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1:45
믿음
본문 : 막 11:12-14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주신 계시입니다.
이 무화과라는 이 형식, 무화과라는 이 무화과의 이 사실 이 형식을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는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이것 이치를 우리가 깨달아야 되지 그저 그런 역사가 지나갔다 고만 생각하면 헛일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 설교하는 설교를 들었는데 이 말씀들을 보고 해석을 하기를 '어쨌든지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엇을 자기가 구하든지, 무엇을 말하든지 말하고 구하는 그것은 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니까 그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의 강약에 따라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은 다 해 주신다. 해 줄 것을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다 해 주신다.
기도한 것도 무엇을 기도했든지 기도한 그것은 하나님이 다 이미 이루어 주셔서 받은 줄로 믿어라. 믿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이 의심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지 무엇을 자기가 행동하든지 말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믿기만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설교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하는 분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믿지 아니하고 인정치 아니하니까 인정하는 것과 또 사람들이,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해서 사람들이 좀 하나님에게 딱 붙어 가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설교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허욕쟁이들이, 사욕쟁이들이, 욕심쟁이들이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어떤 죄를 지어서라도 자기 욕심을 성공해 보려고 애를 쓰고, 애를 써도 잘 안 되는데다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이렇게 성공하는 길이 있다. 소원 성취하는 길이 있다.' 이렇게 믿을 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해석을 해 주니까 교인들은 소망을 가지고 바짝 달려들고 또 모든 사람들이 다 은혜가 있다고 해서 달라 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사람이라 이렇게 말씀했고, 독사와 시랑이와 같은 것이 사람이라 이렇게 했고, 사람은 전혀 사욕으로 사는 게 사람이라 이렇게 말씀해 왔는데, 그렇게 육체의 생각은, '육체의 소욕은' 그말은 '사람 욕심은' 그 말이오. 육체의 소욕이라, 육체의 소욕의 반대는 성령의 소욕이라.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의 욕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고, 육체의 소욕은 순전히 사람의 욕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데, 사람의 욕심은 성경에 말하기를 사망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고 망하는 것.
그런데 사람의 욕심대로 '하나님에게 구하고 의심하지 아니하고 믿기만 하면, 또 이미 받은 줄로 이렇게 여기기만 하면 그 일이 다 이루어진다.' 그러면 하나님은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의 소원 성취를, 이 사욕 성취를 해 준다고 이렇게 해석하는 해석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을 제일 속이고 망치는 하나님이라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소원을 다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면 아마 여기에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 죽어 버렸지. 다 망하고 다 죽어 버렸지. 그것이 사감 속에 있는 모든 소원이요 악독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이 무화과로 가지고 주님이 무화과에 대해서 행하신 일과 거기 대해서 말씀하신 그 말씀은 곧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장하셔서 무화과에게 시장 면하려고 오셨다.' 맨끝에 보면 '남의 죄를 사해 주지 아니하면 너희도 사함받지 못한다.' 이렇게, 사함이라는 것은 용서라 말이요, 해방이라 말이요, 죄에서 구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시장하시기를 무엇이 시장하신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내 먹을 양식은 여기에 있다' 하시고 그 양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 나의 양식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시장하시니까 주님이 시장하신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는 그 일에 순종하는 이 일에 대해서, 주님이 갈급하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갈급하시다는 것. 주님이 시장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낱낱이 순종 순종으로 이루어야 할 터인데 이루지 않으니까 시장하시고, 이루기를 원해서 지금 하신 그것을 또 무화과 나무를 가지고 보여 줬습니다.
와서 보니까 잎사귀 뿐이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 나무를 저주를 해서 뿌리로부터 말라 버렸습니다. 거기 말하기를 '무화과의 때가 안 되어서 그렇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무화과 열매 있을 때가 아닌데, 잎사귀만 있어야 할 때인데 주님이 거기 가 가지고 무화과를 구해 놓고 열매 없다고 저주해 버리니까 그것은 구하신 주님이 잘못이요 저주한 주님이 잘못이지 무화과 잘못이 무엇이 있다 말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깊은 구원 계시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타의 구원을 이루는 일을 행하고 이 일을 성공하는 이것이 주님이 잡수실 참 향기로운 제사요, 또 주님이 요구하시는 당신의 식물이요, '나 먹을 양식은 여기에 따로 있다' 말한 것같이 당신의 양식이신데, 주님이 이것을 구하실 때에 무화과의 때가 안된 것은 무화과의 그 형편으로서는 열매가 없을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이것만 위해서 땅위에 뒀습니다. 우리가 부자 되라고 둔 것도 아니고, 건강하게 살라고 둔 것도 아니고, 또 뭐 잘 먹고 잘 입으라고, 인간들하고 서로 친근하 라고. 아무것 때문에 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구속받은 자를 땅위에 두는 것은 자타의 구원 이루는 이 역사만을 위해서 땅위에 둬 뒀습니다.
이랬는데 이 역사는 주님이, 배 고플 때에 우리가 음식 사모하는 것처럼 주님은 이것을 자시고 삽니다. 이것이 기업입니다. 이래서 우리를 기업이라 이렇게 했소.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그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은 왜 맺지 못하느냐? 무화과 형편 따라서 맺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형편을 따르면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잎사귀만 무성했다고 미워서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때는 잎사귀만 무성하는 것이 그것이 무화과의 할 일이요 무화과의 본능입니다. 무화과의 형편입니다.
열매 없다고 저주받았는데, 우리 기독자들도 자기 형편만 생각하면 주님 원하시는 그 구속의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던 생활은 무슨 생활이냐? 잎사귀 생활입니다. 열매 없는 잎사귀 생활, 잎만 무성한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이 외모로 사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형편이요, 타락한 인간의 외모로 사는 것이 그것이 본능이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타락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끊어졌는데 하나님으로 더불어 연결된 그 역사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것이 뭐인가?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노릇만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타락한 인간이, 인간 자체로 말하면 그거 외에 할 게 뭐 있습니까? 인간 노름, 하나님과 진리가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 그것은 없고 인간들 끼리만, 모든 정치, 모든 사상, 모든 문화, 모든 사업, 모든 물질, 모든 과학, 이것이 성경에 '외모로 하나님이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외모로 '인간을 평가하지 말아라' 이것을 성경이 죄라고 정죄를 했는데 그 외모 그것이 뭐이냐? 내나 잎사귀입니다. 아무리 세상으로 볼 때에는 온갖 그 행위가 구비하고 원만하고 충만하고 세상에 제일 간다 할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시장, 주님이 시장하셔서 원하시는, 다시 말하면 주님이 취하실 것으로 원하고 계시는 구속의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다 저주받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 저주 받습니다.
또 열매를 맺었으면 그 열매는 주님이 따서 자셨을 것인데 열매 맺지 아니한 무화과나무는 당장 저주받아 가지고 다시는 못삽니다. '다시는 네게서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다시는 그만, 그러니까 죽어버렸다 그 말이오. 사람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시기 시기가 있는데, 그 시기에 열매 맺지 못하고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면 그 시기에 열매를 맺어야 할 그 요소는 영원히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어떤 좋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잎사귀만 되느냐? 그것이 열매를 맺었느냐? 열매가 없어 영원히 저주를 받느냐? 주님이 요구하실 그때라야 되는 것이지, 주님이 요구하실 때에 되는 것이지 주님이 요구하실 때가 아닌 무화과 때, 인간 형편 따라서, '뭐 지금 못해도 내일 하면 되지' 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고 요구는 한 시기뿐입니다. 가 보니까 없어니까 저주 해 버렸습니다.
주님 편에서 주님 편에 요구하시는 거기에 따라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렸지 무화과 형편은 하나도 보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형편은, 인간 편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 편에서 당신이 요구하실 때에 당신이 '이때는 이 말 해서 구속해라, 이때는 이 말 해서 구속해라' 하는 이것만이 성취할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지, 하니님이 요구하시는 그 시기는 내 두고 시기를 제 마음대로 정해 가지고 하는 것을, 또 형편을 하나님 형편을 따라서 정하시지 인간 자기 형편을 따라서 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인간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구속의 열매 이것만 주님이 필요로 하시고 이것을 가치로 삼아서, 열매가 있었으면 그 무화과 나무를 축복했을 것입니다.
'열매 있는 자는 더 가꾸어서 많이 맺게 한다' 그때에 열매 없으니까 잎사귀는 암만 무성해 봤자 다 저주받아서 덜해지고 말았다 그 말이오.
그러기에 인간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구비하고 뭐 운동이 뭐 몇백명 모았다, 몇백만명 모았다, 무슨 운동 세계가 어떻게 아무리 떠들어 쌓고 이래 쌓아도 성령과 진리가 직접 와 가지고 인간을 구속하시는 구속의 결과가 맺지 않으면 그건 다 잎만 무성한 것이기 때문에 다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참 네가 미지근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미지근하다 말은 덥든지 차든지 하면 당신이 자시겠다 그 말이오.
자시겠다 그말은 주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시장해서 오셨다. 먹으려고 오셨다. 생명이 시장해서 생명이 삼키려고 왔다.' 생명이 지금 생명 세계에 들어오라고 이래 했는데 이거 하니까 주님이 삼킬 그 무화과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참 생명에서 취하실, 생명에서 취하실, 주의 뜻을 행하고 온전히 이룬, 지금은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거 알아야 됩니다. 지금은 주의 뜻이 전적 인간을 구원하는 거기만, 그것만 주님의 뜻입니다.
그거 외에 딴거, 뭐 하나님께서 창조도 하시고 재창조도 하시고 섭리도 하시고 이 지금 보존도 하시고 유지도 하시지만 그것 뭐이냐? 그거 주님의 뜻 아니라.
그것은 주님의 뜻을 위해서 지금 그런 것들을 공작하시고 그것들을 구비하시고 대비하시고 하시는 것이지 주님의 뜻은 피흘려 구속하신 성령과 진리와 피,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이 역사하시는 지금 이 역사만이 주의 뜻입니다.
이런데 이 뜻이, 이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에 역사 이 세 가지가 하나인데 이 셋이 역사하는 이 역사가 들지 않은 것이면 억만명 모았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숫자만 본다 그 말이오. ○○○이 암만 모아도 소용없소. 그 사람이 아무리 세상으로 아주 모든 일이 구비해도 그것이 뭐이요? 그것이 열매입니까 잎사귀입니까? 지금 이 배우는 대로 그것이 열매입니까 잎사귀입니까? 잎사귀, 잎사귀인데 거기에 열매가 있으면 그 잎사귀가, 잎사귀 그 뭐 하려고 있었느냐? 저주했겠소? 열매가 있었으면 그 잎사귀가 축복을 받았겠소 저주를 받았겠소? 축복받지. 잎사귀만 있으니 그렇지. 아무리 외모 그것이 구비하다 해도 성령과 진리의 역사가 속에서 해 가지고 그 결실이 없으면, 열매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 열매 결실은 뭐이냐? 하면 자타의 구속을 성취하는 그것만 이 열매라 그 말이오. 이거 없으면 그거 다 저주받습니다. 하나님이 분히 여기시오.
그 이튿날 제자들이 가다가 보니까 말라 버렸습니다. '아이구, 어제 주님이 저주한 무화과가 말랐습니다.' 그 제자들이 무슨 생각 가지고 했는지 그거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런 두 가지 생각을 가지지 않았겠느냐? '주님이 저주하시니까 그만 이렇게 버쩍 말랐다. 무화과 때가 안됐는데 열매를 요구하다가 무화과를 저주를 해 버려서 너무 주님 하시는 일이 좀 무자비하다.' 그런 생각도 가졌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주님이 무화과에 대해서는 너무했다' 하는 그런 생각과 그 두 가지 생각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을 우리가 추론 추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가 말랐나이다.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이렇게 뿌리로부터 말랐나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주님이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말랐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어라' 첫째 말이 '하나님을 믿어라' 이랬다 말이오.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거기에서 해석이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어라 하니 하나님을, 제자들 벌써, 제자들이 속에 주관 관념은 '이 무화과 나무가 저주하니까 저주가 되어버려 말랐다.' 예수님이 거기 대해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어라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면 무화과나무도 저주하면 저주가 되어서 마르겠고 어떤 미운 인간도 저주하면 당장 절단이 나 버리겠고 이렇게 한다' 그것으로써, 제자들은 지금 주님의 권능을, 그 말씀하신 대로 주님이 한번 성내면 그대로 된다는 여기, 지금 그 마음만 가득 차 가지고 있는 제자들인데, '주님이 저주하면 그만, 이래 저주함이 있으니까 그만 이렇게 버쩍 말랐습니다.' 이렇게 그것만 가득차 가지고 있는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어라"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어라"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떡 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미운 것은 다 절단 낼수가 있고, 마음에 제 비위에 맞지 않은 것은 다 절단 낼 수가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무화과 때가 안됐고, 무화과 때로 말하면 그게 무화과 저희 때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 없는 것이 그게 옳은 것인데 당신 마음대로 안된다고 저주를 탁 해 가지고 바짝 말라 버리고 이거는 시비를 해도 예수님이 져야 할 것이라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게 자연법칙에 맞았는데 왜 그러냐 그 말이오.
이것이,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공평된 이치가 아닌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이 도리의 하나, 구원 도리를 나타내는 도구로, 기관으로, 물질로 사용하셨다 그거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나님을 믿어라' 해 놓고, 그다음에 지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하시고 난 다음에 '네가 너희가 이 산을 바다에 옮겨 이 산릉 없어져서 평지가 되어지고, 밉상스러운 토지도 개간 못하는 그 산은 저 바다에 던지워져서 없어지고 다 광야가 되는 이것도, 산이 바다에 옮기진다는 그거, 옮겨지라고 말 하는 그것이 그게 될리가 없지만 의심 안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거요.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을 믿기만 하고, 이루어 주실 것을 의심 안하고 믿기만 하고 이러한다고 하면, 된다고 하면 그거 뭐 토지 개간하기 문제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첫째 대답이 '하나님을 믿어라' 하는 말씀을 해 놓은 여기에 이것이, '하나님을 믿어라' 하는 이 말씀이 원 강령이요, 줄이요. '하나님을 믿어라'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어라 말은 하나님은 어떤 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따르라. 그를 따르라 말 아닙니까? 하나님 믿어라. 하나님이 어떤 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따르라. 하나님을 따르라. 어떻게 따를까요?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말씀해 놓으신 그것을 인정해라. 그대로 따라라.
하나님이 영감시켜 주시는 그대로 따라라. 인정해라. 이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네 지식은 다 바꾸어라. 너는 인정해 라.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했으면 그런 분으로 인정해라. 인간은 이런 존재라고 했으면 인간은 그런 존재로 인정해라! 하나님 외에 인간들이 천만으로써 주장을 해도 그 주장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주장을 네가 따라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피동되라. 하나님에게 순종해라. 그말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으라' 그말이 아니오?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데 어쩌라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에게 피동되라 네 언행심사는 하나님에게 피동되고 하나님만 따르고 다른 것에게 네 주장도 세우지 말고 누구의 주장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라.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믿어라 이 산이 떠서 바다에 던지우라 네가 말을 하고' 그러면 그 말은 하나님을 믿는 말하라 말 아니오. 이게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지금 모든 이 성구 해석들이 영 틀려서 사람을 죽이는 역사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라디오 방송을 듣고 이 설교를 들었으면 이 설교를 했을지 모른다 그 말이오. 인정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 말이오. 그러면 벌써 하나님과는 떨어져서 죽었다 말이오.
'이 산을 떠서 바다에 심기리라' 이 큰 말을 했는데, 이 큰 주장을 했는데, 이 큰 말을 선포했는데, 선포하는데 이것을 제 욕심대로 선포하라 말이오. 성령의 욕심대로 선포하라 말이오? 이것을 제가 독립으로, 주관으로 이렇게 하라 말이오. 하나님에게 따르는 객관으로 하라 말이오? 이게 무슨 말이겠소? 이거부터 판단하십시오. 이 무슨 말입니까? 자, '하나님을 믿어라. 무화과 나무가 이렇게 저주하니까 말씀대로 됐습니다.
말씀대로 됐습니다. 저주받아 말랐습니다. 너거도 하나님을 믿어라. 이 산을 옮겨 바다에 심기라고 말을 해라. 말을 하면' 다른 성경에 보면 '말을 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뽕나무를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해라. 그러면 네 말대로 되리라' 그랬다 말이오. 여기에는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했습니다. 이 믿음이 뭐입니까? 믿음이,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주관을 주체로 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자, 무엇이든지 해 놓고 의심하지 않고 믿어지기만 하면, '의심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그러면 그것은 무슨 행위입니까? '이 산을 옮겨서 바다에 심기우라 이렇게 하고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바다에 이 산이 옮겨져 가라 하는 이것은 주관입니까 하나님의 뜻인, 자기로서는 객관에 순종한 것이겠습니까 자기의 단독이 자존성을 가지고 자기가 주장한 자기 주장이겠습니까? 이것이 자기 소욕이겠소 하나님의 소욕이겠소? 자, 이것이 자기 소욕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소욕일 수도 있지. 자기 소욕인데, 자기 소욕인데 자기 소욕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그것을 믿고,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자기가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까요? 하나님의 소욕을 따라서, '너는 하나님을 따라라. 하나님을 믿어라. 너는 하나님에게 피동된 자로 살아라.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살아라.' 선포했으니까 그 다음에 이렇게 어려운 일, '산을 떠서 바다에 심기우라 하는 이 말을 해라.' 그러면 하나님에게 피동이면 이 말을 하라, 하나님에 피동으로 이 말을 하라 했겠소 하나님에 피동이 아닌 네 능동으로 이 말을 하라 했겠소? 한번 대답 해 보십시오.
'능동으로 이 말을 해라. 능동으로 이 말을 해라. 능동으로 이 말을 해 능고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네가 확실히 섞인 것 없이 믿기만 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 그렇게 한 말입니까? 그러면 자기 주관을 얼마든지 하나님에게 요청하고 해 줄 걸 믿기만 믿으면 다 해 주시겠구만요? 이러니까 사람을 전부 사기꾼, 도박꾼, 허욕쟁이, 순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의 그 마음을 만배나 천배나 만만배나 더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 아니겠소? 뭐이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래 가지고 사람들을 전부 허욕되게 만들고 허욕쟁이가 생겨 놓으니까 기독자에게 진실이 없습니다. 전부 잎만 무성해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라, 저주받을 것만 자꾸 만듭니다. 그거나 그거나 내나 마귀 역사요.
여기에 성경에 보지. 자연스럽게 해석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어라' 했으니 하나님에게 피동되라 말 아닙니까, 더 섞인 것 없이? 하나님께 피동되라.
하나님께 순종해라. 하나님을 따라라. 하나님을 따라라. 하나님을 따라라 했는데, 하나님을 따라라 했는데 '하나님을 따를 게 아니라 내 욕심 하나 내 놓겠소. 태산 같은 욕심 하나 내 놓겠소.' '그래도 믿으면 의심만 안 하면, 해 줄 걸 믿기만 믿으면 해 준다.' 하나님을 믿어라 했는데, 이 사람이 자기가 산을 옮겨서 바다에 심기워지라는 이 말을 한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라고 해서 했어야 믿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말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제 단독이 제 욕심으로 제 주장으로 이렇게 말했으면 믿음이 되겠습니까? 어느 게 됩니까? 어느 것이 되겠소? 제 욕심대로 했으면, 하나님을 믿어라 했는데 이것이 하나님 믿는 것이 됩니까? 이걸 모르면 안 돼! 지금 아직도 여러분들에게 지금 분석이 안되는 모양이라.
'하나님을 믿어라' 말은, 믿음의 정의가 틀려서 그런데, 자기가 인정만 하면 된다 하는 그말인데, 그렇게 사람들이 정의를 내는데 그게 아니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좇으라 말이오. 하나님을 닮으라 말이오. 하나님을 배우라 말이오. 하나님을 따르라 말이오. 제 주장 세우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라 말이오.
하나님에게 피동되라 말이오.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믿어라.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믿지. 하나님을 믿지. 자기의 주관과 능동과 사욕이라는 그런 것은 다 버리라! 주님의 소욕으로 네 소욕 삼고, 주님의 주장으로 네 주장 삼고, 주님의 소원으로 네 소원 삼고, 주님의 뜻으로 네 뜻 삼고, 주님의 사상으로 네 사상 삼고, 주님의 지식으로 네 지식을 삼고, 주의 형상으로 네 형상 삼고, 순전히 부인하고 주를 따라서 하라는 그 말씀을 첫째 해 놨는데 그 뒤에 '하나님을 따라라' 하나님을 따를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따라라. 이 산을 옮겨 바다에 심기우라 말하면' 그러면 그 말을 하나님을 따라서 그렇게 말하라고 주님이 시킨 말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집어 던져버리고, 하나님 내비두고 제 욕심, 제 주장, 제 능동, 제 주관, 제 형편, 제 사정대로 그런 것을 구하라 말이오. 하나님을 따라서 그 말을 하라 말이오? 해석이 어찌 됩니까? 하나님을 따라서 하라 말 아니오? 하나님 믿으라 했는데 믿으라고 한 바로 즉시로 '하나님을 따라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따라라 하나님께 피동되라' 했는데 하나님께 피동되지 아니한 다른 행동을 하라고 주님이 시켰으면 주님의 이 교훈이 모순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여러분들이 이게 믿어져야 된다 말이오. 이게 믿어져야 되지 마구 그 설교를 해놓고 막 그러니까 영 막 불뚝 불뚝 하는데 이러니 이것이 되느냐 말이오.
되기를? 왜 이래 거짓부리자들이 되느냐 그 말이오. 되기를? '하나님을 믿어라. 이 산이 옮겨 바다에 심기워져라, 바다에 심기워져라, 바다에 던지워져라 말을 하며'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 말을 해라' 그말은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이 말을 하라 말입니까 하나님에 피동이 아닌 제 독단으로 하라 말입니까? 주님이 하라 말은 무슨, 말이겠소? 하나님에 피동으로 말하라.
하나님에 피동으로 말하라. 하나님이 시키시면 산을 옮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래 말하라고 이렇게 네가 할 때에는 산 옮기는 거는 그까짓 거는 내비 둬 버리고 지구 땅덩어리가 없어지는 것도, 우주가 없어지는 것도 말하고,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하나님이 하라는 것이면 너거 보기에는 어떻게 어려운 것이라도 하나님이 하라는 것이면 하고,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 믿음이라는 그것은 객관의 순종으로 살라는 말이오. 자기가, '믿고' 하는 것은 주관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까 객관의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까? 객관의 순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의심치 아니하면' 의심은 무엇입니까? 의심은 하나님이 의심하라 했습니까? 하나님에게 순종입니까 자기는 자기 주관입니까? 주관이오 객관이오? 주관이지요. 그거는 피동입니까 능동입니까? 능동이지요. 능동만 나타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그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없다.
작아도 커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대로 네가 하라.
하고, 그대로 하고, 하면서도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만 너에게 있게 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만 너희에게 있게 하고, 하나님에,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으로로만 네 전 뭉텅이가 되어지고 네 주관을 나타내지 않도록 해라. 의심 그놈이 안 된다. 네 주관이 거기에 섞이면 안 된다. 네 주관은 거기에 용납지 말아라. 하나님께 피동으로 발원된 것이, 피동으로 진행되는 것이, 피동으로 시발된 것이 피동으로 진행되는 것이 피동으로 결과를 맺을 터인데 피동으로 결과를 맺기까지 너의 주관이라는 것을 거기에 용납지 말아라. 그러면 다 된다.
네 주관만 용납하면 안된다. 이것이 여기에서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왜 이 산을 옮길 만한 이것을 말했습니까? 하나님에게,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을 따라 살아라. 하나님께 피동으로 해라, 하나님의 소욕에 따라서 움직이라. 이렇게 할 때에는 하나님의 소욕이, 하나님이 너에게 명령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네가 그대로 행할 때에, 산이 옮겨져 바다에 던지우는 것 이것은 절대 안되는 일이라고 인간들이 알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니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도- 네가 볼 때에 이렇게 어렵고 이것은 안될 것이라 이래 보여져도 전적 하나님에게 피동으로만 되어지고 네 주관이 섞이지 아니하면 이것은 이루어진다 그말입니다.
이게 이해가 됩니까? 이게 이해가 잘 안되는 겉 같은데, 모두 보니까,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에게 전적 피동으로만 네가 살아라. 피동으로 살 때에 이렇게 어려운 피동이라도 전적 피동으로만 되고 네 주관이 거기에 들지 않으면 성공된다. 그 피동에, 어떻게 어려운 하나님의 피동,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어떻게 어려운 것이고 큰 것이라도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피동만이면 그 일이 성공이 되고 피동에 자기 주관이 섞여서 피동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피동을 반대하면 거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엉뚱스러운 말씀 같은 것 또 해 놨습니다.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은 줄로 알라' 그러면 이 기도는 무슨 기도라 말이오? 하나님을 믿으라는, 거기에 하나님을 믿는 데에서 하나님을 믿는 기도를 말합니까 믿음을 떠난 기도를 말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기도를 말한 것입니다. 믿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한 그 기도라면 그거야 으레 이루어지지. 으레 이루어 놓은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는 우리가 구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할 것을 알려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기도를 해야 되지 믿음의 기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믿음이라는 이 정의를 '믿사옵나이다 하면 된다' 하는 이 아주 사람 죽이는 이거 모두 다 불파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주관을 주장하는 도이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어라' 믿음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그 믿음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니까 네 욕심대로 구하라는 그 말이겠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그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구하라 그말이겠소? 기도는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둘이 기도할 때에, 의논할 때에 자기뜻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하고 의논하는 것인데, 자기에게 하나님을 복종시키려는 그것이 기도입니까 하나님에게 자기가 복종하려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뭐이지요? 이것이 진리요 교리라. 옳은 것은 천하 학자들이 반대해도 눈도 꼼짝거리지 않아.
마귀가 많으면 뭐 할 것이오? 세상이 많으면 뭐 할 것이오? 하나님과 진리가 우리는 두렵고 그 앞에 떨리고 그 앞에 복종하는 것이지. 네가 믿음으로 한 기도는,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한 기도는,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는 그 기도를 하는 그 기도는 했으면 다 이루어질 줄로 믿어라. 받은 줄로 믿어라. 자기는 기도하고 죽어도 그거는 이루어졌지. 죽고 난 다음에 이루어지지. 틀림없이 이루어지지. 만의 만이 다 이루어지지 어찌 안 이루어지겠소? 우리가 하나님이 기도하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까?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으로 하나님께 피동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책임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비밀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니까 알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것 하나님이 허락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쉽다 그거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내 욕심 이루려는 그런 것을 버리고 '주여, 내가 무엇을 구하오리까? 내가 어떤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려고,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기도를 하려고, 하나님께 순종이 되는 기도를 하려고, 자기 나름대로의 성경 지식을 나비어 보면서, 또 성경 지식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요 마음만 가지면 대충 알 수가 있다 그 말이오.
왜? 그말 해놨소? '너거가 남에게 요구하는 그대로 네가 남에게 해라. 너거가 남에게 요구하는 그대로 하나님에게 해라.'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라 말이오.
성령의 마음이라 말이오?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 말이오.
그런데 이것이 뭐이요? '모든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다 알게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알게 되어 가지고 있소. 알게 되어 가지고 있는데 왜 모르느냐? 자기 욕심이 들어서 모르게 하는 것이지, 이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이렇게 하면 성경은 몰라도 자기 생각으로 '이것을 구해야 되겠느냐? 이것는 사욕이니 이거 하나님 참말로 소원하시겠느냐? 하나님의 소원이냐 내 소원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내 뜻이냐?' 성경을 아는 사람은 더욱 정확하게 맞출 수가 있을 것이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기도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 뜻과 대립이 되어 우리 뜻을 박살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이것을 알면 기도할 제목을 안다 그 말이오.
'아, 이 기도는 하나님이 이 기도는 하라고 하시는 기도다. 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이거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상달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옳은 기도다, 바른 기도다.' 하는 걸 자기가 알 수 있다 말이오.
판단할 수 있다 말이오.
'그런 것을 기도해라. 그런 것을 기도하고는 그것은 벌써 네가 이룬 걸 보지 못하고 죽어도 아브라함과 같이 네가 죽고 난 다음에도 이루어질 것이니까 이루어진 줄로 믿어라' 이렇게 말씀해 놓고 마지막에 결론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느냐 하는 것을 결론을 지워 놓았습니다.
'자타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구속하는 이 일을 해라' 하는 것을 결론으로 마지막에 해 놨습니다.
이러기에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를 벗기고 벗기고 그 속에 알맹이에 들어가서, 성경은 다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모퉁이만 말했고, 저기는 저 모퉁이 말했고, 마치 여기서는 코끼리 발만 말했고, 저기는 코끼라 귓때기만 말했고 말해도 그걸 잡고 들어 가면 내나 코끼리라 말이오. 어디를 잡고 들어가든지 코끼리를 만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이런 각도로 말씀하시고 저런 각도로 말씀하셔도 각도 그걸 떼놓으면 안 된다 말이오. 그 각도로 말씀했는데 그 각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체 도에 들어가면 이제 이것이 바로 깨달아지는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안하고 마느냐 하면, 그거 설교를 해도 자기 욕심대로 '사람들을 믿어지게 만들자.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자.' 자기 소욕대로에 치우쳐 가지고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완전히 하나님의 도가 탈선이 되어서, '이리 저리 다 치우쳐 모든 것이 무익한 것이 됐다, 치우쳐 무익한 것이 됐다.' 그 말은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나 내나 마귀 주장하는 것이나 이것이 다, 올라가서 치우친 것,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 왼쪽으로 치우친 것, 밑으로 내려가 치우친 것, 어떤 것은 너무 열심으로 지나가 치우친 것, 게을해 치우친 것, 자기 욕심이 너무 많아 치우친 것, 자기 욕심을 전혀 부인해서 치우치는 것, 인간이 소욕을 하나도 가지지 않아서 치우친 것. 왜 인간이 소욕을 안 가지면 됩니까? 하나님께 대한 소욕을 우리가 영원히 가져야 된다 그 말이오. 세상을 버리라 하니까 세상이 없어도 됩니까? 세상을 버리는데 어째 버립니까? 자기 사욕대로의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세상으로, 보배로운 세상으로 가져야 한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근거하고, 성경을 체계있게 근거하고, 성경을 통해서 깊숙해서 나타나시는 영감을 근거해 가지고, 이것이 순전히 객관 역사인데, 이것이 순전히, 전적 자기를 부인하고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이오?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욕심을 막 태산 같은 욕심이라도 욕심을 부리고 '의심만 안 하면 이루어진다.' 그러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제자 되지 못한다는데, 이랬는데 이런 욕심을 막 가지고 소원 성취하는데 이래도 다 들어 주시는데 '있는 걸 다 버려야 된다.' 그 성구가 어떻게 됩니까? 눈이 어두워서 한 말 들으면 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면 그리 쑥 따라가 버리고, 저러면 저리 쑥 따라가 버리고, 여러분들! 성경은 어떤 말씀이더라도 전 성경이 한 책입니다. 어디든지 모순되면 안 됩니다.
그런고로 말세에 귀를 즐겁게 하는 자기 소욕을 좇는 이 교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삼가야 됩니다. '소욕을 좇는 많은 스승을 뒀다.' 여기도 가니까 사욕 달성시키는 선생, 저기도 사욕 달성시키는 선생, 그러니까 좋고 기쁘고 춤추러 뭐하러 와? 거기 가면 더 좋은데? 세상에 가 가지고 아둥거려 싸우는 것보다 거기 가니까 온 세상을 당장에 점령하겠는데, 그러나 되어지나 안 되어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실패하고 만다 말이오. 다 흩어지고 맙니다.
그런고로 신앙이라는 것은 처음에부터 끝까지 진실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쩌든지 그 좀 지식 자랑하지 마십시오. 언변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기 공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지난밤의 그 말씀이 심판입니다. 그대로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대로 되어져요. 다윗 같은 왕이 실수했는데 우리가 실수 안 합니까? 우리가 무슨 역사든지 역사할 때에 눈에 보이는 그것을, 그것의 가치는 점점 커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치는 점점 까부러집니다. 그것이 저주받을 것이오. 7년 흉년이나 3개월 도피나 3일 동안 온역이나 그거 저주받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무엇이든지 부인해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 세상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교한 그것이, 순교한 죽은 것, 순교한 것 죽은 것, 죽은 것 그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 입니까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입니까? 죽은 그것이, 죽은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죽었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첫째아담에 속한 것이 둘째아담에게 소속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러니까 죽은 것이 살아났는데 살렸으니까 감사할 것뿐이지 제가 한 게 뭐 있어 자랑할 것이냐 그 말이오. 깊이 깨달아야 돼, 외식하지 말고. 도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사울왕같이 해 가지고 버림당하고 버림당하고, 여기에서 버림당하고 난 다음에 이제 회개하니까 또 하나님이 또 듭니다. 또 하고 난 다음에는 또 사울같이 기념비 세우고 야단지기다가 또 버림당하고 그러다가 보면 다 세월 지나가 버리고 나중에 간판이 붙어 버립니다. 간판이 붙으면 그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지 말아야 돼요
오늘 장래식이 있습니다.
아홉시에, 차가 이리 옵니까? 아홉시에 차가 옵니까 그리 갑니까? 이리 와서 간답니다.
이분의 신앙이 좀 잘못됨이 있어서 그 남편이 애를 쓰다가 고만 결국 고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부인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져 버렸습니다.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져 가지고 아주 사람 보면 잘 믿는 것 같고 예언하고 무엇하고 막 이런 것 같지만 그게 틀렸다 그 말이오.
암만 틀렸다고 말을 해도 안 들어, 그게 다 뭐이냐? 이렇게 허영 되도록 말한 데 가 가지고 척 한번 그만 삶겨져 놓으면 못 일어나요. 그만 정신이 획 돌아버린다 말이오.
여기서도 지금도 내가 보고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걸 그래 하지 말라고, 여기 지금도 있는데, 하지 말라고 해도 그걸 안 가서 자기 주관대로 해 댑니다. 얼마 안 하면 잘못하면 그대로 나가면 뒤에 가서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되어 가지고 참 비참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