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신앙, 고행신앙, 인본신앙

 

1986. 10. 15. 밤(수)

 

본문: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 사람이 일생을 살아갈려고 하면 수많은 문들을 통과하게 됩니다. 문은 닫혀 있을 때에는 그 안이 어찌 되어 있는지 모르나 문이 열린 다음에는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문이 크고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들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들이 적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문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문이라고 했는가? 문은 자기가 이제까지 하고 살고 있던 그것이 아니고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생각, 새로운 욕심, 새로운 계획, 새로운 모든 행동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문으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던 생활에서 새로 깨닫는 거, 새로 아는 거, 새로 원하는 거, 또 새로 시작하는 거, 새로 행동하는 거, 새로운 모든 소욕을 품는 거 이런 것은 다 문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새로운 문을 열면, 닫혀 있어서 보지 못한 것을 문을 열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로 보이는 거와 같이 자기가 새로운 깨달음이나,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소원이나, 새로운 계획이나, 새로운 사업이나, 새로운 행동이나, 새로 가지는 마음이나 그런 것을 다 문으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새것이면 좋은 줄로만 생각하지마는 새것이 두 종류 있습니다.

하나는 망하게 하는 새것 있고 하나는 참 영광스럽고 성공하게 하는 그런 새것 있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새 생각을 가질 때에 그 새 생각 가지는, 이제까지 가지지 안했던 새 생각 가지는 그 새 생각은 그게 망하든지 흥하든지 죽든지 살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을 우리가 알고 생각해야 되지 아무나따나 생각 나오는 대로 하면 안 됩니다.

또 자기가 깨닫는 것도 그러합니다. 깨닫는 것도 망하고 흥하고 죽고 사는 것이 거게서부터 시작됩니다. 깨닫는 것도 그 깨달음으로 인해서 자기가 망하고 죽고 절단나는 그런 깨달음도 있고, 또 그 깨달음으로 살고 성공하고 복된 그런 깨달음도 있습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것도 그 소원이 새로 소원하는 것이라면 그 소원이 살고 흥하고 성공하고 복된 그 소원도 있고 죽고 망하는 소원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소원이라고 뭐이든지 이제까지 가지지 못한 새 소원, 새로 소원하는 거, 새로 욕심내는 거, 새로 깨달은 거, 새로 아는 거, 새로 시작하는 거, 또 새로 행동하는 거 그런 것을 사람들은 아무나따나 닥치는 대로 합니다. 또 그것을 해 가지고 망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망하고 난 다음에야 압니다.

이제 망하게 되면 그때사 알고, 또 옳은 문으로 들어가서 복된 그런 것도 사람들은 그 복된 그 결과가 나타나고 난 다음에 이게 복되다 그렇게 압니다.

그러면 그때는 벌써 기회가 지나갔기 때문에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 사망으로 들어가는 문도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도 있다.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도 있고 성공과 행복과 평강으로 들어가는 문도 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여기 말씀하시기를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 문이 넓어서 찾기도 쉽고, 문이 커서 찾기도 쉽고, 또 길도 평탄하고 이래서 멸망으로 가는 그 문을 찾는 사람은 많다.” 이랬습니다. 망하는 생각은 생각하기도 쉽고 또, 망하는 생각은 생각하기가 아주 쉽고 저절로 생각이 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망할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가집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성공되고 행복되고 참 후회 없는 영광스러운 그 문은 아주 문도 좁고 길도 험해서 찾는 사람들이 적다. 복된 생각 성공할 생각, 복된 소원 성공할 소원, 복된 재미 성공할 재미, 복된 일 시작 성공될 일 시작 그것은 시작도 어렵고 또 시작해 가지고 할라고 하면은 힘이 듭니다. 이러니까 그리는 찾아가는 사람이 적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여게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사람들이 우선 하기 쉽고 좋고 재미있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런 길은 대단히 가기가 쉽고 좋지마는 그 결과가 멸망입니다. 또 복된 그런 길은 갈라 하니까 재미도 없고 힘도 들고 또 그 길 가는 사람들은 동무도 많지 안하고 하루 종일 만나봤자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으로 가는 사람이나 ‘이 길로 가자’ 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말씀을 듣고 그저 그냥 지내보낼 게 아니라 우리가 새로 마음의 움직이는 것이나 몸의 움직이는 것이나 우리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행동, 새로운 마음, 새로운 소원, 새로운 욕심, 새로운 취미, 이제 무엇이든지 새로 시작하는 거게는 죽고 사는 것이 있다 요걸 아는 사람이 성경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생각 안 해요.

새로 시작하는 걸 가리켜서 문이라 이랍니다. 문을 열어야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렇고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러하고 일생을 걸어갈라 하면은 문이 수십 첩첩으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문이 수십 첩첩으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데 한 문 열면 또 새 일 시작해 가지고 또 그 일 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 또 새 문 열리고 새 문 열리고 다 그라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문을 열 때에, 시작할 때에 이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냐 그것을 생각해서 자기가 처음으로 생각하는 일, 처음으로 깨달은 일, 처음으로 마음 먹은 일, 처음으로 소원하는 일 무엇이든지 시작할 때에 ‘요게 멸망이 아니면 구원이고 구원 아니면 멸망이다’ 요것을 요 중대성 있는 줄 알고 그것을 신중히 해서 마음의 움직임이든지 몸의 움직임을 가지는 사람은 복이 있고, 그만 우선 하기 쉽고 재미있게 좋도록만 하는 자는 그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거 하나만 해도 여러분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넓어서 찾는 사람도 많고 가기가 좋다 이랬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험해서 찾는 사람도 적고 가기도 힘든다 이랬습니다. 우리가 뭣이든지 우선 쉽고 수월하고 평안하기를 원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안일주의라 이라는데 그 사람은 망합니다.

춘향전에는, 어떤 사람이 글을 짓기를 그래 지어놨습니다. ‘고진감래요’ 쓴 것이 지나가면 단 것이 온다. ‘흥진비래라’ 기쁜 일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그 뒤에는 슬픈 일이 온다. 고생의 열매는 귀하고 복되고, 우선 좋은 대로 산 그 생활의 결과는 멸망이다 그렇게들 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도 다 통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도 있고 또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도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 자꾸 넓은 길만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좁은 길로 찾아갑니다.

이래서, 요거는 간단하게만 말해놨는데, 그러면 좁은 문은 어떤 게 좁은 문이며 넓은 문은 어떤 게 넓은 문인가? 사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은 어떤 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어떤 문인가? 요거는 우리가 예수 믿는 데 대해서 어떻게 믿으면 멸망을 받고 어떻게 믿으면 생명을 얻는가 하는 그것을 요 비유로 가르쳐 놓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문과 넓은 길, 또 좁은 문과 험한 길, 그건 어떤 건가? 고거 예수 믿는 걸 가리킨 건데, 아침에 그걸 재독을 했습니다. 또 어제 아침에 그것을 기록하라고 또 가르쳐 줬습니다. 그러면, 기록한 대로 넓은 문 넓은 길이 네 가지, 또 좁은 문 좁은 길이 네 가지.

넓은 길은 어떤 신앙이냐? 미신 신앙, 또 고행 신앙, 또 인본 신앙, 또 성경 가감 신앙 요 네 가지가 넓은 문이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또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도 네 가지인데. 첫째는 성경주의, 또 둘째는 하나님주의, 또 셋째는 정확주의, 넷째는 끝까지 계속하는 계속주의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랬는데 거게 뜻을 약간 말했지마는 오늘밤에는 그 하나하나를 설명을 하겠습니다.

지금 넓은 길에 대해서 네 가지인데 시간 되는 대로 해석을 하겠습니다. 넓은 길은 몇 가지로 공부했습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 처음 오는 분들도 네 가지 손가락 네 개를 펴십시요. 넓은 길을 네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또 좁은 길은 몇 가지로 가르쳤습니까? 또 네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좁은 문도 네 가지, 넓은 문도 네 가지.

네 가지인데, 요게서 우리가 멸망하고 구원 얻는 요것을 요게서 확정지울 수가 있습니다. 넓은 길 가는 사람은 멸망하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생명 얻는다 하는 것은 그만 다입니다. 모든 성공 다한다 그말입니다.

넓은 길 중에 첫째가 미신 신앙이라. 넓은 길이라 하는 그것은, 이 해석은 뭐 성경 학자들이 열이 각각 다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 해석을 바로 하는 것도 있겠고 삐뚤어지게 하는 것도 있겠는데 여게서 배우는 이것이 바른지 안 바른지 여러분들이 그것은 뒤에 돌아가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조사도 하고 또 주석도 읽어 보십시오. 이런데 주석하고 안 맞다고 여러분들이 틀렸다 그런 생각지 말고 신앙 양심을 가지고 딱 생각하면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 중에 첫째가 뭐이냐 하면은 미신 신앙입니다, 미신 신앙. 거게 참고 절수는 로마서 1장 21절로 23절까지 읽어보면은 참고로 참고 절수가 있습니다.

미신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점치는 것도 미신입니다. 손 비비는 것도 미신입니다.

또 이런 종교 저런 종교도 다 미신입니다. 땅위에 사람들이, 예를 들면은 안 믿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은 다 미신인데 과학 그것만 반 미신이고 온 미신이 안 됩니다.

그러면, 미신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게 미신인가? 미신주의 신앙인데 미신은 어떤 게 미신인가? 미신은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선포해 놓지 안한 것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미신이요, 그런 것을 바라보는 것도 미신이요, 그런 것을 믿는 것도 미신이요, 의지하는 것도 미신이요, 사랑하는 것도 미신이요, 섬기는 것도 미신이요, 좋아하는 것도 미신이요 다 미신입니다. 요 범위가 대단히 넓습니다.

이것을 처음에 여러분들이 들을 때는 잘 모를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믿든지, 성경에 없는 것을, 성경에 “그런 것 믿지 말라” 한 것을 믿는 그게 다 미신입니다. 또 성경에 “그런 것은 네가 소망해야 소용없다, 소망하지 말아라.” 하는 걸 소망하는 것 다, 소망하지 말라는 걸 소망하는 건 다 미신입니다. “그런 것은 네가 의지 안 된다, 그런 거 의지하지 말아라.” 의지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하는 것은 다 미신입니다.

여러분들, 돈을 의지하는 것은 미신입니까 그것이 정당입니까? 이제 그만하면 다 알 거라. 그것도 미신입니다. 돈은 의지할 상대가 못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것은 그것은 정상에 속했습니까 미신에 속했습니까? 그것도 미신에 속했습니다. 이러면 일반 사람들이 들을 때에는 그거는 너무 지나치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미신은 어떤 게 미신인가? 한 말로 말하면 신구약 성경에 “이런 것을 바라봐라, 이런 것은 믿어라, 이런 것은 의지해라, 이런 것을 섬기라.” 이렇게 하는 거 외에 하는 것은 다 그거 미신이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섬기고 의지하고 믿고 하는 그 외의 것을 하나님처럼 바라보고 의지하고 섬기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미신입니다. 이 미신의 범위가 이렇게 큽니다.

그러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것을 하나님 외에 딴것이 할 수 있다고 딴것을 하나님 대신으로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높이고 섬기고 두려워하는 것은 전부 미신에 속한 것입니다. 아주 이것은,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이라면 대단히 높은 신앙입니다.

넓은 문은 미신 신앙이 넓은 문이라. 미신은 어떤 게 미신이냐? 신구약 성경에 믿어라고 하지 않는 거 믿는 거, 다시 말하면 하나님 외에 딴것을 하나님처럼 그것이 무엇을 해 줄 수 있다고, 그것에게 주권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전부 미신 행위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됩니까? 여반들은 허무해요. 오늘 아침에 말 들으니까 저 어데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거게서는 귀신이 있으면 말이요, 귀신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이놈, 나오너라.’ 하고 싹 잡아 빼면 귀신이 쏙 빠져 나와서 빼닫이 빼듯이 빠져 나온다고, 병도 ‘요 무슨 병이다’ 손가락을 넣어 가지고 싹 잡아 빼면 병이 쏙쏙 빠져나온다고 이라는데 그것을 중간반 반사들도 여반사들은 믿는데 남반사들은 믿지 안해요.

또 어데서 냉장고에서 사람이 있다가 살아나와 가지고 뭘 한다고 마구 그 세월이 났어. 냉장고에 들었던 사람이, 나는 그거 보지는 안했는데 말만 들었어요.

냉장고에 있던 사람이 나와 가지고 그 사람이 무슨 말하니까, ‘그 사람 말은 전부 백프로 다 맞다’ 이래 가지고 야단을 지기는데 여반사들은 전부 그 테이프를 복사도 하고 거머쥐고 뭐 한창 야단인데, 그래 놓으니까 성경만을 바라보는 그 신앙은 다 깨져 버리고 말았다 말이오. 이런데 남반사들은 거기 미혹을 안 받았대요. 그런 게 다 미신 신앙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믿으라는 거 외에 믿는 거, 하나님 믿는 거 그 외에 딴것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건 다 미신 신앙이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만이 주권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 외에 어떤 것에게 주권을 돌리든지, 절대를 돌리든지, 그가 자기를 어떻게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바라보는 그런 것, 뭐 별을 바라보는 것도 미신, 달을 바라보는 것도 미신,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 바라보는 건 다 미신, 또 물질 바라보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 바라보는 건 미신. 믿는 것도 미신, 의지하는 것도 미신, 좋아하는 것도 미신, 높이는 것도 다 미신입니다. 미신 신앙은 이런 게 다 미신 신앙입니다. 미신 신앙은 이런 게 다 미신 신앙이오.

성경이 믿어라는 것은 믿고 믿지 말라는 건 믿지 마십시오. 성경이 두려워하라는 것은 두려워하고 성경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두려워 안 해야 됩니다. 성경을 어겨서 모든 언행심사의 행동하는 것은 그것은 다 미신 행동입니다.

또, 둘째는 고행 행동. 고행 행동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 4장 1절로 3절까지를 보면 참고할 수 있습니다.

고행주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좀 수고를 해야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또 이 무슨 고생을 해야 이 고생의 댓가가 있지.’ 이래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대로 할라고는 하지 안하고, 성경에 맞춰서 할라고는 하지 안하고 자기가 수고하고 고생하면 그것이 구원이 될 줄로 아는 것은 다 고행주의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고생이 되는 것은 고생을 하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죽을 때에는 죽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모든 고생이나 수고나 그거 하는 것은 믿음이요,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워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앙이요, 의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하는 그게 아니고 자기가 무슨 수고를 하고 고생을 하면 그것이 공로가 되는 줄로 이래 아는 사람, 공로가 되는 줄로 이래 아는 것은 그거 전부 다 고행주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데 자기가 그 말씀을 지키는 데에 힘 둘만 들이면 지킬 수 있는데, 비유컨대 힘 두 개만 들이면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데 두 개 들이는 것보다도 세 개 네 개 열 개 많이 들이는 것이 좋다 해 가지고, 자, 많이 들이는 것, 그 말씀을 지키는 데에 거게 해당된 그 수고 외에, ‘수고를 많이 해야 좋다’ 싶어서 수고를 많이 하는 그것은 그것이 정상입니까 고행주의입니까? 이거 고행주의입니다. 요거 우리가 그런 일 과거에 많이 하고 지내왔습니다. 지내왔기 때문에 요걸 지금 고쳐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디모데전서 4장 1절 이하에는 보면,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였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인제 ‘고기 먹으면 안 된다’ 먹고 싶은 고기 안 먹을라 하니까 힘 안 듭니까? 또 시집가고 장가가고 싶은데 시집 안 가고 장가 안 가고 이래 독신 생활 할라 하면 힘 안 듭니까? 그렇게 하면 그것이 공로가 돼 가지고 복을 받고 좋은 곳 가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하나 예를 들면은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미신에서는 ‘이 아이가 수명이 짧은데 이 아이 수명을 길게 할라 하거들랑 네가 석 달 산에 가 가지고 석 달 열흘, 백 일 산제를 해라.’ ‘아마 그만치 고생을 하면 뭐이 오지’ 하지만 석 달 열흘 백 일 산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마귀 시키는 대로 잡신을 섬기니 하나님의 저주가 가지 하나님의 축복이 가지 않습니다.

또 ‘야, 백 일 산제라 하니까 그만치 힘이 드는 일이니까 효력이 나겠다.’ 힘들면 효력 나는 줄 압니다. 또 ‘이 아이 수명을 길게 할라면 각 성받이, 백 성,성 백가, 김가 하나, 이가 둘, 이래 말이지요.백 가지 성받이 집에 가 가지고 동냥을 해 가지고 떡을 해 가지고 잔치를 하면은 이 아이 수명이 길다.’ 이라면은 그 속이 ‘야, 그리 할라면 백 가지 성 그랄라면 한 동네 가봤자 찍해야 두 성받이 세 성밖에 없는데 그거 할라 하면 힘들겠다, 힘드는 것 보니까 효력이 나겠다.’ 이거 다 무슨 주의입니까? 고행주의요, 안 믿는 사람도 고행주의 있다 말이오.

또, ‘네가 아주 겨울 한겨울에 찬물에 목욕을 하고 삼베옷 입고 그래 가 가지고 저 호랑이가 어그릉하는 그 산에 가 가지고 네가 공을 들이면은, 얼마 공을 들이면 아들을 낳는다.’ 그래 인제 그라면 ‘공이, 그렇게 힘들여 공을 들이니까 아마 효력이 있겠다.’ 해 가지고 그렇게 하는 그게 다 뭐입니까? 그거 다 고행주의라 그말이오.

예수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할라고는 하지 안하고 어짜든지 자기가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하고, 밥을 굶고 어떻게 그렇게 하면은 뭐이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라고 거기다가 주력을 하고 말씀대로 하기 위해서 굶을 때는 굶고, 또 말씀대로 하기 위해서 잠 못 잘 때는 잠 못 자고 일 때는 일하고 이 말씀대로 하는 이것을 위주로 하지 안하고 자기가 고생하는 그것이 공로가 돼 가지고 무슨 효력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들어 주고 어떻게 해 주리라 하는 요것이 믿는 사람 가운데 많이 있는데 이게 전부 고행주의입니다. 이것이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이오.

넓은 길은 어떤 게 넓은 길이냐? 하나님이 말씀해 놓은 요 길은 요거 좁은 길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해 놓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대로 요대로 해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규의 규범 내의 요 진리의 말씀대로 하는 요거는 좁은 길이고 그 외의 것은 인간들이 천 가지 만 가지를 말하는 그게 전부는 다 통틀어 그게 다 넓은 길이라, 그건 멸망하는 길이라. 요거 아주 범위가 넓기 때문에 요걸 잘, 신앙이 어리면 잘 못 알아들어요, 여러분들이 듣고 자꾸 이래 깨달으면 알지만.

이래서, 고행주의는 믿는 사람들도 고행주의로 하는 것은 그거는 인간주의지 하나님이 시키는 건 아니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러면 예수 믿는 데에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야 되는데, 십자가의 걸음이라 하는 것은 고생스러운 걸음인데, 그러면 십자가의 걸음의 이 고생스러운 걸음은 그것이 고생스러운 걸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행하는, “고생이 돼도 이행해라” 하나님 말씀대로 할라 하면은 여러가지 고생이 되니까 고생이 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 그말입니까? 이제 고생만 하는 그게 가치있는 것으로서 고생을 말하는 것이 십자가의 걸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고생이 돼도 말씀대로 지키라는 그 십자가 걸음입니까? 어떤 겁니까? 자, 예수 믿는데 고생만 하면 십자가 걸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거는 아니야. 맞습니다.

십자가 걸음이라 하는 것은, “말씀대로 지킬라 하면 고생이 돼도 말씀대로 지키라. 고생이 돼도 말씀대로 지키고 죽어도 말씀대로 지키라.” 하는 그것이 십자가의 걸음입니다. 이렇게 아시면은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알아야 돼.

이게 옳다 말이오. 간단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또 인본주의 신앙, 이것이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이오, 인본주의 신앙. 인본주의 신앙은 창세기 4장 1절로부터 13절까지에 보면은 거기 인본주의 신앙의 조상이 나왔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게 인본주의 신앙이냐? 첫째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안하고 인간 생각대로, 인간 마음대로, 인간 뜻대로, 인간 지식대로, 하나님 말씀 외에 인간의 모든, 인간의 권세대로, 인간의 생각대로, 인간의 지혜대로, 인간의 판단대로, 인간 위주로, 인간 중심으로, 인간을 근본으로 해 가지고 하는 그 모두가 다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해석해도, 성경을 해석을 해도 사람 좋게 성경 해석하는 게 있고, 하나님 좋게 성경 해석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나님 좋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런데, 성경을 하나님 좋게 이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해석할라 하면은 예수 믿기 힘이 들고, 힘들고, 사람 좋도록 이래 해석해서 그대로 신앙 생활 할라 하면 쉽고 좋습니다. 그런 것이 다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라 말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주로 해서 성경 해석은 신본주의 해석이고, 성경을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인간 좋도록, 인간 편리하도록, 인간편을 생각해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인본주의 해석이 됩니다.

또,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의 그걸 내비두고 인간의 생각, 인간의 지식, 자, 사람들이, 천하에 있는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 합니다. ‘이래야 된다' 천하 사람들이 다 `이것은 옳다, 이래야 된다.' 이래 할 때에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된다 하니까 이렇게 해야 되고 이게 옳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은 그거는 신본주의입니까 인본주의입니까? 신본주의입니까 인본주의입니까? 인본주의입니다.

그럴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라니까 이게 맞은지 안 맞은지 보자’ 온 천하 사람들이 다 해도 그저 뒤적뒤적 성경을 찾습니다. 성경을 찾아 가지고 ‘아니다.

성경이 이렇게 하지 말라 했다, 성경에 틀렸다, 성경대로 아니다.’ 성경대로 아니라 하니까 천하 사람이 다 그게 옳다 해도 자기는 성경이 아니라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은 천인 만인 하는 거기 따라가지 안하고 성경 말한 대로 따라가면은 그 사람은 뭐입니까? 성경 말한 대로 따라가면 그거 뭐입니까? 신본주의. 인간 따라가면 인본주의입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말씀에 없는 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이리저리 해석하는 것은 내나 성경 말씀을 그것을 모르니까 알도록 해석해 주는 것이지마는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무슨 말 ‘귀신이 말했다, 뭣 했다.’ 하는 그런 거, 자, 여러분들,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죽어서 무덤 가운데 있다가 그 사람이 나와 가지고 지금 말을 한다, 말을 한다.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무덤 가운데 있다가 나와서 말한다.’ 그러면, ‘한 달 동안에 무덤에서 있다가 나와 가지고 말한다’ 그럴 때에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그 동리가 백 호 되는 동리 사람들이 다, 백 호 되는 동리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과연 그 사람은 죽어서 우리가 다 장사 지내 가지고 무덤 속에 한 달 동안 있다가 살아나와 가지고 지금 말을 하고 있다’ 온 동리 백 호 사람들이 다 그래 보고 증거를 하고 ‘우리가 초상 쳤다, 우리가 봤다.’ 이렇게, 백 호 되면 한 오백 명 안 되겠습니까? 오백 명이 그렇다고 이래 그렇게 말을 할 때에 ‘그래, 오백 명이 다 그렇다 하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그 말을 믿으면, 그게 믿으면 인본주의 신앙입니까 신본주의 신앙입니까? 그라면 인본주의 신앙인지 신본주의 신앙인지 찾아봐야 됩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 “사람이 죽어서 한 달 동안 땅속에 묻어놨는데 한 달 만에 살아난다 하는 그럴 수도 있다, 살아날 수 있다.” 하는 것을 성경이 말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성경에 말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성경은 말을 안 했는데, 그런 게 있다고 말 안 했는데, 우리에게는 빠진 게 없다고 말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난 건 예수님만 살아났지, 죽으면 다시 예수님 재림 때나 살아나지 살아나지 못한다.” 죽으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게 성경이고 사흘이라도 죽었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기절해 가지고 있는 것은, 기절해 가지고 있다가 거석한 그것은 아주 죽은 게 아니고 지금 거게 아직 살아 있는 생기가 남아 가지고 있는 그것이고 이런 것이지 아주 완전히 죽었다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없다. 죽었다가 살아난 이는 예수님뿐이지 그외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없다 하는 게 신구약 성경입니다.

성경인데, 백 호에 있는 오백 명이 다 증거할 때에 ‘오백 명이 다 보고 증거하는데, 오백 명이 다 봤다 하고 증거하는데?’ 그럴 때에 오백 명이 말하는 ‘오백 명이나 말하니까 이 말이야 거짓말이 있겠느냐? 이거는 참말이다.’ 오백 명을 믿으면 성경을 배반하는 것입니까 안 하는 것입니까? 배반하는 것입니까 안 하는 것입니까? 그거는 성경을 믿는 사람입니까 사람을 믿는 사람입니까? 사람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성경에 없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야 천 호가 사는데, 천 호가 사는데 천 호가 뭉쳐 가지고 이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살아났다고 천 명이 다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장사 지냈다 무슨 소리 한다 할지라도 성경에 없으면 ‘거짓말 말아라’ 이게 믿는 사람이오. 알겠습니까? 이게 신본주의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다 세상을 이겼고 마귀의 술책을 다 이겼습니다.

만 명이 들어서 그렇다고 들이대면, 만 명이 들어 그렇다고 들이대면, 성경에 위반된 것을 만 명이 들이대서 ‘이렇다’ 하면은, 성경과 만 명이 말하는 것과 영 대립이 되면은 성경을 믿을랍니까, 만 명이 말하는 만 명의 공동 고백을 믿을랍니까 성경을 믿을랍니까? 만 명을 믿을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만 명을 믿을 사람? 만 명을 믿을 사람은 지옥을 가십시오. ‘만 명이 다 해도 성경에 위반되면 안 믿겠다’ 성경대로 그러면, 만 명이 반대돼도 성경대로 믿을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이게 예수 믿는 사람, 신본주의입니다.

박태선씨가 믿는 사람은 안 죽는다고 들이댔습니다. ‘믿는 사람은 안 죽는다’ 이 들이대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는 그 성구를 성경을 몰라 놓으니까 그 사람이 잘못 해석했다 말이오. 잘 믿는다고 제가 칭찬을 하고 돈 많이 내니까 이 사람은 잘 믿는다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 했는데 그 아이가 딸칵 죽어 버렸다 말이오.

죽었으니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죽었지마는 살아난다, 보라, 살아난다.’ 그 사람이 뭐 거짓말한 것 아니요. 자기는 성경을 잘못 깨달았기 때문에 그래 믿었다 말이오. 자기는 꼭 살아날 줄 알아. 꼭 살아날 줄 알았어. ‘살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안한다, 이 아이는 꼭 믿는 신앙을 가졌다.’ 하는 자기가 인정했기 때문에 이거는 죽어도 살아날 것이다 하고서, 이제, 그 아이를 유리관 속에 넣었습니다. 유리관 속에다 넣었는데 저 경찰서 앞에 거게 그때 전도관이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유리관 속에 넣어 가지고 벌써 있는데 이틀이 지나가도 살아나지 안하니까 이틀이 지나가니 벌써 썩을라 한다 말이오.

썩을라 하니까 그 아이를 방부제를 들이발라 가지고 방부제로 이래 들이 소독을 해 가지고 유리관 안에 넣어 놓고서 ‘아무나 보라, 이 아이가 살아난다.’ 이래 가지고 그 사람이 큰 장담했습니다. 살아난다 했는데 사흘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니까 그 다음에는 그 아이를 저 숨겨놓고 누구든지 볼 수 없다고, 저거 거석한 사람들 아주 이런 대가리만 보이지 그래 안 보인다 이래 가지고 숨겨놨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나중에 마지막에는 그것을 경찰서에서 해 가지고 이제 죽었다는 것 확실히 증거해 가지고, 그라고 나니까 그거는 죽었지마는 또 어떻게 된다 또 거짓말하니까 또 넘어간다 말이오.

이북에 공산주의 산하에 있는 사람들이 석 달 만에 해방된다 하는데 ‘석 달이면 해방된다, 석 달이면 남북 통일이 된다.’ 하는 소리를, 지금 6 5 후가 얼마나 됐습니까? 6 5가 몇 년 됐소? 삼십여 년 안 됐소? 삼십여 년이니까 석 달이니까 일 년에 네 번씩 말했으니, 일 년에 네 번씩 말했으면 삼십 년이면 백이십 번, 백이십 번 말해도 지금도 석 달입니다. 석 달 만에, ‘그때는 그렇지 요번에는 석 달이면 된다’ 백이십 번을 말해도 사람이 속고 속고 또 믿고 또 믿는 게 인간들인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은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고 하면은, 잠깐 기절해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다른 기관은 다 죽은 게 아니고 잠깐 기절해 가지고 있는 거는 깨어날 수 있지마는 아주 죽은 것은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인데 성경을 믿는 사람은 그말 하는 걸 거짓말로 알았다 말이오.

이뇌자라 하는 사람이 새일에서 저게 무슨 산인고? 거게서 목욕하다가 죽고 난 다음에 석 달을 송장이 돼도 울고 막 살아난다고 이라고 해서 경찰에서 동원해 가지고 그걸 할 수 없어서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상한 말만 하면 따라갑니다. 그런 것이 다 넓은 길 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넓은 길. 인본주의가 넓은 길이고.

넷째에 넓은 길은 뭐입니까? 넷째로 넓은 길이 뭐이지요. 성경 가감. 그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8절로 19절에 보면은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 가감이란 성경에 없는 것을 더 보태서 말해도, 성경에 없는 것을 보태 말하는 것도 그것도 넓은 길 가는 사람, 멸망 길 가는 사람,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도 멸망길 가는 사람이라 그말이오. 또 성경에 있는 것을 빼는 사람도 멸망길 가는 사람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가감하는 것은 다 멸망 길 가는 사람이라. 그게 다 넓은 길 가는 사람이라.

그것은 성경에 없는 것을 더하고 있는 것을 빼는 것은 누구 따라가는 것입니까? 그게 누구 따라갑니까? 하나님 따라갑니까 누구 따라갑니까? 성경에 없는 것을 더 가하고 있는 것을 감하는 것은 누구 따라가는 것이지요? 마귀 따라가는 건데 사람 따라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게 사람 따라가는 거라. 사람 생각, 사람주의, 사람 말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다 넓은 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신 신앙, 고행 신앙, 인본주의, 성경 가감주의 이것이 다 넓은 길 가는 신앙입니다.

좁은 길 가는 신앙은 뭐인가? 요거 간단하게 이제, 또 내일 새벽에 다 나오면 하지만 못 나올 터이기 때문에.

좁은 길 가는 것은 첫째가 뭐입니까? 성경주의입니다. 천인 만인이 거부해도 성경에 말했으면 믿습니다. 천인 만인이 다 옳다고 주장을 해도 성경에 아니라 했으면 부인합니다. 성경같이 부인하고 성경같이 인정하고 성경대로 할라 하는 요 성경 주의.

‘성경이 뭐라 했느냐?’ 아무리 천인 만인이 뭐 어떤 사실이 뭐 무슨 사실이 있다 어떻게 해도 성경대로만 믿고 성경 에 없는 것은 다 부인하는 것이 그것이 좁은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 나오고, 뭐 어떤 사람이 살아 나와도 그것을 성경이 아니면 부인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미혹이 없습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천 가지 만 가지 사이비한 그런 미혹들이 그 사람에게는 접해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 성경주의, 성경대로 믿는 거. 성경에 하라는 거는 하고 하지 말라는 거는 안 하고, 성경이 가라 하는 데만 가고 성경이 중단하라면 중단하고, 성경이, 양도 종류도 꼭 성경대로, 분량도 성경대로, 성경에는 요만치 하라 했는데 이만치 하면 그거 틀렸어. 양도 종류도 꼭 성경대로, 양도 종류도 성경대로, 때도 성경대로, 꼭 성경대로 하는 요것이 좁은 길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길은 뭐이냐? 넓은 길은 인간 생각대로, 모든 세상 형편 사정대로, 그 모든 세상에 보고 듣고 보이는 그 모든 것대로 그거 따라가는 것은 다 넓은 길 가는 것이요, 성경대로 하는 그것이 좁은 길 가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는 하나님주의, 이거는 뭐 시간 너무 많아서. 하나님주의라 말은 하나님 한 분만을 전부로 삼는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만 말하면 사랑도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나님만 사랑하라.” 부모는 어짜고? 자녀는 어짜고? 부부는 어짜고? 하나님만 사랑해야 된다는 요것이 좁은 길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다니? 그러면, 부모 자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수도 사랑해라, 인간을 사랑해라, 부모를 사랑해라, 자녀를 사랑해라, 부부를 사랑해라.” 하나님이 사랑해라 하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그 인간이 아무리 원수 노릇을 해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은 변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것도 뭐 해석할라면 얼마나 돼야 되는데.

또, 좁은 길 가는 사람은 뭐이냐? 정확주의입니다, 정확주의. 정확주의는 야고보서 1장 18절에 보면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 했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고 우리를 키우기도 진리의 말씀으로 키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만 크지, 영감이나 진리의 말씀은 꼭 같습니다. 마찬가지, 한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에 딱 들어맞아야 우리 살도 되고 뼈도 되고, 진리의 말씀에 딱 들어맞아야 우리가 크기도 하고 성공도 하고 되지 진리의 말씀에 털끝만치도 어기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정확주의라, 기독자는 정확주의라. 이래도 되고 이래도 되는 게 아니라. 기독자는 정확주의.

또 기독자는 여기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계속주의라. 옳은 것이면, 옳은 것이면 죽음이 와도 계속, 죽는 그 시간까지 계속하는 것이 그것이 좁은 길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뭐 해석을 할라 하면 하나 가지고 몇 시간이나 해야 되는 데 여덟 가지를 하니까 여러분들이 잘 모를 것입니다.

한번 더 읽습니다.

미신주의는 로마서 1장 21절로 23절 보면 알고, 고행주의는 디모데전서 4장 1절로 3절까지 보면 알고, 인본주의 멸망하는 길은 창세기 4장 1절로 13절까지 보면 알고, 또 넓은 길 멸망 길 이것은, 성경 가감주의 이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8절로 19절을 보면 알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 성경주의는 마태복음 4장 4절, 7절, 10절 거게 보면은 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시기를 “기록하였으되” “기록하였으되”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경이 아니면 말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주의요. 성경 아니면 말 안 했어.

또 하나님주의는 로마인서 11장 36절,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러기 때문에, 전부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지 하나님으로 움직이지 안한 거는 하나도 없는데 엉뚱한 짓 지금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정확주의, 정확주의는 야고보서 1장 18절, 또 계속주의는 야고보서 1장 4절.

이래서, 넓은 길 좁은 길을 우리가 가서, ‘넓은 길 좁은 길이라’ 이제 그것은 넓습니다. 미신주의라 해도 그것이 이 천하에 가득 찼습니다. 미신주의가 천하에 가득 찼어. 또 고행주의라 하는 그것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행주의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고행주의는 아무 소용없어. 고행주의와 십자가주의는 다릅니다.

십자가주의는 고행주의 아니오.

광고합니다.

매일 삼십 분 기도하는 거 그치지 말고 계속합시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다 나오도록 합시다.

요새는 새벽기도 많이 줄었어요. 새벽기도 줄어서 한 칠백 명밖에 안 돼, 천 명 모이던 사람들이. 이렇게 줄었어. 이렇게 여러분들이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그말이오.

지금 뭐, 이거 넓은 길 좁은 길 이건 여러분들이 어려워서 몰라서 이거 재미가 없어. 제 재미 있는 것을 취하는 사람은 자라지 못해요. 제게 맞으면 재미 있지마는 제게 맞지 않은 건 재미가 없어. 이러나, 이 넓은 길 좁은 길 이걸 모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다 헛일하고 맙니다.

자, 새벽기도 이제 내일 아침부터 결심하고, 내일 아침부터 안 나오면 밥을 굶고 그렇게 새벽기도 내일 아침부터 꼭 나올 사람 한번 손 들어 보십시오. 이제 한번 결심을 해요. 새벽기도 안 나오거든 다리를 바늘로 찔러요. ‘이놈 왜 새벽기도 안 나오고’ 이래 가지고.

내일 아침에 이 사람들이 새벽기도 나오면 또 이 참 진리를 가르쳐 알게 할 것인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몰라요. 이거 배울라면 몇 시간을 배워야 될란지 몰라. 내일 아침에 또 이거 또 할 거라. 아직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모르면 멸망해요.

자, 이거 잠깐 말할 때에 넓은 길을 간 사람 손 들어 봐요. 자기가 넓은 길 갔다 싶은 사람 손 들어 봐. 다 넓은 길 갔어, 넓은 길. 멸망길로 갔으니까 뭐 멸망을 다른 이가 멸망시키는 거 아니라 제가 멸망시키지.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 나올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이제 실실 들고 있다. 자, 손 놓고.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 안 나오면 내일 아침 굶을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자, 그라면 내일 아침에 인제 많이 나오도록 한번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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