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4:19
믿음
1988. 12. 17. 토새
본문: 마태복음 24장 35절∼38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 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의 때라고 말씀하신 것은 노아 홍수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고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하는 말씀은 예수님의 불심판도 그러하리라 하는 두 심판을 비교한 말씀입니다.
특히 인자라고 말한 것은 주님이 불심판을 베푸시고 오시는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그 목적은 근본 하나님의 부요이신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도 없이 다 가난해지셨습니다. '가난해지심으로 그 부요를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가지신 부요는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완전히 내놓으셨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전지 전능 주권의 자유자이신데 털끝만한 자유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자유를, 완전히 그 능력을, 영광을, 존귀를 다 우리의 대속물로 다 내놓으셔서 말 한 마디도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순종만 했지 가지신 자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랬는데 가난하게 되신 이 가난으로 우리의 모든 월권으로 취한 모든 그 범행의 죄와 죄의 형을 다 대속하셨고 모든 소유로 범죄한 그 모든 것은 소유로 대속해야 되기 때문에 대속하셨고 또 아버지에게 전적 순종함으로 이제는 아버지의 것을 예수님께서 다 순종으로 상속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근본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 우리 때문에 가난하게 되셨고 또 당신이 순종으로 아버지의 무한한 충만의 부요를 다시 당신이 받아서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아 가지셨기 때문에 곧 믿는 자의 것입니다.
이래서 부요자가 가난해지셨고 가난한 자가 또 부요해지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가리켜서 인자라 이랬습니다. 이 사활의 대속으로 아무것 없이 가난해지셨으며 부요해지신 이것을 주실려고 구름 타고 오십니다.
처음에 오신 것은 우리를 대속하시려고 오셨으나 이제는 이 대속을 어떻게 자기가 받아서 믿음으로 행함으로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이 간직한 그대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실상을 보상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을 가리켜서 인자라 그렇게 특별히 표시한 것입니다.
여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하는 것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인자의 불심판 때도 같다 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대해서 하시는 일도 같고 또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할 일도 같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나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는 것이나 다 같고 노아가 하나님에게 복종한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그 성질의 것이 꼭 같다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여러가지 기록한 것은 그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는 사람들이 노아의 여덟 식구와 같은 그런 사람들, 창세기 6장 끝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 하는 다 준행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 준행한 사람들도 있고 또 이 말씀을 아주 무시하고 그저 먹고 마시는 것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여게만 전심신과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서 거게만 도모했지 하나님이 물심판 내린다는 여게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지 않고 아주 무시하고 등한히 한 그것이 예수님의 불심판 올 때의 사람들도 같다.
그러면 예수님의 불심판에 관련된 오늘의 성도들도 주님이 명하시고 요구하심에 다 준행한 사람도 있겠고, 또 아예 등한히 한 사람도 있겠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고, 불택자는 영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모르고 또 택자들에게는 중생한 영감이 알려 주시니까 알지마는 그보다 더 크고 좋고 급한 일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이의 마음이 기울어지고 불심판에 대해서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아니고 같다는 이 뜻에는 노아가 홍수 심판이 날 때에 그때에 그 밑에는 홍수의 물이요 위에는 그들이 간신히 타고 있는 방주입니다. 배입니다. 배인데 배는 그것은 물올 누르고 방어하고 하기 때문에 물이 방주 안에 들어오지 못하니까 방주는 침몰되지 않고 그 유지가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에 그 방주에 하나님 말씀대로 다 준행하다가 어느 한 모퉁이를 준행을 안 했다고 하면, 다 준행했다는 말은 그 내용을 보면 배를 제작하는 데 대해서 명령하신 일이 있고 제작 후에 거게 수용하는 일에 대해서 명령하신 그 두 명령뿐입니다.
그런데 수용하는 것에 대한 그것도 우리가 문제는 됩니다. 하나님이 들이라 하는 것만 들여졌지 들이라 하지 안한 것은 들이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불심판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만 구원이 되지 구원하지 않는 것을 우리 욕심대로 하나도 가지고 가지는 못한다 하는 것을 거게서 우리가 또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방주를 만드는 데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조각조각이 붙여서, 뭐 연결하라는 것 연결하고, 못 치라는 것 못 치고, 또. 칠하라는 것 칠하고 다 했는데, 만일 우리가 가정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어떤 한 모때기에 한 조각이라도 붙이지 안했다고 하면 거게는 하나님이, 말씀에 하라는 대로 한 그것이 물을 방어했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한 고것이 물을 방어했지 다른 것으로써는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이랬는데 만일 한 조각이 붙여지지 안했다면 그 중량 있는 방주가 물 위에 떴을 때에 그 틈으로 참 쏜살같이 그렇게 솟아오르는 그 물이 어찌 됐을까 하는 그것을 저는 좀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혹 요새 현재의 모든 구원관을 가진 현 신자들이나 또 그 지도자들의 모든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나 인식들과 비교하면 너무 국썩스러운 지나친 해석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할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렇게 가정이 되련지 실상이 되련지 모르나 저는 늘 거게 대해서 생각을 가집니다.
그때에 노아가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런, 방주 제작에 있어서 말씀대로 준행하지 아니한 그런 무슨 토막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이 홍수를 방어할 수 있을까? 홍수를 방어하지 못한다면 전체를 방어했다 했더라도 한 모퉁이가 방어되지 못했으면 그 어찌 됐을까? 그것은 참 굉장한 센 물의 힘으로서 방주 속에 뚫고 들어올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온 우주가 다 불에 타서 모든 체질들이 녹아져 가지고 고체는 없고 전체가 다 액체가 되어지는 이건 큰 변화의 불 심판이 올 터인데 그때는 불의 세력올 방어해야 불의 해를 받지 안할 터인데 불의 세력을 방어하는 것은 뭘로서 방어할 수 있을까? 그 불의 세력을 방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오늘도 우리에게 구구절절로서 명문적으로 세밀히 말씀을 해 놓은 이 말씀 순종으로만 이 불의 해는 방어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안할 수 없습니다. 또 거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는 말과그 다음에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는 의의 거한다는 것은 중복적인 말입니다.
우리라는 것은 곧 바벨탑을 쌓을 때와같이 인간끼리 뭉친 그것을 가리켜서 복수로 우리라고 말한 것 아닙니다. 만일 사람들의 수가 단합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 효력을 낸다고 하면 아마 노아 물심판 때도 그때에 사람들이 마지막에 침몰되게 될 때에야 뭐 한 마음 한 뜻이 돼 가지고 하나님에게 얼마든지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단합이 효력이 있다고 하면 그때에 단합도 굉장한 단합이 됐겠지마는 그 단합이 아무런 효력욜 내지 못했고 다만 하나님이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예약적인,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한 고것만이 홍수는 방어했지 딴걸로써는 방어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단합이 돼 가지고 하면 그 효력이 나지 않는가 잘못하면 오해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뚤뚤 뭉쳐서 단합되면 된다는 그걸로 생각하겠는데 거게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연합된 무리들을 가리켜서 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시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약속한 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사람들은 다 새 하늘과 새 땅, 불에서 멸해지지 아니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이 구원을 다 소망 가진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택함받고 중생된 사람들은 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을 말씀하셨고 그다음에는 다시 새삼스럽게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거게는 뭣만 있느냐? 의만 있다. 의만 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만이 홍수 심판을 방어한 거와같이 불심판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진 그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신인양성일 위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 대속으로 다 준행한 것을 말씀하시고 구속 받은 우리들이 인간의 의로 가지는 이 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 해서 결실한 것을 가리켜서 인간의 의로 말씀합니다.
이래서 너희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 거룩한 행실이라 하는 것도 구별하는, 모든 행실 다 망라해서 전부가 다 도매금이 아니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소망해라' '바라보고 사모해라' 이런 말씀을 보면 그때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영육의 그 본체는 다 구원 얻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라고 말씀했고, 그다음에 '의의 거하는 바' 하는 이것은 곧 우리 성화구원에 있어 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진 고것만 성별되어서 불심판의 해를 받지 않고 그 나라에 새 하늘과 새 땅에 간다 하는 말씀으로 우리가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데도 보면 '이 터 위에 세우나 모두 다 조심해서 세워라' '조심해서 세워라' '그날에 그 공력을 시험할 터인데 불로 시험한다' 그래 놓고 건설 재료를 금과 은과 보석과 풀과 나무와 짚으로 이렇게 해서 탈 수 있는 것과 타지 안할 것을 가리켜서 말씀했는데 또 말씀의 불이라 하는 것을 또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불로 심판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한다고 하신 말씀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할 때에 그 말씀에 걸리지 않는 것, 정죄되지 않는 것 그것만 남아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저는 구원을 얻으나'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대속으로 기본구원 영육의 그 본체가 구원 얻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셨고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거와 같다' 그 말씀은 불에서 나와서 구원 얻은 게 아니고 불 속에서 겨우 그 심신의 생명만 건졌다 하는 그건 뜻을 말합니다. 그러면 거게서는 뭘 말하는 것이냐? 소유는 하나도 가져오지 못 했다. 불 속에서 구원 얻었으니까 생명만 구원 얻었지 거게서, 무슨 자기의 소유라는 것은 가져을 기회도 없고 그만한 힘도 없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완전히 소유는 귀하나 천하나 다 버리고 자기 알몸만 이제 구원해 나왔다 하는 그런 뜻을 가리켜서 거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면 이런 말씀을 종합을 우리가 해 볼 때에 불심판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 곧 예수님이 대속으로 말씀대로 된 우리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육의 본체는 우리가 다 구원 얻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갑니다.
그러나 본체의 그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그 심신의 정력이, 심신의 정력은 매일 매일 매현실 현실마다 그 정력이 오락으로 그 정력이 다 소모되는 사람도 있고, 또 세상 학문을 위해서 소모된 사람도 있겠고, 또 세상의 기술이나 예술이나 무슨 돈이나 위해서 이 정력을 투자한 사람도 있겠고, 그러면 정력 투자하는 투자된 대로 어떤 사람은 춤추는 기능이 있겠고 묘기의 기능이 있겠고, 어떤 사람은 재벌의 기능이 있겠고, 과학의 기능이 있고 문학의 기능이 있고, 뭐 오만 기능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능이 하나님의 진리대로 된 그 기능이라면 그 기능은 죽일 자가 없고 태울 자가 없습니다. 진리이 기 때문에 진리는 죽이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기능을 가지고 평생 도적질하는 거,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의 모든 정권의 실력이나 통치의 실력이나 그런 모든 궤휼의 실력 그건 것을 일생 동안 정력을 기울여서 마련했다고 하면 대단히 그 나라에서는 큰 기술의 실력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술의 실력이 영영한 하늘나라에 용납이 될 건가 안 될 건가 우리는 생각한다면 그런 거는 용납될 수가 없을 것이라. 필연 용납 못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는 용납될 것은 자기가 땅위에서 수많은 것이 있는 가운데에 그 정력을 가지고 불타지 아니할 것, 이걸 위해서 성령으로 심는 것, 불타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해서 투자한 것은 불타지 아니할 것이 마련됐겠고 '육체로 심은 자는 육체라' 하는 것은 자기의심신의 주권으로 심어진 그런 심신의 소욕대로 심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썩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용납 못 된다.
이런 모든 말씀을 다 체계적으로 종합적으로 한테 해 본다고 하면 이 불심판베는 중생된 자의 심신의 그 본체는 다 구원 얻어 가고, 본체와 본체에 있는 그 정력을 투자해 가지고 만든 그 기술과는 다릅니다. 기술은 본체가 아닙니다. 기술은 본체가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불탈 수 있는 풀과 나무와 짚으로 자어진 것, 하나님 말씀에게 정죄받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소멸된다는 이 말씀으로 우리가 해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이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교리를 가졌고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그것은 또 그 교리 가진 것도 그것은 기본구원의 교리가 되겠습니다. 이래서 홍수에, 멸한 것은 홍수가 멸했지 딴것은 멸하지 안했습니다. 홍수가 멸했는데 홍수 그 멸망은 하나님 말씀대로 준행한 그것만이 방어력이 있었지 딴거는 방어력을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심판에는 역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이 의, 의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한 이것만이 불심판에 방어력을 가졌지 딴것은 방어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러니까 노아 때에는 전인류나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어데 있었는가? 성공과 실패는 근시자들은 생각하기를 뭐 정권을 잡는다, 재벌을 가진다, 세계에서 유명한 과학자가, 학자가 되는 것이라 이렇게 말했지마는 그것도 다 성공이요 실패지마는 그런 거는 사망선 아래 있는, 멸망선 아래 있는 성패의 종류들이지 이 멸망선을 초월해서 이런 것을 꿰뚫은 그런 성패는 아닙니다. 모든 그때 당시의 성패는 심판을 이기느냐 안 이겼느냐 하는 거기에 성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의 그 생애가 모든 사람에게 조롱을 받던 그것이 언제 제일 존대한 것으로서 승격됐던가 하면 물심판이 왔을 그때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대를 받을 수 있는, 천하를 차지한, 온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후사로 그렇게 나타나는 그때에 그 성패는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모든 준비는 그때에 효력이 있었지 다른 데는 효력이 있지를 안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온 천하를 차지했다고 할지라도 불심판이 오늘 내리련지 내일 내리련지, 불심판을 안 내려도 불심판과 꼭 같은 하나님의 공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공심판 통과라야 인간 성공이 되는 것이고 기독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사심판을 통과한 것이라야 우리의 성공이 되는 것이지 그 이하의 것들은 성공이라 실패라 할 것이 없이 모조리 실패가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노아의 준비한 것도 그 효력이나 가치가 거게 있었고 모든 사람의 성패의 가치도 효력이 거게 있었는데 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노아 여덟 식구 밖에 사람들은 전부 그 성공이나 욕망하는 게 다 실패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노아의 여덟 식구만 지극히 큰 인간 성패의 성공을 가지게 됐는데 이 가질 때까지의 그의 과정을 본다고 하면 모든 사람에게 조롱 멸시 천대였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이것 참 다른 사람은 호의호식하는데 이 근근 생활하고 이거 뭐 괴롭기만 하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한번 했습니다.
노아가 그때 여덟 식구만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야 호의 호식하지마는 그것이 뭐 배 만드는데 거게서 돈이 나오 나? 아무 돈 안 나와. 그거는 뭐 만들어 봤자 돈을, 팔 데도 없고 아무 그 배를 뭐 운반선으로나 연락선으로서 쓸 데도 없고 다만 홍수 심판에만 썼다. 오늘 모든 성도들의 생애가 다만 불심판에 통과하나 통과 안 하나 그 불심판이 우리 눈에 보일 때에 이 우주 안에 있는 것은 불심판이지마는 우주 밖에 전체에게 있는 그 심판은 하나님의 공심판이다.
하나님의 공심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가 통과했지마는 공심판받은 자라 할지라도 네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얼마나 믿고 얼마나 준행했느냐 하는 구속받은 자들의 심판이 있으니 그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제사장 선지 왕되게 그 자본을 줬기 때문에 그 행위, 우리의심은 것은, 우리가 짓는 것은 뭐 건설하느냐? 우리의 지식으로 건설하고 행위로 건설하고 우리 자체로 건설하는 이것이 다 세 가지다. 제사장 선지 왕의 그 재료요 자격이요 지식이요 행동이요 권위요 그 자체다.
그런고로 여게 우리의 성패의 소망은 있습니다. 그런고로 노아가 외로웠던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불심판을 보면서 가는 이 성도들의 그 고독이라는 것 또 세상에서 그렇게 모든 것을 절제해서 원하는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한다는 것 이런 것을 노아를 연상하면서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하겠습니다.
오늘 모든 사람들은 너무 사람 줘세 하는 것이 온 천하에 관영했습니다. 가득 찼습니다. 참 에베소서에 말씀하시기를 '때가 악하니라' 말씀한 것과 같이 우리 환경에는 전체가 다 자기 중심이오. 목사도 자기 중심이오. 남녀 성도들도 다 자기 중심이오. 전부 자기 중심의 성공을 밤낮 노리고 있고 자기 중심의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마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당신의 소욕을 목적하시고 그것만을 당신이 노리시고 그것만을 다 보상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다 가꾸고 열매 맺지 않는 것은 찍어 던진다 하는 그말은 당신의 욕심, 성령의 소욕, 당신 욕심대로 한 것만 남겨두고 당신 욕심대로 달성되지 안한 것은 다 소멸한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지금 이제 칠 년이 다 넘어가는데 이렇게 매일 광고하면서 계속하는 거 못 들었다 소리를 못 할 것이오. 하루 삼십 분 기도 자기의 미래의 환난을 위해서 기도 외에는 우리가 이것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암만 들어도 저거 마음에는 다, 어떤 사람들은 '저 영감탕구 자꾸 쓸데 없는 소리 한다 뭐 매일 뭐한다고 새벽마다 광고하는가?' 한 것이 옛날도 그러하고 지금또 무시하는 사람들은 무시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총공회 위원들의 광고 부탁입니다. OOO집사 전도사 인허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정 위원들 의논해 가지고 이 시간 빨리 준비해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OOO집사라는 사람은 OO교회 남집사입니다. 이랬는데 나도 안면 봐도 성명은 모릅니다. 이런데 그 심심 산골에 있는 그 사람을 요번에는 교역자로 등용합니다. 뭐 대학 졸업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마는 아주, 아마 모르지마는 국민학교만 졸업하지 안했는가 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등용하십니다.
그래 나는, 이 자리에 있는데 교만하지는 말고. 목동 초군 다윗을 하나님이 쓴 거와 같이 반드시 그사람이 성공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중심을 보요, 중심. 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껍데기 껍데기 다 벗기고 그 사람 속에 제일 주체가 되는 고거 봅니다.
그게 뭐이냐? 그게 하나님 믿느냐 너 믿느냐? 그거 보면 다 껍데기만 하나님 하나님 하지 속에 알맹이는 자기가 들어 있습니다. 알맹이는 그런 것 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