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가질 것
선지자선교회

1982. 5. 30. 주전

 

본문로마서 61~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1절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이 말씀은 5장 끝에 있는 말씀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더 많다는 이 말씀을 오해하기 쉽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는 교리에 대해서 밝혀 놓은 성경입니다. 갈라디아서도 그러합니다. 도덕에 대해서, 소망에 대해서, 또 사랑에 대해서, 전법에 대해서 여러 모양의 면을 특수이 기록한 성경들이 있는데 로마서는 예수님 믿는 이치를 주로 해서 가르친 것이 로마서 성경입니다. 이런 물리도 아직까지 어린 지식에서는 그 지식이 단순해서 많은 것을 포함한 한 가지 이치를 말했으나 점점 큰 능력에 나아가는 데는 그 지식이 세밀히 분석되고 구별됩니다.

믿는 도리도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하는 한 말씀에 66권 도리는 다 포함됐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는 실지로 신앙생활을 할려고 할 때에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그 구체적인 실상은 이 한 마디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칼빈주의가 대단히 권위있는 깨달음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사오백년전 형편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에, 세상이 이만치 복잡하고, 세밀하고, 죄악이 최고도로 발달되고, 모든 문화도 최고도로 발달이 됐기 때문에 그만치 그 시대를 능히 감당해갈 수 있는 이런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깨달음이 신구약 성경에는 다 내재해 있지마는 우리 사람들의 신앙 성장에 따라서 제재를 받고 성장에 따라서 점점 깨달음이 더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기독자들이 신구약 성경인 문서계시 안에 포함된 내재적 영감 역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 도리를 세밀히 깨달아야 세밀한 세상을 통치하고 구원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맞추어서 기분 좋은 이런 설교를 원해도 안됩니다. 자기 비위에 맞는 설교를 원해도 안됩니다. 자기 지식에 일치된 설교를 원해도 안됩니다.

20세기의 문화가 우리를 끄는 것은 그 문화 그것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제 욕심대로, 제 소원대로, 제 뜻대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의 세상은 10세기나 15세기의 세계보다 아주 다른 세계요 다른 세상입니다. 오늘은 이 세밀하고 복잡하고 능란하고 사이비하고 삐뚤어짐이 하늘까지 관영한 이 세상에서 자기가 걸어갈 생명길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이것이 이 시대를 감당하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20세기의 기독자의 설교는 20세기의 세상에서 구출해 내고 그 세상에 속화되지 아니하도록 안보를 받게 하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바른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건의서를 써 냈는데, 장로님들에게 다 한번 읽도록 할 건데 시간이 없어 아직까지 그 일을 못했습니다. 다음 주간에는 장로님들이 그것을 한 자리에 모여 읽든지 각각 읽든지 해서 다 읽고 난 다음에 거기 대해서 제가 비판을 할 것입니다. 기록한 분도 우리 서부교회와 복음을 사랑함으로 기록해 냈는데, 그 기록해 낸 것은 여섯 조목이나 되는데 한 조목도 바로 된 것은 없습니다. 다 틀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록한 사람은 이 자리에 참석했으면 저한테 개적으로 와 가지고 그것을 잘 해결받아야 건설구원이 이루어지지 그것이 안되면 건설구원은 헛일입니다. 기본구원뿐이지 건설구원은 그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기독교 사회주의자, 기독교 도덕주의자, 기독교 정치주의자, 기독교 지상 행복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기독교 아닙니다. 사이비한 기독교입니다. 그것이 적기독입니다.

거기 설교에 대해서, ‘시대화 되기를, 목사님의 설교가 시대화되기를 원한다.’ 이랬는데 아마 그이 뜻은 이 시대 사람이 잘 감당해서 이 시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런 능력있는 설교를 해 달라 하는 그런 말로 생각하는데 위에 쓴 것을 보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도 시대화, 근대화, 근대화 설교를 할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근대화 설교를 할려고 애를 쓰는 것은 이 시대에 따라가는 설교를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를 설교화시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설교와의 합치는 같지마는 이 시대에 따라 시대화되는 게 아니고 이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화시킬려고 설교를 저는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과 교회와는 정반대인 모순이면서 그것이 참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세상을 위하는 것이니 세상과 하늘나라는 일치되는 반대를 먼저 잡아 그 반대에서 일치되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복음 운동인 것입니다.

 

오늘도 특별히 5절과 6절에 대한 말씀을 증거할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이 만일이라는 번역이 있는 이거는 뺐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읽는 사람들이 오해하기 쉽습니다. 다른 나라 번역에는, 내가 영어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데 중국어나 일본말의 번역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이라는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물크기 쉬운데, 실은 강하게 강조하는 뜻인데 우리 말로써는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좀 힘을 잃기 쉽습니다. ‘만일을 빼고 지금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것은 전제로 두는,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과거사는 아니지마는 현재의 그 전제가 됩니다.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이것은 후자입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어야 합니다. 연합한 자가 되었어야 합니다. 연합한 자가 되는 게 아니고 이것은 연합한 자가 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다음에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이것이 기본구원에 관한 것인데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자기 것 삼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자기 것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지 아니하였으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자기 것 아직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대속의 공로가 자기 것이 되어 있다, 되어 있지 않다이 말은 또 다를 때 들은 거와 착각을 일으키기 쉽겠습니다.

 

여기 말씀하신 이 말씀은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것부터 먼저 돼야 됩니다. “되었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가 되리라이것은 후자입니다.

이렇게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연합한 자가 되리라하신 이 말씀은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건설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기본구원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된 것을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연합한 자가 되었든지 안 되었든지 기본적으로는 연합한 자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어 있고, 또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되고 난 다음에 우리는 기본구원이 우리 것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되고 난 다음에 기본구원이 우리 것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설치되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시키신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중생도 기본구원에 속한 것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고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가 되는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그 택함의 순서 다음에, 순서 다음에 타락이 있고 그다음에 이 대속이 순위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 구원 순위로는 선택이 제일 일위이고, 그다음에는 타락이 제이 순서이고, 셋째는 대속에 연합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비로소 중생이라 하는 우리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 기본적 구원으로는 이미 연합한 자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도 연합한 자 되어 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에도 연합한 자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되고 난 다음에 우리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시켜 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벌써 일차적으로, 기본적으로 연합의 순서를 통과한 자들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죽으심에 연합, 부활하심에 연합 이 두 연합을 이미 받아 중생까지 통과해 나온 우리들에게 새삼스럽게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리라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의 건설구원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첫째 기본구원에 관한 교리가 아니고 건설구원에 관한 교리라 하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또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건설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우리의 육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에 대한 말씀입니다. 육에 대한 말씀이라 말은 우리의 심신에 대한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심신에 대한 말씀이라. 그런고로 우리 주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관, 우리 주관이, 이것을 가리켜서 육체의 사람이라 그렇게 성경에 많이 표현해 놨습니다.

교리 설교이기 때문에 무슨 풍자적으로, 비유적으로, 또 풍채적으로, 웅변적인 그런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좀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마는 이 줄기를 모르면 뼈없는 사람같이 아무짝도 못쓰게 됩니다. 그 신앙은 모든 전투에 승리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 심신인 육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복음이요, 우리 주관, 이 주관이 받아야 할 복음입니다. 기본이나 객관 역사가 아니고 우리 주관이 지금 이 복음에 대해서 상대자요 당사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될려고 애쓰는 게 아니고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된 것을 인식할려고 애써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는 이미 연합되어 있는 자인 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인식하고 또 인식해서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 되어 자기가 죽은 자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이것이 첫째 중요합니다. 자기가 죽은 자된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아직 죽지 아니하고 첫 아담에게 속한, 예수 믿지 아니할 때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로 지식하고 또 예수님의 부할에 연합한 자로 살아야 된다 하는 이것은 다 옛사람의 작용입니다.아주 좀 어려운 일입니다.작용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죽은 자 되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산 자는 되지 못합니다. 죽은 자로 인식해야 산 자로 인식이 되고, 죽은 자 되기를 원해야 산 자 되기를 원합니다. 죽은 자인 이것을 지식하고 또 산 자인 것을 지식하고, 죽은 자 된 것을 원하고 산 자 된 것을 원하고, 죽은 자 되었을 때에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완전히 죽어 장사지내 버렸고, 무덤 속에 묻어서 장사지내 버렸고, 화장을 해서 태워 없어졌고, 이것이 첫째로 어렵습니다. 자기는 있으면서 이런 자인 것을, 이런 자인 것을 자기 주관으로 인식할 게 아니라 그 주관에 이런 자 되는 이것이 첫째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자기는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새 창조로 된 자기는 새로 창조된 새사람이라 하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려고, 또 이것을 인정할려고, 또 이 자기가 될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에서 현실 현실을 통해서 새로 창조된 자가, 새 창조된, 새로 창조된 자가 현실 현실을 통해서 차차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토막이 중요합니다.

이래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에서는 세례를 이렇게 물을 뿌림으로, 머리 위에 물을 이렇게 뿌림으로 세례 주는 그 의식을 행합니다. 그것은 어디다 근거를 하는고 하니 구약 때 짐승의 피로 모든 것을 거룩하게 속량할 때에,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거룩하게 속량할 때에 그때에 그 짐승의 피에다가 씻거나 담그거나 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 피를 뿌림으로 모든 것이 거룩해졌다여기 근거를 해 가지고, 요새 군에서 보면 세례를 주는데 그저 속에 무신론자도 그만 수천 명 모아 놓고 나는 천 명 세례를 줬다. 삼천 명 세례를 줬다. 만 명 세례를 줬다.’ 명예 영광심에 둥 떠 가지고 이런 데에 초대를 받아 가지고 많은 군인들 있는 데다가 물을 펌프로 뿌리든지 뭘로 뿌리든지 이래 가지고 세례 줬다 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그거 참람된 짓이고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세례는 성경에 반드시 그의 신앙 고백을 받고 난 다음에 세례를 주는 것이 정식입니다.

예루살렘 오순절에 베드로가 삼천 명 회개했다는 것은 그는 성령의 세례요 회개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제 세례는 보면 물이 많으므로 세례를 준다이렇게 말했는데, 침례교에서는 세례의식이 다릅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마다 침례주는 물통을 만들어 놓고 물통이 사람 키큰 사람이라도 한 길이 더 되도록 만들어 놓고 물을 가득 싣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침례받는 사람은 그 사람을 침례로 세례주는 그 목사님이 그 사람을 물 속에 넣어서 잠궈 가지고 완전히 잠궈지고 난 다음에 다시 거기서 건져냅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과 함께 죽어 장사지낸 자라하는 로마서 6장에 있는 이 성구를 근거해 가지고 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하는 이 성구를 근거해 가지고 땅 속에 장례지낸 것이나 물 속에도 들어가면 죽으니까 일단 죽음의 그 의식을 통과해 가지고 다시 이거는 참 새사람으로, 하나는 죽어 버렸고, 죽어 끝나 버렸고 다시 새로 창조되어서 새사람으로 생겨졌다 하는 죽고 삶의 그 토막의 경계를 물속에 장례지내서 없어졌다가 다시 새로 생긴 이것이라도 하나 그 의식으로 경계를 밝혀 놓자 하는 그런 의미에서 침례 의식을 행합니다.

그것은 침례를 하는 것이나 세례를 하는 것이나 그 의식에는 제재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성경에 근거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나쁘다 좋다 그렇게 평할 수 없고 다 정통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중요한 것은 이 세례받는 것은 우리의 건설구원에 관한 것이지 기본구원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례를 받고 성찬을 먹는데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이 성찬 예식에 참예한 일이 없으면 그는 예수님의 피와 살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이렇게 깨달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 피와 살이 완전히 피와 살로 화해서 화육설을 주장하는 이 주장, 천주교에서도 화육설을 주장합니다. 그 주장해서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피와 살과 우리가 연합이 된다 하는 것인데 그것도 비성경적입니다. 세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구원은, 기본구원은 영원 전 택함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천주교가 구원이 없다는 말은 천주교에 기본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기본구원은 천주교 교인들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개혁교 교인들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불교 신자에게도 기본구원 얻은 자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 그 사람이 택한 자이지마는 아직까지 중생과 신앙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깨닫지 못하고 불교에 구원이 있는가 해서 중 노릇을 몇십년 하다가 예수님을 구주인 것을 깨닫고 개종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때 불교에 있으니까 기본구원이 없었습니까? ‘기본구원은 있었지마는 본인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기본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나 분명히 건설구원은 그 사람에게는 없다.’ 우리가 단언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그 교리가 기본구원을 말함이 아니고 건설구원에는 천주교 교리는 건설구원은 없습니다. 아무리 수녀 노릇을 하고 무슨 노릇을 한다 해도, ? 그 교리에 어긋났습니다. 어긋난 것은 첫째는 제2계명에 산 사람 외에는 절하지 말라 했는데 모든 성경 인물들을 동상으로 혹은 초상으로 이렇게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절을 많이 하는 것이 미사를 많이 드린다 하는 것은 현저히 제2계명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됩니다. 또 성경에 보면 66권 도리 이외에는 한 획도 가하지도 못하고 감하지도 못한다고, ‘가감을 하면 구원에 제외되고 형벌이 더 가해진다.’ 이것은 몰라서 미숙해서 그런 사람들이 회개하면 되지마는 교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말입니다. 성경에 더 보태도 된다는 그 교리적으로는 그 교리에 구원이 없고 형벌이 가해진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교황의 무오성 그것은 교리인데, 교리적으로는 건설구원이 이루어지지를 못한다 하는 그것을 말해서 천주교에 구원이 없다, 건설구원이 없다 그말입니다.

또 불교도 기본구원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건설구원은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에 교도가 숫자가 많은 것을 말하는데 천주교 교도의 숫자는 회회교 교도의 숫자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숫자가 많다고 해서 회회교에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노아 때에 숫자가 많아도 당신이 선포해 놓으신 계약대로 처리하시고 구원하시지 그 계약을 많은 숫자가 동맹하고 공통되어 대항한다고 하나님의 계약이나 법칙이 거기 제재받고 어거받지를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계약인 것을 우리는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첫째 힘을 쓸 것은 뭐이냐? 이 건설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성구가 건설구원에 관한 설교 말씀이오. 기본구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기본구원은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쭉 밑에 읽어보면 이렇게 믿어야, 이렇게 인정해야 실제로 이것이 되어져야 된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지식해야 되고, 지식은 인정한다는 말 아닙니다. 첫째는 그런 것을 알아야 되고, 기독자가 불교를 믿지 않지마는 불교의 교리를 아는 정도로는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는 교리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이것이 기독교의 건설구원에 건설구원에, 제일 중요한 건설구원의 종자라, 건설구원의 종자라, 건설구원의 밑바탕은 기본구원이라.

이런데 이 건설구원의 종자적인 것을 순위적으로 제일 먼저 이것이 먼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자적이요, 순위적으로 제일위적인 것을 먼저 지식하고, 지식하고 그다음에는 지식하고도 인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는데 그다음에는 우리는 인정해야 하고 또 인정만 했지 실상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정하고는 그다음 셋째 순서가 실상이 되기를 원하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원하고 노력을 해야 되고, 원하고 노력하다가 끝나 버리면 소용없습니다. 원하고 노력을 하는 그 노력 끝에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많이 됐든지 적게 됐든지, 죽으심에 연합된 양이 많든지 적든지, 연합된 그 실상 연합된 것이, 연합되어 있는 연합된 실상 연합된 것이, 연합된 그 실상이, 실량이 많든지 적든지 그것의 양이 된 것만치 그다음에 또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기를 원하고 노력을 함으로 부활에 연합한 자가 많이 됐든지 적게 됐든지 실상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을 때에 그것이 비로소 건설구원의 양입니다.

된 것만침, 처음에 죽으심에 연합이 된 것만치 모든 죄악의 악의 세력, 사망의 세력 이 죄악의 세력을 벗어납니다. 된 것만치 이 세력을 벗어나고 부활에 연합된 것만치 이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으로 성장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으심에 연합한 그 양이 없이 죄악과 사망을 이긴 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있을 능력도 없습니다. 또 부활하심에 연합한 그 양이 없이 영원한 구원에 성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의 것은 소극적으로 화를 받지 않는 화를 면하는 것이고 둘째 것은 이제 산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경계선을 뚜렷이 해야 됩니다. ‘나는 죽은 자라자기가 죽은 자 된 것을 인식하고, 죽은 자 된 것을 인식하고 실상으로 죽은 자가 돼 버리고, 죽은 자 된 것을 인식하고 죽은 자가 된 것만치 산 자로 인식하고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경계선을 뚜렷이 해야 되지 이 경계선 없이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은 죽고 죽어 끝나버렸고, 또 새로 살아난 이자가 아니면 예수님의 대속이 자기 건설구원에 실질적으로는 효력을 주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는 능력으로 역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와 기독교가 이것입니다. ‘울어도 힘써도 못하네 이거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에 못 한다이 찬송 해 놨는데, 그 찬송도 뜻을 보면 교리를 똑똑히 모르는 사람이 찬송을 지은 것입니다. 이 찬송가가 거의, 기독자의 교리가 옛날 그 찬송가를 지을 때에 삼사백년 이전의 그 시대의 교리로서는 틀렸는지 맞았는지 구별하지 못하지마는 지금 시대의 교리 현대화된 교리가 아니라, 현대적인 교리, 현대적인 교리, 현대 세상에 현대화가 아니고 현대를 능가할 수 있는 이런 교리적으로는 따져 보면 우리 찬송가가 교리에 맞지 않는 찬송가가 대부분입니다.

이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이종교는 그 종교를 믿기 전 그 사람이 그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지 못했던 자가 종교를 새로 가지고 그 종교를 믿습니다. 또 이 종교를 제가 이종교 믿다가, 제가 이 종교 믿다가 또 안됐으니까 다른 종교로 개종을 했다가 이렇게 하는 것이지마는 기독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관이 믿는 것 아닙니다.

이 구원의 시발은 하나님이신 성령의 그 역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본을 삼아 가지고, 근거를 삼아 가지고, 이 공로를 의지해서 성령님과 우리 안에 내라는 내 것의 주인, 내 심신의 주인인 중생된 영이 합작해 가지고 우리 속에 이 생명의 씨를 심어서 우리의 주관이, 우리 주관이 성령과 중생된 영의 설득을 받고 감화를 받고 설득을 받고 해서 이 주관이 긍정하고 환영해 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땅에 속한 이것을 여기서 강제하지 않고 감화 감동으로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고 이와같이 할 때에 예수 믿기 전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주체가 되어가지고 믿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주체된 것이 완전히 주체권을 상실해 버리고, 주체권을 이 중생된 영과 성령에게 박탈을 당해서, 거기 설득을 당하고 설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하고 이해를 받아서 거기에 피동이 되어지는 그 심신의 지도자가 생겼고, 심신의 주인이 생겼고, 심신의 왕이 생겨서, 이것이 완전히 주도권을 박탈을 당한, 박탈을 당한, 박탈당해서 이 심신으로 말하면 자기 아닌 객관 역사, 객관 뭐? 자기가 몰랐던 자기의 주인인 영, 자기가 몰랐던 이 창조주 조물주 구속주 하나님 이분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고 설득을 당해서 그의 것이 되기 시작한 이것이 기독교 건설구원의 시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는 자기의 주체성이 과거에는 이 세계에서 주체성 되었다가 이제는 더 고상한 종교 세계에 주체성이 되어 그 주체성이 한 세계 한 세계를 밟아 돋아서 정복해서 올라가 그 주체성이 더 승격되고 성장되고 강해지는 것이요, 기독교는 이 주체성이 완전히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정복당하고 해서 이것이 주체성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정복을 당해 가지고 이 세력에게 피동당하는 이것이 기독교의 건설구원의 시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기가 전적 믿고 싶어 믿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두 싸움이 있어, 자기에게 과거에는 없었는데, 과거에는 이 검은 걸로 통일이고 검은 것뿐이었는데 검은 것 외에 딴 데서 밖에서 흰 것이 하나 들어와 가지고 들어오니까 외적이 들어왔으니까 자기의 주관은 대립을 해 가지고 이것을 정복해서 방어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할려고 애를 쓰고 여기서는 뚫고 들어오려고 애를 쓰고 이러는 이것이 자기 속에 있는 그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는 자기 속에 소원하던 것을 자기 주체, 심신이 주격되어 주체가 소원해서 이것을 찾고 저것을 찾다가 자기가 찾던 것을 만나니까 좋아해서 그것을 취하는 것인데, 기독자는 자기의 찾던 것을 만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원치도 아니한, 자기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원치도 않던 그 세력이 들어와 가지고 자기를 정복하기 때문에 그 자기의 주관과 정반대되고 자기 주체성과 반대되는 여기서 싸움이 일어나나 싸움이 일어나서 반대할수록 그 속에서 자꾸 역사해 가지고 정복을 해서 믿기 싫은데 믿어지고, 하기 싫은 데 해지고 이래 가지고 믿기 전 자기에게 자기 아닌 딴 어떤 적이 들어와 가지고 지금 자기를 정복하고 있고 자기가 정복을 당하고 있는, 점점 박탈을 당하고 있는 것을 자인되어지는 것이 기독자가 양심을 써서 살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속에 주격인 영입니다.

그러나 기독자가 양심을 쓰지 않고 물욕을 가지고, 세상 온갖 정욕을 가지고 그 욕심을 달성할려는 그 주체 그 자가 그 욕심을 달성하는 방편에 있어서 좋은 신무기를 발명한 것처럼 좋은 무기를 발명했다고 생각해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주장하는 그것이 다 좋은 방편, 도덕에 좋은 방편, 사회에 좋은 방편, 또 사상에 좋은 방편, 정치에 좋은 방편, 이 모든 정복에 좋은 방편을 왔다고 생각해 가지고 기독교를 이용해 먹는 것이 오늘 교회의 성전 밖마당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와 이종교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이것을 오늘 기독교들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그 알맹이는 매장을 당해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하게 다 밀어 붙여 버리고 다만 이종교와 똑 같은 종교 운동으로 세계의 복음 운동을 하지마는 암만 해 봐도 속에 참 진정한 기독교와는 대립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계시록에 성전 밖마당은 아예 계수에 헤지 마라. 측량하지 말라. 이거는 다 이방에게 내줬다.’ 이랬소. ‘성전 밖마당은 내줬다. 다만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만 네가 측량해라. 그거 얼마나 되는지 그것만 측량해라. 나머지기는 다 내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흔 두달 됐다 말은 3년 반 내줬다 말인데, 3년 반은 구약을 3년 반 신약을 3년 반 이렇게 7수로 말했는데, 신약시대에는 성전을 내줬고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 외의 이방을 내줬고 이스라엘 밖을 내줬고, 신약시대는 성전과 제단과 그 속에 경배하는 것 이외에 것을 내줬습니다.

? 이제는 악령이 예수믿는 형태를 안 가지면 안되기 때문에 예수믿는 모양을 가지고 기독교를 엎으려고 지금 이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이방과 이스라엘과 그때는 분리하니까 그만한 분리이면 됐지마는 이제 신약시대는 악령의 전법이 달라졌고 이 죄악이 더 관영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와 교회를 구별하지 아니하면 안되기 때문에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와 성전 밖마당과를 구별해서, 밖마당 이거는 세상에게 내줬기 때문에 이것은 측량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혜있는 자는 알려면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정치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그 나라가 망합니다. 또 기독교가 아무리 신령한 기독교라도 세상 정치 속에 들어가면 기독교는 망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교회가 사도교회입니다. 사도들 교회인데, 사도들 교회가 세상 정치에다가 발을 들여놔 가지고 그 안에서 하다 보니까 사람은 연약해서 기독교가 세상 정치적 기독교가 되어서 마지막에는 교황이 로마 황제 위에 가서 로마 황제가 교황의 안수를 받아야 황제가 되고, 교황의 명령이라면 로마 황제가 그 속에 명령 일하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것이 , 기독교 흥왕이라 왕성이라 전성이라생각했지마는 실은 기독교 주후 4백년 때부터 슬슬 썩어지게 돼 가지고 주후 7백년경에는 옳은 기독교가 용납이 되지 못해서 모두 피해서 수도원 생활이, 그때 수도원이 바짝 흥왕한 것은 세상에 진리를 지키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수도원 발달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이러다가 수도원에 가 가지고도 견뎌 배기지를 못하도록 불의한 교권 세력들이 한 그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러다가 주후 천오백년경에 이제 그 루터가 거기서 비로소 개혁을 시작할 때에 그때에저는 역사를 모르는데 그 역사를 본 사람들이 조사를 했는데 이 개혁하는 이 성경을 보고 성경을 자유로 보자.’ 성경을 보니까 천주교 교리는 틀렸다이래 가지고 교리 싸움에서 천주교에게 개혁교 교인들이 수십만 명 죽었습니다. 꼭 석달 만에 죽은 숫자도 10만 명이라 하는 것이 기록된 것을 봤습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비로소 성경을 자유로 볼 수 있다.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만 구원얻지 천주교 교파가 구원 주는 것이 아니다하는 이 무서운 사망에서 헤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데 오늘에도 또 영 달라졌습니다. 제게 온 그 글에 쓰여 있기를 오늘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판단할 것이라하는데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을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성경적이 아닌 것은 틀렸다. 성경적이면 맞다.’ 이것이 우리가 증거하는 의무와 책임이기 때문에 이 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순교를 당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편지가 왔다고 해서 제가 조그만치라도 뭐 요동은 아니하고 관계없는데, 그분이 좀 불쌍하니까 단단히 좀 배워서 귀가 열려야 됩니다. 귀가 안 열리면 그분은 서부교회 설교는 가장 오랑캐가 될 것이고 거슬리게 될 것이고, 이제 신신학 교리는 맞을 것인데 아마 ○○○씨 교리가 제일 맞을 것입니다. 또 에큐메니칼 교리가 그다음에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천주교에서 용공 교리를 가진다.’ 그거는 교리가 그리 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 뭐 쉰두 명이 지난번 그 역사에 거기 가담됐다.’ 또 나는 그 신문을 보지를 못했는데 마흔두 명 목사가 광주에서는 다시 이상한 소리를 들고 나섰다.’ 하는데 그는 다 교리가 그러니까, 그들의 지식이 그러니까 그 지식에 옳고 그른 것을 기독교적으로 비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가 나기 전에 사오백년 전에는 그만한 교리만 해도 구별해 나오지만 그때 교리 가지고 구별할 수 없는 복잡한 일이 지금 많이 생겨졌기 때문에 오늘에는 그 교리 가지고는 안됩니다. 칼빈주의 기독교강요를 암만 통달해도 안됩니다, 그거 가지고는. 오늘에 세대를 담당할 수 있는 성경 깨달음을, 영감 깨달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전에는 이것만 증거하고 오후에 계속하겠습니다.

 

오전 증거는 그것입니다. 죽고 사는 경계선을 뚜렷이 두라. 죽고 사는 경계선을 뚜렷이 두라. 처음에는 지식적으로 두라. 그다음에는 비판적으로 두라. 그다음에는 인정적으로 두라. 그다음에는 소원적으로 두라. 그다음에는 실상으로 이루어져라. 이래야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연히 있는 수지 다 제 욕심대로 다 쓰고 찌꺼기 그것만 가지고 예수를 믿어도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까? 이것 가지고 천군 천사를 통치하고 영계와 물질계를 통치할 수 있는 실력이 마련된다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거는 안됩니다. 이러기에 사데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 행위에 온전한 것을 내가 찾지 못했다온전한 행위라야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누리해서 헐하게 말하면 그것이 거짓 선지자요, 그것이 거짓 선지자. 마태복음 16장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거짓 선지자가 뭐인데?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의 이름만 믿으면 다 건설구원 된다, 병만 낫으면, 신유의 은혜만 받으면 그만 건설구원 된다, 귀신 쫓아내면 건설구원 된다, 이적과 기사만 하면 건설구원 된다 하는 이자들이 다 거짓 선지자들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되지 아니한 것은 건설구원이 되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이 말씀도 구별해야 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하늘나라 들어간다. 행하지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 자 이 말씀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하지 않고 이 성구를 해석할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그 사람이 참 답답한 일입니다. 따져 볼까요?구원이 하나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못함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뜻대로 다 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뜻대로 못 했습니다. 베드로도 뜻대로 못 했습니다. 베드로도 현저히 죄를 지어서 사도 바울에게 책망받았습니다. 바울도 아라비아 3년 생활 뒤에 사도로서 발족하고 난 다음에 대실수 했습니다.

제가 김천 지방에 가서 집회를 하니까 낯이 넓덕하이 뒤꼭지가 뚝 불거지고 사람이 좀 훌륭하게 생겼는데 보기에 잘 생겼어. 설교를 하는데 양반질을 딱 찍혀 앉아 가지고 삐쭉삐쭉거리면서 조롱을 하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나중에 설교해 나가는 가운데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이 구별을 말하니까, 이 교리를 말하니까 양반질했던 사람이 딱 앉아 무릎을 딱 꿇더니마는, 무릎을 딱 꿇고 눈물을 출출 흘리면서 머리를 숙이고 울고 있습니다.

설교 마치고 난 다음에 뛰어왔습니다. ‘강사 선생님, 감히 내가 강사 선생님을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 무슨 말인가 들어오라.’ 들어오니까, ‘내가그말 들어봤어. 내가 고신 뭐 유명한 목사들도 설교 다 들었고, 용문산도 몇번 가 봤고, 박볼달성에도 얼마나 갔고, 또 그 뭐 대구에 어디 불이 났다 하는데 돌아다녔고 했지마는 다 나는 거짓말이라고 부인하고, 어떻게 하면 이 기독교를 마구 끌어 엎어버릴까? 이 가증스러운, 사람을 속이는 일 할까? 해서 내가 처음에 와 가지고 또 이 설교하는 거짓말쟁이 가증스러운 것이 인간을 미혹시킬려고 또 하나 한 놈이 왔구나 해서 내가 어떻게 가증스럽게 보이든지 나 아마 태도가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그래. 내가 그렇게 좀 나 보기도 그렇습디다. 왜 그렇습니까?’ 이러니까 , 회개 안하면 구원얻지 못한다고 외쳐 재끼니 거기서 그 집회에 설교 듣고 회개할 것 다하고, 이제는 간증해야 된다 하기 때문에 회개한 것 뭐 음행죄도 간증했고 도적질도 간증했고 천국 가기 위해서 오만 것 간증 다 했고 댓가 다 내놨고 이랬는데, 이제는 구원됐지 하고 기뻐 즐거웠는데 다른 집회 가니까 또 설교하는데 또 회개 안한 게 나와서 또 그러니, 여기 가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니까 암만 돌아다녀 봤자 내 속에 회개하지 못한 게 얼마든지 있으니 결국은 지옥가는 것인데 이것은 공연한 인간을 고민주는 거짓 도다 해서 내가 반발이 났는데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해서 기본구원은 전적 주님의 구속으로 되어 이미 주의 공로로 구원 얻었고, 구원 얻은 자가 하늘의 영광인 건설구원을 마련하는, 그 성화를 마련하는 것이라는 여기에서 나는 안심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가서 우리 교회에 지금 이 교회를 깃발 들고 나는 새로 개혁해 가지고 새로 믿겠습니다.’ 한 그때에 거기서 일어선 교회가 제가 고신에 있을 때이니까 고신 교회로 일어섰습니다. 그래 가지고 수백 교회가 일어섰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고신에서 그 많은 교회들을 일으킨 것이 그 숫자가 아마 숫자로서 많이 일으킨 숫자로서는 ○○○조사님하고 저하고 둘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모두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이랬지마는 그 후에 갑자기 백목사가 죄 지었다고 해 가지고 막 공동으로 이러니까 그분들이 놀래 가지고 뒤집어져서 다시 나를 가서 만나지도 말아라. 이단자는 가서 말하면 이단자 된다.’ 나를 이단자라고 딱 정죄해 가지고 만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나지 못하고 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막은 일이 얼마나 뒤에 가서 하나님 앞에 책임이 클런지 모릅니다.

이래도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녹음으로 녹음으로 보내서 녹음은 안 간 곳이 없답니다. 이래서 누가 말하기를 녹음으로 가 가지고 그것이 돌아와서 새벽 설교까지 다 지금 교계에 퍼지고 있으니까 우리만 녹음 못하게 해서 우리만 못 듣고 있지 이 교계에서는 교역자들은 다 듣고 있으니까 우리도 녹음을 합시다.’ 하면서 그 항소가 나한테 왔습디다. 여러분들 정신을 차려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떻게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하지 아니할 때에, ‘, 회개 안 하면 천국에 못 가. 회개하라. 그래야 천국간다.’ 성경 아니오?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그 성구는 건설구원에 관한 교훈이요 기본구원에 관한 교훈이 아닙니다. 기본구원은 택하심에서 다 결정이 됐습니다. 택한 자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했습니다. 중생되기 전에는 제가 택했는지 안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중생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날 대속하셨는지 안 하셨는지 모릅니다. 중생되고 난 다음에도 모릅니다. 중생되고 난 다음에 성화 생활이 시작되어야, 주관 신앙생활이 시작되어야 주관이 비로소 아는 것이지, 중생은 내 주관이란 심신이 아니고 죽어 있던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완전히 죽은 자입니다. 죽어 장사지낸 자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새로 생겨진 자입니다. 이 경계선이 뚜렷해야 됩니다. 이 경계선이 뚜렷하도록 처음에는 지식적으로 이 경계선을 알고, 그다음에는 비판적으로 알고,비판할 때는 세상에 수많은 천만의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라 말 아니오. 그 지식으로 비판하는 건 아니오.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이것을 비판해서 비판적으로 자기가 경계선을 뚜렷이 하고, 그다음에는 인정적으로 경계선을 뚜렷이 하고, 인정적으로 뚜렷이 하고 난 다음에는 소원적으로 이 경계선을 뚜렷이 하고, 그다음에는 자기의 노력적으로 이 경계선을 뚜렷이 하고, 그다음에는 실상적으로 죽은 자, 다시 창조되어 산 자로 이 경계선이 뚜렷이 될 때에 비로소 성화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세상 지식을 목사님은 부인하는데, 과학도 세상 지식인데 과학이 만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세상 지식을 부인하면 됩니까? 또 비디오를 사용을 하면서, 이거 테레비 이걸 사용하면서 세상 지식을 부인하면 됩니까?’ 잘못 들었어. 그분이 잘못 들었어. 세상 지식을 부인하는 것 아니오. 반지식론이 아닙니다. 반지식론이 아니고 세상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음행의 포도주가 되고말을 했습니다. 세상 지식의 주인이 하나님의 지식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왕이요, 세상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게 통치 지배를 받고 이용을 당하면 이 세상 지식은 보배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 위에 왕 노릇 하면 그것은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차에는 운전대가 참 보배입니다. 지난번에 저 버스가 이리 들어와서 우리 집도 받고 화랑국민학교도 받아 가지고 운전수는 아마 그때 죽었다고 하지요. 3, 4일전에 그랬는데, 나는 가 보지는 않고 말만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왜 그랬느냐?’ 이러니까 그 운전대가 듣지 않아 그랬다 그 말도 있는데, 브레이크가 안 빠졌다, 또 운전대가 안 들었다, 운전대가 안 들으면 더 그렇습니다. 운전대는 운전수가 딱 잡고 있을 때에, 이 운전대는 돌이 탁 치이면 운전대가 이리 픽 틀어져서 이리 갈려 합니다. 이리 픽 틀어질 때 운전기사가 팔에 힘이 없어서 운전대가 픽 틀 때에 같이 픽 돌아갔으면 저도 죽고 사람 다 죽습니다. 그래 픽 돌아갈 때 운전기사가, 운전대 이놈이 왼쪽으로 돌려 할 때 이놈 어디 왼쪽으로 가?’ 팍 틀어서 오른쪽으로 탁 틀어 버려야 안 죽고 산다 그말이오. 운전기사에게 운전대가 다스림을 받아야 되지 운전기사가 운전대에게 다스림을 받으면 몰사합니다. 그와 마찬가지요.

세상 지식은 운전대와 같고 하나님의 지식은 운전기사와 같다 그말이오, 비유컨대. 이 똑똑히 알아야지.

 

이러니까 오늘 오전에는, 죽은 자와 산 자는 이 경계선이 뚜렷해야 됩니다. 우리는 완전히 죽어버린 자가 돼야 돼요. 완전히 죽어 끝난 자가 되고 새로 완전히 산 자가 되어져야 여기서 성화구원이 이루어지고 세상을 이기고 이건 모두 다 심판할 수 있는 실력이 되어지지, 이종교와 같이 심신이 주격이 되어 있는, 자기가 예수를 믿고 싶어 믿는 그거는 예수믿는 사람 아니오. 믿기 싫은데 속에 그 객관의 능력으로서 믿는 자 되어지는, 속에, 겉사람으로서는 이렇게 하는데 속사람이 이래서 내 속에 두 싸움이 있다는 이것이 체험이 없는 사람은 신앙 양심을 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 한 사람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당장에 여러분들에게 이 지식이 충만해지지지 않으면 지식적으로 알고, 그다음에는 성경을 가지고 상고하면서 비판을 하십시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비판하되 확실히 인정되기까지 비판을 하십시오. 인정된 것이 소원이 되기까지 인정이 돼야 됩니다. 소원된 것이 실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소원이 되어야 그 소원이 참 소원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건설구원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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