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22:21
믿는 사람이 되자
1988. 1. 25. 새벽
본문:야고보서 4장 13절∼17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요사이 우리가 늘 공부하기를 둘을 보고 살라 그렇게 늘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짝 없는 것이 없으니 언제든지 마귀는 하나만 보고 살도록 이렇게 우리를 유혹하고 하나님은 둘을 보고 살도록 우리에게 항상 경성시키시는데, 우리는 지금 제대로 다 살아 있습니다.
이러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도 ‘내가 그래도 살아 있으니 몇 해야 더 살지 않겠나?’ 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나는 젊기 때문에 그래도 보통 칠십이라면 나는 몇 해는 살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또 건강한 사람은 ‘내가 건강하니 다른 사람들이야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건강하기 때문에 생명이 아직 쨍쨍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자기 형편과 처지가 ‘복잡한 일 많은 책임들을 다 짊어진 가족들이 있고 또 사정이 이러니 지금이야 죽겠나?’ 이렇게 모두들 다 생각해서 살아 있으면서 이 죽음이라는 이것을 같이 생각해야 될 터인데 이것을 같이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 여기 말씀하시기를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일 년 동안 장사하면서 이익 얻겠다. 또 몇 해만 하면 지금 대학을 졸업맡는다. 또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한다.
이렇게 하는 이것은 다 성경에 말하기를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허탄한 자랑을 자랑한다 그말은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을 한다 그말이오. 자랑한다 말은 주장한다 말이오. 자랑한다 말은 주장한다 말입니다.
근거 없는 네가 주장을 하고 주장만 할 뿐 아니라 그걸 가지고서 네가 담대히 지금 의지하고, 그걸 의지하고 네가 뽐내고 있다. ‘허탄한 자랑을 자랑한다’ 아무 근거 없는 그것을 가지고 네가 주장하고 담대하고 그것을 가지고 네가 배짱을 내고 있다 그말이오.
자랑한다 말은 주장한다, 의지한다, 그걸 가지고서 네가 배짱을 낸다 그말입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자랑하니」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나는 젊기 때문에 아직까지 죽지는 안한다. 살 날이 멀었다. 강건하기 때문에 살 날이 멀었다. 또 나는 사정이 이렇고 이러니 살 날이 멀었다. ’ 이렇게 너희들이 말하는 그것이 다 근거 없는 일이다. 네가 무엇을 근거해 가지고서 나는 젊으니 아직 멀었다 나는 건강하니 멀었다 이렇게 네가 주장하고 있느냐? 그것은 다 허탄한 자랑이다. 근거 없는 주장이요 근거 없는 배짱이요 근거 없는 의지다.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 이것은 네 중심에서 나온 자랑이지, 네 중심에서 나온 자랑이지 네 생명은 하나님에게 주권되어 있는데 네 생명을 좌우하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그 말씀이 맞지 네 생명은 하나님이 주권하시고 네게는 주권이 하나도 없는데 너는 네 생명에 대한 주권이 하나도 없는데 네가 들어서, 나는 젊으니, 나는 건강하니, 나는 사건이 있으니, 나는 복잡하니, 중대한 입장에 있으니, 또 나는 좋은 형편 사정에 있으니 나는 안 죽고 오래 살겠다.
어리석은 자야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 네 중심에서 나왔지, 너를 근거해 가지고 나왔지 그것은 너는 생명에 대해서 털끝만치 권리 없는 네가 네 주장으로 말하는 것이지 네 생명을 주권하고 계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네가 건강해도 오늘 뒈질지 모른다. 젊어도 모른다.
그러기에, 사람이 자기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음이 같이 있다는 이것을 모르는 그것이, 인간의 지혜 중에 이게 둘째 지혜입니다, 둘째 지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자기를 아는 것이 둘째 지혜라. 자기는 생명의 권리가 없어. 무슨 일이 날란지 몰라. 「악한 것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네가 하나님 중심으로,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그 모든 것이 다 영생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을 네가 알고도 행하지 안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니라」 「잠간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니라」 그 모든 육체를 가리켜 말합니다. 아주, 안개라 말은 이것은 그 형태를 말하는 것인데 잠깐 보이다가 고만 흩어져 버립니다. 그만 사라져 버려요.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 버려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정당한 말을 할라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 수 있고 하루도 이틀도 일 년도 살 수 있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몰라요. 주님의 뜻이면, 내가 아마 이 가운데서 나이가 제일은 많은지 몰라도 거의 많은 축에 갈 터인데 이래도 내가 여러분들보다 내가 뒤에 죽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나보다 앞에 죽을지 몰라. 나이 많다고 일찍 죽고 젊다고 늦게 죽는 것 아니오.
건강하다고 늦게 죽고 약하다고 일찍 죽는 것 아니오. 요것을 알아야 됩니다.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주님의 뜻이면 이것 저것 하겠다. 이래서 사는 것도 주님의 뜻이면 이 시간 살 수 있고 주님의 뜻이 아니면 이 시간이라도 죽을지 모른다. 이제 주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이 자기의 생사 화복을 주님이 주권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믿음인데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주권은 전부 제가 가졌소.
사는 것도 제가 주권 가져서 제게 매였고 성공하는 것도 제게 매였고 부자되는 것도 제게 매였고 출세하는 것도 제게 매였고, 제게 매인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그거 하면은 다 되는 줄 압니다.
공부하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고 부지런히 날뛰면 되는 줄 알고 어떤 자는 속여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라도 그것만 달성하면 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다 허탄한 주장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젊어도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됩니다. 뭐 건강합니까? 자기는 오늘 내가 죽을지 모르는 그것을 생각하고 오늘 죽어도 제일 큰 문제, 주님 앞에 심판 문제가 다 정리돼 가지고 있도록 하는 것이 첫째 중요하고, 또, 오늘 죽어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관련되어 있는 그 일에도 후회할 것이 없이 다 정리해 놓고 사는 것이 옳고, 자기의 그 하는 일은 언제 끝날지 모르나 나는 그저 오늘 죽어도 죽는 그 시간까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그런 일을 택해 가지고서 할 일이지 ‘오늘은 죽지 안할 터이니까 이 일은 한다. 오늘은 안 죽으니 내가 아직까지 죽지는 안할 터이니까 한다. ’ 아직까지 죽지 않는다고서 생각하고 하는 일 그 일은 전부이 후회할 일이요 다 그 일은 전부 자기에게 다 해독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죽어도 이 일은 해야 된다’ 그 일만 해도 우리에게 많습니다.
‘오늘 죽어도 해야 될 일이다’ 그러면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도 `내가 오늘 죽어도 내 시대에는 내게 대해서는 이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공부해야 된다’ 공부하는 것도 ‘오늘 죽어도 공부는 이거는 내가 할 일이다’ 깨닫고 하고 사업하는 것도 다 그렇게 하고, 이러니까, 오늘 죽어도 내가 후회 없이, 공부는 자기 직업이니까 하지마는서도 이 공부하는 데에서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은 그 공부하는 걸 안 하고는 안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렇지마는서도 구원 떼놓고, 죽어도 해야 된다는 그런 것 어디 있어, 죽어도? 죽는다 할지라도 해야 된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 죽어도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죽을 일이라. 하다가 죽는 게 옳은 일이라’ 이렇게 생각이 되는 일은 하지마는서도 ‘내가 오늘 죽어도’ 이 죽는 데 필요 없는 일이라도, 죽는 데 필요 없는 일, 오늘 죽을 줄 안다면 이런 일 할 필요가 없다. 죽음에 필요 없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 필요한 일만 우리가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라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니라’ 하는 그말은, 믿음으로 한다 말은 자기가 공부를 해도 ‘나는 이 공부가 아니면 내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나는 공부하는 여기에서 조심도 기를 수 있고, 주의도 기를 수 있고, 공부하는 여기에서 내가 연단도 받을 수 있고, 공부하는 여게서 진실도 기를 수 있고, 정직도 기를 수 있고, 또 여게서 의도 기를 수 있고, 거룩도 기를 수 있고, 덕도 기를 수 있고, 내가 여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본을 보이는 모본도 기를 수 있고 내가 여기에서 모든 걸 기를 수 있고, 또,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데에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고 자기 그 현실의 생활에서 구원 이루지 그거 아닌 데 딴데서 뭐 이루겠습니까? 이것이 아니면 우리는 안 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거는 그렇게 쉬운 것 아니요. 아무나따나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모든 세상 사람의 살이에서는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은 생활해 가지고 구원 이룰 줄 알지마는 아니오. 안 믿는 사람들 생활과 우리 생활은 완전히 딴 종류요 딴 성질이요 또 딴 방편이요 딴 소속이요 딴 소망이요 딴 성공입니다.
전부 다른 줄 알아야 되지 이거 안 믿는 사람 생활이나 믿는 사람 생활이나 우리는 같이 생활하고 예수 믿는 것만 다르다 하는 것은 그 사람 예수 믿지를 안하는 사람이요, 껍데기 중에 껍데기로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 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같이 있어도 모르는 생활입니다. 그들은 모르는 생활이오. 성질이 다르요. 법칙이 다르요. 소망이 다르요. 소속이 다르요. 목적이 다르요. 그에 대해서 주는 힘이 다르요. 또 그에 대해서 성공이 다르요.
이러기 때문에, 분석을 하면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생활과 믿는 사람이 믿음 생활하는 거는 전혀 다릅니다. 껍데기만 같지 껍데기를 똑 떼고 보면은 속은 전체가 다르요.
이러기 때문에, 한자리에서 둘이 누워 자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두 여인이 같이, 팔레스틴에는 매 가는 것은 그래 갈아요.
하나는 위에 손 쥐고, 혼자 갈면 되니까. 하나는 위에 손 쥐고 하나는 밑에 손 쥐고 둘이 장 이래 돌아갑니다, 둘이. 이러니까 이라면서 떠넣고 하니까 그거야 뭐 붙어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라는 데에도 하나는 멸망받고 하나는 구원 이룬다 그말이오.
한 밭에 둘이 일을 하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한 밭에서 둘이 일하는데 하나는 멸망을 만들고 있고 하나는 구원을 만들고 있어.
껍데기야 꼭 같지. 껍데기는 꼭 같애. 같지마는 속에 알맹이는 달라. 목적이 다르고 소망이 다르고 계획이 다르고 방편이 다르고 피동이 달라.
어데 지금 피동 돼서 하느냐? 옆에 그자는 돈에 피동돼서 하고 인간에 피동되어 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게 피동돼 해. 그게 신앙 생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앙 생활해서 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 생활하는 것을 세상 사람이 보고는 저거 아주 제일 천하에 나쁜 놈이다 하는데 그 사람이 천하에 제일 의인일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어! 이러니까, 이렇게 그 힘드는 생활 내가? 힘드는 생활이 아니라. 그 생활이 인간이 껍데기로 보기는 힘드는 것 같지마는서도 속으로는 그 생활이 평안해.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이 생활이 될 때에는 다른 사람은 위험하다 불행하다 하지마는서도 속에는 만족하고 이 생활이 안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이 ‘하이고 참 형통이요 성공입니다. 아주 복이 있습니다. ’ 해도 그 속에 근심이지 평강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이런 것을 하나라도 실천을 해야 알아지지 그리 안 하면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사는 것과 죽는 것, 그것이 같이 있어서 삶도 생각하고 죽는 것도 생각하고 그 둘을 생각할 때에 고 새에서 생명 생활이 바로 나오고 바로 깨달음이 바로 나오고 바른 지혜가 바로 나오고 바른 욕심이 바로 나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둘이 한테 붙어 있으니, 요 내가 살아 있는 삶과 내가 오늘 죽을지 모르니 살고 죽는 요 둘을 한테 붙여 놓고 생각할 때에 고 둘을 생각하는 고 새에서 쪼끄매씩 쫄쫄 흘러나오는 그 생수가 있으니 고게 뭐이냐? 바른 지혜요 바른 생각이요 바른 욕심이오. 그게 믿음의 욕심이라. 하나님이 시키는 욕심입니다. 성도의 욕심이오.
죽는 거는 잊어버리고 사는 것만 생각하고 나는 욕심 그 욕심 다 자기 속이는 욕심이요 마귀가 주는 욕심입니다. 죽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가 살아 있는 그거 생각지 안하고 하는 그것도 다 마귀가 주는 생각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둘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이번에 그걸 많이 공부를 했는데도 거게 대해서 느끼는 사람들이 참 있으면 좋을 터인데 평생 죽을 때까지 목사노릇 해도 여게 대해서 생각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많은데 이걸 이렇게 많이 말을 해도 오히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듣는데 장성한 사람들은 듣지를 못해.
왜 그렇습니까? 씨뿌리는 비유로 말하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듣지 못하고 나이 많은 사람 중에도 더 듣지 못하는 것은 유식한 자가 더 듣지 못하고 오히려 젊은 사람들 어린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더 잘 들어. 그거는 뭐이요? 그라면 나이 많은 사람 못 듣는 그거는 비유에 뭐이라고 비유했습니까? 길바닥이라, 길바닥. 길바닥 되어 있는 밭이라.
그 아이들은 다섯 살 여섯 살 먹는 그런 것들이 신앙이 있어. 내가 엊저녁에도 말 들었는데 여섯 살 먹는 아이가 자기가 아파서, 동생이 지금 딴데 갔는데 그래 그 아이가 자꾸 자기 구역장 소리해 가지고서 좀 기도해 달라고서, 자기 구역장 소리해 가지고서 기도해 달라고 이래 쌓는데 또 마침 그 구역장 되는 사람이 아팠더래요, 또. 아파 가지고서 가지 못하고 이제 전화로 기도해 주니까 그렇게 기뻐하더랍니다.
이라면서 그 아이가 말하기를, 동생을 자꾸 데려 오라고, 나중에 안 데려오면 안 된다고 동생 데려오라고 이래서 동생을 전화해 데려오라 하니까, 전화하니까 잔다 하니까 그게 혼자 하는 말이 ‘기도하고 자는가? 기도하고 자는가?’ 이라더래. 여섯 살 먹는 게 동생에 대해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자는가?’ 이렇게 염려를 하더래요.
그거 또 자기 구역장이 전화로 기도해 주니까 이제 나았다고서, 집사님이 기도해서 나았다고서.
어제 아침에 어떤 아이가, 저거 어머니가, 자꾸 목사님 손 좀 한번 만져 보면 좋겠다고서 그 아이가 자꾸 소원을 하도 해쌓는다 하면서 내가 가니까 뒤에 따라 나왔어. 그래 내가 손을 만지며 말이지, 그게 내가 저거 할아버지도 아니지 내가 또아이들이 참 잘 봅니다아이들이, 뭐 저거딴에는 젊었다 하는데 할머니라 합니다. 고 아이들은 바로 봐. 아이들은 보면 할머니라 하고 또 할머니에게는 똥꾸렁내가 난다. 그것들이 다 어떻게 뭐, 아이들은 보면 옷 하나만 잘 입고 나가면 막 그리 쭉 따르요. 요새는 하도 옷이 흔하니까 몰라도 우리가 클 때 보면은 옷 한 벌만 좋은 것 입고 가도 고만 그날은 그 아이가 그 옷 때문에 인기요. 전부 막 그리 다 따라 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기 아름답고 좋고 한 그게 인기가 굉장히 끌려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게 뭣 때문에 늙은 영감탕구의, 자꾸 손 한번 만져보기를 원한다고 하도 그래 쌓아서 지금 업고 왔습니다 이래. 그래 내가, 그게 뭐이냐? 그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난 사람이라. 고 속에 영감이 있기 때문에, 영감이 있기 때문에 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지 껍데기야 젊은 뻔들뻔들한 미남들 쌨는데 뭐할라고 송장내 나는 영감탱이를 그래 하겠어?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거요. 그래 내가 기도해 줬어. 또 그 본뜨고 아이구야 그러니까 그라면 기도 받겠다 이라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해 주지를 못해.
우리는 이 기본구원, 우리 영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다 돼 가지고 있습니다.
여게 대해서는 관심 하나도 가질 필요 없어. 하늘나라 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 하나도 가질 필요가 없는데 우리가 하늘나라 가서 실력 있고 권세 있고, 세상에서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과 사람에 차이가 있고 대우 차이가 있고 가치 차이가 있고 실력 차이가 있는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로서 그 차이, 쓸모 있는 사람, 영광 차이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과 뭐 이렇게 존귀한 사람도 있고 욕 얻어 먹는 사람도 있고 하는 이런 모든,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 있는 그거와같이 하늘나라 가기는 갔는데 간 자와 간 자의 있는 것은 전부 이 세상에서 마련돼야 됩니다. 다른 데서는 마련을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라도 들으면 고대로 실행을 해야 됩니다. 실행 안 하면 안 돼요. 고대로 실행을 해 봐야 고게서 깨달아지지 듣고 실행해 보기 전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듣고 난 다음에 실행함으로 자신이 변화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고것이 참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을 만한 사람도 안 되는데 뭐 어찌 깨닫습니까? 자기가 듣고 깨닫고 실행을 하면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고것을 가리켜서 ‘참 내 제자가 되고’ 말했어. ‘성화가 되고' 그러면 진리를 다시 깨닫습니다.
이번에, 좁은 길 넓은 길 그것도, 보니까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처음이 좋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처음이 좋소 어느 게 처음이 좋소?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처음이 좋아, 마지막은 참 비참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처음이 어떻습니까, 처음에 어때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처음에 어때요? 좋아요 나빠요? 저 뒤에, 좋습니까 나쁩니까? 남의 일로 들을 게 아니라 제 교훈으로 듣고 제가 말해야 돼. 저 앞에 사람들 대답하니까 나는 구경이나 하지, 그러면 구경하는 것이 고만 돼 버려. 마귀 고놈은 고렇게 작용을 잘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처음이 나쁘고 마지막이 좋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과 길은 처음에는 좋고 마지막이 나쁘고. 요거 하나만 잡아도 지혜가 있을 수 있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 성공할 길, 복있는 길 그 길은 언제든지 처음이 나쁩니다. 나쁠 수밖에 없어. 처음이 나쁜데 자꾸 가니까 좋아집니다. 가니까 결과적으로 좋아져.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이 길이 걸어가면은 껍데기가 좋습니까 알맹이가 좋습니까? 껍데기가 좋습니까 알맹이가 좋습니까? 알맹이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봐. 껍데기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봐요. 아무도 안 드네?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
바로 믿으면 먼저 뭣이 잘 돼요? 알아 봐. 말해 보라고. 그래 경제 그게 표시판이라. 제일 껍데기 표시판이라. 예수 바로 믿으면 부자부터 돼요. 이런데 이북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믿어 가지고서 이것을 껍데기만 잘 되니까 이것도 다 됐다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6.25를 만난 것입니다.
그말 있었어. ‘예수 믿은 지그 사람들은 좀 길어. 십 년이라예수 믿은 지 십 년 만에 부자 안 되는 그거 다 잘못 믿었다. ’ 나는 예수 믿어서 삼 년에 부자 안 되면 잘못 믿었다 하는 사람이오. 삼 년으로, 이제 십 년이 삼 년으로 단축됐어.
내가 거짓말 하면은 그러면 심판, 거짓말은 다 심판받는 건데 심판받을라고 장 이 자리에 서고 있어요? 심판 안 받아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시는 걸 내가 경험해 봤고 체험해 봤고 또 성경이 그와같이 말했고, 이러니까 믿는 것은 먼저 껍데기가 잘 되고 속에 알맹이가 그다음에 잘됩니다.
예수님을 그 사람이 만일 한 달을 그 사람이 신앙 생활한다면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볼 것이오. ‘저게 조작배기로 지금 외식으로 제가 꾸며서 지금 예수 믿는 척 하고 있다’ 이럴 건데, 그게 만일 석 달이 계속되면 ‘야, 그 사람이 영 다르다. ' 더 이상하게 볼 겁니다. 일 년을 계속되면은 벌써 그 사람을 존대합니다. 멸시 못 합니다. 멸시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이 벌써 그 사람이 자기보다 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보다 과거에 낫던 사람을 속으로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저게 지금 멸망받을 돈만 보고 저렇게 지금 수단 방법 가리지 안하고 살고 있으니 인간 같지 않게 살고 있으니 참 불쌍하고 가련하다. 벌써 가련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지는 안하고 그 사람을 가련하니까 위해서 거게서 구출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일 년 동안을 신앙 생활 잘하면은 그 사장을 불쌍하고 가련해서, 부러운 게 아니라. 그 사장이 불쌍하고 가련해서 애연스러워서 그를 위해서 불 가운데서, 멸망 가운데서 건지는 거와 같은 그런 심정을 가지고 그를 위해서, 겉어머리로는 말은 못 해도 속으로 동정하는 그 기도를 하지 안할 수 없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래 가지고 신앙 생활을 삼 년 동안을 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멸시를 하는가? 안 해.
저도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 약 삼 년은 참 비참했습니다. 이렇지마는서도 삼 년이 다 가기 전에 이상하게도 어데서 오는지 몰라. 뭐 어째 되는지, 어째 돼서 그만 형통하고 부자가 되는지 몰라.
여게 나 있던 데 있던 사람 여기 많이 왔어요, 여게. 저 “““ 씨 손 들어 봐요. 저 “““ 씨 저분 나하고 항상 함께 예배당에 가고 오고, 가면 우리 집이 좀 가까와요.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려 가지고서 우리하고 함께 가고 이래요. 이라는데 아마 그때 그거, 내가 여러 번 말했지마는서도 그 삼농사 지을 때 저분들 다 봤어요. 삼 농사는 반 년 농사면 돼.
이랬는데, 아마 전무 후무해. 그 개명 골짜기 생긴 이후로 주님 재림 때까지도 그런 삼은 없고 그전에도 없었고, 한 해 삼농사 지어 가지고서 그 길동배미라고 그 골짝에 제일 좋은 논인데 그 “ 부자 논인데 다른 사람이 억지로, 나는 안 산다 하니까 억지로 그 사람들이 사라고 그래 가지고서, 그걸 돈도 대 주며 사라 하니 내가 샀는데, 사 가지고 삼농사 짓고 나니까 그 삼, 농사만 지었지 모두 원청 삼이 좋으니까 이거 갈라먹기 하고 좀 달라 해서 쭉 나눠 줬더니만 나중에 베가 들어왔는데 그 베를 다 파니까 논값이 되고 남았어. 일 년 삼농사 지어 가지고서 그 골짝에 제일 호답인데 논값 다 치르고도 남았어.
저 “““ 목사 그 삼 지은 거 알아? 그때 그래도 학생 때니까, 그 삼이 얼마나 잘됐는지 몰라. 그 삼은 전부 다, 전부 열석새요. 전부 열석새 이하는 없었어.
열석새 알아요? 베 열석새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베 열석새 아는 사람? 열석새 본 사람 손 들어 봐요, 열석새 본 사람. 안다 해도 본 사람 별로이 없을 거야. 본 사람은 별로이 없어. 그렇게 귀해요. 어떻게 삼이 잘됐는지 가늘게 돼서 말이지.
그래 놓으니까, 그래 놓으니 처음에는 내 친구들이 모두 술먹는 친구들이 ‘저거 참 아까운 사람 버렸네. 예수 믿고 안 망한 사람이 있나?’ 이래 쌓더니마는서도 삼 년이 지나고 나니까 내가 지나가면서 들으니까 술집에서 말하기를 ‘뭐이든지 할라면 잘해야 돼. 예수 그것도 잘 믿으면 참 효력이 있는 모양이라. 그 영희 봐, 영희 봐. ’ 이라면서 저거끼리 수구덩거려.
그래 가지고 그 골짝에선 이랬어, 제일입니다. 지금 그 골짝에서는 나만한 사람이 앞으로도 예수님 재림 때까지 안 나옵니다. 예수 잘 믿으면 그렇지만 예수를 나만치 잘 못 믿어.
모든 게 주님에게 주권되어 있다. 망하고 흥하는 것도 그에게 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은 그날부터, 그때는 새벽기도가 없어요. 예배당은 더 머니까 항상 아이들 둥쳐 업고 이래 가지고서, 먼데도 안 가요. 고 옆에 조그만한 동산이 있어요. 고게 항상 가서 산기도 했어. 믿고 난 다음에 내가 죽을 병같이 이래 뭐 요동 못 할 때는 몰라도 그전에는 새벽기도 빼지 안했어.
요새는 새벽기도 종종 빼요. 왜 빼는가? 나오는데, 내가 계산해 보니까 오늘 새벽기도 나오면 요것 때문에 무슨 일을 못 한다, 건강을 딱, 건강이 하나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요라면 못 하겠다 이래 그걸 조절을 하기 때문에 그렇지, 그래도 장 깨어 있고 일어나 있고 기도하고 이런데 주를 위해서 그러지 새벽기도 게을해서 피곤하고 되니까 안 나오겠다 그게 아니야. 나오면 고장날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안 나와.
여러분들,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내 죽고 사는 것도 그분에 있고 성공 실패하는 것도 그분에 있고 흥하고 망하는 것도 그분에 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존귀한 것도 그분에 있고 멸시받는 것도 그분에 있고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모두가 기도라.
그 사람하고 나하고 마음이 좀 상할상바르면 내가 가서 거기 가서 말을 해서 해결할 거는 해결하지마는서도 말을 해 해결 안 될 것은 앉아서 해결해. 주님에게 부탁해. 모든 걸 주님에게 부탁하니까 주님하고 자기 생활 전체로 인해서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에게 부탁하고 주님하고 상의하는 그 일이 끊어질 수가 없어, 매일 생활의 일과에.
이러니까, 오늘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그것을 알고 삽시다.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사람, 정말로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사람?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 오늘 죽을 수도 있다 말입니까?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사람. 요것을 여러분들이 손은 들었지마는서도 요거 알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몰라. 정말로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사람? 오늘 죽을지 모르니, 오늘 내가 죽으니 만일 죽는다고 해도 후회 없을 모든 것을 다 간추려 준비해 놔야 되겠다. 오늘 죽으니 내가 살 것 같으면 한 주먹 쥐박고 난 다음에라도 뒤에 그것을 모두 다 처리할 수가 있지마는서도 오늘 죽는다면은 내가 이 말을 해야 되겠느냐 안 해야 되겠느냐? 자기가 오늘 죽을 줄 알고 죽으니 하는 고 말이 후회없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직도 살 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말 한다 하는 것은 다 후회할 말입니다.
죽음에서 하는 말 삶에서 하는 말, 죽음에서만 하는 말도 치우쳐 안 되고 삶에서 하는 말도 치우쳐 안 되고 죽음과 삶의 고 사이에서 하는 말만이 고게 참된 말이라. 고것이 슬기로운 말이라. 이 말에 대해서 깨달아져요? 이해가 돼져요? 저 ““ 신랑, 이해가 돼져요? 그래. 나는 저거 지금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만날 학교 교장노릇이나 하고 그라고 말 건가 말이요, 그런 거나 하고? 껍데기만 보고 몰라요. 일꾼이 없어. 지금 뭐 교역자들 짜다라 있지마는서도 봐야 다 시시해. 왜 시시해? 설교를 못해서? 아니오. 설교 다 잘하요. 보내는 데마다 부흥사라. 다 부흥사 하고 오면 다 그때는 하나님이 같이 했다 하고서 은혜를 다 끼쳐, 설교 다 잘 해요.
다른 진영에서는 부흥사가 잘 안 돼. 여게서는 좀 있으면 다 부흥사라. 안 청해 그렇지 가면 설교는 깜짝깜짝 놀랠 만한 설교를 다 할 수 있어. 이런데 희망이 없어. 왜 희망이 없어, 왜 희망이 없지? 너 목사될래, 너? 너 가운데 조거, 너 말이야. 너 목사 안 할래? 목사하고 싶나? 감히 못 바라봤나? 앞으로 목사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 봐. 보자, 목사 될란가 보자. 너 목사하고 싶나? 하고 싶으면은, 목사들이 많은데 희망이 없다 하는 건 왜 희망이 없지? 너 대답해 봐. 자기 혼자만 하는 그런 거라 그래? 자기 혼자가 하나님 힘입지 안하고 혼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지? 너는? 자기 깨달음이 없고 들으라 봐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누가 손 들었더라? 저게 진짜 목사 될세.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속에 왕이 들어 앉았으니 헛일이라, 왕이 들어 앉았으니 헛일.
저 보자, 저놈 네가 요번에 주일학교 일등했지? 손 들어 봐. 뻐뜩 들어 봐. 저 쪼끄마이 저게 일등을 했어. 그래 내가 일등한 게 하도 아름다워서 지금, 그 얼굴이 어제 처음 봤는데 내가 다 아는구먼.
그래, 여러분들 하나님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을 당신이 주권하고 계십니다. 천하 인간이 다 이래 한다 해도 하나님이 이래 한다 하면 이래. 인간들이 소용 없어. 하나님은 아무 데 제재도 받지 안해.
주권하고 계셔. 알지 못하심이 없으셔. 공평된 하나님이시라. 그분은 약속을 선포해 놓고 약속대로 이행하는 주님이시라.
「나는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계약 선포해 놓고서 계약대로 이행하는 하나님이라 그 뜻이 여호와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믿는 것은, ‘믿사옵니이다. 믿음이면 능치 못할 게 없습니다.
믿사옵나이다. ’ 요 믿음에 대한 것을 모르고 ‘믿었사옵나이다. 믿어 두었사옵나이다. 믿사옵나이다. 믿어 뒀습니다. 믿어 지나갔습니다. ’ 믿음을 옳게 할라고 자꾸 애를 쓰고 있는데 그 믿음이 무슨 일을 합니까? 믿음이 무슨 일을 합니까? 믿음이 들어서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믿음 자체가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봐요. 믿음 자체는 아무것도 못 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고것을 내가 고대로 해 주실 것을 믿을 때에 일은 누가 합니까? 말씀하신 그분이 책임지고 해, 그분이 책임지고 해.
그런고로, 당신이 말씀해 놓은 것을 나는 부족하지만 내 힘지 힘대로 고대로 실행해. 실행하면은 말씀하신 그분이 책임지고 그 일을 이행해 주시요. 요것을 믿는 믿음, 능치 못함이 없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은 능치 못할 게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어짜든지 바로 믿어야 되겠는데, 바로 믿으면, 어서, 믿으면 부자가 되겠는데, 그래 어제 내가 몇 사람을 보고 말했어. 우리 서부 교인들이 이거 복을 받는데 복을 지금 살찌는 복을 받는가? 살찌는 복을 받는가? 내가 전체를 볼 때에 살은 조금 쪄요. 살은 조금 찌는데, 살이 찌는 것은 마음에 근심 걱정 없이 되고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지고 모든 생활이 정리되고 그저 신앙 하나로만 일관해 나가면은 잘 안 먹어도 살찝니다. 잘 안 먹어도 살쪄.
사람의 살찌는 것은 영양 섭취에서 살찌는 것인데, 영양을 흡수하는 데서 살이 찌는 것인데 영양 흡수는 어데서든지 우리가 살찔 만한 영양은 다 음식에 다 있습니다. 있는데 다만 그 기분에 어떻느냐에 따라서 그 기분 여하로써 흡수는 다 되는 것입니다. 기분 나쁜 사람은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자기 생활들이 다 안정이 돼 가는가보다 내가 그걸 어떤 사람에게 말했어. ‘우리 서부 교인들 내가 강단에 쭉 보면은 다 얼굴은 조금 맑아지고 살찌는 것이 보여지니까 이 살찌는 축복은 받는 것 같은데 거게도 받지 못하고 마구 똑 창호지 쪼가리를 이래 뽈끈 쥐었다가 놓은 거 모양으로 막 얼굴에 마구 근심줄이 졸졸졸하고서 이래 가지고서 또 아직도 까끌까끌한 그거는 저거는 정리 못 한 게 있다. ’ 아현교회 교인들을 제가 그전에 볼 때에 그 교인들이 다 살이 쪄요. 왜 그건 뭐이냐? 그거는 전부 마음이 다 신앙 하나로 정리됐다 그말이오. 그 사람들은 허영과 허욕과 그런 ‘안 된다’ 하는 그런 게 없었어. 안 된다는 그런 게 없었어.
아예 자기 정도로 하기 때문에 다 되고 남지 안 될 그런 허욕과 허영을 가지고서 날뛰는 사람들이 없었어.
이래 그 사람들은 머리 빡빡 깎았어. 머리 빡빡 깎고, 뭐꼬? 광목, 새카맣게 물들인 광목 바지 저고리 입고 다녀요. 이런데도 보면은 다니며 이라면서 막 신중 같은 게 똑 이래 가지고 막 이래 가지고 이래 가지고 다녀요. 그거 보면 아현교회 교인들이라. 자신이 있거든. 남한테 굽히지도 안하고. 아예 자기가 못할 것을 허영과 허욕을 가지고서 애를 써 될려고 할라고서 남에게 사정을 할라고, 남을 힘입을라고, 남하고 공연히 시비할라고 하지 안하고서 시비 안 하고 자기로 할 수 있는 그런 일 해.
이러니까 안정이 되니까, 그래 거기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루 세 시간 일하면 먹고 사는 것 문제 없대요. 세 시간 일하고. 남은 시간은? 남은 시간은 성경 보고 교회 일한다고. 전부 그러니까 교회 일을, 뭐 할 일이 있어야지, 전부 뭐 할 사람들만 많은데? 참 김현봉 목사님이 목회를 바로 했는데 그분이 목회 바로 한 그걸 아무도 배우지 못하고 말았어. 그걸 배운 사람이 없어. 그 목회 하는 것을 껍데기만 배웠지 속에 알맹이 배운 사람들이 없었어.
이러니까, 자기 마음이 안정이 돼야 됩니다. 신앙으로 하면 안정돼. 염려할 거나 뭐 그런 것이 없어. 안정된 생활로, 그저, 왜? 자기가 못 할 거는 아예 바라보지도 안하고 주님에게 기도하지 뭐 그 이상 자기가 나아가지도 안하고 허영과 허욕을 다 버리고 옳은 신앙 걸음에 서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평안하게 해 줍니다.
부활하신 후에 제일 제자들에게 처음에 주신 은혜가 뭐이지요? 제일 처음에 주신 은혜가 뭐이지요? ‘너희들이 평안할지어다’ 이렇게 평강을 줬습니다. 평강의 축복을 줬어. 예수 믿으면 먼저 이제 모든 것이 평안하고 즐겁고 아무 염려없는 사람이 되어지는 고것이 제일호의 축복이오. 아직도 여러 가지 있으면 그거 정리 안 됐으니까 빨리 정리하면 평강이 되지.
의식주를 당신이 다 책임진다 했는데 뭐 때문에 제가 책임져?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만 지키면, 믿음 지켜서 굶게 되면 어찌 됩니까? 믿음 지키다가 굶게 되면 어찌 됩니까? “““ 집사님, 믿음 지키다가 굶게 되면 어찌 됩니까? 안 지켜 그래요? 저 장로님, 믿음 지키다 굶게 되면 어째요? 믿음 지키다 굶게 되면 회개해야 돼요? “““ 목사님, 믿음 지키다가 굶으면 어째? 왜 기뻐해? 참 뚱단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왜 기뻐해? 이분 말이요, 이분. 시련을 줬기 때문에 기뻐한다? 극복을 이기면 축복이 오기 때문에 기뻐해야 된다? “““. 알고 계시니까? 굶는 것 알고 계시니까? 이거 참 어렵다. ‘기뻐하라’ 하는 이제 어째 조금 그럴듯 하더니마는서도 끝이 없네.
“““ 권사님, 신앙 지키다가 굶으면 어찌 됩니까? 축복인 줄 알아요? 신앙 생활하는 데 굶게 되는 것은 축복이라? 그 말은 맞은데 어째야 돼, 그라면 어짜면? 녜, 기뻐하기는 기뻐해야 돼요. 왜 기뻐해? 전지 전능으로 생명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모든 걸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때는 굶는 게 제일 좋기 때문에 나에게 굶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됩니다.
부자되면 부자되는 게 좋기 때문에 부자되게 해 주신 것이고, 가난하면 가난이 좋기 때문에 가난하게 해 주시고, 우리가 뺨을 맞으면 그럴 때에 자기가 뺨 맞을 만한 무슨 이유가 있나 먼저 살펴서 그런 것이 있으면 얼른 회개해서 감사하고, ‘내가 뺨 맞은 것 때문에 회개하게 됐다’ 감사하고, 아무리 신앙으로 살펴봐도 뺨 맞을 만한 그런 잘못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 너는? 왜 기뻐해? 녜, 주님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내게 필요하고 요긴하고 없어서 안 될 뺨이기 때문에 맞게, 공연히 죄 안 지어도 뺨 맞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나에게 섭리하신다는 이 주권, 그분의 주권을 믿을 때에, 그분의 전지 전능을 믿을 때에,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직접 관리하고 계신다는 걸 믿을 때에 뺨 오는 것도, 그분 없이 뺨 오는 것이 없어.
그 뺨은 누가 때렸지, 누가 때렸어? 주님이 때렸어, 주님이 때렸어. 이러니까 그 뺨 맞는 데는 굉장한 주님으로 더불어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고 주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어.
공연히 뺨 때리는 데 있을 수 있어야지? 고만 뺨 때려도, 뺨 때려도 감사하고, ‘왜 날 공연히 아무 죄 없는데 왜 나 뺨 때리요, 뭣 때문에 때리요, 뭣 때문에 때리요?’ 이렇게 싸우지 안하고, 한번 뺨을 탁 때려 봐도 ‘주여, 감사합니다. ’ ‘뭐 뺨 맞은 게 뭐이 감사하노?' `주님이 내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뺨을 때려도 좋고 날 십자가에 달아도 좋고 주님이 내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손을 대시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이게 신앙이라. 그냥 말쟁이로 꾸며 대는 게 아니라. 실상은 그래. 그런 일이 성경에도 많이 있어.
여러분들, 주님을 믿읍시다. 그분을 믿어요. 믿고, 그분을 믿고 그분은 죄를 멸하고 마귀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는, 이것이 원수가 돼 가지고 당신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우리를 구출하신 분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 복을 받을라고 생각지 말아요. 마귀 그놈의 심부름꾼이 돼 가지고서 마귀의 지도를 받으면서 주님을 부르지 말아요. 그거는 주님을 만홀히 여기는 거라.
어쨌든지 죄를 회개해서, 뭐 살림살이가 깨어진다 이라면 이거 큰 들통이 난다 해도 죄를 광고를 하든지 광고할 수 없는 것이라면은 다 끊어요. 죄를 끊고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끊고 깨끗하게 살고 마귀 그놈의 그 꼬임을 받지 말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면 우리가, 벌써 온 교인이 이걸 작정하고 살면, 작정하고 사는 사람들이 이 작정만 해 놓고 ‘이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았어야 되겠다’ 이럴 때에 안 되지, 작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찾아 가지고 그 뜻대로 움직이면 석 달이 안 갑니다.
만일 우리 서부교인들이 그와같이 한다면 석 달 안 가서 모든 게 다 형통해져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를 한번 해 봐. 석 달 안 가서 자기 머리가 열리는 걸 환하게 볼 거라. 하나님이 머리를 열어 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 사업에 같이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의 원수를 해결지어 주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전능자가 와 가지고 자기를 돕는다는 것을 환하게 자기가 목격할 수가 있어. 믿는 사람 됩시다. 공연히 말로만 하지 말고.
또, 반사들은 언제든지 공과를 외우고 이 공과 가지고 자기를 기르도록 하십시오.
요절 외우고 공과 외우고 이래 가지고, 공과 외우면 요절도 다 인제 외우고. 이거 하나만 하면은 자기를 참 알속 있게 길러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양 중에는 아주 적은 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