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2:44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인간
1980. 1. 4. 새벽(금)
본문: 창세기 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 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2장 23절에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 해와가 하나님이 주시는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범죄한 후 하나님에게 쫓겨나서 에덴동산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 생애는 다 사망을 마련하는 거 뿐이였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은 거울로 상징해서 주신 것인데, 거울로 상징해서 주신 것인데 이 에덴동산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은 복있는 현실이요 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 처소는 복이 없는 현실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동산에서 살다가 동산에서 쫓겨나서 동산 밖에서 살았는데 그들이 동산 안에서 밖에서 산 거와 같이 우리들도 복있은 현실에서 살수도 있고 복없는 현실에서 살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있는 현실과 복이 있는 동산과 복이 없는 곳이 그때는 장소가 달리 있었지마는 오늘 우리들에게는 꼭 같은 자기의 현실이지마는 복있는 현실로 살 수도 있고 복이 없는 현실로 살 수도 있습니다.
불택자들은 복없는 현실에서만 살게 됐고 복있는 현실은 다시 찾지를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택한 자들은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 대속으로 인해서 타락함으로 빼앗겼던 본 지위를 다시 찾게 된 것이요.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본 인간 지위에서 타락한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들은 이 지위에서 벗어나서 복있는 그 타락 이전의 지위와 같은 그런 지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위는 영은, 영은 이 지위를 완전히 점령해서 다시는 변동없이 이 지위를 점령하고 있지마는 마음과 고깃덩어리로 된 이 육은 이 지위를 점령해서 이 지위에서 살다가 또 이 지위에서 타락해 가지고 타락한 위치에서, 지위에서 살다가 이렇게 중복하기를, 중복하기를 수없이 하면서 타락 이전과 같은 이 인간의 본 지위, 인간의 본 지위를 자기 지위로 삼을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본 지위, 본 위치, 본 위치에서 살 수 있는 실력을 많이 마련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타락 후의 지위가 재미있고 좋아서 이 지위에 사는 모든 준비만 하고 인간의 본 지위의 준비는 하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이렇게 해서 택함을 입은 구원 받은 자이지마는 택함을 입은 구원 받은 자이지마는 인간의 본 지위에서 사는 그 실력을 마련한 것은 참 천층만층도 더 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구원입니다.
인간의 본 지위는 어떤 것이 인간의 본 지위인고 하니 모든 피조물 중에 제일 존귀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 하나님에게 위임을 받았고 또 이것을 통치하고 안 된 것들은 정복하고 이래서 통치하고 정복하여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본지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인데 하나님 같은 자가 인생이요. 하나님 같은 자가 인생이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이랬습니다. 하나님 모양으로 지음받았다. 하나님 같은 자로 지음 받은 것이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 같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행사를 하도록 되어 있는 참 만물의 영장입니다. 만물의 가장 존귀한 자인데 이것이 첫째, 해와와 아담 우리 조상으로 인해서 여기에서 범죄해 가지고 타락했습니다.
삐뚤어진 일을 해 가지고서 타락을 해서 인생은 본 지위에서 떨어져서 쫓겨났습니다. 본 지위에서 떨어져서 쫓겨나 가지고 타락된 위치에서 이제는 사망에서 사망으로, 사망에서 사망으로 점점 사망으로 옮겨 영원한 사망, 영원한 사망이라 말은 사망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점점 사망이 더 되기를 영원히 더 됩니다.
이래서 영원한 사망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요. 죽은 그대로 영원히 있다 말 아닙니다. 죽은 그대로 영원히 있단은 말이 아니고 더 죽고 더죽고 더 죽는 이것이 영원히 계속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은혜에서 떨어져서 무한하신 그 은혜가 자꾸 착수되어지고 이것이 제거 되어지고 끊어지기 때문에 무한히 끊어집니다. 무한히 끊어질 것이 있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크신데 이 은혜가 영원히 제감되어지고 삭감되어지는 이것을 가르쳐서 영원한 사망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택함을 받고 중생된 사람들은 본 지위의 이 거처를 본 지위의 생애를 영은 영원히 변동없는 계속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생을 가졌다 이랬고, 우리의 심신은 이 지위를 완전히 가진 것이 아니고 이 지위를 가졌다가 또 이 지위를 내놨다가 이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가 마귀의 자식이 되었다가 의인이 되었다가 죄인이 되었다가 자꾸 이렇게 교체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에덴동산과 쫓겨난 그 세상과 같이 오늘도 이 에덴동산 생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도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생활도 할 수 있어서 이렇게 이 인간의 본 지위에서 본 지위, 곧 에덴동산, 타락한 위치, 곧 에덴동산에 쫓겨난 세상, 이렇게 이 양 곳으로 왔다가 이 양 곳으로 왔다가 갔다가 이렇게 얼마든지 중복할 수 있은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심하고 깨어서 살면 본 지위에서 이 심신이 살 수 있고 이럴 때 새 사람이라 이라고 조심하지 안해가지고 본 지위에서 떨어지면 이것을 가르쳐서 옛사람의 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새사람 생활하다가 옛사람 생활하다가 자꾸 종복합니다. 새사람 생활하고 옛사람 생활하고 자꾸 이렇게 중복적인 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육이요.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고깃덩어리요. 영은 중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속사람 영과 이 심신이 자기 주인이 아닌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이 옛사람에게 붙들려서 이 심신의 옛사람대로 사는 때도 있고 새사람대로 사는 때도 있기 때문에 이 심신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참 중생된 자기가 되는 영이 이 심신을 가지고 영이 다스릴려고 애를 쓰고, 또 이 악령은 제가 안 뺏기고 제가 다스릴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데 우리의 마음과 고깃덩어리라 하는 것은 자유성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자유성을 하나님이 없애 버리면, 짐승처럼 없애 버리면 없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물의 영장으로 가장 존귀한 자로 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자유성을 빼 버리면 능동성이 없는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짐승같이 돼 버립니다. 자유성 없으면 짐승같이 됩니다. 영감도 짐승과 다르고, 우리 마음도 짐승의 마음과 다르고, 우리의 고깃덩어리도 짐승의 고깃덩어리와 다른 그 이유는 자유성이 있고 그 희망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심신이 하나님을 모셔서 새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악령을 제가 영접해서 옛사람으로 살 수도 있는 이것이 자꾸 교체 됩니다. 그러기에 시간마다 교체되는 것이 아니고 어떨 때는 뭐 십 분만에도 교체되고, 일분만에도 교체되고, 어떨 때는 찰나에 촛점이 아니고 촛점보다도 더 빠르게 교체가 됩니다. 금방 새사람으로 움직이던 사람이 바로 옛사람으로, 말을 말을 시작할 때에 말 시작해서 말을 하는데에 말을 하는데 내나 말은 그 말하지요. 말은 거게 대한 말을 하는데도 그 속에 마음이라는 것은 찰나에 옛사람이 됐다가 새사람이 됐다가 새사람이 옛사람 됐다가 옛사람이 새사람 됐다가 이렇게 마음은 재빨리 바꾸어 집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옛사람이나 새사람이나 자기는 자기인 줄로만 이렇게 알지, 자기의 심신을 망치는 옛사람 자기 인지, 자기 심신을 구원하는 새사람 자기 인지 이것을 구별하지를 못하고 그만 자기는 자기라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이것을 택자들은 구별할라고 하면은 둔한 사람이나 명철한 사람이나 다 구별을 할 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왜 구별할 수 있는고 하니, 이 구별은 인간으로서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와서 구별해 줘야 하고 또 진리가 구별해 줘야 하기 때문에, 진정코 자기가 어떤 걸음을 가든지 어떤 형편을 닥치든지 상관이 없으니까 새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고 새사람으로 살라고 이것을 소원하면 됩니다.
소원하면 진리와 성령이 새사람으로 살도록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나고 명철해도 그것이 새사람으로 살고자하는 이 중심의 간청이 없고 소원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는 그 자유성 가지고 새사람으로 살기가 싫은 그것이 자유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유성을 꺾고 강제로 진리와 성령이 그 사람이 진리와 성령이 그 사람을 새사람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가르쳐 주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강제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못나도 바로 사람의 본 지위, 성도의 본 위치에서 새사람으로 살고저 하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 살게 되고 아무리 잘나도 새사람으로 중심에 살기는 싫으면서 입술만 가지고 방편만 가지고 광고만 이렇게 떠드는 그 자는 하나님께서 새사람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어 성공한 사람 가운데에는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이 많지를 못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저 사람은 위대한 집사다. 위대한 장로다. 위대한 목사다 해 가지고 그 사람이 새사람의 생활을 잘 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해서 집은 지어놨는데 어떤 사람은 좋은 집을 모두 좋은 집을 조그마하게 지어놓고 크게 지어 놨는데 나중에 불을 가지고 와 가지고 시험을 해보니까 아주 큰 집으로 지어놓았는데 보기는 꼭 같더니마는서도 색깔 칠을 해서 꼭 같더니마는 불로 태우니까 다 타버려. 그래보니까 내부의 재료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재료가 되어 가지고 있고 이 집은 작지마는 타지 아니하는데 재료를 보니까 뭘로 했습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불이 와도 안탔다 그거요. 그래 비유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 이하에 보면 그렇게 비유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껍데기 신앙 생활하는 거는 보면은 꼭 같은 거 같지마는 알맹이가 다르다 그기요. 그렇기 때문에 껍데기 볼 때는 꼭 같은 생활했다. 두 여인이 (안따라오면 생활이 변화 안돼 말씀만 들으면 사람이변화되야지 사람 변화 안돼면 소용있는가 졸면 안 되요. 두 여인이 메를 가는데 메가니까 그기야 꼭 같은 껍데기 생활하지 않소? 또 두 사람이 누워 자는데 똑 같지 않소.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꼭 같다 그거요.
그러나 하나는 멸망하고 하나는 구원 얻었다 그렇게 기록되지 안했소? 이러니까 인간의 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거까짓거는 아주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은 허무한 것이요. 우리가 이것을 그렇게 이것은 다라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 그러냐? 당시 아브라함이든지 노아든지 그런 사람을 어떤 사람이 알아줬소?
그 알맹이 그러츰 다른 줄 누가 알았소? 노아를 다 조롱했는데, 홍수가 날 때도 다 조롱했는데 그 사람들이 죽을 때에야 알았지마는 죽을 때 알아도 똑똑히 알았습니까? 바람이 이래 불고 물이 이래 치거나 내리니 배 저까짓게 견디겠나? 아무 것이도 배 가지고 있는데 그 배도 절단나고 그 배도 절단 났으니 저 배도 절단나지 이렇지, 그들이 다 노아의 위대함을 노아의 이렇게 구원얻음을 그들이 못 보고 죽었습니다. 모르고 죽었소. 그들도 같이 다 멸망할 자로 알았지, 그가 구원 얻는 걸 몰랐다 이기요.
당시 아브라함을 그까짓 거 누가 알아 줬겠소? 아무도 아브라함 알아 준사람 없었소, 그 당시에. 그 이웃의 몇 사람이 알아 줬지 온세계 전인류가 인류가운데 제일 큰이가 아브라함인 줄 누가 알았소 알기를. 다 같이 밥먹고 옷 입고 농사짓고 양 먹이고 이래 사는데, 속에 중심이 문제라 그 말이요.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 보시는데에 그게 문제입니다.
이러기에 껍데기 생활보다 또 다른 사람의 말하는 그것보다 자기가 인정되는 그것이 크고 자기가 인정되는 그것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크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사람의 논평하는 것도 매우 적은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그 판단도 아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안다. 나는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다 아시는 분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터이니까, 내 눈은 당달 봉사와 같은 눈이고 하나님은 보지 못하심이 없는 이런 전지한 지혜를 가지고서 나를 판단하실 터이니까 내가 그 앞에 설 때 어찌 될지 이것 때문에 내가 항상 괴롭다. 무거운 짐진 거와 같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타락한 위치와 성도의 본 위치 이 양편 생활을 얼마든지 중복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옛사람으로 살다가 새사람으로 살다가 이것이 바꾸어지는 것이 어떻게 빨리 바꾸어지는지 모릅니다. 뭐 시간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고 분 초를 가지고 다툽니다. 그런께 분 초보다도 더 빠릅니다. 이거는 찰나에 바꾸어질 수 있소. 찰나에.
왜?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은 찰나에 완전히 태도와 행동을 바꿀 수 있은 이렇게 재빠른 빠른 존재입니다. 몸뚱이야 그기 아무리 빨리 자기 몸을 이동할라고 해도 그렇게 이동이 됩니까 어데. 그것도 많이 연습한 사람들은, 내 언제 일본 있을 때 보니까 위에서 그 앉았는 걸 칼로 가지고서 아주 격검 잘 하는 사람이 칼로 가지고서 위해서 고함 빽지르면서 탁치는 데 벌써 그사람은 몸뚱이가 칼을 피해서 거기서 나와서 앉았다 말이요. 우리 같은 사람이야 탁 거리면 벌써 거기서 옮길려고 생각도 하기 전에 옮길려고 생각도 하기 전에 벌써 칼 맞았을 것이라그 말이요.
이거 연습하면 그렇지마는 그 우리 마음은 그까짓 걸로 비교할 수 없소. 마음은 1초동안에 우주를 몇십 바퀴를 돌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라 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어떻게 빨리 이 마음이 중생된 영을 주격으로 영접했다가 또 악령 악성 악습을 주격으로 영접했다가 뭐 이래되는 것이 그 찰나에 몇 번이든지 바꿔 질 수 있도록 이렇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깨어있어라 그 말은 새사람으로 사는 것을 계속해라 그 말이요. 그러기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는 이것을 연습을 해서, 또 자꾸 이런 자기가 뭐인지 모르겠어. 이러니까 이런 형편에 볼때 아! 이 자기 이것이 이 내라는 이 내가 이거 원수 내로구나. 이 내가 참 내로구나. 자기 현실에서 자꾸 찾아야 돼. 현실에서만 나타나니까 아.옛사람 이놈을 아! 이것이 나 아닌 나인데 이건 참 멸망할 내다. 이놈은 죽여야 되겠다. 요놈이 폭 숙여가지고 안 나옵니다. 안 나오고 있다가 나올 수 있는 고런 기회에 대가리를 들고서 쏙 나와 버립니다. 이러니까 주인이 뭐인지 모른다 그 말이요, 주인이 무인지. 그러기에 이 마음은 참 예민하지마는 그보다 더 몇백 배 몇 천배 예민한 그 영과 악령이기 때문에 이 주인을 몰라. 모르고 모를 만침 바꿔 들어선다 그거요.
이러기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 가지고 요것을 평소에 한번 구별하면 고걸 놓지 아니하고 요거는 분명이 내다. 요거는 분명히 내라는 나인데 요거는 나를 내 심신을 망치는 내 생애를 망치는 생애를 하는 내다. 요놈을 자꾸 익혀서 요거를 요렇다. 요거는 요자다. 요것을 낯을 익혀 놓고 그기다 간판을 써서 못을 박아 놓고 요거는 나 아닌 내요. 요놈은 옛사람 내다. 요놈은 요걸 내인줄 알면 내 심신은 죽는다.
또 새사람 자기도 요렇게 알아서 요것을 살펴가지고 똑똑히 알라 그 말이요. 자다고 일어나도, 암만 급경에 일어나도 이것을 알려고 그러면 자기가 하늘나라에 유익된 일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데 이 일이 싫다 그 말이요. 그거는 두 말할 것 없이 옛사람 아니요?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그걸 번연히 아지마는 그 말은 하지를 못하고 그 말은 하기가 싫고 어쩐지 부득이 분명히 이거는 옛사람의 노름이요. 이거는 새사람의 노름이라는 것을 알고도 새사람의 노름을 이걸 말은 제가 하면서도 새사람 노릇은 못하고 옛사람 노릇으로 이렇게 하게 된다 그기요.
(졸면 헛일이야 졸면 도가 안 들어가. 졸면 도가 안들어가 망합니다. 예배 드릴 때 조는 것은 피곤해 그런 것도 있지마는 그 속에 도가 살아 역사하지 않는 그 증거인데 그러면 모든 판단이 거꾸로요). 옛사람이 되면 전체가 망할, 생각도 망할 생각, 듣는 것도 망할, 망하도록 듣고 모두가 듣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전체가 멸망할 것 뿐입니다. 새사람으로 살 때는 전체가 구원 이루는 것 뿐이요.
이렇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이렇게 구별하는 이 일을 많이 연습해서 자다가 깨도 이것은 옛사람이라. 아무리 좋은 때나 나쁠 때도 옛사람이라. 이거는 새사람이다. 이것을 구별해야 되지. 옛사람과 새사람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나는 내지. 나는 내지 이렇게 셍각하는 사람은 헛 일입니다. 자! 내가 둘입니까 자기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요? 네, 우리가 다 알지요.
둘이라고 지금 논리적으로 다 알고 있지요. 이게 새사람이가 이게 옛사람인가? 구별하지 아니하고 살 때는 새사람 옛사람 구별하지 아니하고 살때, 새사람 구별하지 아니하고 살 때 그럴 때 많지요? 새사람 옛사람 구별하지 아니하고 살 때, 그 때는 옛사람일까? 새사람일까? 옛사람인지, 옛사람 자기인지, 새사람 자기인지, 참 자기인지, 자기 심신을 망치는 자기인지 요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살 그때는 옛사람도 아니고 새사람도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하나도 없습니까? 그러면 그럴 때는 새사람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이렇게 알고 있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이거는 내 심신을 망치는 구원을 망치는 옛사람이라 요렇게 사는 것이 참 영생 가진 내가 사는 것이라. 요것은 참 내가 사는 것이라, 요거는 하나님과 연결된 참 내가 사는 것이라. 요게 의인이라. 요게 영생을 가진 내라.
요렇게 구별을 하면서, 구별을 하면서 옛사람을 미워할 고때만이 옛사람을 미워하면서 옛사람을 대적하면서 사는 그때만이 새사람인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봅시다. 예, 이것입니다. 대적하지 아니하는 자는 환영하는 자요. 대적해야 될 고때에 대적하지 아니하는 그자는 환영하는 자입니다. 환영해야 될 고때 환영하지 않는자는 대적하는 자입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옛사람을 대적하는 이 대적하는 이때는 대적해야 되는데 옛사람을 대적해야 되는 것이 하루 몇 번이나 닥칩니까? 하루 몇번이나 닥치요? 하루 한 스무 번 닥칩니까? 대적해야 될 그 시기가 끊을 사이 없이 계속됩니까? 열 시간만에 한 번씩 있습니까? 하루 백번 있습니까? 자, 하루백번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대적해야 되는 고 대적해서 싸워야 되는 요 대적해야 되는 요 대적하는 고 시기는 기회는 찰나도 끊어짐이 없이 계속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예 요겁니다. 요것이요. 계속입니다.
이걸 잊어 버릴때는 벌써 옛사람으로 옛사람이 돼 버렸소. 왜 그 사람이 됩니까? 세 가지 우선 말했는데, 첫째가 하나님만 상대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잊어 버리면 고만 그거는 옛사람이요. 또 자기 현실에 어째야 돼요? 현실에게 피동이 되어야 돼요? 현실을 다스려야 돼요?
이 사람이 와서 이 말을 하니까 그 말이 쏙 귀에 들어 오면서 그게 지금 하니까 아무리 어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진리를 받아 가지고서 진리로 자기가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참고요. 자기 속에서 영감과 진리로 중생된 영, 새사람이 들어서 새사람이 들어 가지고 그거는 합당한 진리다. 그거는 환영해야 된다. 그거는 배워야 된다. 영접해야 된다. 자기가 주체가 돼 가지고서 그 다음에 그걸 상대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거게 피동이 아니야. 거게 피동이 아니고, 여게 자기 안에서 자기 안에게 피동 돼 가지고서 그걸 상대합니다. 이것이 다스리는 것이요. 환경의 산물이 되면 안됩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그것이 되면 안됩니다. 환경을 그것을 자기가 하나님으로 인한 것으로 접촉을 해야 됩니다. 그게 다스리는 것이요.
다음에 지키는 게 있는데, 이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는데 이거는 자꾸 자기가 생각을 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깨달은 것이 그것이 하루 이틀에 된 것이 아니고 벌써 그것을 생각하고 깨닫는 것은, 또 깨닫고 또 더 깨닫고 더 깨닫고 깨닫는다고 다 깨닫습니까? 다 깨달은 사람 없어. 자꾸 깨달아 가지요. 자꾸 깨달아 가니까 그거는 평생 공부라, 평생 연구고, 그 연구가 앞선 사람은 뒤선 사람들을 다 알아요. 보면은 다 알아요. 앞선면 고면은 자기 뒤선 사람은 고면은 환하게 다 압니다. 뒤선 사람은 앞사람 몰라요.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새사람으로 옛사람으로 요렇게 사는 요것이 아주 재빨리 교체가 되는데, 새사람으로 사는 고것이 인생의 본 지위에 사는기라. 본지위. 하나님 다음 피조물 위, 본 지위에서 사는 것인데 요게서 사는 생활은 이제 말한 대로 고 세가지. 하나님만을 상대해 가지고 하나님으로 서로 주고 받고 해. 하나님만을 상대해가지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산을 지키고 자기 현실을 다스리고,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것만 있게 하지 요것만 네가 지키지 딴거는 못 들어 오게 해라. 요게 그거라.
자기 현실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온 것이 아닌 것은 용납지 안해. 용납지 않는다 그 말은 자기 현실에 하나님으로 인한 고 사실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 접촉하지 발견하기 전에는 접촉하지 않는다 그 말이요. 다음 계속할 것이니까 잘 배워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