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00:50
새 사람의 생활
1987. 8. 7. 새벽집회 (금)
본문:요한복음 5장 6절∼18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이루는 이치를, 우리가 살아가는 그 이치를 가르쳐 주실 때에 자연계시로 처음에는 가르쳐 주셨고 또 타락 후에는 모든 형식계시와 영감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고 다음에 애굽에서 나온 지 오십 일 만에 처음으로 문서로 기록해서 문서계시로 가르쳐 주셨고 그 후에는 형식계시 문서계시 영감계시로 오늘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것을 이 계시들을 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으로 깨닫고 여기에서 모든 것을 찾아 살펴 자기의 걸어갈 과제들을 다 발견하고, 발견한 그것을 최종 확고하고 더 확실한 문서계시인 신구약 성경 이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을 최후 법전으로 삼아 모든 자연에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내 환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 모양 저 모양의 그 천태만상의 변해가는 인간 심리에서, 또 자기에게 여러가지로 환상으로 꿈으로, 또 자기 마음에 스스로 느껴지는 그 느낌으로, 혹은 영감으로 모든 것으로 자기에게 자기 갈 길을 소개해 주는 들추어지는 그 모든 제목을 그것을 저버리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그 모든 데에서, 주님이 나를 가르치시고 또 인도하시고 말씀해 주시는 이 사실인데 내가 심령이 어둡고 또 하나님의 이 문서계시를 총괄적으로 한꺼번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점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여러 형식의 계시 방편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니까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서 움직이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되기 쉽습니다. 또 그런 것을 무시해 버리면 자기는 소경이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자기의 멸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사명도 깨달아 감당치 못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그 모든 데에서 모든 그 조건들을 최종 심판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이 신구약 문서계시를 법전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본 것이 이것이 성경과 어찌되느냐 하여 성경과 위반될 때에는 그런 것을 다 부인해 버려서 상관하지 말고 성경과 일치가 될 때에는 하나님이 내가 무지하니까 그런 모든 것으로 나에게 알리신다 하는 것을 깨닫고, 문서계시 외에 다른 어떤 그 계시 방편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을 다 문서계시와 대조해서 일치가 될 때에는 그런 계시 방편으로 자기를 알려 주시고 깨달은 것은 다 버리고 최종 문서계시로 이는 여기에 저게서 나에게 알선하고 소개했으나 이 문서계시를 내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니까 이 문서계시에 일치되었으니 이제 다른 계시 방편으로 나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나의 비유컨대 중매쟁이와 같고 이 문서계시는 신랑과, 내가 상대하는 신랑과 같은 것이니 문서계시를 잡고 난 다음에는 그 뒤에 모든 것을 다 부인해 버리고 문서계시를 가지고 그대로 실행을 해야 합니다.
위험성 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은 문서계시는 상관하지 안하고 이런 계시들을 위주로 해서 자기의 이 황황하고 어두운 이 세상을 걸어서 자기 길을 찾아 가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실패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자기는 최종 자기가 확정짓고 걸어갈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탈선돼서 택한 자면 기본구원은 얻지마는서도 성화구원 건설구원은 자기에게는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조심해서 이런데 저런 계시로 그 종목을 깨닫고 문서계시와 대조해서 문서계시대로라고 판정이 될 때에는 자기에게 다른 계시로 자기가 깨닫게 된 그것을 주로 삼고 문서계시를, 문서계시와 일치됐기 때문에 문서계시를 버려 두고 자기의 다른 방편의 이 모든 자연계시, 꿈, 환상, 소리 들리는 거, 또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그 모든 느껴짐, 감정 그런 것을 문서계시보다 주로 삼아서 가는 사람도 실패자입니다.
그것은 벌써 그리 될 때에는 악령이 거기에서 자기의 주관을 하나님의 문서계시 이 타율보다 더 앞세우는 그런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일라고 하는 것이 자기 주관이요 하나님을 따라서 갈라고 하는 것이 우리 구원인데 자기 노력은 다 헛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대조해 가지고서 최종은, 모든 것은 문서계시로 나를 인도하고 소개한 것이기 때문에 비유컨대는 그거는 중매쟁이와 같으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중매쟁이를, 주장한 자이나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는 중매쟁이는 자연히 그는 없어지고 그 남편만 만나는 것처럼 모든 다른 계시 방편으로 자기에게 알린 것은 문서계시를 자기가 보고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같이 한 것이니 자기의 그 무지함을 더욱 느껴 조심하고 또 그런 데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고 그렇게 세심하게 자기에게 알려 준 데 대해서 감사하고 모든 다른 방편으로 알아진 그런 것은 자기에게는 중매쟁이처럼 감사하고 그를 귀중히 여기고 다 포기하고 최종은 문서계시 하나로 자기의 갈 길을 확정지워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대개 좀 깨어서 열심 있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문서계시 하나만이 정확무오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심지어 변화산에서 그 환상과 그 모든 것을 본 음성 들은 것 그런 것보다도, 그것은 주님이 직접했고 아버지가 직접 그렇게 하신 일이지마는서도 그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이 문서계시 예언이 있으니 이 말씀은 그보다 더 확고하고 확실하다 그렇게 말씀한 것을 인해서 안심하고 문서계시 하나로만 자기의 걸어갈 길을 찾을라고 애를 쓰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쓰신 그 방편인 모든 계시에서 자기는 찾아 이 문서계시에 최종 심판을 받아 가지고 거기에서 확정하여 걸어가는 이 걸음을 걷지 안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문서계시 하나 가지고서 이렇게 날뛰는 데에서 찾는 그 눈이 어두워 자기 길을 다 찾지 못하고 다만 율법적인 사람으로 그렇게 변질되고 타락돼 나가기 쉽기 때문에 대개 성경만 가지고 또 날뛰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하나의 율법주의, 하나의 제도주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세심한 그 인도를 계시를 몰라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고로 이번에 이 알려 주시는 계시에 대해서 우리가 배운 대로 이것을 꼭 활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기독교는 다 성장적이요 필연적이라, 지극히 작은 겨자씨 같은 그 씨알이 그것이 생명이 있기 때문에 땅에 심어지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자라갑니다.
자기가 생명의 이 도리는 감당키 어려운 큰 것을 잡지도 말고 또 이것 저것 여럿을 잡지도 말고 한 그 진리를 자기가 잡고, 밭에 심은 것은 잡으면 자기는 이대로 살고 세상에서 하루 이틀 세월을 지나 거쳐 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겨자씨 비유로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갔다 심은 거와 같다” 시간이 지나가면 자라니까 자라기 전에는 씨 중에 작은 씨지마는서도 자라고 난 다음에는 나물이, 나물의 종자지마는서도 큰 나무같이 되어 가지고서, 심기워지기 전에 자라기 전에는 수십 개라도 먹을 수 있는 그런 이 모든 원수인 그 새들이 와 가지고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하는 것으로 비유하신 말씀을 어제도, 지난 시간에도 해석을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은 생명의 도기 때문에 자라가는 도라, 또 기독교는 창조의 도가 아니고 다 계시의 도라, 또 은혜의 도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그 구원을, 완성해 놓은 그 구원을 우리가 하나씩 둘씩 받아 나가기 때문에 하나 받으면 둘 받게 되고 둘 받으면 서이 받게 되어서 기독교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하나 행하면 그 다음에 둘 행하게 되니 하나 행할 때에 바로 행해졌나 안 행해졌나 하는 것은 그 결과인, 결과로 표시를 삼아서 그 결과가 이루어지지 안할 때에는 그 나무가 딴 나무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그 행한 것이 바르지 않고 진실되지 안했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의 행한 것이 필연적으로 그 다음에 표시판인 그 결과, 그 결실이 맺어지는 걸 가지고서 자기는 모든 것을 판정하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가는 도라, 필연성의 도라 요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신구약 성경에 역사적인 이런 사실 저런 사실을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해서 주신 것은 하나님은 그런 역사를 하신다, 그런 권능을 베푸신다 하는 그것도 있지마는서도 대개는 그 하나 하나가 우리가 예수 믿는 구원 길로, 구원의 도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은 이런 권능을 베푸셨다’ 하는 것을 보는 것도 아주 외부만을 보는 것이고, 또 이런 하나님이 역사를 하셨다 하는 과거의 역사 소개로 보는 것도 그것도 다 외식에 속한 것이고, 형식계시로 역사적인 사실 그 하나를 자기가 ‘이것은 나에게 어떻게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쳐 주신 이 도리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한 한 사건을 자기가 걸어갈 도리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 자기는 깨닫고, 이 도리로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깨닫고 또 깨달은 이것이 하나의 형식계시요 문서계시기 때문에 이 형식계시에서 구원의 길로 깨달은 그것을 다른 모든 문서계시로 또 재판을 받습니다.
‘내가 여기에 대해서 요 부분은 이렇게 걸어가라고 가르쳐 주시는 구원 도리라’ 구원 도리면은 이 구원 도리는 다른 그 문서계시와 일치가 되느냐 혹 배치되느냐 해서 배치가 될 때에는 자기의 형식계시의 단편 깨달음이 잘못된 줄 알고 그것을 취소해 버리고, 또 다른 문서계시와 일치될 때에는 이것도 다 문서계시요 또 형식계시가 문서계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일반적인 그 다른 문서계시와 일치가 되고 서로 상이함이, 서로 다름이 없을 때에는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잘 깨달은 것을 깨닫고 그대로 생애 법칙을 삼아서 걸어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생애 법칙을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들을 다 기억을 하고 또 우리가 이렇게 와서 모여 가지고서 공부한 것은 사람병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얼마 동안 하나님의 모아 주심을 받아서 공부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오는 것도 다 하나님이 오게 하셔서 온 것입니다. 어제 많은 사람들이 질문한 그 전부를 다 총합을 하면은 하나님의 그 절대 예정이라고 하는데 절대 그 예정과 인간의 그 행위의 책임과 또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그 서로 모순된 점을 그것을 해석해 달라 하는 그런 것들이 대개 많았습니다.
많았는데,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인간의 행위의 책임과 그런 것이 다 모순 모순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 사람은 조금 심령이 밝은 셈입니다.
그런 것을 초보에 발견을 하고 나중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다’ 절대 예정을 믿는 단계에 나아가서 확실히 예정이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확신이 되어지고, 또 하나님이 이 전지 전능보다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의지로 모든 걸 예정하셨고 주권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오늘도 주권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 섭리하시는 것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개별 개별, 개별 개별, 개미 한 마리가 나는 것도 죽는 것도, 걸어가는 것도, 가다가 개미 수염 하나 오른쪽으로 흔들고 왼쪽으로 흔드는 요런 것이 가장 세미한 개별이겠습니다.
세미한 개미 그것도 만들어 놨으니 만들어짐을 받은 그 개미가 제 자유 가지고 이리 저렇게 흔드는 것이 이니고 만든 것도 그분의 주권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흔들고 활동하는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도 그로 인해서 되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하는 그것을 믿는,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을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은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요동치 않는 그런 단계로 성장돼 나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이해 못 하고 자꾸 모순이라는 것은 모순을 말할 때에는 그만치 자기 주관을 인정하는 데에서 된 것이요 자기 주관을 완전히 부인해 버릴 때에 그런 것은 다 해결이 되고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식도 믿음의 지식이어야 하고, 또 능력도 믿음의 능력이어야 하고, 결실도 믿음의 결실이어야 합니다. 그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지식도 하나님이 이렇다 하기 때문에 그분에게 수동적으로 내가 가진 그 지식이 기독자의 지식입니다.
또 행동도 그분이 능동으로 이렇게 움직이기 때문에 거기에 피동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기독자의 행동이요 능력입니다. 또 자기가 결과를 맺는 결실도 그분이 결실하게 하셨기 때문에 결실한 그분에게 주신 결실로 결실되는 그것이 기독교의 결실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모두가 다 지식도 신앙 지식이요, 또 움직임도 신앙 움직임이요, 결실도 신앙 결실이라.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구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전히 만들어 놓으신 것을 공으로 받는 것이 기독교라, 공으로 받는 것이 기독교라, 그런데 받는 데에는 그 유일된 일정된 방편이 있으니 그 방편은 하나뿐인데 그 방편은 믿음이라.
그러면 믿음은 어떤 것이 믿음인고? 믿음은 분류하면 세 가지로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믿음 지식을 가지는 것이요, 하나님이 이렇다 할 때에 그분에게 피동으로 ‘예, 그렇습니까?’ 하는 그것이 믿음 지식입니다.
믿음 지식을 가지고 또 자기가 인정할 때 ‘이거는 참되다 옳다’ 인정하는 인정 그것도 믿음 인정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게 하니까 자기가 인정한 것이지 스스로 인정됐다고 하면 넘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있는데 인정되는 것도 천태만상이요 그 천층 만층으로 되는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이 준 것만치 그는 인정하게 되지 준 거 이상은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행하는 것입니다.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완료해 놓은 이 구원을 우리가 은혜로 받아서 하나씩 둘씩 우리가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은 다 얻었고 이제 육체는 얻지 못했기 때문에 “영은 의를 인해서 산 것이나” 로마인서 8장 9절입니까? 10절입니까? 로마인서 8장 10절에 보면 “영은 의를 인해서 산 것이나 몸은 죄로 인해서 죽어 있다” 아직까지 구원이 되지 못한 것을 말했고, 또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된 우리까지도” 하는 것는 중생된 영의 그 단합을 가리켜서 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중생된 영들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곧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그랬습니다. 영은 구속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이 본능적으로 부르게 되고 이 심신으로 된 육은 아직까지 구속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구속될 것을 영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는 것은 이 심신으로 된 육은 아직까지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되지를 못했고 주님의 주신 이 구원을 완전히 입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입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양자될 것 곧 구속을 기다린다” 이랬습니다.
영은 양자가 됐지마는서도 이 심신으로 된 육은 양자가 아직까지 안 됐다. 양자로 표시한 것은 그 본질과 본성은 신적 요소의 본질과 본성은 아니고 피조물의 요소의 본질과 본성이지마는 신적 요소의 본질과 본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는 그 기업과 상속을 그 본질은 다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도 받는 것은 꼭 같이 받는다, 이러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표시를 양자라 그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이랬는데 영은 양자가 됐지마는서도 육은 양자가 되지 안했다 그말은 심신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주시는 그 기업인 상속을 영이 받은 것같이 심신은 받지를 못하고 있다. 받을 자격이 아직까지 안 되고 있다. 그런데 영은 단번에 이 양자가 됐지마는서도 우리의 심신은 단번 양자가 되지 안하고 중복적으로 여러 차례를 걸쳐서 양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영은 단일성이요 단일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받으면 다 받습니다. 그 영은 쪼가리로 나누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표현하기를 ‘중생이라 하는 것은, 영이 이 책상만하면은 영은 책상 한 귀때기만치 요거는 살았다. 요거는 살아서 중생됐지마는 남은 부분은 지금 살아나지 안했다. 이러기 때문에 차차 살아난다.’ 영도 이렇게 부분 중생, 부분 중생을 생각하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왜 그런 표현을 했느냐? 영이 산 거는 단번에 살았는데 왜 단번에 살아난 그 영을 그렇게 부분 중생으로 사람들이 해석을 하고 지식을 하고 있느냐? 요한복음 3장에 보면은 단번에 살아났는데 그것은 거기에 지식이 온전치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곧 영과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은 분명히 성경에 보니까 살아났는데 아직까지 그 마음은 살아나지 안했기 때문에 영을 마음과 하나로 이렇게 보고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요, 양심이 영이요 곧 영이 양심이라 이렇게, 모든 이성이 영이요 영은 이성이라 이렇게 이 영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그 지식에서 이미 확실히 실상으로서 마음은 살아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고 영은 살았다는 것이 성경에 증거돼 있기 때문에 ‘이 책상으로 비유하면 귀때기는 살아났기 때문에 요거는 범죄하지 않는다, 살아난 거는 범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나지 못한 이것은 범죄한다.’ 이래 가지고서 영의 중복 중생을 말하는 것은 그 지식의 온전치 못한 그 폐단으로 생겨진 것입니다.
심신, 심신 성화가, 영의 중생을 말한 것이고 영의 중생은 죽었던 것들이 살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성경에 표시를 했고 또 이 심신의 구원은 이거는 거룩하게 변화된다 성화된다고 말한 것은 주격체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거기에 소속한 게 살아나기 때문에 이거는 별개의 것으로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따라서 변화돼 나가는 것을 이걸 가리켜서 심신의 이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표시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신 구원이 그렇게 단번이 안 되고 왜 중복적이냐 하면 영은 단일성이요 단일체이지마는 우리의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종합체입니다. 종합체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살려 살아난 것은 살아났지마는 아직까지 살아나지 못한 부분은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성경에 비유하기를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그 지체에서, 지체는 거기에 따른 또 모든 세포들도 있고 이래 있는데 한 세포가 살았다고 다 산 것이 아니고 위에 이 생명에, 전체의 생명에 속해 있으면 세포가 살고 거기에서 분리되면 죽는다. 이렇기 때문에 부분 죽음도 말하고 부분 그 성화, 부분 중생, 부분 부활, 그렇게 말을 표시를 하는데 중생이라 말은 그 주체에게만 썼고 거기에 소속의 피소유격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거기에 이미 살아난 중생에 따라서 거기에 소속하게 된다 하는 그런 뜻으로서 이제 성화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는 수많은 종합체요 집합체요 조립체라.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부분적으로 살아난다. 마치 기계를 부속품을 가지고서 조립을 할 때에 그 조립하는 것이 반 조립했으면 반은 됐지마는 반은 안 돼 가지고 있다. 하나가 모자라면 하나 모자라는 그거는 하나 모자라는 것이지 그것도 채워 넣으면 다 조립이 된다. 이렇게 되는 비유가 맞지는 안하지마는 그와같이 육체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중복적이다. 그렇게 중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 또 착각하기 쉬운 것은 그러면 조립이니까 하나 둘 이와같이 지금 만들어서 조성해 나가는 것인가? 조성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성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하나씩 둘씩 받아 나간다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됩니다.
이래서 어데까지 성화된 성화에 가장 높은 그런 온전한 그 영육의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일 분류한다 하면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뭐인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뭐인고 하니 피조물 요소가 나오고 하나는 분류하면은 신적 요소가 나옵니다.
이래서 신적 요소가 이 피조물의 요소를, 와 가지고서 신적 요소가 마치 흰 원단의 베쪼가리다가 이 물을 들이면은 그 물이 들고 난 다음에는 그 베쪼가리에 흰색은 하나도 없고 그 물들인 그 물 색깔만 배어 있어서 아무가 봐도 그걸 그 흰 베쪼가리는 찾을 수가 없고 다 새파랗게 됐다, 푸르게 됐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완전히 하나님의 물을 들였는데 몽A입니다 물을 들였는데 몇 가지 물을 들였습니까? 몇 가지로 된 물을 들였습니까? 손가락으로? 몇 가지로 된 물을 들였습니까? 녜, 세 가지로 된 물을 들였습니다. 이거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과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로 물을 들여서 암만 봐도 이거는 진리요, 암만 봐도 진리요, 그 사람의 손도 진리요, 행동도 진리요, 사상도 진리요, 마음도 진리요, 영도 진리요, 또 자기의 소원도 진리요, 다 진리요, 영감이요, 다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의 그것들이요,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볼 때에는 하나님으로 봅니다.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노릇 합니다. 보고, 이 안에서 보니까 그것은 피조물입니다. 이렇게 분석을 하면은 두 가지로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 얻어서 억천만 년 가도 언제든지 창조주의 요소와 존자자존자의 요소와 피조물의 요소가 둘이 있지 피조물의 요소가 창조주의 요소로 그렇게 화해지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창조주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신적 요소는 신적 요소 그대로 또 그 인적 요소는 인적 요소로 그대로 있으니 인적 요소 그거는 첫째 아담에게 받은 것이요 둘째로 이것을 감염해서 완전히 성화시킨 이것은 둘째 아담의 요소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 후에는 첫째 아담의 요소가 악령 악성 악습에게 감염돼 가지고서 이거는 순전히 마귀적이요 이거는 악성적이요 악습적의 것이 이것이 차차 차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탈색하고서, 이 악령 악성 악습으로 물들여 놓은 이 감염의 이 색깔을 이것을 탈색시켜 버리고 이제 세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대속으로 말미암은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로써 다시 이 탈색시킨 데에 재염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탈색시켜 놓고 염색하느냐? 이 색깔이 강하고 힘이 있어서 이 색깔로 염색을 할 때에 이제 타락할 때에 이 감염됐던 것은 차차 차차 녹아져서 제거돼 나가는 것입니다.
이 힘으로 제거돼 나가고, 탈색하고 난 다음에 염색하는 것이 아니고 염색이 됨으로 이래 탈색된다. 여기에서 이 성화가 되어짐으로 이런 것이 탈색돼 나간다.
그런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다 오늘까지의 이 신학의 조직신학에서 판정이 되지 안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가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단단히 듣고, 가서 공연히 증거할 만한 자격이 없으면서, 증거라 하는 것은 자기 입으로 증거하는 것만 아니고 모든 지식으로 증거합니다.
입으로 증거하고 또 자기 행위로 증거하고 자기 자체로 증거하는 거,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자기 행위가 됐고 행위가 자기 자체가 된 이렇게 온전함을 이룬 후에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가 있지 이걸 이루기 전에 하나의 움싹인 이 지식만 가지고 증거하면은 그 새에게 먹히기 쉽습니다. 새에게 먹혀버립니다.
겨자씨 알을 새 한 마리가 종조리 새는 요만한데 그것도 삼십 개 사십 개라도 다 집어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고 난 다음에는 수많은 공중에 나는 새들이 거기에 와서 의지하고 깃들이며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나물이 성장하면 나무가 된다. 이거는 인간이지마는 인간성을 초월한 초인간의 것들이 다 되어진다 하는 것을 거기에 다 비유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고로 우리의 구원은 이것은 땅에서 만들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늘에서 내려와 가지고서 순전히 되어지는 것이냐 이 논단이 많습니다.
제가 어떤 책에, 저는 책을 독서를 못합니다. 많이 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대개 책 한 권이면은 겉어머리 제목, 제목 중에 하나 보면 그만 그 나머지기를 별로 안 봅니다. 왜? 처음에 제목 하나 보면은 이것은 어떤 사상으로서 어떤 방편으로서 어떤 조성으로서 어떤 결과를 맺어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많이 보지 못했으나 그런 것을 다 제가 또 스스로 깨달은 것도 있고 본 것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고 있다 하는 것은 제가 본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의 이 구원은 전부 하늘에서 온 것이냐 땅에서 솟아난 것이냐 하는 이것이 논단이 많이 있는데 아직까지 판정은 지어지지 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 해도 틀리고 땅에서 생겨진 것이라 해도 틀립니다.
땅에서 생겨진 거 하늘에서 온 것인데 하늘에서 온 것이 땅에 것을 삼켜서 하늘에서 온 것화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 아담의 것이 이것이 하늘에서 온 것으로서 이것이 다 성화돼 가지고서 화해졌기 때문에 이것이 화해졌으니까 우리의 중생이라 하는 것이 진리의 능력으로 중생했고, 영감의 능력으로 중생했고, 완전 대속의 능력으로 중생했기 때문에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죽거나 변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않는 것으로 됐습니다.
안 한 것으로 됐지마는 이 아담 하와에 속한 이것은 영원성이 아니고 이거는 변질성을 가졌고 이거는 사망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이 능력이 와 가지고 이 화돼서 이 화돼 가지고서 이 변질성 이 시공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은 다시 신령한 것으로 변화가 돼야 되고 이렇게 변화되지 안해도 신령한 그 신령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하늘에서 온 그리스도의 이 구원과 화합될 때에 이것이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안해서 영생할 수 있는 영은 첫째 아담에게 속했지마는서도 그대로 세상을 뜰 때에는 하늘나라 갑니다. 또 마음도 그대로 갑니다.
가지마는서도 가장 시공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에 피와 살로 되어 있는 이것은 다 썩어지고 노쇄해지고 다 도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생을 하지를 못합니다. 하늘나라 가지를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가 돼야 되지 그리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이제 변화가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뜰 때에는 영과 그 마음은 그대로 옮겨져 가지마는서도 육의 일 부분이 되어 있는, 육의 일 부분이 되어 있는 이 고기덩어리, 피와 살로 되어 있는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 없는 가운데서 창조할 수 있는 능력,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는 그 능력 가지고 우리의 이 육체의 피와 살로 되어 있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시킨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면 그 다음에 구원 얻은 영육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영계 가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고 물질계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이것은 영계의 것과 물질의 것이 다 이와같이 통일되는 것은 영이 물질되고 물질이 영이 된다 말은 아니고 영계와 물질계는 있지마는서도 그게 통일됐다 말입니다. 이게 통일 정치 나라에 통일 정치, 통일 정치권을 가진 곧 그리스도의 이 왕국으로서 그리스도가 왕노릇하는 그 나라가 되는 그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계와 물질계를 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통치해서 영원히 왕노릇하고 사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 자격을 이룹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것은 이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그 모든 영계 것과 물질계 것을 다 통치할 수 있는 그런 통치권을 가질 수가 있을까? 통치권을 가집니다. 능히 통치를 얼마든지 합니다. 그 통치를 얼마든지 하는 그런 실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통치할 수 있는 그 실력이 있는데 이 실력은 무슨 실력입니까? 통치할 수 있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이렇게 왕노릇해서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통치권을 우리가 가진 것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믿습니다.
그러면 믿으면 무슨 재주 무슨 능력 가지고서 통치를 합니까? ○목사? 신성? 녜, 신적 요소. 그것은 이것은 피동적이고 신적 요소가 주동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나기를 진리로 살아났고 영감으로 살아났고 또 예수님의 대속은 완행입니다.
완성한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오. 이 완성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은 이미 영계에 있는 거와 물질계와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에 대해서 완성,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이 심판할 때에 이는 완전이라 인정한 그 공심판은 다 통과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심판을 다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을 받되 사심판을 받습니다. 사심판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심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공심판이 심판하는 것 아닙니다.
공심판에는 우리 대신 예수님이 공심판에 정죄받아 가지고서 공심판에 인정하는 그 완전 승리를 했기 때문에 공심판 인정에서 우리는 다 통과된 것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공심판 통과한 증거가 뭐이냐 하면 우리가 중생이 됩니다. 중생 되는 건 공심판 통과가 안 되면 안 됩니다. 죄의 문제 하나님의 율법의 문제가 다 완료가 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공심판 통과를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뭘 심판하느냐?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 말은 기름 부음이라 말인데 기름 부음이라 말은 곧 제사장 선지 왕의 직책을 가진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대속의 구원을 말하고 대속 구원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이 직책을 받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기업이요 영원한 우리의 직업입니다.
우리의 직업은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중보되는 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이제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피조물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이에 중보는 하나님의 교회가 중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돼서 우리가 살아나기를 이 셋으로 살아났는데 이 셋은, 셋은 뭐이냐? 셋은, 영감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또 진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창조하신 피조물과 그 사이를 영감과 진리, 영감은 하나님이요, 하나님하고 진리하고 피조물하고 요 셋을 한테 합하서 완전한 그 합법적화, 합리적화, 합영감적화 이래 가지고 완전 화합을 한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이것이 일차 창조를 엿새 동안에 했는데 일차 창조를 엿새 동안에 해서 그 창조된 피조물을 복 주는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제칠일로 삼았고 이차 창조는 완전 창조인데 완전 창조된 이것을 이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새로 한 날을 정한 것이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로 완성됐기 때문에 사활이 한테 함축된 그 날이 곧 제팔일 주일날이기 때문에 주의 날이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가지로 우리가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의 힘은 진리의 힘이요 우리의 힘은 영감의 힘이요 우리의 힘은 예수님의 대속의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새사람의 힘은 이 세 가지 힘이 제 힘이지 이 세 가지 힘이 아닌 그것은 어떤 것이든지 다 그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사망의 것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이번에 우리의 새사람은 어떤 것이며 옛사람은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새사람을 뭘로 어떻게 새사람은 그 활동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새사람의 활동은 이것이 새사람의 활동이다. 옛사람 활동은 이런 것이 옛사람의 활동이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로 움직이는 것이 새사람의 활동이요 이것이 새사람의 힘이라, 이것이 새사람의 지혜라, 이것이 새사람의 본질이요 본성이라, 이것의 소원이 새사람의 소원이라, 이거 아닌 것은 자기 아닌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자기의 원수인 자기 이것을 자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착각하는 데서 인간은 다 전멸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를 죽였다 말은 자기 영을 죽였다 말이오. 자기 주격체인 영을 죽인 것이요, 그거는 자기가 아니라 말이오. 우리의 심신의 주격은 자기의 영이 주격이지 마귀가 주격이 아닌데 이놈이 우리의 영인 주인을 죽여버리고 그놈이 대신 주인인 체 하고서 들어온 그거 자기 아닌 자기, 원수인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이것을 자기인 줄 아는 자기 착각에서 다 멸망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아닌 자기 이놈은 뭘 보고 아느냐? 그것은 그 수가 천도 만도 넘기 때문에 그것을 가 가지고서 그런 것으로 더듬어 알라 하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원 강령에 가 가지고서 이 셋이 아닌 지혜, 이 셋이 아닌 소원, 이 셋의 소원이 아닌 소원, 이 셋의 힘이 아닌 힘, 이 셋의 지혜가 아닌 지혜, 이 셋의 판단이 아닌 판단, 비판이 아닌 비판, 이 셋이 원하는 소원 이 셋의 욕심이 아닌 그것은 뭐입니까? 그거는 뭐입니까? 그거는 뭣입니까? 다 옛사람의 것입니다. 그것을 한 말로 말해서 그놈의 이름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악. 한 말로 말하면 악입니다.
그것을, 악인데 그것이 몇이 합해 가지고서 됐습니까? 셋. 셋이 합해 됐는데 하나는 무엇입니까? 악령은 하늘에서 범죄하고 그짓 하다가, 하나님에게 소속하지 안하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안하고 자기가 자기 중심 위주로써 자기가 왕될라 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신한 그것이 악령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천사입니다.
악령.
또 악성은 그것에게 감염돼 가지고서 우리의 인간성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성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악습은 악령 악성으로 말미암아 그 둘 합작 그 유혹의 공세로서 이 고기덩어리가 거기에 피동돼서 한 그것이 악행인데 악행 한 번 했으면 악행이요 두 번 했으면은 악행이 연습했기 때문에 악습이 되는 것이요 그것의 종합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하는 것이니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 옛사람인데 그놈을 자기로 알고 그놈 좋아하도록 하니까 전부 자살 행위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래서, 우리가 사람병을 고치는 데에는 세 가지 병을 고쳐야 되는데 하나는 영병, 하나는 마음병, 하나는 이 고기덩어리의 병, 이 세 가지 병을 합해서 인간병이라 사람병이라, 사람병이라 그렇게 표시를 했습니다.
영병 하는 그것을 어제도 질문이 많이 나왔지마는 이 교계 나가면은 이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논단이 있을 것입니다. 논단이 있을 줄 알고 제가 영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영병이라고 말하지 안하고 영의 유약이라, 유약이라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못하지마는서도 이의를 달아서 논단이 될수록이 그것이 더 확고히 증거가 되고 사람들에게 깊이 박힐 수 있기 때문에 영 유약병이라 하는 병을 붙였습니다.
그거는 지옥 가는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구에 미달됐다 말이오. 자기가, 그 영병은 뭣이 영병인고 하니 자기의 심신을 통치하는 그 통치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데에 완료가 되지 안하고 아직까지 미완성에 돼 있다.
영병은 뭐이 영병이냐? 영이 어리고 약해서 자기의 심신을 예수님께서 그 심신을 통치한 것처럼 이렇게 통치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인데, 이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나아가기까지 너희들이 힘써 자라가라” 이랬는데 제일 큰 것이 중요한 게 뭐이냐 하면은 중생된 영이, 중생된 영이 셋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 셋으로 살아난 제 힘을 가지고서 그 마음을 셋으로 정복해서 셋화돼야 됩니다.
이래서 우리의 마음도 셋으로 살아나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살아나야 되고 영감으로 살아나야 되고 진리로 살아나야 됩니다.
살아나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다 이 진리화 영감화 예수님의 대속의 열한 가지화 이렇게 됐을 때에 그 마음에 병이 다 치료됐습니다. 이것이 되는 데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마음을 이 능력으로써 다시 살리는 그것이 그 마음병 고치는 것인데 마음병은 어떤 것이 마음병이냐? 이 세 가지와 대립되어 있는 것이 다 마음병입니다.
그러면 대립돼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원망, 불평, 시기, 미움, 혈기, 분노, 낙망, 의심, 절망, 슬픔, 고통 이런 것 다, 이제 사욕, 또 자기의 모든 허영, 허욕, 물욕, 모든 이성적으로 음란, 또 모든 것에 다 지나친 것 이런 것이 전부 육체의 병입니다. 또 시기하는 거, 쟁투하는 거, 당짓는 거, 의심하는 거 이런 것이 다 육체의 병이라는 말이요, 육체의 병. 마음병, 이거 마음병이오. 육체병의 마음병.
육체는, 육체는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가리켜서 육체라, 영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된 이거는 완전히 별도의 것이라. 영은 단번에 죽었지만 영은 죽어서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없는 거와 같이 완전히 기능은 전연히 없으나 전혀 기능 없는 그 존재도 육은, 심신은 살아서 움직여. 심신은 살아서 움직이는데, 살아서 움직이는데 그 살았다는 것이 죽음을 살았다고 생각해서,그 움직이는 것이 악령으로 움직이고 악성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거는 죽은 자에게 속했고 죽은 자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사람을 사는 것인 줄 알고 칠십 년 살았으니까 많이 산 줄 알았지마는 칠십 년을 죽었습니다. 이래서 하루 살면 하루 죽고 죽고 죽어 가지고서 마지막에 다 죽어서 심신이 다 죽었을 때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는 것이요, 우리 중생된 사람은 하루 살면 산 것이 자꾸 저축되고서 하루 살면은 그만치 생명이 커졌고, 열흘 살면 커졌고, 몇십 년 살면 커졌고, 자꾸 세상을 뜰 때에는 영생하는 것은 커져버렸고 이제 그 죽은 것은 도태되고, 그러면은 이 죽은 것과 영생된 것이 서로 나뉘어지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으로 살아서 자라가고 또 옛사람은 이게 있는 것이 점점 죽어서 점점 죽어서 없어져 가고,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오십이라 하면은 ‘엔간이 죽었구나. 아직까지 죽을 거는 얼마 안 남았구나.’ 그 사람이 지금 만일 한 칠십이나 팔십이나 됐으면 ‘이제 그 육체로서는 다 죽고 이제 죽을 것 조그매밖에는, 안 죽고 남아 이제 죽을 것이라, 안 죽고 남은 게 아니라 앞으로 죽을 것, 다 사형받은 것이기 때문에 죽을 것이 얼마 남지 안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몇십 년 살았다면은 그 사람은 ‘인간이 많이 컸겠구나. 많이 자랐겠구나, 영생으로 자랐겠구나.’ 그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거 다 시간 없기 때문에 이 재독이니까 여러분들, 이래서 영의 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옥 갈 병이 아니고 영의 무능이라 그말이요, 영의 유약이라 말이오. 영의 유약을 가리켜서 여러분들이 좀 자극받고 그걸 깊이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병 가운데에 영의 유약도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유약을 가르쳐서 영의 병이라 말합니다.
영의 유약은 어떤 게 영의 유약이냐? 자기 심신을, 자기 심신을 지배 통치하지 못하는 그것이 영의 유약입니다. 그러면 영이 자기 심신을 통치할 때에는 몇 가지로 통치하느냐 하면은 세 가지로 통치합니다.
진리로 통치하고 영감으로 통치하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통치해서 자기의 마음이 악령화, 이 모든 더러운 것 시기, 질투, 음란, 욕심, 사욕, 이 모든 의심, 모든 미움, 전부 이런 것들이 다 이것이 온전하신 이 예수님의 대속, 또 영감, 진리, 온전함이 들어오니까 이놈이 마치 등불을 켜면은 어두움이 도망치고 녹아지고 안 가는 거는 녹아지고 도망쳐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중생된 영이 이 세 가지 빛을 비추면 그런 것들이 다 나가는 것인데 이 빛을 비추지 안해서 빛이 약하니까 마음 속에 어두운 모든 죄악들이 그대로 있는데 이 강하면 나가니까 이 영이 약해서 이러니 영이 장성한 것만치, 영이 강한 것만치 그 빛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밀려 나간다.
밀려 나가서 나중에 그러면 다 밀려나가 버리고 자기 마음에는 이 세 가지만 가득 찬 것이 그것이 이제 그 마음에 하나님 아들화된 것이 완전히 된 것이요 그 마음이 살아났다, 그것이 마음이 살아나서 마음이 얻은 그것을, 마음이 얻은 것을 가지고서 그 고기덩어리, 고기덩어리에 비춰서 고기덩어리가 또 이게 세 가지로 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고기덩어리를 살린다 말이오.
영이 마음을 점령해서 지배하고 마음이 자기의 고기덩어리를 점령하고 지배하는데 지배력의 그 지배력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지배력은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왜 여기 모두 손 안 들어. 몰라요? ○○○목사님 사모님, 몰라요? 몰라? 허, 저거 참 큰일났네. 세 가지라, 세 가지.
영도 세 가지로 살았고 마음도 세 가지로 살았고 고기덩어리도 세 가지로 살아납니다.
이런데 이 고기덩어리에는 병이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고기덩어리에 두 가지 병이 있는데 한 가지 병은 사람병이 고기덩어리에 있습니다. 고기덩어리에 사람병이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다른 말로 말하면 고기덩어리에 있는 사람병 그것은 무슨, 이름이 뭐입니까? ○장로님? ○장로님? ○장로님? 그래 그 엔간히 쭉 빼네. 백점이야 백점. 그 빼는 그래 말고 얼른 부르면 ‘예, 악습입니다.’ 이래야 돼. 아이가 돼야 돼. 그래, 악습입니다.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것은, 악습은 사람병입니다. 악습은 고기덩어리에 있는 사람병이요, 또 그 사람이 지금 앉은뱅이다, 누운뱅이다, 암병이 들었다, 뭐 들었다 하는 그것은 무슨 병입니까? 육체의 병입니다. 사람병과 육체의 병을 우리가 구분해야 됩니다.
이래서 사람병만 치료되면은, 대개 사람이 병들었기 때문에 고기덩어리도 병듭니다. 사람이 병들었기 때문에 그 생활이 병들었습니다. 사람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복이 병들었습니다. 사람병을 고치면 그 모든 행복도 살아나고 모든 그의 그 활동도 살아나고 모든 명예도 살아나고 다 살아납니다.
사람병을 고치면 고기덩어리의 병도 다 살아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제 내가 어떤 형제에게 가 가지고서 자기가 나를 보기를 원한다고 쌓는데 그래 가서 다른 걸 말해 주지 안했소. 내가 기도할 때에, 병은 하나님이 낫아 주시고, 병은 하나님이 낫아 주시고 또 내가 뭐 낫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낫아 주시고 이러니까 낫는 방편을 내가 말해 줬습니다.
낫는 방편 말한 것은 여러가지로 복잡한 방편을 말하면 모르기 때문에 이제 ‘다른 것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기에게 싸움이 있으니까 이 전투만 바로 해라.
이 전투만 바로 하면은 승리하는 것만치 자꾸 이 병은 물러가고 낫게 된다.’ 그 전투하는 방법을 간단 명료한 방법을 가르쳐 줘야 되지 그리 안하면 모르기 때문에 ‘네가 지금 주님 사모도 있고, 돈 사모도 있고, 자녀 사모도 있고, 아픈 것 사모도 있고’ 그 사모나 생각이나 마찬가지 말이오. 생각하는 거, 사모하는 거. 이거 생각하는데 사모하는데 이제 이런 거 저런 거 땅위에 사모할 게 많아, 생각할 게 많다 말이오.
땅위에 생각할 게 많아서 ‘네 마음이 땅위에 돈 생각하면 그 마음이 돈하고 합작했고, 네 딸 생각하면 딸하고 합작했고, 아들 생각하면 아들하고 합작했는데 네 마음이 모든 거 합작하는 그것이 다 간음이다. 주님과만 합작해야 되는데 딴거 했으니까 간음이니까 네 마음이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생각할 때에 딴것이 와 가지고서 거기에서 가로막을 때에는 그것이 곧 간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간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놈을 물리쳐라. 꼭 꼭 암병으로 꼭꼭 찔러서 아파서 못 견딜 때, 아플 때에 아픈 그놈으로 가면은 유혹이라는 간부 아픈 그놈하고 네가 한 짝이 됐고서 주님하고 이별했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올 수가 없다.
그럴 때에 아픈 거 올 때 아픔을 물리쳐서 아픔을 물리치고 자꾸 그 잘 물러가지 안할지라도 주님만 자꾸 생각하고 생각해서 자꾸 생각해서 그 간부 그놈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생각해서 네가 지금부터 주님만 생각해서, 주님하고 연결하는 것은 생각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주님만 자꾸 생각해 가지고서 그 생각이 끊어지지 안하면 너에게는 얼마 지나지 안해서 그런 병은 다 물러가게 될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로 완전히 성화된다. 세상에 있어도 성화됐고 또 떠나도 성화됐고, 우리는 있으나 가나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화되는 것이 문제기 때문에 성화됐으면 가도 좋고 있어도 좋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라.’ 그런 방편을 내가 가르쳐 주고 기도하는 것이 그 일이 성공이 되도록 주님이 간섭하시고 보호해 달라고 그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그분이 그 전투를 바로 했는지? 전투를 바로 했으면 벌써 효력을 많이 봤을 것입니다. 전투를 바로 했으면 그만치 벌써 원수 그놈은 물러갔을 것이고, 고기덩어리의 병도 그거 사람병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죄 지었을 때에 병이 왔으면 그 병은 죄값으로 온 병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죄값으로 오는 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이거 세상 일반 교계에서 이것을 지금 말하지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에게 지금 말하는 것은 이래 놓으니까 자연히 내가 교만한 사람돼지고 다른 사람에게 입질에 오르내리는 원수가 대상이 된다 말이오. 여러분들이 안 믿기 때문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값으로 말미암아 오는 병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지었는데 병이 왔는데 어째? 죄를 지어서 병이 온 것은 그 죄를 지을 만치 그만치 병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시는, 치료하시는 방법입니다.
치료하시는 방법. 그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구원의 방법이요 사랑의 방법이요, 그러기 때문에 죄값으로 오는 거 같지마는서도 죄값의 벌로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랑의 징계로 온다 해서 그 이름을 징계라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어떤 그 죄라도 그 죄값으로 온다는 그것은 불신입니다. 성경에 그걸 주님이 모든 죄를 담당하고 질고를 담당하셨다고 성경이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믿고, 다만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와도,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와도 죄의 값으로 온 게 아니라 그 죄를 죽이고 없애서 죄를 치료하고 죄의 해독에서 치료받아 구원얻기 위해서 왔다는 그것이 다 주님의 사랑의 뭉텅이라 하는 것을 알고 주님의 사랑의 치료의 능력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시간이 많이 갔는데 이제, 그러면 마음병 또, 마음병은 뭐 육체의 병이 없기 때문에 마음병 하면 이거 다 인간병인데 인간병은 분류하면은 세 가지 이것이 인간병인데 이 육체는 아롱아롱해 가지고서 분별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육체에는 마음병도 있고 고기덩어리의 병도 있다. 알아듣겠어요, 그거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시기하고 그 삐꾸는 거, 삐꾸는 것이면 삐꾸는 그거는 사람병입니까 고기덩어리병입니까? 그거는 사람병입니다. 그 사람이 발에 무좀이 있으면 그거는 사람병입니까, 고기덩어리의 병입니까? 요렇게 여러분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요거 분류를 해서 요렇게 말해 주는 것이니까 알고,
다만 오늘 아침에 지금 간단한, 뭐 시간이 없으니까, 나을 때에 낫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 낫게 됐는가? 낫게 된 것이 요 삼십팔 년 된 자가 낫게 된 것은 먼저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 모든 사람이 많지마는서도 많은 사람 가운데에 삼삽팔 년 된 자가 주님을 만난 것은 세 가지 때문에 만났습니다, 세 가지.
첫째는 뭐이냐? 모든 사람보다 제일 중한 환자입니다. 자기가 ‘나는 모든 사람보다 제일 중한 환자라.’ 그것을 자기가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땅위에 자기를 도와 줄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땅위에 있는 것은 참으로 자기의 방해물이지 자기에게 유익되게 하는 것은 없다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세 가지 알았습니다. 요 성경 본문에 있습니까? 확실히 있어요? 확실히 있습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또 의원은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고쳐서 살려서 구원할라고 왔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데에는 자기가 많이 그 많이 못쓸 자, 아주 중한 환자, 제일 중한 환자로 이렇게 자기는 누구보다도 많은 죄인이다, 무능자이다. 무능자이다, 죄인이다, 많이 삐뚤어진 자다, 제일 못쓸 자다, 제일 힘 없는 자이다 요렇게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제일 먼저 끌어오는 인력이 되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아무것도 세상에서 나를 도울 자 없다. 나를 도울 자 없다. 아무것도 나를 도울 자 없다. 이제 나도 나를 돕지 못하고 부모 형제도 돕지 못하고 땅위에 있는 피조물의 어떤 것도 나를 도와 줄 자는 없다.
도와 줄 자는 없다는 것은, 없다는 것은 자기를 도와 줄 수 있는 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도와 줄 자가 없어서 탄식하는 것은 도와 줄 자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는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것을 그라는 것은 자기는 가련하니, 가련하고 불쌍하니까 자기는 다른 이의 무엇의 타의 도움을 받지 안하면 안 될 아무것도, 도움받지 안하면 아무것도 없는 자라. 도움받아 하나 받으면 하나 있고 둘 받으면 둘 있지 도움받지 안하면 없을 자라.
도움을 받아야 되는 제일 불쌍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무지 무능자인데, 제일 못쓸 자인데 도와 줄 자는 땅위에는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그것은 한 분이신 주님밖에는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속에 중심에 요 세 가지가, 중심과 그 형편이 요 세 가지가 돼 있기 때문에 많은 환자가 솔로몬의 행각에 있었지마는서도 주님은 그자에게 먼저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는 요것을 우리에게 구원 도리로 줍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이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있지마는서도 제일 주님을 먼저 만나고 주님을 제일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은 요 세 가지 있는 양 그것이 주님을 끄는 양입니다. 요 세 가지 요것이 빈약하면 주님을 끄는 그 양이 빈약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은 잘난 자로 살라고 하는데 모두 자기 잘나서 자기는 능력 있다고 하는 그것이 주님을 차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나는 이거 의지할 것도, 의지할 것도 이거 의지할 것도 있고 나를 도와 줄 자가 많이 있다 하는 것은 주님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생각은 이것이 가장 잘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인데 생명법에서는 이것은 아주 못쓸 것이고 자살하는 행위라 이렇게 판정이 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낫고자 하느냐?’ 그 낫고자 할 때 고백하는 것이 세 가지를 고백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런 것 다 안 도움받아도, 네가 다른 데는 도울 이 없어. 나밖에는 도와 줄 자가 없어. 또 나밖에는 의지할 자가 없어. 나밖에는 너에게 이 제일 불쌍한 자를 부자 만들 자는 나밖에는 없어.’ 그래 주님이 이와같이 떡 만들어 주고 나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자, 그 솔로몬의 행각과 그 예루살렘 성전 출입하는 데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굽니까? 제일 불쌍한 사람이 삼십팔 년 된 환자입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 그 가운데 제일 인기가 크고 모든 사람의 인기가 막 집중돼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리 보고 그리 바라보고 인기가 집중됐고 제일 유명하고 제일 기쁘고 제일 영광스럽고 제일 즐겁고 한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삼십팔 년 된 병자의 그 나은 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뭐 구해 가지고서 지위를 구하고 돈을 구하고 뭣을 구하고 오만 것 구하지마는 기독자가 제일 행복된 것을 구하는 것은 자기 사람병을 고쳐서 사람병 고쳐서 이제 병 없는 사람, 완전한 사람, 완전한 그리스도인, 주님의 구속의 인, 영감의 인, 진리의 인 이거 되는 것보다 더 기쁨이 없고 더 가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떤 그 빠짝 말라서 오랫 동안 지나간 소경이 이제 죽어가는데 그분에게 예수님이 그 속에 많이 계시고 예수님과 밀접해지고, 다른 거 없어. 예수님하고 딱 들어붙어 있어. 있으니까 나는 그게 어떻게 좋았든지 말이지요, 그만 같이 가면 싶어. 어데든지 예수님이 그 안에 계셔서 이 세 가지가 있으면은 모든 피조물은 다 거기에 끌리기 마련이고 거기에 마음이 기울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뭐이냐? 이 세 가지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뭇아들의 자유함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말입니다.
그라니까 주님이 낫는 방편을 말씀하시기를, 간단합니다.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라”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니까, 일어서니까 돼져.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라 하는 것은,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라 하니까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야겠다’ 그래 가지고 일어서야 자리를 들지요. 일어서 가지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까 훌훌 뛰었어. 그만 그대로 성전까지 갔어.
일어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어서는 거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한 것 아닙니까? 일어서니까 주님이 시킨, 주님이 일어서라 하니 선 것 아니요? 이것은 주님이 그 현실에서 자기 현실에서 주님이 요래라 조래라 하는 대로 하는 그것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게 일어서는 것이오.
현실에서 현실에 수많은 피조물의 모든 환경의 그 능력들이 유혹을 시켜 가지고 저에게 피동돼라고 저에게 복종하라고 저하고 하나되자 하지마는 현실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 배격하고서 자기의 주가 되신 영감, 진리, 대속 이 세 가지가 자기를 인도할 때에 그 인도대로 따라 움직이려는 것이 일어서라 주님의 음성 따라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어설라고 할 때에 이 환경과 싸우게 됩니다. 일어서는 것이 그게 일어서는 것이요, 그 해석을 여러분들이 그전에 들었을 터이니까 알 것이고 일어서는 것은 곧 그 현실에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대로 하는 것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일어선다고 대번에, 일어선다고 이래 버렸겠습니까? 일어서니까 그거 삼십팔 년이나 누웠었으니까 일어섰으니까 뿌둑뿌둑 뿌둑뿌둑 뿌둑뿌둑 자꾸 이래 일어서지 안했겠습니까? 일어서지 안했어요? 이와같이 현실에서 그 한 현실에서 순종하고 한 현실에서 순종하니까 이제 차차 차차 일어서집니다. 차차 차차 인간병이 이제 치료가 돼집니다. 병은 물러가고 자꾸 건강이 자꾸 돌아오니까 돌아오는 데 따라서 병은 물러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자꾸 이래 가지고 다 순종하니까 다 일어섰지, 다 순종은 언제가 다 순종합니까? 다 순종은 언제입니까? ○○○목사님? 다 순종은 언제입니까? 다 순종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가 다 순종인데 거기에는 다 일어서 가지고 걸어가고 있지 안해요? 이래도 이 걸어가는 일어서는 데에 완성은 세상 끝날입니다, 자기의 끝날입니다.
그러나 그때 이 구원이 중 염불줄 모양으로 한 개 두 개 이래 꿰어서 이래 가는 것이라 했어요 옆으로 자라가는 것이라 했어요? 옆으로 자라가는 거라. 이런데 그건 여러분들이 가서 해석을 하면은 깨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일어서서 자리를 들고 가라 이랬습니다. 일어서서 자리 들고 가지 안하고 일어서 가지고 자리 안 들고 가면은 어찌돼요? 일어서서 자리 안 들고 가면은 다시 그러면 아이구 그 자리 귀찮스러운 자리 애먹였던 자리 그거 이제 만나기도 싫고 보기도 싫은데 그것 또 들고 가라 해? 이제 일어섰으니까 됐다고서 훌훌 그냥 뛰었으면은 그거 주님 거역이요 순종이요? 도로 주저앉아. 이러기 때문에 일어서는 거는 현실 현실에서 한 말씀 한 말씀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순종하는 대로 자꾸 순종하는 대로 일어서고 병은 물러갑니다.
일어서니까 병은 물러가, 일어서니까 병이 물러가. 물러가니까 일어서는 게 아니라 일어서니까 병은 물러가. 알아듣겠습니까? 순종하니까 이제 인간병은 치료해 건강하게 되어지고 인간병은 자꾸 벗어진다 그 말이오.
“자리를 들고 가라” 그 자리는 자기가 삼십팔 년 동안 누를 끼친 자리입니다.
삼십팔 년 동안 자기는 그 자리에게 짐이 됐던 자입니다. 자리에게 업혀 있었고, 들어 얹혀 있었고, 자리에게 누를 끼쳤고, 자리에게 책임을 지웠고, 그 자리에 대해서 혜택을 입었고, 이와같이 그 자리에게 부담을 줬고 누를 끼쳤고 짐을 지웠고 그것의 혜택을 봤고 이랬는데 이것을 전복하라 그말입니다.
오늘까지 네가 모든 어떤 사람에게 네가 누 끼친 것을, 누 끼친 것을 네가 들어야 된다. 이제 누를 끼쳤던 그 자리를 네가 들어라. 네가 다른 사람에게 누 끼쳤던 그 누를 네가 이제 그 사람이 너에게 누를 끼치고 너는 그 누를 짊어져라. 다른 사람에게 부담했던 그것을 이제는 그 부담을 네가 해라.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줬던 그것을 네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받는 사람이 돼라.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친 자가 다른 사람이 너에게 누를 끼친 그 누를 네가 달게 받아 들고 가라.
감당하라. 요것이 자리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짐되고 누되고 고통거리되고 근심거리되고 애먹인 애먹인거리되는 그 모든 것을 이제는 주의 명령에 그거 내가 모든 사람이 나에게 그와 같은 대상이 되어질 때에 그것을 잘 들고 가라, 네가 책임지고 가라 하는 요것이 끝까지 살아나는 방법인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모이고 싶어 모인 것 아니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사 하나하나를 이 모임에 참석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느 인간이 우리에게 준 것 아니고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의 것, 주의 종, 주의 성전, 주의 지체, 주의 몸, 주의 신부, 주님의 제사장, 선지, 왕된 순전히 주의 것된 이것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강건케 하시고 치료케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는 능력의 말씀, 창조의 능력의 말씀, 성장케 하는 능력의 말씀, 치료하는 능력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습니다! 한 말씀도 주님 없이 인간이 인간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은 다 우리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다 소멸해 주시고 순전히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만을 저들이 강직하고 이 말씀으로 강건해지고 치료받고 온전해지려 합니다.
주님, 금번에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이 우로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적시지 않고는 돌아감이 없는 거와 같다고 주의 말씀은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이 억지로 듣고 간절히 듣고 자며 듣고 반대하며 듣고 어쨌든지 이 말씀에 접한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이 말씀이 그의 속과 밖에서 역사하여 오신 목적을 달성하시옵소서. 이리하여 이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의 완성을 이루어 영광의 찬미가 되기까지, 주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이루시옵소서.
이리하여 영의 강건 성장을 주시고, 이 마음을 강건함으로 새생명으로 충만해짐으로 모든 병은 다 제거되어 소멸되게 하시고, 이 몸에 있는 인간병도 이 말씀과 영감과 주의 피로 완전히 치료되고 이로 강건해짐으로써 병들은 다 치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과 마음과 몸에 주의 대속의 이 공로와 영감과 진리로 충만케 함으로써 모든 어둠 같은 질병들이 다 소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따라서 이 사실을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 고기덩어리의 병도 완전히 소멸시켜 주시옵소서.
소멸받은 자가 이 강건 가지고서 소멸케 한 이 능력을 힘입어서 살지 않고 망령되게 다시 범죄할 때에는 더 큰 증세로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더 큰 증세로 나타날 때에 주의 주신 경고의 말씀을 인하여 다시 회개하고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즉시 치료해 주시옵소서.
치료와 징계를 빨리빨리 하여 주시고 더디지 말아 주시옵소서. 유한한 시간에 우리에게 허락된 무한을 다 속성하고 갈 수 있도록, 완성하고 갈 수 있도록 주님의 치료와 징계를 빨리하시고 우리의 건설과 파괴를 빨리하사 주님 앞에 흠과 점과 주름잡힘이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로 주님이 속성시켜 주시옵소서.
금번에 베푸신 말씀이 한 은혜도 떨어지지 안하고 소멸되지 안하고 완전히 실상을 이루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의지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고 이번에 그걸 광고를 안 했는데 이번에 와서 병 나은 사람들은 그걸 병 나은 것을 자랑을 해야 됩니다. 병 나은 것을 광고를 해야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병 나은 것을 자기는 영병이 나았다, 마음병이 나았다, 이제 또 고기덩어리에 있는 사람병이 나았다, 또 자기는 고기덩어리의 병이 나았다. 나은 것을 낱낱이 다 그대로 기록해서 보고를 해 주십시오.
보고를 해 주면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우리도 그와 같이 고침을 받겠다 하는 주님의 하시는 역사가 널리 전파돼 가지고서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기 때문에 이제 그 보고를 해야 합니다.
혈루증된 여인이 낫고 난 다음에 가만히 낫고 난 다음에 이것을 보고하고 광고하지 안할 때에 주님은 노여워하셔 가지고 그 여인을 들추어 가지고서 그것을 발표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발표를 시켰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해 주신 것을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는 그자는 주님이 해 주신 걸 주님이 도로 찾아와야 됩니다. 부끄러워하지 안하고 사람들 앞에 영광스럽게 자랑하고자 하는 자는 주님이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두실 것이요 또 더 많이 많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