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능력-설교 잘 하는 것

 

1986. 2. 5. 수새벽

 

본문:마태복음 24장 37절∼51절 노아의 때와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때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나 사람들에게 대해서 이 시비 변론의 이 전투는 끊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육박전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혈육의 싸움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전투는 외부적으로 논리의 전투요 또 그 안에 내적으로는 믿음의 전투요, 우리는 그분을 인정하고 확신할라고 할 때에 ‘그렇지 않다. 그분을 인정치 말아라. 확신치 말아라.’ 또 그분을 따라서 움직여 살라고 할 때에 ‘그분 따라 움직여 살지 말아라. 어떤 세상의 유명한 철학가나, 도덕가나, 사상가나, 집권자나, 그런 자를 따라서 움직여라’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투요.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그의 주신 이 길로 걸어갈라고 하는데 그리 걸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령은 그대로 복종해야 된다 하는데 복종하지 못하게 한 것이요 하나님은 대주권자요 개별 주권 섭리자라 하는 것을 믿을라고 하는데 그들은 ‘믿지 말아라. 네가 믿으면 속는다.’ 그럴 때에 그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분이 어떤 분이 ‘그분에게 주권이 있지 불에 주권이 있지 않다. 사자에 주권이 있지 않다. 정권자 자기들에게 주권이 있지 않다.’ 이렇게 인정하는 고것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대로 됐습니다.

그것이 내적의 전투요, 그 전투보다도 최종 결말적인 전투는 무슨 전투냐? 대주재 그분이 심판을 베풀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심판에 통과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의 전투입니다.

그 심판에 통과되게 할라고 주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는 우리를 붙들고 역사하시는데 우리도 그 능력을 힘입어서 그 힘으로 우리가 살아서 그 심판에 옳다 인정함을 받을라고 이렇게 하는데 이 심판에 삐뚤어져서 걸리도록 할라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들의 전투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전투할 때에 우리는 어떤 것을 배경으로 삼을 것인가? 우리가 배경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배경이 영원히 되어 있고, 또 배경이 되고 싶어 원하시고, 배경이 되어서 역사해 주실려고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선포해 놓으신 변치 못할, 하늘나라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그 규범을 하나님이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 규범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규범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하나님에게는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유한한 자유를 받았지마는 자유성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상속자인데 그 자유성을 말살하면 그런 가치 있는 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유한한 자유성이지마는 자유성을 준 것인데, 이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법규를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아니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강제로 지키게 해서 법규에 맞은 사람 만들어 가지고 얼마든지 복 줄 수 있지마는 그라면 우리에게 자유성이 말살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성도 살리고 하나님의 법규에 맞추고 이래 가지고서 은혜를 주실라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일 어려운 것은, 우리 복종시키는 것도 문제 없고 모든 것 복 주시는 것도 문제 없는데 다만, 하나님의 법규를 맞추는 것도 문제 없습니다. 법규도 한 시간에 온 천하 사람을 그 법규에 다 맞출 수 있습니다. 어떤 위협으로도 강제로도 맞추게 할 수 있습니다 마는, 그러면 자유성이 그것이 다 말살되고 말기 때문에 자유성을 살려서 하려는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제일 난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유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이 법도에 맞추기만 맞추면 맞춘 그자에게 대해서 올린다, 높이 올린다. 많이 줘서 부강하게 한다. 영광스럽게 한다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엿새 동안에 모든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존재를 다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또 있는 것을 당장 없게도 하실 수 있는 이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올린다는 것도 당장 올릴 수 있고 우리를 부강하게 하시는 것도 당장 부강하게 하실 수 있고 우리를 존영하게,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복종하고 우리를 존영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당장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에게 거리껴서 못 하고 당신이 우리에 자유성을 줘서 온전케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강제 관계가 아니고 우리의 관계는 유기적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 유기적인 결합입니다. 유기적인 결합이라 말은 자유의 의사를 다 인정하고 우리가 그의 교훈받고 감당 받아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자유성으로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고 맡기고 의지하고 복종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이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결합을 가지실려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문제는 어데 매였느냐?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이 법규를, 강제당하지 안하고 이 법규를, 우리의 자유성 가지고서 이 법규를 선택해서, 내 현실에서 수많은 법규의 유혹들이 있지마는 다 내 자유성에서 다 버리고 우리가 유기적으로 하나님의 법규 이 법규를 지켜서 요대로 나가는 요것이 우리에게 촛점이요 모든 것에 다 결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전투를 하나, 우리가 배경 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배경이신데 하나님이 우리 배경이 되는 데는 조건부의 배경입니다. 우리에게 법규를 주셨기 때문에 이 법규에 맞는 배경이 되어 주시지 이 법규를 어겨서 당신이 우리에게 배경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에게 강제하지 못합니다. 직접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한다. 그러면 자녀된 것을 증거한다 하면은, 그러면 누구에게 증거한다.

말입니까? 그거 누구에게 증거합니까?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했으니까 그 우리라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영은 증거자인데? 성령과 영이, 우리 중생된 영이 함께 증거하는데, 그러면 누구에게 증거를 한다 말입니까? 우리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에게 증거를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증거를 해 가지고서 우리가 그 증거를 받아서 알고, 다음에는 확실히 그렇다, 옳다, 그러하다, 그렇게 인정하는 확신을 가지고 고라고 난 다음에 고대로 살면 우리 할 일 다 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하나님이 하실 것은 시간 걸리지 않습니다. 당장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독자가 기적과 축복으로 산다 하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배경이 되어 주시되, 그분이 우리 배경이 안 되면 우리는 약자 중에 약자입니다. 참, 세상에 제일 약자입니다. 왜? 우리가 성경에 배우기를 주먹으로 하지도 못하게 돼 가지고 있지 악으로 하지도 못하게 돼 가지고 있지, 이러니까 우리는 세상이 쓰고 있는 모든 무기를 모든 전법을 모든 힘을 우리는 쓰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 제일 천한 자 아닙니까? 못 쓰는 것이 지존하시고 절대자인, 주권자이신 그분의 배경을 쓰기 위해서 그걸 안 쓰는 것이지, 이것도 쓰지 안하고 그분의 배경도 우리가 힘입지 못한다면은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참는 것도, 죽음을 뿍뿍 걸어가는 것도, 이 십자가에 미련한 길을 걸어가는 그것이 그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길이지마는 절대자이신 주권자 전능자 이분의 능력을 마구 내가 옷입듯이 입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구원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게 바로 전능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배경 삼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용납될 수가 없고 존재할 수가 없는 우리들인데 하나님의 도우심의 배경이라는 것은 당신이 선포해 놓으신 이 법규, 이 계약, 이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나타낸, 신약은 이제 근대에 와 가지고서 계약한 것이요 구약은 그전에 계약한 것이라 그 구약이라는 약자가 약속 약(約)자요 약속 약(約)자, 하나님이 처음 약속한 것이 구약이요 두번째 약속한 것이 신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법규를 당신도 어길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형과 대행과 대화친의 제물이 되셔 가지고서 우리를 구출하셨지 당신이 말로 해 가지고 다 하고 주권 가지고서 뭐 마음대로 다 하고 당신이 암만 이렇게 말해 놨다 할지라도 또 때를 따라 또이렇게 하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 같으면은 십자가에 못 박힐, 도성 인신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게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규를, 선포해 놓은 법규를 어길 수 없는 분이시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워도 어기지 못했는데 우리가 어기는 그 일을 통해 가지고서 그분을 무슨 힘입을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주장을 해도 제일 권위 낮은, 권위 낮은, 이 신구약 성경의 계시의 이 도,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시의 도라 말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도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당신이 선포해 놓은 도요. 이 계시의 도의 배경을 가져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고 이 배경의 도를 가지고도,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다’ 그말은 이 배경의 도는 딱 들어맞게 했지마는 그보다도 높은 영감의 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배경의 도를 바로 우리가 선택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전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터이기 때문에 양심에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하나 여게서 안심하고 담력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두려워 떤다 하는 것은 이 문서 계시에 무슨 착오가 있다 말이 아니고, 다른 유오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다만 이 성경 깨달음을 내가 어떻게 잘못 깨달아 가지고서 이렇게 내가 성경대로는 틀림없이 했다 싶으지마는 이 틀림없이 했다는 이것이 바로 깨달아서 내가 알았는지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게 의문이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에 ‘마음에 자책할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 양심에 가책할 것이 없다 그말이오. 자기가 성경 깨달은 대로는 다 했다 그말이오. ‘이러나 내가 담력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두려움으로 전지자 그분 앞에 설 때 그때까지 두려움으로 날마다 생각하고 연구해서 틀리면 즉시라도 고치고 이렇게 나아간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런데,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다고 했는데 우리가 하는 말이 이거 세계에, 모두 다 사람들이, 소련에 수뇌자들이 영국의 제일 대 원수 아주 두령들이 그분들이 최고의 무슨 회의를 한다 하면은 세계는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난 이 계약의 말씀의 한 성구만치도 보지 않습니다. 한 성구의 중량은 우주 같은 중량을 가졌으면 그것은 우주의 한 티끌 같은 그런 존재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자들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 큰 강한 배경이 있는데 우리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이나 일차적으로 이 배경이 있어야 되겠고, 성경 말씀의 배경이 있어야 되지 이 배경이 없는 말을 제가 고함을 지르면 어짤 것이오? 제가 용감을 부리면 어짤 것이오? 여기에서 배경으로 후원해 주지 않는데, 책임져 주지 않는데, 천하 인간이 다 옹호를 하면 어짤 것이오? 우리는 ‘천하 인간이 다 옹호해도 이 말씀이 정죄하면 소용없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을 믿는 것이요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분이 했기 때문에 그분이면 그 말씀했고 그 말씀이면 그분이니까 그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이오. 그분을 믿으면 그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인기를 얻는 것 좋지마는 얻는 그거보다도 더 큰 것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당신의 기적과 축복이 나와 함께 하는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보다도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는데 이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완성을 이루어 놓은 그 완성, 예수님의 피가 내 배경이 돼야 됩니다. 그 피만 나와 함께 하시면 모자랄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 대속을 해 놓으신 것은 완전 구원이요, 완전 구원이요, 조금도 흠이 없는 완전 구원이요 그 완전 구원을 우리가 법적으로 입었고 공심판적으로 입었고 계약적으로 입었는데, 그리스도의 심판이, 계약적으로 입었으니까 그것으로 그만 끝나 버리면 좋겠는데, 계약적으로 입은 자에게 ‘네가 정말로 믿나 안 믿나, 네가 인정하고 있나 안 있나’ 하는 그것을 우리 현실에서 시험하시고 요 현실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대속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하는 고것을 실상을 심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을 입었고 예정적 구원을 입었고 창조적 구원을 입었으나 우리가 현실에서 우리가 실행적인, 다시 말하면 믿음의 구원을 입느냐 못 입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의 구원을 입고 있는 것이오.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이기 때문에.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여론이 중하지마는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에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시겠다 했기 때문에 그분의 기적과 축복이 그보다 더 큽니다.

기적과 축복이 있어 봤자 이것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가 나와 동거 동행하는 것이 더 큽니다. 동거 동행하고도 마지막에 결말 짓는 것은 심판이기 때문에 동거 동행하고도 마지막에 심판에 걸려 버리면 헛일입니다. ‘동거 동행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에 걸릴 리가 있는가?’ 발람 선지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을 했지마는 도구로 기계로만 쓰고 마지막에 던져 버렸을 때에 그는 저주받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동거 동행하는 그것도 귀하지마는 그것이 마지막에 최종적인 그 심판에 거게까지 다 함께 해 주셔서 거게 인정을 받아야 되지 인정을 안 받으면이러기 때문에, 천하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사람이 환영하고 인정하는 그것보다도 더 큰 가치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고, 기적과 축복 뿐이면 다인가? 그것보다도 더 큰 가치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걸 압니다. ‘내가 와서 너희와 거처를 함께 하리라’ ‘너를 통해서, 너에게서 나를 나타내리라' 주님이 당신이 당신의 보이지 않는, 도성 인신하셔 가지고 지금 신인 양성 일위로서 계신데 일위로서, 양성 일위이신 그분이 하실 것을 나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성전이요 당신의 지체요 당신의 몸인 것입니다.

이 큰 일이 있고, 이것보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를 어데다 둬야 됩니까? 우리는 가치를 첫째로 심판에 둬야 되겠고 다음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동거 동행하는 데에 둬야 되겠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에 둬야 되겠고, 그다음에는 사람들도 인정을 해야 빛이 되고 덕이 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는 복음 역사를 위해서 그들이 인정하는 그 여론도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서 하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 운동의 역사인 것이지, 우리 내용은 다 돼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을 왜 자꾸 이래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성경이 배경이 되어 주지 않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 그말이오.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다고 했는데 성경이 배경이 되어 주지 않는 이 말을 우리가 해 가지고서 어떻게 감당하고 그 처리를, 뒷 처리를 어떻게 하고, 그래 가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결과가 맺어졌으면 우리가 심판대 앞에 가 가지고 우리가 다 심판을 받는데. 가르침을 받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로 더불어 함께 하라.

좋은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좋은 것을 가르치는 게 뭐이요? 신구약 성경의 도리 가르치는 게 좋은 거 가르치는 게 아닙니까? 그거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자도 행해야 되고, 가르치는 자도 가르치는 거 가지고 다 되는 거 아니고 가르치는 자도 제가 행해야 살고 가르침을 받은 자도 행해야 삽니다.

이런데,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다 너희들을 대신해서 회계할 자처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계산을 대서 다 계산을 보고서, 계산을 대야 될 자처럼 알고 행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잘못 가르쳐 가지고 그 사람이 잘못 됐으면 그 댓가를 우리가 다 내고, 그 사람의 영원한 구원 아닙니까?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사람을 영원히 살리고 구원하는 거 아닙니까? 영원을 성공시키는 것 아닙니까? 이런데 내가 잘못 가르쳤으면은 영원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까지 흘려서 이와같이 해 가지고 완성을 해 놨는데 내가 잘못 가르쳐 가지고 그 구원을 절단냈으면은 그 얼마나 주님의 그 복수가 크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김 현봉 목사님이, 내가 들은, 내가 배운 거는 아닌데 그분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합디다. 어두운 데 쫓겨났다 하는 것은 그것은 다 택자들도 그럴 수 있다.

이래서,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는 다섯 처녀 슬기 없는 다섯 처녀도 구원을 얻었다 하는 고 말을 저와 교리상 일치를 봤습니다. 깨달음의 하나를 봤습니다.

그러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데는 일치를 못 보고 말았습니다.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이 가는 것은 그것은 불택자를 말한다 그렇게 해석을 했는데 저는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그것을 택자의 심신의 기능을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그렇게 저는 깨닫기 때문에 그때에 말을 했으나 서로 교리상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게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말하면서 ‘외식하는 자의 율에 처한다’ 외식하는 자가 뭐입니까? 외식은 껍데기만 꾸미고 속에는, 껍데기만 꾸미고 속에 알맹이를 가리지 못하는 자의 처리라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 법칙에 맞추는 것을 다 가리켜서 성경에 외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법에 맞춘 것을 외식이라고 말했고 성경 법칙에 맞춘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이제 믿음이라 그렇게 말했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이 심신의 기능 구원이지 영 구원이 아닙니다.

또, 고 위에 보면 ‘인자의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 그때 홍수로 멸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하다 망했는데 인자의 때도 그와 같다’ 하시고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이것이 기본구원인 영 구원이라면은 위에 그 말한 것은 뚱딴지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이것이 중생된 영을 가지고, 영을 가지지 안한 사람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는 전부 구원 얻는 우리에게 대해 한 말입니다. ‘인자의 임함도 노아의 때와 같다’ 하는 그것은 구원 얻는 우리 믿는 자에게 권유하는 말씀이지 불택자에게 말하는 것 아닌 것입니다. 또, 고 다음에도 보면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것도 깨어 있으라는 이것이 행위에 책임을 지운 것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요런 데에서 이것이 중생된 영을 가진 사람과 중생된 영을 가지지 못한 불택자와 택자로 요게 보고, 또 요것이 다 택자인데 그의 심신의 기능이 믿음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것으로 보고하는 데에서 이거는 고만 생명과 사망과 그 차이로 갈라져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 건설구원을 이루는 그 폭발력은 다 김이 새어 버려서 다 헛일되고 맙니다.

요것이 여러분들이 깊이 느껴서 ‘이것은 과연 불택자는 버려 두고 택자는 데려간다는 고 말이다 이렇게 보든지 이것은 다 택자에 대해서 한 말이라. 위에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도 다 택자에 말씀을 했는데 요 구원과 멸망이 행위에 근거되기 때문에 행위를 이렇게 해라 그들의 행위는 이렇게 멸망받았다. 그러므로 네가 행위를 이렇게 조심해서 이래 해라 이렇게 한 심신의 기능 구원으로 보느냐 택 불택으로 보느냐 하는 데에서 이 구원의 능력은 다 절단나 버리고 이 구원의 능력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하나님께서 택 불택자를 두고서 말씀한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택 불택자를 말한 것이 아니고 다 택자는 택자인데 심신의 기능 구원에 대해서 말했다’ 이라면 하나님과 그렇게 깨달음이 반대가 됩니까 일치가 됩니까? 어찌됩니까? 일치됩니까 반대됩니까? 여러분들, 만일 하나님께서 택 불택자를 당신이 두고 말씀한 것이라면은 택 불택자로 이렇게 깨닫고 말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하고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지요. 그러나, 택 불택자를 말씀한 것이 아니고 중생된 자들의 그 심신의 기능 구원을 두고서 말씀한 것이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것이라면은 택 불택자로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입니까 하나님과 대립입니까? 대립 아닙니까? 대립이면 하나님이, 거게 대해서 하나님이 같이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깨닫기까지는 당신의 능력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게서 인간의 구원이 마구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받을 심판이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 깨달음은 아무나따나 말을 이와같이 해서가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이 그 계시해 주실 때에 당신의 목적, 그 뭣 때문에 그 계시를 해 주셨습니까? 당신의 목적과 일치가 되고 당신의 사상과 일치가 되고 당신의 뜻에 일치가 되면은 그것이 바로 전능입니다. 전능자와 하나인 것입니다. 그분과 배치된 설교를 했으면은 그분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설교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그 모든 양 무리들에게서 멀리 쫓아 보내 버렸습니다. 자유성을 가지고 쫓아 보냈어. 하나님과 반대된 적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받을 심판이 큰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권고만 하시고 있지마는 함구하고 계시지마는 이것이 간추려져서 다 그대로, 털끝만한 것도 빠짐이 없이, 말 한마디도 빠짐이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다 드러나서 판단 받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거나 깨닫거나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 말씀을 사람에게 인기 끌기 위해 가지고서 묘한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거는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도 분수가 있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할 때에 관주 보고도 연구하지 말아라.

주석 보고도 연구하지 말아라 설교록 보고도 연구하지 말아라. 네가 성경 보고 자꾸 연구할 것은 성경 보고 알맹이 깨달을라고 하지 말아라 성경을 읽는데 저절로 깨닫는 거 있다 제일 처음에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 보면 깨닫는 거 있다. 그저 제일 처음에 깨닫는 거 있다. 깨달은 대로 실행해라. 실행하면 실행하는 것 만치 네가 변화된다 참 내 제자가 돼 변화가 돼. 실행하면 변와된다.

변화된 것만치 진리를 더 정확히 또 깨닫게 된다. 또 깨닫고 난 다음에, 깨달으면 그 진리는 나중에 너를 자유케 한다. 그 진리는 그대로 실행 실천하지 어떤 피조물에게 제재받지 안하고 자유한다. 자유한다 말은 피조물에 제재받지 않는다 그말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 문답하는 문답지에 성경의 도리를 깨닫는 데에 제일 좋은 방편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묻는 말이 있는데 그 답이 뭐입니까? 예?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 하는 고것이 고것 답입니다. 세례 문답의 답이오. 학습 문답에도 답이 고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방법대로는 하지는 안하고 자꾸 지식에 욕심이 있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자기가 위에 올라갈라고 이래 가지고 자꾸, 관주를 찾아 본다. ○○성경을 찾아본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쨌다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가 샀던 책을 째더란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성경을 파는 지부장, 지부사장이오. 와 가지고서 ‘이러는데 그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네가 다른 책은, 이래 팔면 거게는 별별 귀신 책도 있고 별 책이 있지마는 너는 책장사이기 때문에 책을 팔아라. 그러나 인간 말을 성경이라 해 놓은 그런 거는 팔면 안 된다.’ 뭣을, 무슨 뭐 성경 이래 놓고서, ‘무슨 성경이라’ 성경이라니 그 책은 성경 아닙니까? 그 책은 성경 아닙니까? 성경인데 거기 인간들의 말을 거석해서 인간들의 말 그걸 성경화한 거 아닙니까? 이렇츰 판단이 어둡고 둔해서 모릅니까? 관주 성경은, 관주 성경은 글자만 거기 표를 해서 요 어데 있다 어데 있다 같은 말이, 단어가 요게도 있고 조게도 있고 조게도 있다 하는 그것을 이렇게 표해 놓은 그것이 관주지 거기 사람의 말을 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있는 대로 ‘요 단어가 이 성경에도 있고 저 성경에도 있고 이래 있다 그 단어가 여게도 있다 저게도 있다 하는 그걸 소개한 것뿐이자. 그것을 알려 준 거뿐이지, 성경을 알려 준 거뿐이지 거기 사람 말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관주 성경과 이거와는 아닙니다. ‘이것도 관주 성경과 같지 않느냐?’ 하는 그게 배암 말이라 말이오. 사이비한 말이라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첫째 생각할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지 않도록 둘째로 주의할 것은 내가 한 말이 하나님이 같이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다? 내가 해 놓은 말 하나님이 같이 하셔야 되지. ‘옳은 거는 옳다 아닌 거는 아니라만 하라 이에서 지나면은 악으로 좇아난다’ 자기 중심으로 나온다 그말입니다. 이라면 그 일을 누가하고? 그것은 당신이 다 인계 맡아서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이렇게 이 말씀을 설교를 이래 하면 이 교인들은 이해를 못 하고 듣든지 말든지 해도, 다 듣고 이해하면 좋지마는. 첫째로 하나님이 이 말을 책임 지시고 ‘됐다. 옳다’ 찬성을 하시나! 이거 찬성하고 난 다음에는, 이 무리들이 이해가 돼야 될 터인데 이해가 못 되니까 내가 이거 증거하는,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신데, 내가 입으로만 증거하고서 성령이 증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까 내가 성령이 같이 하는 데에 힘을 써야 되겠다 이래서 바울이 늘 힘쓰는 것은 ‘내가 증거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감동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너희들의 믿음이 말에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고 성령에 있기를 내가 원한다. 이걸 힘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같이 해야 되겠다' 같이 하면, 같이 하면 세월이 지나갈지라도 차차차차 그 일은, 알파와 오메가 되신 그분이 책임졌기 때문에 역사가 나타날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에 선교사를 둘을 보냈었는데 하나는 교회를 몇을 세웠고 하나는 그 사람이 충성되게 일은 하고 참 진실로 일은 하기는 하는데 병신 두 사람 구원하고 그 선교사가 죽었다. 그 사람은 뻘뻘 떨면서 성경에 배치되지 안할라고 했는데 그게 다 실패라. 그때는 모두 다, 남산 꺼머쥐기 북산 꺼머쥐기 꺼머다가서 마구 이래 가지고 웅변적으로 이래 가지고 모두 다 정치적으로 활동적으로 이 모든 수단적으로 이런 권세도 타고 저런 권세도 타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유리하다 이렇게 봤지마는 그 이세에 가 가지고서 병신 둘이 교회를 크게 전도를 해 가지고 교회를 많이 세웠고, 두 교회인가 세워 놓고 그 교회는 끝이 없어 고대로 자라가지 못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나는 몰랐는데 그걸 아마, 목사라면 거의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거 통계를 해 가지고 다 그 말을 다 해서 그런 말을 다 들었을 것이오. 그게 뭐이냐? 하나님이 일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겠소? 우리가 설교할 때에는, 우리가 설교할 때에는 첫째로, 껍데기로는, 전지 전능을, 전능을 가진 만능을 가진, 독자적 권위를 가진 이 말씀이 일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 말씀이 일하도록, 이 말씀은,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모든 열방을 파괴 파멸하고 또 건설하고 뽑고 심고’ 말씀이 한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말씀하지 안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말씀이 일할 수 있도록 내가 벙어리같이 전해도 말씀이 일할 수 있도록, 내가 아무리 웅변을 가지고서 천하 사람을 설복시켰다 할지라도 거게는 생명이 없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으면은 이 말씀은 피와 성령과 함께 합니다. 이 말씀은 피와 성령과 함께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이 일할 수 있도록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가 전하는 것 아닙니까? 문체와 그런 것을 해서 알아 듣도록 잘 하면 좋지마는 그리 못 하면 이 말씀을 고대로라도 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말씀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고, 말씀이 일하면 이 말씀은 뭐습니까? 내것을 가지고 증거하리라 말씀을 했습니다.

성령도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왔소. 진리도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왔소. 이러기 때문에 이제 진리가 일하도록 우리가 하는 것이 그것이 능률적이요 성령님이 일하도록 하시는 그게 능률적이요 주님의 이 대속의 공로가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적입니다.

이래서, 최종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심판에 하나든지 둘이든지 통과되도록 하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가치를 이렇게 두고, 우리가 조심해서 그저 거리끼지 않도록 하려는 여게서, 조심하고 조심해서 우리의 전하는 것이 어떤 웅변이나 열변의 말에 있지 안하고 인간들을 감화 감동 시킴에 있지 안하고 진리가 일할 수 있도록 내가 했고 영감이 일할 수 있도록 했고 주의 공로가 일할 수 있도록 하려는 여게 관심을 둔 사람은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바른 데 속했는데 왜 이 사람이 진리를 모르겠소? 왜 깨닫지 못하겠소? 그러나, 모든 육체를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함이라.

육체가 뭐입니까? 영은, 중생된 영은 그따위 자랑을 하지 안합니다. 벌써 안 합니다. 중생된 영은 성령하고 동행합니다. 육체를 자랑한다 말은 심신으로 된 옛사람 자기를 자랑한다 말이오. 심신으로 된 옛사람 ‘자기 인기’ 하는 것은 전부 옛사람이오. 그것 자랑하기 위해서, 그것 나타나기 위해서, 그거 유명하기 위해서 그거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서 ‘저 사람 학자다. 유식한 사람이다. 안다.’ 아마 ○○성경 가지고서 사람 많이 죽였을 것입니다. 여기, 거게서 주석해 놓은 거 그런 거, 옳은 거는 좋지마는 생전 듣지도 못한 거 이렇게 제가 처음보고 하니까 ‘하, 이 유식한 말’ 한마디 떡 해 놓고, 사람 죽이는 말 해 놓고 아, 이랬으니까 ‘이거 이렇게, 이렇게 하나 유식하다 누구도 아직까지 발표하지 못한 걸 내가 지금 발표했다, 이 시골 조사들이 발표 못 한 걸 내가 발표했다. 나는 유식하다.’

제가 ○○교회에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여 년 전인데 집회를 가니까 본과 학생, 그분 내가 이름을 지금 알고는 있는데 말을 못 합니다. 말을 하면 곧 그거 그분도 설교록을 볼 때에 이렇게 자기 인신 공격이라 할까 해서 말을 못 하나 보면 날 말한다 알기는 알 것입니다. 이름 말 안 하니까 대우 할 것 다 했어. 가니까 교인들이, 밤 설교하고 새벽 설교하고 나니까 교인들이 막 몰려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가지고서, 저거 목사 있는데 ‘조사님 한번 물어 봅시다. 그때 나는 조사요 그분은 본과생으로서 그분도 그때 조사입니다. 아직까지 신학 졸업 안 했어.

본과생이고 나는 별과생입니다.

“우리 조사님은 이걸 무엇을, 무엇을 띠띠때때 띠띠때때 말해 놓고서, 이게 원서에 이래 있다. 이게 영어에 이래 있다. 우리 못 하는 말 그래 하면서 거게 있다 하면서 무엇을 가르쳐 주는데 그 가르쳐 주는 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우리가 못 알아 듣겠고 죽을 지경인데 조사님이 와 가지고서 두 시간 설교했는데 우리가 막 살아났습니다. 이만하면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될 걸 확실히 알고 지금 믿겠습니다. 이게 뭐입니까, 뭐입니까? 그분이 그러며 ‘여러분들이 무식해서 모르지’ 그걸 읽으면서 `이거 지금 유명한 아주 학자들의 말에 이렇게 했다’ 하면서 그것을 읽어 주면서 이렇게 거게 읽은 걸 말하는데 그말 하는 걸 우리가 들을 때는 말도 아니고, 예수 믿는 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있다가서 그 자리서 다른 말은 하지를 못하고 ‘사람들의 깨달음이 다 각각 되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 말해도 여러분들이 성경 안 가졌습니까?‘ `성경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있으면 성경 속에 내재적 영감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영감 역사가 있습니다. 또 일반들이 다 깨달은 대로 성경에는 명백성이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를 똑똑히 알려 주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보면 다 되는데 성경보고 예수 믿지 뭐, 그러면 그런 사람은 그래 깨닫고 저런 사람은 저래 깨닫는데 남의 깨달은 것을 전부이 다 자기네들 깨달은 거와 똑 통일을 시킬라 합니까? 공통성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 보고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라고 나갔습니다. ‘예' 그러며 그들이 나갔습니다.

나가고 난 다음에 그 조사한테 말했어. ‘조사님, 지식 가지고서 망하기 쉽습니다.

그 지식을 지금 말하는데 그 지식이 지금 뭐 그 말하는 거 한번 말해 보이소.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이거 신앙 생활하면서 성경에 깨닫고 하는 이것이 더 진리지 무슨 국썩스러운 어떤 말을 들었습니까? 그거 한번 말해 보이소 어떤 건고 한번 들어 봅시다.’ 아무것도 아니라 그말이오! 그 사람이 뭐이냐? 중심을 지식에 두고 있고 지식 위주자라 말이오. 지식주의자라 말이오. 우리가 말하는 거는 반지식주의자가 아니고 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다, 또 하나님이 더 크시다 이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 집회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교회서 얼마 있다가서 배척당해 쫓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조사의 유식한 말 듣고는 못 살겠다’ 그래 가지고 배척당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때에 고려 신학교에서 본과 학생들 별과 학생들 있었는데 본과 학생 쳐 놓고서 교회서 환영받는 조사가 별로이 없었습니다. 또 유력하게 목회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렇소. 그때에 다 별과생들이 다 유명하고 유력하게 일했지. 왜? 그분들은 성령으로 일하고 진리로 일하는데 이 사람들은 인간 말을 도를 삼아 가지고 지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하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할 때에 첫째로 성경에 배경이 돼야 되지 성경이 배경이 안 되면 내가 무슨 변론을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가도 ‘네가 왜 이렇게 가르쳤노?’ ‘성경에 이렇지 않습니까?' 내가 성경을 잘못 택해도 그때까지, 갈 때까지는 ‘성경이 이렇게 때문에 네가 그 성경을 보고 잘못 깨달았다’ 이런 정죄는 받을지라도 성경이 나를 변호해 줄 수 있는 그런 성구를 가지고서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고 우리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해석은 성경으로라야 성경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내 설교에 같이 하시기를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이 말씀으로 모든 교인들이 기적과 축복을 받는 책임이 내요 저주와 진노를 받는 것이 내 책임이기 때문에 기적과 축복을 받도록 하는 그것이 내 책임이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가치가 뭐이냐 하면은 그 교인들이 감화 감동을 받고 깨닫고 하는 것이 그것이 그다음입니다. 그다음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라는 것을 임시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기 위해서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이래 한다는 것은 그거는 참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또 벌로 아무나따나 말을 하고 나면은 그 말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공동체기 때문에, 우리 총공회로 나가는 것은 공동체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람이 잘못 거석해도, 말을 하면 ‘ 저 사람이 어데 속했지?’ ` 저 사람이 총공회에 속했다’ ‘총공회 그 사람들이 이렇게 가르치는가배' 이래 가지고 우리가 도매금으로서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이 넓게 생각지 안하고, 넓게 생각하면 ‘거게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지’ 이라지마는 그렇게 생각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교파에 있으면은 ‘그 ○○교파에서 이래 말한다’ `그 사람이 ○○의 어떤 사람이야?’ ‘○○교파에 좀 유력한 사람이라'그라면 ○○교파에서는 이런 교리와 신조를 이렇게 믿고 있는가?’ 그렇게 사람들이 그렇게 도매금으로 그렇게 여긴다는 것은 그거 필연성이라 그말이오. 물론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어떤 사람을 내가 만나서 어떤 조사님이, 그분은 말하기를 백 목사님의 설교집은 나는 불에 태워 버립니다. 태워 버리고 나는 원고 없이 설교를 합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서 해서,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거 그래 가지고 되겠습니까?’ 이래 하기 때문에 내가 말을, 나는 들을 때에 ‘그게 그건지, 그 사람이 설교록만 보고서 한 자 읽고 또 쳐다보고 또 내려 보고 또 보고 한 자 읽고 자꾸 이라는 거보다는 그걸 자기 속에 다 집어넣어서 자기 것을 삼고 자기 깨달음의 지식을 삼고 이제 설교록 다 태워 버리고 없애 버리고, 이제 다 없애 버리고 성경 본문만으로도 이 성경 가운데는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것을 깨달아서 그렇게 하는, 자기 것을 삼아서, 자기 깨달은 지식을 삼아 가지고서 설교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니까 내가 보기에는 아마 그 사람 같다’ 내가 이래 말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 같아. 아마 그 태운다는 것이 이 설교록 이거 무슨 소용 있느냐, 불에 멸살시키는 것으로 태우는 게 아니라 내 속에 다 집어넣고, 문서만 놓고 항상 하는 그런 사람되지 안하고서 내가 다 속에 넣고, 원고를 놓고 몰라서 줄줄 읽는 그거 가지고는 안 되고 이러니까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는 아마 그걸 것이다 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고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면 그런 것이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똑똑히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기는 모릅니다. 그거 뭐, 이거 깨달은 그건 필요 없고 내 깨달음만 가지고 하겠다 하는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지마는 아마 그렇지는 않지 않겠느냐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이 뭐이든지, 교리라는 것은 이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자기의 깨달음이라 말인데 그 깨달음을 선포해 놓으면 사람에게 자꾸 전달해 가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게 없어지지를 안합니다.

이런고로, 이 교리라 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말인데 이 깨달음으로 교리가 서지면은 그것이 뭐, 사람이 교리를 세워서 교리로 서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역사성을 가지면 말이오, 역사성을 가지면 교리가 돼 버립니다. 이 시대도 그렇게, 그래 깨달은 말이 나가 있고 저 시대도 나가고 벌써 여러 시대, 십 년 백 년 이래 나가 있으면 그게 교리가 아니라도 교리가 돼 버리고 마는 것이오. 또 자기 아는 것이 자기 혼자만 아는 게 아니고 한 사람 두 사람 알아서 이거 모두 다, 사회성 공통성, 모든 사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깨달았고 알고 있으면 그게 교리가 아니라도 교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잘못된 교리를 창설해 내놓으면 어찌 됩니까? 지금까지 우리에게 유명하지 않소? 아다나시우스가 신론을 주장할 때에,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할 때에 그 앞에서 또 제 일인자로서 역사하던 아폴로나리우스입니까? 그 사람이 그 다음에 예수님의 인성을 말할 때에 인성 부정의 제일 앞잡이 된 이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돼 있지 않습니까? 콘스탄티노풀 회의에서 그 사람이 그래 됐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 지금 벌써 전달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을 벌로 할 것이 아니고 이 말이 언제든지, 나쁜 말이면 나쁜 말을 배암이 전해서 그걸 심판대까지 가지고 갑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지고 갑니다. 옳은 말이면 성령이 그것을 들고서 역사해 가지고 그때까지 가지고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기 끌기 위해서 아무나따나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이 ○○성경 이런 것도, 좀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걸 내가 전해 가지고 이게 결과가 어찌 되겠느냐?’ 여게 대해서 책임을 조금이라도 알면은 이런 걸 전하지 안할 것입니다. 필요 없는 그런 학설들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 학설 전해 가지고서 자기가 유명해지는 거보다도 그 학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 정죄받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손해 봤으면 그 배상을 어떻게 물 것입니까? 무슨 담력 가지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거는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과 꼭같은 말이오. 우리가 하나님의 도가 어떤 도인데 이걸 알지도 못하고 되는 대로 자꾸 마구 씨부려 대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번에, 주보에 대해서 그걸 어제 그 사람들에게 좀 보라고 몇을 말하고 이랬었는데 어떻게 봤는지? 내가 어느 하나를 약간 좀 보니까 그거는 남의 말을 인용하는데, 남의 말을 인용하면 꼭 인용을 바로 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콩을 말했는데 팥으로 인용하면서 그 사람을 들어서 말하는 것은 그것은 큰 심판을 받을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꼭 설교에 능력이 어떤 게 능력이며 설교 잘하는 게 어떤 게 설교 잘하는 것이냐? 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알고 깨닫는 그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를 거게 두지 마십시오. 자기 설교하는 것이 그 설교를 들은 사람에게 기적과 축복이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냐, 하나님이 동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심판에 통과할 수 있느냐? 거게다가 가치를 두고, 거게다가 가치를 두면 내가 거게다가 가치를 두기 때문에 거게다가 주력을 해 가지고서 거게 일호 맞추고 이호 맞추고 삼호 맞추고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깨달아서 감동받도록, 마지막에는 사호를 맞출라고 애를 쓸 거 아닙니까? 일 이 삼이 없는 사호만 맞출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벌로이, 어느 사람이 말했다고, 듣기 좋다고, 그 말이 듣기 좋은 것부터 자신이 성화가 안 됐기 때문입니다. 참 내 제자가 되지 안했기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래서, 여게 제일 뭐 또 시간이 지나가니, 여게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구원을 말한 것이냐 건설구원을 말한 것이냐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는 깨달은 것은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인 것을 나는 요렇게 깨닫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 봐서 건설구원에 대한 것으로 나는 요렇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데려감을 당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새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행동한 사람입니다.

다니엘하고, 다니엘 시대에 총리가 셋인데 삼 총리가 일하는데 그 삼 총리가 다 다리오 왕에게 복종해서 그이 시키는대로 일했는데 그이 시키는 대로 일해서, 거기 보니까 다니엘이 무슨 자기 사무 처리한 다 대해서는 아무 흠점을 잡을 것 없다 했으니까 다리오 왕 시키는 대로 다 했고 또 말하기를 다리오왕에게 하나도 손해를 끼치지 안했다고 했으니까 그 말한 대로 대립되지 안하고 하지 안했습니까? 대립되지 안하고 했으나 거기에 다른 총리는 다 버려둠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로 했고 다니엘은 데려감을 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일을 했습니다.

일한 것이 뭐이 표가 나는가? 마지막에 ‘기도하지 마라’ 하는 고 말에, 하나님에게 배치된 말이 한 마디 딱 나오니까 딱 걸려서 표가 나왔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배치된 일이 없을 때에는 아무 표가 나지 안 했습니다.

요것이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하는 것입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새사람이 이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자기의 도구로 삼고 성전으로 입고, 자기 집으로 입고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려 가지고서, 중생된 영 새사람이 마음과 이 몸을 다스려 가지고서 행동한 것과 ,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이 사람이 지금 행동한 것과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이 새사람이 하지 아니하고 어만 사람이 한 것과, 그러면 새사람이 하면 새사람은 무슨 요소가 새사람입니까? 새사람이 한 것은 몇 가지가 합한 것이 새사람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세 가지.

중생된 영, 마음의 기능, 고기덩어리의 기능, 이 셋이 합했을 때에 이것을 가리켜서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중생된 영은 영이라고 했지 새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생된 영은 성령으로 난 거는 영이니’ 말했습니다. 성령으로 난 거는 영이라 알겠습니까? 새사람은 중생된 영이 자기 심신을 점령해 가지고서 이 심신과 심신의 기능과 중생된 영이 하나됐을 때에 새사람이고 새사람 됐다가 즉시 옛사람 되고 새사람 됐다가 즉시 옛사람 되고 ‘속지 말아라 죄를 안 지을 때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됐고 금방 마귀의 자식이 된다’ 이렇게 말했어. 금방 마귀 자식이 된다 말이 뭐이오? 당장 마귀 자식 되고 당장 하나님의 아들 된다는 그거는 뭐이냐 하면 이 심신이 중생된 영과 일치가 되나 안 되나 거게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게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중생된 영과 심신의 기능이 하나가 돼 가지고서 이제. 꼭 같은 자리에서, 다니엘이 총리한 것은 그거는 중생된 영과 그 심신의 기능이 일치돼 가지고 그와같이 한 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중생이 있었느냐? 중생이 있지 안했으나 미래의 중생을 가져서 그때의 그 영감이 내재해 가지고서 영감하지는 안하지마는 외부에서 그 성령이 주관했습니다, 성령이.

그렇기 때문에 구약 영감과 신약 영감이 다릅니다. 또, 신약에 와 가지고서 그 중생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무덤에서 살아난 것으로 이제 내재적 영감으로 중생된 것을 그때 표현했으나 다니엘 그런 사람도 다 미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다 새로와져 가지고 있으나 완성을 이루지 못해.

완성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가 있어야 완성인데 우리가 있지 않으면 완성을 못 이룬다 하는 것은, 히브리 11장 끝절에, 그들이 이렇게 생명 내어 놓은 결사적인 신앙을 가졌지마는 우리가 아니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다 하는 그말은 뭐이냐 하면은 대속주의 이 대속이, 십자가의 대속이 되기 전에는 그 구약에 생명 내놓은 신앙들이지마는 그거는 다, 아직까지 다 미결이요 미완성이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됐다 하는 것을 표시한 성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한 자리에서 우리가 이 시간 지금 예배드릴 때에도 새사람으로 예배드릴 수도 있고 옛사람으로 예배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심신을 악령 악성 악습이 지금 주장을 해 가지고, 이래 앉았으면서도 ‘아이구, 시간이 너무 지루하다. 내가 뭘 해야 될 터인데’ 악령의 감화 아닙니까? ‘뭐 암만 설교는 하지마는 나는 지금 무엇이 바쁜데’ 자기 중심 그것이 악성 아닙니까? ‘에, 시간 너무 지루하다 안 됐다’ 그게 악습 아닙니까? 이게 그런 버릇이 늘어 가지고 그렇다 그말이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얼마 가도 요 진리를 배워야 되겠다는 그것이 있을 사람 있을 거라. 또 여기서 다 같이 들어도, 들을 때에 ‘아멘, 아멘.’ 여게는 아멘 안 하는데 아멘 하는 게 좋습니다. 좋은 것 따라가면 좋습니다.

자기가 이래 듣다가 깨닫다가 마음에 이럴 때에는 ‘좋으면 `아멘!’ 이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왜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 했는데 왜 우리는 안 합니까? 성경에 그 듣는 자들이 아멘 한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아멘을 안 하면 자기가 듣고 깨달을 때는, 깨닫는 것을, 듣고 옳은 것을 깨달으면서 ‘픽!’ 이래 보십시오. 옳은 말 자기가 깨달으면, 옳게 깨달으면 ‘픽!' 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사람이, 설교자가 거기 대해서 은혜를 받겠습니까 못 받겠습니까? 어때요? ‘저 사람이 픽 하는 거 보니까 뭐 내가 잘못됐나 뭐 내가 그 사람에게 뭐 어찌 됐나?’ 이럴 거 아니겠습니까? 그거 들을 때 그 사람이 아멘을 못 하면 ‘과연’, 그 사람이 깨달았다는 것을 들을 때에 설교자는 기쁩니다. 여러분들이 다 여기 교역자가 많이 있지마는 그렇지 않습디까? 교인들이 들어 깨달으면 여러분들이 기쁩디까 안 기쁩디까? 들어 깨달아서 기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다 그렇지요.

말해 놓으니까 이거 그 사람이 좋다 하는 것이 만일 그렇다 할지라도 입을 삐쭉거리며 ‘픽!’ 이래 삐쭉거리며 비웃고 이래 버리면 설교하는 사람이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요것을, 설교 증거할 때에 요렇게 조심 있게 요렇게 증거를 해서 할라고 하면은 요게 바로 되어집니다. 제가 볼 때에는 우리 교회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문제는 뭐이냐 하면은 자기 나타낼라 하는 거 이게 제일 문제입니다. 자기 나타낼라고, 자기 인기 나타낼라고, 자기 좀 유명한 거 나타내고 유식한 거 나타내고, 생전 무식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어째 한 마디 들어 놓으면 ‘나도 이거 안다’ 이래 가지고 말하면 `저거는 제게 부합지도 안하는 말을, 자기 분수에 맞지도 안하는 말을 한다’ 이래 가지고서 그런 말 많이 들었소.

밑에 교인들로 있지마는 그 사람들이 일본에 다 동경 대학에 졸업한 사람들도 거기 있고 또 거기 뭐 다 유명한 대학에 졸업한 사람도 있고 유명한 학자들도 있고 또 다 많이 있는데 자꾸 이라니까 그 사람이 무슨 말인지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다고서 자기도 모르는 말을 뭐 책을 보고서 자꾸 떠뜸거리고 있으니 사람이 답답해 못 견디겠다고서. 아마 그것은 이런 말을 듣고 이런 말을 보고서 하는 것 같다고서, 이런 말을 갖다 썼는데 그 말은 그런 데 쓰는 게 아닌데 얼토당토 안 한데 그 문자를 하나를 써 버리고 나니까 그게 그것을 소위 말하기를 말 똥싼다 이랍니다. 말 설사한다 이랍니다. 그 말을, 입에 안 된 말이라도 말을 똥싼다. 말 똥쌌다. 말, 말 설사 했다 이래 말해요. 정상이 아니라 그말이오. 안 할 말을 했다 그말이오. 바로 쓰지 못했다 말이오. 정상으로 나온 게 아니라 그말이오.

여러분들, 자기 나타낼라고 하는 데에는 꼭 똥이 따라 옵니다. 수치가 따라 오는 줄 아십시오. 어짜든지, 모르는데, 모르면 모르는 거 좋습니다. 우리가 다 알 수가 있습니까? 모르면서 그 말 한 마디 단어 하나를 말하면서 그 단어를 내가 모른다 하면 내가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까 그 단어를 아는 척 하자 하고서 모르는 단어를 아는 척 하면은 반드시 고 뒤에 우사가 따라 옵니다. 그 못난 사람이오.

‘나는 그 단어가 무슨 단어인지 모릅니다. 그거 무슨 단어입니까?’ 우리가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이 이런 단어도 모르는갑다 하면서 가르쳐 주면은 고때에 배우고 난 다음에는, 그러냐고서 똑똑히 알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그다음에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거게서는 주저하지 안하고 고 단어는 자기 단어가 돼 가지고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꼭 자기를 나타내서 존영하게 하자는 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낮추시고 맙니다. 자기를 높일라 하는 데에는 반드시 끌어 내리고야 맙니다. 주님만 높이고 자기는 주님 높이는 사다리가 될라고 할 때는 자기가 높아지지 안하는 길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 데려가는 사람은, 새사람이 할 때에 그 생활은 다 살게 되고, 심신의 기능이 영하고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움직이니까 그거는 살 것 아니겠습니까? 산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생명에 속하고. 심신의 기능이 일은 같이 하지마는 중생된 영과 하나되지 안하고 악령하고 그 마음이 하나되고 악성하고 하나되고 악습하고 하나돼 가지고서 행동 했으니까 행동은 꼭 같지마는 속에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는 기능이 멸망하고 하나는 기능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면 도적 맞지 않는다. 깨어 있으면 도적 맞지 않는다. 깨어 있는 게 뭐이 깨어 있는 것입니까? 어떤 게 깨어 있는 것입니까? 이것도 바로 알아야지요. 깨어 있는 걸, 아무나 웅변을 안 붙여도 좋습니다. 깨어 있는 것이 뭐이 깨어 있는 것이냐? 깨어 있는 것은 새사람으로 살라 그말입니다.

새사람으로 살라 그말이오. 새사람으로 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라 그말입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라. 그 힘으로 살아라.

우리가, 우리가 이 세 가지 힘으로 살아나지 안했습니까?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살아났어. 우리가 증거하는 것이 이 셋이 하는 증거가 내 입을 통해서 나와야 생명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 세 가지의 배치된 말을 천하 학자를 다 끌어다 들이면 그 사망이 더 클 것 뿐이지 무슨 가치 있습니까? 요것도 깨어 있으라 말은 새사람으로 살라 그말입니다.

또, 때를 따라서 양식 나눠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새사람으로 살면 그 자체가 영생을 얻게 된다. 새사람으로 살면 자기의 소유 하나도 손해 보지 안하고 영원히 자기 소유를 만들게 된다. ‘모든 소유를 다 맡김 받으리라.’ 새사람으로 살면 무궁한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서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내것으로서 맡겨서 내가 위임 통치를 하게 된다. 이거면 다 아닙니까? 때리는 것은 말했지요? 그것 말할 시간이 없으니까, 때리는 건 말했으니까 알 것이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새사람으로 살라고 하면은 말로는 쉽지만 어떻게 하면 사는가? 새사람으로 사는 그 순서는 그러합니다. 내가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이 성경 말씀을 준해서 살라고 내가 현실에서 애를 씁니다. 이 현실에 애를 쓰면은 이 성경 말씀은 어데로 인도합니까? 성경 말씀은 성령에게로 인도합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에 인도해서 성령을 만나게 합니다.

성경 말씀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성령을 영접하지 성경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안하고는 성령을 영접하는 수가 없습니다. 그거는 마신이오. 성령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내가 성경 말씀에 복종해서 이래 하면은, 복종해서,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이래 해서 성경 말씀에 복종해서, 복종한다 말은 성경 말씀의 인도를 받는 거 아닙니까? 인도를 받으면, 그라다가 인도 받아 가지고 보면은, 힘을 쓰다 보면은 영감을 만났습니다. 영감을 만나게 됩니다. 영감을 만나게 하는 안내자가 누구냐 하면은 이제 문서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게 진리요.

진리가 인도해서 영감을 만나게 합니다.

그러면 진리와 영감을 만났으면 진리와 영감은 뭘 소개합니까? 진리와 영감이 어데로 인도합니까? 진리와 영감이 어데로 인도합니까? 저 뒤에, 뭐 어데 인도합니까? 한번 말해 봐요. 어데로 인도합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이 뭐하러 왔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똑똑히 전해서 대속의 소유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이 역사합니다. 진리는 뭐 할라고 역사합니까? 진리도 내나 이 대속을 소개하기 위해서 역사합니다. 이래서, 새사람으로 사는 이 생활을, 우리가 영은 우리가 중생한 영이지마는 영을 뭐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 영은, 장성하면 영은 알지마는 영이 장성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났지마는 제가 저를 모릅니다. 제가 존재가 있는지 몰라요. 장성하면 나이도 알고 제 눈도 알고 제 코도 알고 뭐 다, 제 부모도 알고 알지마는 이거 모양으로 중생된 영은 어려도, 이러기 때문에, 어릴 때는 이 심신이 역사합니다. 역사하기 때문에 이 심신이 이 계시 말씀대로 이와같이 살라고 애를 쓰면 그라다 보면은 나중에 성령의 감화의 생활이 됩니다. 성령의 감화의 생활이 돼요.

성령의 감화의 생활이 되면 성령 감화의 진리가 뭐 합니까? 성령 감화의 생활이 되면 성령과 진리는 전적, 예수님의 사죄를 입었으니, 사죄를 네가 있었으니 사죄 입은 자이니까 사죄를 입은 자로 살아라 말합니다. 칭의를 입은 자로 살아라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친돼서 하나님과 너는 떨어질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증거해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결합된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합을 시키는 게 아니라 결합된 자로 살게 하는 것이오. 우리가 이와같이 된 것을 알려 주는 것이오.

하나님과 우리와의 결합돼서 영생을 얻었는데 이 영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본을 얼마나 들였습니까? 당신이 도성 인신하셨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지, 영원히 피조물의 형상을 입으셨지,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걸 예정하셨지,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걸 창조하셨지,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걸 다 섭리하시지, 뭐 미국 나라 소련 나라 지금 뭐 어쨌다 하는 거 그게 뭐 때문에요? 내 구원 위해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큰 자본을 들여서 했는데 그분과 우리와 끊어집니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연결됐는데 끊어집니까? 끊어지지 않는데 믿지 않으니까 진리와 성령이 믿게 하는 것이니까 진리대로 성령대로 하면은 예수님의 피의 이 세 가지 지극히 큰 이 공로면 다입니다. 전부 다요.

우리 구원 다 이루어 놨소. 이것을 내가 입고 있는데 입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벗은 자로 살기 때문에 우리 기능은 다 죽습니다. 이 대속을 입은 자인 것을 알고 입은 자로 살면 우리의 기능은 그때부터 다, 산 기능이 다 되고 맙니다.

이래서, 이것이 깬 생활이요, 이것이 데려감을 당할 생활이요, 이것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자기 것을 영원히 삼을 수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걸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이게 없는 자는, 이게 없는 자는 청산 유수로 가지고 말을 한다고 해도 이거는 사람을 정죄해서 죽이는 말입니다. 때리고, 주객으로 더불어 취한 게 뭐이오. 주객으로 더불어 취한 게 뭐입니까? 주객으로 더불어 취한 것이 ○○성경 그런 걸로 더불어 취하는 것이, 그 교훈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 내나 술친구 친하고 술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에 유익이 없는, 인간들이 자기, 책을 보면 압니다. 자기 인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한 것은 거게는 마귀가 있지 성령은 내재하지 않습니다. 몰라도 자기가 무엇인가 깨달은 것을 알릴라고 애를 쓰는 그것과 자기 명예주의로 나오는 것이, 보면은 압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알 수가 있어. ○○성경이라는 말 한 마디에서, 왜? 제가 거기 ○○성경이라 그 책은 다 성경 아닙니까? 그 책은 성경이 아닙니까 ○○성경이라 하니까 그 책이 성경 ○○아니오. 성경 아닙니까? ○○이라는 저는 뭐이요? 저는 어떤 자요? 제가 신구약을 계시했습니까? 이거는 다 선지 사도들이 계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오. 제 말이 아니오. 제가 어데, ○○이라고 제 이름을 떡 붙여서 그따위 행세를 하고 있으며 또 거게 여러 가지 쓰지 못할, 이 모든 불신자들이 다, 불신, 마귀들이 말해 놓은 그런 말을 전부 다 넣어 가지고 ‘이게 성경이다’ 이래도 모릅니까? 눈이 그렇츰 어둡습니까? 심령이 그렇츰 어둡습니까? 그것이 다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때리는 자들이니까 그자들에게 대한 처할 율에, 외식하는 율에 처해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습니다. 이를 갈고 있다니? 우리는 하늘나라 가는데 누가 갈아요?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갑니다.

여러분들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정치가도 되고 대통령도다 하고 이와같이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의 영이 일합니까 심신이 일합니까? 그 인격은 뭐이요? 그 인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격이 있소 없소? 불신자 저 소련에 요새 수상의 이름이 뭐이요? 내가 그거 들어도 모르겠다. 소련에 있는 수상 그 사람이 영의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지금, 세계에 유명한 인격성을 가지고 하는 것은 그거 무엇이 하고 있습니까? 심신이 하고 있습니다. 심신. 여러분들, 영은 신격을 닮은 것이요, 우리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영을 모형되어 있는 것이요, 우리의 몸은 마음을 모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얼굴 봐서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묘하게 돼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의 심신의 기능이, 영은 다 구원 얻었지만 심신의 기능이 다 갔으니까 이제 그 사람이 예수 믿지 안할 때에 그 사람의 기능이 다 갔으니까 이를 갈 수 있소 없소? 고통을 느낄 수 있소 없소? 그것이 이를 갈며 있는 것은 그 자기의 기능을 자기가 죽였는데, 죽였는데 그것들이 지옥에 가서 슬피 울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이를 갈고 있으니까 제 주체가 그와같이 했으니까 하늘나라 가서 평안하겠소 안 평안하겠소? 이러니까,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 구원 얻는 거는 뭐냐? 뜨겁다 말이오. 부끄럽다 말이오, 뭐. 거게는 구더기도 타 죽지 안해. 뭐이냐? 부끄럽고 뜨겁고 미안하고 수치스럽고 견디지 못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기 때문에 구더기도 지옥 불에는 타서 죽지 않는다 고렇게 성경에 밝혀 놔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한 말씀 한 말씀을 우리가 조심있게 전하고 그렇게 헛된 만용을 가지고, 어리석은 용기를 가지고서 아무나따나 전해서 인기나 끌라 하는 그런 짓을 하지 맙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해도 우리를 보고 그 사람들이, 욕을 하지마는 ‘저 뭐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하는 말이 요 성경을 가지고 또박또박 성경 한 절에 근거를 해 가지고 이래 하기 때문에 이래 나가서, 예를 들면은 마태복음 24장이면 24장 40절 이하에 쭉 있는 이것을, 일반이 다 듣기는 대개는, 대개는 이것을 다 택 불택으로 말하고 있는데 여게는 택 불택이 아니고 이거는 심신의 기능이 구원 얻느냐 못 었느냐 말한다 하니 그분들이 ‘별스러운 말 한다’ 대적해서 `이단이다' 많이 말했지마는 이게 맞았으면 이단이라는 말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이게 옳다는 것을 선전해 주는 것입니다. 많이, 이단이라고 말한 사람이 백 명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게 옳으면은 그 사람들이 백 명이 다 증거 대야 될 거 아닙니까? ‘우리는 틀린 것 말했다. 틀린 것 말했다’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에 꼭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 존재가 지금 남아 있고 그들이 아무리 볶아도 이와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성경에 근거하지 못하고 아무나따나 이런 거 저런 걸 웅변을 해 가지고서, 그저 이 세상이 그런 줄 아는, 그들이 말하는 그것이 아니고 뭐 욕을 하고 자꾸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그거 못하겠다’ 이래 가지고서 퇴보하기 때문에 내가 좀 나무랜 일이 있었습니다. 욕을 하는 것이, 욕을 왜 하는 게 아니라, 욕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오. 욕을 하는 것이 욕을 얻어 먹을 만한 그 사실이 있어서 욕을 얻어 먹으면은 그 욕은 자기가 얻어 먹을 욕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서 욕을 얻어 먹을 걸 지금 욕 얻어 먹으니까 거게서 회개하면 유익이 되어지는 것이고 욕 얻어 먹을 일이 없고 속에는 옳은데 틀렸다고 이 모든 사람들이 하면은 모든 사람이 틀렸다고 하는 그 사람은 나중에 옳다고 영원히 증거해야 될 사람이 됐기 때문에 많은 부하가 생겼습니다. 많은 부하가 생겼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권위를, 권위를 어데 두느냐 하나님의 요 말씀에다 권위를 두고 그보다는 하나님이 동거 동행하는 데다가 권위를 두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에 권위를 두고서, 하나님이 옳다 인정해야 된다 말이오. 시편 1편에 ‘하나님이 옳다 인정하신다’ 옳다 인정한다는 그게 얼마나 큽니까' 그분이 옳다 인정하면 다 됐어. 온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문제가 뭐입니까? 그분이 인정하면 되지.

이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자기가 아무나따나 이래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똑똑히 알고 요 진리에 딱 근거해서 아예 앞으로 얼마든지 심판날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판 앞에까지 갈 요량 하고서 우리는 말씀을 또박또박 진리에 이탈되지 안 하도록, 더디도 좋습니다. 고렇게 할라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 증거는 뭐이냐?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요. 그리 안 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안해요. 축복이 나타나지 안해요. 하나님이 책임지지 안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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