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22:03
사람 낚는 어부
본문 : 요한일서 5장 4절∼12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게 잘못 분별하면 복잡해서 무슨 말씀인지 모르기 쉽습니다. `물' 말 한 것은 내나 진리를 이렇게 물로 표현했고, 또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말씀했고 성령은 내나 영감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알고 또 이렇게 혼돈해서 삐뚤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이라 피라 물이라 이렇게 세 가지로 나타내서 말씀을 하시고 둘로 나타내서 말씀도 하시고 하나로 나타내서 말씀하시고 이렇게 했는데.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바로 구별해서 알아서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거게 대해서 하나 하나 세밀히 아는 것은 늘 증거하는 그 말씀이 다 이렇게 펴서 책을 퍼면 조그만한 책 한 권이라도 그것을 펴면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심히 많은 거와 같이 하나님의 이 도리는 펴면 심히 양이 많고 참 온 세상에 둬도 둘 만한 곳이 없을 만치 그런 많은 양이나 한테다가 접으면 신구약 성경 한 권 책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진리라도 그 진리를 자기가 바로 깨닫고 들어가서 그 진리를 성신이 펴 주는 대로 펴 가지고 보면 한 진리 안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 들어 있고 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어느 말씀이라도 다 하나를 가르치는, 속에 들어가면 그 진리는 하나라 하는 것을 자기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단일성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겉으머리로 나타내기는 만일 백 가지나 천 가지로 나타냈지만 도 속에 들어가면 하나입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참이 외부로 나타날 때에는 참이 사랑으로도 나타나고 긍휼로도 나타나고 정의로도 나타나고 공의로도 나타나고 깨끗으로도 나타나지만 깨끗한 그것이 파고 들어가 보니까 깨끗 그것도 내나 그것이 사랑이요 깨끗 그것이 진노요 깨끗 그것이 또 관용이요 깨끗 그것이 진실이요, 그러면, 이런 모든 것이 하나, `깨끗' 하면 그 깨끗 속에 진실도 들어 있어야 되고 거룩도 들어 있어야 되고 공의도 들어 있어야 되고 인자도 들어 있어야 되고 그 모두 다 진실이라는 그 진실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거기 다 있습니다. 진실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실 안에는 거게는 공의도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 안에 보면 공의 없는 진실은 소용없어. 정의 없는 진실은 소용없어. 사랑 없는 진실은 소용없어. 거룩 없는 진실은 소용없어. 신실없는 진실은 소용없어. 충성 없는 진실도 소용없고 열심 없는 진실도 소용없어. 이런 것이 다 진실 하나 속에 다 들었다 그말이오 그것을 가리켜서 단일성이라 그렇게 한말로 말하면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된 것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다 이렇게 표현을 하나 예수님의 피로 중생됐다는 말도 꼭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피 하나를 말하면 좀 알기가 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물로도 말하고. 또 진리로만 자꾸 말하면 거석할 것이기 때문에 물로도 말한 것입니다. 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물은 자꾸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그런 성분을 가리켜서 말하고 또 물은 모든 데 대해서 아주 깨끗하면서도 관용성이 있습니다. 물은 얼마든지 깨끗한 것이지만 어떤 동물에다 갖다 부으면 다 받아 들여 가지고 그것이 차차차차 정화돼 가치고 마지막에는 깨끗한 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물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가는 길에 여러가지 방해물이 많이 있어서, 태산이 있으면 태산 밑으로 스며 들어가 가지고도 가고 결국 그 목적인 하나님이 정해 놓은 궤도대로의 바다로 홀러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바위가 있으면 그 바위에 갇혀 가지고 있으면 하다 안 되면 나중에 세월이 지나가는 데 따라서 그것이 증발돼 가지고 나중에 공중으로 올라가 가지고라도 기어코 바다로 가고야 맙니다.
목적을 향하여 가는 것이 변동이 없으며 또 어떤 거와도 그렇게 타협이 없지 않습니다. 어떤 거와도 타협을 합니다. 타협을 하나 한 지 얼마 안 돼 가면 마지막에는 깨끗한 물을, 정결을 이루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는 우리에게 와 가지고 이렇게 역사하는 것이 진리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꾸준히 노력합니다. 진리는 어떤 것이라도 관용합니다. 또 어떤 것이라도 관용한다고 어떤 것에게 물들어 가지 않습니다. 물이라 하는 거는 물들어 가지 않고 이렇지만, 물은 뭐이라도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이면 차차 정화해 버리고 맙니다. 깨끗하게 정화를 하고 맙니다. 이와같이 진리는 모든 것을 관용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다 이렇게 서로 화합을 하지만 그것에게 감염되어서 가지 안하고 그것들을 이 물 본질 본성대로 다 정화를 시키고야 맙니다. 이래서 진리를 물로 이렇게 비해서 우리에게 표시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로 이렇게 중생됐다는 것이 그런 것을 우리에게 표시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하는 것은. 여게 10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들을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다음에는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내나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라는 그걸 연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면, 예수님에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은 전부 다 예수님에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를, 오시지 안한 예수님을 예언적으로 증거를 하고 또 오셔서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주님을, 과거사로 되어 있는 것을 또 현재 증거하고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이 대속을 이루시기 전 앞으로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고적으로 우리에게 증거를 하셨고 또 지금 신약은 회고적으로 증거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신 것을 뒤로 돌아보면서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그 전부는 다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려면 신구약 성경을 알면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을라면 어떻게 하면 믿느냐? 예수님을 믿을라고 하면 신구약 성경에 이 발표된 모든 말씀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일이 됩니다. 또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믿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형함으로써 사죄의 공로를 입 혀 주셨습니다. 그러면, 사죄의 공로를 입혀 주셨는데 사죄의 공로를 자기가 입고 있는 것, 사죄의 공로를 입은 자로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입은 자로 사는 것인가 하면 죄 사함을 입은 자로 사는 것이 사죄의 공로를 입은 자로 사는 것인데, 죄 사함을 임은 자로 산다는 말은 죄 없이 해 주심을 입고 죄 없이 해 주심을 버리지 안하고 죄 없이 해 주신 그대로의 죄 없이 해 주심을 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사죄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없이 하신 공로를 자기가 입고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범하지 않는 거, 신구약 성경 말씀에 하라는 것도 범하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도 범하지 안하고 신구약 성경 말씀은 두 가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해라, 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한 것인데. 하라는 것도 범하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도 범하지 안하는 것이 그것이 사죄의 공로를 입은 자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하라는 것도 자기가 그 말씀을 범하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도 범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사죄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칭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칭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인가? 이제 신구약 성경 말씀에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 그것이 칭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이요, 또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칭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죄는 이것은 사람 말로 말하면 혹 그게 잘 맞지는 안하지만 소극적이라고 할 수가 있고 칭의는 적극적이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문서 계시로 나타낸 진리인데 이 문서 계시로 나타난 이 진리 속에는 내재적 영감이라 하는 그 영감이 있습니다. 내재적 영감, 안 내(內)자 있을 재(在)자 내재적 영감.
내재적 영감은 뭐이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모든 책은 사람들이 거게 이렇다 저렇다 논리를 해 놓은 논리뿐이지 논리 속에 살아 있는 무슨 능력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능력이 없고 또 그 지식 속에 지식을 말한 자는 죽어 버렸고 지식을 말한 자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지식을 말한 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벌써 죽어 버렸고. 그 사람이 지식을 문서에 써서 기록했으면 기록한 그대로의 문서만 있지 문서 그것으로서 다이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이 차차차 낡아져서 떨어져서 자꾸 도태당하고 쇠퇴되고. 쇠퇴해지지 그것이, 지식 속에 지식을 말한 자가 그 속에 살아 있지 않습니다. 또 지식을 말한 자가 그 속에 들어서 그 지식을 찬성하고 따라 오는 저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쳐 주고 또 계속적으로 그 지식대로 인정하고 따라오면서 행할라고 하는 자에게는 행할 수 있도록 이렇게 협조해 주는 영원 불변의 능력이 그 속에 없는 것이 세상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서 안에 문서 안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문서 안에 진리가 들었다 말은 문서에 기록된 것이 다 진리입니다. 진리라 말은 영원 자존자의 그분의 의사라 말입니다. 그분의 의사요. 그러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의사요, 의사인데 그 의사 속에는 뭐이 들었느냐 하면 그분이 들어 있습니다. 의사 속에는 그분이 들어 가지고 계시면서 그분이 이 의사를 인정하는 자에게 그분이 도와 주시고, 이 문서, 진리를 인정을 하면서 이 진리로 인하여서 자기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는 자에게 그 속에 내주해 계시는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신 그분이, 그분이 자존자 하나님이시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속에 계시면서 얼마든지 가르쳐 주십니다.
또, 가르쳐주고 가르쳐 주고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할라고 할 때에 도와서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능력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영감으로 우리에게 자꾸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은 의를 입고 있는 것인데, 의를 입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의를 입고 있는 것인가? 이 문서 계시에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의를 입고 있는 것이요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 의를 입고 있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안하고 하라는 것을 하고 이 문서대로 하는 이것으로써 끝을 막아 버리고 이 이상 자기가 더 바로 알라고. 이 이상 더 깨끗해질라고 온전해질라고 하는 자기의 욕망이라 하는 것이 끝이 막혀져 버렸으면 그 사람은 문서 계시에서 방황하다가 끝을 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서 계시에서 자기가 문서적으로 깨닫고 난 다음에 예를 들면 진실하라 하면. 진실하라 하면 자기가 문서대로는 그렇게 진실함에 무슨, 인인 관계에 진실하고 사건에 진실하고 이랬는데, 그 진실이라는 그것을 문서대로 진실하라는 것을 하고 보니까 그것으로 만족 이 되지 안하고 이 진실이 어디까지냐, 이 진실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진실의 길이가 어디까지이며 진실의 깊이가 어디까지이며 진실의 높이가 어디까지냐. 이 진실의 범위가 어디까지냐, 그 진실에 양적으로 이렇게 자기가 생각할 때에 진실의 양이 어디까지냐 또 진실이라면 그 진실이 질적으로 어디까지냐 이렇게 자꾸 더 새로와지고 더 알라고 더 온전해질라고 하는 그 사람에게 이제 역사해 주시는 것이 뭐이냐 하면 문서 계시 안에 있는 내재적 영감 내재적 영감은 영감이라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역사를 가리켜서 영감이라 하고 영감을 주는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꾸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알려 주셔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진실이라 하는 것도 그 범위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진실도 무한이오. 진실의 범위도 무한이요 또 질도 무한이요 그러면, 진실의 양도 무한이요 진실의 질도 무한이라 그러면, 이렇게 자꾸 무한으로 인도해서 주는 것이 영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칭의를 보수하는 것은 어떤 것이 보수하는 것이냐 하면 문서 계시대로 요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칭의를 우리가 받아 가지고 칭의를 보수하고 있는 것이요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이요, 칭의를 입고 있는 것이고 사죄를 자기가 입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문서 계시에 햐지 말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그것을 하지 안하고 또 하나님께서 하라는 그런 것을 자기가 거부치 않는 것, 하라는 것을 거부하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거부하지 안하고 다 인정하는 그것이 사죄를 입은 것이요 그대로 또 실행을 하는 것이 칭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죄도 자기가 자꾸 연구해서 나가면 참 끝이 없고 칭의 도 연구해서 나가면 끝이 없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또 만삭되지 못해서 낳은 아이와 같다' 그거는 자기 연약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 무한한 말씀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자꾸 이렇게 더 알고 난 다음에 알고 난 다음에는 미진해서 또 알고 싶고 고치고 난 다음에는 미진해서 또 고치고 싶고 자꾸 이것이 뭐이냐? 영감을 향하여서 벋어 나가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말하기를 너희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다 그말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장생골 가 가지고 집회할 때에 ○○교파에서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억지로 안 올라 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교역자인데, 목사인데, 와 가지고 몇 시간 조금,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인가 참여하더니만 `아 이거 틀렸다' 하며 가더랍니다. `왜 틀렸느냐' 이러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할 있고 깨끗할 수가 있느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란다고, 그라면서 가더라고. 그 사람들은 성경을 제 비위에 맞은 대로. 맞으면 믿고 제 의견에 `이거는 참 될 수 있겠다 가능하겠다' 가능하겠다 하면 믿고 이거는 불가능하다 싶으면 안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지금 깜깜 어둠 가운데 가서 있는 사람이라.
성경에 말씀한 것을 어려우나 쉬우나 그렇게 돼라 한 것은 다 돼야 됩니다.
돼라는 것은 또 될 수 있는 걸 말씀했지 될 수 없는 거를 말한 거 아닙니다. 또 됩니다. 왜 되느냐? 그는 성경 자체에 무한의 전지 전능이 있고 또 그 안에 내주하시는 영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됩니다. 되는데, 다만 우리가 왜 안되느냐? 그것은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약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계약하시고 요대로 될라고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요와같이 만들어 주신다 하는 것을 믿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라고 자기가 행하면 돼. 믿고 행하면 돼. 우리 할 일은 뭐입니까? 우리 할 일은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그런데, 아무리 자기가 행하기는 행해도 뭐 아주 그 사람이 참 결사적으로 행합니다. 생명을 기울여서 결사적으로 행한다고 해도 얀 믿으니까 하나님이 해 주실 수가 없다 말이오. 결사적으로 행하는 그 행하는 것이 큽니까 믿는 것이 큽니까 행하는 것이, 이루는 그 행하는 것의 성과가 큽니까 믿는 것의 성과가 큽니까? 어떤 게 큽니까? 믿는 것의 성과가 큽니다. 행하는 것도 자기가 행하되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안하면 소용없다 말은 두 가지 면을 말하는 것인데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피동으로 행하는 것이 돼야 된다 그거요. 하나님께 피동으로. 문서로 말했기 때문에 문서를 따라서 자기가 행하는 것이라야 되지 제 자율대로 제 맘대로 행하는 거는 소용없어. 문서를 따라 서 행해야 되고, 문서를 따라서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와 같이만 행하면 이제 다 됐습니까? 문서를 따라서 행하고 난 다음에 그것으로써는 안 돼. 문서를 따라서 행하는 그거 가지고는 안 돼. 문서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 차차사차 뭣으로 행하는 것이 되어져야 됩니까? 문서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 영감의 도움을 받아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된다 그말이오. 영감의 도움을 받아서 행하는 그 영감의 도움 받는 그 영감이 뭐이냐 하면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시요. 이러니까, 영감의 도움으로 행할 때에 그 능력이 와 가지고 다 해준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행하는 것도 자꾸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와서 일 해 주도록 우리가 행해야 되고, 또 믿는 것도 하나님이 계약을 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계약하신 것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기만 믿으면 그분이 와서 해 준다 하는 것을 믿는 그것이라야 된다 말이오.
믿음이 없이 하면 행함이 소용없고, 또 믿는다 할지라도 또 행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어.
그러니까, 어제도 행함 없어서 안 되는 거, 세 가지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안 되지, 또 행함이 없어도 안 되지, 믿음이 없어도 안 되지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믿음도 있고 그런데 행함이 없으므로 안 된 것이 있었는데 행함이 없으므로 안 된 것을 어제 증거를 했는데 그게 뭐입니까? 하나님 말씀도 있고 믿기도 믿고, 행하지 안하기 때문에 멸망을 받은 그 멸망 받은 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오늘에 이 신약의 종교 말년 신약의 결말을 짓는 이때에도 그때와 같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의 때와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그걸 범위 좁게 아는 사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해도 같다고 하는 것을 아는, 아는 길이가 어디까지, 길이를 언제 몇 천 년까지를 봤느냐. 또 넓이를 이 우주까지를 넓이로 봤느냐. 우주 외에 모든 존재까지를 봤느냐, 창조주까지를 그 범위를 넓이 잡아 봤느냐,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끝이 없기 때문에 다 같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 사람이 사랑한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그까짓 거 암만 해 봤자 그 범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넘어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가지고 사랑한다 하면 그 사람은, 이 사람도 사랑의 사람이요 저 사람도 사랑의 사람이요 이제 모든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나 사랑의 사람인데, 사랑의 사람이 억만 명이 있으면 억만 명이 꼭 같습니까? 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억만 명의 그 사랑의 범위도 다르고 중량도 다르고 질도 다르고 양도 다르고 길이도 다르고 그 수명도 다르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사랑의 범위가 다른데, 이 사랑의 범위가 다르니까 이 사랑은 무엇을 따라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범위가 다르겠습니까? 사랑이 뭘 따라서 사랑합니까? 자기가 모르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모르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랑을 할 수가 없어. 예를 들면 세상 사람은 밥이나 먹이고 옷이나 입히면 사랑인 줄 알지 그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안하면 멸망한다는 것을 모르니까 거게 대해서는 상관도 안 합니다. 자꾸 교회 갈라 하니까 못 가구로 합니다. 저거 부모가 아들 망하라고 하 그것이요. 구원 얻을라 하니까, 영생 얻을라 하니까 영생을 못 사게 하는 것이니까 그 부모가 알면 그래 합니까?' 알면 그래 합니까? 예? 알면 그래 하겠소? 주일 갈라 하니까 주일 못 가구로 막. 공부하고 주일 못 가구로 하니까 주일 못 가구로 하고 공부만 하는 것은 멸망하는 것인데 멸망하는 걸 부모가 알면 초래하겠습니까? 몰라 그렇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사랑도 지식을 따라서 자꾸 커지고 넓어지고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신구약 성경 말씀에 기록한 말씀을 백분지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랑도 그만치 범위가 좁고 백의 백을 다 아는 사람은 사랑도 그만치 범위가 넓고. 그러면, 신구약 성경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사랑하면 그 사랑이면 이제 원만하게 다 됐습니까? 그 외에는 없습니까? 없습니까? ○선생. 인제 자다가 들어도, 그게 들어서 망하는 거라. 다 모두 지식은 있고, 지식은 있고 믿기는 믿는데 행함이 없어 망하는 사람들이 다 그거라 말이오. 자다가 들어도 알기야 잘하지. 하도 많이 들어 놓으니까. 문서 지식을 아는 대로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그너머 영감의 지식을 따라서 차차차차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고 길어지고 이래 하는 게 돼 놓으니까, 영감의 지식은, 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을 다 책에 기록할라 하면 온 세상에 두 지 못해, 세상에 두지 못할 게 아니라 우주 안에도 못 둡니다. 무한히 끝이 없습니다.
이러 때문에.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 그거는 우리가, 믿음도 이제.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인정하고 내가 그대로 행하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어. 하늘나라 가서도 믿음 생활은 합니다. 하늘나라 가면 소망이 끝났습니까? 인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 믿고 천국만 가면 그때 다 끝났다 이렇게 말하는데 끝나지 안했습니다. 소망은 항상 있습니다. 끝이 나지 안햇어. 그러니까, 또 망하고 소망하고 억만 년 가도 또 소망하고 소망하고 그러니까 자꾸 자라간다 그말이오. 믿음도 항상 있다 그 말은 또 내가 믿고 행하니까 하나님이 또 해 주시고 또 해 주시고 이래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 영원히 찾아가고 영원히 자라가고 영원히 성화되고 영원히 온전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목사님을 한번 대접하느라고 청했는데, 그분이 와 가지고 말하기를, 자꾸 날 시험한다 그 말이오. `김현봉 목사님이 이거 하는 거와 백 목사님 하는 거와 같은 거 같은데, 비슷한데 이걸 내가 똑똑히 좀 알아야 되니까' 와 가지고 척 물어. 묻는데 뭘 묻느냐 하면 `아, 목사님은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는 성장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이래 물어요. 내가 있다가 `성장하는 일이 있지' 있다 하니까 `있으면 어느 성구를 근거합니까?' 내가 그래서 이걸, 내가 그런 줄 알고 `지금 ○○○목사님은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이러니까 `예, 저도 믿습니다.' `그러면 김현봉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칩디까 안 가르칩디까?' `예 그래 가르칩디다.' `그러면 김현봉 목사님이 성구를 무슨 성구를 말해 줍디까?' 내가 되 반문을 했다 말이오. 반문하니까 `뭐 하기는 하는데 어느 성구를 똑똑히 안 가르쳐 줘서 내가 그래 묻습니다.' 그래 내가 있다가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내가 말해 줬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는 항상 있다는 거는 영원히 있다는 말이다. 이게 믿음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해 주심이 있을 것 아니냐?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거는.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자꾸 바라보니까 앞으로 자꾸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또 사랑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주는 것이 영원히 있으니까 받는 것이 영원히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러니까 그렇다고 이랬는데 그분과 끊어졌는데 지금은 얼마나 그분이 어떻게 됐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만 그라고 난 마음에 끊어져서 서로 나뉘어 가지고 아직까지 한 번도 서로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만나지 못했는데도 이렇게 들어 보는데. 들어 보는데 거기서 무슨 신학을 한다 하는데 대략 이래 들어 보니까 좀 많이 침체돼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좀 통하면 좋은데 왜 않느냐? 제가 왕 뒬라고 하기 때문에 통하는 것이 다 막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수가 누구냐? 원수는 자기가 원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서 `나 요놈을 죽이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자기 소원대로 자기 주장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취미대로 자기 계획대로 한 그것이 일생 동안 그와 같이 한 것이 똘똘똘 뭉쳐 가지고 이것은 다 자살 행위가 되고 말았다 하는 그것을 실질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참 복이 있습니다. 다 그런 일 하고 있는데 그걸 몰라 그렇지, 깨달아서, 그러기 때문에, 자기 욕심은 죽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칭의를 입는 것은 어떤 것이 입는 것이냐 하면 자기가, 칭의 입는 것은 자기가 신구약 성경 말씀 그대로 행하고, 그대로 행하고 또 그 다음에는 그리 자꾸 파고 들어가면 영감이 있으니까 영감대로 행하고 이 사람이 칭의를 입고 있는 사람인데, 그러면 칭의를 입으면 다 입었으니까 지금 점점 입어가고 있습니까? 입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도 바울은 다 입었소? 사도 바울은 다 입은 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지금 입어가고 있습니다. 영원히 입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혹 제가 기도할 때에 주님의 이 십자가의 대속의 해방의 범위가 어디까지며. 또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그 자유의 범위가 어디까지, 또 우리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의 종류의 범위가 어디까지며, (○○○조사님, 듣나? 안 졸았어? 자꾸 신앙이 영감이 와야 되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 아는 척 하고 다른 사람이나 정죄나 하고.) 그러면, 선물의 범위가 어디까지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이렇게 대속의 그 범위가 무한한 것을 차차차차 믿어 나가면 이제 알게 된다 말이오. 믿어 나가면 점점 대속의 범위가 다 자꾸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요거 뿐이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말이오. 그것은 자기가 양심을 써서 살지 안했기 때문에 영감을 받지 안했고 영감 받지 안했기 때문에 무한하신 기독교, 무한한 기독교, 영원한 사랑, 이것을 차차 알면 땅 위의 것은 죽었다는 것이 확실히 보여지고 또 이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보여지게 됩니다. 무가치한 것을 보여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땅 위에 있는 것이 뭐 그것을 얻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지, 그까짓 거 다 허풍선이고 껍데기요 쭉정이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연결되지 아니 한 것은 그것은 없는 거나 한가지요 다 불탈 것들입니다.
그러면, 또 화친의 결합은 뭐이 화친의 결합인가? 화친이 결합은 그것은, 자, 영감과 결합한 거는 영감 결합이고. 진리와 결합한 거는 진리 결합이고. 하나님께 영감과 진리 그거 역사를 다 떼내 버리고 나면 뭣만 남았습니까 하나님께 붙은 것이 진리가 붙었고 영감이 붙었는데 영감도 진리도 다 이제 따로 떼 놨다 말이오. 영감은 영감대로 내가 결합했고 진리는 진리대로 결합을 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본체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만 남았어. 요거 좀 알기가 어려워.
하나님의 본체만 남았는데 하나님의 본체는 예를 들면 어떤 동글 동글 한 공이 있었는데 그 공을, 그 공에게서 줄이 달렸는데 공에게 줄이 달려 서 그 줄이.
쭈렁쭈렁 달렸는데 그 줄이 달렸으니까 그 줄하고 붙들리니까 잘 붙들렸다 그말이오. 줄하고 붙들렸지만. 인제 줄하고 붙들렸는데 줄을 싹 다 끊어 버리고 줄을, 그 뭉텅이 속에서 줄이 나왔는데 그 줄을 싹 끊어 버리고 줄이 없으면 똥글똥글한 이거 구슬같은 뭉텅이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남아 있으니까 이거는 뭣만 남았느냐? 하나님의 신격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신격, 하나님의 신격.
하나님의 신격만 남았고 나는 또 뭣만 남았느냐 하면 인격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신격을 모형한 인격만 남았어.
이러니까, 이분하고 화친의 결합을 가지는 데에는 인격 대 인격이기 때문에, 인격 대 인격이기 때문에 거게는 다른 걸로써 교제될 수가 없어. 결합이 될 수가 없어.
인격 대 인격이니까 그 인격은 완전한 인격이요 나는 그의 모형적 인격이기 때문에 그분은 원형이요 나는 거게 닮은 모형이기 때문에 내가 그분과 결합되는 것은 뭐이냐하면 내가 그분의 모형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분은 나의 원형으로 삼고 나는 그의 모형으로 삼아서. 그분을 내 원형으로 삼아 나는 그에게 속했고, 그에게 속했고, 그의 것이고 그에게 속했고 그의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생겨졌고 그로 말미암아 나는 움직인다 하는 이거 근원을 자기가 깨닫고 이제는, 영감은, 하나님의 영감이 왔으니까 나도 지금 내라는 존재가 있어 가지고 그 영감을 따라 결합할 수 있지만, 내라는 존재가 있지만 나중에 가서 하나님과 결합하는 데는 내라는 존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졌기 때문에 그분과 나와의 뭘 서로 상대적으로. 상대적으로 이래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완전히 그분에게 속했고 그분의 것이고 그분의 소유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는 거라. 이러니까, 이제 그분과 내 자신을 바로 알고 내가 이제 그분의 것이 돼 가지고. 그분의 것이 돼 가지고 그분으로 인하여서 동하고 정하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는 거, 그분을 떠나면 나는 죽는다는 거 이 사실을 깨닫고, 그분은 원형이고 나는 모형이기 때문에 모형은 원형을 자꾸 향하여 가고, 그분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속했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분에게 지배받는 것이 이것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 받는 것은 제가 자기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자기가 거기서 그에게 피동되는 것이고 이렇지만, 순종하는 것이고 이렇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결합은 그분이 나를 붙들고 역사하는 것이니까 그분이 능동이요 나는 거게 피동되는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본체와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차차차 우리가 성경 말씀을 믿고 행해 가면 믿고 행해 가면 뭣이 차차차차 빈약해져 갑니까? 빈약해져 가는 것은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것이 차차차차 빼빼 말라 가지고 빈약해져 갑니다. 빈약해져 가는데 또 그거 빈약해지면 그것이 죽을 때까지 뭐 다 죽는 건 아니오. 그게 옆에 있지요.
빈약해져 가는데, 빈약해져 가고. 그 다음에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내가 차차차차 자라서 커져 갑니다. 자라서 커져 갑니다. 또 주님의 피의 생활, 피와 성령과 영감과 진리의 생활을 자꾸 이렇게 해 가니까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내가 차차차차 커져 가는데 자꾸 그대로 살고 가니까 어찌 되느냐 하면 내가 커져 가는데 내가 자꾸 작아져 갑니다. 요거 모르면 안 돼요. 요거 어려워요.
내가 영감과 진리대로 사니까 제일 처음에 살 때에는 무슨 결과가 나옵니까? 옛사람이 차차차차 죽어지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아, 네. 됐어요. 그러면, 차차차차 지금 빠짝 마릅니다. 자꾸, 그놈을 먹여 주지 안하니까, 그놈을 먹여 주지 안하니까 악령의 감화를 받아 주지 안하고. 악성대로, 자기 내 중심으로 사는 게 악성이라. 내 중심대로 살지 안하니까, 내 중심 그놈이 나 아닌 옛사람 원수인데 그 악성이 죽어져, 또 악습이 죽어져, 자꾸 나쁜 일 한 번 두 번 해서 연습했는데 안 하니까 그 연습이 차차 서툴어질 것 아닙니까? 줄어진다 말이오. 줄어지고, 자꾸 그와같이 이제 믿음 생활을 하니까 진리와 성령과 피로 중생된 사람이 자꾸 튼튼해지고 장성해지고 확고해집니다. 확고해지고 확고해지는데, 자꾸 믿음 생활을 하니까 자꾸 커지는데 이제는, 자꾸 믿음 생활 하니까 커지는데 이제는 자꾸 작아져 갑니다. 커지는데 작아져 갑니다.
커지는데 작아져 간다 그 말은 자꾸 나는 옛날보다 커지기는 커지는데 왜 작아져 갑니까? 왜 작아져 갑니까? 주님을 보니까, 주님을 보니까, 내가 과거에는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다섯 개를 행했으니까, 다섯 개를 행했으니까, 네가 하나 행하던 것이 다섯 개를 행했으니까 커졌지요. 커졌는데. 다섯 개를 행했는데 주님을 차차 가까이 보게 되니까 다섯 개 행한 것이 `나는 다섯 개나' 이렇게 자랑을 했었는데 주님을 가까이 보니까 다섯 개 한 것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말이오. 다섯 개 한 게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가서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사도 요한이 그만 엎어져 죽었어. 주님의 하신 일을 보니까 해와같이 빛났다 말은 주님의 하신 일이 너무 광명하고 완전한데 나 한 거는 모양도 아니고 흉내도 아니고 이거는 참 아무것도 아니라 말이오. 그래 놓으니까 그만 꺼꾸러져 버렸어. 이러니까 주님이 위로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다. 너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 내가 너를, 이만치 못하고 예수 믿지 안할 때도 내가 너를 사랑했는데 네가 이만치 성화가 됐는데, 너는 날 보고 놀래지만, 너는 나를 지금 보고 놀래지만 나는 옛날부터도 너를 똑똑히 보고 알고 너를 사랑했다' 하면서 위로를 해 줬습니다.
이러니까, 차차차차 자기가 작아진다 말이오. 아무것도 아니라, 보니까, 자기가 뭐 어북 아는 줄 알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골에서 국민학교에서 이거 거기서 배울 때에 기역 니은 이것을 배워 놓고 `나는 우리 글을 안다' 이랬는데 와 보니까 뭐 꼬꾸랑 글자도 있지 뭣도 있지 뭣도 있는데 거기 와 놓으니까 그만 내놓을, 자기 지식을 내놓을 것이 없어. 그만 푹 들어간다 말이오, 푹 들어가. 푹 들어가.
작아져. 자꾸 작아진 다 말이오. 이래 작아져 가지고 나중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보니까 이제 하나님으로 자기가 전부를 삼고,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고 자기는 그에게 차차차차 속해서 그로 말미암아 살고 그에게 속하고 그로 인해서 동하고 정하고 이것이 차차 온전해지기 때문에 소망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요.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자꾸 새벽기도 나와서 들어서 깨달아야 되지 깨닫지 안하면 안 돼. 지금 이거 모두 다 참 문제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이래 설교록에 기록해 가지고 보내기는 보내는데 이 설교록을 다른 사람들 이 좀 읽어보고 여게 대한 진리를 깨달으면 막 야단이 날 건데 지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꾸 방송 설교를 하라 하는데 내가 방송 설교로서는 이 설교를 못 합니다.
이렇게 길고 신묘한 이 진리를 내가 가서 방송 시간에 어떻게 내가 그걸 내가 할 수가 있겠소? 또 해 봤자 그 들어도 깨닫지를 못하게 될 거 라 말이오. 자꾸 순서적으로 이래 쭉 해 나가도 그만 모르고 자꾸 이라는 데 엉뚱이 같이 가끔 가다가 갑자기 하나만 떡 말하면 아까 말한 사람같이 도로 욕만 얻을 거라 말이오. `아, 사람이 하나님처럼 온전하다. 거룩하다. 그리스도와 같이 깨끗하다.
이게 말이 되나. 어디? 사람이 그럴 수가 어디 있는가?' 그러면 성경 아닌가.
그거는? 그 사람들이 도리를 몰라서, 그라면서 가더래요. 그러니까 `네가 몰라 그렇다. 좀 더 들어봐라 더 들어 봐라' 아이고 뭐 들을 것도 없고 이거는 이단이기 때문에 가야된다고 그래 가더래요. 그 사람 우리 얼마나 큰 손해요?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고 거룩하심같이 거룩하고 깨끗하심같이 깨끗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이걸 이루는 것이 뭐입니까? 믿고 그대로 될라고 행하면 누가 그렇게 해 줍니까? 하나님이 해 주시는 데, 자. 이 지극히 큰 소망. 저거 주관과 저거 의견과 저거 주관적 자율적 지식가지고 이해되는 그 범위 내의 것만 믿고 행하지 그 범위를 초월한 것은 믿지 안하고 행하지 안하니까 이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수 알맹이 알맹이를 빼 놓고 믿습니까 알맹이를 이제 바로 믿습니까? 알맹이를 빼 놓은 아는 사람들 손들어 봐요. 알맹이를 빼 놓고 믿는다 말이오. 기가 찬다 그거요. 이 말도 다 설교록에 나갈 거라 말이오. 나가면 그 사람들이 듣고 난 다음에 부애를 내든지 자세히 듣고 난 다음에 깨달으면 깨달음이 있어야지 깨달음이 없으면 안 돼요.
자, 또 연습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세 가지만 합하면 그는 전능이라.
시간적으로는 차차 돼 나갈지라도 그거는 결말적으로는 전능이라. 완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합하면. 하나 뭐입니까? 하나가 뭐이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첫째 계약의 말씀이 있어야 돼. 하나님이 이렇게 된다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주마 하는 계약이 있어야 되지 계약 없는 거 저 혼자 말한 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하나님의 계약이 제일 중요합니다. 중요하고, 그다음에 또 하나는 뭐입니까? 믿을 거. 그 다음 뭐입니까? 행할 거.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이 이 셋 중에 우리가 행할 것이 몇 가지입니까? 우리가 할 것이 둘입니다. 우리가 할 거 둘이면 이제 주님이 하나밖에 안 했지요. 우리에게 명령밖에 안 했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또 그거 명령하는 것으로 다 해 버렸습니까? 주님이 할 일이 안 남았습니까? 주님이 하실 일 안 남았소? 뭐 남았습니까? 내가 믿고 행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 남았다 그말이오.
그거 주님이 하실 거라. 그러면, 주님이 최후까지 몇 가지 하십니까? 두 가지 우리는? 두 가지. 이래 돼 이 네 가지인데 처음에 우리가 세 가지만 합하면 우리 할 일 해. 이 세 가지만 합해 놓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하실 거니까 그만 기다리고만 있으면 돼. 하나님이 이거 네째번에 이거 안 합니까 합니까? 독촉할 필요 없어. 그분이 전지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시기도 장소도 적절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맡겨 놓고 기다리면 된다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제 내가 ○○교회에서 보고가 왔는데. 함부레 또 그렇다고 나는 낙심할까 싶어서 뭐 장년반은 뭐 얼마 한 댓 명 왔더나 여나뭇 왔더나 내가 이랬던가 이러니까 `예. 이거 참 이거 목사님 보기에 이거 죄송합니다. 이랬는데, 장년반은 줄었습니다.' 서른 여섯 명이 지낸 주일에 예배 봤는데 어제 주일에는 서른 다섯 명이 예배를 봤다고 그러면, 한 명이 준 데 대해서 목사한테도. 제 지도자 목사한테도 부끄러워 못 견뎌 하고 하나님 보기에는 더 불충하니까 죄송하고 요게 있어야 되는데 이거는 뭐 도무지 그만 전부 이거 교역자들이 보면 할망탕구라, 할망탕구. 처녀성을 가져 야 될 더인데 할망탕구라. 기독자는 말이오, 기독자는 어떤 것이냐? 지금 처녀가 총각하고 결혼할라고 서로 알아 볼 때에 그때 얼마나 삣고 깍고 조심하는 거처럼 처녀성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목사가 처녀성이 떨어지면 벌써 그거 할망탕구라 못 써. 또 주일학교 반사들도 그래요.
우리 ○○○선생 지금 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래서, 열심히 해서 조사님 인허까지 해 줬는데 그만 할망탕구가 돼져 가는지 지금 자꾸 점점 미혼 처녀가 돼 가는지 몰라. 처녀성이 있어야 돼. 그거 없으면 안돼요.
어떻게 하든지 새벽기도 나와야 됩니다. 안 나오면 모릅니다. 이거 뭐 언제까지나 내가 가르칠란지 모르기는 모르지만 이제 자기네들이 알면 이거 뭐 한 시간도 빼면 다시 모르기 때문에. 알고 찾아 나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물론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기는 하지만 찾아가는 데에 그렇게 쉬운 것 아닙니다. 내가 똑 이 연구하고 시작한 것이 오십 일 년째 납니다. 오십 일 년 그라고 난 다음에는 시작할 때부터 성경 읽으면서 궁둥이 몇 번이나 터져서 또 낫고 낫고 그래 가지고 내딴에는 한다고, 하나님이 은혜로 해 주셔서 그렇지요. 그래 가지고 오십 일 년을 내가 전공을 했습니다. 오십 일 년 전공을 해도 또 보면 또 틀렸고 또 보면 또 틀렸고 또 틀린 것은 다 미진이라 말이오. 미진이니까 또 해야 되겠고, 또 해야 되겠고 그러니까 자꾸 설교를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또 해 야 됩니다.
그러니까, 요새도 자꾸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또 해야 되겠다 그거요.
그러니까. 안 들으면 모르니까, 여러분들 혼자 연구해 가지고 알든지 안 될 상 바르면 배워 가지라고도, 하나 배우면. 문일지십(聞一之十)이라 말이 있습니다.
하나 들으면 열 가지 안다, 저 석원태 목사님은 말하기를 `나는 설교 하나 들으면 서른 개는 할 수 있다' 그거는 문일지 뭐입니까? 문일지삼십(聞一之三十)이라, 문일지삼십이라. 알면, 자기가 뭣인가, 막을 열지 못했는데, 뭣인가 발견치 못했는데 그게서 야단칠 때에 그 한 마디만 딱 들으면 그 한 마디 듣는 거 가지고 뭐 문일 문일지 백도 더 됩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노력하면 자꾸 알아진다 그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