속의 제물로 내어놓음을 인해서 벌써 인간이 모르는 그 세계에서 모든 것이 다, 우리를 고통 주는 것이 차차 이것이 도말돼지고 쇠약해져 가고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의 생기가 비추어 오니까 모두 다 기뻐하게 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계시록에 보면은 예수님이 이렇게 오시지 안했으면 이 우주에, 물질계의 전개라 하는 것은 끝나버렸습니다. 물질계, 믿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고 이 물질계라 하는 것은 그것으로서 완전히 그만 끝나서 불타고 말았을 터인데, 불타고 말 터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속주로 오심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연장됐고 또 연기됐고 보류됐고 다시금 새로운 소망의 이 전개가 시작됐습니다.
전개라, 펼 전 자 열 개 자, 그리 아니면 그거 딱 끝나 버리고 마는 건데 이 우주 전개, 세월이라, 하루 이틀 그 모양으로 오늘이 생겨졌고 또 내일이 역사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서 그게 유지됐습니다.
유지돼서 이 예수님의 이 대속이 완전히 끝나게 되면, 끝나게 되면 그다음에는 이제 우주는 예수님이 붙들고 전개시키던 것이 예수님의 이 구속이 끝나 버리면 그 전개는 끝나고 이것은 불로서 다 완전히 소멸돼서 원소로 화해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 나라도 그전에는 참, 옛날은 뭐 이 밥 한 덩어리를 줬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밥 한 덩어리 준 그게 참 큰 은혜고 큰 사랑이고 큰 희생이고 큰 봉사였습니다. 이렇지마는 요새는 누가 이거 식은밥 덩이를 만일 준다면 멸시한다고 싸울라고 달라들 것입니다.
이거 다 우리 나라도 경제가 차차 부요해지니까 백성들은 어째 그런지도 모르고 이래 차차 차차 경제가 넉넉해지고 뭐 먹는 데 곤란 없고 입는 데 곤란 없고 자꾸 이래 돼지는 것은 대국적인 이 전국의 경제가 조금 부강해지니까 모르는 그 백성들도 다 일반적으로 경제에 좀 윤택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그런 성질적의 기쁨을 가리켜 말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세 가지 큰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를 탄압하고 있던 것이, 우리를 목을 조르고 있던 것이 차차 목이 펴지니까 숨을 좀 내쉬게 되고 무거운 짐같이 눌러 가지고 있던 그 세력이 차차 벗겨지니까 이제 어짠지 모르게 인간에게 평강이 오는 그런 기쁨을 말합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 이렇게 어짠지 모르는 기쁨이 오고 또 그 속에 차차 차차 하나씩 해동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평화가 슬슬 와 가지고서 인간이라는 한, 인간이라는 한 개체, 인간이라는 한 개체에 자꾸 새생명이 돋아서 이렇게 기뻐지고 구원이 오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성탄을 어떻게, 그러면 뜻을, 성탄의 뜻을 어떻게 알고 우리가 맞이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첫째로 두 가지 그 결과가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두 가지 결과가 있도록.
하나는 위에 하늘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성탄 맞이해서 이 모든 행동을 인해서 하늘에서 감동받는 일, 하늘에서 기뻐하는, 하늘에 누가 계십니까?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또 천군 천사들이 있는데 천군 천사들과 하나님이 우리의 하는 일을 보고서 감동받아 그 기뻐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하나님에게 영광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는 것을 보고서 참 감동받아서 우리의 하는 일이, 우리 하는 일이 그는 참 모든 만물들에게 칭찬받고 영광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이 될 때에 하나님은 감동받아서 그 영광은 다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이 행동으로 인해서, 하는 행동 자체가 영광이 돼서 그 영광에,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그 행동에 감탄을 하시고, 우리 영광스러운 그 행동에 감탄을 하시고 또 이 감탄한 영광스러운 그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이렇게 이 큰 구속을 베풀어 가지고서 이 구속해 놓은 인간들이, 독사와 시랑이와 같은 그 인간들이 이렇게 그 구속을 받아 가지고서 이렇게 됐다.’ 하고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 할 일이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하는 일이 그것이 이 하는 일이 영광스러운 일, 모든 존재들이 다 감탄하고 칭찬할 수 있는 이런 열매를 맺는 일이 되어져서 하늘에서 하나님은 보시고 감동 받으시면서 ‘그 참 내가 수고해 놓은 것이 헛수고가 아니다. 이거 참 너희들이 참 하는 데 대해서,’ 하나님이 감동받아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감동받아 만족하시고, 그럴 때에 그 모든 행동의 결과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조성품인 구속을 받은 이 존재들은 이런 존재가 됐다’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영광돌릴 수 있는 그것이 하나 위로 향해서 되어져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 되어져야 하겠고, 또 우리가 행하는 것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뭐 우리가 그 은혜를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그뭐 가치든지 그 구비구비를 말하면 측량 못 할 그런 사활의 대속을 받았지만 우리는 이제 좀 예수 믿고 나서 오래 됐으니까 예수님의 사활 대속을 이거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도 흘려봤고 또 여러가지로 참 밥도 못 먹어본 일도 있고 여러가지로 우리가 너무 감사하고 너무 기막혀서 감탄해서 우리가 뭐 식음을 할 줄 모르고 이렇게 잘 줄도 모르고 그런 일이 있었지마는 처음에는 그런 일이 아니라 말이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
그런 일이 없었고 다 무지해서 뭐 예수님이 그와같이 큰 사랑의 큰 세 가지 큰 부자가 제일되는 부자가 제일되는 거지가 되는 이런 일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했지마는서도 우리가 그걸 알기나 했습니까? 몰랐다 그말이오.
몰랐지마는 이제 땅위의 인생에게는 벌써 그것으로서 기진맥진해 죽는 것이 생기가 나와서 어째서 나온지도 모르나 인생에게는 기쁨이 왔고 평화가 온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기념하는, 기념하는,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하셨으니까 우리가 그분에게 뭘로 가지고서 그 대접을 할 건가?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고 그것으로서 기뻐하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당신이 이렇게 땅위에 인간으로 오시는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을 기뻐하셨으니까 우리가 그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또 우리가 멸망 가운데 있는 형제를 구원할려고, 당신이 우리 위해서 하신 거와 같은 그런 흉내라도, 그런 흉내라도, 그런 그 성질의 것의 조그마치라도 우리가 행할 때에 그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영광이 그에게 돌아갈 것인데, 우리가 그런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잘못하면 이 상대방에게 이 세 가지로, 내가 마땅히 그 부요를 가질 것이지마는 내 부요를 희생해 가지고서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요를 희생하고, 내가 마땅히 이권을 취할 만한 그런 이권을 취할 만한 그 이권적인 부요 또 자기가 무슨 그 온갖 지식적이나 능력적이나 모든 그 부요를 자기가 취하고 누릴 수 있는데 그 형제 구원을 위해서 그것을 자기가 가난해지는 거, 예를 들면은 자기가 공부할라고 하면은 자기 공부하면 그다음에는 못 시킬 것인데 자기가 공부 안 하고 하나 희생하면은 동생 몇을 근근히 공부 시킬 수 있어서 그 형이 희생해서 그 있는 부요를 자기 부요를 내놓음으로서 이제 거지가 부요가 돼지는 그런 성질의 것들이 많이 있다 말이오. 우리 생활은 다 그런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혹 그렇게 하는 일을 하다가, 이러니까 그 상대방이, 형제간이라도 ‘이렇게 해 준다. 우리 형이 이렇게 해 준다.’ 또 ‘우리 부모가 이렇게 해 준다' 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그것이 별로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일이 없고 또 감사한다고 해도 그것의 실상의 뭐 백분의 일도 안 되는 그런 감사지 참 그 감사할 만한 그런 실지의 그만한 양의 감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는 그럴 때에, 내가 자꾸 이렇게 하니까 나는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인 줄 알고, 권세도 자기가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마땅히 쓸 권세를 그것을 쓰지 안하고 그 권세를 희생하고 또 부요도 희생하고 자기 그 영광이나 지위나 마땅히 자기가 그런 대우받을 것도 그것을 희생을 하고 이래 하면은 상대방은 ‘으례히 저거는 저런 물건이라’ 이렇게 천하에 보고 오히려 그걸 선을 악용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선을 악용하고 그 감사할 줄은 모르고 거게 대해서는 오히려 천치 바보로 알고 이렇게 그걸 악용을 하고 이거 참 ‘무능하고 등신이라 저렇다. 나는 그런 것을 벗겨먹어 가지고서 내가 이와같이 지금 내 실속을 차리고 그라니까 나는 지혜있고 상대방은 무지 무능하다.’ 이렇게 되어지는 그런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때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서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피곤해지면 안 됩니다. 그 하는 그것이 그만 기진맥진해서 더 할 용기 없어지면 안 됩니다. 이래서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이랬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그 모든 존재 가운데, 창조주니까 그분의 그렇게 모든 부요, 그 부요의 종류를 뭐 어떻게 입으로 다 말하겠습니까? 그 많은 부요를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제일 거지 됐습니다. 제일, 제일 천해져. 제일 거지 됐고 또 그렇게 그 영광과 존귀하신 분이 그것을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제일 천해졌습니다.
홍포 입어서, 이렇게 홍포 입어서, 죄인이면 홍포 입는 건데 홍포 입었지마는 옆에 양쪽에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는 그래도 그 강도는 예수님같이 그렇게 옆구리에 창을 찔리고 뭐 이렇게 멸시와 천대를 받지를 안했습니다. 그래도 동정을 받았지마는 예수님은 동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지의 능력을 가졌지마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능력을 조그매라도 쓰는 날이면 내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 무한한 능력을 가졌지만 능력 하나도 안 썼습니다. 그 능력 하나도 안 쓰고 당신이 그 영광을 누릴라 하지마는 그 영광 하나도 영광 가져보지 못했고 당신이 또 하나님의 주권자지마는 그분은 우리 구원하기 위해서는 털끝만한 자유도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털끝만한 자유도 가지지 못하고 이렇게 큰 사랑의 구속의 희생을 했지마는 그 희생을 우리가 알아줬느냐? 우리가 몰라 줬다 말이오. 우리가 몰라 주고,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뭐 말한다 하지만 그분의 대속한 사활의 대속의 그 희생이나, 사랑이나, 참은 것이나, 또 낮아진 것이나, 무능해진 것이나, 천해진 것이나, 가난해진 거나 그것의 뭐 억억억억만분의 일도 우리가 모른다 그거요.
몰라도 그분은 거게 대해서 원망 불평하지 안하고서 그저 꾸준히 그렇게 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살았지 그분이 얼마 뭐 천 년 하다가 ‘에이, 이거 도리어 나를 몰라 주고 이렇다.’ 하고서 당신이 한번 당신을 나타내시면 우리는 전멸되고 맙니다. 영원히 당신은 그렇기에 우리 위해서 희생을 당하고 있는 분이지 그분이 억만 년 후에라도, 억만년 후에라도 ‘내가 자꾸 이래 당하고 있으니까 그거 알지 못한다’ 하고서 당신이 당신 본전을 억만분의 일이라도 찾으면 우리는 다 헛일되고 맙니다.
이러니까, 이런 관계의 기독의 구원이니까 우리가 그렇게 이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또 천해지고 무능해지는 이런 일을 형제 구원을 위해서 하다가 상대방이 감사를 하고 알아주면은 재미가 있고 좋지마는 감사치 안하고 알아주지 안하고 오히려 알아주지 안한 것보다도 도리어 우리는 그런 자인 줄 알고 멸시와 천대를 할 그때에 우리가, 그때가 가장 큰 수입이 있는 때인데 그때 우리가 피곤해서 그만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피곤하기 쉬운 때지마는 악령이 붙들고 그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그 악령도 피곤한 때입니다. 그때는 참, 최후의 오 분간이라는 말이 일본 나라에서는 최후의 오 분간이라, 사이고노 고훙깡 하는 최후 오 분간이라 하는 그런 말이 있는데 나도 그 하는 그 일을 사랑의 구속을 베푸는 일이 피곤해서 간들간들하게 약해지는 동시에 대적하고 방해하는 마귀 그놈도 지금 간들간들해서 지금 피곤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끝까지 참는 그것을 가졌으면 우리는 그때에 상대방을 충분히 구원할 수가 있고 구속의 뜻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밤에 우리가 이거 한번 더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든지 상당히 알아준다 안 알아준다 그런 걸 생각지 말고 내 이 모든 내게 있는 것을 내가 희생함으로 상대방에게 기쁨이 되고 평강의, 기쁨과 평강의 결과가 맺어지도록, 상대방이 알든지 모르든지 내 하는 것이 상대방에 기쁨과 그 평화의 결과가 맺어지도록 하려는 그것 우리가 하나 가져야 되겠고, 또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약해지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것을 생각지 말고 우리는 그 일을 할 때에 상대방을 향해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서 대속의 역사를 하실 때에 우리 대속받을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알아주기를, 또 우리를 향해서 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출하시는 이 세 가지로 큰 희생을 해 가지고서 제일 큰 부자가 제일 천한 자가 되어지신 이것은 당신이 우리 보고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서 이와같이 했지 우리 보고 한 것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와같이 할 때에 그 결과는 이루어졌지 우리가 당신이 우리에게 대해서 바라보는 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 은혜를 알아줘서 은혜에 보답이 있다는 그런 것은 만의 억만의 일도 털끝만치도 그거는 비추지 안했습니다.
우리가 그 대속의, 사활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 때에 그 은혜 받은 우리들이 그 은혜에 대해서 무슨 감사나 뭐이나 이런 것이라 하는 그런 것은 하나도 바라보지를 안했어요. 안 해 보고 다만 우리에게 대해서는 그저 기쁨과 평화의 결과가 맺어지기만을 바라봤고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을 알아주는 것은, 알아주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알아주는 걸 바란 것 뿐이었습니다.
이런고로 우리가 이 일을 할 때에 무슨 자기는 소유를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든지, 또 그 영광과 존귀를 희생해서 하는 것이라든지, 또 자기가 무슨 지위와 권세 그런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을 할 때에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미혹시키는 것이라.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상대방 보고 하는, 알아주는 건, 알아주는 것은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가 알아주는 걸 바랐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는 저희들을 세상에 보낸다” 했으니까 우리를 보내신 주님이 알아주는 것을 우리가 바라고 그 상대방 인간에게 대해서는 그 알아주리라 하는 건 털끝만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바라지 말고 다만 그에게 그 기쁨과 평화의 결과가 맺어지는 그것만을 우리가 상대해서 바라보고 그렇게 하는 우리들이 돼야만 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하는 그 역사가 우리를 보내신 주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해서 그분이 감동을 받고, 그분이 감동받고 그분이 기뻐하고 우리 자체의 행위가 영광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하늘에 있는, 모르는 건 모르지만 아는 거.
모르는 자들은 모르지마는 아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주님에게 영광 돌리는 거.
이는 천군 천사들은 다 알고 또 그렇게 우리가 할 때에 그 아는 것을 우리는 믿는 성도들은 아는 사람은 압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을 가지고서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이 마땅히 지금 쓸 그 권세를, 구원하기 위해서 권세를 희생하고, 그 권세를 내놓는다 말이 아니오. 그 권세를 가지고 그 권세를 마땅히 쓸 권세를 쓰지 안하고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권세를 쓰지 안하고 희생하고, 또 자기가 마땅히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먹고 쓰고 얼마든지 욕심대로 뭐이든지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지마는 자기가 마땅히 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유를 온갖 그 소유를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안하고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소유를 희생하고, 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가 주권이 있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자기 권리로 하지마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마디도 말 한 마디도 당신이 권세를 못 썼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버지가 요 말 해라 해서 했지 당신 그 독단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행동, 숨 한번도 당신 마음대로 쉬지를 못하게 요렇게 종이 돼 버렸어.
요렇게 종이 된, 종이 된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쓸 권세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쓰지 안하고 하는 이런 일을 하는 이 일을 우리가 할 때에 상대방인 인간을 보고 하다가는, 한다면은 마귀에게 시험들기 때문에 인간 보고 하지 말고 그것은 알아줄 이는 주님밖에 알아줄 이가 없습니다. 주님이 알아주셔서 주님이 보고 감탄을 받도록, 내 하는 데 주님이 감탄을 받아서 당신이 기뻐하도록, 또 내가 그와같이 되어지는 그와같은 일을 한 그 모든 형태를 보고, 형태를 보고 천군 천사들이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또 우리 성도들도 그것을 보고서, ‘저분은 참 장관인데, 저분은 참 사장인데, 사장인데 그 사람은 누가 와도 보면은 말단의 무슨 하나 직공 중에 천한 직공이지 그거 누가 사장으로 보지 못할 만치 그 사람은 자기의 권세나 영광이나 존귀나 이런 것을, 자기 의무와 책임에는 피나게,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피나게 전심 전력 다 하지마는 자기가 받을 영광이나 존귀나 뭐 대우나 그런 것은 하나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이거는 다른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그래 돼지면 아는 사람도 보고 참 그 사람을 보고서 머리가 숙여질 것이고 주님에게 ‘참 예수의 도는 기이하다. 예수님의 능력은 참 크다. 이제 저런 사람을 만들었다.’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는, 옆에 있는 이웃되는 형제에게는 어쨌든지 내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기쁨이, 기쁨과 평강이 그에게 이르도록, 기쁨과 평강이 오고 난 지 후에 그에게 비로소 구원이 갑니다. 내 모든 희생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강이 가면은 이제, 그것들이 처음에는 감사할 줄 모르고 멸시도 하고 조롱도 하고 뭐 아주 천대를 합니다.
그래 내가 오늘도 어데 가면서 그런 말 했습니다. 해방 직후에 그때 미국이 승리하고 미국이라 하면 하늘같이 봤습니다. 이런데 그때는 뭐 차도 귀한데 기차에 타고 가면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서 미국 사람이 하나 떡 나오면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온 거 같이 다 모두 떨고 모두 조심하고 별스러운 사람같이 이래 뭐 존대해서, 지금은 뭐 그래도 그때는 그랬어요. 만일 그 사람들이 똥이라도 흘리면 막 주워 먹을라 하는 그런 정도라, 예를 들면 말이지. 그렇게 그 사람들을 특수인으로 이렇게 막 존대했습니다.
이렇게 존대하다가도 그 사람들이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으십시오’ 하면은 그만 그 사람들이 아주 천하게 봅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하면 그거는 그렇게 존대하던 사람을 ‘예수 믿으십시오' 하면 막먹을라 합니다. 막먹으면 그거 천하게 봤습니다.
그렇게, 그러면 천하게 보이면 ‘내가, 내가 지금 미국 사람 중에서도 내가 지위로 말하면 장교고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것들이 몰라 준다’ 해 가지고 그걸 나타내 버리면 다 헛일입니다. 이제 거게서 꼭 참고 천대를 해도, 그렇게 다 미국 사람이라면 존귀하는데 천대를 이렇게 해도 그분들이 기뻐하고 또 천대하니까, 어떤 사람은 놀려 먹느라고 ‘아따 키다리 키는 크다’ 또 이라면 그래 또 웃고 또 `뭐 코는 뭐할라고 그래 크노?’ 또 이라면 또 웃고, 또 이라면 또 이라며 뭐 ‘악수 한번 합시다.' 이래 쌓으면 악수 해 주고 이렇게 하는, 그런 가운데에서 그 사람들이 할 때에 그 상대방 사람에게는 어짜든지 내가 이와같이 한 것이 저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가 돼 가지고서 그 기쁨과 평화 오랜 넘은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보시고, ‘너 하는 일을 보고’ 그 사람이 나를 보고 구원 얻는 거 아닙니다. 그걸 하나님이 보고 우리를 보내신 주님이 보시고 ‘네가 할 만치 했다. 참 내가 감화를 받았다. 내가 그걸 구원해 주마.’ 내 노력하는 노력의 대상에 주님이 구원해 줄라고 착수를 할 때에 구원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전도한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것은 주님만 보면서 하고, 알아주는 것은 주님이 알아줘.
알아주는 것은 주님이 감동도 받고, 알아주는 것도 주님이 알아주고, 칭찬도 주님이 하고, ‘네가 이렇기까지 지성으로 하니 나도 내가 너 하는 일에 내가 협조하게 해야겠다.’ 그분이 와 가지고 협동해 주도록 그렇게 하고 다만 인생에게 대해서는 뭐 감사를 알아 주리라, 그 대접의 무슨 댓가 볼라 하는 그런 것은 마귀가 그걸 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 볼 것이 아니고 그거는 마귀가 하는 것이지 거게는 그저 어쨌든지 내가 어떻게 주든지 줘 가지고 상대방에게 기쁨과 평화가 충만해지도록 해서 거게서 그들에게 기쁨과 평화가 충만해지기까지 할 때에 이제 나를 보내신 주님을 보고 ‘아’ 나 하는 일을 감탄을 해서, 당신이 권고하시면, 당신이 돌아보시면 당장 성자 됩니다. 당신이 돌아보시면 당장 성자 돼요.
그러기 때문에 땅위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성자되는 것은 성도들의, 당신의 투자한, 성도들의 투자한, 예수님의 투자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구원 얻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 자신의 투자로 말미암아 투자의 댓가로 복음이 전해지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서 위로 하나님이 참 감동을 받도록, 감화 감동을 받아서, 감동을 받아서 나 하는 일에 감탄을 받을 때에 당신이 와 가지고서 권고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지 않는 가정에서, 믿지 않는 가정에 혼자 믿으면 그 남편이 점점 독사같이 자꾸 이래 되어질 때에 독사가 돼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하니까 강퍅해지고 또 의롭게 하면 의로워집니다.
이러니까 그거 하나님이 권고해야지 권고하지 안하면 안 되니까, 강퍅해지나, 강퍅해지나 그것으로써, 강퍅해지나 암만 독사와 같은 자라도 당장 성자도 만들 수가 있는데, 여기 있지만 말이요, ○○○장로님 말이지요. 그뭐 뜅뜅하이 그래 가지고서 뭐 그거, 아무 지금 요새는 누글누글한 사람이지마는. 연보 같은 것 다 그런 것 안 합니다.
연보하라 하니까, 건축 연보하라 하니까 안 하고 또 이라니까 그만 ○집사님이 있다가서 하도 기가 차서 그만 거기서 울라면 남편 잠도 못 잘 거고 나가 가지고서, 뭐꼬? 대문, 대문간, 대문간 옥상에 가서, 스라브 옥상에 가 가지고 엎드려 가지고 자꾸 이래 뭐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이 자다 보니까 아내가 없거든. ‘이거 어데 갔노? 어디로 갔노?’ 아내 찾아 야단인데, 이래 가 보니까 뭐이 왔던데 잡아 가지고 갔나 납치돼 갔나 하는 마음을 감동을 줘.
이래 가지고 양사방 찾다가 보니까 뭣이 자꾸 훌쩍훌쩍 우는데 보니까 ‘이게 뭐이고?’ 깜짝 놀래서 보니까 거기 있거든. 그래 소리 해 가지고서 이래 와서 ‘뭣 때문에 그라노? 뭣 때문에 그러노?’ `그뭐 내가 하나님 앞에 이거 지금 우리가 연보 얼마 해야 될 터인데 하지도 안 하고,’ 그때 뭐 사백만 원인가 그렇대요, 사백만 원. 이랬는데 ‘아, 그거 내가 할께. 염려하지 말고 가자 가자.
가자 가자. 뭐 그런 것 때문에 그라고 있어?’ 그래 가지고서 인제, 그래 됐어.
그래 가지고 그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독사같은 남편이라도 그 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감동을 못 받아 그러니까 자꾸 내가 하나님에게 감동되도록 하려는 요 일이 이루어질 때 당신이 감동받아서 ‘너 하는 일에 내가 해서 내가 너 하는 일에 내가 같이 하겠다.’ 하나님이 권고하실 때에 그 사람이 당장 회개해서 돌아온다 하는 그 말씀을 성경에 많이 해 놨습니다.
이래서, 이래 이 양쪽으로 이것을 보고 우리가 할 일은 뭐이냐? 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게 있는 그 부요를 가난하게 희생하고, 부요를 희생하고, 또 내 영광과 존귀를 내 영광 존귀를 받으면 영광 존귀 다 받으면 다른 사람이 감동받을 게 뭐 있습니까? 내가 영광 존귀 다 받으면 감동받을 게 없어.
마땅히 영광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안 받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감동이 돼지고, 또 존귀를 받을 수 있는데 이렇게 막 존귀해서 그 앞에 뻘뻘 떨 건데 이거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존귀한 사람이니까 내가 감히 그 앞에 서지도 못할 터인데 가니까 악수를 하고 이래 앉으라고 이래 하니까, 이래 앉으라고 자꾸 이래 쌓으면서 그 존대를 하고, 미국에서 김길창 목사님이 가니까 자기 앉았던 대통령 보좌에다가, 대통령 보좌에 아, 여기 앉으라고 이라니까 그래 가지고서 그만 그분이 거기 갔다 오고 난 다음에 뭐 변화가 돼 버렸어요.
이래서, 우리가 지위나 영광이나, 영광이나 존귀나 이것을 우리가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를 그렇게 구원했기 때문에 구원하기 위해서 이것을 우리의 성탄 때에 희생해 주는 것, 희생하는 것, 또 자기의 부요를 희생하는 것, 자기의 자유하는 그 권세를, 자유성의, 자유 다 우리 주권 있지 않습니까? 자유 주권성 있는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것을 희생하는 것, 이럴 때에 그 하는 그것이 열매가 맺지 안하면 그거 헛일이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상대방이 감사하다고 생각지 말고 감사를 바라지 마. 그 감사하면 감사할 때는 그거는 껍데기요 감사할 때는 그때는 껍데기라. 아무 효력이 없어, 감사할 때는. 감사할 때는 벌써 감사함으로 댓가 다 됐어요. 얼마 그 감사를 오랫 동안 그래 하면은 처음에는 감사하지만 나중에는 으례히 ‘이 인간은 등신이라 이렇다’ 해. ‘등신이라 이렇다. 이거는 원래 이런 물건이다.' 이렇게 감사 하나도 못 하고 오히려 멸시 천대를 받아도 하는, 그 멸시 천대, 완전히 하나도 댓가를 받지 안하고, 댓가 받지 안한 그 너머서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라면서 상대방에게 기쁨과 평강의 그 결과가 맺어지도록, 또 위로서는 주님이 참 감동받아서 기뻐하시고 그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우리가 이번 성탄에는, 우리 평생 생활이 그 생활 아닙니까? 평생 생활이 그 생활이지마는 특별히 이 성탄 맞이할 때에는 그때는 우리가 그날 전도하는 것이라든지 또 우리가 그것도 뭐, 이거 한번 그래 해 보는 것이지, 평생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할 말 못 하고, 권세 못 부리고, 뻐젓하이 ‘에헴’ 못 합니다. 에헴 못 하요. 이러니까 그 어데 가 만나면 참 천한 사람으로, 천한 사람으로 그렇게 하는 가운데에 그 가운데 옵니다.
천한 사람으로 이라다가 ‘내가 이라니까 자꾸만 천하게 보네’ 하면 벌써 헛일이오. 그 마귀 벌써 마귀 들어갔다 그말이오. 으례히 주님이 내게 대해서 그랬는데 으례히 지당한 일이지 그걸 그럴 게 다만 거게 상대방에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 했는데 그 결과를 맺지 못했으니까 나는 지금 아직까지 이거 미달된 자요 미숙한 자요 또 주님이 감동을 받을 만한 그런 것이 이루지 안한 이거 양면만 보고, 이 양면만 보고 우리는 요번에 간단하나마 요럴 때에 그런 걸 한번 해 가지고서 요것을 그때만 할 게 아니라 평생 그 생활이 우리가 그 생활 돼야만 할 것입니다.
이래서, 지난번에 그랬는데 우리가 여게 뭐 동회니 모두 이거 또 이런데 말이지요 하는 것은 이거는 성탄 축하하는 건 아닙니다. 성탄 축하하는 거 아니라. 이거는 그런 기회에 대접하는 것이요. 우리 빚 갚는 것이요. 빚 갚는 것이지 그거는 성탄 성질의 대접은 아닙니다. 성탄 성질의 대접은 아닌 줄 아십시오. 그거는 교제요.
그분들에게 평소에 아이 잊어버리면 찾아 주십시오 자꾸 이래 쌓으니까 너무 그 수고를 몰라 주니까 빚을 많이 졌기 때문에 그거 한번 대접해서 하는 하나의 교제요 대접하는 것이요 빚을 갚는 것이요. 그런데 다만 우리가 그런 우리 정신을 기르자 그말이오.
내가 그래 가지고서 무슨 그뭐 무슨 의복 하나 해 가지고 참, 의복 하나라도 해 가지고서 없는 사람 그 사람에게, 뭣이라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 감사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물질로나 내가 정신으로나 내가 또 내 무슨 인간의 실력으로나 또 내가 그를 위해서 무슨 마땅한, 마땅한 그런 권세나 영광이나 지위나 그런 것을 좀 그 형제 구원을 위해서 희생해 가지고서 희생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감화 감동이 되어지고 그 하는 것이 그 상대방에게는 기쁨과 평화가 되어질 수 있는 그런 열매가 맺도록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전에는 우리가 여기서 뭐 유명해. 소문이 났었어. ‘서부교회 탄일날 잔치한다’ 그라면 그 모두 거지들이, 시대도 달라졌어요. 그때는 다 먹을 것이 참 귀한 때니까 그렇게 할 때 모두 기쁘고 즐거워했지만 지금 시대가 다르니까 그거 우리가 그래 했다 할지라도 그런 손님들이 안 올 터인데 그만 우리가 그때 너무 식구가 많아지니까 복잡해서 ‘우리가 그래 못 하겠으니까 어라 모두 구역별로 그만 구역으로 나누자.’ 구역끼리 나누자 이래 가지고서 나눠 버리니 그만 제 떡 제 갈라먹기로 저거끼리만 먹어버리고 그만 이라다 보니까 외나 손님을 잊어버려 버렸어.
이래 놓으니까 그때 와 가지고서 모두 왔다가, 왔다가 그만 지나가 버리고 왔다가 지나가 버리고, 이런데 왔다가 지나가고 왔다가 지나가고 이랬는데 첫 해는 왔다가 지나간 사람이 요 사택에서 몇 명 여기서 몇 명 한 뭐 이삼십 명 대접했어요. 첫해는 그런데 그 오다 가다 만났으니까 그 사람이 왔다 보니까 ‘떡국 잔치 하나?’ 하니까 `안 한다.' 왔다가 그만 섭섭해 가지고 돌아가 버리고, 돌아갔을 것인데 오다 가다 만난 사람이 그 숫자니까 그때 온 사람이 그래도 몇십 명이든지 한 백여 명 왔을런지 몰라. 그전에는 그 온 사람이 그렇게 많이 왔었어요. 와서 대접을 했었어요. 이랬는데 그만 그때 우리가 그만 못 생각해. 그건 내 불찰이야. 그만 싹 끊어 버리고 저거끼리 다 이 구역 저 구역 먹어 버리니까 그 사람들은 왔다가 다 헛일했어.
헛일했는데 그 인제 헛일해서, 안 하느냐고 자꾸 이래, 너무 배가 고프고 또 이런 사람은 자꾸 묻고 돌아다닌 사람은 ‘여기 있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그래 가지고서 약간 대접했다 말이오. 이랬는데 그 벌써 올해 삼년채 납니다. 이러니까 그 이듬해는 온 사람이 아주 삼분지 일도 안 됐더랍니다. 삼분지 일도 안 됐어.
그래 올해는 아마 안 올 것입니다. 올해는 올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올 사람이 없을 것이니까 각 구역에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끼리만 그래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좀 고게서 자꾸 우리 정신을 기르자 그말이오.
내가 처음에 예수 안 믿을 때에 나는 술도가 하고 이랬는데 그 ○○목사라.
{영익}○○목사가 조그만한 아이인데 와 가지고서 ‘너거는 어제 뭐 했노?’ 내가, 그때 나도 속으로는 중생 됐어요. 알면서도 ‘뭣 했노?’ 이라니까 ‘어제 참 재미 있었습니다.’ `재미 있어? 뭐 했노?' 연기대에 강변에 가 가지고서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 그때 나는 솔직히 다 말한 거라. ‘재미가 있습니다’ 이래서 내가 있다가 ‘재미가 있어? 그러면 술이 몇 말이나 왔더노?’ ‘술은 무슨 술이 와요?' 그래 또 있다가 `그라면 재미가 있다니? 기생은 몇이나 데리고 왔더노?’ ‘기생은 무슨 기생이요?' `그러면 뭐 술 없고 기생 없는데 마실 게 뭐 있고 재미 있을 게 뭐 있노?’ 이라니까, ‘뭐이 있었는데?' 내가 이래 물으니까 말이지요, 그래 인제 좀 뭐인가 이상스러워서 물었다 말이오.
물으니까, 그날 뭘 해 가지고 갔는데 해 가지고 갔더니마는 그 사람들이 와서 그 저거는 먹을라 하는 거 먹지 못하고 내나 재미가 뭐이냐 하면 그날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배 쫄쫄 곯은 그 재미라. 배 쫄쫄 곯은 그 재미고 그거 먹을 거 안 먹고 온 사람들 다 이래 주니까 그 기뻤다고. 그 천국 맛을 봤어요. 그 천국 맛이라.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 어데서든지 몰라 그렇지 참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로 주님이 보실 때에 주님이 감동받아 기뻐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 길만이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러기 때문에 썬다씽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 가 가지고서 만일 그 십자가가 없으면 주님에게 기도하고 나는 십자가 있는 데로 보내 주십시오 하고서 나는 십자가 있는 데로 도로 내려가겠다’ 그렇게 말하는 그 전기를 써 놓은 것을 봤습니다.
이러니까, 인생의 평강은 거게 있고 어떻게 하든지 모든 걸 끌어다가서 끌어붙여 가지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아볼라 하는데 지옥은 거게 있습니다. 지옥은 거게 있어.
부자간 지옥도 거게 있고, 형제간 지옥도 거게 있고, 친구간 지옥도 거게 있고, 가족 지옥도 거게 있고, 회사에서 지옥도 거게 있고, 사회도 그렇고 지옥은 거게 있고, 천국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요 걸음 걷는 데 여게 참 평강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자기가 은밀히라도 뭣인가 ‘나는 이거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걸 어떻게 하든지 좀 뭐 조금이라도 해 봐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그러면 자기는 뭐 참 ‘나는 이 전도지를 얼마 나누겠다’ 전도지를 얼마 나눈다든지 돈이 있으면은 전도지 박는데 내가 몇십만 원이든지 몇백만 원이든지 바친다든지 또 이거 뭐 하나 인간 구원에 뭘 한다든지 어쨌든지 나는 내 소유도, 내 영광과 존귀도, 내 권세와 지위는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는 털끝만한 지위도 못 가졌고 권세도 못 가졌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 한 마디라도 당신 주권으로 말해 보지를 못했어요. 이렇게 우리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이러니까 영 이거는 아주 막대기처럼 무능하게 됐지 권세는 하나도 없게 됐어요.
이러니까 이런 것을 우리가 좀 이런 기회에 더 생각하면서, 사소한 그런 것을 가지고서 자기에게 예수님의 이 대속의 이 성질과 행위가 내게서 움이 트도록, 조그만한 움이 터서 그게 움이 터 가지고서 한 번 하고 두 번 하면은 그 움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서 자꾸 이래 무성해서 나중에 일생 생활이 다 해서 자기 소유와 몸을 형제 위해서 주지 안하고는 견디지 못하는, 다 순교자들이 그래 그렇습니다. 무슨 명예 그런 거 아니오.
어짜든지 자기 있는 것을 다 하고도 오히려 생명을 다 바치기 전에는 마음에 만족이 없어서 ‘어짜든지 내가’ 그 형제 구원을 위해서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치고도 자기 모든, 생명을 마지막에 바쳐야 되지 그거 바치기 전에는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다 깨달은 사람들의 정신입니다. 입으로 하는 게 아니오.
진정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번에는 탄일 때도, 오히려 그래 가지고서 뭐 이 세상 사람 모양으로 서로 많이 먹을라고 서로 안 줄라고 돈 서로 적게 낼라고 이래 가지고 하는 그런 독사와 시랑이 같은 그런 추접하고 썩은 일 하지 말고 또 보는 대로 자꾸 이 시장에 있는 분들도 자꾸 데리고 가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어제 아래 말하니까 이 데리고 오라 하면 이 데리고 온 사람이 다 하나 오면 그 사람만 손만 주고 그 사람 안 줄 수 없고 데리고 와 먹고 데리고 와 먹고 하니까 오히려 우리 교인 먹는 게 많다 이랬는데 그것도 좋지마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집 있는 데로 자기 구역 식구 있는 데로 데리고 가고 또 거기 못 데리고 갈 사람은 이리 데리고 오십시오. 이리 데리고 와 가지고, 그래 인제 앞으로 살려서, 그걸 모르기는 모르지만 지금 아마 살린다 해도 못 살릴 것 같아요. 그때는 많이 왔었어요. 왔는데 지금은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뭐 떡국을 먹으러 오라, 떡국 먹으러 오라 하는 그거는 그것은 지금 대 그거 푸대접이고 욕을 보이는 사람이라. 지금은 갖다가 드려서 자셔 주십시오 이렇게 할 경제성이 지금 옛날과 영 달라졌습니다. 이랬는데 누가 뭐 떡국 얻어먹으러 누가 돌아다닐 사람 있습니까? 이러나 우리가 참 청할 때에 저 다리목거리에서 여기서 이까지 떡국 먹으라 하면은 좋다고 여기 올 사람 그 사람을 지금 대접하는 그 기회도 얼마 남지 안했어요. 좀 있으면 그 사람들도 그런 대접을 안 받아요.
이러니까 요것을 다시 살려 가지고서 해서 이 탄일 되면은 다 모두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 있다 해도 ‘아, 서부교회에 떡 먹으러 가자, 떡국 먹으러 가자.’ 뭐 오면 뭐, 그 해석은, 마귀란 놈이, 자꾸 먹여 보니까 원래 먹는 것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 없다. 감사한 마음 하나도 없다. 갖다가 주니까 뭐 한번에 두 그릇씩 먹는 것 모양으로 ‘한 그릇 더 주소. 아, 내가 먹을 게 아니라 집에 가지고 가야 되겠소. 좀 싸 주소.’ 이렇게 하면은 그게 좋은 것이지 그럴 때 ‘이거 저만 먹고 가면 되는 건데’ 하면 벌써 마귀 들어갔소. 알겠소? 그래 내가 여기 어떤 이 보니까 그래 가지고 ‘이거 내가 좀 마른 떡 좀 싸 주소.
나는 또 인제 가서 집에 가 좀 끓여 먹어야 되겠소.’ 이라고 또 이래도 그 예예, 어짜든지, 그래 주님의 심정으로 그거 참 해서 “구하는 자에게는 주고 물리치지 마라” 하는 그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인데 거게서 살아도 살지 못 사는 건 아니야.
그래서 세 가지, 세 가지 우리가 꼭 제물될 거, 자기의 소유를 가난해질 거, 또 자기의 영광과 존귀, 자기 영광 받을라 하면 그만 뭐 그만이지, ‘네 영광 네 받았는데 무슨 상관 있느냐?’ 안 받아야 상대방에게 구원이 돼지지. 영광과 존귀, 자기 지위와 권세, 자기가 제 마음대로 못 하는 데서 거석해요.
이러니까 “네가 장성하면은, 네 어려서는 네 마음대로 돌아다녔지만 장성하면 다른 사람이 너를 띠를 띠고서 원치 안하는 곳으로 끌고 갈 거다.” 제 마음으로 못 살아요. 항상 제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 또 형제에게 장 끌려서, 자기 주관이라 하는 건 완전히 죽여 버려. 그러기 때문에 “육체와 정과 욕심은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느니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이것이 영광스러운 것이요 이것이 참 권위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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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다 나오도록 합시다. 어짜든지 나와서 배워야 됩니다.
그라고 이번 공과는 지난 주 공과를 한번 더 하니까 외우고 자꾸 연습해 가지고 여러분들 속에 ‘이걸 안 가르치면 안 되겠다. 요번 주일에 소리해 가지고 아무래도 이걸 가르쳐야 되지 이거 안 가르치면 큰일나겠다’ 하고 속에 이 말씀의 불이 붙어야 되는 것이지 ‘뭘 가르칠꼬?’ 하는 그자가 무슨 심방과 전도를 할 것입니까? 기도 안 하기 때문에 그래.
우리 이 진리는 우리 마음을 다 먹어야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데 이거 뭐 돌짝밭에 다 걸려 버렸지 길가밭에 걸려 버렸지 덤불에 다 걸렸지 이 마음 다 뺏겨 버리고 진리가 내 마음을 먹지 못했으니까 그 씨가 빼빼 말라서 죽을 것 아닙니까?
그라고 인제 비디오, 그라니까 백이인치? 백 인치? 백인치 우리가 비디오를 계약을 걸어놓고 인제 금요일날 와 가지고 설치 다 합니다.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천팔백육십만 원을, 육십만 원은 교회서 대고 천팔백만 원은 빚을 내 가지고 지금 하기로 했는데 그래 가지고 중간반에 비디오 하면 거게 나오는 화면이 나보다 크대요. 내 몸뚱이보다 크게 나온대요. 그러니까 좋을 겁니다.
얼른 모두 잘 믿어 가지고서 거지가 잘 믿어 가지고 부자되고 부자돼 가지고서 이래 자꾸 돈도 많이 내야 뭘 일을 할 건데 자꾸 복은 번져 나가는데 큰일입니다.
○○○조사님도 진해로 갔습니다. 진해로 갔는데 돈 삼백만원이 있어야지? 오늘 우리 교회에 삼백만원을 빚을 내 가지고서 그래 인제 가서 돈 다 치르고 왔어요.
예수를 잘 믿어 자꾸 축복받아 가지고 이래 좀 부자가 돼 가지고 좀 의의 열매를 많이 좀 맺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