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1:47
성전건축-세가지 할 일
1981. 9. 26. 토새
본문 : 학개서 2장 9절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크리라" 하신 말씀은 이 전의 나중 은혜가 크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은혜가 많으면 영광도 많이 돌리고 은혜가 하나도 없으면 영광을 하나도 돌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나중 영광 이전이라 말은 그때에 스룹바벨이 짓는 그 전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처음보다 중간이 더 많고 중간보다 마지막 종말이 더 은혜가 큰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구약시대보다 나중 전은 신약교회의 성전을 말함인데 물질로 지은 그 성전을 통해서 육체 이스라엘에게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물질로 지은 성전이 아닌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신약시대는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가 어느 시대보다 은혜가 큰 것을 가르쳐서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셨고 또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베푸셨습니다. 보면 하나도 빠집없습니다. 전부가 다 성전 생활을 잘못하는 데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 백성들에게 임했고 또 성전 생활을 바로 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이것을 표시해서 "내가 영광으로 이전에 충만케 하리라" 하는 그말은 그전 거기에 충만타 말이 아니요. 그 전이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그 전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크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영원 자존자시지마는 하나님의 홀로 자존하실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완전이면 완전이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도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영광 돌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때부터 피조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되다 영광되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이 성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가 벗어날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의 이 긍휼을 입을 수가 있지 이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확고히 잡아야 됩니다. 여기에보면 성전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성전을 짓지 아니하고 오만일 다 했습니다. 심으기도 했고 노력도 했고 또 소망도 했고 또 실지로 수입도 했고 다 했지마는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령한 이스라엘에게 심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신령한 것을 심는 것이 농사나 장사나 그런 것도 외부적으로 포함이 되지마는 내적으로는 "우리가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주신다" 또 "심어라." "건축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우리는 복음을 심으고 우리의 소유를 심으고 우리에게 가진 모든 은혜 이것을 가지고서 주를 인하여 사는 이것이 미래에 소망을 위해서 심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신약교회가 성전 짓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복음 운동을 암만해야 헛일이라 말이오. 다른 사람들 많이 구원했어도 자기에게는 헛일이라 말이오. 또 목회를 암만 했어도 헛일이라 말이오. 연보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헛일이라 말이오.
이렇게 중대한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계시받고 있는 것입니다. 계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합니다. 성전이 지어지지 안하면 어떤 일을 해도 그 일은 자기 구원에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우리가 짓지 아니하면 온갖 믿음에 속한 일을 해도 다 허사라.
그것이 다 모래 위에 지었기 때문에 모래 위에 지었기 때문에 다 헛일이라. 성전이 지어져야 비로서 반석위에 지은 집이 된다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이 전의 말은 스룹바벨의 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스룹바벨의 전은 그 위에다가 말했습니다. 삼절에 "너희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전의 이전 영광을 본자가 누군가"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 전의 영광이 큼을 말했습니다.
또 고 다음에 9절에 "이전의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기에 말한 이 전은 스룹바벨의 전을 말했고 9절에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하는 그것은 신약시대으 전을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내 이름을 반석이라 하라 이 반석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하는 것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이 아니고 이는 육체가 너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게 하시니라.
모든 자기 몸밖에서 알려주는 그 알림으로 알지 아니하고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영감으로 알려주는 고 영감 고대로 예수관을 보고 모든 관을 보는 영감 고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는 그말입니다. 영감 고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는 그 말씀같이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하는 말씀은 성전을 짓는 이 성전 짓는 여기에 하나님 평강을 주시리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전짓는 이 일을 참 전심 전력을 기울려서 이 일만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이 난제를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안하면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성전에는 세수통도 있고, 떡상도 있고, 등대도 있고, 향료도 있고, 지성소 성소도 있고, 휘장도 있고, 금향로도 있고, 법궤도 있고, 그룹도 있고, 속죄소도 있고 다 있지마는 우리가 성전 짓는 이 일을 하면은 그것이 거기에 다 따라들어가버립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성전은 우리 영은 벌써 성전이 되어있고 우리의 육이 지금 성전 되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할일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본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건설구원 이것만이 우리의 그 노력으로 해야 될 일인데 이 건설구원은 우리의 심신의 구원 이것이 건설구원입니다.
그러면 심신의 건설구원을 하는 이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뜻을 성경에 선포해놨고 또 은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벌써 영감 역사가 있고 이러니까 하나님에게 거리끼는 일 그 일이 있으면 이것을 우리가 제거해야 됩니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4절에 보면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가라고 내 사자를 같이 보내주겠다 그렇지마는 나는 같이 가지 않겠다 왜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 가다가 패역을 부릴 터이니까 패역을 보고는 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패역부리면 그 패역의 댓가는 전멸이기 때문에 내가 전멸을 할터이니 내가 같이 가지 않는게 낫지 않느냐"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 성전이 되어서 주님이 우리안에 계실 때라도 주님에게 거리끼는 그런것이 있으면 당신이 멸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기 때문에 우리를 멸할 수는 없고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거리낌이 있으면 거리낌이 있기 전에 당신이 나가셔버립니다. 우리 마음에서 나가셔버립니다. 우리 행동에서 나가십니다. 우리 사업에서 나가십니다. 우리 가정에서 나가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에게 거리끼는 그것을 우리가 제거하는 것이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 붙드는 방편이요. 또 주님이 계실 수 있도록 거리낌이 없이 주님이 계실 수 있는 우리 마음과 마음의 움직임 몸과 몸의 움직임 우리의 사업 이것이 될 때에 주님은 우리 안에 와서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들어가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겠다 그말은 나는 너를 통해서 당신이 커지겠다 그 말이오. 당신이 강해지겠다 그 말이오.
당신이 커지겠다 말은 당신의 역사가 커지고 당신의 역사가 넓어지게 강해지겠다 말이오.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는 나로 더불어 역사해서 네가 커지고 네 모든 지위나 무대나 소유나 영광이나 존귀가 커진다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에게 거리끼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주님을 붙드는 것이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만드는 것이 주님이 와서 계시도록 하는 것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할때에 주님은 내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그일을 경영할 때에 주님은 그일을 하시지 안할 수 없습니다. 하시기로 약속했고 당신의 뜻에 당신이 이루지 아무도 이룰자 없습니다.
당신의 뜻만 우리가 잡으면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성전 짓는 것은 이 세 가지 방편으로 하는 것이 성전 짓는 것이요.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마음을 지키시고 주인이 집지키듯이 당신이 우리 마음을 지키시고 우리 마음의 움직임은 당신이 동행해서 역사하시고 그것이 마음 성전 몸의 성전은 우리 몸이 주님에게 거리낀걸 하지 안하고 우리 몸에 움직임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움직임을 버리고 합당치 안한 움직임이 어떤 움직임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안한 움직임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막바로 공산주의 제거입니다. 남침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가정에나 모든 데에 모든 환란과 대적들을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움직임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합당한 그 움직임을 할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니까 우리의 움직임은 전능자의 움직임입니다. 전지자의 움직임이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해.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있는 것은 우리가 해놓은 일 우리의 사업 말이오. 우리가 해 놓은 일 사업 그 사업에 하나님에게 거리끼는 것을 이해 불구하고 이해를 돌아보지 말고 하나님에게 거리끼는 것을 그 사업에서 제거하고 그 장사에서 제거하고 하나님이 법도에 허락하신 그 법도대로 그 계명대로 그 사업을 경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대로 그 사업을 할때에 하나님은 그 일을 책임지시고 같이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사업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것 하나님이 같이 일하실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유 성전입니다. 소유 성전 자기의 몸 성전 자기의 마음 성전 이것만을 하는 이것으로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짓는 요걸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것으로 전부를 삼습니다.
성전으로 전부를 삼는다 이것이 그 성전이 무슨 일 하겠습니까? 성전으로 전부를 삼는다 그말은 성전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는다 이거는 뭐 전쟁도 하나님, 돈벌이도 하나님으로, 사업도 하나님으로, 가정도 하나님, 원수의 원수에 대한 것도 하나님, 영광도 하나님, 다른 사람보면 참 이 사람을 미쳤다 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예수님도 그렇게 해방을 들었지마는 왜 아버지로 전부를 삼으니까 지금은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주님으로 전부를 삼는 것 주님을 전부로 삼는 데에는 성전 아니면 당신 안돼. 성전을 통해서 네가 구원 이십삼일 이 성전의 지대를 놓는 그날부터 그 전을 네가 한번 생각해봐라. 그 전에 전체 어떻게 다 실패고 멸망으로 이루어졌나 오늘부터 이후를 한번 생각해봐라.
전체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네가 볼 수 있으리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진영 다 내두고라도 우리 진영의 교역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더 기도해도 깊이 깨닫고 안되면 금식해서 깊이 깨닫고 이 성전 짓는 이일 외에는 우리에게 급선무가 없다. 이거 외에는 우리가 어려운 난제도 해결할 길이 없고 또 우리 사는 이 땅을 미국보다 못지 않는 그런 복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도 이거 외에 딴 길이 없습니다.
어제 아침에 말씀한 것인데 우리 사람은 이 마음이나 이 몸이라는 이것이 그저 단일체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단일체 아니요. 단일성의 것도 아니요. 굉장히 복잡한 것입니다. 마음도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 아니라 수천도 넘습니다. 그런 각 요소들이 다 모아 가지고 마음이 된 것이고 모인 종합체입니다. 마음이 또 우리 몸도 그렇소. 몸은 하나뿐이지마는 지체가 여러 지체가 아닙니까. 또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 심신의 육의 구원은 단번에 되지 아니하고 중복적으로 여러번에 됩니다. 영의 구원은 단번에 되지마는 이러기에 이 마음과 이 몸의 이 요소를 고칠려고 하면 그 요소를 고칠 준비가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요소를 고칠 준비가 뭐입니까? 우리에게 변해져 오는 그 현실입니다.
그 변해져오는 그 현실은 요 현실에 요 요소를 고칠하면 요 현실을 줘야 되겠고 또 요소를 바로 깨닫게 하려면 현실을 줘야 되겠고 현실은 자기 안에 있는 각양의 그 요소를 바로 알게 하는 것이요. 병을 고치게 하는 것이요. 그것을 바로 만들어서 온전케 하려는 것이 그것이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현실을 당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러면 우리가 이 현실을 당할 때에 어떻게 해서 구원을 이룹니까? 우리가 행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습니까. 행동하면 몸이 행동하는데 몸 제가 근원이 되어 가지고 행동합니까. 몸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수천 명이 모였어도 그 사람이 나가면 각각 다 헤어지는 것은 자기 마음이 가는데로 다 각각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에 따라서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서 시발되는 것이므로 그 마음에 시발이 제일 중한 문제이고 또 그 다음은 몸의 시행에 둘째로 중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시발이 중한 문제는 마음의 작정이 그것이 중한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의 작정이 단번에 되는 것 아닙니다.
마음에 작정이 그렇게 쉬운 것 아닙니다. 마음에 수많은 요소가 있어 가지고 그 요소들이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회의 정치요 안에 그 수많은 요소들이 회의를 해 가지고 각각 이 요소는 자기에게 해당된 것을 주장하고 모든 요소들이 해당된 것을 주장 해 가지고 거기에서 그 결의를 해 가지고 결정되는 그것이 비로서 자기 마음에 작정인 것입니다.
단순히 마음이 그래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수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정서의 요소도 있고, 기억의 요소도 있고, 감정의 요소도 있고, 욕심의 요소도 있고, 또 이런 이성의 요소도 있고, 양심의 요소도 있고 별별 요소들이 많이 있어 가지고 이것이 모아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회의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요소를 다 죽어버리고 꺽어 버리고 하나만 되어 있는 것 있습니다.
대개 보면 무지한 사람 그 아주 사람 중에 제일 좀 무지한 사람들은 욕심이라는 그것이 하나도 단독 독재를 하고 있고 다른 것들을 다 꼼짝을 못하도록 그렇게 억압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욕심 중에도 그 욕심이 물욕에 붙들린 자, 명예욕에 붙들린 자, 정욕에 붙들린 자, 행락욕에 붙들린 자, 식욕에 붙들린 자, 별별 그 욕심에게 붙들린 자가 있는데 그자는 만 가지 비판과 평가를 그것을 표준해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거 유익하면 되고 그거 해로우면 안됩니다. 그자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요 가련한 사람이요 그의 비판이 제일 치우쳤습니다.
이리저리 치우쳐서 무익한 자가 되었다 그 말은 이 마음의 요소의 이 회의가 정상적인 공평된 회의 결의가 되지 아니하고 어떤 것에게 치우쳐서 그로 달아났다 그 말이오. 그보다 낫은 사람은 그래도 그 마음의 요소가 둘이 살아 가지고 둘이 서로 대립도 하고 충격도 하고 의논도 합니다. 그 사람이 그 보다는 조금 작정이 원만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이 살아 있습니다. 열이 살아 있어 가지고 다 동등 그 실권을 가지고 그 실력 견제를 합니다. 견제를 해 가지고서 아무리 욕심이 주장을 해도 도덕심이 있다가서 '안된다 그건 내게 거리껴서 안된다.' 아 도덕심과 양심은 합의가 되가지고서 합작을 봤다 할지라도 도덕심과 욕심이 합작을 봤다 할지라도 양심이 '안돼. 내게 거리끼 안되겠다. 내 주장은 이런데 내게 거리껴 안되겠다.' 그러면 양심하고 도덕하고 한 덩어리가 됐다 할지라도 욕심이 있다가 '나는 안되겠다 내가 못먹으니 안되겠다.' 이래 가지고 서로 실력 견제가 되어 가지고 이렇게 회의가 되어 나옵니다.
이러기에 그 사람에게 여러가지 요소된 요소있는 그것이 죽지 안하고 다 생생하게 그 요소들이 다 살아 가지고 그 요소들이 자기의 시력을 다 발휘하고 자기의 실권을 주장을 하고 이랬을 때에 그 사람의 생각은 복잡합니다. 단순히 사건을 말하면 일면을 생각해서 탁 그 경솔하게 판단하지 아니하고 많은 면을 생각해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면도 생각해 보고 저면도 생각해 보고 이러니까 그것이 간단하게 결정이 되지 아니하고 모든 면을 생각해서 원만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오. 그 몸도 몸은 있지마는 팔 다리 병신이고 다 병신이면 병신 아닙니까. 이것 병신된 것은 병신으로 알지마는 마음의 병신된 것은 사람들이 그걸 모릅니다. 마음의 병신된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이 세상에서 권세를 얻는 그 원만한 사람이요. 구비한 사람입니다.
몸에 어떤 사람은 맹장 그것은 맹장 그거는 있을 필요 없으니까 맹장은 어데 참 먼거리를 가려하면은 이게 중간에 낭파를 해서 그 고장도 안난 맹장을 수술하고 간다고 그것이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지금 그런 말이 없어.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맹장 그것도 없으면 그 만침 그 사람은 불구자 된다 이게 필요하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는 그것이 요새 과학에서 나왔답니다.
이래서 지금은 고장나기 전에 맹장을 수술하지 안해. 맹장 그 고장날 상 바르면 미리 예비약을 가지고 준비해 가지고 갔으면 갔지 맹장을 고장도 안났는데 소용없는 것 제거해 버리지 않는다 그 말이오. 눈썹 이것도 필요 없는 줄 알아도 눈썹 이것도 필요 있습니다. 육체에 요소 쳐놓고 필요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마음의 요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요소를 죽은 것을 깨우치기 위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런 현실을 만나게 될 때에는 장 이거는 평상 거기에 대해서 느끼지 못한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을 촉감 받지 못한 것을 그 현실에서 받습니다. 이래 가지고 마음에 결정이 되어지는 것인데 불택자로 서는 그 마음의 요소를 다 살렸다 할지라도 그 마음 회의를 열때에 왕적으로 왕이 되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가지고 그 회의를 주장하는 그 왕이 누구입니까? 중생된 이후에는 마귀가 왕노릇 못합니다. 죄가 왕노릇 못합니다. 불택자는 마귀와 죄가 왕노릇 한다. 고 성경에 말했습니다.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그 마귀가 그 중앙에 좌정해 가지고 고 마음에 회의를 결의하기 때문에 말하지 안하고 있어도 그에게 거리끼는 그일을 마음들이 하지를 못합니다. 요소들이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요소가 결의를 했지마는 그 결의가 다 마귀적이요. 다 사탄적이요. 그러기에 불택자들이 경영한것은 만의 만 억에 억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는 다 마귀적이요.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된 사람들이 올바른 결의를 할라 할때에는 우리는 그와 같지 안해요. 우리는 불택자와 회의가 다릅니다.
불택자들이 그 마음에 회의 할 때에는 원하든지 원하지 안하든지 마귀가 와 가지고 좌정하고서 왕노릇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마음에 결의를 할때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계시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결의는 그분이 간섭하지 안하지마는 그분이 앞에 섰고 보이고 그분이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요소가 안된 것을 주장을 못합니다. 주장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 그분에게 거리낀 것을 하면 당신은 나가버립니다.
그분을 모시고 결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을 모시고 결의하는 것이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때는 우리 마음에 각양 요소가 있지만은서도 그런것이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작정이 거의 다 옳은 작정을 합니다. 믿는 사람이 옳은 것을 몰라서 성전 못짓는 것 아니요. 이것은 제거해야 되겠다 이것은 구비해야 되겠다하는 것을 기도하는 사람은 다 압니다. 대게는 다 압니다. 엎드려 하나님을 모시고 주님으로 더불어 의논할 때는 알아집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도 주님은 버리고 자기 목적을 가지고 미신과 같이 자기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목적만 자꾸 생각하면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 목적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만을 하는 데에 자기 전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 회의에 들어와서 참석하시게 되기 때문에 대개는 그 결의가 옳게 됩니다. 결의가 옳게 되니까 믿는 사람이 비판이나 평가는 바로 하는데 왜 성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심정 가운데서 올바른 출발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올바른 출발을 하려고 할때에는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기도라야 올바른 출발이 됩니다. 마음 속에 결의가 바로 된다는 말입니다.
이 바로된 결의를 이것을 달성을 시키는 데에는 의지가 이 일을 책임 맡아 가지고 책임 맡아 가지고 이 일을 하는 것인데 계속적으로 마음의 요소 중에는 그 의지라는 그 요소가 이일을 경정된 일을 책임지고서 이것을 달성시켜서 자기 몸으로 더불어 싸워 가지고 이 일을 달성시키는 것인데 이 의지를 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무엇이냐? 그 밑에 말씀하시기를 "이는 주를 의뢰함이니라" 말했습니다. "이는 주를 의뢰함이니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라"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의지는 무엇으로 강해질 수 있고 무엇으로 자랄 수 있느냐? 주를 의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강해지지 못하고 자라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마음의 수많은 요소들이 결의하는데 제대로 내비두면 우리에게는 강한 자가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알것입니다. 아 내게는 물욕이 강하다. 내게는 감정이 강하다. 내게는 행락욕이 강하다. 나에게는 이성이 완전히 지금 세력을 잃고 있다. 내게는 양심이 강하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마음에 붙들려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줄 알아지마는 꼼작 못한다. 그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바울이 자신이 자기에게 제일 마음 가운데에 강자를 발견했는데 그 마음이라고 말한 것은 뭐입니까? 양심입니다. 신앙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어코라도 양심대로 달성하지 안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도록 까지 양심 주장은 다 주장을 했고 다른 요소들이 양심 주장에게 다 복종을 해서 양심이 주장하는 걸 하나도 그대로 하지 안한 것이 없고 양심이 해라 하는데 안한게 한나도 없다 그 말이오. 자기에게는 이 마음에 어떤 요소가 강하고 점령하고 있는지 그것을 잘 살피면 알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별별 요소들이 있는데 그 요소를 우리가 정리할래야 또 세력 균형을 이 세력이 다 각각 다 주님이 지으실 때 다 세력을 줬기 때문에 제대로는 다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력이 고로 가져서 이 견재가 되고 균형이 되도록 우리는 못합니다.
이러니까 무조건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모시고 결의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됩니까? 내가 해야 됩니까 버리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을 모실 때에 그때에 모든 것을 정상화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각양의 요소는 그것이 월권하는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그 결의가 바라되고 바로된 결의를 이행하는 데는 그 의지가 힘이 있어야 되겠는데 의지는 뭘 먹고 자라느냐? 여호와 의뢰 주를 의뢰하는 그것으로 먹고 자랍니다.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말은 그 주님을 의뢰하는 자는 달성한다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작정해 놓고 나갈라고 하면은 어떨때는 너무 애로가 많아서 의지가 낙심합니다. 어떨때에는 또 좋은 미혹시키는 것이 많아서 그만 또 넘어집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의 출발은 기도해서 해야 되겠고 또 그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우리의 의지를 길러야 됩니다. 의지를 달게야 됩니다.
의지를 가꿔야 됩니다. 뭘로 가꿉니까? 아 주는 우리를 돕는 자시니 염려하지 말아라. 주께서 모든 원수도 정복하고 모든 태산을 골라서 시온의 대로를 만든다고 하셨다 여호와를 의뢰해라. 주님을 의뢰해라. 자꾸 주님을 의뢰하는 것을 자기가 말해줍니다. 자 의지에게 이제 결정한 일을 의지에게 맡겨 놨는데 의지 제가 하나 들고 나갑니까? 우리 마음의 요소는 양심도 의지를 돕고 달게도 타이르고 우리의 욕심도 타이르고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기억도 우리의 정서도 우리의 도덕심도 전부가 이 의지를 자꾸 여호와 의뢰해라. 여호와 의뢰해라. 네가 위험 천만하다 여호와 의뢰해라.
네가 감당 못한다. 여호와 의뢰해라. 주를 의뢰하라 이렇게 할때에 우리는 그 결정한 것이 계속되 나가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를 의뢰하는 이것이 중단되면 우리의 의지는 그만 피곤해서 넘어집니다.
이래서 성 어거스틴은 그가 죄에 대해서 정의를 말하기를 의지가 꺽어지는 것이 죄라 그렇게까지 그는 죄에게 대해서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런고로 어쩌든지 우리가 이 성전짓는 일을 그저 뭐 교훈 많이 할 필요가 없소. 뭐 묘한 설교도 또 이상한 말도 운동도 필요없고 자기 성전되면 이것이 오병이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성전되면 이것이 오병이어 되는 것이요. 이만하면 아무리 많아도 먹고 남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떠서 보면 별별것들이 우리를 흔듭니다. 큰것이 우리를 누릅니다.
또 두려운 것이 우리를 억압합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를 미혹시킵니다.
하지마는 우리가 이 성전 건축을 할때에 주님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성전 건축하면 그보다 더 좋은거 당신이 주십니다. 성전 건축하면 아무리 강한 자라도 그것을 저거끼리 다 꺽어서 절단나게 만듭니다.
이러니까 이 설교를 그저 구경만 시키고 하지말고 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 일이 되기까지 일년이고 되면 그 다음에 성전 생활 계속하고 해서 이 일이 되면 이 성전 건축이 바로 되면 어떤게 바로 된 것인가? 자기 주관으로 내가 이것도 다 제거했고 저것도 고쳤고 이것도 다 구비했으니까 성전 건축이 됐다 하지 마십시오.
성전이 건축된 증거는 뭐이냐? 주의 도우심이 현저히 나타납니다. 도우심이 당장에 나타납니다. 자기에게 나타날 것이고 목회자라면 자기의 심령에 나타날 것이고 또 자기 역사에 나타날 것이고 교회에 나타날 것이고 가정에 나타날 것이고 자기의 모든 지위에 권위에 자기 무대에 자기의 그 지경에 넓어지는데 다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기도를 바로 했으면 그 바로 한 증거는 회개로 나타나고 회개를 바로 했으면 그 증거는 주만을 의뢰하고 바라보는 그 열매가 나타나고 주만을 바로 바라 봤다면 그 결과는 그만 의식주 영광 안보 이것이 마구 따라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제는 실질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될 그 위급한 때를 당했습니다.
이래서 어쩌든지 가 가지고 이 성전 건축 성전 건축은 간단합니다. 세 가지로 말했는데 이 세 가지면 다 됩니다. 주님에게 거리끼는 걸 같이 계실 수 없는 걸 제거해요. 주님이 계실 수 있는 걸 해요. 주님이 같이 일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 좋아해서 당신이 믿는 것이 나의 일이니라. 당신으로 인하여 동하면 그 일은 주님이 하신다 그 말이오.
이 일을 어떻게든지 해서 그 표가 나기를 그냥 주관으로 됐다 할 것이 아니라, 그 표가 나기를 당신의 도우심이 모든 면에 역사하심에 봐라 "네 소위를 살펴봐라 네 소위가 구월 이십사일 성전 지대를 놓는 이날부텀 이후를 봐라 증거가 나타나리라" 이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참고로 말씀하신 것은 너희들이 이렇게 이 큰 계약을 가지고 큰 세력을 배후에 두고도 너희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제물은 다 거룩한 것인데 거룩한 제물을 네 옷자락에 쌓다고 하면 제물만 깨끗하냐 옷자락도 깨끗해졌느냐? 이 옷자락이 다른데 닿았으면 닿는 그것도 다 깨끗해지냐? 어찌되느냐?' '제물 그것만 깨끗하나이다.' '네가 시체를 만졌다.' '시체를 만졌으면 네 손이 더러워졌나?' '네.
더러워졌습니다.' '더러워졌으면 더러워진 네가 시체만진 손 아니고 다른 손으로 다른 음식이나 물건이나 사람이나 만졌으면 그게 더러워졌느냐 이 손만 만진 손만 더러워졌느냐?' '그 모든 것이 더러워졌나이다.' '그렇다.' 그런데 너희들이 바로 모든 행위가 이렇다 옳은 것 하나 가지고 다 옳게 된 것으로 여기고 더러운 것은 하나 더러우면 고것만 더러운 줄 아는데 하나 더러우면 모든 게 다 더러워진다. 옳은 것 좋은 것은 하나 좋다고 모든 게 다 좋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다르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요 학개서를 읽고 우리 진영이 어쩌든지 이 성전 건축에 서둘러서 뭐 다른 설교할 것 없이 이것은 성전 건축에 하나님이 달아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피해서 달아나시는 일이다. 이거 우리에게 제거하자 이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실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은 하나님이 계실 수 있다. 이 행동은 하나님이 같이 계실 수 있다. 이 마음 하나님이 같이 계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같이 계시기는 하지마는 역사 하시지는 안한다. 이 일은 하나님이 역사하다.
이 세 가지로 나눠서 성전 짓는 일을 해서 먼저 자신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또 자기 가정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자기 교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또 자기 가정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자기 교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것이 운동이 자꾸 펴져 일어나는 이것이 표적으로 나타나기까지 이렇게 해야되지 공연히 주관으로 이래할 것이 아니라 이제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뭐 방송도 이런 설교 아닌 것 암만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성전이 건축되어야 되지 주님은 계실 수 없도록 쫓아내어 버리고 전부 하는 일이 자기 집에만 빨랐도다 자기 집에만 빨랐도다 자기 집에 빠르다니 자기 살 곳에 빨랐다 그 말이지요. 자기 처소에 빨랐다 말이지요. 자기 위하는 일에 빨랐다 말이지요.
부흥이니 무엇이 운동이 해도 속에 디비보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기 위하는 운동입니다. 저거 자기 집짓는 것이요. 자기 집에 빠른 것이요. 어떻게 하나님이 계실 수 있습니까. 어째 껍데기로 보면 야 남한은 전부 기독화 되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문제없다 싶으지마는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전부 자기 집에만 빨랐습니다. 자기 처소에만 빨랐어. 자기 집만 판벽된 집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놨습니다.
자기 명예가 있을 곳, 자기 지위가 있을 곳, 자기 욕심이 있을 곳, 자기 의식이 있을 곳, 자기의 취미가 있을 곳 오만 것 다 자기 있을 자기 처소 그것 마련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 방편 가지고 마련하고, 어떤 사람은 저 방편 가지고 마련하고, 어떤 사람은 부흥 방편 가지고 마련하고, 어떤 사람은 개혁운동 방편으로 마련하고, 복음 운동 가지고 방편을 가지고 마련하고, 그 방편으로 예수 믿는 걸 절 위하는 방편으로 썼지. 하나님의 성령이 안되니 안된다 그 말이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다 화가 받을 것이요. 다 멸망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개인도 상관없어요. 우리가 원하기는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이 교계적으로 원하지마는 그게 안되면 개교회 적으로 개교회라도 하나님이 구원합니다. 그게 안되면 개가정이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안되면 개인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