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1 15:30
보배로운 믿음
1981. 2. 15. 주일오후
본문:베드로후서 1장 1절∼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죄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편집한 자료임) 성경 중에도 이 베드로서는 깨닫기가 어려운 성경입니다. 다른 성경보다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 양이 너무 큰 것을, 지극히 큰 것이 지극히 작은 것으로 축소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함부로 풀다가는 도로 죄를 범하기가 쉽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그 권위는 어떤 것으로도 비할 수 없는 큰 권위를 가진 말씀입니다. 획 하나가 우주보다 크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천지는 없앨 수 있어도 획 하나도 가감을 못 한다고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은 먼저 신구약 66권에 기록된 이 말씀을 확신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령이 성경에 대해서 사람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를 아주 박살을 내려는 그런 방편입니다. 어학이 능하지 못한 우리들은 한국말로 번역해 놓은 성경을 보는데 이 번역을 천주교하고 개혁교하고 합해서 번역하는 그 역사는 기독교를 박멸하는 역사입니다. 그는 마귀들이 가입해 가지고 마귀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또 성경을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헐어 가지고 성경의 권위성 정확무오성을 흐리게 만드는 그것도 다 악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말세에 진실치 아니한 자들은 다 그런 데에 떨어지고 진실한 자들은 그런 것이 역사할수록 눈을 비벼가면서 성경을 바로 찾으려고, 바로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국제기독교신문이라고 하는 그 신문을 제가 잠깐 봤는데, 그것을 어디서 출간하는지 모르지마는 박태선씨가 논술해 놓은 것이 거기 일부 기록돼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자기가 아는 것을 몰랐다 하는 그 말을 기록했고,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은 다 칠계범자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라 그렇게 기록을 하되 담대히 기록을 해서 출간을 했습디다.
그 사람이 그 글을 쓴 그 동기는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발견해 가지고 '이 박태선씨가 말하는 것은 성경대로의 것이 아니라' 해서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흩어졌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의 나가던 그 일이 그대로 보존이 되는 데는 성경을 부인해야만 하는 그런 입장에 놓였기 때문에 성경 부인을 하려고 그렇게 공작을 하는 것이고, 성경을 부인하려고 하면 성경이 인정하는 인물들과 성경이 인정하는 일들이 틀렸다는 그것을 주장을 해야 성경 부인이 되는 고로 필연적으로 그런 공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더 참되게 들을 것이요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교를 증거하는 것은 오히려 억설이라고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의인이라고, 다윗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도덕 면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하나님을 알고, 인생을 알고, 금생과 내세를 알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를 따르는 이것을 가리켜서 의라 그렇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라고 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또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인 관계의 것인데 그는 시대를 따라서 달라지고 지방을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중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이 그 시대에 중요하고 그 지방의 도덕이 그 지방에 중요하지 시대가 바꾸어지고 지방이 바꾸어질 때에는 그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또 바꾸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생은 바꾸어지지 않고 또 모든 사물과의 관계도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변동 없고, 하나님의 뜻인 진리가 변동 없고, 하나님의 심판이 변동 없고, 영원히 보응하심이 변동이 없는 이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그 시대와 범위를 혼돈하면 유혹받기 쉽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에 그는 외부의 피조물의 때를 따라 변동되는 형편을 따라서 변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시대에는 죄라고 정죄하는 것을 어느 시대는 죄로 인정치 아니하고 도리어 의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는 자기의 가까운, 멀어도 친사촌 또 내외종간 사촌, 외가로, 사가로, 또 직계로 이렇게 사촌 이내에 결혼을 해야 양반 결혼이고 참 좋은 의로운 결혼이지 그것을 넘어가는 것은 다 죄의 결혼이라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에서가 처음에 결혼했다가 두 번째 이스마엘 자손으로 더불어 결혼한 것은 다시 사촌 결혼을 찾아서 재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런 것은 전세계가 용납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진 연고인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만 해도 한 사람이 처가의 딸 둘을 결혼을 해서 큰딸이 죽으면 둘째딸을 그에게 결혼시키는 그것을 성공으로 생각했지마는 지금은 또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달라졌습니다.
박태선이가 그것을 모르고, 이 시대와 벌써 근 4천 년 전 시대를 하나로 보고 그래 가지고 믿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왜 하는고 하니,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인정치 아니하면 그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먼저 성경부터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자손이요 의인이라고,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성경이 증거하는데, 박태선이는 '그는 칠계범 죄인이라. 그가 무슨 구원 얻었겠느냐? 예수님이 이 사실을 발견했더라면 이것을 정죄했을 터인데 발견 못 해서 정죄 못 했다. 자기가 발견했다.' 그렇게 지금 주장합니다. 그것도 안 믿는 사람들은 꽤 들을 만하고 기독교가 산산히 박살되는 구경을 하면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셔서 주님이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성신의 감화 감동을 받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도 안 되고, 주의 피의 구속을 받지 않은 사람은 기본구원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럴수록 택함을 입은 자들과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깨끗해지고 온전해지고 굳세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성경이 믿어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알고 그대로 인정을 하고 그대로 확신을 하는 이 사람이 되어야 하니 이 면을 힘써 노력을 하는 데 따라서 그에게 신앙이라 하는 것은 생겨지는 것입니다.
오전예배 보고 나갈 때에 어떤 청년이, 제대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서울에서 백목사님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왔습디다. 왜? 가거든 네가 한 마디라도 듣고 오너라 한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하면서 묻기 때문에 제가 한 마디를 해 줬습니다.
해 준 것은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뭐라고 가르치며, 인생을 뭐라고 가르치며, 세상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하는 이것을 성경에 배워라.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성경에서 배우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둘씩 실행을 해 봐라.
모든 발명가들이 논리적 책상 위의 연구에서 둘째 실험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또 새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 것처럼, 행함은 실험이요 성경은 논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니까 그래 봐라.' 그것을 말해서 보냈는데 오후에 참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확신하고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이것을 찾아서 자기의 지식을 삼는 것이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이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산 지식이요 또 살리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믿어지는 것은 두 가지로만 믿어집니다. 하나는 택한 자에게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믿어지고, 하나는 감동 받은 자들이 실행을 하는 데에서 실험과 경험으로 인하여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학문과 달리 성경은, 중생되지 아니한 자가 천하 지식을 다 통달했어도 성경은 열 번 백 번 천 번 읽어도 저는 절대 모릅니다. 한 성구도 저는 알지는 못합니다. 외워도 모릅니다.
또 중생된 자라도 이 문서로 기록한 문서적으로는 알지마는 실제의 실행을 할 수 있는 권위적인, 실지의 실상을 만들 수 있는 권위의 능력을 가진 능력적으로 아는 것은 실행에서만 뾰족뾰족 커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은 모르고 실행에 힘쓰지 아니하는 사람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말로야 다 압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종교마다 하나님 다 말합니다. 뭐라고 그들이 설명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나타난 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면 아는 것만큼 그 사람과 행동은 하나님을 따라서 변화될 것입니다. 많이 알면 많이 안 것만큼 이분을 거슬릴 수 없고, 이분을 떠날 수 없고, 이분을 좇지 않을 수 없고, 이분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도, 의지하는 것도, 따라가는 것도 없는 것은 입술로만 말하지 실은 털끝만큼도 하나님에게 대한 능력적 지식은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가 무엇이 은혜냐?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은혜요, 인정되는 것이 은혜요, 실행되는 것이 은혜요, 이 지식대로의 사람으로 행동으로 변화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외에 딴 은혜는 없습니다.
지금은 악령이 사람을 미혹해서 기독교를 인간 주관적 도로 탈선을 시켜서 불파니 지시파니 방언파니 하는 것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정신차려서 '예수를 어째 믿어야 되느냐?' 하는 이 똑똑한 정신을, 희망 있는 이 갈망을, 힘있는 이 열심을 엉뚱한 구멍으로 몰아넣어 가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구덩이에 빠져서 자기 주관으로 일생을 지내게 합니다. 전진이나 향상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점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것은 없이 자기 주관의 흥분만 강해지는 이것으로써 이루어지고 맙니다.
그 운동은 나이가 많아서 혈육의 힘이 쇠잔해지면 지는 데 따라서 반드시 쇠잔해질 것이요 마지막에는 그 힘이 다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힘은 육은 약하지마는 능력은 강합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마지막에 육신은 일어서지를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면서 겨우 일어설 만했지마는 그가 한 말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못합니다. 그가 말한 그대로 이 세계는 움직여지고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체는 약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허영과 허욕의 모든 자율과 주관으로 날뛰는 미혹의 길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구약 성경 원본은 정확무오하고, 사본은 정확무오에 비슷하고, 번역은 거기 가깝고, 그러나 66권을 다 읽으면 정확무오한 우리의 갈 길을 환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다 성경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 나온 성경은 조금 미달점은 있었지마는 탈선은 없으나 그후 번역한 것은 찬란한 언어와 수사학적이지마는 악령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탈선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중에도 번역이 좀 바로 된 그런 성경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것은 준비 못해도 각 시대 번역 성경을 사서 마련하려고 애를 쓰고, 또 각국의 번역된 번역 성경을 종합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번역했으며 저 나라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번역했는가?' 해서, 여러 나라의 번역을 찾아 가지고 바른 번역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원본 성경은 없어졌으니 사본 성경을 많이 모아서 '이 사본에는, 저 사본에는' 이래 가지고 원본 성경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왜? 원본 성경의 한 말씀이면 천지는 없앨 수 있어도 그 말씀의 획 하나도 없앨 수 없는 권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전소망을 두고, 소유도 몸도 생명도 이 말씀대로 바쳐서 이 말씀대로 개조하고 이 말씀에 다 투자해서 이 말씀대로 행동과 사람과 일들을 성화 개조 조성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도리를 잘못 알면 자기의 생명을 잘못 버리는 것이 되고 자기의 일생 생애를 잘못 투자하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겨서 심각히 다루는 것입니다.
이야기 성경 같은 그런 것을 읽으면 안 됩니다. 또 성경을 주석이라고 해 놓은 그런 성경을 벌로 읽으면 쑥물을 먹어서 죽기가 쉽습니다. 영이 죽는 건 아니지마는 그의 생애가 죽습니다. 그의 신앙이 죽습니다.
그저 성경이 있으니까 성경 읽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씩 둘씩 실행해 나가면 성경을 아는 방편에 제일 좋습니다. 성경 연구하는 법 중에는 이 이상 권위 있는 연구법이 없습니다.
저는 책은 많이 사다 놓지마는 보지는 않습니다. 혹 어떨 때는 성경 읽고 깨달아진 것을 다른 주석에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고 주석을 보면 너무 얼토당토않은 엉뚱한 소리를 해 놨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려거든 누구한테 배우는 것보다도 성경을 읽고 진실된 마음으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면 잘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손해 가는 것이든지 유익되는 것이든지, 죽는 것이든지 사는 것이든지 성경이 바로 나에게 알려서 바로 깨닫게만 해 주면 내가 그대로 실행하겠습니다 하는 요것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것만 돼 있으면 성령님이 그 사람을 바로 인도해 주십니다.
'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바로 가르쳐 주시면 내가 생각해 봐서 내게 손해 안 가면 순종할 것이고 손해가면 순종 안 할 것입니다.' 하는 그 사람은 욕심이 다 삐뚤어져서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르쳐 봤자 옳은 걸 가르치면 삐뚤어졌다고 반대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걸 이용하려고 삐뚤어지게 가르쳐서 옳게 하도록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할 수 없고 저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곳에서는 이곳에 사람들을 파송해서 녹음을 해 가지고 가는데, 한 시간 설교 녹음해서 한 군데 주면 5천 원씩이랍니다. 열 군데 해 주면 5만 원이오. 백 군데 해 주면 50만 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복음이 세계로 번져 나가고 있는데 우리 서부교회 교인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 있어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지자의 고향에서는 선지자의 말을 예사로 알고 예사로 듣고 지내보낸다 그 말입니다.
1절에 "우리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 하나님'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자기 구원은 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불교의 부처같이 입에 익어서 자기 지식대로의 어떤 신으로만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면 자기에게 대해서도 모릅니다.
이 세상도 무엇인지 모릅니다. 죽음도 사는 것도 무엇인지 모릅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그대로 아는 것은 모두가 다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에게 속한 모든 자와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었지마는 다른 사람 보기는 죽는 것으로 봤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식이 틀렸기 때문에 죽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지공법과 지성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모든 택자의 멸망을 대신 책임지시고 이 책임을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과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을 이루는, 이 완성을 이루는 이것은 사망을 완전히 멸했고, 죄를 완전히 멸했고,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 인정과 찬성을 받게 됐고, 아버지로 하여금 승리자로 존대할 수 있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예수님에게 다 일임할 수 있는 이런 실력 있는 실력 행위를 완성을 했지마는 사람들 보기에는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이 삐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인식이 잘못돼서 죽는 것은 사는 것으로 사는 것은 죽는 것으로 그렇게 인정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목숨을 버리는 자는 살리라' 말씀했습니다. 또 '버리는 자는 여러 배 백 배를 얻으리라' 말씀했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 말한 그것도 이치에 안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뺏기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좋다 하는 것은 거꾸로 된 사망 법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그 결과로는 완전히 멸망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한 공부를 평생 해야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접촉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실물 교재요 교과서입니다.
세계에 강대국이 있습니까? 그 강대국을 만드신 분이 바로 우리가 우리 구주로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만들었어요. 이것이 이렇게 인정이 되어 믿어집니까? 이 사실이 인정되면 만들어진 그 보배가 귀합니까 이것을 만드신 그분이 귀합니까? 강대국의 정권자 그의 생명을 주고 뺏고 거머잡고 있는 분이 우리 구주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지혜와 총명을 당신이 운전해서 당신이 혼자 운영하고 계십니다. 이분이 그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습니까? 20세기의 과학이 자랑하고 떠들고, 이 별에서 저 별 가고 큰 야단을 치지마는 그 수많은 별이라고 하는 그것이, 아직까지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 하지마는 발견한 것이 발견 안 한 것의 백분지 일이 되는지 천분지 일이 되는지 모릅니다. 왜? 세월이 지나가니까 자꾸 새것이 나옵니다. 그것은 발견 다 됐다 말 아닌 것 아닙니까? 그것을 여기서 저기 건너가 놓고 말하지마는 그 넓고 큰 것을 엿새 동안에 혼자 만드신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전쟁을 일으키고 해산시키고, 약한 걸 높이 올리고 높은 것을 깨뜨리고, 지극히 작은 버러지 한 마리의 움직임에서 지극히 강대국의 전민족과 그 정권자를 움직이는 그것 일동 일정까지 혼자 영원 전에 경영했습니다. 그걸 예정이라 합니다. 또 그대로 창조했고 그대로 지금도 섭리하시는 그분이 우리 구주 하나님이신데 믿습니까?
"이분을 앎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 많을지어다" '이분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분을 아는 것만큼 그분이 거저 주는 것을 자기 것 만들 수 있습니다. 이분을 아는 것만큼 거저 주는 것을 자기 것 만들 수 있어요.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인데 너희 것으로 인정하고 누리라' 했는데, 그분을 알고, '그분은 신실한 분이라, 그분은 거짓말 안 하는 분이라, 그분은 약속에 절대성을 가진 분이라, 그분이 말씀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것은 내것이라.' 인정되는 거기서 자기 것 되는 것입니다. 인정되면 되는 것만큼 자기는 인정된 소행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앎으로 평강이 너희에 더욱 많을지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장자 재앙으로 출애굽 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에, 앞에는 홍해 바다가 있고 뒤에는 애굽 백성들이 추격할 때에 모세나 그 백성들이나 여호수아나 꼭 같은 입장인데, 꼭 같은 입장인데 모세와 여호수아는 기쁘고 즐거워서 춤을 추면서 '햐, 하나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 또 하나 보겠다.' 왜? 당신이 인도했기 때문에.
인간이 보기에는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지, 뒤에는 애굽 강군이 추격하고 있지, 완전히 맷돌 속에 넣어놓은 곡식 모양으로 가루가 될 모양인데 거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그분이 전능자시요 그분이 모든 시간계와 공간계와 활동계를 주권하고 계시는 분이신 것을 믿기 때문에 '이분의 능력이 요렇게 인간 보기에는 절대 안 되는 가루가 될 판인데 이분이 어떻게 하는고 또 하나 솜씨 보자!' 하고 기뻐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왜 그분들이 그런 가운데서 평강을 누렸느냐? 평강 누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아는 것 때문에 평강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 어떤 하나님이라 말하지마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그 능력과 신실함을 경험했지마는 그들은 패역해서 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 인정 안 되는 그것으로 저희들은 고통만 당했습니다. 인정하는 것으로 평강을 누렸습니다.
공산국 루마니아에 기독 청년 20명이 성경 2만 부를 가지고 그곳에 담대히 들어가면서, 죽이니까 맞아 죽고 그래도 또 가지고 들어가고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과 그분이 계약한 것을 믿기 때문에, 그가 곤봉에 맞아서 죽은 것은 그분의 지식으로서는 최대의 성공을, 최대의 고속의 신앙의 성공을 한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길을 갔고 그 일이 기쁘고 유일의 즐거움의 소망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다 건너로 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대주재가 가라고 말씀했는데 그분들이 가다가 물에 빠져서 중간에 죽었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헛일 아닙니까? 당신이 가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은 거기서 다 중단돼 버리고 꺾어지고 말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가라고 하셨으니 그는 피조물 전체가 다 달려들어도 못 가게 못 합니다. 왜? 이분이 주권자요 주재시기 때문에.
이분을 알고 이분의 명령의 권위성을 알았으면,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같은 하나님의 지식이 있었더라면 풍랑이 일 때에 그들은 '야, 하나님의 솜씨 보겠다.
풍랑아 일어라. 네가 어떻게 한번 해 봐라. 야, 풍랑아 너하고 하나님하고 싸우는 것 좀 보자. 우리를 바다 속에 매장을 시켜라. 하나님이 어쩌는가 보자.' 그들은 풍랑을 향하여 호령을 쳤을 것입니다. 조롱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으며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향하여 호령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배타고 건너가는 자들이 '여기는 벌써 육지에서 수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이 풍랑에는 헤엄을 쳐도 안 죽을 수 없고, 수심이 얼마나 되고, 또 이래 일어나는 풍랑은 과거로부터 여기서는 벗어나지를 못하고...' 과거에 저희들이 가졌던 그 지식이 배탄 제자들을 두렵게만 만들었고 이제 죽는다는 그런 인식만 강하게 재촉했지 이 풍랑은 너희들을 죽이지 못한다는 그런 지식은 하나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왜 놀라고 떨고 기절했더냐?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과 모든 유전의 지식, 자기들의 주관 지식 그것이 들어서 사실에 맞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에게 공연한 고통만 주고, 불안만 주고, 이탈된 행위만 빚어내도록 한 것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아는 것만큼 성경은 자기에게 복될 것이고, 평안할 것이고, 자기에게 능력일 것이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이 책은 거짓말 책 중에 제일 거짓말 책이 될 것입니다. 필요 없는 책 중에 제일 필요 없는 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아서 하나님을 전능자로 알면 이 책은 전능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절대자인 것을 인정하면 이 말씀은 절대적인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에 기록한 소망은 절대적인 소망이 될 것입니다. 이 책에 약속한 능력은 절대적인 능력이 될 것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가 전능자인 것을 인정하면 제가 받는 능력은 전능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전지의 지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하는 데에서 이 성경은 그에게 효력 있게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이 성경은 그에게 평안하다는 것도 평안을 주지 못하고, 존영하다는 것도 존영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이 주는 것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그는 성경이 주는 형벌도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대로 하시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사망을 무시한 그가 사망을 받을 것이요,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평강을 인정하는 자가 생명과 평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환자들이 왔을 때에 믿는 자에게는 이루어졌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 이 세 가지를 믿지 않으면 안 이루어졌고 믿으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실물로 보여줬습니다.
이런 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보여주고 이랬습니까? 병 낫게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 아닙니다. 왜 다 같은 사람인데 믿는 자는 낫고 안 믿는 자는 안 낫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과 말씀 그대로 예수님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 세 가지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거기 와서 역사해서 이루었고 인정치 않는 자에게는 역사하지를 못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 '예수'는 창조주가 우리 구원하려고 피조물 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전능자가, 전지자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했기 때문에 불순종 거역으로 하나님을 거슬려 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전능자가, 전지자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털끝만큼도 자기 지식 지혜를 못 썼습니다. 자기 능력을 못 썼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 피동 이것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피조물 되어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쓰지 못하고 그분의 지식과 지혜, 그분의 소원, 그분으로 인하여서만 움직여지는 요것을 완성해 가지고 이 일을 거역함으로 죽은 우리들을 대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존귀한 문화인이 미개국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거기에 가서 오만 수욕과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신 이것 때문에, 이 한 가지에서 위로를 받고 평강을 받고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나는 불충성한 죄인입니다.' 하고 일생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목적으로 택한 자들을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려는 그 직책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에게 입혀 준 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스도라 말은 사랑과 도덕의 완성을 말합니다. 지혜 지식의 완성을 말합니다. 능력의 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제사장도 하나님 중심이요, 선지자도 하나님 중심이요, 이스라엘의 신정 국가의 왕도 하나님 중심으로 이렇게 되어지는, 사랑의 완전, 지혜 지식의 완전, 하나님과 결합의 완전 이 완전의 의를 우리에게 입힌 것입니다.
이것이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의 완전 결합인 새생명입니다. 이 의를 우리에게 입혔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이 공로를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이 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의를 우리에게 입혀서,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보배로운 믿음, 지극히 존귀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보배롭다 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지마는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피소유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유하고 있는 그것이 보배일 때에 보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체를 보배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배로운 사람이라 할 때는 그 지방의 보배나 나라의 보배나 그 가정의 보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존귀한 것을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받게 되었으니 그게 무엇이냐? 믿음입니다. 믿음. 지극히 고귀한 믿음을 받았다, 존귀한 믿음을 받았다.
믿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간접 연결이 아니라 직접 연결 이것이 믿음입니다. 직접 연결.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의 직접 연결입니다. 어떤 것을 두고 연결하지 않습니다. 직접 연결. 예수님과 직접 연결은 하나님과 직접 연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 중보자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 연결됐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거기 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는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직접 연결의 믿음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것이 큰 것을 느낍니까? 이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분이 만든 부스러기 중에 어떤 한 부스러기를 직접 연결하고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이라 존귀라 하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다면...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인정만큼 자기에게는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북이라면 '그 사람은 김일성과 직접 결탁돼 가지고 있다.' 중공이라면 '그는 등소평과 직접 연결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미국이라면 '레이건과 직접 연결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직접 연결된 것은, 소국의 왕이 대국의 왕으로 더불어 직접 연결이 되면 소국은 살았다고 막 희망이 넘칩니다.
우리가 하나님하고 직접 연결인데 이걸 압니까!! 정말로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할 공부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아니하니까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감동시켜 믿어지게 해 달라고, 똑똑히 알게 해 달라고, 인정되게 해 달라고 금식기도를 하고, 의지할 것 없는 맹수 있는 심심 산곡에, 인간의 힘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 큰 사실이 믿어지면, 확신이 되어진다면 이는 참 천상 천하에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한 일인데, 이것을 입술로는 읽으면서도 이런지 안 이런지, 믿는다고 하지마는 진실이 없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있다고 알면서도 그분의 만든 지극히 작은 부스러기 같은 것에게도 오만 종질을 다 하고 있으니 이게 안 믿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안 믿고 이걸 해결 지워야 되겠다 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살 행위는 못 하지마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이 손대지 못하고 그분으로서만 되어지는 그런 형편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가 오면 '오, 요번에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이 일에는 참 성경대로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주권하신 하나님 이분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봉착했으니, 해결이 되면 이분이 계시는 것이 인정이 되어지고 안 되면 이분 계시는 것 인정 안 되어지겠으니, 이 큰 문제를 내가 좌우간으로 생명은 위험해도 끊어져도 알 수는 있으니 한번 알아보자.' 하고 이것을 고대하고 있다가 기회를 닥치면 지체하지 않고 이 걸음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뛰어들었던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자살하는 행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는 할 수 없고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야 하나님 앞에 죄겠나? 내가 기도하러 가는 것이야 하나님 앞에 죄되지 않는 길이니까 요 길로 가 가지고 정말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 하고 갑니다.
평소에 집에서 발버둥치다 안 되니까 보따리 싸 짊어지고 산으로 갑니다. 가고 가고 가다가 날이 저물면 저 높은 태산 밑에 어지간히 가까이 가서 거기서 잡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은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첩첩 산중, 맹수, 사자굴, 표범산, 아가서에 '표범산 사자굴'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곳으로 해가 넘어갈 때까지 달음질을 쳐서 자꾸 앞으로만 갑니다. 가다가 보면 해가 떡 끊어집니다.
그러면 거기는 맹수들이 어글어글하고 있는 곳입니다. 처음 갈 때는 용기를 가지고 갔지마는 가 가지고는 겁이 나 못 견디니까 '아이구, 돌아가야 되겠다.' 해서 돌아가 봤자 산 중턱도 못 내려갑니다. 이러니까 꼼짝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죽을둥 살둥 이렇게, 아무 의지할 것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지내는 가운데에 그분의 능력의 보호를 조금이라도 체험을 받고 조금이라도 경험을 받으니까 '오 주여, 당신이 계십니다.' 이렇게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을 믿지 못하니까 어렵고 두려워 견디지 못하던 것이 당신을 발견해서 당신을 인정한 것만큼 평안해졌고, 당신의 구속을 확실히 깨달은 것만큼 만물에게 대해서 사랑의 설교를 할 수 있고, 그들을 사랑하여서 맹수를 어루만져 줄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당신 시키는 대로 하되 인간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인간이 해서 되는 것인지 모르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 것, 하나님이라야만 할 수 있는 그런 걸 시켜 줬으면 좋겠다.' 요것을 기다리다가 그런 기회가 오면 하나님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려고, 더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는 담대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에게 소망은 견고하 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의 말씀인 그의 지혜는 자기에게 쓰여지고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분의 명령 순종에 능력이 되고, 피조물에게 대해서 담대하고, 죄에 대해서 두렵고, 마귀에 대해서 호령치고, 이렇게 하나님 비슷한 참사람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과 직접 결합이라고 말씀했는데 내가 정말로 믿나 안 믿나?' 하는 것을 살펴서 안 믿는다면 안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일국의 정권자와도, 일 면의 재벌가와도, 한 동네에서 권위 있는 사람도 저와 직접 교제를 가지고 직접 하나가 돼 가지고 움직인다면 그것이 배경이 되고,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고, 영광이 되는 줄 알아서 아무리 그 권세를 안 쓰려고 해도 써지고, 거만하게 안 하려고 해도 자연히 배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만유의 하나님과 결합이 됐는데 이것이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없기를!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네가 시험해서 확정을 지워라, 공연히 머뭇거리면서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척하고 이렇게 자기를 속이는 하루, 일 년으로 일생을 망치지 말고 네가 너를 시험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면 평강이 되고 권능을 믿지 않으면 두려움 될 그 길을 네가 닥쳐서 너를 시험해 봐라.
하나님의 전지한 지혜를 참으로 네가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네 앞에서 천하 인간들은 이렇게 하라 하고 하나님 말씀은 저렇게 하라 하는데, 하나님 말씀은 앞으로 가라 하고 천하 인간의 모든 지식과 공론은 그리 가면 안 된다 하는데, 그럴 때에 과연 하나님의 인도는 전지의 지혜라, 실패 없는 지혜라는 걸 인정하나 안 하나, 여기서 너를 인정하나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나, 인간의 지혜를 인정하나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나 이것을 시험해 봐라. 네가 믿는지 안 믿는지 너를 시험해 봐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은 시간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의를 행해서 그 의의 양을 가지고 하늘나라의 것을 받는 것 아닙니다. 의의 양을 가지고 하늘나라 받는 것 아니고 하나님을 어떻게 알며, 어떻게 인정하는지 그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너만큼 인정하는지? 네 집에 하인만큼 인정하는지? 무식한 사람만큼 인정하는지? 아주 높은 지식 있는 사람들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치 않는지? 네가 너를 시험해 봐라.
하나님을 어떻게 알며, 어떻게 인정하며, 어떻게 그를 바라며, 어떻게 그분의 은총을 힘입는지? 인정하면 안 입을래야 안 입을 수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아는 것만큼 자기에게는 효력이 있고, 효력이 있는 것만큼 그는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가 너를 시험해서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확정하라'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은 전능자의 명령인데, 일국의 왕의 명령이라도 배짱이 있고 큰소리하는데, 대통령의 명령이라도 배짱이 있고 큰소리하는데 왜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명히 알고도 인간을 두려워하느냐? 왜 떠느냐? 왜 염려를 하느냐? 모든 피조물보다 크신 분이 명령하신 명령이요, 그분이 요구하시는 요구고, 그분의 뜻이요, 그분이 나와 결탁해 가지고, 그분이 나하고 하나돼 가지고 내 움직이는 것은 그분의 것 가지고 움직이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간접이 아니요 직접 결합이, 이 결합이, 이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이요, 둘째로는 그분의 것 가지고 활동합니다. 그분의 것 가지고.
'야, 저 사람이 무슨 권세로 저래 지금 설치고 서슬 좋게 막 문서를 뒤지느냐? 동회의 이런 저런 문서를 마구 뒤지고, 시청에 가서 막 뒤지고 이래 가지고 심사를 하고 저러나? 저거 무슨 권세를 가졌느냐?' '그 사람이 바로 직접 대통령 권세 가지고 온 사람 아니냐?' '아이구, 그러냐?' 떨 수밖에 없지요. '그분이 누구의 명령 가지고 왔느냐?' '바로 그게 대통령 명령 아니냐? 바로 그 대리자 아니냐?' 이것을 우리가 믿습니까? 예수의 피로 인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이 왔는데, 보배로운 결합이 왔는데, 하나님과의 직접 결합, 하나님의 지혜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 가지고, 하나님의 뜻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 가지고, 하나님 소원 가지고, 하나님의 것 다 가지고 활동하는데.
어디다가 활동합니까? 당신의 모든 무대,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 모든 것, 당신의 것 모든 것 거기서, 당신과 결합되어 당신의 것 가지고 거기서 내가 봉사하고 거기서 역사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아는지? 이것을 모르고 입술로만 알고 지나가는 이 병을 우리가 고쳐야 됩니다. 이 미끄러지는 병을 고쳐야 됩니다. 이 불신의 병을 고쳐야 됩니다.
우리에게 진실이 없기 때문에, 진실이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으로, 인정 안 하면서 하는 척으로, 안 믿으며 믿는 척으로, 이 권세를 안 쓰면서 쓰는 척으로, 없으면서 있는 척으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린양이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이기실 터이요 부르심을 입고 빼심을 얻은 자이나 진실이 없는 자는 질 것이요 진실이 있는 자는 다 이기리로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 결합이라는 이 결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진실되게 인정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가 역사할 수 있는, 우리가 이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중생된 자면 결합이 돼 가지고 있고 그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부여돼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시야는, 그분의 모든 소유는, 그분의 일거리는, 그분의 농장은 이미 우리 것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인정함으로 어느 정도 나에게 주관이 생겨지고, 나에게 능력이 발동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와 가지고 실질적으로 역할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이것은 진실로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진실이냐? 백분지 일 정도 진실이냐, 만분의 일 정도 진실이냐, 진실이 하나도 없느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이 있나니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여기 대해서 진실이 없는 것을 인하여 우는 자 진실 받아 기뻐하고 또 진실 받고 나서 보니까, 진실로써 받고 나니까 또 하나님께 대해서 진실이 없어서 모세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던 것을 발견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더 두려워서 두려워하고, 이제는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하는 줄 알았는데 또 발견하니까 자기는 하나님의 만분의 일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는 결론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두려워하는 자가 누가 있을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여야 할 양만큼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가 어디 있을까?' 했습니다.
이런고로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노라. 누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거기서 달리라, 앞으로 달리라. 네게 진실이 없는 것을 향하여 달려 진실에서 진실로 점점 진실로 성장돼 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거짓됩니다. 왜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극히 작은 것을 두려워하며, 모든 것에 충만한 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으면서 왜 돈 몇 푼에 종이 되어지고 땅위에 그렇게 소원되는 것이 많습니까? 분명히 이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땅에 지지해 있는 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바라보라! 땅의 것을 찾지 말아라! 예수님은 이렇게 살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셨느니라! 인생아 인생만으로 자랑하지 말라.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결이 안 됐으면 무가치한 것이다. '왜? 일국의 대왕인데, 세계에 제일 위대한 정치가인데, 제일 부강한 자인데?' 아니라. 가치 없다. 왜 가치 없느냐? 지구 땅덩어리를 다 차지해도,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인데 지구 땅덩어리를 차지해 봤자 제가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가라 하면 끝나고 가야 될 것 아니냐? 어디 자랑할 것이 있느냐? 인생은 그리스도와 결합이 된 지 후라야 가치 있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에누리하지 맙시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니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렇게 연결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 연결된 사실을 효력 있게 효력을 발생하느냐? 이 행복을 누리느냐? 이자로 사느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 가지고 새로 재결합을 하려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다 되어 있는데 되어 있는 것이 이자로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권세자가 다른 사람에게 정권을 맡겼는데, 자기 범위 내에서는 자기 대리로 정권을 맡겼으니까 정권을 가졌지마는 가진 그 정권을 가지고 정권 행사를 할 때에 제 공로가 되어지고, 정권 행사를 했을 때에 그것이 효력이 있고 성사가 되어지는 것이지 정권을 가졌지마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정권 가질 때는 가졌지마는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권 행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맡겨놔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세워놨다가는 탈입니다.
결국은 쫓아내야 됩니다.
정권을 맡겼더니 그 사람이 정권 행사를 해 가지고 행사를 많이 했습니다.
했으니까 자기가 정권 행사한 그것은 정권 행사로 처리가 되고 성사가 되고 건설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없는 존귀한 위치를 가진 것이 우리들인데, 이 존귀한 위치를 가지고 존귀한 위치의 이 영광스러운 생애를 얼마나 하느냐, 얼마나 행사했느냐 이것으로 무궁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생애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영원한 기업을 쌓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해 무궁세계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입니다.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 이 무한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이 관계를 가지고 세상에서 어느 정도 쓰느냐? 어느 정도 썼느냐? 썼으면 이것은 다 생명 역사요, 이것은 다 의의 역사요, 이것은 봉사 역사인데 세상에서 어느 정도 했느냐? 이것이 미래로 영계로 영원 무궁세계의 자기의 터를 마련하는 것이요 자기 자본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 것만큼 무궁세계에서 그대로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으나 사는 것이 무궁세계에 없을 것만 이 세상에서 했으면 암만 숙달돼도 무궁세계에 없는 것만 숙달했으니까 그것은 죄요 멸망입니다. 그 나라에는 소용이 없어요.
영원 무궁토록 있을 그 사업, 그 일 그것을 이 세상에서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숙달해서 한 그것은, 너의 연성된 것은, 너의 훈련된 것은, 너의 연달된 것은, 너의 성장된 모든 생애 실력은 무궁세계의 실력의 기초라,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일시 했지마는 이것이 영원히 무궁세계서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의 이름을 말하기를 영생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깹시다. 어쨌든지 하나님 바로 아는 연구, 그분을 바로 나타내는, 우리의 생활을 바로 하는 이 연구, 이 행동에 주력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하나님의 능력과 나와, 하나님의 소유와 나와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맺어진 이것을 어느 정도 효력 있게 발생하느냐? 어느 정도 이 위치를 감당하느냐? 어느 정도 이 사명을 감당하느냐? 어느 정도 이 일에 달되고 능숙해지느냐? 이것이 무궁세계의 자기 기능입니다. 하늘나라 생애의 기능입니다.
무궁세계에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충만케 해 주는 기능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성경에서 알고, 기도에서 영감 받고 믿어져야 합니다. 자기가 성경에서 아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면 영감이 믿어지게 합니다. 처음에는 알기만 알았지마는 자꾸 기도하면 믿어지니까 자기 전신 전체가 요대로 하지 못한 것을 통분히 여기고 요렇게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면 자기 전부는 부스러기 하나도 남은 것 없이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하고 싶은 사람으로, 전체가 하고 싶은 사람으로 완전히 성화됐습니다. 하고 싶은 자가 됐습니다. 하고 싶은 자 되고, 하고 싶은 자 된 자기에게 하나님이 능력 줘서 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게 성화입니다.
하나님과 인생과 세계와 무궁세계와 자기에 대해서 알 자가 누구냐? 세계에 책이 산더미같이 있어도 다 거짓말 책이요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된 지식입니다.
이 참된 지식에서 지식으로 알고, 기도하여 영감으로 확실히 인정되고, 한 자욱 두 자욱 걸어가는 데서 능력 받아 실천해서 옮겨 실상을 만들고, 이리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 결합된 이 결합의 효력을 내가 얼마나 써서 실상으로 얼마나 가졌는지? 당신의 것으로 내가 활동하는 이것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당신의 것에게 내가 은혜를 베풀어 그들에게 필요한 자로 어느 정도 되어 있는지?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만드는 것이요 이것이 무궁세계의 자본이요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믿는 자는 담대합니다. 믿는 자는 소망이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믿는 자의 힘은, 배경은 다릅니다. 믿는 자는 두려워하는 것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분을 상관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일을 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승리를 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저축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부요해지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보지도 못하고 없다고 부인하는 그것을 상대하고, 그것으로 자기는 저축하고, 노리고, 주력하고, 투쟁하고, 마련하고, 갖추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알고 보고 좋아하고 두려워하는 그것은 세상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런 것은 다 배설물같이 무가치한 무능한 것이며 저주와 사망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