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12:48
노를 풀어 드리고 기쁘시게 하는 것
1985. 12. 1 주일오후
본문: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 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 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 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담대하여」 여기 담대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담대는 무엇 을 상대해서 우리가 담대하여야 구속 받은 자로서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여게 담대는 세상을 상대한 담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했을 때에는 담대치 못 한 것은 죽을까 봐 담대치 못하고 비겁했고, 또 우리가 이 세상에 필요 있는 그런 모든 행복스러운 그런 것을 우리가 가져오지 못하고 빼앗기고 상울까 해서 담대 치를 못했고 또 우리가 어떤, 땅에 있는 그런 것의 그 능력을 협조를 받아야 될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모든 참된 이치를 우리가 알게 됐습니 다.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은 주님 한 분에게 주권되어 있지 천 인 만 인이 죽는 그 런 방편이라고 그런 세력이라고 우리를 죽일 수 없고 다만 우리를 죽이는 이도 살리는 이도 주님 한 분만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생사에 대해서 주님이나 두려워할까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세상에 있는 것을 두려워 할 리가 없게 됐습니다. 또 우리가 과거에는 이런 것에게 얽매이고 저런 것에게 얽매 여서 우리의 모든 흥망 성쇠가 어떤 무엇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 을 두려워했고 항상 그 비위를 맞추고 그 종이 되어졌지마는 이제는 우리가 흥망 성쇠가 주님 한 분에게 주권되어 있는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과거에 공연히 헛되이 종노릇하고 그렇게 비겁했던 그런 것을 우리가 다 벗었습니다. 또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일을 하는 데에는 땅에 있는 수만 가지의 그런 것들의 다 협조를 받아야 되는 줄 알았기 때문에 항상 그것들에게 종이 되고 참 창기와 같 은 그런 인격성을 가지고 모든 데에 다 아부해야 되겠고 다 모두 붙어야 되겠고 이렇게 했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 한 분에게 있는 이 모든 것을 알 았기 때문에 사람이 보기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이 보이고 땅의 것을 염 려하는 것도 같이 보이지마는 하나님 한 분에게 주권돼 있기 때문에 그분의 비위 를 상울까 해서, 그분을 섭섭하게 할까 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큰 구속을 줬는데 이 구속에 조그만침이라도 거리낌이 될까 해서 그렇지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담대함을 가졌습니다.
가져서, 세상에 대해서는 상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상대해 가 지고 그 분을 상대해서 그분의 노를 풀기 위해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고, 모든 일도 물건도 그분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이 지 그분 외에는 상대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이런 사람이 됐습니다. 이제는, 과거에는 세상을 상대했던 것이 이제는 주님 한 분만을 상대해야 되는 이 진리를 우리가 깨달았기 때문에 두려운 것도 한 분, 또 노엽게 할까 염려되는 것도 한 분, 또 기 쁘시게 해야 되겠다 하는 것도 한 분 간청할 분도 한 분, 또 의뢰할 분도 한 분, 지도받을 분도 한 분, 의논할 분도 한 분, 관계를 맺을 분도 한 분, 이분 한 분과 모든 것을 하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우리가 다 아닌 줄을 알았기 때문에 다 그런 것은 있으나 없는 거같이 여겨서 한 분만을 상대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상대가 수많은 인간과 만물을 상대하지마는 실은 껍데기로는 상대하는 것같지마는 속으로는 주님 한 분만을 상대해 가지고서 그분과 상대하는 그것을 모든 사람과 만물에게 대해서 그대로 우리가 선포하고 그대로 또 땅 위에 서 움직이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담대함을 우리가 가져야 신앙 생활 하지 이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면 신앙 생활 못 합니다.
그러기에, 층층 시하라, 층층이 모든 주인을 모시고 있고 사장을 모시고 있고 어른 을 모시고 있고 또 상관을 모시고 있고 모든 거 층층이 이래 가지고 있어도 우리 는 모든 것 다 이제는 해방됐고 한 분만 상대하는 이 사람이 되어져야만 하는 것 입니다. 그러기에 만일 자기 위에 상관이 열 층어리가, 열 계급이 상관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모신 상관은 한 분 주님뿐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우리에게 할 때에 무슨 일을 하든지 할 때에 그것이, 보기 에는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한다 할지라도 실은 그를 부리시는 분이 있고, 그를 부리시는 분이 있고, 또 그분을 부려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분이 계시기 때문 에 우리는 그분 한 분만을 상대해서 하는 고로 내게 직접이나 간접이나 무슨 일 이든지 그것이 내게 나타났을 때에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을 알 수 있는 고로 주 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그 법칙대로 거게서 전달돼 온 것이라고 하면은 우리는 전달해 가지고 온 그 전달 기관을 우리는 상대하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전달된 그 명령을 받을 때에는 오직 주님 한 분이 주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전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 전달이라면 우리는 죽도록 거게 충성해야 됩니다. 이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한 주님의 명령이 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명령을 가져 온 그 사람 앞에서 그 명령대로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죽도록 충성해 야 됩니다. 그러면 충성하는 것은 사람 보기에는 사람에게 하는 것 같지마는 그렇 지 않고 우리는 실은 한 분이신 주님을 상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속해서 모든 일에 복종하고 충성하다가도 그 명령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온 명령이 아니고 다른 것이 왔으면은 그것은 주님의 부리시는 그 자로 통해 오지 안했고 주님에게 반역하는 역적으로 통해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반역 의 기를 들고서 강하게 투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명령도 그러하고, 또 상대도 그 러합니다. 어떤 것이 왔든지 주님이 계약의 법칙에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은 사람 이 내게 주나 그 사람이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에게 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관인 줄 알고 우리는 아주 존대해야 됩니다. 존대 해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은혜를 나에게 전달한 그 전달함에 대해서 감사를 하지 그분을 주인으로 알고 감사해서는 안 됩니다. 말은 안 해도 ‘이렇게 이렇게 이런 은혜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고서 외나 그 주인은 주님이신 것을 우리 가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낳은 데 대해서, 우리를 낳은 부모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 중에서는 제일 우리가 존대해야 됩니다. 오계명, 제일 존대해야 됩니다. 그러나 부 모가 나를 낳았다고는 우리가 생각지 안하고 우리를 낳은 그 은혜는 주님에게 감 사를 하고, 또 부모가 우리를 길러준 데 대해서 감사합니다. 길러준 데 대해서 감 사합니다. 그러나 길러 주신 것도 감사하지마는 우리를 기르게 하신 이는 주님이 모든 자원도 주셨고 그 마음도 주셨고 또 성의도 주셔 가지고 했기 때문에 우리 를 기르신 것은 그 양육의 기관은, 하나님의 심부름은 부모가 했지마는 양육하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깊은 사은은 주님 한 분에게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꼭 요렇게 우리가 구별해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담대하여 요 담대하다는 요것을 똑똑히 우리가 깨닫고 담대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세상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고 그게 주권자인 줄 알았고 그것이 원동인 줄 알았고 그것이 시발인 줄 알았고 이랬지마 는 알고 보니까 그것은 주님이 은혜의 기관으로 쓰셔 가지고서 이와같이 하기 때 문에 인간 중에는, 내가 세상에 출생됨에 대해서는 주님에게 감사하고, 다음으로는 주님이 인간을 통해서 나를 출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다음으로서는 나를 출생해 주신 그 부모에게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계명 지나고 난 다 음에는 부모를 공경해라 하는 그 오계명이 인인 관계의 계명으로서는 제일 첫 계 명으로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이 담대라고 하는 것을 요것을 단단히 구별해서 요 담대를 확실히 구별하면 이만 해도 우리는 소경 을 면하게 되는 겁니다.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뭐인고 하니 「원하는 바는 차라 리 a뤄쏭i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 이라」 그말에는 우리가 이 영육이, 영육이 하나가 돼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 는 이거 중량보다도, 이 중량보다도 우리가 이 몸을 떠나서, 이 몸을 떠나는 것은, 이 몸이라는 것은 이것은 다 제한된 건데 우리가 다 벗을 몸들이요 버릴 몸들입 니다. 버리고 이것을 신령한 것으로 변화시켜 가지고 가지 이 몸은 누에가 꺼풀을 벗는 거와같이 이런 것은 벗고 다 신령한 것으로 변화해 가지고 우리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영으로 계시지 안하고 영육으로 계십니다. 주님은 영육 으로 계시고,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십니다.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시고, 또 주님은 인 성은 영육으로 계시고 이리 하지마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안하고 거리끼지 않습니 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앞으로 거룩하게 변화될 사람인 것입니다.
이래서,여게 「몸을 떠나」 그말은 이 모든 시간과 공간과 이 모든 이런 저런 세 력들에게 제재를 받고 있고 제한을 받고 있는 이 약한 몸 이거 어서 벗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서 주님과 함께, 이 우주에도 일 초 동안에 뭐 우주 몇천 바퀴라 도 돌라면 돌고 또 영계도 얼마든지 돌아다니면 돌아다닐 수 있고 그럴 때 우리 가, 부활해 가지고, 성화를 받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요새 뭐 우주를 뚫은 걸 무슨 비행기라 하던가 관도탄이라 하던가 그 아주 지금 광선의 속도를 가지고서 이래 하고, 또 원자의 속도를 가지고 다니니까 아주 빠르다고 생각하지마는 그런 것이 우리 일 분 동안에 도는 것을 그런 거는 뭐 몇십 년 돌아야 따라오지도 못합니다.
뭐 그런 게 따라오지도 못하고 걸거쳐서 다, 걸거쳐서 다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부활한 몸은 그런 몸입니다. 이제, 원자의 또 광선의 속도니 하는 그런 것이 부활 한 몸에게는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따라오지도 못하고 또 우리 가는 데 가지도 못하고 그거 그저 말하자면 병신이 누운뱅이가 고무 쪼가리 배에 대고 자꾸 이래 들이 미는 거 그런 거와 같지 우리 부활한 사람은 뭐 날아다니는 이런, 만일 날아 다니는 이런 비행기 타고 날아다니는 데 비유하면 그런 거는 이 누운뱅이가 그저 땅에 고무대고 밀고 다니는 거 한가지라. 그뭐 그 관도탄의 속도니 뭐 광선의 속 도니 그런 거는 느려서 상대할 수가 없어. 그런 거는 그거 있으나 마나 한가지라 그말이오. 아무 필요 없어.
이런데,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어서, 어서 성화 돼 가 지고 그리스도로 더불어 이 시공과 모든 생사를 초월한 이런 신령한 몸으로 그렇 게 부활해 가지고 주님하고 같이 있기를 원하는 요것이 우리가 소원하는 소원, 또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좋아함 이런 것이, 우리는 땅의 것이 있는데 이 땅의 것과 이 성화 돼 가지고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같이 있는 것과 이 중량을 달 때에, 이 중량을 달 때에 이 중량이 무거워야 되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이 중량이 무겁 지 안하고 이 중량이 항상 땅의 것이 무거운 사람은 그 사람은 죽자껀 해도 마지 막에 결론은 땅에 속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을 우리가 갖추어 준비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몸을 가지고서, 이 영육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이런 거 저런 거 재미 있는 일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재미 저런 재미, 또 이런 무슨 그 기계 저런 기계, 이런 편리 저런 편리 뭐 이십 세기의 과학이면 편리하다고 많이 그라 지마는 이제 그런 것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신 령한 몸으로 변화를 해서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있는 그것이 이것으로 비교 할 수 없어 더 좋은 이것을 자꾸 연구를 해 가지고서 그 가치가 훨씬 높고 중량 이 훨끈 무겁고 우리의 마음이 거게 쏠리기를 차차차차 처음에는 땅의 것이 십분 지 구를 차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것이 십분지 일 차지했다가 차차차 이 게 바꾸어 가지고서 땅에 있는 거는 십분지 일을 차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건 십분지 구를 차지하고, 마지막에는 십분지 십이 그리 다 가 버리고 이제 여기 있는 것은 부득이 해서 내가 있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 수입을 하나 바라서 있지 여게 있기 싫다 하는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자꾸 변화를 받아 야 됩니다.
변화받는 것은 성경 말씀을 자꾸 읽어보고 따져보고 따져보고 뭐, 따져보고 또 모 든 사람들을 보고, 세상에 있는 거 이런 거 저런 거를 보면은 처음에 땅 위에 부 러운 것이 많다가 땅 위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고, 부러운 것은 전부이 하늘에 있는 것만 소원되고, 하늘의 것만이 지금 소원이 되고 부럽고, 이제 땅 위에 있는 것도, 땅 위에 있는 것도, 땅 위에 가지고 있는 것도 이거 뭐 할라고 가지고 있느 냐? 이대로 가진 이거는 아무 소용없다. 이대로 가지고는 전부이 썩은 것뿐이요 전부 그 형벌받을 것뿐이지 하나도 가치 없다. 이것도 이것도 보니까 이 썩은 건 데 이게 썩었고 이게 약한 것이고 이게 욕된 것이고 이게 수치스러운 것이고 이 게 전부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고 있는 이거 모두 다 혈육의 것들인데, 가지고 있 는 건 뭐 할라고 가지고 있느냐? 이것도 이대로 가진 거는 아무 소용없다. 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은 혹 이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바꾸어질까, 강한 것으로 바꾸어질 까,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어질까,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질까 해서 바꾸기 위해서 가지고 있지 이대로는 이까짓 거 아무 매력도 없고 아무 가치 없고 아무 그 정이 안 붙는다, 요 사람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피의 능력이 있고 영감의 능력이 있고 진리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은 처음에 받지 못하는 것이지마는 진리는 우리가 읽으면 돼. 성경은 읽으면 돼요 읽으면 자꾸 읽고 연구하고 하는 가운데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차차차차 모 든 평가가 바로 됩니다. 모든 평가가 바로 돼. 세상 것은 백 점,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은 한 점 이랬는데 성경을 자꾸 읽으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점수 가 높아 가지고서 이거는 오십 점, 이 땅의 것이 백 점되던 것이 자꾸 깎여 가지 고서 오십 점, 자꾸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양심 쓰고 자꾸 고대 로 신앙 생활 하나 둘 해 보니까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거는 백 점, 땅에 있는 거는 영 점 자꾸 이래 바꿔진다 그말이오. 이것은 해 봐야 되지 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슨 걱정 근심 있는 거는 대개 보면은 하늘의 근심 걱정이 아 니고 땅의 근심 걱정입니다. 땅의 근심 걱정이 있어 가지고서 뭐 그 신앙 있는 사 람이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 이 사람 그 뭐할라고 걱정하노? 걱정하지 말 아라.’ 걱정 안 해도 될 일 자꾸 걱정하고 죽겠다고 합니다. ‘그건 걱정 안 해 도 된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라면은 이 사람, 참 남의 일은 식은 죽 먹듯이 그 렇게 쉽게 말하나? 너는 그래도 내게 대해서 네가 지금 안 닥쳐 봐 그렇지 너는 지금 그래 말하지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나? 제 딴에는 어렵다 합니다.
어렵다 해. 아, 이 해와야 그 선악과 그거 ‘아, 먹고 싶다. 또 보고 싶다. 참 탐스 럽다. 지혜 얻을만 하다.’ 죽을 지경인데 ‘이거 하나님 배반해도 이거 먹어야 되겠는데. 남편 다 집어던져 버리고 이거 나 혼자라도 이거 먹어야 되겠는데.’ 이라지마는 그게 필요가 없다. 그거 네가 공연히 배암 그놈한테 꼬여 가지고서 지 금 꼬여 가지고 그런 것이지 실은 아무 소용없는 거다. 그거 버려 버리라’ 이라 니까 그거 그런 소리 말라고서 이렇게 하지마는 나중에 먹고 나니까 뭣이 보입니 까? 먹고 나니까 뭐 좋습니까? 이제 그걸 배암을 쫓아내고 성신의 감화가 오면 ‘이거는 해독 중에는 다 해독이고 제일 못쓸 것이다’ 그러면 실상은 그런데 그 렇게 배암이 와 놓으면 그렇게 꾀워서 꺼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벗어 나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렇게 우리의 소원은 어서 이 썩어질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 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주님과 이거 때 문에 거리가 멀고 한 이것이 어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 가지고 주님과 항상 동 거 동행하고, 이 우주라는 우주도 전부이, 우주라는 것도 내 정원을 삼아 가지고, 우주를 내 정원을 삼아 가지고서 이렇게 다 돌아보고 어제 우리가 어데 뭐 누가 말하기를 ‘야, 거기 한번 거게 좋은 아주 나무가 있다.’ 해서 ‘그러면 한번 기 도원에 가서 한번 그리 들려가자.' 고 가는 길처라. ‘한번 가 보자’ 이라니까, 아주 잘 꾸며 놨습니다. 잘 꾸며 놓았는데 이거 내가 보면서, 이래 보면서 그 모두 ‘아따 야 이거 참 좋다. 좋다.’ 하는데 이제 나는 뒤에 설설 뒤에 따라 가면서 이제 보고서 ‘참 이까짓 거 뭐 우리 정원에다 보면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잠시 후면 우리 집 정원을 한번 구경을 만물에게 시킬 것인데 우리 정원은 굉장할 거다. 우리 정원은 굉장할 거다. 바다 가운데도 굉장한 식물들이 꽉 있지, 또 그 어족관보다도 굉장한 것들이 놀고 다니고 있지, 우주에는 그렇지, 또 이거 뻔쩍뻔쩍하는 별들이 이리가고 저리가고 이리가고 저리가고 뭐 이 우주의 정원이 굉장할 것이고, 영계에는 더 굉장할 것이고.’ 그걸 가만히 생각하며 ‘주여 이 어 짠 일입니까? 어떻게 해서 주님이 우리를 택해 주셨으며 십자가의 피를 흘려 주 셨으며 이와같이 중생시켜서 깜깜한 우리에게 금생 내세 모든 존재를 환하게 바 로 알도록 이렇게 주님이 이렇게 계시를 우리에게 주셔 가지고서 알게 하셨습니 까?’ 거게서 가만히 있으면서 그래 그걸 떡 한번 생각하고 보니까 이만한 나무 가 있는데’ ‘ 이런 나무는 얼마나 줬을꼬?' 옆의 사람이 물어요. 옆에 사람이 물으니까 하나 있다가 ‘아마 이런 거는 아마 몇천만 원대 갈 겁니다.’ 이라는데 그게 몇천만 원 갈 거라 하고 그라는데 그것도 아이들 소꿉장난도 분수가 있지 그 나라를, 그 정원을 한 번 생각하고 보니까 아무 볼 게 없어. 땅 위에 이런 거 저런 거 다 이거 뭐 두려워서 그만 꼼짝도 못 하고 이리 갈라고 하니까 이리 거 석하니까 또 요래 요거 해야지. 여게 종노릇해야지 여게 종노릇해야 지 꼼짝을 못 하는데 주님을 척 바라 보고 보니까, 그분이 모두 주권하고 있으니까 ‘다 물러가 거라’ 이거는 다 아무 종 될 게 하나도 없어. 붙들려 매일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 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 라’ 우리는 이 세상에 있든지 세상을 떠나든지 그분이 권세도 제일 큰 권세 가 지고 있지,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시지,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지, 또 그분이 지금 도, 늙었으면 하지만 늙지 안하고 쌩쌩해서 크고 작은 거 하나도 빠짐 없이 초롱 초롱하게 심지어 저 식물 하나에도 그 세포로 말하면 사람들 아마 몇만이나 된다 하는지 몰라도 사람들이 아는 것은 백분지 일도 몰라요. 모르는 게 더 많아요. 앞 으로 세대가 지나가면 저 속에도 더 많은 게 나와요. 그렇게 세밀해도 ‘야 너거 머리털까지 다 내가 세고 있어 머리털까지 다 세고 있어. 염려하지 마.’ 이분을 척 만나고 보니까 ‘공연히 떨었구만. 공연히 염려했구만.’ 이분 하나 만나고 보 니까 고만 만족이라. 이분 한 분으로써 뭐 전부 다 됐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 고 우리를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시니까 그 외 딴거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예수밖에 무엇을 달리 찾아 보리요, 복과 영생 예수니 더 원할 게 없어. 뭐 예수님 한 분이면 다 돼요.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노라’ 이러니까 땅 위에서 어짜든지 그분 앞에 가 서 그분과 영원히 같이 살아야 되겠고, 그분 모시고 살아야 되겠고 또 영원히 그 분에게 얻어 가지고 살아야 되겠고 그분의 보호를 받아야 되겠고, 또 그분의 사랑 도 위로도 모든 은혜도 기쁨도 전부 그분에게 받아야 되겠어. 기쁨도 그분에게 받 고, 그분에게 받은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도 못해요. 그분에게 받은 기쁨, 그 분에게 받은 즐거움, 그분에게 받은 모든 편리한 거 뭐 그분 한 분이면 다 돼. 이 러니까 이분을 깨닫고 보니까 밤이고 낮이고 그분 한 분 외에 생각할 이도 없고, 바로 볼 이도 없고, 사모할 이도 없고, 위할 이도 없고, 기쁘게 할 이도 그분 하나 뿐이요, 사귈 이도 그분 하나뿐이요, 비위 맞출 이도 그분 하나 비위 맞추고 그분 을 존귀케 하는 거 외에 딴게 아무것도 없어. 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요 세 가지가 돼 야 신앙 생활합니다. 요 세 가지가 돼야 신앙 생활해요. 이거 세 가지 시작도 안 한 것이 무슨 신앙 생활을 한다 말입니까? 이 세 가지가 된 사람은 세상에서 자 유합니다. 이 세 가지가 된 사람은 세상에서 자유해. 이 세 가지가 된 사람은 세 상에서 자유합니다. 요 세 가지. 담대한 자, 몸 떠나서 이 제재받고 이 부자유한 이거 모든 불완전한 이 몸 이거 떠나서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부 활해서 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이 참 천사를 다 통치하고 천사 를 호령치고 천군 천사를 부하로 통솔하고 다닐 수 있는 이런 신령한 몸으로 부 활하는 이 부활 주님 동행 이것이 소원이 되고, 그분 한 분 외에 더 원할 게 없기 때문에 떠나든지 거하든지 자든지 깨든지 있든지 뭐 하든지 먹는 것도, 그분을 기 쁘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면 먹을 필요도 없어. 사는 것도 그렇고, 그분을 기 쁘시게 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직접 기쁘시게 안 하면 간접으로 기 쁘시게 하고, 간접으로 기쁘시게 안 하면 간간접으로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런 준비 저런 준비, 이런 모든 구비 저런 구비하는 것이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거 외에는 할 일이 없어.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뭐 가치 있는 일이 없고 그 외에는 또 전부 하는 게 다 죄라. 삐뚤어진 죄라. 그분 하나만 기쁘시게 하는 그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지. 하늘나라는 그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전부 그분 한 분만 연 결해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교파 저런 교파 있는데 나간 것이, 우리가 모두 개교회로 이 래 나간다 이라니까, 개교회라는 그 발족은 성경에 다 개교회로, 성경이 다 개교회 로 살았고 유사시에는 공회로 모였고 그 일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다 개교회지 다 그런 무슨 상존 기관으로서 노회니 총회니 그런 것이 없어요. 다 이 사건이 있 을 때에만 임시 공회로 모이고 그 사건 해결되고 나면은 다 해산돼서 모두 개인 대 하나님, 개교회 대 하나님 이렇게 지내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뭘 만들어 가지고 이래 했지. 그래서 개교회라 하는 것은 고만 직접 하나님하고 연결해 가지고서, 교회마다 하나님하고 직접 연결하고 개인마다 하나 님하고 직접 연결하고 중간에 사람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하고 직접 연결하는 게 좋아서 개인도 하나님하고 직접 연결하고, 또 교회도 하나님하고 직접 연결하고 그 직접 연결이 하도 소원이 돼 가지고서 그래서 우리 개교회라 하는 것이 발족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고는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주를 기 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고래 놓고 고 다음에 무슨 말했느냐 하면은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행 한 대로 받을라고 한다. 그러면 행함이 뭐인데? 고 밑에 보니까 기쁘시게 하는 그 것이 행함입니다. 우리의 행함은 둘밖에 없소. 오전에 둘 말했는데. 둘. 우리의 행 한 것은 둘뿐이오. 우리의 행할 것은 둘, 둘뿐인데 하나는 뭐이냐? 하나는 소극적 으로, 그분을 노엽게 한, 주의 노를 푸는 것이 우리 하나 할 일이요, 주님의 노를 푸는 거.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이 우리 하나 할 일이요. 또 할 일은 주님을 기쁘시 게 하는 것이 하나 할 일이라.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이 우리 할 일이요 주님을 기 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이 두 가지만 하면 돼요.
그러면, 두 가지 하는데 선은 뭐이냐? 선은 주님을, 그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선입니다. 악은 뭐인가?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악입니다.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뭐인가 하니 그것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산 것이 노엽게 한 것이요, 이제 기쁘시게 하는 건 주님을 위주로 중심으로 사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주님의 노엽게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뭐인가? 노엽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말하기를 ‘사람들도 두 세 증인이 있으면은 아끼지 안하고 다 죽였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이 성령과 진리 와 피로 된 이것을 업신여기는 자의 그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 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주님의 피를 속된 것 으로 여기는 거, 주님의 피를 속된 것으로 여기는 거, 주님의 피를 업신여기는 그 것을 주님이 노여워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항상 우리에게 대해서 길이 참으십니다. 참으시는 건 모르기 때 문에 이러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떤 죄로 주님이 그 형벌을 담당했 는데 어떻게 담당했느냐?’ 이것이 신구약 성경에 삼분지 일이라 하면 삼분지 일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전부 그걸 가르치고 있다 그말이오. 우리가 어떤 내 범 한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 어떤 죄로 인해서 그 죄의 형벌을 주님이 어떻게 당 하셨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항상 가르치는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씁입니다.
그런데, 뭐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셔 가지고 우 리를 그 죄에서 해방시키고 죄에서 겨우 구출시켜 놨는데, 구출시켜 놨는데, 하나 님의 공심판에서는 구출해 놨으니까 손을 대지 안해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예수 님의 대속으로 구출했기 때문에 공심판에 다시 호출이 없어요. 거기서는 그만 상 관하지 안해요. 전져냈지마는, 구원해 냈지마는, 구원해 낸 후, 이제는 주님이 구원 해 놓은 후,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대신 형벌 받으셔 가지고서 사죄를 줬으니까 네가, 내가 네 죄를 어떤 죄를 네가 지었으며 그 죄의 형이 어떠며 그 죄의 형을 내가 어떻게 받아 가지고서 너에게 사죄 줬느냐, 이것을 밤낮 가르쳐도, 밤낮 가르 쳐도 여게 대해서 아주 뭐 이런 무슨 짐승의 피, 이런 무슨 이거 뭐 짐승의 피같 이 그렇게 여기고 도무지 이 피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다 말이오. 피를 속된 것 으로, 피를 속된 것으로 여기는 그게 진노라. 피를 속된 것으로 여김으로써 주님이 진노해서 그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렇게 말했어. 이거는 구속 받은 자 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겠느뇨 이랬어. 그 분해서 전부, 그 영은 죽여 버리면 안 되니까 영은 하늘나라 가지마는 그 심신의 기능은 막 뽑아 서 막 불에 태워 죽여 버립니다. 그 심신의 기능, 이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은 애 낌 없어. 마구 뽑아 가지고 막 유황불에 태워서 영원히 태워 버립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는 형체만 부활했지 속의 기능은 지금 이제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펄펄 타고 있다 말이오. 제가 들어서 제 육체의 그뭐 심신의 기능, 마음의 기능 몸의 기 능 그거는 다 전부 유황불 구렁텅이에서 지금 타고 있다 그말이오.
이래서, 주님이 노여워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죄의 형벌을 대신해서, 참, 그 대신하기 위해서 부요도 다 냈고 존귀도 다 내놨고 권세도 다 냈고 영광도 다 내놨고 이렇게 천해지고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다 해 가지고서 우리를 사죄를 입혀 주셨는데 도무지 여게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어요. 그만 그저 ‘주님 내 죄 사해 주옵소서’ 사해 달라 하면 사해 주시기는 사해 주시는데 이러되 도무지 거게 대해서 아무 감각 없이 그렇게 상대를 하는 그것이 주님의 피를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노엽 게 하는 것은 그것이오. 우리의 죄를 모르고 죄의 형벌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그 형벌을 주님이 어떻게 해서 그 형벌을 다 담당하신 이것을 모르는, 이것을 모 르고 여게 대해서 아무 감각 없이 무시하고 지내는 그것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오.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오.
또, 우리가 순종하지 못한 게 얼마나 있으며 전지자가 입법해 놓은 입법이니까 그 입법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요구하는 그 요구와 명령이 어떻게 되는가, 그 요구와 명령을 우리가 하나도 행하지 못했는데 주님이 내가 하지 못한 걸 나를 구원할라 하니까 내 대신 내게 대해서 지성 지공법이 요구하고 명령한 그것을 대신 주님이 다 순종했으니까 주님이 내 대신 무엇을 순종했으며 얼마나 순종하느라고 힘들었 는가, 얼마나 대신 순종했으며 순종하는 게 얼마나 힘 들었는가 무슨 형벌을 대신 했으며 그 형벌을 대신하는데 얼마나 그 형벌을 대신하는데 그 힘이 들었는가, 고 통을 당했는가, 그 형을 받았는가? 또, 내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와같이 원수가 돼서, 피조물이 조물주와 원수 됐으 니까 영원 멸망 아닙니까? 영원 멸망인데, 이렇게 주님이 나와 지극히 크신 하나 님과의 이 천한 것이 이렇게 아주 영원히 밀접해서, 밀접해서 주님 동하면 나 동 하고 주님 정하면 나도 정하도록 요렇게 에덴 동산에서 처음에는 요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가 돼 가지고 이렇게 우리가 멸망 받는 것을 원수 된 이걸, 어떤 점이 원수가 됐는데 그 원수 된 점을, 어떤 원수 된 점을 주님이 책임지시고 화목하기 위해서 어떻게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화목했는가 요 것을 모르고 무시하는 것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요것을 모르면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오. 딴거 없습니다. 요거요, 핵심을 딱 찌르면 요것입니다.
백지 우리가 뭐 이런 거 저런 거 꺼집어 내놓고 이거 주님이 노여워하시는 건가 뭐인가 고만 그래 할 게 아니라 요 세 가지로 분별해야 고게 바로 돼지지 요 세 가지로 분별하지 안하면은 그게 삐뚤어져요, 마귀란 놈이 이것도 노여움이다, 이것 도 노 푸는 것이다, 암만 풀어봐야 헛일입니다. 요 세 가지, 사죄 칭의 화친 요 세 가지를 주님이 대신 담당하셔 가지고 죽기까지 하신 이 고난을 담당하신 그 종류 와 그 양과 고난받은 그 종류와 양을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오. 처음에 모를 때는 사랑하시지마는 자꾸 가르쳐도 무식하니까 귀넘어 들어 암만 가르쳐도 ‘그까짓 소리야’ 하고서 그뭐 도무지 귀넘어 듣는다 말이 오. 귀넘어 듣는 고게 주를 노엽게 하는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처음에 믿는 사람은 주님을 노엽게 하는 사람 아닙니다. 예 수를 처음에 믿는 사람은 주님을 노엽게 하지 않소. 주님을 기쁘시게 하요. 예수 를 믿어 갈수록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노가 자꾸, 노의 봉우리가 자꾸 높아져 갑 니다. 주님을 믿어 갈수록 노의 봉우리가 높아져 가고, 집사가 돼 갈수록 노의 봉 우리가 높아져 가고, 장로가 돼 갈수록 노의 봉우리가 높아지고, 권사가 돼 갈수록 노의 봉우리가 높아져 가고, 목사가 돼 갈수록 노의 봉우리가 높아지고, 전도사가 돼 갈수록 자꾸 노의 봉우리가 자꾸 높아져 간다 말이오. 왜? 자꾸 이렇게 가르치 고 가르치고 했는데 한 번 들어도 귀 넘어 듣고 열 번 들어도 귀넘어 듣고 무시 하고 거게 대해서야 아무 관심 없이 그렇게 속되게 하기 때문에 이게 노여운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가운데 차차차차 주님을 노엽게 하는 노엽게 하는 봉 우리가 커지는 사람 있고 주님의 노를 이제 풀어서 차차차차 노여워하심을 풀어 서 노여워하심이 없는 그런 사람도 있을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격발케 하는 자가 누구뇨? 이스라엘이 아 니고 누구뇨? 이스라엘 외에 누가 나를 촉분을 지르고 나를 노엽게 했느냐? 내 노를 격발케 한 자가 누구뇨? 히브리서에 보면은 ‘이렇게 완악하게 해 가지고서 완패하게 해서 주님을 노엽게 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오늘날 그의 음성을 듣거들 랑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주님을 노엽게 하지 말아라’ 이 말을 히브리서에 얼마나 많이 부탁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가서 읽어 보십시오. 얼마나 부탁을 하셨 는가? 이랬는데 그것이 주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라.
그러면, 노를 푸는 것은 어떤 것이 노를 푸는 것인가? 노를 푸는 것은 내가 주님 의 세 가지 이 대속을 내가 성경을 보고서 깨달으면서 이 대속하기 위해서 주님 이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얼마나 참고 견디고 얼마나 고난을 받아 가지고서 나에 게 이 세 가지 대속을 주신 것이지 그냥 말로만 준 것 아니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말만 가지고 안 되고 친히 당신이 이 형벌을 받아 가 지고, 친히 고난을 당해 가지고 우리에게 이제 이 세 가지 대속을 주셨는데 이 세 가지 대속 주실 때 전부이 죽음입니다. 주님은 죽기는 한 번 죽으셨지마는 죽음은 이 세 가지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래 가지고 이렇게 대속을 주신 것을 자기가 깨닫고 주님에게 부담시킨 그 종류 와 부담하신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세 가지 대속을 이제는 내가 이 대속을, 내가 이제는 보수하고 이 대속을 내가 이제는 세상과 악령과 어떤 게 와서 뭐라 한다 할지라도, 만일 내 살림 뺏들라고 하면은 살림도 지키고, 세 가지 대속도 지키고 살림도 지킬라 하다가 나중에 가서 살림 지킬라 하고 대속 지킬라고 하면 대속도 살림도 못 지킬상바르면 살림을 다 내줬으면 내줬지 대속은 안 뺏기겠다. 또 나중 에 가서는 이제 그러면 살림은 다 나갔지만 몸뚱이는 중하니까 그래도 내가 몸은 살아야 되겠다. 몸도 살고 이 대속도 보수 할라고 하니까 나중에 가서 또 세상이 들어 가지고서 ‘이놈, 대속 그거 안 내놓을라면 네 몸 절단내겠다.’ 몸을 내줬으 면 내줬지 내가 대속은 안 내주고, 마지막에는 이 생명을 뺏들라고 위협을 해도 생명을 뺏겼으면 뺏겼지 대속만은 나는 뺏기지 안하고 대속만은 이것은 거머쥐고 대속을 거머쥐고 숨이 딸칵 지겠다. 죽는 그 시간에도 대속을 거머쥐겠다. 요렇게 우리 이 자체에서 세 가지 대속을, 주님이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받은 것을 그것을 생각하고 어떤 그와같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주님에게 그런 고난 받으시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해야 될 거 아닙니까? 우리가 또 암만 어려움 받아 봤자 주님의 어려움의 백분지 일도 안 되 고 천분지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자기가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주님이 주신 이 대속을 내가 이제는 벗을 수가 없고 내줄 수가 없다, 요렇게,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이 대속의 은혜를,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요것을 뺏기지 안할라고 발발 떨고, 뺏기지 안하고 맞아도 옥 에 갇혀도 가난하게 돼져도 뭐 박대를 당해도 배척을 당해도 외로와져도 요 대속 을 안 내주고 마지막에는 죽어도 요 대속을 내주지 안하고 발발 떨면서 가지는 요것으로써 주님의 노는 다 풀어집니다. 이거 외에는 주님 노를 푸는 길이 없습니 다.
주님의 노를 다 풀고,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는 뭐인가? 이거는 주님의 노를 푸는 거. 왜? 우리가 주님의 대속을 많이 만홀히 여겼기 때문에 주님의 노를 푸는 건 이걸로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이고, 이것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되지 안해.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이라. 이거 정당 이상 하는 게 아니라 이거는 정 당한 일이지 이거는 주님이 이렇게까지 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줬으니까 이거 보 수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지 무슨 선한 일이며 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뭐 이 된다 말이오? 이것은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거는 주님의 노를 푸는 정도로서 그치는 것입니다.
끝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뭐이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내가 너 희를 사랑한 거같이 이제 주님이 세 가지 대속을 주신 이렇게 큰 힘 들여 가지고 주신 이 대속을 다른 형제에게도 내가 전해 가지고서 그 형제도 이 대속을 입어 서 이렇게 인간 영원 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 얻는, 이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 가 지고 나도 이 대속을 형제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전해 줄라고 하니까 좀 괴롭고 힘이 듭니다. 새벽 잠을 못 자고 새벽에 오늘 아침에도 일찌거니 지금 심방 가고 뭐 전도 가야 됩니다. 그것도 하고 이러는데 힘이 들어도, 어려워도 전할라고 애를 쓰고, 괴로와도 전할라고 애를 쓰고, 나중에는 자기 직장에 좀 손해가도 전할라고 애를 쓰고, 손해 가도 전할라고 애쓰고, 나중에는 밥을 굶어도 전할라고 애를 쓰 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가도 전할라고 애를 쓰고, 마지막에는 죽어도 이거 전하는 것을 전하는 이제 여게서 주님은 만족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 리는 것은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종이라 다시 하지 안 하고 너를 내 친구라 해서 나 있는 데 너 있고 너 있는 데 나 있고 너와 나와 함 께 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모든 것을 너에게는 하나도 숨기지 안하고 다 알 려서 나 아는 거 너 다 알고 너 행하는 거 나 다 행하고 나 행하는 거 너 다행하 고 너와 나와 같이 되어서 내 보좌에 나만 앉을 게 아니라 내 보좌에 너와 함께 내 보좌에서 영원히 다스리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은 주님이 대속해 주신 이 대속 을 보수, 고수하는 것이요 , 이 보수하는 것이요, 고수하는 것이 주님의 노를 푸는 것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님이 날 사랑하셔서 대속하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다른 사람도 이 대속을 입어 이제 구원하려는 그것이 주님의 심정에 동정하는 것이요 주님의 심정에 같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요것이 주 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 말은 제사장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 말이요, 제사장 선지자 왕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 말이니까, 그러면 우리가, 우리가, 이 제사장은 여러번 해석해 다 알 터인데,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에 잘못 얽혀 가지고 있는 것을 해결지우는 것이 그게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을 인간 에게 전달해 가지고서 인간들이 그 축복과 은혜로 부강해지게 하는 것이 그게 선 지자요, 왕은 하나님이 옳게 통치하는 그 통치를 인간들에게 전달해서 인간들이 바른 그 통치대로 살도록 하는 그것이 이것이 왕의 직책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 것이 뭐이냐 하면은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
이래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이제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검사하는데, 이 검사는, 이러기 때문에 이 검사에는 대심판의 검사가 아닙니다. 대 심판의 검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심판은 지옥을 못 보냅니다. 이 심판은 지옥을 보내지 못하지마는 거지 만들고 부자 만들 수는 있습니다. 이제 이게 그 영광이 있게 하고 없게 하고는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등용해 쓰고 폐물로 등용하지 안하고 밥이나 먹고 영생이나 하라고 집어 던져 주는 그렇게는 할 수가 있다 말이오. 이거는 공심판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 가고 천국 가는 일은 하지를 못하지마는 이제 그에게 소유라 하는 그런 것은 다 그것을 제거 할 수도 있고 그 대로 유지할 수도 있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서 선악간에 행함을 따라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선은 이제 하나님 중심, 내나 지금 노 푸는 것이 하나님 중심이요,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게 하나님 중심인데 이 하나님의 노를 얼마나 풀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얼마나 했나 그 것이 선이요, 악은 이거 무시하고 전부 제 맘대로 제 욕심대로 한 것이 악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는 뭐이냐 하면 하나님의 노를 풀라고 우리가 애를 쓰지 않습니까? 노를 풀라고 애를 쓰는데, 오전에 그말 했습니다. 노를 풀라 고 애를 쓰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라고 애를 쓰는데 먼저 노 푸는 것이 그게 문제입니다. 노를 풀라고 애를 썼는데, 자기가 어떤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 죄는 자기가 그것을, 그 죄를 주님이 대신 담당해서 형벌받은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깨 닫고, 깨닫고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우리 할 일이 뭐이냐 하면, 지은 죄에 대 해서는 고것을 그 죄를 깨달아 알 것, 고걸 알 것, 주님이 어떤 형을 대신 받았다 는 것을 알 것, 고 다음에는 감사할 것,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고거요. 그 외에 다른 거 하면 안 돼요. 이 세 가지.
깨닫고, 주님이 어떤 형벌받은 거 알고, 주님에게 감사할 거 요거뿐이고, 이제 우 리 적극성으로 할 것은 뭐이냐 하면은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현재에 이렇게 해서 나에게 입혀 주신 이 세 가지 대속은 나는 놓지 않겠다. 나는 놓지 않겠다 여게 대해서, 이거 대해서 눈물 흘려야 되고, 이거 대해서 이를 갈아붙여야 되고, 이거 대해서 결심해야 되고, 이거 대해 가지고서 우리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투자하 고 희생해야 되지 과거에 벌써 지은 죄 가지고서, 사함 받았는데 과거 그걸 후회 할 후회에 대해서는 정력을 기울이지 말아라. 후회된 것에, 죄를 알고 형을 알고 거게 대해서 네가 감사하고 그 힘은 전부이 적극성으로 앞으로 그 대속을 보수하 는 데에 기울여라, 보수하는 데 기울여라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단단히 잡읍시다. 거게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요만큼 가르쳐 놨으면은 그 속에 은밀한 것은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성경이 와서 가르쳐 주실 것 입니다. 그 이상을 가르치면 알아 듣지도 뭇하고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들기 쉽기 때문에 그 다음은 내가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 다음은 여러분들이 성신의 감화를 받으면 자꾸 깨달아서 이제 한없는 평강이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다 해 결되는 그런 길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전부는 주님의 노를 푸는 것과 주님을 기 쁘시게 하는 일에 전부를 다 기울여서 내 가진 거는 다 거기다가 완전히 다 투자 하는 이 사람이 안 될 수 없고 이 사람되는 것이 제일 좋고 행복인데 딴거 할 일 이 있습니까, 이 일이 제일 가치 있는데? 뭣 때문에 이 일을 냅두고 지저분한 그 런 일을 하겠습니까? 뭐 지저분한 거 무슨 그런 일을 하겠소? 아, 이 세상에서도 뭐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그런 권세도 제일 그 나라에서 제일 최고의 권위 있 는 사람 그 사람 하나 떡 사귀어 가지고 뱅뱅 돌며 그 밑에 지저분한 거는 다 생 각도 안 하는데, 그래도 그거는 뭐 오늘 어찌 될지 정함이 없는 권세이기 때문에, 정함이 없는 배경이기 때문에 그까짓 거 언제 갈지 모르지마는 우리 이 주님의 배경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이러니까 이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어. 모두 눈이 어두워 그렇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들어 깨닫지 도 못한다.’ 말씀한 거와같이 우리의 심령이 자꾸 밝아지도록, 밝아지려면 성경을 읽어요. 여러분들 이 성경 이런 거는 다 이런 거는 말로 못 가르칩니다. 성경 읽 어 봐라. 성경 읽으면 된다 하는 이것은 말로 암만 해 봤자 성령이 믿음 줘야 되 고 제가 경험하고 체험해야 되지 그리 아니면 안 돼요. 세상에 복잡한 거 열 가지 가 있습니다. 열 가지가 복잡해서 열 가지 이놈이 잠을 잘라고 해도 잠도 못 오고 자꾸 이래 가지고 밤에도 이 열 가지가 꿈도 꾸이고 자꾸 이랄 때에 열 가지가 오는데, 이거를 없애는 것이 말이요, 없애는 것이 ‘주여 이걸 내게 없애 주옵소 서. 주여 없애 주옵소서.’ 암만 해 봤자 안 돼. 암만 해야 안 돼요. 두말할 것이 그만, 그런데 이거 떡 하도 배워 놓으니까 ‘아, 네가 성경 읽어라 성경 읽으면 그 게 다 녹아져 버린다. 그거 마귀란 놈이 주는 건데, 성경 읽으면 녹아진다.’ 이래 도 그런 줄 알면서도 성경이 요게 있지마는 척 펴 가지고 읽으면 되는데 그거 읽 지를 못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은혜 안 주시면 안 돼요. 이 척 가지고 펴 가지 고 고만 무조건 어데든지 자꾸 성경을, 성경을 한참, 어북 큰 문제가 있거들랑은, 큰 문제가 있거든 좀 얼마 동안 읽어요.
내가 어떤 사람 뭐 큰 일이 나 가지고서 갇히고 어짜고 이래 가지고 뭐 감옥에 갇히고 부도가 났다든자 뭐 이래 가지고 이라는데 ‘너는 그라면 네가 지금 자꾸 그거 잘할라고 하면 자꾸 도로 말리니까 너는 가 가지고 고요한 자리 가 가지고 서 성경 열 번만 읽고 오너라, 이라니까 다섯 번을 빠듯이 읽고 난 다음에는 ‘이 제 됐습니다. 이제 내가 그런 거 다 떠나 가 버리고 이제는 근심 걱정 없고 이제 모든 문제 다 해결입니다. 이제는 됐습니다.’ ‘네딴에는 지금 그렇게 하지마는 네 마음으로만 그렇게 정비 정돈이 됐지 실상은 안 됐다. 다섯 번 더 읽어라.’ ‘아, 이만하면 됐습니다. 내가 무슨 문제라도 이제는 뭐 문제 없습니다.’ 자유하 는 거 같지마는 나와 가지고 내나 얼마 있으니까 고만 도로 거기 더 들어가 가지 고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말이오.
여러분들, 나를 잠 못 자게 하는 것이 열 문제가 있는데 성경을, 언간한 거는 성경 그저, 잠이 오거든 말이오. 잠이 오거들랑은 깨서, 잠은 자꾸 깰라고 해도 안 돼요.
잠 오거든 쫓아나가요. 잠 오거든 쫓아나가 바깥에 휙 한 바퀴 돌고 와서 또 보면 또 좀 있으면 또 잠 옵니다. 또 돌고 세 번, 그리 아니면 네 번만 바깥에 나갔다가 나와 가지고 새로 잠을 깨 가지고 성경 보면 똑똑히 보입니다. 대개는, 어두운 심 령도 그러면 됩니다. 뭐 그래 가지고 보면은 그 깨달아. 그래 가지고 성경을 그저 고만 자기에게 언간한 문제는 한 이삼 일만 읽으면 이삼 일만 계속해서 뜻을 생 각하며 또 잠 오거든 또 나가 그라고 또 그라고 또 잠 오거든 자고 또 읽고 이래 가지고 이삼 일만 성경 읽으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그놈이 근심 걱정이 어찌 됐노?’ 글로 써놔. 요거 요거 요거 다 써놓고, 써놓고 이제 한 사날 읽고 나서 보니까 ‘아무것도 근심 걱정 할 놈의 일도 하나도 안 되는 걸 백지 근심 걱정했 네’ 다 절단나 버렸어. 근심 걱정이 다 가고 문제가 다 해결돼 버렸어.
이거는 해 봐야 알아요. 이게 비밀이라. 소견 머리가 꼰지가 꺼꾸러, 꼰지가 서 꺼 꾸로 돼 가지고서 자꾸 이런데 소견이 정신이 바로 되니까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 라 말이오 그기. 사람들도 무슨 돈 계산 댈 때 자꾸 안 되거들랑은 고만 그래 가 지고 자꾸 하면은 자꾸 꺼꾸로 이리 틀리고 저리 틀리고 나중에 그만 이 뭐 섞여 서 못 합니다. 그때는 누워 자든지 저 바깥에 돌든지 한번 빙 한번 돌고 떡 와 가 지고서 머리를 식혀 가지고 와서 떡 대 보면, 아, 보니까 대번 턱 들어맞는데 꼭 이와 같소. 이러니까 ‘뭣으로써 청년의 행위를 깨끗이 할 수 있느냐 여호와의 말 씀이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 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 도다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 이거 성경 읽으면 다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오전에도 그렇고 오후에도 그렇고, 이런데, 이제 주님의 노를 푸는 거, 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 고것보다도 제일 어려운 거 요거는 여러분들이 모르는데 어떤 죄라도 네가 범한 죄가 있으면은 그것으로써 너 깨달을 게 뭐냐? 아,내가 이 죄를, 이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내가 이 죄를 짓기 전에는 이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줄 몰랐지, 몰랐는데 십자가에 못 박은, 주님을 고난 시킨 죄를 하나 더 깨달았소. 하나 더 깨닫지 안했습니까? 하나 더 깨달았으 니까 주님에게 대해서 더 감사하고 더 감사하고, 주님에게 내가 부담을 많이 시켰 고, 또 고생을 더 많이 시켰고 이랬으니까, 많이, 시켰으니까, 주님 많이 시켰으니 까, 앞에 이제 탕감을 많이 받았으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꾸 커지겠소 작아지겠소? 예? 많이 탕감 받았으니까. 주님 사랑함이 점점 커지지? 또 주님이, 나를 담당하신 것이 적게 담당한 것과 담당하셨으니까 많이 담당한 자에게 관심 이 크겠습니까 적게 담당한 자에게 관심이 크겠습니까? 예? 많이 담당한 게 커.
누가복음 7장에 말씀해 놨어. 많이 담당한 가에게 커. 이러니까 생각하면 이제 인 간에게 말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과 주님하고 나하고 이와같이 밀 접하게 돼집니다.
이러니까, 고것만 딱 하면은, 과거 지은 죄에 대해서는 죄를 알 것, 그 죄에 대해 서 형벌을 주님이 어떻게 담당한 고걸 알 것, 고라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내 형벌 담당했기 때문에 내가 과거 그거 모를 때에는 하나 알 때에는 하나만 담당하게 되었는데 둘 아니까 둘 담당한 게 되었고. 서이 아니까 서이 담당했고, 많이 담당 했으니까 주님에게 대해서 감사가 더 많을 거, 요 세 가지만 하고, 울지도 말아요.
부르짖지도 말아요. 그라면 안 돼요. 그런 거 같지마는 통회하는 심령이라 하는 해석을 잘못하면 안 됩니다. 거게는 울지도 불지도 말고 ‘내가 요런 죄로 주님에 게 요런 형을 부담을 시켰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내게 대해서 형벌은 다른 사 람 열 사람의 형을 담당한 거 보다도 나 한 사람의 형을 담당한 게 많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사랑의 빚을 더 졌지. 고라고 난 다음에 내 총력은, ‘이러니 까 주님이 이렇게 하셔 가지고서 나에게 사죄를 입혀 주셨고 칭의를 입혀 주셨고 화친을 입혀 주셨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대속을 나는 이제는 내가 죽어도 놓지 않 겠다.’ 거게다 전력을 기울이고, 거게다 전력을 기울여서 ‘놓지 않겠다’ 하는 거, 거게다가 전력을 기울일 때에 요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노를 푸는 것입니까? 예? 주님의 노를 풀어.
기쁘시게 함은, 그 마음에 주님이 흐뭇하니 이제 속에 체증이 내려갑니다. 분함이 내려가고 다 노가 풀리요. 그라고 난 다음에 주님을 기쁘게 해서 못 견디게 할라 고 하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할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토마 스 목사와 같이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이 대속을 전해 주기 위해서 새벽에 막 뛰 어가 가지고서 이 이 집에 가니까 문을 닫았어. 문 닫았고 불도 안 켰다 말이오.
안 켰으니까 또 가 가지고서 문 앞에서 ‘주여, 어짜든지 깨워 주시고 이 집도 다 예수 믿는 사람 구원 얻도록 하여 주시고 이 학생 오늘 어짜든지 주일 거록하게 지키도록 해 주옵소서’ 기도 한 번 하고 또 저 집에 또 가 가지고 보니까 또 깜 깜하다 말이오. 또 기도하고 막 아다닙니다. 이리저리 아다니고 그러니까 그 한 집에 많이 간 집에는 얼마 갔는냐 하니까다섯 번까지 간 사람 있어. 다섯 번까지.
일찍 가 가지고 불을 안 으니까 안 일어났으니까 다섯 번까지 가고, 그라는데 그 때에 그게 뭐입니까? 그게 하나님 노 푸는 것이요 뭐이요?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장에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 '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뭐이냐? ‘뜨겁게 사랑하라’ 사죄를 입히기 위해서 네가 열심을 가해라. 칭의를 입히기 위해서 열심을 가해라. 화친을 입히기 위해서 열심 을 가해라. 이 구원을 형제에게 입히기 위해서 네가 열정을 가지고서 일해라. 그 게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라.
그래서, 오늘은 이 주일 학생들이 얼마나 왔는지 모르겠는데, ○총무 어데 갔어? 오늘은 뭐 어찌 됐어? 또 내려왔어? 예? 뭐라 해? 비슷해? 이거 참 이거 큰일이 네 기도 모두 안 하는구먼. 기도를 좀해요. 나는 막 기도 자꾸 해 가지고 오늘은 내가 좀 많이 나왔으리라 이래 생각하는데 만날 비슷하구만.
어짜든지 우리가 주님의 노 푸는 것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 요걸 딱 가져요.
노는 주님의 대속을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이 대속을 다시는 내가 놓지 안한다.
이 대속을 내가 다시는 원수에게 뺏기지 않겠다. 대속을 보수하는 거. 보수하는 거,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주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가 지고서 그 사람들도 이 구원 얻도록 하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