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받는 법과 결과

 

1982. 4. 4. 주후

 

본문 : 사도행전 1장 6절∼11절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요사이 믿기 어려운 설교를 오전에 했습니다. 요사이 일반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설교를 오전에 했습니다. 나도 이 설교를 하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강단에 와서 본문을 택했기는 택했지마는 또 내가 생각하던 것은 달랐습니다.

 새벽에 반사들 출발할 무렵에 설교한 설교와 같은 성질의 것을 증거하려고  생각하고 섰습니다. 여기 오기까지는 설교를 빌립보 4장 8절로 9절까지의 설교를  하려고 준비를 해 가지고 왔었습니다.

 또 여기 와서 장로님 사회하는 그 도중에 이 사도행전 말씀은 증거하기로  작정을 했고, 또 강단에 서서 증거하기 시작할 때에도 다른 각도에서 시작했는데  자꾸만 나를 끌고 오전에 증거 한 그 증거를 증거 하게 해서 매우 나와 내  속에서 끄는 역사와 둘이 일치가 안돼서 심히 고민스러웠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증거 하기는 했습니다.

 오전에 증거 한 이 말씀을 오후에 또 증거 하여야 할 깨달음을 가져서 또 증거  합니다. 오전에 증거 한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기본구원은 얻은 사람들인데 소위 성화구원, 건설구원, 하늘나라에 간  자로서 하늘의 그 영광 지위 권위에 차이가 있는 그 건설구원이라, 영광구원이라,  성화구원이라 하는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요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건설구원을 한 말로 말하면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가 갖추어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예수님의 형상을 세상에게 보여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요,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형이라면 예수님과 꼭 같은 모형을 가진 우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자체도 그는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인 것이 다른데 피조물들에게 대해서는  창조주 같이, 시은자 같이, 하나님 같이 이렇게 영원히 이 위치에서 사는 준비를,  실력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자체도 그러하고, 욕망도 그러하고, 모든 지능도 그러하고, 사업도 그러합니다.

희로애락도 그러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은 원형의 기쁨이라면 똑 그와  같은 기쁨을 우리가 가지게 되는 모형적 기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형상을 입는, 우리가 마련하려고 하는 이 구원, 이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구원이지 우리의 노력은 여기에 가담되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인가 수요일 밤인가 그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섯 가지  기본구원의 이 은혜 생활을 하는 거기에 우리가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이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건설구원의 세 가지를 깨닫는 것과 행하는 것과 열매  맺는 일을 당신이 일으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받은 바의 은혜, 우리에게 그 은혜 생활 할 수 있도록 당신이  만들어 주신 그 은혜 생활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 우리의 요소는 전적 받은 바의 은혜를 입어 은혜  입은 대로 은혜 생활하는 그것이 우리지, 우리 요소는, 새로운 건설이나 창조에는  우리 힘은 전혀 추호도 거기에 가담되지 않는다는 이것이 아주 참 돌발적인  말씀입니다.

 종전에도 이러한 교리와 신조가 있기는 있었지마는 일반적으로 다 인정하지  아니했고, 신인합동설을 부인한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신인합동설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인적 요소는 당신의 은혜가 와 가지고 만드신 것만침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것뿐이고, 만들어진 고것이 만들어진 대로 보존되고 유지되고 행동할 때에  다시 하나님께서 새 은혜로 와 가지고 만드시니 우리의 구원은 전적 하나님 한  분의 조성이요, 조성에는 인간은 가담하지 않았다, 다만 받은 은혜를 감당하는  것뿐이다 하는 그것을 지난 시간에 증거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증인의 자격과 증인 역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 무궁세계 가 가지고도 꼭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생애라. 그런데 이 일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 얻어 가지고 이 일을  하지 인적 요소로는 전혀 되지 않고 다 신적 요소로 되어지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는 확정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어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신 것,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증인  곧 예수님의 모형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 이 구원은 전적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이 역사를 일으키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그 말씀보다도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생시에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에 두고 말씀하신 그 말씀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한 말씀과는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마는  우리에게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또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 유언으로 남겨 두고 간 이 말씀인 것만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든 성경 중에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으로 멍에를 지워,  멍에를 메워 주신 말씀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이 권능의 은혜로 건설구원을 이루지 인적 요소로는  건설구원을 이룰 수 없다 하는 것을 확정을 지우고 나서는 것이 큰 지혜가  됩니다.

 대개는 악령이 우리를 미혹시켜 가지고 실패케 하는 것은 기본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지마는 건설구원은 하나님 은혜와 인간의 힘을 합해 가지고 합동해  가지고 구원을 이룬다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배운 교리와 신조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라도 실제로 자기가  생활에는 자기의 인적 요소를 이 건설구원의 자원으로 계산을 대고 사는 생활이  되기 아주 쉽습니다. 이 실수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우리 요소는 다만 기본구원을 이미 주셨으니 이 구원을 잘 감당하려고 하면  마음도 목숨도 힘도 뜻도 성품도 뭐 다해야 감당하지, 다해 가지고 이미 받은  은혜 감당하니까 받은 은혜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새것이 무엇이 건설되어지니까,  자기는 힘을 다 쓴 것이 자기가 아는 바이니까 내가 다 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이렇게 계산을 대서 스스로 우리 구원을 혼돈하고 혼잡 시키는 그런  일이 많이 돼서 손해를 많이 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은 내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내가 전적 성령님에게 복종을 해야 이분의 능력이 내 복종을 통해서 나타나시지,  이분에게 복종하지 않고 나와 서로 상대되어 있는, 대립이 되어 있는 이런 요소가  털끝만치라도 있으면 지공하시고 지성하신 성령님은 그 일에 같이 할 수는 절대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전에도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땅 위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말을 할 때에, 이것은 너희 알 바 아니니 버려라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즉시 땅에 있는 소망을 버렸습니다.

 그들이 다시 갈릴리에 와 가지고 고기 잡는 일도 했고 했지마는 그것은  세상으로 돌아간 실패라고 그 위에 증거가 있고 그들은 다 버렸다고 그렇게 자기  주관적으로는 인정할 만치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에 여러모로 말씀하신 말씀을 보면, 세상을 가지고 이 건설구원을  이룰 수가 있다, 또 세상을 가지는 것이 건설구원과 하나님에게 배치되게,  대립되게 가지면 잘못이지마는 하나님과 진리와 일치되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하나님과 진리와 구원 역사를 위해서  가지면 좋다 하는 이런 말을 많이 성경에 말해 놨고 또 우리가 그렇게 주장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개울이 있으면 이 개울을 건너뛰어야 되는데, 건너뛰어야 되는데,  건너뛰어야 저 개울 저편 언덕에 닿을 수가 있기는 있는 것인데, 건너뛰는 일에  있어서 이렇게 건너뛰어라, 저래라, 저래라 많은 말이 있지마는 마지막에 결론은  부인입니다.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을 가지고 주를 따르는 이런 일을 할 때에 그것이 어느 정도 주와  주의 진리와 그것을 가지는 법칙이 배치되지 않지마는 언제인가 마지막에는  그것이 주를 위해서 가졌는지 또 복음 위해서 가졌는지, 복음 위해서 가졌다,  주를 위해서 가졌다, 뜻대로 가졌다, 진리대로 가졌다 말을 해도 실은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자기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무슨 일이 나는고 하니, 자 네가 세상을 가진 것이 하늘나라냐  세상이냐. 하늘나라를 가지겠느냐 세상을 가지겠느냐. 이것을 가지겠느냐 주를  가지겠느냐. 이것을 가지겠느냐 진리를 가지겠느냐. 마지막에는 둘 중에  하나이니까 어느 것을 네가 가질 것이냐 하는 그 종말에 반드시 도착이 되고야  맙니다.

 마지막에 둘 중에 하나라는 종착점인 그 갈래 길에 딱 도달하기 때문에  이제까지 무슨 말을 해서 빙빙 둘러 가지고, 뭐 수십 방편을 가지고 이 핑계 저  핑계 해 나왔지마는 마지막에는 이거냐 저거냐, 보다 어느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취하라 하는 그때가 오고, 그때가 올 때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늘나라,  자기보다 주님 이것이 결정되지 않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이 되어지는 이 두 갈래길에 꼭 도달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빙빙 돌면서 귀한 세월만 허송하고 그것이 예수 믿는 척, 믿는  줄 알고 있었지마는 그러다가 귀한 세월 지나 보내 버리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그러면 자네가 주를 위해 가졌다고 하고 그것보다 주를 높인다고 하니까 이제  실질적으로 한번 달아보자 하고 마지막 그 경중을 달 때에 그때라도 이것을  버리고 주님 앞으로 옮겨 서야, 이것을 부인해야 되어지는 것이지 부인하지 않고,  그때는 머뭇거릴 수 없으니까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그것을 부인하게 되는, 둘 중에 하나를 어느 것을 섬기지 둘 다  섬길 수는 없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보다"라는 말 붙였습니다. 보다  어느 것이냐, 보다 어느 것이냐. 어쨌든지 보다에 도달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우리가 공연히 이렇게 유혹 받는 말을 가지고 우선  그것을 붙들어야 되기 때문에, 붙들어야 되지 붙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리  빙빙빙 잡아 돌려 가지고 그만 어쨌든지 이 도랑을 퍽 건너뛰어야 되는데, 그만  세상을 부인해야 되는데, 부인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아야 되는데.

 이것을 그럴려고 하면 다 떨어져 버릴 터이니까 이것을 데리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이래 저래 자꾸 세월만 보내면서 행여나 그러다가 건너 뛸 수  있는가 해서, 또 건너 될 기회를 가지고 건너 뛰지 못할 판이면 또 데리고 이리  돌아다니고, 암만 방황해야 마지막에는 건너 뛰어야 됩니다. 건너 뛰어야 구원이  되지 건너 뛰기 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은 본인들이 다 잊어버려 그렇지 자기의 과거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  보면 분명히 자기가 오랫동안 머물고 신강해 나오던 그 일은 밤중인,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를 취해라, 보다 어느 것이냐 하는 그런 순서가 통과하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통과함으로 자기의 준비는 다 실패로 돌아갔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서 보다  천국을, 보다 주님을 이렇게 결정지움으로 구원에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든지 이  종착에는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지 이 종착 통과되기 전에는 우리의 건설구원은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둘째는 생명도 그러합니다. 성령을 받으려고 할 때에 오전에 말한 것 같이  요새 뭐 공산주의자 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래도 거기도 민주주의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또 민주주의 치하에도, 여기도 지하 공산주의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그때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뒤에 부활 한다 안 한다,  부활했다 안 했다 하고 지금 심히 소란스러울 때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 외에는  전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대적해서,  예수교가 완전히 전멸이 되어져야 우리에게 화가 끝나지 이거 남겨 뒀다가  나중에 큰 복수를 당해 가지고 우리가 전멸 당한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예수교는 아주 종자를 없애려고 하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그만 숨어서 밤에 모였으니까  숨어서도 도피를 하면 싶은데 예루살렘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대적 속에서 성령의 영접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들썩거리고 있으니까 여기는 자기의 몸이나 생명이나 자기라는 전부를 다 내놓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성령을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들은 그때에 열흘동안 다락방에서 성령의 권능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 다 대가로 내놓고 성령의 은사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때에 열흘 돼서 성신의 은사가 그들에게 환하게 그들이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임하셔서 그때부터 신약교회는 건설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생명 내놓고 자기 내놓는 것도 그저 우리가 평소에 자살할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산다, 주를 위한 생애다, 또 자기는 주를 위한 것이 되면 되어진다.

 이래 가지고 자기 부인이 단번에 안 되고, 자기 생명을 완전히 주님에게 맡겨  자기가 책임졌던 자기도, 자기가 책임졌던 생명도 다 내어 주님에게 맡기는 이  일은 자기 생명 내놓는 일인데, 이 일을 단번에 하려고 하니까 믿는 사람들이  이해가 잘 안 되고 또 너무 억세고 너무 여물어서 이렇게 소화하기 안 되니까  공연히 이렇게 기독교 뭐 세상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도덕주의, 기독교  가정주의, 기독교 정치주의, 기독교 성공주의, 기독교 신유주의 별별 일들을  하면서 빙빙 이렇게 돌고 있지마는 마지막에 우리의 구원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 자기요,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 자기요, 영원한 생명을 반대하는 것이 이  육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은 뭐인고 하니 하나님하고 딱 결합되는 것인데, 이  결합이 되는 것은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이 죽음이라는 자한테 종 되어 있는  여기에서 완전히 생명을 내놔야 주님과 결합이 되는 법이지 이거 내놓기 전에는  결합이 안됩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이끌리든지 저러든지 세월만 지내 보내지 마지막에는 네가  주님이냐 네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또 하나님과 결합이냐 네 육의 생명이냐. 네  생명보다 하나님과 결합을 더 중하게 여겨서 이것을 취하면 취한 것이지 네  생명도 하나님과 결합도 두 가지 취할 수는 없다 하는 이것이 솔직한 말입니다.

솔직한 말인데 공연히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빙빙 돌아서 귀한 세월만  허송합니다.

 이런데 오전에 설교가 꼭 바른 설교입니다. 어쨌든지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성령이 임하셔서 내가 완전히 성령의 것이 되어져야 되지, 내가 성령의  것이 되어지려면 첫째는 나를 부인해야 되고, 또 성령의 것이 되어져서  하늘나라를 건설하려면 세상 나라를 부인해야 되고, 해야 되는 것인데 이것 안  하고는 이 나라가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전에 설교 마치고 가서 시계가, 시간이 어떤고 싶어서 시간을 맞춰 보려고  기독교 방송을 틀면서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라디오 들으니까 그때 마침 여수  반란사건 때에 손양원목사님의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지금 잡혀 가지고 심문을  당하고 순교 당하는 그 장면 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나와서 들을 때에, 참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씩씩하게 언행심사를 한 것으로  그렇게 나타나 있는데 실상은 그렇게 됐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기독자들을, 기독교 목사들을 잡아다가 신문하고  고문할 때에 그 목사들이 모두 기를 펴지를 못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이것  때문에 그들에게 아부하고 아첨하고 발발 떠는 것이,  그것이 참 척 부인하면 그만 평안하게 기독자로서 빛나게 씩씩하게 빛나는 생활  할 것인데 거기에서도 자기 생명을 내놓지 못한 그 한 점에서 전체가 다 공포와  비겁이요 지옥이요 고통이요 또 천물이요 너무 참 불쌍하고 가련한 자가 되어서  답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을 제가 보면서, 참 인생은 어리석다. 공연히 기독교에서 그만 바른 길로  예수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대로 자기 부인해라,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나 따라 오지 못한다.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자는 구원하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지마는 천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들의 생명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너희들에게 머리털까지 세신다. 몸은 죽여도 그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영혼은  우리의 심령 말합니다. 심령이야 저거가 붙들어 맬 수가 있어야지. 심령에 칼로  찌른다고 찔립니까. 우리 마음이 칼로 찌른다고 찔립니까, 어디.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씀하신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될 터인데 그저 주저 주저하고 세월만  보내고 길 아닌 길을 우리가 가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그 모든 길은 자기를 부인한 자가 걸어 가야 되는  걸음이오. 자기를 부인한 자들이 그 길을 걸어야 그것이 구원이 되어지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옛사람인데 그것이 생활하는 것이 새사람에게 무슨 구원이  되겠습니까 주님으로 인한 진리대로 고난받는 그것이 자기의 양식이요, 자기의  생애인데, 그것이 십자가인데, 이것을 자기의 생활로 삼은 지 후에 이것 저것 다  있는 것이지,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통과한 넘어 그 생활을 통과하지 않고  옛사람으로 있으면서 그 생활을 하게 하기 때문에 이것은 다 미혹 주는 것이요,  이거는 어지럽히는 것이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오늘 재삼 느꼈습니다.

 우리는 어쨌든지 우리 구원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면 안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은 나에게 왕 노릇 하려고 오는 성령이지 내 심부름꾼 하려고 오는 성령은  아닙니다. 내가 그분에게 복종해야 그분이 내게 역사하지 내 심부름으로 나를  돕는 역사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나를 부인하고 내가 그분에게 양보해서 자기를 비어,  자기를 비어 그에게 복종하게 된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종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 될 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었고 종의  형상을 가져 피조물 같이, 창조주가 피조물같이 되어져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기 때문에 성공했다. 이 마음을 품어야 된다.

 이러니까 어쨌든지 우리 기독자들은 땅에 있는 소망을 버려야 예수 믿는 이 첫  발자욱을 떼어 놓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소망을 버리는 것, 땅에 있는 소망을  버리지 않으면 땅에 있는 소망이 하늘의 소망을 방해를 합니다.

 땅에 있는 소망을 버리고 하늘의 소망만 자기 소망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땅엣 것을 주든지 말든지,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주었던  것을 가져가시든지 또 많이 주든지 그것은 나 할 것이 아니라. 오면 오고 가면  가고, 오면 온 대로 가면 간 대로 다만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는 소망이라,  이거 확정을 지워야 비로소 구원의 첫 발자욱을 떼어 놓는 것이고,  그 다음에 둘째 발자욱은 자기의 몸과 생명을 완전히 주님에게 맡겨서 살든지  죽든지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생명은 당신이 뭐 몇십 년 몇백 년 연장을  시키든지 당장 오늘로 끝내든지 당신에게 맡기고 이 생명은 나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완전히 맡겼습니다. 내 몸도 맡겼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하여 이것을 완전히 부인해서 이것을 내어 놓고라야 하나님이 내  주가 되셔 가지고 내게 역사 할 수가 있고, 땅에 있는 소망을 내어 놔야 하늘의  소망에 이루어 갈 수 있는 이거 솔직한 진리입니다. 이거 에누리없는 진리입니다.

그저 빙빙 돌고 여러 가지 말하는 것을 다 포기해야 됩니다.

 이 성경에는 그러고 난 다음에, 그러고 나서 네가 진실해라, 네가 거룩하라, 네가  의로워라 옛사람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 의로운 것이 뭐 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 진실한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러니까 신구약 성경에 자기 부인하고 세상 부인하고 주님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자기가 되고 난 다음에 네가 진실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모든 것 다 하라. 이렇게 한 것인데. 왜 그렇게 한 것 다 의가  되고 다 영생이 된다 했는데. 이것이 자기 부인하기 전에는 이것은 옛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아닌데 우리는 이거 첫 자욱도  옮겨놓지도 않고 옛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이것을 가지고 방황 유리하면서  지나왔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령을 영접해야 되니, 성령 영접하는 데에도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바꿀 것. 그 바꾸는 데 있어서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이 안심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의식주라든지, 자기의 권세라든지, 무엇이라든지  이것은 주님이 주권하고 계시는 것인데, 우리가 이 신앙주의로 나아가면 주님께서  여러 배도 주시고 백 배도 주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게 주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구할 것이지  우리에게는 당신이 많은 것이 필요 있는 것, 적은 것이 필요 있는 것, 없는 것이  필요 있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구하지  말아라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의식주나 여기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완전히  주님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습니다. 왜. 내가 암만 여기 대해서 애를 써 봤자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 그렇게 많이 말해 왔고, 또  주님의 뜻대로 할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서 얼마든지 구원 이루기에  가장 적절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고, 또 우리의 목숨도 우리가 아낀다고  해서 얼마라도 더 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이  일각이라도 일찍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에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 11장  7절 이하에 보면, 증거를 마친 후에 죽는다 했습니다. 증거를 마친 후에 죽는다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죽는 그 시간까지 영원 전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예정해 놓으신 예정 순서가 있습니다. 이 순서를 다 끝내야 우리 생명이  끝나지 이것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우리 생명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끼고 전 인류가 우리 생명을 아낀다고 해 가지고 일각도 이 생명을  연장시키지도 못하고, 또 어떤 피조물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해도 일각도  일찍 죽도록 하지도 못한다고 성경에 말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이 말씀을 믿어서 모든 자기의 소유도 안심하고 주님에게 맡겨 놓을  수 있고, 자기의 몸과 생명도 주님에게 맡겨 놓을 수 있고, 주님의 뜻이면 밥도  먹고, 주님의 뜻이면 굶기도 하고, 주님의 뜻이면 취직도 하고, 주님의 뜻이면  시집도 장가도 가고, 또 주님의 뜻이면 이것 저것도 하고, 사는 것도 주님의  뜻대로 이것도 저것도 모든 것을 할 일이지 주님의 뜻을 어겨서 할 필요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목숨이나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모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맡아 주시겠다고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맡겨 놓을 수 있습니다.

 안 맡겨 봤자 제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맡겨 봤자 세상 마음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맡기면 세상은 당장 부술 것 같지마는 못 부숩니다. 안  맡기고 내가 알뜰히 보살피면 될 줄 알아도 보살펴 봤자 일각도 조금도 더  가감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말씀을 믿고 단정 지을 것은 아무래도 성령 영접하는 데에는  이것을 부인해야 된다. "너희 알 바 아니요" 하는 이 말씀대로 부인하고, 둘째는  너거 생명을 삼키려고 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오시기를 기다려라.

이것이 자기의 생사를 주님에게 맡겨 놓고, 자기의 목숨을 부인하고 목숨보다  성령의 임하심을 구하는 자라야 성령이 오셔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암만  성령이 좋지만 내 목숨보다 못합니다 하는 그자에게 성령이 와서 어떻게  일하겠습니까.

 뭐 우리가 공연히 갈래길로 사람들을 이리 저리 흩어 가지고 애만 먹였습니다.

나도 여러분들한테 애만 먹였습니다. 이 죄를 자복합니다. 부인하고 난 다음에  생활하는 것을 부인하기 전 생활, 이 생활함으로 부인이 될 줄로 아는 이런  생활을 했던 이런 미혹을 줬습니다.

 이러니까 그저 예수 믿는 사람이면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땅엣 것은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비용으로 이용물로 써서 없앨 세상이요, 하늘나라 소망이오.

 또 자기는 완전히 주의 것으로서 대속을 받아 주의 것 된 것이 참 자기지 주와  주의 도를 배격하는 자기는 자기 아닌 옛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도 완전히  부인해야 되고, 옛사람은 완전히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주님에게 소속한 자기로  살아야 되고, 생명도 주님에게 맡겨 놓고, 생사를 주님에게 맡겨 놓고 그저  주님과 나와의 결합되는 이것이 영생하는 생명이니까 이 생명만 취하기 위해서  가야 되지, 둘을 거머쥐고, 육의 생명도 붙들고 하나님과 결합된 이 생명도  붙들고, 이 세상도 붙들고 천국도 붙들고 이 둘을 붙들고 이러니까 제 딴에는 둘  다 붙들고 가는 줄 알았지마는 마지막에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는  놓고 하나만 취하라 할 때에는 천국 놓고 주님 놓고 이것을 취했다가 또 그  이튿날 새로 붙잡고 이것이 항상 되풀이 구원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은 다  헛일입니다.

 그런고로 성령이 임했을 때에 비로소 주의 형상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니까  그만 갈래길로 이렇게 미혹의 길로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이 시간 단정을 합시다.

내가 하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 맡겨. 굶기든지 먹이든지  입히든지 벗기든지 당신에게 완전히 맡길 것. 내 육의 생명도 몸도 당신에게  완전히 맡길 것. 당신에게 맡기는 것이 영감과 진리대로 세상 것을 취급하는 것이  당신에게 맡기는 것이요, 당신에게 맡기지 않는 것은 이것 때문에 진리와 영감에  배치되어도 배치되는 방법으로 이것을 취급하는 것이 이것이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몸도 생명도 그런 것입니다.

 주님에게 맡긴 것은 주의 뜻대로 하게 맡기는 것이니까 주의 뜻대로 하는 것이  주님이 내게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는 그대로 하는 것은 당신 뜻대로 하는  것이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내 세상이나 내 몸이나 생명이나  주님의 진리대로 하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신에게 맡겨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당신에게 맡겨 놓고 나 할 일은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내 주인이 되셔  가지고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여 사시도록, 나는 하늘나라를 건설하도록,  이것만 욕망합니다. 이것만 욕망하고, 자 내 심신, 나를 주님에게 다 맡겨 놓고,  내 세상을 주님에게 다 맡겨 놓고, 주님으로 살고 하늘나라 건설하려는 이 목적  이것을 위해서 하는 일은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 일입니다. 주님 시키시는  것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뭐. 주님 시키시는 대로 세상 일, 세상에 있는 것, 일,  자기 일에, 자기에게 대한 일, 내나 주님의 시키시는 대로 한다고 해서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데 주님이 뭐 시키시느냐. 네게 대해서는 이리라 저래라, 네  목숨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네 소유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네 지위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네 사업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내나 그분에게 다  맡겨 놓고 그분이 시키시는데, 내나 그 일 시켰습니다. 그 일 시키시면 그 일을  시키시는데 내 욕망은 주님과 하늘나라를 바라서 그분의 시키시는 대로 내가  합니다.

 또 그분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제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자기 몸과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고 일하면 것 합니까. 내나 세상 생활합니다. 내나 세상 생활 하요.

맡겨도 세상 생활, 안 맡기고 제가 책임져도 세상 생활. 내나 세상에서 밥 먹고  옷 입고 살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생활이오, 같은 생활.

 이런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요.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도 저는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다 맡겨 놓고 주님과 하늘나라만  욕망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야 너 뭐하노. 주님을 내 주로  모셔서, 주님을 내 주님으로 주인으로 모셔서 주님으로 살려고 한다. 너 뭣하고  있노. 하늘나라 건설하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뭐 네가 지금 일하면서 뭐 주님으로 살고 하늘나라를  건설해. 아니 나는 그거 안 한다. 주님으로 살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것 이것만  나 한다. 너는, 너는 뭐하노. 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나는 지금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내 몸과 생명 내가 지금 살려고, 지금 나 살려고 지금 하고 있다.

그것이나 그것이나 꼭 같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데 근본이 다르고 목적이  다릅니다.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부인하는 것, 내가 이것을 바랐던  것을 포기하고 이것은 주님에게 다 맡겨 버리는 것. 내가 수고하던 것을, 내가  무거운 짐 졌던 것을 주님에게 다 맡겨 버리는 것. 내 목숨과 내 몸에 모든, 내게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책임졌던 것. 지도 못할 것 책임졌던 것 이것 다 이제는  주님에게 맡겨 버리는 것, 맡겨 버리는 것. 내가 책임졌던 것을 포기하는 것. 나는  포기하는 것, 당신에게 맡겨 버리는 것.

 한 자리에서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는데, 한 자리에 같이 누워 자고 있는데, 한  공장에서 둘이 일하고 있는데 하나는 위엣 것 하나님과 하늘나라만 소망해서  그를 취하느라고 지금, 그를 취하느라고 그것 마련하느라고 그 자리에 있고,  하나는 세상과 자기 마련하느라고 그 자리 있고, 둘이 한자리 똑 같이 일하는데,  이런데 하나는 생명에 속했기 때문에 이는 구원이 됐고 하나는 멸망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악령이 우리를 꾀워서,  "이것은 너희 알 바 아니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했는데 이 두 가지인데,  예루살렘에서 열흘 동안 기도하는 그 방편 우리가 가져야 되고 또 주님이  포기하라 하는 것 포기해야 되고, 이러면 성령의 권능 오고, 성령의 권능 오면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데 예수님의 형상을 어디서 입는고. 밥하면서 입지,  공장에서 일 하면서 입지, 시집가면서 입지, 장가가면서 입지, 가정 생활하면서  입지, 부부 생활하면서 입지, 정치하면서 입지, 이런 저런 모든 활동하면서 입지,  사회 생활 하면서 입지.

 이러니까 이렇게 성령의 권능 얻어 가지고 별개 생활하는 것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 얻어 가지고 내나 그 자리 그 생활하는데, 이는 산 생활이요 이는 하늘에  속한 생활이요 영생이요, 그 자리에서 하는데 하나는 영멸이요 사망이요 땅에  속한 생활이요 옛사람의 생활이오.

 하나는 새사람의 생활이요 하나님이 주장해 사는 생활이요, 하나는 마귀가  주장해서 하는 생활이니, 우리가 내나 땅에 있는 그 생활 할 수 있는데 이것  부인하고 내어 놓지 못할 것 없고, 또 내어 놓는다고 해서 일각도 일찍 없어지는  것 아니고, 또 조그만한 소량이라도 감소되는 것 아니고, 또 전적으로 매어  달린다고 해서 일각이라도 더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소유도 더해지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귀라는 놈이 꼬아 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어리석게 만들어  가지고 이렇습니다.

 이러니까 이 시간에 우리는 완전히 이 두 가지를 부인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두 가지 부인하지 않은 신앙생활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끌어 가지고 해도 그  관문을 통과하고 난 다음이라야 구원이 되지, 되기 전에는, 통과하기 전에는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이 안 되나 이것을 그리 건너가라 하다가 안 건너가면 도망쳐 버릴  터이니까 공연히 이리 저리 붙들어서 머뭇거리는 것뿐이지 아무래도 건너가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 구원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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