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1984. 12. 9. 주새벽

 

본문 : 누가복음 16장 23절∼24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오늘 공과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공과입니다. 우리가 여게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사람들은 일방적 지식으로  살기가 쉽습니다. 일방적 지식으로 끌어 붙이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볼 것을 다 보고 원만하게 모든 것을 생각하고 찾도록 이렇게  사색하지 못하게 하고 어짜든지 이렇게 저렇게 치우치도록 해서 쌍방을 다  알아야 되는데 쌍방은 보지 못하고 일방으로만 생각하도록 그렇게 마귀가 계속  유혹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쌍방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좋으면 반드시 나쁜  것이 있는 것이고 옳으면 또 틀린 것이 있는 것이고, 곧으면 굽은 것이 있는  것이고, 잘되는 것이면 잘못되는 것도 있고, 물건이든지 일이든지 사람이든지  쌍방 없는 것은 없는데 그 쌍방을 보고 우리가 비판하고 평가해야 될 터인데  그것을 일방만 보고 그렇게 하니까 안됩니다. 또 사람도 아무리 그 사람에게  장점이 있다 할지라도 또 단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좋은 거  반면에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서 양쪽을 다 보고 양략을 다  비교해 가지고 그렇게 모든 것을 원하기도 하고 작정도 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여기는 이 홍포 입은 부자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생전, 살아 있는 생전 세계만  보고 생각했지 인간이 사후에 어찌 되느냐, 사후 세계를 전연히 생각지  안했습니다. 또 자기가 지금 이렇게 모든 것을 구비하고 참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내가 호화로이 연락하는 이것이 언제까지 갈 것이냐 이것을 전연히 생각 안  했습니다. 이것이 전혀 없어지는 그런 때가 은다는 것을 생각지 안했기 때문에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학생들에게, 양면을 봐라. 무엇이든지 양면을 봐야 한 다  살았느냐? 죽는다. 산 것만 생각지 말고 죽는다는 것도 생각해라. 또 금생이  있는 동시에 죽은 후 내세가 있다 그것도 생각해라. 또 자기가 있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있고 피조물이 있는 동시에 창조주가 있다. 그러면, 피조물은  피조물들에게는 이런데 좋으면 창조주는 어떻겠느냐? 창조주도 좋고 피조물도  좋고, 나도 좋고 다른 사람도 좋고, 금생도 좋고 내세도 좋고 육에게도 좋고  영에게도 좋고 이렇게 쌍방이 다 좋은 길이 있는데 사람들을 마귀란 놈은 쌍방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일방적으로 보고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그만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이렇게 만드는 거게서, 자기가 망하는 길인데, 한쪽만 보고 사는  길은 망하는 길인데 마귀란 놈이 망하는 길을 딱 들어서 놓으면 그만 그 길을  보고 다른 길을 볼 여가가 없이 그 길이 좋다고 자꾸 들이댑니다. '이러니까  좋고 이러니까 좋고 이게 좋다' 그러니까 그거 욕심 내 가지고 그거 만들어  놓으면 또 그 다음에 또 '이게 좋다' 그 다음 거 만들라 하고, 그저 만들고  만들고 욕심이 자꾸 계속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쌍방 지식을 가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쌍방은  무엇이든지 쌍방 없는 것이 없는 것이니까 쌍방으로 생각하면서 쌍방이 다 좋은  것을 취하고. 또 쌍방을 보고서 쌍방이 이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자기의 할 일을 선택해야 되지, 쌍방을 보지 안하고 일방만 보고서 자기  할 일이나 소원하는 것이나 그런 것을 결정하면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면을 봐서, 쌍방이라 말은 양면이라 말이오. 양면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성령이요 일면만 알게 하는 것은 배암이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사람에게는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길 한 길 있었는데 그  길만 갔으면 되는 건데 그만 그 길을 버려 두고. 그 길 가는데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배암이 와 가지고 '이게 좋다' 하면서 한 길을 더 줬어. 이래서 그만 두  길이 돼 버렸어. 두 길이 됐는데, 두 길이 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길은 힘이  들고 또 성공이 더디고 배암이 주는 길은 빠르고 성공이 속히 된다 이라니까  배암 주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런 건 여러분들이 속에 알고 있어야 되지  학생들에게는 가르쳐도 그거 모르는 것이라 그거요.

 그랬는데, 그만 하나님의 길은 집어던져 버리고 배암 주는 그 길만 취하고  보니까 그 한 길이 두 길로 갈라졌습니다. 배암이 주는 그 길그 방편을 취해서  '요라면 된다' 생각했는데 하고 나서 보니까 사망이라 그만 안 됐다 그말이오.

그래서 길이 이젠, 불신자들은 무슨 길을 살고 있느냐? 무슨 방편을 쓰고  있느냐? 불신자들이 쓰고 있는 방편이 몇 방편입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이소. 몇 방편? 들어 봐요. 아, 예. 다 잘 아네요. 두 방편. 불신자들이 쓰고  있는 방편은 두 방편입니다.

 두 방편인데. 그 방편이 다 무슨 방편이냐 하면은 배암이 준 방편인데, 배암이  줘서 '성공된다 복되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막상 그 길대로 갔다가 걷고 보니까  뒤에 결과적으로 사망이 됐다. 그러면 '배암 시키는 대로해서 사망됐다' 요렇게  알면 그만 실패를 안 하겠는데 요 마귀란 놈이 어둡게 만들어 가지고서, '배암  시키는 대로 하니까 요 실패의 길이 됐다. 이러니까, 성공하는 길이나 실패하는  길이나 이 길은 다 배암이 준 길이다' 이렇게 계산을 하도록 심령이 밝으면 될  터인데 그만 심령이 어두워서 배암이 주는 길 잘되는 길 그거는 그 길로 보고 또  실패한 길은 실패한 길로 보고 이러니까 실패한 길만 피할라고 하고 있지 배암이  주는 성공하는 그 길이 뒤에 결과적으로는 실패된다 하는 그것은 보지 못하게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제가 뭐 박사든지 대통령이든지 제가 왕이든지 학자든지  도덕가든지 종교가든지 어떤 것이라도 그 사람들은 그 쌍방 지식만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쌍방 지식이 다 그거 배암의 지식이라 그말이오. 배암의  지식인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로 보지 둘로 보느냐? 배암의 지식인데 사전에,  사전에 보는 지식. 일 전에 사전이라 말은 죽을 사(死)자가 아니고  사전(事前)이라 말은 사건 전이라 말이오. 또 사후(事後)에, 일하고 난 다음에  보는 지식. 배암의 지식인데 그 사건 전에, 행하기 전에 보는 지식과 행하고 난  다음에 보는 지식 행하기 전에 보는 지식은 잘된다 했는데 그 지식대로 행하고  난 뒤에 보니까 잘못 되더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거는 사건 전에 보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보는 것이나 그 둘을 한테 합하면 쉬운 거 같으나 다 어렵고, 잘되는  거 같으나 망한다 속성 같으나 다 사망이다 이렇게 알아야 될 터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지혜의 눈을 잊어 버렸다 그말이오.

 그래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뭐 훌륭하다 해도 그 사람은 배암의  지식뿐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그만 던져 버렸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히 폐로가 됐다 말이오.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 길은 그만 완전히 폐지가 돼  버렸어. 그라고 배암이 인도하는 길 두 길만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하신 것은 사람에게 이제 다시 하나님이 사는 길을 뚫어 주셨다  그말이오. 사는 길을 뚫어 주셨는데 이제 불택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는 길  그까짓 거 다 소용 없다 하고서 아예 보지도 안할라 하고 듣지도 안할라  하지마는 우리는 벌써 예수 믿는 사람이라 택함을 입었고 또 사죄를 받았고  중생돼서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성신의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길을 우리가 받았고 또  이 길을 안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 앞에는 반드시 세 길이 있다 하는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길이 있고, 배암이 주는 일, 사건 전에 배암이 주는 길이 있고 또  배암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결과를 보니까 망한 그 길이 하나 있고 세 길이  있는데, 우리는 언제든지 현실을 만날 때마다 무조건 여게는 세 길이 있다 하는  걸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길이 있고 배암이 주는 두 길이  있고, 이런데, 배암이 주는 두 길이 있고 이런데 우리 앞에 세 길이 있는데 세  길이 있는 여게서 한 길은 쓸모있는 길이요 두 길은 다 사망하는 길이라 요것을  생각하고 두 길을 벗어날라고 애를 쓰고 한 길만 갈라고 애를 쓰지 안하면 안  됩니다. 두 길은 배암 길이라 한 길만은 하나님의 길이라.

 두 길은 배암 길인데 배암 길은 사전에는 잘될 것으로 보이나 막상 그대로 하고  나서 보니까 결과적으로는 다 망하는 길이더라 하는 그것을 판정을 해서,  학생들이 벌써 그것을 생각할 수 있으면 대단히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아주 높은 사람도 의례히 죽는다는 걸 안다 하지마는 그 사람이 실상  죽을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어짜든지 죽는 그 시간까지도 살 것만 생각하고 살  준비만 하고 있지 죽을 준비는 하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이 생전 세계와 사후 세계가 있다. 금생과 내세가 있다. 또 길이  처음에는 한 길 줬는데 그 다음에 두 길 됐다. 그 다음에는 두 길 밖에 없는데  불택자들은 두 길만 보고 있다. 우리 택자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다시 새 한 길  만들어 가지고서 우리 앞에는 세 길이 있다 현실을 만날 때는 반드시 세 길이  우리 앞에는 당도한다.

 배암은 와 가지고서 이 두 길을 가지고 말한다. '봐라. 네가 이라면 망한다.'  그놈 내나 저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 망한 건데 그놈이 떡 아주 제가 선량한  체로 '이 길 가면 망한다 봐라. 이렇게 아무도 망하고 아무도 망하고 이래 모두  망하지 안했느냐? 그러니까 네가 망하는 길 있으니까 조심해서 망하는 길을 잘  피해야 된다' 떡 그래 놓고서 '망하는 길을 피하려면 어째야 되느냐?' '잘 되는  길이 있다. 잘되는 길을 네가 이렇게, 택해라' 이라니까, 망하는 길을 말하는  그것도 제가 거짓말로 꼬우는 잘된다 하는 그 길을 폭 듣고 염려 없이 듣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잘되는 길 그걸, 자기 마음에, 자기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조심있게 생각하는 것 같지마는서도 배암의 잘못되는 길 배암의 잘되는 길이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길 외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생각해도 어머니가  생각해도 선생님이 생각해도 뭐 또 정치가가 생각해도 어떤 학자들이 생각을  해도 말하는 그놈이 내게는 배암이라 말이오. 그놈 속에 배암 들었다 말이오.

그속에 배암이란 놈이 들었어. 그 속에 배암이란 놈이 들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 한 길 외에 다른 길을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주신 길을 버리고  세상대로의 망하는 길 잘되는 길을 요 두 길을 생각할 때는 내속에 배암이란  놈이 들어 가지고서 나를 주관하고 있는 것이오. 또 부모들이 말 해도 하나님이  주신 요 한 길을 버리고 다른 요 두 길을 말하는 것은 고 길 말하는 것은 부모면  부모 속에 배암이 들어 가지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고. 선생님이면  선생님 속에 배암이 들어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고 모든 위인들이면 위인들  속에 배암이 들어 가지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이 생명의 한 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열려진 그 길은 무슨 길이냐 하면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지도하는 길이요 인도하는 길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길 요거 외에 세상에는 두 길이 있는 대 두 길은  뭐이냐? 모든 사람들이 '이라면 잘된다 이라면 된다 이라면 안 된다' 하는 두  길인데, 두 길 그거 다 배암이 준 길이기 때문에 두 길만 가지고 자꾸 따져서  이러냐 저러냐 하는 것은 벌써 그 사람이 배암에게 미혹받아 가지고 배암이 제  속에 와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고, 두 길 다 망하는 길이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요 길만이만 사는 길이라' 요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속에  배암이 쫓겨 나갔고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서 그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라  그거요.

 그것도 생각해야 되고,

 또 우리는 비교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교. 학생들에게 비교 하는 것  '봐라. 네가 이거와 저거. 하나만 보고' 아담 해와가 와 죽었느냐 하면 하나만  봤어. 비교를 못 했어. 비교를 못 하고 하나만 봤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죽었습니다. 반드시 거게는 둘이 있는데 둘을 보지 안하고 하나만 봤다 그거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래라던데 또 배암은 저래라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두 길을  비교를 해 봤으면 그들이 그런 시험에 들지를 안했을 것이라 그말이오. 비교를  안 해 보고 그만 하나님의 것은 다 던져 버리고 이 마귀 것만 보니까 자꾸, 마귀  것 그것만 보니까 자꾸 배암이 유혹을 주니까 그 일이 자꾸 좋습니다. 더 좋고  더 좋고 더 좋고 더 좋으니까 그만 다른 거 볼 여가도 없어. 마귀란 놈은 그렇게  우리를 유혹시켜 한쪽으로 쓸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하면 내가 어찌 되느냐. 이렇게 하면 내가 어찌  되느냐, 나 하고 싶은 대로 이렇게 하면 뒤에 어찌 되느냐 그걸 생각지 안하고  그만 그라고 보니까 제가 하고 싶은 그것이 어떻게 강한지. 그래서 요한계시록  9장에는 말하기를 전쟁에 달리는 말과 같다 이랬습니다. 그만 그게 어떻게  볼수록 자꾸 좋고 필요하고 참 지혜될 만 하고 행복될 만하고 참 아주 자기의  소원될 만하기 때문에 그래 달리다가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는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를 비교를 해 봐야 되겠습니다. 비교를  해 보고, 또 홍포 입은 부자는 금생에 그렇게 살았는데 사후(死後)에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있으니까 금생과 내세 그 둘을 부자의 두 길을 봐야 되고, 또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곤고하게 지냈지마는서도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에 간 그것을 비교를 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사로는 이렇게 불쌍하고 가련해도 홍포 입은 부자보다는 아주  행복스러운 사람입니다. 그 원인이 어데 있느냐? 나사로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를 입은 사람이고 홍포 입은 부자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를 입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천하에 예수님의 피공로 못 입은 천하에 제일 부귀영화를  그렇게 충만히 갖추어 가지고 있는 그 사람보다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은  사람으로서 인생 중에 제일 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천하에 있는 부귀영화보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더 보배롭다 하는 것을  이것을 또 비교해서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 그 홍포 입은 부자가 음부에 가 가지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지, 또  거기 가서는 다른 것 소원 할게 없었어. 단지 둘밖에는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지금 소원하는 것이 뭐 소원하는 것 필요한 일이  많습니다. 내가 소원하고 필요한 일이 죽을 때도 소원이 되고 필요하겠느냐.

내가 죽을 때도 소원이 있고 필요하겠느냐 내가 이 소원하는 이것이 죽을 때도  이것이 소원이 되겠느냐 이게 필요하겠느냐? 이제 오늘이라도 죽는다면은 아무  소용 없는 그 일을 자꾸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내요 또 죽은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도 내요. 내가  둘이 아니라. 내가 나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인데 지금 필요하다 하면은 이것이  죽을 때도 필요가 있는 일이어야 되겠고 또 죽은 다음 오는 내세에도 필요 있는  일이어야 될 건데, 내세는 필요 없고, 지금 필요 있고 내세에 필요 없는 일  말이지, 그런 일만 우리가 생각했어.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는 지금은 필요 있다고 자꾸 이랬지마는서도 딱 죽고  나니까 그거 다 소용 없는 일, 죽고 난 다음에는 두 가지밖에는 제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이 홍포 입은 부자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일생 동안 한번 생각해 보지도 못했는데 생각해 보지도 못한 그 일이 영원히  자기에게는 중대하고 필요한 일이었고, 그렇게 날마다 이 일 저 일 막 꼬리를  물고서 바쁜 이 일은 저에게는 하나도 필요 없는 일이었더라 그거요.

 그런 것도 좀 사람들이, 늘 이래 학생들이라도 좀 가르쳐 자꾸 그 마음을  넓혀야 되겠습니다. 넓혀서 이렇게 널리 알고 길게 알고 이런 걸 이래 가지고서  학생들이 어쨌든지 이 세상에 마귀의 지식 얼마나 많아도 그런 걸 발 아래 밟고  일어설 수 있는 그 지식을 만들어 주지 안하면은 그것들이 다 끌려서 죽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전부 다 세상 지식을 다 발 아래 밟을 수 있는 그런 아주  최고의 지식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등신같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러면, 천하에 뭐 이런 거 모든 거 다 만물박사가 된다 할지라도 만물  박사보다도 한 가지 아는 것이 만물 박사 그걸 발 아래 밟습니다. 뭐이냐?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했다.'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신 거 이거 하나를 알면은  창조주가 없다 하고 난 다음에 만물을 다 아는 만물 박사라 해도 그까짓 거 발  아래 밟습니다. 그보다 이 지식이 크다 그말이오. 또 아무리 그 사람이 뭐 널리  알아서 광문 다학으로 얼마든지 많은 지식을 가졌지마는서도 너는 죽고 난다음  내세가 영원한 세계가 있다. 이 세상은 하루 밤 나그네와 같이 짧고 내세는  영원함이 있다 그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데, 그걸 알고 있으면은 인생에게  문제가 뭐입니까? 인생에게 둘째로 문제는 금생과 내세가 있다 하는 그걸 아는  것이 둘째로 큰 지식 아닙니까? 그 다음에 인제 인간에게는 이렇게 금생과  내세가 있는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제일 중요한게 뭐이냐? 예수님의  대속이라 그말이오. 예수님의 대속을 모르는 사람. 대속을 알고 대속을 가진  사람, 그러면, 대속을 가진 사람은 천하를 다 가진 것보다 더 보배롭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모르는 지식은 지식이 천해서 모르는게 아니고,  세상이 그들이 알 만한 그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는 예수의 공로가 아니면  알 수 없는고로 우리가 아는 지식은 세상이 모르는 것은 가치가 없어 모르는 것  아닙니다. 가치가 없어 모르는게 아니고 우리가 가진 지식은 세상이 가진 세상  사람들이 알 만한 그런 범위에 있는 지식 아니고 그 범위를 뛰어가서 그들이 알  수 없는 그런 높은 지식이기 때문에 우리만 알고 그들은 모르는 것이라 말이오.

이런데, 이 등신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크고 높은 지식 이 지식은, 이거는 크고  높고 귀해서 세상이 모르는 줄 모르고 이것은 천해서 모르는 줄 안다 그말이오.

모든 존재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지식이 천합니까? 하나님이 모든 걸  주권하고 계시는데 이 부자는 하나님도 몰랐고 하나님이 주권하시는 걸 몰랐기  때문에 이 부자는 제 마음대로 살았지만 그 결과가 그렇게 천해지고 절단났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좀 학생들에게 이모로 저모로, 기도 많이 하면 그 시간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네가 네  반을 가르치는 데는 이게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게 있다  말이오. 가르쳐 주는게 있으니까 그 시간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는 대로  깨달아지는 대로 자꾸 학생들에게 가르쳐 줘. 충분한 성경. 공과를 읽고  설교하는 것을 늘 많이 듣고 거기서 기도 많이하고 난 다음에는 가르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배피 능력과 또 영감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이 나를 붙들고 가르쳐 주옵소서' 이라고 난 다음에 그 학생들에게  가르칠라고 하면은 눈이 환하게 열리는 것이 자기에게 나오는 말씀이 있으니까  나오는 말씀을 강하게 가르쳐요. 가르치면 이 선생은 이래 가르치고 저 선생은  저래 가르쳐도 그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성령이 가르치기 때문에 그  학생들이 들어서 다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몇 가지만 가르치면 돼. 양쪽이 있다는 거. 쌍방 지식을  그들에게, 이런 쌍방 저런 쌍방 쌍방 지식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또 이거와  저거와 비교하는 그 비교도 알려 주고 이래서 금생과 내세에 대한 것 그런 것을  아이들에게 좀 가르쳐 주는데. 최고의 중한 것은 뭐이냐 하면 예수님의 피  없으면 절단되고 예수님의 피 있으면 다 해결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도를 많이 해요. 어짜든지 내가 심방 갈 때도 성령님과 진리와 주님의 피의  능력이 같이 해 달라고 자꾸 기도하고, 또 가르칠 때도 그와 같이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배우는 학생들도 이 세 가지 능력이 같이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꾸 기도해서 하나님이 와서 역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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