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981. 10. 29. 목요일 새벽

 

본문: 요한복음 15장 9절 - 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이것은 설교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날중에 자기 구원에 대해서 제일  중요한 날은 주일날이요. 또 시간적으로 제일 중요한 시간은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왜 거기에서 예배에서 하나님과 가장 접선되기가 쉽습니다. 이래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주님이  찾으신다 이랬어.

그러면 그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은 내가 주님을 찾는 그것도 되지마는 내가  예배를 바로 드릴때에 내가 아름다워서 주님이 나를 찾게 됩니다. 그 시간이 제일  중요한데 예배 시간을 에누리하는 그 사람은 참 보배를 빼앗긴 사람이요. 예배  시간을 주일이든지 새벽이든지 언제든지 예배 시간을 에누리하는 사람 그 예배  시간을 에누리하지 않고, 다만 이삼분이라도 예배 시작하기 전에 와 가지고  준비를 해 가지고 그 예배에 온전한 예배를 드림으로 주님이 내게 마음이 쏠려서  "사랑하는 자가 내 마음을 빼앗았도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것은 무한하시고  모든 삐뚤어짐이 없으시고 하는 후회가 없으시고 그런면이 다르지 감정이나  그런것은 비슷합니다.

왜 그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은 자꾸  취하려고 탐정해 가다가 늘어 죽어도 가고, 낭떨어지에 좋은 꽃이 피었으면 그  꽃을 탐이 나서 꺽으려고 기 올라가다 떨어져도 꺽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우면 내 마음은 그리 끌리는 것이고 나는 끌리게 되는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바로 드리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서 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주일날도 예배드릴 때 꼭 예배는 그저 한 형식에만 주목되는 자라 '한  형식 형식만 갖추면 된다' 이래 생각하니까 예배드리는 시간을 제 볼일 다 보고,  에누리하고, 찌기를 가지고 와 가지고 하나님 섬깁니다. 하나 예배드리는 데에는  첫시간부터 이래 시간 다 드리기는 아까우니까 그 동안에 뭐 볼일 본다든지 잠을  잔다든지, 무슨 뭐 자기가 공부를 한다든지, 무슨 일한다든지 하고 예배 시간 딱  되면 가고 그리 안하면 또 예배 시간은 참석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동안에 좀  다른것 하고 반시간만 참석하면 예배에 반만 참석하면 된다, 그 자리에  출석만하면 된다, 그 사람은 예배에 하나의 형식으로 골떼움이지 그 예배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의 접선된다는 그거는 전혀히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새벽으로도 와 가지고 앉았으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주일날도 그 예배에  출석만하면 무슨 무슨 그것만 하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실효가 있어야 되지 참  어리석소 예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보면 좀 깨닫아 그 사람은 자꾸 자라가,  아무리 중요한 시간이라도 예배만침 중한게 없다. 그러니까 뭐 마구 심방 같은  것도 다른 사람의 몇배나 하는 사람도 예배 시간은 절대 양보하지 안해요. 예배  시간은 양보하지 안하고 또 그사람이 자기 사업이나 모든일에 열중하는 그런  사람이라도 아무리 위대하고 뭐 바쁘고 무슨 큰 문제라도 예배 시간은 에누리를  하지 안해.

예배 시간은 양보하지를 안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 예배 시간을 다른것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 시간보다 중하게 여기는 게 많애,  예배 시간 보다 중하게 여겨서 취급하는 게 많은 그 사람은 하나님과 접선보다  더 그것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고치기 전에는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힘껏 해도 혹은 자기 아닌 객관 세력으로써 그 기안  되져서 그럴때에는 그것은 별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지키려는데 암만 지키려해도 지키지 못해서 주일을 예배당에  나와서 지키지 못해도 예배당에 나온 사람보다 몇백배 더 은혜를 받을 수 있소.

왜? 방해하는 것이 많아서 감옥에 가둬놓고 내보내지 안하지, 또 믿지 안하는  가족들이 붙들어 놓지 이러니까 오만 박해 다하고 이래도 나오지 못하니까, 그  마음이 장소만 그 자리에 있지 그 마음은 예배드리는 그 장소에 와 가지고  마음이 참 미칠만침 그렇게 되는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말이요.

그 사람은 그 장소에 안와도 그 인격 교제로서는 벌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는  하나님 섬기는 것인데 하나님 섬기는 일이 됐다 그말이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 에누리하면 안돼요.

그러고 새벽 예배는 암만 말해도 숫자는 보니까 늘 그 숫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만 살지 다른 사람들은 살릴 생각을 가지지 안 하니까 그 듣든지 안  듣든지 옳은것은 옳다 아닌것은 아니라 하라 이에서 또 지나치면 그 자기  욕심으로 인간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권면해야 되겠고 또 배워야 되겠고 안 들어도 이래야 될  터인데 이런것이 없다 이기요, 숫자가 보니까 늘어 나가지를 안해. 남반도 고정도  언제든지 그 숫자라 그 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거기에서 자기 구원이 되집니다.

지난밤에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했는데 사랑에 성질과 본성에 대해서 제일  처음에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의 본질과 본성은 어떤 것이 바른 사랑인가?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좋아하고, 또 위하고, 또  그를 복되게 하려는, 상대방을 좋아하고 위하고, 또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자기를 인하여 나를 사랑함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사랑하고, 나를 좋아하고, 나를  복되게 하려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과 본성입니다. 이 사랑의 본질과 본성이  잘못된 것은 어떤게 잘못된 것인고 하니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것은 다  사랑의 본질과 본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 같으나 그것이 미움입니다. 그런것은 표현해서 뭐 혈육의 사랑이라  정욕의 사랑이라 동류 사랑이라 그렇게 몇 가지로 표현을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은 그것은 다 사랑의 꺼풀만 입었지 실은 그것이 미움이 되어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혈통에서 났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자기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것, 또 그와 자기와 자꾸 가까이 하고 친근하니까, 자기와 가까와지니  그를 사랑하는 것, 또 자기 온갖 욕심을 인해서 그 사람을 쓰는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하니까.

그 종업자를 사랑하는 것 그런 것 다 자기로 인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그것은  사랑같으나 그것이 따지고 보면 미움입니다. 그 사랑의 올바른 본질과 본성은  자기때문에가 아니고, 상대방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그러면 동기가 시작이  상대방에서 시작되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과 본성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 사랑을 내가 평가할때 그렇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그 사랑의 평가가 그 자기로 인해서 시발됐느냐 상대방으로 인해서 시발됐느냐?  하는 그것이 이제 본질과 본성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미움이 변해서 사랑이 되는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참 올바른 사랑의  본질과 본성이 아니었는데 그게 한 지식이요 외식이요 껍데기로 했는데, 하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는 올바른 본질과 본성의 사랑이 되어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속에서 돼 나오는 것도 있고 밖에서 돼 들어가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전쟁에 같이 가서 입장이 같고 또 같이 있으니까 서로 사랑했습니다. 사랑한  그거는 처음에는 외식 사랑 껍데기 사랑이지 속에는 자기를 위해서 사랑하는  그런 사랑으로 사랑했지마는 얼마동안 그 어려움을 치르고 지나가는 가운데에 그  사랑이 변해서,  이제는 자기보다도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를 위하고 싶지 안하고  상대방을 위하고 상대방을 위하고 싶은 그런 사랑으로 변해지는 그런일이  있습니다. 전우 전쟁하는 그 전우애도 그런수가 있고, 또 그 혈통적인 사랑에도  그런수가 있고, 또 정욕이나 그런 사랑에도 마지막에 그렇게 그 사랑이 참 사랑의  본질과 본성으로 변질되가는 그런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이것은 당신을 인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모든 행사하시는 것은 당신을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을  위함이라고 성경에 많이 밝혔습니다. 이렇게 하신것은 당신이 당신을 깨끗게  하신것이나 또 버리신 것이나 또 십자가에 지신 것이나 모든 참으심이나  그런것이 다 우리를 위해서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쁨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주되신 주님이 기뻐하심은 그 기뻐하심은 뭐이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  기쁨에 해석은 그 기쁨이 내나 참 사랑의 기쁨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기쁨은 당신이 좋아서 기쁨이 아니고 당신을 기쁘게 함으로  당신에게 유익이 되어서 당신이 형통해서 당신에게 좋아서 기뻐하는 기쁨이  아니고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다른것  가지고는 안돼. 내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행복된 자가 될때에 그분은  기뻐하십니다.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내가 행복되는 것 외에 딴게 없어. 내가 좋고 내가  잘되면 그분이 기뻐하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없이는 믿음이 아니면 자기가 참 온전해지고, 깨끗해지고, 참 존영해지는,  존귀해지는 그런자가 될 수 없어. 믿음이 없이는 자기가 잘 될 수 없어, 자기가  잘 되는 그것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것이 된다 그말이오.

그것을 그전에 그 절수 해석할 때에 그걸 많이 해석해 줬는데 여러분들이 자꾸  이 신앙이나 모든 지식이 체계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이것대로 동가리 떼놓고,  저거는 저거대로 동가리 때놓기 때문에 알아 듣는 것 같은데 알아듣지 못하고 또  쉽게 알아듣고 그걸 체계적으로 알아들으려 하면 알아 듣기 힘이 들고, 좀 애를  쓰고 알아들으면 자기에게 참 능력이 될긴데 그게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단편적인 그 단절 딱 끊어논 것 끊을절자, 절수절자, 마디절자 이  끊어논 그런 한동아리로 끊어논 단절적인 이런 마디절자가 아니고, 단절적인  이런식으로 받아 드리기 때문에 이거 알고나면 저거 모르고 저거 알면 이거  모르고 모든 진리는 하나인데 그것이 다 통하지 안한다 말이요 이거 도가 통하지  안한다 말이오.

내가 뭣 말하다 말았지? 믿음이 없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 기쁘시게 못한다' 하는 그걸 내가 믿음을 가져서 당신 시키시는 대로 해  당신이 기뻐하신다 그게 아니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는  그 기쁘심은 내가 하나님을 좋게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이 아니고  내가 믿음을 지키야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계시는 그 소원대로의 내가 행복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다 그말이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그말은 믿음이 없으면 네가 하나님 이제는  안심을 하고 이렇게 근심 걱정하고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염려하신 그 당신의  소원이 풀어진다, 당신의 소원대로의 네가 가치있는 존귀한 자, 참 그 존귀한 자,  영광스러운 자가 되어진다 그말이오. 사랑의 본질과 본성을 말을 했고 또 그  다음에는 사랑에 강도를 말했습니다.

사랑에 강도는 내나 이런 사랑인데도 자기에게 있는 자기에게 있는 백분에  일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지, 자기의 전부보다 사랑하는지, 사랑에 최고에 강도는  열도는 자기의 소유와 자기 자기까지 다 희생해도, 상대방을 위해서 다 자기에  무엇이 아니라 자기에 전부를 다 희생해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자기 소유보다  자기 자기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그것이 최고의 사랑에 도수가 높은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사랑이 그러하요 그러한 것은 당신에 부요도 우리 위해서 내놨지,  존영도 내놨지, 지위 영광도 내놨지, 내 모든 소유도 다 냈지, 생명을 마지막인데  최고 절정이요 최후인데 우리의 죄에 문제를, 의에 문제를, 하나님과 원수 문제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 내놨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대해서 최고도에 사랑을  가지신 것을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뭐이요? 사랑에 실력 사랑에 실력은 그는  분명히 그 참 사랑에 본질과 본성으로 참 사랑에 본질과 본성으로 나를 사랑하고,  또 최고의 그분으로 최고에 도수로 열도로 나를 사랑하고 한다 할지라도 이제 그  사랑에 능력이 문제라 그말이오. 사랑에 실력이 문제, 능력이 문제 능력은 뭐  재산에 그 능력도 있겠고 그 사람에 또 무슨 권위나 지위나 지능이나 그런  능력도 있습니다. 있으나 자기에게 능력 이상은 자기가 못한다 그기요 이상은  못해.

그러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을 제일 좋아 하는데 사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살맛은 자기 때문에 살맛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때문에 살맛이  있소. 자기 때문에 살맛이 있는데 왜? 사랑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고 하니, 자기  아닌 자기를 하나 더 얻게 되기때문에 그리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를 좋아하던 사람이 자기가 둘 됩니까 더 좋아해 또 자기보다 자기보다 더  좋은 자기를 얻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결혼도  다 그 이치요 친구도 그 이치요 사랑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 아닌 자기를 얻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주님이 행복된것은 당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것이 그분에게는  행복입니다. 우리 위해서 모든 것을 기울이지 안하고 견딜수 없는 것을 하나  얻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으로 기뻐함 보다도 우리로 기뻐함이 하나 더  생겨져서 커진것입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알아듣기가 좀 힘들터이니까 모르나 이제 기억만 하십시요.

사랑에 능력은 그 상대방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서 하는지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만족한 행복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만족과  행복과 평강을 누리게 돼요. 그러나 만족한 그런 행복과 평강을 누리다가 나를  사랑하는 상대방에 그 능력에 능력이 끝나면 능력이 끝나면 그때는 그 사람이 참  그만 기절해 자빠집니다. 그이면 다 될줄 알았는데 그이면 다 될줄 알았는데 그만  그이로써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나 턱 닥치면 고만 절단이 납니다.

어떤 사람들 참 아주 재미있게 사는 젊은 부부인데 그 부인이 뭐 어떻게  배짱있고, 어떻게 만족하고, 평안하니 다른 소리를 해야 귀에 전에 들어가지도 안  합니다. 전에 들어가지 안하고 그 행복을 따지보면 자기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만족합니다. 이러다가 갑자기 그만 그 남편이 병이 들어서  죽을 병이 들었다 말이오. 그래놓으니까 그 부인이 그만 완전히 생명을 잃었다  말이요 기가 차서 이러다가 뜩 죽어버리니까 그만 그만침 평안했던 것만침,  만족했던 것만침 그게 바싹 깨져버리니까 아주 그만 그 사람이 환장을 해 버리고  정신이상이 되버리고 굉장해지는 것을 내가 봤다 이거요.

그것이 뭐이냐? 사랑의 그 실력이 끝났다 그말이오. 사랑의 능력이 끝나니 그래  사람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책상 위에 앉아서 비판해보고 해봐도  모두가 다 그 실력이 한정이 되어 있으니까 그 사랑에 대상의 실력을 자기가  측량을 해봤다 말이요, 그 사랑의 대상에 실력을 앉아서 측량을 해봤어 측량을  해봤어. 자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능력이 이면에는 그 능력이 어느 정도 크냐?  저면에는 어느정도 크냐? 그 사랑의 실력을 이제는 심사를 해봅니다. 심사를  해보니까 요거는 어느 정도고 조거는 어느 정도고 하는데 다 마지막에 끝이난다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데에는 이제는 그만 절망이 되고 사랑을 받는데도  절망이 됩니다. 이러니까 이 절망에서 죽어서 없어질 때에 절망되는 거와 같은 그  절망과 같은 그런 절망을 자기가 만나게 되면은 그 절망에서 끝날 것이 아니고,  예수님 믿지 안한 사람은 그만 그 절망에서 끝나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하고, 그만 그  사람이 세상을 싫어하는 염세주의가 되버리고, 그만 세상에서 아무런 욕망이 없는  그런 참 염세주의자 낙망자 마지막에는 자살하는 이런 사람까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거기에서 그 사랑의 실력을 측량을 할때에 아주 온전한  본질도 있고, 본질이 바로된 참 사랑의 본질과 본성을 가졌고, 또 참 사랑의 최고  도수의 도수를 가졌고 이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실력이 너무도 없어서 참  인정하고 믿을 수 있고 이렇지마는, 그 실력이 어느 정도기 때문에 그 실력이  끝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에 사람이 기절할만침 낙망할만침 그렇게 되어지는  고통에서 안됐다, 아무래도 이 사랑의 실력의 실력을 이것을 갖추도록 이  실력있는 데다 접을 붙여야 되겠다, 사랑의 접을 붙여야 되겠다, 이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하나님에게 접을 붙입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사랑해서 그를 위해서 내가 목숨을 바치고 다 나보다 그를  분명히 더 사랑해도 내가 내 실력을 따질때에 이 실력이 끝나니 이렇츰 내가  사랑하는데, 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 내가 만일 죽는다면은 내가  사랑하는 그자에게 좋게 행복되게 해주려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서 당장에 내가  죽는 동시에 죽음이 되어지는 이런 일이 되어지니 이거 어떻게 되느냐 이 생명  문제가 탈이다.

이래 가지고 그 생명을 찾아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된 영생을 자기가 가지고 또 내가 이렇게 하지마는, 지혜가 유한하기 때문에  내 딴에는 사랑함으로 아주 있는 힘 다 써서 지혜를 다 썼지마는 실은 초지장  한장 넘어도 모른다 그말이오. 내가 이 다음에 뭐 어찌될지 몰라 모르니 안됐다  하나님의 지능으로 연결시킨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지능으로 연결을 시키고 그  하나님으로 연결을 이렇게 시켜서 하나님과 연결된 이 연결된 하나님의 것이  내게와 가지고 내것으로서 그걸 상대방을 사랑치않고는 그 안돼.

이러니까 이거 아니고는 줄 것이 없다 그말이오. 이것이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이거 접을 붙여 변화시킨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분이 거기에 연결이 되어서 해야되지 그것만 가지고 자꾸 나를  사랑하니까, 그 사랑은 너무도 뿌리가 얕고 끝이 빠르기 때문에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고 나는 안심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상대방이 하나님에게 연결되어서 포도는 주님 말씀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게 끊쳐지면 다 헛일이라 모든 것이 다  헛일이라 이러니까 거기에 연결되도록 해서 참 그분이 주님과 결합이 되어  가지고 날 사랑하고 내가 주님과 결합되 가지고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끝이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실력가라 이거요. 실력가라 모든 게  아니라 시간으로도 이 시간에도 사랑할 수 있고, 억억만년 후에도 사랑할 수가  있고, 이자리에도 사랑할 수가 있고, 또 어떤 감옥소에서도 사랑할 수가 있고, 또  하늘나라에서도 사랑할 수가 있고, 어데가든지 나를 사랑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공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졌어, 시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졌어, 또 사건 초월  능력에서 이 사건에서만 사랑하지마는 다른 사건에 사랑할 수 없지마는 그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건에서 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말이오. 내가  죄를 지을 때는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가 있어.

이러니까 내 죄에 대해서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써 내 죄를  해결짓기까지 사랑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의 사랑에게 실력을 연구할 때에 자기에게 포근함이 나옵니다. 이  사랑은 가장 포근하고,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만족되는 이것이 형언 할 수  없어. 제일 행복된 것이 이것인데 사랑의 결과는 사랑의 결과는 행복되고,  평안하고, 즐겁고, 쾌락되는 것인데 요것의 도수는 그 사랑의 본질과 본성대로의  요것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스러워지는 것인데 그 지난밤에 그 하나 비유로 해 가지고 이  사랑은 자기에게 참 이런 사랑이 되어있는데 그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스러운 그 병이 우리에게 들었다  이거요. 이제 그것을 치료가 되면 우리는 행복스러워 집니다. 행복스러워지는데  그게 치료가 되면은 행복스러워집니다. 사랑의 본질 본성, 또 사랑의 그 열도, 또  사랑의 능력 그러면 행복의 그 양이 행복의 양과, 행복의 능력, 행복의 질, 행복의  열도가 행복의 능력이 이것이 자기에게 쾌락으로 옵니다. 쾌락으로 그것이  나타난다 이기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이 사랑이 변질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변질이 됩니다.

이렇게 참 행복스러웠었는데 행복스러웠는데 이 사랑이 변질되면은 이 변질되는  병이 들면은 아주 이렇게 강도로 되어 가지고 참 본질과 본성도, 그 열도도,  능력도, 자기에게 이루어진 그 행복의 쾌락도 이것이 한없이 행복스러운 사람이  됐다가도 그것이 차차차차 변질돼 나가면 나중에 가서 아주 불행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 변질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던 사랑이 변질되는 그 변질이 따로 있고, 또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또 그 사랑의 변질이 따로 있습니다. 어떻게 변질이 되어지는고 하니  내가 다른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변질 되어가는 것은 그 사랑의  눈이 어두어져서 변질돼 나갑니다. 사랑의 눈이 어두어져서 눈이 어두어지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변질병은 이름을 가르쳐서 눈병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눈병이라 말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안한다 이게 제  사랑의 눈인데, 사랑함으로 상대방의 그 흠점이 그것이 보이지지 안하고 그만  사랑하니까 그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좋은점도 나쁜점으로 보이지는  그것도 눈먼 것인데 또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만 나쁜점도 좋은점으로  보여집니다.

이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가루느니라" 하면 해석을 해논 주석들이 모두다  어떻게 해석해 놨는고 하니, 그 사랑이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그 모든  흠점이나 그런 자기에게 어떻게 나쁘게하는 그런 것이 자기에게 자극주지 않는다  자기에게 그것이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랑하면 그를 관용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있다, 단점이 보이지 안할 수 있다 고렇게 해석을 해서 고 쓴 사람은  고 사랑을 아직까지 맛도 보지 못한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랑의 눈병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만 그 다음에는 완전히 그  사랑이 변질되어서 미움으로 화해지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화개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면 그이에게 대한 좋은 점도 보이지마는  잘못된 단점이 보여져서 그 단점을 치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눈이 멀면 보면 저거 남편에게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는 것보다  다르고, 저거 아내에게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는 것보다 다르고, 저거  자녀에게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는 것보다 다르고, 저거 친구에게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는 것보다 다르고, 그 자기 교인에게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는 것보다 다르고, 저거 식구에게 대해서는 다르고, 그게 다른 것이 뭐이냐?  사랑이 그 눈병이 나서 그렇습니다. 사랑이 변질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변질되는 그 변질되는 그 변질은 눈병입니다.

그거 아니면 변해져 거기에서 제일 거기에서 사랑으로 시작됐던 것이 마지막에는  그 사람을 해치는 미움 나는 실상 좋아하지마는 그를 자꾸 망치게 합니다. 자꾸  망치게 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 사랑이 변질되면 내가 주는 사랑에 변질되는 그  사랑은 눈병이라 눈병으로 변질합니다. 또 내가 사랑을 받는 사랑이 변질되는데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내가 받는 사랑에 대해서 변질되는 것은, 그  사랑이 차차 경쟁으로 사랑이 경쟁으로 변질됩니다. 받는 사랑의 변질 병은 경쟁  병이라 전투병이라 이 병으로 변해집니다.

몰라도 알아듣고만 있으면 나중에 알아질 것입니다. '변질되고 변해진다' 그말은  뭐인고 하니 이제는 상대방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니 그것이 바로 되려면  사랑하니 감사가 되어져야 되고 또 그 어떤 분이 그 사랑의 실력이 어떤  실력인지 그 실력을 연구하고 또 그 본질과 본성을 연구하고 사랑의 열도를  연구하고 그러니까 내게오는 사랑이 어떠한 가치를 요구하고 이래서 감사가  나오고 내가 그이의 사랑에 대해서 사랑을 받는 그 받는 사랑의 가치를 내가  연구한다 말이오.

사랑의 본질과 본성을 나에게 나를 사랑해 주시는데 사랑해 주는데 요 사랑의  본질과 본성을 내가 따져보고 자꾸 따지들어 따져들어갑니다. 이것이 주의 피와  살을 먹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과 본성을 따져, 그의 열도를 따져, 그의 능력  사랑의 능력을 따져, 이러니까 나에게는 그 사랑의 가치가 커지니까 사랑의  가치가 커지니까 내게 대해서 감사의 가치가 커집니다. 감사의 가치가 커지니까  그 다음에 뭐이 커집니까?  뭐 하나라도 알아야지 뭐이 커지요. 뭐 행복의 가치가 커지지 행복의 가치가  커지지 않소. 이런데 이것이 악령의 작용으로 변해지기 쉽다 말이오. 변해질  때에는 받는 사랑의 변해질 때에는 이것이 전투로 변해집니다. 경쟁으로 변해지요  상대방이 자꾸 나를 사랑하니까 그가 나를 사랑하니 내가 자꾸 그는 나를  사랑해서 자꾸 날 위해서 이랬다 하는데 내가 그 사랑을 상대방의 사랑을  연구하지 안하다 보니까 내가 그 사랑을 처음에는 귀중히 여겼다가 나중에는  차차차차 저는 높아지고 저는 높아지고 상대방은 작아집니다. 저는 높아지고  상대방은 작아지요 이러니까 상대방을 이제 만만하게 업수이 여기에 됩니다.

업수이 여기게 되어서 자꾸 그래 사랑하게 자기는 높아지고 상대방은 작아지고  자꾸 이래 가지고 지금 이게 이제는 이 경쟁적으로 이러니까 경쟁은 저거 하나  나오면 또 나는 둘 나오고 이래 가지고 이제 싸워야 되는데, 이쪽은 잡고 있는데  저쪽에서 이걸 옮겨되니까 오해를 해서 저 자세를 본다 그말이오. 저 자세로 보고  그 상대방은 자기에게 자꾸 이제 주고 희생하고 자꾸 이러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걸 깨닫지 못하게 되면은 어찌되느냐 고만 이 경쟁성으로 나가고 또  전투성으로 나가고 그러니까 상대방은 작아지고 자기는 자꾸 커집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받는 사랑에 병이 들고  주는 사랑이 병이 들어서 변질되면은 아무리 좋아졌다가도 차차차차 그것이 병이  들어 나중에 낡아져서 그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대해서  어떤 그 이 변질이 안되 가지고 있는지 변질이 되면 변질이 되어서 그 받는  사랑의 변질이 되나가면 그 상대방이 업신여기게 됩니다.

내가 어떤 그 말하나 들었는데 그 사람은 참 아주 유식하고, 원만한 인격을  가졌고, 참 휼륭한 사람인데 그분이 장관이라 장관, 장관인데 그 장관은 이  부인을 아주 사랑하고 부인이 무식한데 무식할수록 사랑하고, 또 등신이니까 더  못견디게 사랑하고, 애착이 되지고, 자꾸 그래 되고 이런데 이러니까 이 부인이  자기는 싫어해도 상대방은 좋아하고, 자기는 미워하고, 무시하고, 멸시를 해도  상대방은 자꾸 자기를 존중히 여겨서 이러니까 오해를 가졌다 말이오. 사랑이 그  전투로 비교를 해서 변질이 됐어.

이러니까 그만 그 사람에게는 그 다른 사람은 그 장관을 일국에서 다 높히 보고  이래 보는데 그만 그 부인만큼은 그 남편이 못난 사람 중에 제일 못난 사람이고,  천한 사람 중에 제일 천한 사람이고, 자기를 자꾸 그렇게 해 줄 수록이 자기가  비교해보니까 자기는 높아지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주 이거는 길가 다니는  거지만도 못하고 이제는 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말이요 아주 그만 자기 보기에  아주 못나 보이니까, 다른 사람은 그분을 행복되다 하는데 행복이 없어. 그  불행스럽고 불만해서 참 마음에 견디지 못하겠다 말이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집에 아주 아무것도 아닌 운전수 자가용 운전수가  있었는데 그만 운전수를 달아 가지고 둘이 그만 그 남편을 치워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어. 장관 부인이 자가용 운전수하고 도망갔다 그런데 그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사랑했더랍니다.

그것이 뭐이냐? 받는 사랑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랑이 변질되는 것이요  주는 사랑이 변질되는 것은 눈병으로써 그것이 절단나고, 또 받는 사랑에  변질되는 것은 이 평가로써 그것이 평가가 잘못되 가지고 경쟁으로 비교성으로  전투성으로 이렇게 보기 때문에 상대방은 자꾸 굴해지고 자꾸 이래하니까, 자기는  이제 버려도 상대방은 이래 하니까 그것이 그만 그 경쟁성 전투성이 그 병으로  변해져서 변질되 가지고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에게 대해서 어떤 병이 들었는지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으나 모르는 사람 주님의 사랑이 한없이 있지마는 참 자기는 천하에 피조물  중에 제일 행복되는 사람이지마는 그 사랑이 믿어지지 안해서 믿지를 못해서  인정이 못 돼서 불행스러운이 병이 우리에게 들었소. 우리에게 인정 못하기  때문에 행복되지를 못하는 이 병이 우리에게 들었소. 이 병이 들었고 또 이병이  고쳐져서 참 그의 사랑을 알아 행복을 가졌던 이 행복된 사랑이 마지막에 그  행복이 깨지는 일이 있다 말이오.

깨지는 일 있는 그것은 뭐이냐? '처음 사랑을 버렸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가져라' 그 성경에 말씀한 것이 그것인데 마지막에 무슨 병으로 됐느냐 하면은 이  평가적으로 나는 주님의 사랑을 그것을 연구해 보지 안하고, 그것을 참 심사해  보지 안하고, 그 능력을 헤아려 보지 안하고 했기 때문에 그 능력은 차차차차  없어지고 그 사랑에 대해서는 나는 무식해지고 상대방이 나를 사랑했는데 내가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하고, 이래 사랑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무시하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무시하는 것이 예수님이요. 이렇게 벌써 무시하는 그  평가를 잘못했지요. 평가를 잘못하고 자꾸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한다, 자꾸 사랑한다 말만 되지고 하나님의 그 두려움이나 하나님의  미움이라는 그면을 잊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가서 그 받는 사랑에  병이 들어서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아주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아무리 하나님을  인정하래야 인정되지도 안하고 업신여기 가지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니까 자기  행복이 업신여겨집니다. 자기 행복이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그 행복이 없어지고 마는거라. 그것은 뭐이냐?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만 보고 그 율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늘 말하기를 율법에서  정죄는 죽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살아나야 되는 것인데 율법없는 사랑만 자꾸  말해, 요새 지금 가속도로 이제 교회를 죽입니다. 가속도로 교회를 죽이는 것은  뭐이냐? 율법이 없는 사랑만 자꾸 말하기 때문에 가속도로 되져.

그러니까 사랑 운동 그게 제일 밉다 그말이오. 그게 제일 밉고 그게 사람을 제일  죽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게 암이 되지고 병이 되지고 디비질런지 모릅니다.

변질이 돼 나가는 일, 이러니까 자 교인들이 교인들끼리 사랑하는 이 사랑은 그만  병이 들어서 눈병이 들어서 다 절단이 나버렸지, 또 서로 교인들이 사랑하는  사랑도 이 사랑이 평가 병이 들어서 이것이 전투병으로 들어 가지고 서로  투쟁하는 것 보니까, 나는 쿡 지박아야 저 쥐박지 못 합니다.

나는 지금 저쪽에서는 자꾸 굴하고 사랑해주니까 이 병이 들어 가지고 절단이  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인정이 안되는 데에서 그  결과인 행복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예 그의 사랑의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내 사랑안에 거하라" 그말은 그 사랑을  인정하라 말인데 그 인정하면 모든 것이 다 인정을 해야 믿어야 뭐이 되지지  약속하기를 네가 믿는 대로 되리라 믿으니까 낫았다 그말이오. 그게 전부 보이는  것이 사복음에는 그게 거의 다 아닙니까.

이런데 "내 사랑안에 거하라" 그말은 그 사랑을 인정하는 인정속에 있으라  그말이오. 인정속에 있으면 어쩌려고 "내 기쁨이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 속에  있어서 그 십자가의 죽으심의 그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한 것처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내 기쁨으로 말미암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되  가지고 너희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했는데, 사랑속에 있지를 않기 때문에  그말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인정되지 안하는데 인정하게 하려면 내  계명을 지키라.

내 계명을 또박 또박 지키면 그 사랑안에 있기 위해서, 그 사랑이 인정되기  위해서, 그 사랑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분이 날 사랑하니 그분이 날 그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돈 위해서 율법지키지 말고, 사람들에게  간판이나 인정받기 위해서 지키지 말고, 뭐 자기네들이 지키지 말고 그 사랑의  거기 연결되 가지고 계명을 지키보라 지키보라 지키보면 내 사랑안에 거하게  된다 인정하게 돼요. 인정하게 되는데 인정하게 되니까 기쁘고, 즐겁고, 뭐 뛰고,  좋아하고 모든것이 보이지 안하고 그 사랑만 제일이였는데,  이렇게 주의 사랑을 받음으로 만족했던 것이 이것이 그 사랑을 연구하지 안하고,  그 본질과 본성을 연구하지 안하고, 그의 도수를 연구하지 안하고, 그의 실력을  연구하지 안하고 연구하니까 자기 행복이 연구된다 말이요. 그 연구 하니까 자기  행복이 연구되고 그 연구하니까 자기 연구가 돼. 자기 연구가 되니까 자기는  미워할 수 밖에 없고, 자꾸 미운것이 나오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고, 괴수가  되버렸고 나오고 그사람 커지고 이러니까 커져 나로 인한 행복은 다 깨져 버린다  그말이오. 나로 인한 행복은 다 깨져버리고 아무것도 아니라 말이오. 나로 인한  행복은 깨져버리고 그로 인한 행복은 나에게 자꾸 커진다 이거요.

이러니까 감사가 되지고 또 그러니까 그분은 자꾸 나보다 커지고 나는 작아지고  이러니까 하늘나라 가면은 그분과 나와의 한테 어깨저름 하고서 그만 다 같을 줄  알아도 신앙이 자라가서 그 사랑이 커질수록이 그분을 다시 눈을 들여다 보니까  커지고 나는 작아지고 이러니까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가 거기서 기절했던  것입니다. 눈이 뜨이고 보니까 그 사랑은 그분은 크고 그 사랑은 크고 자기는  못낫기 때문에 기절해졌어.

그러면 하늘나라 가면은 거리가 멀다 주님은 같이 계시지마는 그와 나와는  무한한 거리가 되어 있다. 이러니까 그거 보고 사도 요한이가 놀랬어. 네가  패역과 반역을 부릴 때도 네가 내 품안에 기대고 했을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만치 너는 나와 가까와지고 커졌지, 커졌는데 그때 내가 너를 사랑했는데 그  내가 널 지금 사랑하지 않겠느냐? 네 눈이 지금 밝아져서 네가 변해졌지, 내 눈이  그때도 변해진 것 아니다 그때 알파와 오메가다 그래 말씀했어. 알파와 오메가다  그때와 나는 지금 같다 그 말씀을 요한계시 1장에 말씀했더라 이거요.

이래서 자꾸 바로 연구하게 되면 그분이 커지면 나는 작아지고, 그 사랑이  커지니까 나로 말미암아 행복했던 것은 없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된 행복이  자꾸 커지는데 이것이 병이 드는데 주님이 날 사랑해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이  무슨 병입니까 무슨 병이요? 그게 실은 경쟁병이요, 전투병이요, 비교 병이라  말이오. 이런데 전투인데 자꾸 날 상대방이 나에게 굴해지니까 그것이 오해병인데  말이오.

그래 내가 어떤 사람들도 가만히 부모도 보면 그래요. 보면 그 남편이 아내가 참  못쓸 짓을 할 수록이 불쌍하고, 애 터지고, 애가 쓰이고 이렇게 자기로 측량못할  좀 폭넓은 사랑과 사랑이 측량 못하고 폭넓은 이 큰 사랑이 되지면 사랑을  이해를 못하고 도로 오해하고 하는 이 비교 그 잘못된 평가, 전투, 경쟁 이것으로  변해져서 남편이 그 아내를 사랑할 수록이 자꾸 업신여깁니다.

우리 요 앞집에 이제 우리가 집을 샀는데 그 집에 그 부부간이 있었어. 이 사랑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서 그 아내가 참 인간 같지 않는 짓 할수록 자꾸  사랑합니다. 사랑해 가지고 가만히 보면 남편이 출근하면 고만 얼른 전화 걸고 뭐  꾸미고 이래 가지고 나갑니다. 나갔다가 남편 들어올 때 되면 그만 와 가지고 막  이래 수심이 있어 가지고 아파서 들어 누워 죽는 사람처럼 이래 가지고 들어  누워서 이러면, 남편이 약도 지어 가지고 오고 그 안다 그 말이오. 알지마는  그것을 또 타이르고 또 가서 하고 하고 자꾸 이래도 안돼.

그래 자꾸 남편은 이러니까 그만 남편이 자기 발새 때만치도 안 여겨. 이런데 그  남편은 참 위대한 사람인데 이 아내가 그 사랑을 연구를 못해. 그래 가지고 뭐  오면 돈을 벌어 가지고 오는 그 남편을 욕도 하고, 밥도 해주지 안하고, 밥해주지  안하면 자기가 밥을 해먹고, 그렇지 않으면 약그릇 집어 내 던져 버리고 이러다가  마지막에는 이혼을 했습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저도 이혼하는 게 좋고 뭐  징그럽다 그 말이오. 그 남편이 징그럽다 그 말이오. 또 이제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무리 하려해도 안 된다 이 말이오. 안 되니까 포기야. '이러니 할 수  없다.' 둘이 나눴어 이혼했습니다.

이혼했는데 그 뒤 말 들으니까 그 남편은 다시 재혼해서 참 잘 산답니다.

행복스럽게 산데요. 이 사람은 그 뒤에는 시집도 못가고 그래 가지고 놈팽이  깡패모양으로 그래 다니고 있어. 얼마 전에도 누한테 물으니까 봤다 말 들었어.

그 부부간도 그럴 수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랑은 두려움과 또 사랑이 겸해야  되지, 두려움 없는 사랑만 가지면 반드시 변질됩니다. 네 두려움과 사랑이 겸해야  되지 두려움 없는 사랑은 맛이 없어서 안돼.

내가 그건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인데 어떤 들은 말인데, 그 남편이 그 아내를  자꾸 사랑하고 이러니까 아내가 어떻게 그 사랑할 수록이 업신여기는 거라.

사랑할 수록이 업신여겨 업신여겨서 그 남편은 좀 체신이 작고 이러니까 이  아내가 그만 그 사랑을 업신여기는 게 체신도 업신여기고 이랬는데, 친구가  있다가 '네가 두려움을 가지지 안하고 네 아내가 네가 두려워야 맛이 있을 것인데  두려움이 하나도 없고 사랑뿐이니까 맛이 없어서 그렇다. 그 내가 방편을 가르쳐  줄터이니까 한번 해라.''그러면 그래 어떻게 하면 돼노?' '너거 실한 장하나 있지. 그 장안에 나는 키가 작고 그러니까 좀 저것 좀  내려보라고 이제 슬슬 추켜올려봐라. 그러면 기 올라갈기다 기 올라가거들랑 딱  잠가놓고 밖에다 대못을 쳐라 쳐 가지고 어쩌든지 이레만 굶겨라 굶겨 놓고  빼돌라 해도 안 빼주고 그래봐라.' '어떻게 굶어 죽는다.' 하니까 '이레동안 굶겨  놓았다가 나중에는 막 자복을 하고 이래 가지고 뭐 빌고 싹 싹 빌고 그러니  밖에서 호롱을 치고 빌고 빌고 하니까 이레만에 뜩 끄내놓으니까 기운이 있을  것입니까 그래 놓고 나가서 실컨 뚜드리라. 평상 결혼하고 처음인데 실컨  두드리라.' 이러니까 아야 이 남편에도 이런 무슨 까시가 있고 용기가 있구나! 그  뭐 거기에서 그 아내가 그 남편에게 바짝 달라붙고 그만 그 매력을 느껴 가지고  잘 살았다고  그럴 때는 그것도 좋은데 요새도 또 어떤 남편은 보니까 영 치우쳐서 그 참  동양에는 남존여비가 되어 가지고 이래놓으니까, 지금은 좀 있으면 이게 여자에게  남자들이 천대 굉장히 받습니다. 굉장히 받을 것이요. 남편이면 주먹이 세고 힘이  세니까 그거 가지고 그 무리하게 두드리고 어쩌고 이래 가지고 제가 이치도  잘못해 가지고 잘못한 이치에 무리하게 그렇게도 하지마는 아내가 참 남편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그런 아내도 있고, 또 남편이 아내에게 참 억울하게 하는 그것도  있고 이게 공평이 안되면 행복은 절대 안 옵니다. 그 공평이 되야 이래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남편인 이 주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는데 믿지 못하는데서  불행이 오고, 그 행복을 그 사랑을 믿음으로 행복의 양이 작든지 많든지 이  행복을 가진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오해를 해 가지고 업신여겨서 이 사랑이 병이  들어서 주님이 날 무조건 사랑하니까 내가 주님을 만만히 여겨서 죄짓고, 또  주님에게 고하고, 죄짓고도 구하고, 죄짓고도 구하고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하는  그 사랑을 세기지 못하고 도로 업신여겨서 만홀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썩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해 못하는 병, 또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이 사랑을 오해하는 그 병, 도로 주님을 업신여기는 이런 병 그러기에 이것을  가르쳐서 "주의 피를 속된 것으로 여긴다." 이 죄를 크게 정죄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주님이 우리 사랑하는 사랑 우리가 인간 사랑하는 사랑이 꼭  하나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요기라야 되어지지 소용없는 사랑 그 사랑이 변질된  본질과 본성이 변질된 그런 사랑 그까짓 거 암만 받아봤자 또 그게 바로 되어  봐도 또 그게 뜨거워 봐도 실력 없으면 헛일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의 실력을 이것을 연구해 가지고 사랑의 사랑이  좋습니다. 좋은 이유를 어제도 말했고 오늘 아침에 말했습니다. 그 연구해 가지고  실력있는 사랑에 뿌리를 박아야 돼. 주님에게 연결시켜 놓으면 그 아내 사랑함이  영원하요, 남편 사랑이 영원하요, 자녀 사랑함이 영원하요. 영원한 사랑이 좋지  않습니까 있다가 가다가 낭파 될 것 영원한 사랑으로 살아 놓으면 죽으니까 더  좋지 죽을때 닥치면 낭만에 죽을 때는 더 좋아.

아마 이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 부부들은 죽을 때는 아내가 죽으면 죽는 아내가  남편에게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럴 것이요. 남편도 그 아내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앞서 가십시요. 아주 그 이별이 아니고 참 기쁘고 즐거울 것이라 이게  우리의 생명의 길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이 새벽에 안나오면 저거가 도리를 몰라요. 그렇게 알기가 쉬운 것이  쉬운 것인 줄 압니까? 도리를 몰라. 그러기에 성경 한 권만 보고 신앙생활하는  거기에서 뭐이 돼 나옵니다. 이 속화된 신앙 안돼. 삭개오가 뭐입니까 다  치워버리고 앞서 도망질 달음질 쳐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어. 삭개오를 하나 형식계시로 들어내 놓은 것은 뭐이냐? 이렇게 줄 따라가면  안돼. 이 변해져야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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