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11:31
생사의 갈랫길
1980년 1월 20일 주일오전
본문: 요한복음 3: 22∼30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하 하니라
29절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그 '나' 字가 틀렸습니다. 신랑이니 '니' 字로 고쳐야 됩니다. 지난 오일밤 예배에 혹 참석 못한 사람들은 모를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오일 예배 끝에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에게 헌신할 세 사람을 전도사로 인어 했습니다. 서천석 집사님은 서천석 전도사님으로, 신옥범 집사님은 신옥범 전도사님으로, 김병춘 집사님은 김병춘 전도사님로 각각 임명 했습니다. 곧 지정된 교회로 부임할 터인데, 여러 가지 좀 사정상 각각 며칠씩 지체돼서 좀 더디 가는 사람도 있고, 또 속히 가는 사람도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그 분들은 전도사님이 됐기 때문에 전도사님이라고 칭호를 부르든지 조사님이라고 그렇게 부르든지 하고, 다 중한 사명을 갖고 나가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배후에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길러서 보낸 하나님의 종들인데, 끝까지 우리가 그 책임을 지고, 배후에 기도의 도움이 있어야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이 말씀은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연결점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선지. 세례요한의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는 중대한 문제가 어디로 속해야 되느냐 하는 이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지자 된 것을 증거도 했고. 또 모든 유대인들이 다 선지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생활을 끝내시고, 공생활에 출발하실 때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회개하는 세례인데, 예수님은 회개할 세례가 필요가 없지마는 우리를 대신하시는 대속주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는 것을 대신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고 가실 때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다 요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을 가르쳐 증거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구약시대에 짐승으로 하나님 앞에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번제 이렇게 드릴 때에 짐승으로 드린 그 짐승은 앞으로 세상죄를 담당하실 여인의 후손, 예수님을 하나 예표로 하나님이 정해주셔서 짐승으로 제사를,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서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하고 하나님에게 바쳐 영생하게 되는 이 의식과 제도를 세우신 것은 예수님을 예표하신 것인데 이제까지 모든 교회들이 예표인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던 그 실상인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증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 온자다. 나는 인간의 구주도 아니라. 구주에 대해서 증거하러 왔다고 그렇게 밝힌 일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세례를 주시고, 또, 세례요한은 세례요한대로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유대인들 가운데에 이 결례라고 하는 것은 세례 전에 있었던 깨끗게 하는 예인데, 이 결례에 대해서 서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결례에 대한 논란이 있은지 그 결과로 이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와 가지고 결례에 대해서 물을려고 찾아 왔습니다.
찾아 와 가지고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생님, 아 선생님이 그 전에 가르치던 아, 그분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데 선생님한테 세례받으러 오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세례 받으러 갑니다. 사람들이 전부 그리 몰립니다. 그 전에는 선생님에게 다 모든 사람들이 다 몰려 왔는데, 우리가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갑니다. 이렇게 세례요한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주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아니한 일은 아무일도 없다. 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일이 시발돼서 나오는 것이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시고 또, 그 다음에 말하기를 내가 그 전에 너희들에게도 말하지 아니했느냐 '나는 그리스도 아니라 인생의 구주가 아니라 구주에 대해서 증거하러 온 자' 라고 한 그대로 이 사실에 있어서 내가 떠나고 나면 증거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증거한 그 증거를 계대해서 증거를 해야 할 자들은 너거인데, 너거가 이렇게 말하면 어찌 되느냐?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요한이가 말하기를 마치 중매쟁이가 그 결혼식을 거쳐서 결혼이 돼야 자기 사명을 다 하는 것인데 결혼식날 신랑이 오지 아니해도 걱정. 신부될 사람이 오지 아니해도 걱정. 그러다가 이제 신부는 와 있는데 신랑이 오지 않으니까 기다라고 걱정하다가, 신랑오는 소리를 들으면 아, 이제 신랑온다 하고서 그 중매하는 사람이 이제는 신랑이 오니까 자기하던 목적이 달성하게 되기 때문에 기뻐한다. 그 중매쟁이가 기뻐한다. 신랑 오는 소리를 듣고서 기뻐한다. 이와 같은 기쁨이 내게 충만하다. 이런 성질의 기쁨이 나에게 충만하다.
이렇게 세례요한이 말을 하고 또, 마지막으로 말을 하기를 그는 점점 흥해야 하고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차차 차차 사라져서 보이지 아니해야 된다. 이 말씀을 하고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은 구약교회가 신약교회로 교체될 때에 구약교회의 교회에서 신약교회가 움틀 때의 바로 그 시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고로 이 말씀은 우리가 껍데기 예수 믿는 사람이 알맹이 예수교인이 되는 그 시점의 그 위치의 중요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사람을 근본으로 한 인본주의의 신앙가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가와가 다릅니다. 인본주의 신앙과 신본주의 신앙이 다르고, 예수님을 믿되, 세상주의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릅니다.
이래서 오늘 이 말씀은 묵은 데에서 새로운 것으로 새로워지는 데에 대단히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주고 있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22절로 30절까지 봉독했는데. 22절에는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으셨느냐 하는 그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도록 과제를 주셨습니다. 25절부터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갈라고 하면 실질적으로 당면되는 이 사실을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25절에 그들이 모여가지고 결례(潔禮)에 대해서 결례란 말은 깨끗할 결(潔)자 예(禮)라는 예자. 그래 깨끗하게 하는 예라 그말입니다. 청결이라 하는 그 결(潔)字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이 의식을 주어 가지고 하나님 백성들을 깨끗게 하는 역사를 하게 하던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 제도입니다. 이 결례에 대해서 저희들끼리 논란이 났습니다. 이것이 거게서 그만 끝내지 아니하고, 마지막 세례요한 예수님과의 그 사이의 그 분기점의 중대한 역할을 하는 그 시발이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나 하나님은 다 아시고, 또 우리는 모르나 악령은 우리보다 아는 범위가 넓습니다.
그러기에 악령은 우리가 아는 범위 밖에서 폭 넓게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역사를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아니하고는 악령의 이 넓은 보재기 속에 자루 속에 말려 들어가서 죽지 아니할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의 지혜로만 이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례에 대해서 이렇게 논란난 것이 우연히 된 일이라. 만나다 보니까 그런 말이 났다. 이렇게 사람들은 알기 쉽지마는 악령은 계획적으로 범위 넓게 여기서부터 유대교를 예수교로 이렇게 새로워지는 이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할려고 방해의 역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좋은 문제나 나쁜 문제나 가까운 사람으로나 먼 사람으로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지고 오는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지고 오는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삼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접촉되는 그 문제는 내가 잘하면 내 구원에 유익이 되고 가지고 온 그 사람도 유익을 보고, 내가 잘못하면 나도 구원이 실패를 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도 구원의 실패를 합니다.
우리가 사람 접촉이 될 때에는 단순히 물질이면 물질. 사건이면 사건. 정서면 정서 이것을 들고 왔다고 그것 뿐으로 생각하면 실패입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보다 큰 악령의 굉장한 구원방해가 접선되어 있고, 또, 거기에는 악령의 그 방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구원이 접선되어 있는 이 두가지 접선과 자기들의 인간이라는 인간과 이 삼각점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이 초점이라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해야 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돈 말하니까 돈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사건에 대해서 말하니까 사건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껍데기로 사는 사람이요. 악령의 궤휼에 말려들어가지 아니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구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두 사람이 다 죽고, 한 사람이 살면 두 사람이 다 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접촉에는 언제나 이 동기가 어데서 났으며, 목적이 어데 있으며, 여기에 관련된 영이 어떠하며, 나의 취할 길이 어떠한가 하는 이것을 찾아가지고 그 현실을 통과할 때에 자기도 살고 자기를 접한 사람도 삽니다. 산다는 것은 인간이 좋아한다고 사는 게 아니고 인간이 싫어한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거게는 하나님이 긍휼과 하나님 편에 사는 것과 악령의 궤휼에서 벗어나는 이것으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우연한 그 결례의 논란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어디에 번져 나갔느냐? 선생님, 아 선생님에게 다 몰려오던 사람이 그전에 선생님이 증거하던 그 사람에게도 다 몰려가 버리고 선생님에게는 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둘째 죄악으로, 아담이 범죄한 죄악은 원죄고, 가인과 아벨이 범죄한 죄악은 본죄입니다. 본죄. 본죄 중에 제일 우두머리 종자적 죄악은 뭐이냐 하면 시기입니다. 이것이 제일 첫 죄악이요. 본죄의 종자적인 죄악입니다.
아, 선생님, 선생님에게 올 모든 사람들이 저 가르친 그 예수라 하는 그 사람에게 가 가지고 세례를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사람이 되고 선생님을 배반하고 지금 떠납니다. 선생님에게 오지 아니하고 전부 그리 갑니다. 하는 요말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접할때에는 반드시 요런 성질의 알맹이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아,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으로, 자기중심으로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모여들었는데 이제는 중심을 뺏겼소. 자기 중심으로 모여들었는데, 자기 중심을 버리고 그 자기가 가르치던 뭐 예수라 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 그 사람 중심으로만 모아듭니다. 이렇게 해서 그 찾아온 그 무리로 인하여 세례요한에게 온 목적과 주는 충격은 뭐이냐? 세례요한 자기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 온 사람은 몰라도 그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냐 자기 중심이냐? 요 두가지를 가지고 판정을 지우도록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인간접촉의 모든 목적입니다.
동기는 이런 일 저런 일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그 일은 악령과 성령과 그 사람과의 관련된 일인데, 그 일어난 일의 목적은 뭐이냐? 일어난 일의 목적은 뭐이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소속하느냐 인간에게 소속하느냐? 이 결말을 지우기 위해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접촉되는 일은 그 접촉으로 인해서 내가 하나님과 진리에 중심으로 내가 움직여 처리를 하느냐? 나와 내 형편으로 중심을 삼아서 판정을 하고 처리를 하느냐? 요 결말을 짓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일이 그 이면에는 이것입니다.
교묘하게도 이 일은 하나님과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은 진리신데, 하나님과 진리와 세례요한과 이 둘이 시기하게 한 것이 요것이 요 접촉의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올때에 요 맛배기 안경을 쓰지 아니하고, 요 진리로 안약을 바르지 아니하고, 접촉을 하면 이런 돈 문제라 이런 사건문제라 인정문제라 하지마는 진리를 가지고 똑똑히 파악을 하고 보며는 그거는 다 껍데기요. 그건 다 껍데기입니다. 돈을 들고 말해도 껍데기요. 사건을 들고 말해도 껍데기요. 감정을 들고 말해도 껍데기요. 인정을 들고 말해도 껍데기요. 사랑을 들고 말해도 껍데기입니다.
그 알맹이는 내가 사람을 접촉하는데에 어떤 사건의 꺼풀을 가지고 왔든지, 그 원인은 악령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원된것이며, 그 목적은 내가 접하는 거기에서 내가 취하는 태도와 내 방편이 하나님과 진리를 중심으로 내가 그 사건을 인해서 판정을 지우느냐? 자기 중심과 이 세상 것을 인하여서 판정을 지우느냐? 요 둘이 판정되어지는 고것이 알맹입니다. 고기에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믿음이 없을때와 안 믿는 때의 사람들은 전부가 한건 한건 요렇게 부딪혔을 때에 고 사건은 하나님이냐 내냐 요 둘이 견제하고 비중을 다는데. 고럴때에 하나님은 버리고 다 자기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는 버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차지해서 판정지우는 그 결말을 내는 것이 전 인류입니다.
다만 성령의 감화 감동이 왔을때에 (참, 기가 차요. 꾸벅 꾸벅 조니 뭐 아요.) 모르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인간의 도덕적으로 해야 그까짓게 신앙생활 아니요 껍데기요. 그게 아니라 요걸 알아야 됩니다. 요 눈을 뜨고 바로 요것을 견해해야 되지, 아니하면 헛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 밥 안 먹고 사요? 안 믿는 사람은 지위, 권세, 명예, 재벌이 안 됩니까? 그거 예수 믿어 복 받은 거 아니요. 이기나 그기나 다 땅에 것입니다. 요것이 판정돼야 되요.
나 없는데 어떤 사람이 논리가 논단이 났든지 우연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우연은 없습니다. 목적이 똑똑이 있습니다. 인간은 몰라도 그 근원은 성령과 악령으로 지금 시작된 일입니다. 나 없는데 일어난 일. 일어난 말. 일어난 물건 그런 것들이 나에게 부딪혀 질 때에는 돈차지 하라고 돈 온 것아니요. 권세 차지하라고 권세 온 것 아니요. 욕 차지하라고 욕 온 것 아니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일단 내게 접선되었을 때에는 접선된 목적은 죽느냐 사느냐 고것이요. 결말은 죽느냐 사느냐 고것입니다.
그 접선에서 진리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내냐,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어느 중심이며 어느 것을 네가 차지하겠느냐? 어느 중심이며 어느 것을 네가 소유하겠느냐? 진리를 소유하겠느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소유하겠느냐? 하나님이 중심이 되려느냐? 너의 인간이 중심이 되려느냐? 요것이 결정지워 지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단순히 오지 아니했고. 기묘하게 세례요한의 감정을, 세례요한의 인간적 욕심을, 세례요한의 인간적 그 위치나 형편을, 강하게 충격시키는, 강하게 충격시키는 요 시기를 가지고 딱 왔습니다.
아, 모든사람들이 다 세례요한을 따라서 세례요한의 제자가 되고 부하가 되고 세례요한 중심으로 세례요한이 세월이 났는데 아, 이제는 세례요한을 당신을 버리고 다 그리 사람들이 몰려서 거게서 세례를 받습니다. 인기가 그리 끄여 집디다. 중심이 그리 옮겨 집디다. 사람들이 다 그리 속합디다. 요렇게 충격을 줄 때에 세례요한은 거기서 자기의 태도를 밝혔습니다.
27절에 '하나님께로서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어떤 그 인간 행동이든지, 어떤 그 움직임이든지, 내게 좋은 것으로 오든지, 나쁜 것으로 오든지, 나를 해치든지, 유익되게 하든지. 나를 대적하든지, 환영하든지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인다. 공산주의가 예수 믿지 말라고 무기를 들고서 해한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움직임이 없다. 하나님께서 활동계와 공간계를 다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이 공간속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활동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섭리를 세례요한은 믿었습니다.
아, 그가 그렇게 합니다. 그가 세월이 나고 이렇습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인간이 할 수가 없다. 그것도 하나님에게서 왔다. 모든 부딪히는 일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네가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고, 다만 그런 것들이 왔는데, 너 할 일이 뭐냐 본인이 할 일이 뭐냐 내가 할 일이 뭐이냐 고것은 고 다음에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어떤 것이 부딪혀져도 그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다고 생각하면 실수합니다. 그것을 원수라고 대적이라고만 선입적 관념을 가져도 실수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게 대해서 상대하신 것은, 세상임금이 오겠으나 악령이 와 가지고 나를 애매히 정죄하고 저주하고 고문 고통을 주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요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내게는 상관이 없다. 저 할 일은 제가 하고 나 할 일은 내가 한다. 저 할 일은 제가 하고 내 할 일은 내가 한다. 요게는 그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는 일은 그를 통해서 하시고,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은 나를 통해서 하실 것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움직일 수도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니.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면 그 일에 대해서 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 일을 어떻게 제거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니. 다만 너는 그걸 대할때에 나로 하여금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뭐인가?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 뭐인가?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내가 나 하는 일이니까 그들이 와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하는 그는 내게 상관없고, 나 할 일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거 요 두가지만 하니 그로 인해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어떻게 순종하는 이것이 나타날 것 뿐이지, 그외에는 나는 상관이 없다.
요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 승리의 방편입니다. 세례요한도 요렇게 했소. 하나님께로 나지 안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것이 예수님과 세례요한, 모든 성도들이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상대방에게 대해서 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상대방에게 대한 모든 환경과 주위에 대한 그 관이 이렇게 봤습니다.
환경관이 이랬고. 주위관이 이랬고, 상대방관이 다 이러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했고, 세례요한도 이러했고, 가말리엘이라고 유명한 법학사가 있었는데 유대교에 가말리엘도 그 제자들이 와 가지고 예수님을 송사할 때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게로 나지 안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네가 어떻게 할라고 하지 말고 너 할일이 뭐인가 그거 찾아 해라. 요것을 구별지워서 그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28절에 말하기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인간의 구주가 아니라 너희들의 구주가 아니라. 구주에 대해서 증거하러 온 것이 내라. 사람들로 하여금 나로 인해서 구주를 믿도록, 구주를 만나도록, 구주에게 가까이 가도록 이렇게 하는 일이 나 하는 일이라.
내가 일생동안 노력한 것이 너희들을 예수님을 알게 한 것이요. 예수님을 보게 한 것이요. 예수님을 가깝게 하려는 것이요. 예수님을 너희 구주로 접결되게 하려는 요것이 나의 일생의 노력이니, 너희들이 요와 같이 되어지는 것이 내 제자되는 것이요.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이요.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요. 이런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이 일을 증거할 것이 너희들이라.
아, 세례요한은 모든 사람을 자기 제자를 삼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그 일을 했구나 하는 것을 너희들의 할 일로 너희들이 증거할 것이라.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치고 깨우치고 노력한 그 모든 것은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의 구세주가 아니라. 나와 결합돼서 내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로 하여금 예수의 사람이 되도록, 예수를 따르도록, 예수를 사랑하도록, 예수님만 바래 보도록. 예수님과 결합이 되도록 이거 하기 위해서 내가 노력했고 너희들에게 밝히 증거했으니, 너희들이 이 사람으로 온 나라에 보이는 것이 너희들의 할 일이라.
또, 이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너를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내가 소개하고 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님을 따르도록, 예수님의 사람이 되도록, 예수님에게 접선이 되어지도록 하는 이 일을 너희들이 하고 너희들 중심으로 삼아서 사람을 너희들 중심으로 너에게 소속시키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도록 남을 가르치고 너희들이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너희들이다.
내가 일생동안 어떻게 너희들에게 무슨 목적으로, 무슨 욕망으로 너희들에게 세례를 주고 가르치고 했는가 하는 그것은 너희들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는 그것으로써 증거가 되는 것인데, 너희들이 예수님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지금 나에게 속할라고 여게서 시기심을 일으키면서 우리는 세례요한에게 속해서 세례요한 중심으로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선지자로 모시고 사는데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이 따라간다.
이렇게 말을 하니, 너희들이 내가 가르친데 대해서는 정 반대로 실패의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너희들이 할 일은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가르쳐서 누구의 중심으로 누구에게 소속시키고 누구와 연결되어 누구의 사람이 되게 했는지. 그것을 너희들이 밝혀 알리는 것이 너희들의 할 일이요. 또 너희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이와 같이 해서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너희들의 증거할 일이니라.
29절에 나는 신부를 차지할 자는 신랑이기 때문에 신부를 신랑에게 소개해서 이 중매를 할려 하는 사람은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인간을 차지 할 이도 대속주 예수님이시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권능 가지신 이도 예수님이시오. 인간의 생명도 예수님이시니, 사람이 예수님과 결합이 되고 예수님을 바라 보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고 이래야 인간이 구원을 받지. 어떤 그 유력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인간의 구주도 못되고. 인간의 소망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것이니까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도를 전한 것은,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할려고 전한 것이기 때문에 수 천년 동안 고대하던 인간의 구세주가 오셨고 구주가 너희들에게 나타났고 사람들이 인간의 구주에게로 몰려가니 이것이 나에게는 이제 이제까지 노력하는 바가 성공을 보고 있고 목적을 달성하게 되기 때문에 내 기쁨은 이렇게 기쁘다.
비유컨댄 중매쟁이가 기뻐하는 그 기쁨 같은 그런 기쁨. 인간을 구원해서 차지하고 인간을 책임질 이는 예수님 뿐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책임지실 예수님이 오셨고 책임지실 분에게 인간이 접선이 되고 연결이 되기 때문에 내 기쁨은 충만하다.
그런고로 차차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보여지고, 나는 차차 사라져서 흐미해지고, 이제 나는 보이지 아니하고 예수님만 보여지고, 나와의 그 연결은 끊어지고 예수님과만 연결이 되어지고 내게 가졌던 소망이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가지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을 내가 소원하고 또 이렇게 되어져야 하느니라. 하는 것으로 그는 흥하여야 되고 나는 쇠하여야 된다고 하신 말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것이 구원에 대해서 중대한 문제입니다. 사람이나 사건이나 물건이나 사람이나 사건이나 물건은 이것은 그 직책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효력을 주는 것이냐? 그것은 나와 그것과 합해 가지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바라 볼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못 줍니다. 그와 나와는 아무리 결합해 봤자.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흥하여야 되고 나는 쇠하여야 된다. 내가 가진 세상의 물질이나 사람이나 사건이나 어떤 기능이나 이것은 주님과 나 사이에 하나의 중매 역할을. 하나의 하나님과 나와의 이 화합 역할을, 친밀 역할을, 결합 역할을 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그것에게 아무리 붙고 그가 내게 아무리 붙어도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과 맞붙어 가지고는 암만 해 봤자 사망뿐입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되고 나는 쇠하여야 된다. 너희 제자들. 너희들과 예수님과 그 사이에 너거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되고 나는 차차 쇠하여야 한다. 그는 보여져야 되고 나는 안 보여져야 된다. 그와는 결합이 되어져야 되고 나와는 멀어져야 된다. 이것이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 여기부터 녹음 없음*)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사람이든지 뭣이든지 바울이나 게바나 아볼로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이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해서 역할하는 것이니 무슨 역할이냐?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데에 이용되는 것이요. 이것이 그들의 존재 목적이요. 이 역할이요. 이것 뿐이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이것으로 인해서 나를 영원히 구원하실 이 구주가 되신 예수님과 가깝게 만드는 이것으로 그것들의 존재의 목적은 달성했고 나는 그것들로 인해서 예수님만 나에게 충만해지고 그것들은 차차 사라지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점점 사라지고 없어지고 예수님과 나와만 요렇게 결합되어지는 요것이 달성되어 지는 것이 성도들이 세상에 구원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 순서가 올 때에는 한 접촉. 한 접촉이 어느 것이냐 네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진리냐 요것을 판정 내는 현실인데 고기에서 세상과 자기를 차지하는 자는 그리 갈 것이고, 하나님과 진리를 차지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할 것이고, 어떤 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차차 쇠해지고 자기에게 쇠해지고 하나님은 흥해지고, 어떤 자는 하나님은 점점 자기에게서 쇠해져 멀어지고 없어지고 세상과 자기만 나타나는 이것이 결말이 되어지는 이것으로서 둘이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몸 밖에 보이지 않는데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일들은 다 목적과 계획이 단단히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목적과 계획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부딪쳐 올때에 껍데기가 돈이라고 돈만보고 인간이라고 정이라고 사건이라고 그것만 보고 하는 사람은 외식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세상이냐 천국이냐 땅위에 있는 소유냐 진리냐 자기와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판정을 지우려는 고것이 자기 현실에 부딪힌 그것들의 목적입니다. 사망이냐 생명이냐? 이것으로써 생명과 사망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요것을 둘째로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고, 셋째로 성공은 어떤 것이냐? 그는 흥하여야 되고 나는 쇠하여야 된다. 천국은 흥해야 되고 세상은 쇠해야 된다. 진리는 흥하고 모든 소유는 쇠해야 된다. 하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우리의 모든 증거는 우리는 세상중 하나기 때문에 내가 인간 접촉할 때에는 그 사람과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자기는 뽑혀 나가야 됩니다. 이런데 세상은 첫째 것 생각 못하고 둘째에서 사망으로 옮겨서고 셋째에서 사망에 속한 것만 보여지고 생명에 속한 것만 보여지는 이것으로서 결말을 짓는 것이 인간의 생애입니다.
그런고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둘 중에 어느 것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결말은 어느 것이 없어지고 어느 것이 있어졌느냐? 어느 것이 쇠해지고 어느 것이 흥해졌느냐?. 첫째는 내가 없이 되는 일이요. 둘째는 내가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느냐? 결말은 어느 것이 섰고 어느 것이 넘어졌느냐? 이것으로서 결말입니다.
세가지 요 단계로 인간은 새로워지고 더러워지고, 인간은 살고 죽고, 인간은 건설되고 파괴되는 것이 요 세가지 단계로 결정되어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