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양을 먹이라

 

1983. 10. 30. 주후.

 

본문 : 요 21:15-22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는 참 주님을 사랑하여야 할 우리들입니다. 세상에는 섬기는 신도 많고,  섬기는 신도 많고 바라보는 주도 많습니다. 뭐 천도 만도 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런 것을 바라고 살고 저 사람은 저런 것을 바라보고 살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제일 높여 살 만한 그런 것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각각 다 이런 것 저런 것 자기 비판과 평가로  그래도 제일 '이것을 의지하는 것이 낫겠다 바라보는 것이 낫겠다, 내가  이것에게 속해서 여기 따르는 것이 낫겠다 내 모든 것을 여기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 이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숭배하는 그 숭배의 대상은 심히 많습니다. 또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들도 심히 많습니다.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지혜껏 연구하고 생각해서 선택 한 그 숭배의  대상과 소망의 대상과 의지하고 그만 전폭을 거기다가 맡기고 안심하고 그를  따라서 그저 동하고 정하고 이렇게 안심하고 기뻐하고 사는 그런 것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옛날은 그런 것을 이 빛을 알기 전에는 그런 것이 다 그만한  실력이 있는 줄 알았고 또 이 사람 저 사람 섬기는 것이 그것이 더욱 더 좋다고  생각해서 우리들이 헤매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참 길을 잘 들었다'  행복되다고도 생각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나도 저런 민족 중에 났으면  좋을 뻔했다. 저런 나라에 국민이 되었더라면 좋을 뻔했다. 또 저런 사람의  자손, 저런 사람들의 부하 또 저런 사람들의 제자, 저런 이런 그런 모든 인간  형편과 사정을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부러워허봤자 소용이 없으니까 또 각각 자기 가진 것을 만족하고 그만  거기에서 자기 만족을 찾으려고 만족하고 살려고 이렇게 해서 살지 참 그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평가하려 하면 보다 좋은 것이 얼마든지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생각하면 참 열등감도 많이 생기고 또 부러운 것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우리가 빛을 받고 보니 참  모든 것이 다 헛됩니다. 어떻게 인간의 시조가 이 배암에게 꾀여 가지고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에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을 미혹시켜서 멸망케하는 악령이  인류를 주관하고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과 영원 자존하신 지존하신 한 분  되신 이 하나님이 참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된지 참  모릅니다.

 참 세상에는 길이 너무도 많은데 어떻게 해서 제일 크신 분 제일 크신 분 제일  사랑으로도 제일 완전하시고, 지능으로도 완전하시고, 그분이 제일 신실하시고  제일 크신 분으로서 모든 것이 그분으로 인해서 생겨겼지마는 생겨진 모든 것이  그분을 알지 못함으로 그 분에게 거슬림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무서운  심판을 다 알지도 못하고 향하여 가다가 자기 일생의 생애라는 것이 털끝만한  것도 그저 지나간 것이 없고 모두가 다 행동록 하나님의 필림 그 모든 녹음에  녹음되어 있는 이 사실을 하나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저도 저 그때 계룡산에 한번 가보자. 계롱산이 많은 종교들이 모여 있다고  하니까 한번 가보자.' 가보니까 참 조그만한 기와집 하나 지어놓고 그것을  자기들의 숭배의 소망의 대상으로 삼아서 요 언덕에 집 한채 지어놓고 그거  섬기고, 저 냇물가에 물가에 집 한채 지어놓고 그거 섬기고, 저런 큰 돌 밑에  무엇을 각해 놓고 섬기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다 바른 길을 찾지 못해서  그저 이렇게 저렇 게 속아 가지고 일생이란 인간 일생, 다시 두 번 돌아올 수  없는 한 번씩 오면 돌아올 수 없는 이 인생 일생을 그래 그래 해 가지고 자기는  그게 옳은 줄 알고 사랑하는 자손들에게도 신실히 부탁하고 이래서 대대로  그것을 자기 도를 삼아 가지고 이래 삼는 그 속고 참 비참한 그 인생인 것을  생각할 때에 참 마음에 가련치 안할 수 없고 인생이 불쌍하다는 그 말이 자꾸  나오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생각하고 인생이 만물 중에 제일  불쌍하고 가련하고 참 너무도 인생이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길고 인생에게 있는  그 수많은 갈래길이 있어서 이 사람은 이 길로 가서 망하고 저 사람은 저 길로  가서 망하는 그걸 볼 때에 인생보다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련한 것이 없다.

차라리 개미 한 마리가 됐으면 낫겠고 구더기 한 마리가 되었으면 낫겠고 차라리  사람들 발에 짓밟히는 하나의 모래알이 되었으면 낫지 인생이라는 그 존재가  되어져 가지고 갈 바를 알지 못해서 이리 저리 헤매고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서 석가모니 같은 그런 사람도 오래 동안 인생을 비관해서 울고  울고 울면서 울다가 그래 인생의 참, 참된 길을 찾았다고 하나 발견한 그것이  불교인데 그것마저 완전히 속아 멸망하는. 자존자를 몰랐고 자존자를 거슬리기  싫으면서 자존자를 거치고 그의 법도를 거슬리고 결국 보니까 마귀에게 끌려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의 많은 사람을 미혹의 길로 인도하는 그 길밖에 되지  못했는데.

 하물며 이렇게 참 우매무지하기가 짐승 같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 이 영원  자존하신 홀로 계시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주권하시고 모든 일에 목적을 두시고 계획을 해서 하나 하나 때를 찬  경륜을 따라서 이렇게 착착 이루어 나가는 이분을 우리가 어떻게 찾았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참 이걸 생각하면 참 우리가 뭐 어떻게 감사한지 그 감사의  울음을 뭐 그거는 암만 울어도 모자라고 암만 감사해도 모자라고 얼마나 감사  한지!  옳은 분 한 분 그분을 우리가 찾아서 그분에게 우리가 속하고 그 분을 바라보고  그래 그분을 알아서 그분에게 속해 가지고 그분으로 더불어 이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이거 뭐 참 놀 랠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이렇게 귀중히 여기는데 우리가 보이는 것도 그끝이  없습니다. 그저 이 세대를 보고 나면 그다음 세대는 또 딴 세대가 나오고 이  지역을 보고 나면 그다음에는 또 다른 지역이 있고 이거 뭐 지음을 받았다 하는  그것도 한 말로 말해서 참 셀 수 없는 무수한 존재라고 할 만한 이 물질계도  그러하고 영계는 더군다나 더 그러하고 이런데 이 모든 것이 다 합해 가지고  나를 위해서 운동했던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예택 속에  하나님 목적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가 나를  위해서 전부가 다 기울여져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 운동으로 하나님의 목적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어디 목적입니까? 모든 존재가 다 서둘러 봤자 이 목적  속에는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목적 속에 우리가 생겨지게 됐다는 이것도 생각하면  참 놀랠 일  이 모든 존재를 다 그분이 지으신 그분을 내가 알고 바라보고 속해서 그분의  섭리를 알고 그분의 계획을 알아서 인생이 나는 것도 알고 죽는 것도 알고,  인생의 참된 길도 알고, 만물의 종말도 알고 만물의 시발도 알고, 만물의 이것  존재 목적도 알고, 이거 뭐 놀랠 만한 이 지극히 큰 이 무한한, 이 무한함을  우리가 알게 된 것 이거 어떻게 우리가 참 감사한지!  이럴 뿐만 아니라 그분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받게 된다는 것 그  사랑을 받게 되고 그분에게 속해서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전사랑을  간섭을 받으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계획을 알려 주셔서 그 계획을 따라  부족한 우리들이 그저 꼬박 꼬박 앉은뱅이 같은 걸음이라도 한 걸음씩 걸어가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여기다가 당신이 가장 축소하는 첩경이 되는 방편 믿음의 방편을 주셔서 그분이  선포해 놓으신 문서계시를 문서계시는 그분의 사진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분의  속성을. 그분의 계획을 소원을 그분의 역사를 그려 놓은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모두 나타낸 그 실상이라고 볼 수 있는 그것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인정하고  그 사실을 인정만 하고.

 부족하지마는 주님이 또박 또박 주시는 한 현실 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주시는 현실에 순종하는 이 걸음을 걸으면 우리가 모든 심판을 이겨  나갈 수 있고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우리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주인공의 위치를 가질 수 있고 그들을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는 이런 위치에  있게 되고 그분의 무한함을 우리가 받아서 모든 만물의 중보자로 된다는 이거 뭐  이거는 참 말로 할 때에 이거는 이거는 뭐 천하 만민이 다 말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며 너무도 얼토당토 안한 이건 생각할 수 없는 이런 일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과연 그럴 만하다 생각할 만한 것입니까?  너무도 이 세상 것은 그것의 억억만분지 일이라도 우리의 주관에 맞지 안하면  그걸 믿을 수 없습니다. 주관에 맞지 안하면 '그거 그런게 있을까? 부인하는  건데 이렇게 지극히 큰 것을 우리가 믿어져서 의심없이 믿어져 이 사실을  믿음으로 생명의 어떤 위협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이 걸음 걸어가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도 믿음으로서 모든 것 다 내놓고 다 버리고 갈 수 있는 이런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이렇게 됐다는 이것도 놀랠 일이고 가만히 생각하면 참  놀랠 일입니다.

 우리가 요새 기도의 제목에 기본구완을 입은 자로 살게 해 달라는 그게 기도 첫  제목인데 우리가 이 기본구원을 생각하면 참 생각 하면. 생각하면 아무 때라도  놀래지 안할 수 없는 평생 생각해도 평생 놀래지 안할 수 없는 이 사실이요 어떤  처지에서라도 거기에서 만족하지 안할 수 없는 이 사실이요 어떤 혹독하고  어떻게 냉혹한 그 속에서라도 안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뛰놀지 않을 수  없는 이 사실이요. 우리가 이렇게 큰 기본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그 저  우리는 예사롭게 생각해서 그저 입에 익어서 이래 줄줄 하지 그 사실을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그만한 그 지역에서 거기에서 그 지역에 있는 인구의 수효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도 그게 어렵고 또 두 사람 세 사람이 동의해서 운동해서 얻을 만한  그런 것도 어렵고 우리가 땅에 있는 이런 것 저런 것 그런 지식 그런 지혜 그런  능력 그런 소속 그런 상관. 그런 계통 이런 걸 뭐 생각해 보면 참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이 기본구원의 이 계통이라든지 소속이라든지 얻어진  소망의 그 희망이라든지 또 우리가 받는 그런 기업이나 권리라든지 또 그 지식도  천하의 박사들이 천하의 학문을 다 통달해도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안하시면 이 자존자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재자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이  아버지된 것은 절대 안 믿어집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 다 미치괭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교는 다 아편이라고 사람 버리는 아편이라고 말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어텅게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었는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는 것이 믿어지게 됐는지!  모든 것이 없는 가운데서 홀로 계신 그분이 믿어지고 그분이 목적 정한 것이  믿어지고 그분이 모든 걸 창조하신 것이 믿어지고 그분이 주권자인 것을  믿어지고. 그분이 주재인 것을 믿어지고 모든 것이 그분의 크고 작은 것이  섭리라는 것이 믿어지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인 것이 분명히 믿어지고, 천하  사람이 나 버려도 그분이 나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이 믿음을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셨는지!  이것이 인위적으로 되겠습니까 무슨 노력으로 되겠습니까? 이 믿음이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인력으로 된 것 아닙니다. 거기다가 믿는 이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세상 사람을 다 점령한 이 사탄은 우리에게 이것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백방으로  우리를 의심케 합니다. 의심하게도 하고 우리를 못 믿도록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것을 박차고 믿어질 수 있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이 이. 거 뭐 어떻게 되어서 이런지 생각하면 참 뭐라고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을 섬겨야 될런지 모를 만한 일입니다.

 그래 저도 오늘 아침에 끄락에 나가 가지고 주님이 주신 그것을 생각할 때에 뭐  할 말이 없소. 그저 '이게 웬일입니까? 어쩐 은혜입니까? 그저 뭐 놀랠 것밖에  없고 감사 소리도 다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내비두고 도 당신이 이렇게 존재한 이 존재 이 모든 존재  가운데에서 그분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 그분을 잡았는지. 어떻게  그분을 우리가 주로 모시게 됐는지 그분에게 속하게 됐는지. 놀래지 아니 할  수가 없어  이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으로 된 것인데 일단 이것이 우리를 타락 속에  들게 하시고 타락에서 당신이 대속하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겠고 있는 것을  다 희생하는 그 희생의 경로를 통과치 않고는 우리의 구원이 영원 완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의 타락을 예정하시고 우리가 죄 짓도록 만드시고  죄 지은 것을 대형해 가지고 한 그 사랑. 그 사랑도 그거는 뭐 인간이 암만  지식으로 생각해야 안다고 해 봤자 그 사랑의 넓이나 깊이에 그저 종적도 찾아  못 볼 만한 그런 인간이 상상 못 할 사랑입니다.

 참 동물의 에미가 새끼를 사랑하는 그것도 하나님의 속성의 창조로 되고 부모나  이런 모든 식물이 되는 그것도 그렇지마는 그런 것도 그러하지마는 주님이  우리를 타락 속에 경과시켜 당신이 대속 하시지 안하면 안 됨으로써 당신의  대속으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의 이 공로가 아니면 안 되는 이 지극히  크심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대속하신 이 공로를 통과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가 측량 못한 이 기본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본구원은 우리를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빼앗겨도 얻고  얻어도 얻고, 이래도 저래도 이 기본구원만 벗지 안 하고 입고 있는 자에게는  모든 존재가 그를 위하기만 하지 해할 수 는 없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게  이치입니다. 우리가 그 이치만큼은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바울이 말하기를 "주를 사랑치 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했소.

이렇게 참 깊은 사랑. 높은 사랑. 유일한 참 지성적인 사랑 이 평가적인 사랑  실질적인 사랑, 이 희생의 공로적인 실효 있는 실행의 사랑 이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사랑을 받은 기독자가 주님을 사랑치 않는 것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성령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저 우리가 참 지성적인 사랑을 가져야 되지마는 지성적인  사랑을 가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 측량  못 할 무한합니다. 그 사랑은 깊고. 높고. 위대하고 거룩하고 참되고. 얼마든지  깨끗하고. 빛되고, 위대하고 영원하고 지존하고 지극히 높고 큰 이렇게 참  인간의 지식이 측량 못 할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치 자기의 생명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치 거기에 감격된 것 만 치가 생명이요  평강입니다. 그게 성공이오. 그게 인생의 참 사람의 힘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생명길을 걸어갈 수 있고. 그것이 죄를 이길 수 있고, 그것이 의를 고수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아직 어려서 '예수심이 나 죽을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하는 이만해도 그 무한합니다. 이런 것으로라도 해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그 기도를 우리가 그저 잃지 말고 늘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말씀하신 그 약속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 하는 그 기도를 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분을 배반할 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분을 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어떤 피조 물이든지 사랑치  안할 자가 없고 어떤 피조물의 세력들에게 피동될 자가 없습너다. 어떤  피조물에게 유혹받을 자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알면 모든 세계는 천국이요 모든 만물은 다 자기의 평안한 쉴  곳이요 그는 참 평안한 자기의 보금자리 처소지 어데 그 분의 사랑을 깨닫고  보면은 아무것도 두려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두려워 해할 것도 없고,  대적할 것도 없고, 겁낼 것도 없고 자기 것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이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그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인간들이  인간의 지식으로 측량 못 하나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 사랑을 알도록 하나님에게 기도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 달라고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  되어집시다 그분을. 그분을 아는 것이, 그분의 사랑을 알면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이 영원 자존자를 아는 것이요, 주권자를 아는 것이요. 목적을 아는 것이요,  모든 예정을 아는 것이요, 창조를 아는 것이요, 모든 존재를 아는 것이요, 모든  존재의 현재와 미래 영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가리켜서 우리의 중보자라. 그분을 가리켜서 우리의 생명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의 모든 것은 다 동결되고 그에게는 아무  작용이 없고 생명이 있은 지 후에 모든 작용이 있는 것처럼 주님이 있고야 모든  존재된 작용이 있고 그분을 잊어 버리면 우리는 그만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달라고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을 그저 무조건으로 이래 사랑할 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가장 많이 명상합시다. 명상하면서 우리가 구하면 성신의 감동이 와  가지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줄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와서  알려진 것만치는 빛입니다. 알려진 것만치 빛이요 작게 알려졌든지 '많이  알려졌든지 알려진것은 다 빛이요.

 여러분들이 다, 알려졌으면 알려진 것만큼 그때는 빛입니다. 어두움이 그  속에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절망이나 낙망이나 비관이나 두려움이나 원수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겠고, 또  그 사랑을 우리가 알도록 노력해서 연구를 해야 되겠고, 또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실지로 체험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되겠고, 또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 도리를 가지고 우리가 연구를 해야 되겠고, 또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현실에서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실지로 경험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동에서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되고 성경으로 연구해야  되고 행동으로 우리는 체험하고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에 오늘 이 세 가지 주님이 다시 다시 이렇게 물어서  다진 말씀을-우리가 봤습니다. '시몬아'라고 이떻게 하신 것은 이 말씀은 아무리  네가 시험에 들어서 네가 시험에 들고 네가 어떤 그 절망에 끊어지고 어떤 그  낙망에 떨어지고 어떤 그 비참에 떨어지고 어느 지경까지 이르러 인간이 볼 때에  어떤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러 그것도, 그것도 그만 베드로 되면 다 됐습니다.

그것도 베드로 되면 다 돼 버려.

 베드로면 다 됐는데 베드로를 되지 못하고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을 버리지  못해서 이놈에게 미혹받기 때문에 그것이 다 참 가시밭이 되고 그것이 다 험악한  그 험로가 되어지고 다 그것이' 참혹하고 암흑의 그런 길이 되어지지 그만  베드로만 되면 새사람만 되면 그것이 시온의 대로요. 그것이 영광있는 길이요.

광채있는 길이요 수입있는 길이요 그것, 존귀한 길이요 가장 행복된 길입니다.

 이러나 우리가 새사람이 옛사람으로 바꾸어질 때에 이 세상은 다 험한 가시밭  같고, 새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될 때에 새사람으로 변화될 때에 그렇게 험한  세상은 자기의 그 험한 가시 가시 한 개가 험한 가시 가시 한 개가 그것이 다  자기의 영광의 꽃이 피는 것이요. 그것이 영원한 아름다움의 영광의 열매가 여는  것이요 그 암흑과 절벽의 그 모든 험한 그 절망의 오든 앞길들이 주님의 그  권능을 내가 체험하고 경험해서 주님의 능력으로 이제 강건해지는 전부가 나  위한 것이요 나 위하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건마는 옛사람으로 돌아가면 전부는  다 원망 불평 불만할 그 상대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새사람으로 있을 때에는 문제가 없지마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 먹 이라. 시몬아 내 양 쳐라.

시몬아 내 양 먹이라" 하는 이 말씀은 새사람으로 살 때는 의례히 그거는 말할  것도 없고 네가 옛사람으로 돌아가 가지고 네 현실에 네가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게 끌려 가지고 어느 지경까지 네가 이르렀을지라도 어디까지 네가  이르렀을지라도, 다른 것 다 잊어버리고, 다른 것 다 빼앗기고 다른 것 다 네가  내게 대해서 원망도 하고. 망령도 부리고. 무슨 죄를 짓고 거기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만은 네가 지키라 하는 말입니다.

 네가 그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 이르러 가지고서 거기에서 네가 그 뭐 절망도  하고 낙망도 하고 그 모든 절벽을 당하고 암흑을 당하고 이래 하면은 네가 이런  저런 어떤 발동을 하고 뭐 그때 그렇게 옛사람으로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게  붙들려 놓으니까 사람이 변질이 되어서 다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고 마니까 그뭐  질팡갈팡 전혀 정신이 없다 그말이오.

 정신 없는데 정신도 없어도 그런 중에서라도, 그런 중에서라도 내가 그런  중에서라도 네가 내 양은 네가 상우지 말아라. 내 양은 네가 사랑해라 내 양에  대해서는 네가 함부로 하지 말고 내 양만은 네가 사랑해다고 하는 이  부탁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는 이것이 우리가 그러면 가다 보면은 참 절망되어서  뭐 앞뒤가 보이지도 안하고 또 모든 뭐 사람에 대해서도 뭐 생명도 아깝지  안하고 뭐 이렇게 무서울 게, 악독이 악독이 솟아 가지고 무서울 것도 없고 애낄  것도 없고. 뭐 주저할 것도 없고, 뭐 조심할 것도 없고 다 그렇게 되는 그런  경우에 우리가 빠질 때 있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도 빠질 때 있는 사람이오.

 그래도 그럴 때라도 네가 내 양만은 네가 사랑해다고 하는 것을 주님이  부탁하신 것이오 내가 타락의 길을 걸어서 타락해서 타락해 서 어디까지  타락할지라도 네가 내 어린 양만은 먹여 달라, 내 양을 쳐 달라, 내 양을 사랑해  달라. 내 양을 먹이라 하는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이 은혜가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 이 은혜 역사가 있는 것을 저는 종종 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자살을 하면서도, 자살을 하면서 도 '나는 지금  내가 못 견뎌서 나는 살아야 필요없으니까 자살하련다' 자살을 하면서 자살하는  고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같이 신앙 생활하는 그 사람에게 '그 사람에게  시험이 되면 안 됐다. 그 사람의 그 믿음이 어찌되나? 나를 인해서 그 사람이 그  믿음이 흔들리면 어찌될까?' 하면서 오히려 그 사람에게 대해서 다른 데는 다  두려울 것 없고 아무 그 지체할 것 주저할 것 없고 조심할 것 없고 마구잡이로  다 하면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자기가 견디지를 못해서 그걸 생각하고는 눈물을  홀리고 제일 마음에 아픈 것이 그것이 아프다고  '철없이 어린 양인데 나만 보고 믿던 그것이 만일 내가 이리 되면 은 그것이  어찌될까? 그러니까 내가 어디 가 자살해도 그 사람 모르는데 저 모르는데 가  가지고 어디 가 돌을 목에다 메고 바다에 빠져서 그만 그래 흔적없이 자살하지  그것이 내가 자욘한 3런 것이 그 사람에게 보여 줘서 그 사람이 그것을 봄으로서  그의 어린 그 믿 음이 상처를 받을까 염려된다.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 떠는  그런 소리를 제가 몇 번 들은 일이 있습니다. 몇 번  자기가 뭐 물불을 가리지 안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안해도 자기에 관련된 그  양에 대해서 말할 때는 주춤하연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러기 때문에 내가 그  양이 모르는 저 모르는 그런 곳에 가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지, 제일 내 마음에  아픈 것이 그 양에 대해서 마음이 아프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제가 여러번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나는 그때 들을 때에 거기에서 나는 감동만 됐습니다. '이 사람이 참 막가는  자기를 완전히 다 절망 속에서 자기를 멸망으로 던지는 그중에서라도 자기의  관련된 양떼에 대해서는 아끼고 사랑하고 하는 그게 있구나.' 그걸 보고서 제가  그 말을 듣고서 '참. 이 사람은 이래도 성자요 성녀다 성자요 성녀다. 나는 이런  양떼에 대해서 이런 사랑을 내가 가져보지를 못했다' 하는 그것을 제가 그때  느끼면 서 혼자 울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랬는데 제가 가만히 요즘에 지금 "시몬아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여다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쳐다고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여다고. 이렇게 시몬을 세 번 불렀으니  주님이 세 번 부르시면서 이래 하신 것은 시몬은 옛사람인데 시몬은 옛사람  이름인데 옛사람으로 네가 타락해 갈지라도 네가 어떤 경우에 어떤 무엇에  빠질지라도 네가 내 양은 네가 아껴다고. 내 양은 사랑해다고 하는 이 말씀의  부탁이 있 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으면서도 거기에서도, 아무것도 겁  낼 것 없고 아까울 것 없고 두려울것 없고 주저함이 없지마는 자기에게 관련된  그 양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눈물이 나고 주춤하고 그 랬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양을 자기에게 속한 양을 사랑하라 는 이 하나님의 축복을 주셨고  이렇게 딱 결정을 지워놨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사람이 자기가 참 할 수 없어서. 먼 곳을 가면서 그 사람이  이것도 저것도 다 모든 것에 다 냉정하고 뭐 아무 거칠 것 없고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럽고 불평스럽고 다 이렇게 가면서도 내가 양을 말하니까 '그러면 네가  전도해서 나온 그 양떼 몇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노?'  하니까 그 사람이 그 말 하는 데는 자기가 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합디다 '참  내가 그것만큼은 참 마음에 안됐어요. 내가 아무래도 내가 이 땅에 있을 수가  없어서 내가 이랬지마는 그 사람을 생각할 때에는 내가 참 마음에 제일 안  됐다'고.

 그 어떤 사람이 뭐 죽으면서 자기의 어린 철없는 아들을 두고 죽으니까 그걸  두고서 눈을 감고 가지 못한다 하더니마는 보니까 자기가 전도해 놓은 그 양떼  그 양떼에 대해서는 눈을 감지 못하고 마음 놓고 떠나지를 못해요.

 아무 지방 정실이나 혈육 정실이나 그런 것 아무것도 거침없고 땅 위에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가면서도. 다 뭐 조금도 마음이 뚝뚝하고 거기 대해서  아무런 관계 없지마는 자기가 거석해 놓은 몇 마리 양떼를 말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눈물 홀리는 것을 제가 얼마 전에도 봤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은 의인들이 모였을 때에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너희들은 예비된 하늘나라로 가라. 내가 주 릴 때 먹을 것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 줬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 줬고, 또 나그네 됐을  때에 방문했고, 병들었을 때에 방문했고, 이렇게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방문해  줬다" 이러니까 그 성도들이, 의인이 모두 다. 이구 동성으로 모두 말하기를  '언제 주님이 그럴 때 있어서 내가 그떻게 했습니까?' 안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다 그렇게 '언제 주님이 그런 일 당할 때에 내가 그렇게 주님을  대접했습니까?' 다 그렇게 반문 안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 마태복음  25장에 있습니다.

 물론 의인들이 세상에 살 때에 소자에게 행한 것이 주님에게 행한 것이요.

소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힘쏜 것이 주를 위한 것인 줄 알고, 그를 위해  희생한 것이 주를 위해서 희생한 것인 줄 알고 그를 위해서 봉사한 것이 주를  위해 봉사한 것인 줄 알고 그를 위해 서 참은 것이 주를 위해 참은 것인 줄 알고  그를 위해서 모두 참 애통의 기도한 것이 주를 위해 기도한 것인 줄 번연히 알고  갔는데도. 알고 갔는데도 주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딱 당도해서 주님이  자기들에게 말할 때에는. 그런 줄 알고 하기는 했지마는 참으로 땅 위에서  소자에게 행한 것이 그렇게 주님에게 그렇게 바로 주님에게, 막바로 주님에게,  막바로 주님에게 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렇 게 그런 줄을 몰라서 다  놀랬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다 놀랬습니다.

 오늘 우리가, '자. 우리가 주를 사랑함으로써 주의 양떼를 사랑하여 주를  사랑함이 되게 하자.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양떼를 사랑하여 주님 사랑함이  되게 하자' 우리가 이것을 알고 이렇게 다 일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반사  선생들도 다 이를 알고 일하고 있고, 다 목회자로 나가는 가운데에서도 뭐  목회자 나가면 좋다 영광 있다 왕노릇한다. 그러는 사람도 있기는 있지마는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그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양떼를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께 생명 바치기 위해서 주의 양떼에게 생명 바치는  이 일을 하려고 다, 목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대개는 그럴 것입니다.

 이렇지마는. 아무리 그런 줄 알고 가지마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하늘나라  가서 보면 그 주님의 맡겨 주신 그 양떼에게 한 것이 바로 그렇게 주님에게,  직접 주님에게 막바로 함이 됐다는 그것을 그렇츰 그런 줄은 다 모르고 놀래지  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합시다 기억해서, 우리는 아무래도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생명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모든게 다 됩니다. 주님을 사랑치 않는 것은 다 저주받을  일입니다. 성경에 바울이 "주님을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참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보면 세상  행복도 그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가진 자가 행복이오 돈 가진 자가  행복이 아니라. 세상에 없어질 행복도 그렇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행복이라도 사랑하는 자를 가지는 것이 행복이요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가진  것이 행복이요, 자기를 사랑하여 주는 자를 가진 것이 행복이요, 또 사랑을 주고  받는 그것이 행복이요, 그 이상 딴게 없어 그걸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랑이 제일이라 사랑이 섞이지 안한 노래라면 맛이 없다고 하는 그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결과적이 능력이 없어, 아무리 사랑하고 싶지마는 능력이  없으니까 자기가 죽으니 어쩔 수 없고 자기가 약해지니 어쩔 수 없고, 끝까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능력도 제한되어 있고 수명도 제한되어 있고 지혜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랑 한다고 이래 했는데 넓은 지혜가 와서 보니까  사랑이 아니라 망친 것이 되고 말았다 말이오.

 이러니까 사랑은 전지전능 전재 영생 완전자가 아니면 사랑은 참 사랑은 가질  수가 없는 이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면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자기는 행복스러운 사람이요.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자기는 기쁜 사람이요  즐거운 사람이요 평강의 사람이요 만족의 사람이요 주님의 사랑을 자기가 받고  있지마는 주님에게 사랑을 받는 그것을 아는 것만치 자기는 행복됩니다.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 그 사랑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자기에게 있는 것만치  행복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행복은 주님의 사랑을 내가 하나님에게 구해서 발견하고.

발견해서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걸 발견할 때에 그에게는 행복되고, '나는 생명을  바쳐서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다' 하는 이 사랑이 자기에게 생길 때에  행복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달라고 기도해서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찾아야 되겠고, 또 신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데에서  주님의 사랑을 찾아야 되겠고, 우리는 실지의 생활에서. 생활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경험해서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발견하고 찾아서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주님의 사랑 속에 내가 담뿍 잠기고, 내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충만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충만하면 주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내가 다  사랑으로 충만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확실히  발견하고 보면 모든 주님의 지으신 모든 것은 전부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주님의 사랑은 생명이십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사랑을 이 세 가지로 우리가 연구합시다. 기도에서 하나님에게  구하고 명상하고, 성경으로 연구하고, 내가 행동함에서 행동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하고 경험하고 이렇게 해서 어짜든지 주님의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고. 주님을 사랑 하도록 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내 생활이  변화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내 생활에 저  말단의 세포. 저 밑에 끝에 말단 말단 거기에 참 지극히 작은 데까지, 주님을  사랑함으로의 사랑이 거기까지 피어서 갈 수 있는 이것이 우리의 자유요 이것이  우리의 천국이요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사랑을 연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생활에서 점점 체험하고  경험해서 사랑하는 이 사랑을 길러가는 그 방편 중에 행함의 방편 중에 이 세  가지를 가르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내 속에서 장성해지는 것은 그 사랑이  장성해지는 것은 어린 양을 먹이는 데에서 장성해지고, 어린 양을 먹이는 데에서  장성해지고. 양을 치는 데에서 장성해지고. 양을 기르는 데에서 장성해집니다.

이것은 참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피곤치 않습니다. 권태날 일이지마는  권태나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럴 것이요 가만히 일생을 산 짧든지 길든지 산 그것을  고요히 생각할 때에 주님을 사랑한 중에, 주님의 양떼를 사랑한 중에도 어린  양떼를 먹인 그런 일은 마음에 참 잊어지지를 안할 것입니다.

 저도 제가 저 개명교회 있을 때에 그때는 핍박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산  순교자들이 많았습니다. 톱으로 켜인 일도 있었고. 참 칼에 찔리는 일도 있었고.

꺼꾸로 달아놓고 불로 지져서 이웃이 노랑내 보고 와서 그런 일도 있었고, 뭐  여러 번 맞아서 피를 쏟아서 죽는 그런 일도 있었고, 잡아서 예수 안 내놓는다고  구둘장을 떼고 그 속에다 집어넣고 청솔개비를 들이 때니까, 들이 때니까 막 참  그 속에서 하는 그런 일도 있었고, 그때에 제가 있는 개명교회서는 산 순  교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때에 6·25가 왔지마는 그들이 거기 와서는  건드리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거기에는 핍박이 많아서 그때에 제가 집사로 있으면서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참 그때는 그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앞에 개울이 있으니까 개울가에  가 가지고. 뭐 그 사람 본인들이야 모르지마는 그 개울가 반석 위에 가서 밤이면  밤이 맡도록, 하나님께서 그 박해 중에서도 믿음을 유지하게 해 달라는 그런  간구를 하고, 또 이렇게 새벽에 나오고 그렇게 그 개울가에서 주의 양떼를  위해서 기도한 것.

 또 당할 때에 참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은 어린 양들은 꼴을 먹고 못 삽니다.

어린 양은 젖을 먹어야 되니까 젖을 먹는 것은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도를 받아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도화되어서 도를 행하므로 내 행하는 걸 보고. 그 전체는  성경보다도 나를 보고 살고 있으니 내가 그들에게 감화를 주지 안하면 안  되겠다는 그것 때문에 뭐 물질에 이해라는 것을 그런 것을 돌볼 수 없고, 무슨  여수 거래에 내 유익을 취할 수 없고. 이런 것을 닥치면 연약해서 그 일 하지  못하니까 그 일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해서 하나님께 산에 가서 기도 하고 어째  단식으로 기도하고 며칠 기도하고 그래서 한 문제 두 문제 해결해서 살아 왔던  그곳이 제일 그립습니다.

 제가 부산 와 가지고 이렇게 뭐 큰 교회가 되고 또 이랬으니까 하나님이  인도했으니까 그저 거기에 대해서 뭐 어떻다 말할 수는 없지마는 나는 그리운  것이 그곳입니다. 나는 그리운 곳이.

 그때 참 남모르게 그저 아무도 모르게 혼자 그 문제 짊어지고 반석에서  물가에서 산에서 밤이 맡도록 기도하고 그럴 때에는 주님이 당신이 기뻐하셔서  참 좋아하셨습니다. 좋아하셔서 그때에 당신이 나를 위로도 해 주시고 어떨 때는  수많은 새떼가 와 가지고 막 내 주위에 들이 덮으면서 와 가지고 지절거려서  나를 위로도 해 주고 또 기쁨도 보여 줘서.

 그런데 그만 그 생활을 부산 오고 나서는 못 했습니다. 부산 오고 나서는 내가  산에 가서 기도한다 하지마는 뭐 기도 해 봤자 그거는 부산 이런데 와 가지고는  핍박될 일이 없고 그저 난제 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츰 뜨겁게 기도할 일이  없어 산에 가 기도해도 보편적으로 기도했고 뭐 별로 그런 기도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래서 제일. 사모하면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인 그때가 그립습니다. 어린 양을  참. 내가 어린 양을 생각하고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생각도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이해관계도 여수 관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모든 면에서 죽은 자입니다. 뭐 죽은 송장같이 안 되고는 안 되기 때문에  송장같이 되는 것과. 참 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고,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지 그뭐 하는 일이야 만고가 다 죽는 일이요 빼앗기는 일이요,  희생되는 일이요, 짓밟히는 일 밖에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일을  하면 그 어린 양이 다 배가 곯아 죽기 때문에. 어린 양이 굶어 죽기 때문에.

 그런고로 그때에 그 생활이 뭐 그 뒤에 부산 오고 나서는 거기서 구경 못 한  구경 못 한 무슨 이런 것도 많이 구경도 많이 하고, 이십 세기의 문화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 접촉도 하고 가져 보기도 하고 사용해 보기도 하고 별별  신기한 그런 게 있지마는 아무런 맛이 없습니다. 맛이 없고 아무런 기쁘지  않습니다. 그때에 그 생활이 그립고 그 생활이 기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주님의 어린 양을 먹여 달라고 하는 이 말씀,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은 결단코 고통이 아닙니다. 결단코 불행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양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셔 가지고  승천하신 당신이 삼십삼 년 동안 와서 생활한 그 생활은 인간이 볼 때에  고생이라 하지 그분에게는 한없는 기쁨을 누렸을 것이고 그는 영원히  전무후무한, 존재의 전무후무 한 쾌락이요 기쁨이요 만족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들 생활 가운데에도 학생을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참 눈물을 흘렸다면,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을 했다면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멸시나 천대나 박해나 모든 구타나 그런 박해를 받았다면,  받고도 그때도 그 양떼를 사랑해서 그 양떼를 구원하기에만 열중하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안한 그 아름다운 인간의 생애, 그리스도의 형상의 생애, 그리스도의  모형의 생애 그 생애를 여러분들이 한 것 있으면 그것을 과거를 추억하면 결코  질리지 안할 것이고 결코 마음에 후회되지 안할 것이고 원통히 여기지 안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립고, 그것이 없는 것이 그렇지 그것이 그리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어린 양떼를 먹이고 주의 양을  다스리고 주의 양을 친다 말은 관리하는 것인데, 양떼들을 이렇게 저렇게 그  앞길에 가는 길에 모든 것을 걸려서 죽을, 여기에는 올무가 있으니까 그 올무를  미리 가서 치우고 여기는 함정이 있으니까 이리 달리 또 다른 데로 인도하고,  여기에는 가면 이리의 굴이 있으니까 그 이리의 굴을 가지 말라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못 가 구로 하면 그 양떼는 모르고 가고 싶은데 못 가구로 한다고 원수를  맺고 이래 가지고 참 구역장을 바꿔 달라 하는 그런 사람도 있고 뭐 원망하고  시비하고 그래 가지고 뭐 억울한 소리를 그런 소리를 많이 해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어쩌든지 그 양떼의 앞에 올무와 착고와 함정과  맹수의 토굴 같은 그런 것을 자기가 앞에서 대신 앞에 나서서 대신 그것을 다  모든 것을 조절하고 방어해서 양떼를 다스려서  그 악한 동무에게 걸리면 죽을 터이니까 그 악한 동무에게서 걸리지 않기  위해서 그 악한 동무를, 예수 믿지 안하게 하는 사람을 그 사람을 제해 달라고  그 사이를 끊게 해 달라고 하는 그 기도를 눈물을 얼마나 흘리고 하며 애통을  얼마나 해서 그 인연이 끊겨지고 끊겨졌기 때문에 빌립보 4장 1절에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빌립보 교회야 너희들은 내 면류관이라 했습니다.

 면류관이라 그말은 너희가 저절로 생긴게 아니다. 내가 너거 모르게 싸우고  싸우고 암투 속에서 내가 암투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나를 승리케 해  주셔서 너희들이 맺혀 있고 남아 있는 것이지 만일 그때 하나님이 남아 있게 안  했으면 너거들은 다 마귀의 밥이 됐을 것이다 하는 그것을 자기의 전투한 그  본인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내 면류관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면류관이라 말은 내 자랑거리라 말 아니오. 면류관이라 말은 내가 너거들을  수없는 전투에서 전투에서 하나 하나 전투를 이김으로써 전투를 승리한 그  승리에서 너거들이 하나 하나 구출돼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깐 있다가 우리가 갑니다. 우리는 나그네 세상입니다.

우리는 행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뭐 공산주의나 뭐이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고요한 이 때를 주실 때에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의 양떼를  사랑할 수 있고 주님 만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준비를 할 수 있는 이때에  우리가 잘못 하면 참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그 가치있는 일이 아닌 거기에  우상같이 그걸 제일로 삼고 주님에 대해서는 뒤로 돌리기 쉽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쩌든지 일어섭시다. 우리는 조만간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모든 것은  이별하고 주님 앞에 서야 됩니다. 우리는 단정짓고, 헛된 영광을 구해서 공연히  격동하여 투기하지 말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꼬박 꼬박 충실히 걸어가서  주님 앞에 섭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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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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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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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베드로전서 5장 6절-7절/ 830928공과 선지자 2015.10.27
4588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베드로전서 5장 6-절7절/ 830928수야 선지자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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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3 너희는 세상의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0703 남권찰회 선지자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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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7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1985. 10. 11. 공과 선지자 201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