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5 12:27
성도의 재세의 목적
1981. 3. 8. 주일오후
본문: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믿는 사람은 신구약 성경의 증거를 받아야 하고, 신구약 성경의 증거를 받아야 하고, 또 성령의 감화 감동의 증거를 받아야 하고, 경험적 증거와 체험적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성경이 증거해 주는 것을 모릅니다.
순전히 속이고 속는 반거짓말 인간 두뇌에서 나온 말만 읽고 듣고 접하지 택한 자들에게 구비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지식은 성경뿐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세상에 어떻게 광문 다학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자타를 속이고 속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장애가 있어도 그것을 물리치고 성경 상고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옳고 바르게 가르쳐 줍니다. 또 양심을 쓸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세밀하고 똑똑하게 바로 가르쳐 주십니다. 또 이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려주신 말씀대로 실행해 보면 그 경험에서 더욱 확실히 알게 됩니다.
또 자기가 친히 말씀대로 하면 체험에서 잘 알게 됩니다.
이래서 여게 말한 대로 세상이 좋지마는 어서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사람이 되고 또 모든 가까운 사람도 귀하고 자기도 귀하지마는 모든 인간보다 주님이 자기에게 더욱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보다 주를 의지하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의논하는 것보다 주님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어떤 신실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주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피조물보다 무한히 나은 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막바로 보이는 피조물을 두고 그것보다 주님을 더 바라보고 의지해서 가까이 할 자가 없고 또 천국이 확실히 나은 이 탁월성을 알기 전에는 암만 말해도 그의 애착이나 미련은 땅에서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여게 말씀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같이 있기를 원하는 이 마음이 담대히 있다 그말은 죽는 것도 상관없고, 가난한 것도 상관없고, 병드는 것도 상관없고, 뭐 세상이 어떤 걸 가지고서 위협을 줘도 그것 조금도 문제되지 안하고, 또 어떤 좋고 아름다운 걸 가지고 유혹한다 할지라도 탐낼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그 목적이 떠나든지 거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는 그것이 일편단심이요, 또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을 존귀케 하려는 그것이 일편단심이요, 어느모로 어떻게 하여서라도 주님에게 영광 돌리는 그것만을 소원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영감에서 세상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과, 어느 정도 견고성을 가진 것과, 또 장구성을 가진 것을 아는 사람은 땅에 전적 소망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도 허무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자기가 상대하는 것은 주님만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주가 실력이 구비해도 호주에게 아까운 가정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겉은 맡기는듯 해도 속으로는 아무래도 주님이 우리 가정을 맡아주셔야 되겠습니다.라고 그는 시종이 거기에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아내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떠들어 쌓아도 성경을 아는 사람은 거게다가 기울이지를 않습니다. ‘예예’ 해도 ‘주님이 우리 부부도 이렇게 다정한 것이 계속되도록 장구하도록 해 줘야 되지 주님이 안 해 주면 그까짓 것 바람 앞에 등불 모양으로 시간을 두고서 변하는 것이니 정말로 내가 주님 인간을 의지합니까? 바라봅니까? 인간을 믿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하는 것 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그것이고 주님을 존귀케 하는 일이 그것이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에 단 일도 쓴 일도, 지루한 일도 시원한 일도, 원수도 가족도 사랑하고 위하고 하는 것이지 주님 떠나서는 모두가 다 사망뿐인 줄 알기 때문에 당신에게만 소망을 두고 당신 위해서 빛나는 부부로, 당신 위해서 빛나는 가정으로, 당신 위해서 직장에 빛난 생활로, 당신 위해서 사회에 빛나는 생활로 이렇게 하는 것이지 당신 없으면 영원히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 성경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왜? 아무런 그것이 생명에 대해서 아무 권리가 없지, 시간에 대해서 권리가 없지, 공간에 대해서 권리가 없지, 금방 아주 펄펄 뛰는 고기 같애도 금방 썩 늘어지고 뻐드러지니 아무것도 의지하고 볼 것이 없다 그거요.
이런고로 우리는 한 시간이라도 일찍 하늘나라와 세상과 비교해서 가치를 논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세상과 천국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천국을 비추어서 판단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세상과 천국을 비판하고 평가해야 되고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이신 주님과 이렇게 비교해서 비판하고 평가해서 정상적인 정가와 정평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아직까지도 그걸 가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천국을 말하나 실은 애착과 미련과 욕망은 땅에 있어 땅에서는 천년 만년 돼도 떠나기 싫고 ‘떠나면 부득이 하늘나라 가니까 안 떠날 수 있으면 안 떠나는 것을 취하지마는 떠나게 되니 그 나라를 바라보자.’ 하는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건 천국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천국을 위해서 세상을 투자하고 비용으로 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자기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가 주님의 것이 되어져야 이것이 영생인 것을, 자기보다 모든 피조물보다 주님이 크신 분이시니 내가 그에게 속하고 그에게 필요 있고 그를 위하는 자가 되어지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크고 영화로운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주를 위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나 항상 욕망은 땅에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하지마는 실은 자기를 의지하고 더 바라보고 자기를 더 믿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이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성경 읽어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양심을 써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실천 실행해서 경험 체험해 가지고 천국은 세상보다 탁월한 것과 주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하신 것을 자기가 확정지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땅에 있는 것도 하늘나라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마치 물 속에 든 그 보자기가 좋을 것 없지마는 그 답답한 숨에 고통이 있지마는, 그 깊은 탄광에 광부가 고통이 있지마는 밖에 나와 가지고 가족끼리 살 욕망 때문에 그 고통을 겪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같이 영생할 이 재미로 땅위에서 이런 애로 저런 애로의 처세를 하는 것이지 세상만 보고는 ‘참 하늘나라 두고 살 맛이 없다’ 하는 그 사람이 된 것이 그것이 천국과 주님을 바로 안 사람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세상에 있든지 “떠나든지” 무궁세계에 가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뭣 때문에? “이는”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땅위에 사는 목적이 오전에 말한 대로 세 가지 이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그가 무엇을 해서 ‘세상에 영광 있는 사람이 되겠다. 존귀한 사람이 되겠다. 권세 있는 사람이 되겠다.’ 다 어리석은 욕심입니다.
제가 웅천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러 가니까 거게 줄언이 하나 써 있는데 보니까 커다란 글씨로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글이 쓰였어. 그래 내가 깜짝 놀라서 ‘이 글을 누가 썼느냐?’ 이래 물으니까 `예, 주기철 목사님이이 교회에 어릴 때부터 여게서 자라 가지고 나간 분인데 그분이 써놓은 평생 그분의 소원의 표어입니다.’ 그래.이러니까 그때 그 주씨들이 사람이 나서 그때에 그 동창생으로서 자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보니까 그때 보니까 뭐 장관으로 있는 사람 대장으로 있는 사람 다 있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서 죽겠노라 하는 그 소원을 가졌기 때문에 그분은 주기철 목사가 됐습니다.
벌써 그분들 다 지나가 버렸소. 다 죽었소. 다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평가할 때에 어느 사람의 가치가 큰지? 세상에서 위대해졌지마는 그 사람들은 다 자타를 속인 일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어쩌든지 성경 읽고, 성경을 읽어야 하늘나라와 주님을 소개받습니다. 성경이 하늘나라와 주님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성신의 감동이면 더 밝히 우리에게 소개를 해 줍니다. 우리가 그대로 따라서 행해 보면, 베드로가 ‘그물 던지라’ 할 때는 비웃었지마는 그물을 던져 가지고 그 결과를 보고 난 다음에는 꺼꾸러졌습니다.
성령과 성경에서 천국과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소개받고 그분 인도하심을 따라서 한 자욱 두 자욱 걸어보면 과연 천국이 어떠하며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알면 그 앞에 소유와 몸과 생명을 기울여 바치지 아니할 자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뭣 때문에 장사꾼이 백 원 들여 가지고서 억만 원을 버는데 백 원 투자 안 할 자가 어데 있습니까, 있기를?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의지가 굳다.’ 아니오. 의지 굳은 것 아니오. 다 욕심입니다. ‘저 사람은 참 미련한 등신이네. 저렇게 손해보는 일을 하네.’ 아니오. 등신이 아니오.
욕심이오. ‘저 사람은 창수도 없는 사람인가 참 속도 없는 사람이다.’ 속이 없는 것 아닙니다. 욕심이오. ‘저 사람은 마음이 관대하다.’ 관대한 것 아니오. 욕심입니다.
하늘나라와 주님에게 대한 이 성령의 욕심이 거기 욕심으로 일합니다. 욕심이오.
돈 욕심 내는 사람은 예의도 체면도 수고도 죽는 것도 가리지 않고 돈이라면 달라드는 것처럼 하늘나라와 주님이 어떤 분인 것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들은 죽는 것 사는 것 상관 없습니다.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만 원하노라” 그런고로 우리가 첫째로 노력할 것은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상고해 가지고 예수 믿는 게 무엇인지, 천국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구속하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겠고, 또 믿는 자의 소망이 어떠한 것도 알아야 되겠고, 우리를 부르신 그분이 어떠한 분인 것도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믿는 것은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는 것, 양심을 써 가지고서 성경의 도리를 명상하는 것, 묵상하는 것, 자기가 알아보기 위해서 그대로 실행 실천해 보는 것. 성경 지식, 영감 지식, 경험의 지식 체험의 지식 이 지식으로 생겨진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은 주를 위해서 사는 것 죽는 것 어렵지 않는 것입니다.
이래서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둔다” 했습니다. 아는 자는 신앙 생활이 피곤치 않습니다. 돈을 아는 사람은 대목장 수고가 피곤치 않는 것처럼 기독자의 구원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걸음이 피곤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죽고 사는 것이 성경에 있는데, 죽는 것을 면하고 사는 것이 영감에 있는데, 내가 한 자욱 한 자욱 현실에서 사는 그 생애에 있는데, 이것이 우리 생활인데 이것은 모르고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욕심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서 이 생활 하다가 죽는 것은 기본구원뿐이지 택자라도 건설구원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선지 사도들도, 지금도 남녀 성도들이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애끼지 않고 복음 위해서 살려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지지 아니하는 지방에서는 복음 위해서 살기 쉬운 미개국으로 야만국으로 그런 곳을 찾아 가는 것이 그것이 필연성인 것입니다.
공산치하에 있는 루마니아 나라에 기독 청년 이십 명이 성경 이만 권을 모르게 가지고 들어가서 복음 전하려고 들어가다가 붙들려서 이십 명이 맞아서 하나는 직사하고 나머지 열아홉 명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게 신앙의 자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매일 몇 번씩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루마니아에 그들의 피를 신원해 줘서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거기 가면 맞아 죽을 줄 알고 한데 뭐하려고 들어갔겠습니까? 그들은 하늘나라를 똑똑히 발견했소. 주님을 똑똑히 발견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본능이 안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공연히 위로를 받고 어리석게 만족하지 말고 비교해서 나는 세상이 더 귀중한지 하늘나라가 귀중한지, 내 욕심과 소원은 어데 있는지? 피조물을 더 귀해서 이걸 의지하는지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지 우리가 똑똑히 시험해 가지고 어떤 자인 것을 판정지우고 자기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오전에 증거한 것처럼 우리 기독자의 목적은 이 세 가지입니다. 죽음에서도 이 세 가지 삶에서도 이 세 가지, 성공한 그 시간에도 이 세 가지 실패한 그 시간에도 세 가지, 실패나 성공이나 이것은 지나가는 순서입니다. 다만 내가 이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 처소를 준 것뿐입니다.
고문에서도 이 세 가지 이룰 수 있고 존영에서도 이 세 가지 이룰 수 있고 어데서든지 이 세 가지를 이루었으면 성공이요 실패가 아니요, 만일 죽음에서 살아나왔다 할지라도 이 세 가지 손해갔으면 그 사람은 산 것이 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소원하고, 또 기도로 다지고, 또 명상으로 다지고, 오든지 가든지, 바쁘든지 한가하든지 어데서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이 세 가지를 우리는 항상 사모해야 되겠고 놓지 말고 향해서 달려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을 가졌을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의 목적을 인정하십니다. ‘네가 옳은 목적을 가졌다. 네가 바른 목적을 가졌다.’ 목적에 대해서는 당신이 만족히 여기실 것이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하는 이 목적을 달성하는 방편은 무엇입니까? 방편은 오전에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마태복음 25장에 오른편에 있는 그 의인들에게 말씀한 이것입니다.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한다고 했습니다. 보는 형제를 위하고 기쁘게 존귀케 귀히 여기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존귀케 귀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이렇게 제가 행동하는 것 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요 허위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어떻게 함으로 그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 저 사람이 믿는 예수 그는 참 존귀한 분이라.’ 이렇게 존귀케 하고 영광을 돌리고 귀중히 여겨서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하는 이 방편 외에 제가 굴에 들어앉아서 밀실에 들어앉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평생 불러도 소용 없습니다. 주님을 제가 아무리 존귀케 여기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다. 소자 하나에게 행치 아니한 나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여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워주었고, 벗었을 때 입혀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대접했고, 병들었을 때에 방문했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했다.’ 이 여섯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의인들이 ‘언제 우리가 그랬습니까?’ 그들이 물을 때에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 악인들이 ‘언제 우리가 주님에게 그렇게 냉대했습디까?' ‘소자 하나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 나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라.’의인들이 왜 이걸 모르겠습니까? 의인들의 그 영혼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땅위에서 모두 다 형제들에게 하는 것이 주를 위해서 한 것인 줄 알았지마는 가 가지고 볼 때에, 형제에게 하는 것이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인 줄 알기는 알았지마는 그렇게 형제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막바로 한 것이 됐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 놀라서 다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전도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 심령이 굶주렸을 때에, 그가 심령이 목마를 때에, 그 심령이 참 헐벗고 있을 때에, 그 심령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갇혔을 때에 그걸 위해서 심방하고 전도하고 방문하고 위해서 기도하고,몸으로 하다가, 돈으로 하다가, 자기의 권세를 가지고 하다가, 자기 지위 가지고 하다가, 자기의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기능이나 언재나 지식이나 돈이나 건강이나 부지런이나 명예나 모든 것 다 해 가지고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영을 구원하는 것은 암만 해도 지내침이 없으나 육을 구원하는 것은 가다보면 구원 안 할 것을 구원하는 것이 되어지기도 하고, 잠깐 배고픈 데에서 오히려 겸손을 배울 수 있는데 내가 그만 배불리 해 줘서 그 사람 겸손 배울 기회를 잊어버리게 하고 오히려 교만이 꺾어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도 있기 때문에 육을 구원하는 일은 참 구원하기가 힘이 들고 영을 구원하는 것은 마음놓고 할 수 있습니다.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육을 구원하는 것을 잘못하면 지나치게 넘어가서 안 할 걸 해서 도리어 한 것이 그 사람에게 손해보이는 일이 되게 돼. 그러나 이것 때문에 못 하는 것이지 자기의 있는 것을 두고서 육을 구원할 수 있는데 구원해야 될 자에게 구원하지 못하는 그것은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변화를 시켜야 할 그 요소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형제에게, 주님을 존귀케 하기 위해서 인류에게,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인류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우리는 복음을 들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하는 이 일이 되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되는, 존귀케 하는 일이 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는 인간 구원, 인간의 영을 구원하고 인간의 육을 구원하고, 천주교에서는 육을 구원하는 것으로 치우쳐서 폐단이 되고 개혁교는 영을 구원하는 데로 치우쳐서 폐단이 되니 영도 육도 한꺼번에 이렇게 구원하는 이 일,이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작은 것을 크게, 적은 것을 많게, 약한 것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자에게 우리가 구하고,구할 때에 당신이 보니 돈을 주면 돈 가지고 제 욕심대로 온갖 죄 다 짓겠고, 건강 주면 건강 가지고 제 욕심대로 온갖 더러운 죄 다 짓겠고, 권세 주면 그 권세 가지고 제 욕심대로 남용해서 옆에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겠고, 사업에 성공을 주면 배짱 나서 제 욕심대로 이것은 내것이기 때문에 저 위해서는 모든 것 다 애끼지 않고 쓰고 주님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하기 위해서 형제를 영육에 구원하는 이 일에 대해서는 쓰지 안하는 그런 악한 자에게 하나님이 줄 수가 없지요. 그 악한 자에게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살펴서 주님은 이렇게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 목적을 위해서 인간에게 대해서 이 여섯 가지를 하려고 ‘돈을 주십시오. 권세를 주십시오. 지능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 구변이 없으니까 구변을 주십시오. 영감의 영능을 주십시오.’ 할 때에 당신은 주시기를 원하고 원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달라고 하는데 왜 안 줍니까? 안 주는 것은 안 주는 것이 주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안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안 주시는 것이 주시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그것 받아 가지고 우리가 악용해서 죄짓고 자타를 망치면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이 낫지.
우리가 정말로 그런 것을 회개하고 당신이 나에게 건강 줄 때에 이 건강 가지고 과거에 내가 약할 때와 같이 내게 대해서는 그렇게 하고 이 건강 가지고 형제를 구원하는데 이 건강 쓰고,돈을 주면 과거에 돈 없을 때에 생활 같은 내 생활은 그래 하고 이 돈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는 데 쓰고,
지능을 권세를 모든 것을 주실 때에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배고픈 자에게, 목마른 자에게, 벗은 자에게, 나그네된 자에게, 병든 자에게, 옥에 갇힌 자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존귀케 하기 위해서 이웃에게 이 일을 베풀기 위해서 ‘주여, 돈을 주시옵소서. 지위를 주시옵소서. 권세를 주옵소서. 건강을 주옵소서. 지능을 주옵소서. 영능을 주옵소서. 언재를 주옵소서.’ 하는데 왜 안 주겠습니까?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는 연고요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대로 잘못 쓸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안하니까 주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에 주인이십니다.! 우리 위해서 피까지 흘려주신 주님이십니다.! 왜 안 주시겠습니까? 윌리암 부으드는 그는 돈 한푼 없이 나섰지마는 ‘나는 돈 가지고 형제를 구원하는 복음 위해서 살기 위해서 나섭니다.’ 할 때 다른 사람이 ‘네가 돈 한푼도 없이 나서 가지고 뭘하려고 하느냐?’ `주님으로서 내 전부 삼는다.’ 하고 나섰는데 돈 한푼 없지만 그 사람은 이제까지도 역사에 그 사람만치 물질을 가지고서 복음 운동 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왜 이렇게 빠짝 말라 있습니까? 우리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 목적을 가졌을지라도 이 목적을 달성하는 방편을 우리가 잘못 썼기 때문에, 목적과 방편이 옳았으면 우리가 당신에게 구할 때에 당신 보시기에 우리에게 버려야 될 것 있고 회개해야 될 것 있는데 회개치 않으니까 당신이 줄 수 없는 것 애터지는 것뿐이지.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일어섭시다! 달아납시다! 우리의 시간 얼마 남지 안했습니다. 짧은 시간을 우리는 달음질해야 합니다. 누구야 뭐라 하든지 그야 세상을 취하든지 말든지 우리의 갈 길은 따로 있습니다.
‘주여, 건강을 주옵소서. 돈을 주옵소서. 권세를 주옵소서. 지위를 주옵소서.
지혜와 총명을 주옵소서. 나에게 사랑을 주옵소서.
믿음을 주옵소서.’ 당신에게 바른 목적 가지고 바른 방편으로 쓰려고 구할 때에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