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세 가지 생애

 

1981. 3. 6. 밤 (금)

 

본문:시편 1편 1절∼3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끝에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믿는 사람의 하는 일은, 참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하는 일은 다 형통해지는 것입니다. 형통해진다는 것은 하나도  지장을 받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다 성공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잘못 형통의 표준을 정한 그것 때문에 믿는 사람의 하는 일이 형통치  아니한 것이 있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지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형통합니다. 하나도 막히지 아니하고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달통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하는 일에 대해서 사울 왕이 방해를 심히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방해가 다윗 왕의 그 가는 길을 막지를 못했습니다.

또 요셉이가 가는 길을 형제들도 방해했고, 보디발도 종으로 사 가지고 가서  방해했고, 그 집에서도 방해했고, 감옥에서도 방해하고 온갖 애로들이  있었지마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인도해서 애굽 나라 총리대신이 되는 그 자리까지  요셉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는 그 길을 아무도 방해 못 했습니다.

그대로 형통했습니다.

또 다니엘을 통해서 파사 나라에 하나님이 영광이 충만케 하려 하시는 다니엘의  그 맡은 사명의 그 길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전국이 달라 들었지마는  방해를 못 했고 사자구덩이에 집어넣었지마는 그 길은 방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선지 사도들의 가는 길이 다 이러했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크게  방해하는 것 같았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 길을 돕는 일이 됐지 방해하는 일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가는 길에는 사람의 방해도 있고, 짐승의 방해도 있고, 본국인의 방해도 있고,  이방인의 방해도 있고, 광야의 방해도 있고, 민족의 방해도 있고, 모든  이종교들의 방해도 있고, 참 그 방해 중에 하나도 인간의 힘으로서는 뚫고 나갈  수 없는 그런 어려움들이 총총 있었지마는 그 어려움들이 믿음의 사람들의 가는  그 길을 추호도 방해하지는 못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이 크게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길을 도왔고, 또 빠르게  만들었고, 더 힘있게 만들었고, 고귀하게 만들었지 그 길을 방해한 어느  피조물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안 됩니다.

어떤 자의 그 사욕적인, 사욕적인 그 걸음, 또 인본적인 그 걸음, 그런 걸음이  형통하다는 말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형통하다는 이 형통을 오해를 갖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게 다 형통타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데에, 그 사람이 참 복있고 가치 있는 그  걸음을 걸어가는 데에, 하나님과 피조물들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씌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걸어가는 이 걸음에 있어서 다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이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냐?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시는 요구가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그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그 명령을 다 완수할 수 있도록 되는 그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구원이 되고, 복이 되고, 승리가 되고, 성공이 되고, 모든  이웃에게 감사를 받을 수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친 은혜와 봉사를 베푼 일이  될 수 있는 그 길,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고 칭찬하실 수 있는 그 길, 다시  말하면 신앙 양심대로 걸어가는 그 길, 영감대로 걸어가는 그 길, 자기 진리의  길, 자기가 걸어가야 할 자기 길 그 길이 형통한 것을 말합니다. 이 길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을 기도하지 말라고 다리오 왕이 말할 때에 기도하면 사자굴에다가 넣어서  죽이겠다는 전국 결의, 이 결의가 있을 때에 만일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기도를 하겠다고 함으로  사자구덩이에 던지워진 것, 또 사자구덩이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구출해 내신 것,  그러므로 파사 나라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온 전국에  가득히 차게 된 일, 이런 것이 다 형통입니다.

그런고로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리로다” 하는 요 형통을 잘 깨달아야 됩니다.

요 형통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그 일이 형통한 형통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또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원수 중에 원수가 자기 욕심인데, 사욕인데, 사욕대로의  가는 그 사욕의 길이 형통한 것을 말한 것 아닙니다.

이는 참 영원히 가도 후회 없고 부끄럽지 않고 잘못됨이 없는, 그 사람으로서는  가장 옳은 길, 옳은 생활, 가치 있는 생활, 복 있는 생활, 영광 있는 생활 이  생활이 거침없이 형통하게 되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섭섭해하시는 그  길, 그 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 자타에게 손해가 될 일 그 일은 딱 막혀서 갈  수 없다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이 형통을 죄짓는 일이 형통해지고,  자기 욕심대로의 되는 일이 형통해지고, 자타를 해치는 그 일이 형통해지고,  후회할 일이 형통해지고 하면 그것이야 멸망이지 복될 게 뭐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것을 소원해야 되느냐? ‘하나님이여, 당신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은  내가 갈 수 없게 해 주시옵소서. 갈래야 갈 수 없도록 당신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 영원히 내가 후회될 일, 자타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그 해를 끼치는 일 이  일은 갈 수 없는 자 되도록 해 주옵소서. 어쩌든지 이 길을 막아서, 이 길을  가려 하면 참 가시로 담으로 막으시고 이런 것 저런 것이 다 막아서 갈 수 없는  내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불에다 넣어서 태워  죽이려고 하는 이런 것이 막아도 막히지 안하고 썩 지나갈 수 있는 이런 내 길이  되도록, 사자구덩이에 집어넣어서 사자밥이 되게 하겠다고 이렇게 막아도 막히지  안하고 그대로 화살처럼 일관으로 통과해서 지나갈 수 있는 이런 형통을 달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 돼야 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게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보면 그 사람은 망할 길은 어떻게 잘 열리는지? 망할 길은 잘 열립니다. 복 있는  길은 딱딱 막혀집니다. 그 사람 해치고 망칠 사람만 자꾸 가까이 옵니다. 그  사람 유익되게 할 사람은 가까이 오지를 못합니다. 그 사람 눈에는 유익될 것은  눈에 뜨이지 안하고 하필 그 사람에게 믿음에 손해갈 그런 일만 눈에 뜨이고  귀에 들려집니다. 그것 참 불행입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 형통한 축복.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 생활이 한 시간 가다가 중단되고, 하루 가다가  중단되고, 며칠 계속하다가 중단되고 이 일이 안 되어진 이것의 불행이라는  우리의 그 비참이라는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것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죄짓는 길, 멸망하는 길, 구원에 손해보는 길, 없어질 썩어지고  없어질 이 세상과 세상 것을 탐하고 취하는 그 길은 형통해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거룩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길은 형통하기를  원하는 것보다 이 길을 겁이 나 가지고서 이 길을 당하지 않고 일생 동안 자기의  사욕 인본의 길 세상만을 위해서 일생을 살 수 있는 그 길, 이 일이  형통해지기를 원하니까 얼마나 우리가 멸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습니까? 얼마나  그 사상이 비판이 평가가 얼마나 죽어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의인들이 걸어가는 그 십자가의 걸음을 다른 사람은 다  굴복하고 떠나는데 죽어도 그 길 걸어가고, 감옥에 가도 그 길을 걸어가고,  외로와도 그 길을 걸어가는 이 길을 보고서 미련한 길을 걸어간다, 말만 들어도  얘기만 들어도 무섭고 징그럽다, 그런 일 평생 닥치지 안했으면 좋겠다.

죽는 날까지 썩어지고 없어질, 천국을 모르고 주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살고  가는 그 길로 계속되기를, 땅의 것만 소망하고 소욕해도 그 일이 무사히  형통해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은 여게 대한 형통이라 하는 것도 그의 해석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있는 사람은 신앙 양심대로의 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영감대로 사는 이것이 형통해지고 아무것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다니엘만 갈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이  앞길이 형통해서 온 세계가 세상이 다 막아도 하나도 막히지 안하고 꿰뚫고  형통하게 이렇게 갈 수 있는 이런 생애를 가질 수 있는 우리들이며 또 우리의  소속과 구속의 배경이 되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형통한 것, 아무것에게도 제재 받지 안하고 그대로 바로  통과할 수 있는, 죽음에도 막히지 안하고, 어떤 권세에도 막히지 안하고, 어떤  아름다움에도 막히지 안하고, 어떤 귀한 것에도 막히지 안하고, 어떻게 재미있는  데도 막히지 안하고, 많은 사람들이 치켜올리는 명예에도 막히지 안하고,  압제에도 막히지 안하고, 감옥에도 막히지 안하고, 아무데도 막히지 안하고  우리가 신앙 양심대로 영감대로 하나님의 진리대로 이대로 형통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큰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다음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 이것 비유입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청청하고, 언제든지 생생하고, 언제든지 기쁘고, 언제든지 희망이  넘치고, 언제든지 담대하고, 언제든지 평안하고, 언제든지 즐겁고, 언제든지  힘있고, 신앙의 그 마음 작용인 마음 안에서 되는 신앙의 사상이나, 신앙의  용기나, 이 신앙의 욕망이나, 이 신앙의 열심이나, 이 신앙의 능력이 조금도  약해지지 안하고, 시들지 아니하고, 약해지지 안하고 이렇게 잎사귀가 청청한  것처럼 언제나 소망으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충만하고, 이 성령의 소욕으로, 돈  욕심내는 사람이 돈 욕심 내듯이 성령의 소욕으로 충만하고 든든한 배경을  가져서 온유하고 담대하고 또 진실하고 겸손하고 화평하고 인자하고 한 이 모든  신앙 행위가 시들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좀 더 새로와지고, 어제보다 오늘 더  새로와지고, 오늘보다 내일 더 새로와지고, 좀 더 새로와지고 새로와지고  청청하게 죽는 날까지 점점 새로와지는 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줍니다. 이 생활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데 믿는 사람들이 성경이 주신 이 표준은 이런 사람들인데 우리는 조그만한  어려움만 닥쳐도 형통치 못해서 거게 딱 걸려버리지, 좀 좋은 일만 닥쳐도 거게  걸리지, 거지로 살다가 돈이나 몇 억 가지면 그만 거게 떡 걸려 가지고서 시들어  죽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것이 좀 지위나 권세나 하나 얻어놓으면,  얻어놓으면 그만 딱 거게 딱 걸려버리지, 있으니까 걸리지, 있던 자가 훅 달아나  버리면 또 가난이 오니까 또 걸리지 이것은 촌보를 옮기지 못하는 그런 것이  오늘 믿는 신자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신앙 생활이 금방 청청한 것 같지마는 마치 꺾어다 심은 화초  모양으로 좀 있으면 시들시들하게 그만 곯아버리고 맙니다. 왜? 그것이 모두 다  죽음에서 나온 것이요, 저주에서 나온 것이요, 다 썩은 데서 나온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열심도 시들어지고, 기쁨도 시들어지고, 감사도  시들어지고 이것이 도무지 일관하지 못하는 그게 뭣이냐 하면 뿌럭지를 보면  내가 그게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교인들 접촉하면 기뻐하는 것도 참 탄식입니다. 저 사람이 저 기뻐하는  건 뭣 때문에 기뻐하는가? 너무 허무한 것 가지고 기뻐합니다. 허무한 것. 별  가치도 없는 것. 몇 시간 지나고 나면은 변동될 것.

그러기에 신앙의 사람들른 땅의 것을 인해서 기뻐하는 그것이 미치괭치 노릇  하는 것같이 생각이 돼지기 때문에 몰라서 뻐뜩 기뻐했다가 ‘허, 내가 이  기뻐하는 이것이 무슨 기쁨이냐? 그 기쁨이냐? 아이, 더럽다.’ 침을  뱉아버립니다. 힘을 냈던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된 것은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청청하다” 또 새 움 나고 또 자라고 한 것처럼 그의 모든 전생애가 마음의  움직임이나, 몸의 움직임이나, 정신의 움직임이나, 지식의 움직임이나 그 모든  것이 한번도 말라비틀어지지 안하고 쇠해지지 안하고 항상 청청하고 항상  새로워져.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인데 우리가 잘못되어서 우리 모든 신앙 행위가  시들어지고 낡아지고 곯아 말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생애에 이렇게 힘이라고 하는 것, 뭣이 기쁨이나 평안이나 담대나  즐거움이나 힘이나 욕망이나 이런 것이 참 시들지 아니할 그 성질에 속한  것들인지 금방 사람 하나만 변동돼도, 사람 하나만 변동돼도 변동될 것, 시세만  변동돼도 변동될 것, 정권만 변동돼도 변동될 것, 전쟁만 나도 변동될 것,  흉년만 들어도 변동될 것, 싸움만 한번 일어도 변동될 것, 어떤 사람이 한번  웃어만 안 줘도 변동될 것, 아, 더러워요.

어떤 것인지, 나는 과연 내 생애라 하는 생애가 어떤 것이 오고,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어느 사회, 어느 형편, 어느 처지가 와도 시들지 아니하고 곯지 안할  수 있는 이런 청청함에 속한 것인가 이것을 살펴서 자기를 확정지워야 할  것입니다.

참 성도의 생활은 환경이나 주위를 따라서 그 생애가 시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변동되지 않습니다. 같이 우는 자로 함께 우는 듯, 슬퍼하는 자로 함께 슬퍼하는  듯 해서 그렇지 그 속에는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물은 아무리 풍랑이 심해도 그  속에는 요동하지 않는 것처럼 믿는 사람의 속에는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대외 관계에 따라서 같이 이렇게 움직이지 안하면 너무 거게서 절단돼서 거리가  멀어서 연결이 끊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는 자로 함께 우는 듯이, 고난을 당하는  자로 함께 고난당하는 듯이 하는 것이지 그 속에 것은 요동치 않는 것이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 같다” 그러면 시절  좇아서 과실 맺는다 말은 이런 현실을 만나든지 저런 현실을 만나든지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그 현실마다 결과를 수입을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그 현실에서 자기의 구원을 이룬다 그말이오. 어떤 현실에서든지 그 현실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주님 대접할 것을 마련한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뭐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이 형통해질 때 그때 구원 이루고 그 생활이 사람 보기에  비참하다고 할 그때는 구원을 못 이루는 줄 압니까? 아니오.

형통할 때도 구원 이루고, 비참할 때도 구원 이루고, 이러기에 신앙의 사람은 이  세상 자기 현실이 천태만상으로 이렇게 변해져도 그 변해지는 천태만상의  변화되는 현실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 현실이 이용가치도 꼭  같고, 그 현실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수입도 꼭 같고, 그 현실을 귀중히 여기는  것도 꼭 같고, 그 현실에 대해서 보배로 여겨서 노력하는 것도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렇게  사는 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자, 어떤 현실에서라도 꼭 같은 수입을 본다. 어떻게 자기 현실이 변해 나가도  그의 신앙 생애는 항상 청청하고 새로와지지 조금도 시들어지지 않는다. 그의  가는 길은 죽음도 사자도 나라도 공산주의도 아무도 막지 못하고 그대로 일관돼  나간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생애인데, 이 세 가지. 이것이 우리의  생애인데 우리는 이 생애를 가지고 있는지? 이것을 가진 주인공이 되어 있는지?  우리가 이 세 가지를 못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살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질 수 있는, 누구든지 택한 자면 이 세 가지를 가질 수 있는 그  방편을 그 위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 세 가지를 소유할 수 있는 그 소유권자가  될 수 있는 방편을 그 위에 말해 놨습니다. 택함 입고 중생된 자라면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무식하든지 유식하든지, 병신이든지 건강하든지 간에 택함을 입고  중생된 사람이면 이 세 가지를 다 가질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형통하니까 세상을 이긴 사람입니다.

청청하니까 세상을 양식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세상을 우리의 밥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우리의 밥이라 했소. 어떤 것이 와도 이 사람이 먹고 사는 밥입니다.

이러니까 이 현실을 먹고 청청하게 자라고 저 현실을 먹고 청청하게 자라고,  이러니까 세상은 그의 식물이 되고, 그는 형통하니까 세상을 이겼어. 그는  시절을 좇아서 열매 맺었으니까 세상을 이용했습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자,  세상을 양식으로 먹는 자, 세상을 이기는 자 이것이 믿는 사람의 정상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고귀한 이 생애는 인간의 힘으로도 능으로 도 할 수 없는데 그  위에 되는 방편을 둘로 말해 놨습니다. 택한 자면 다 됩니다. 어떻게? 성령과  진리가 보증이 돼 있기 때문에 그 돕는 힘을 입어 가지고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사람을 삼가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람을 삼가는  것. 사람을 조심하는 것! 사람에게 대해서 조심할 줄 모르면 헛일입니다. 등을  톡톡 두드리면서 간을 내 먹는다 말 있습니다. 등치고 간 내 먹는다 그말이오.

등을 톡톡 두드리면 저를 사랑해 좋아 두드리는 줄 아는데 속으로는 간을 내  먹었다 그말이오. 그게 뭣이냐? 하나의 형용사입니다. 모형을 말하는 것이오.

아무리 내게 달콤한 사람이나 내게 있는 간보다도 더 보배로운 것을 삼키는 것이  인간일 수도 있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원수가 내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아무나따나, 우선 제 비위에 맞다고, 제 기분에 맞다고, 제 심령 풀이에 맞다고,  일시 제 사욕에 맞다고, 제 입장과 맞다고, 저를 동정한다고, 저를 위한다고  크게 주의 없이 사람을 접촉하면 멸망입니다.

인간 접촉에 영을 접촉하는 게 제일 첫째로 우리에게 어렵고 두려운 일이고  둘째는 인간 접촉인데 인간 접촉을 이것을 자기의 죽고 망하는 것이 여게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접촉하는 사람들은 멸망입니다. 돌이키기 전에는  멸망입니다.

번연히 멸망받을 그 접촉인 줄 알고도 말을 해 줘도 안 듣습니다.! 얼마든지  접촉을 해 보지! 일 년 이태 삼 년 사 년 허송세월하고 마지막에는 제가  일어설래야 일어서지 못합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그말이 사람 삼가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삼갈 것! 내 물욕에  맞다고, 내 정욕에 맞다고, 내 사업욕에 맞다고,  지방 정실의 사람이라고, 혈육 정실의 사람이라고, 동류 정실의 사람이라고,  자기 보고 웃어준다고, 자기를 귀하게 봐 준다고 정신 없이 사람 접촉하는 자는  이 세 가지 큰 길을 걸어가지 못합니다. 세상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양식으로 먹지 못합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양식으로 먹어 자라고 세상을 이용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 사람은 두 가지 중에 첫째가 사람을 삼갈 것. 사람을 삼갈 것.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 것. 사람은 삼가고  말씀은 떠나지 말 것.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소개받는  것입니다. 나는 모르는데 ‘야, 아무것이가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단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그 사람을 소개해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  대충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소개받는 것이오.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사람도 방해하고, 물건도 방해하고, 일도 방해하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부패성도 방해하고, 내 속에 있는 부패성도 방해하고, 악령도  방해하고 방해물이 많습니다.

이러기에 성경을 내가 읽으려고 할 때에 내가 미리 약속해 놓은 그 일을 내가  착각해 가지고 거기 대해서 대비가 없이 성경을 볼 때에 그 일이 닥치면 저는  성경 볼 자격이 없기 때문에 성경 덮어두고 그 일 봐야 됩니다. 그러나 내가  성경을 읽는데 내가 모르는 뜻밖의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방해할  때에는 내가 그걸 물리치고 냉정스럽게 물리치고 내가 볼 만치 보고 그 일을  접하고 그 사람을 접할 것입니다. 왜? 그보다 이게 더 크기 때문에.

 그보다 더 이게 크기 때문에. 악령은 기이한 장난을 합니다. 성경을 읽으려  하면,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이 저거 군병이오. 세상이 자기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성경 보지 못하게 하려고 의외의 일을 덜퍽덜퍽 갖다  붙입니다.

의외의 것이 왔으면 그것은 늘여 붙여도 됩니다. 늘여 붙여 둬야 됩니다. 두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읽을 만치 읽고 그다음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미리부터,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인데 제가 그것을 착각해서  모르고 성경 보려고 시작했으면 그 일이 닥쳤으면 제 실수니까 성경 볼 자격이  없어. 성경 두고서 그 일을 자기가 착수해야지.

이러니까 우리는 자타의 부패성을 이것을 배격해 가면서라야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모든 사람과 이 사물의 방해를 배격해 가면서라야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자기를 길들일 수 있는 제어할 수 있는 이 힘이라야 성경을 읽지 그리 안 하면  성경 못 읽습니다.

성경 읽는 것이 그렇게 저절로 되는 것이나 쉬운 것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에 이는 우리에게 제일 중요하고 필요하고 요긴한 하나님을 소개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 구원 도리인데 구원 도리를 소개받는 일인데 이 일이  적극적으로는 첫째되는 이 중요한 일인데 이것이 그렇게 쉽게 되리라  생각합니까?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려 할 때에 의외에 덜퍽덜퍽 닥치거든 그것이 악령이  역사하는 것이요 세상이 역사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성경을 읽고 그다음에 성경을 연구합니다. 성경을 연구한다 말은 성경을  한테 합했다가 나눴다가, 이 성경과 저 성경을 연합시켜 보고, 또 성경에 이런  인물을 저런 인물을,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뜻을, 저 사람에게  역사하는 뜻을, 이 시대에 저 시대에, 모든 것을 종합도 해 보고, 연결도 해  보고, 나눠도 보고, 비교도 해 보고 이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이것이 이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게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능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알맹이는 빼놓고 껍데기만 가지고 날뛰는 자요.

하나님을 찾노라고 하나님의 뜻을 찾노라고 성경을 가지고 이리 저리 자꾸  연구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게 성경 연구입니다.

찾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만나게 되면 그때에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이 나옵니다.

묵상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묵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만난 하나님으로 더불어 성경으로 교제하는 것이 이것이 기도입니다.

명상에서 묵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의 뜻을 만났습니다. 그럴 때에  ‘주여!’ 그럴 때에 자기의 주관의 힘이 아닌 힘도 나오고, 깨달음도 나오고,  각오도, 잘못도, 모든 것이 산, 회개도 산 회개, 간구도 산 간구, 감사도 산  감사, 이것이 기도 가운데 나오는 것이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제 사귀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그 사귐에서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시행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시행하는 것을 하나님 섬기는 일로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도 하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시행하는 그것이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끊쳐질 만한 그런 어려움이 있어도 끊쳐지지  안하고 계속 인내합니다. 계속 합니다. 계속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면 하나님 섬기던 일을  그만 중단해 버리는 것이오. 하나님 배반하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 그것이 성경 말씀대로 사는 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어떤 일이 와도  중단당하지 안하고 계속하는 그것이 내가 섬기는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섬기던  그 일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주님과 진리 때문에 내 소유나 몸이나 내게 대한 무슨 건강이나  생명이나 빼앗기게 되면, 손해가게 되면,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손해보는 것,  하나님과 진리에게 쓰여지는 것,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나  하나님과 진리에게 쓰여지는 것이나 이것이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내게 이것이,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 되어 있는 내게 있는 이것이 주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주의 것이 됩니다. 주의 것이 내게 있는 것이 내것이 주의 것 된  것만치 주의 것은 내것 됩니다.

이러다가 마지막에 주님과 진리 때문에 자기 생명이 끝나버렸으면, 순교를 해서  끝나버렸으면 자기에게 있는 전부는 다 주의 것이 완전히 돼 버렸습니다. 이미  법적으로 주의 것 되어 있는 것이 완전히 주의 것 됐소.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주의 것이 됐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모든 것은 내것 됐습니다.

사망의 것이 주의 것이 됐기 때문에 생명의 것이 됐기 때문에 전능자의 것이  됐기 때문에 완전자의 것이 됐기 때문에 거게는 사망이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하지 않고 이렇게 살다가 늙어서나 병들어서 죽었으면 나머지기  그것은 주의 것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주의 것이 주의 것 되지 못하고 썩는 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순교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하나님 소개받고, 성경으로 하나님 찾고, 성경으로 하나님  만나고, 성경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으로 하나님 섬기고, 성경으로 계속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것 되고, 성경으로 내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전부는 내것 되어 나는 주안에 주님은 내  안에 있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이것으로 세상을 이용해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세상을 양식으로 먹어 청청하고, 세상을 이겨 어데든지 관통합니다.

형통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다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우리는 달려야 합니다. 자기가 어데까지 떨어졌든지 일어서야  합니다. 어데까지 달렸을지라도 그대로 달려야 합니다.

마지막에 내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 완전히 주의 것된,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인데 주의 것이 주의 노릇으로 완전히 되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완성이요  이럴 때에 주님은 나의 주님이 되고 그 모든 것은 내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세 가지 가치 있는 일, 권위 있는 일, 참 일, 이 세 가지, 세상을  이용하는 것, 공산주의도 이용하고, 사회주의도 이용하고, 가난도 이용하고,  질병도 이용하고, 매장도 이용하고, 감옥도 이용하고, 무엇이든지 어떤 세상이  오너라. 그 세상을 이용해서 열매 맺고 그 세상을 먹고 배가 불러서 더 신앙이  튼튼해지고 그 세상을 이김으로 하나도 제재받지 안하고 관통하고 하는 이것이  사람 삼가는 것과 성경으로 말미암은 이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공연히 헛되이 날뛰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참되시며  완전이십니다. 모든 거짓부리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를 상대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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