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믿음

 

1981. 7. 19. 주전

 

본문: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은 우리를 모든 면으로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금생 내세 영육 또 모든 소유 평강 어떤 것이든지  우리에게 온전한 것을 이루어 주시려고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루는 방편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믿는 자를  온전케 해주시려고 하는 일이 성사가 됩니다. 그 믿는 데에는 잠시 잠깐  어려움이 있는 것을 그 다음에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승리와 성사를  하셨는데 그 믿음을 지킬 때에 여러 가지 애로가 있었지마는 그 애로를 참고  견딤으로 마침내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면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속하시고 불러서 예수님 믿게 만드신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입는 데에는 우리도 믿음으로만 입을 수 있습니다.

이 온전케 하심을 입는 이 믿음을 지키려고 할 때에는 여러 가지 애로가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애로로써 후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으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오늘 간단하게 세 가지를 말할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해서 믿음이 적은 것을 걱정을 하시면서  꾸중하셨습니다.

또 다음에는 믿음이 아주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크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또 셋째는 믿음이 어떠한 결과를 맺는다는 것을 또 주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어떤 것이 믿음인고 하니 신구약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하고 바라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요 또 당신이 홀로 모든 것을  주권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거슬려서 할 수 없습니다. 소범위로  보면 거슬리는 것을 하는 것 같지마는 넓은 범위에 보면 그것이 주님이 거슬리는  것도 쓸모 있어서 하시기 때문에 결국은 거슬리는 자는 이용당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또 그 지혜와 능력과 사랑도  바로 알고, 또 하나님이 무슨 목적을 가지시고 무엇을 하시는가? 이것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 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쳐다본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잘 해  주실 것을 자기가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의지합니다. 어디서든지  아무데나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제 그 다음에 셋째로는 하나님이 현실 현실에서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총칭해서 한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러하신 분이라 하는 것을 말씀해 놨습니다. 그 사실을  의심없이 참되다 인정을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목적과 역사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자기가 바로 알아 인정하는 그것이  믿음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온전케 하시는 이 은총을 입어 나가려고 하면  방해물들이 많고 또 우리 조브라운 생각으로 볼 때에는 위험하다 낭파다 이제는  파괴된다 이렇게 놀랄만한 의심할만한 염려할만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요동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가 있고, 그 사람은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있지,  이렇게 환경에 따라서 경거망동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주실 수도  없고 또 주시는 것을 자기는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현실에 하나님께서 문서 계시로 말씀해 주신 이 문서 계시를 자기가  순종을 하고 또 하나님이 이 섭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인도를 따라서  움직이고 또 그 안에서는 양심으로 성신의 감동이 자기에게 인도해 주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순종하는 것이 이것이 순종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순종해도 그  마음과 인격과 소욕은 따로 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둘 때에는 문서 순종은  되지마는 성신의 감화의 순종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문서계시만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그  섭리를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문서대로만 하고 그 섭리 따라 움직이지  안하는 것으로 순종이 못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은 이 세 가지라 생각을 하면 대충 강령적으로는 바로  됐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이것을 자기가  바로 알고 인정하는 것,  그 다음에는 이러기 때문에 이분을 소망하는 것 이분이 모든 것을 해 주시리라  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 가지로 인도하시는 인도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신 일을 몇 가지만 들어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에는 보면 사람들이 주를 따르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이 일에 대해서 염려하는 거기 대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적다 말은 믿음이 조금 있었지마는 그  믿음이 고만 끝이 났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자기가  인정하고 바라보고 순종하다가 그만 의식주에 대해서 곤란함이 심해지면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의심을 가지고 고만 바라보던 것도 흐려지고 또  순종하는 것도 고만 흐려지고 끝이 나고 이런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 적다 그렇게  주님께서 꾸중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의식주에 대해서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고  입고 사는 것 이것을 천지를 창조하신 이분이 책임맡은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분이 지금도 모든 것을 홀로 주권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것은 털끝만치라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분의 허락  안에서 당신이 이용하기 위해서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도 당신이 필요해서  신자들을 박해하도록 그렇게 뒤에 조종을 해서 이 무신론자들이 생겼고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이지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안하면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의식주에 대해서 어떤 형편 사정을 만나고 또 어떻게 긴  세월에 의식주에 곤고해도 죽는 날까지 자기는 의식주를 하나님이 맡아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고 이렇게 바라보고 하나님 뜻대로 순종을 했지마는 죽는  날까지 거지로 지내고 곤고하게 지내도 여게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의식주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 가지고 죽는 날까지 의식주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권자라 모든  것의 주인이라 또 이분이 모든 것을 다 섭리하신다. 이분이 나를 사랑하신다.

나에게 잘해주신다.

죽는 날까지 의지해 봐도 쌀 한 가마니도 생기지 안하고 배는 쫄쫄 굶고 하는데  뭐 의지할 게 있느냐?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해라! 믿으라!  네가 의식주에 대해서 믿는 믿음이 오늘에 나타나지 아니하면 내일에 나타난다.

당장에 나타나지 안하면 긴 세월 후에 나타난다. 금생에 나타나지 안하면 이것이  무궁세계에 너에게 한없는 의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 끝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금생이 다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한 내세가 있습니다. 금생은 이거 하룻밤 나그네 생활이라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의식주에 대해서 믿으라. 의식주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이 믿음이  적은 것을 주님이 꾸중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신앙의 사람이지마는 그가 의식주에 대해서 장기간 곤경을 당하니까  의식주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그만 시험에 들어서 애굽으로 갔다가  자기에게 큰 수치를 하나 만났고, 또 자손에게 못할 일을 하나 끼치고 갔습니다.

우리는 의식주에 대해서 믿음 적은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것을 잡읍시다. 먹고 입고 사는 이 일에 있어서 믿음 적은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됩시다.

일 년을 의식주에 대해서 믿어서 효력이 안 나도, 십년 믿어 효력이 안 나도,  죽는 날까지 믿어 효력이 안 나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효력이 안 나는 것은  정말로 믿는데 효력이 안 나는 것 아닙니다. 효력이 안 나는 것이 아니고 그  효력을 제 주관 조브라운 생각대로 여기에서 효력 났으면 좋겠다. 요런 효력  났으면 좋겠다. 제 효력을 발휘하는 그 효력을 효력으로 정한 그것이 제  인본으로 자기 주관 자율로 조브랍게 정해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공로를 갚지 아니한 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가 믿음을 가지되 선이 굵은 믿음, 든든한 믿음 끝이 없는  믿음, 죽는 마지막 시간까지 이 믿음이 점점 성장되고 튼튼하고 이 믿음이  조금도 요동되지 아니할 수 있는 든든한 이 견고하고 장성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것이 자기 주관대로 그 효력을 바랐더라면  그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아브라함이 믿어도 믿음의 효력이 세상에서 나타나지 안했는데 그만 나타나지  안하는 그것을 믿는 게 큰 믿음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거기에도 에누리가  있고 허무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참 믿음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의식주에 대해서 죽는 날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안했지마는 그는 믿고 떠났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이 허락되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하늘의 소망을 가지게 됐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됐고  하나님과 하나님 모든 역사를 소망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됐다 그 믿음으로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나 가지고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작정합시다. 사람이 믿을 때에 그 믿음의 효력이 당장 나타나는 것도  있고 또 십 년 만에 나타나는 것도 있고 노경에 나타나는 것도 있고 제일 큰  믿음은 그의 믿는 믿음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것도 좋지마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것은 영광 다 받기 쉽고 그 가치를 다 울궈먹기 쉽고 또 나타난 그것을 잘못  이용해서 오히려 교만해서 큰 해의 자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인격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진실을 믿고,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하나님의 주재성을 믿고,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했는데 그 효력이  세상에서 죽는 그 시간까지 효력이 세상에서 나타나지 안했으면 하나님이  위약자가 될까요? 그 사람의 믿음의 공로가 헛것이 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억억 억억만 배도 더 큰 무궁세계가 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세상에서 효력이 나타나지 안해도,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 안해도, 보이지  안해도, 끝까지 믿는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믿음에 댓가를, 그 믿음의 실력의  등용을 무궁세계까지 등용합니다. 무궁세계에서 그에게 믿음의 효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농사를 지어 봐도 콩을 심어도 석 달 만에 추수하는 콩 있고,  달 반 만에 추수하는 콩 있고, 넉 달이 되어야 추수하는 콩이 있습니다. 맛을  보면 그 가치가 아주 다릅니다. 한 달 반 만에 추수하는 콩은 시골 가면  앉은뱅이 콩이라고 있는데 그 추수도 많지 안할 뿐만 아니라 껍데기가 두꺼워서  참 맛이 적습니다. 넉 달 만에 추수하는 그 콩은 아주 질이 고급입니다. 가치가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무는 심어서 수입이 십년이 되어야 정상 수입이 나온다.

일 년 가야 헛일이요, 이태 가도 헛일이요, 삼년 가도 몇 개 과일이 열고  맙니다. 헛일이요. 그러나 십년이 되면 이제 정상적으로 수입이 오게 돼 가지고  몇 십 년 수입이 옵니다. 한 십년 적어도 한 십오 년 잘하면 이십년도 수입이  옵니다. 큰 수입이 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 년 만에 수입  오는 것은 사람 수입이라 이래 말합니다. 백년을 공을 드려서 자식을 기르고  결혼 같은 것을 조심해서 시키고 이렇게 노력을 백년을 하면 백년 그 후에  비로소 큰 효력이 나온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그것은 가치가 큰 것은 그 결실이 늦게 맺는다. 그런 것을 하나의 말하는  것으로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력도 일 년 노력해 가지고 효력  받는 것 하루 노력해 가지고 효력 받는 것 그거는 날품군입니다. 한 달 노력해  가지고 효력을 받는 것은 그 달 품군입니다. 일 년을 노력해 가지고 효력을 받는  사람은 그 농부입니다. 지주요 지주.

우리는 끝없는 믿음을 가집시다. 큰 믿음을 가집시다. 어떻게 이렇게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해도 그 효력이 나타나지 안해도 이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 이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하나씩 둘씩 믿음 생활을 해보면 차차 자기가  사람이 변화되어지고 믿음 생활을 해보면 믿음 생활로 사람을 접촉을 해봅니다.

사람을 접촉을 해보면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이런 믿음이 생겨집니다. 사람을  접촉을 해서 사람을 기르기 전에는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하기 전에는 이런  사람이 안 됩니다. 자기가 사람을 길러 보려고 하면 그것이 조금만 고생하면  되는데 당장 수입을 바라보는 이런 조급한 사람이니 이것을 도무지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내가 뭘 할까요? 네가 이런 직업을 택해라 그 일거리를 일간에 보냈습니다. 나  안 할랍니다. 왜? 오늘 하루 종일 일해도 올 때에 잘 가라고 인사 한마디도 없고  돈 한 푼도 안줍디다. 왜 안 주지마는 안 주지 안하니까 좀 기다려라, 오늘  안주면 아마 주말 토요일 날 주든지 그리 안하면 보름 간주가 되어서 보름  주든지 그 월말에 주든지 할 터이니까 좀 기다려라! 그럴까요? 그 이튿날  오더니마는 여 죽어도 안 갈라 합니다. 왜? 오늘도 돈 한 푼도 안주고 인사도  안합디다. 얘! 밤 거석해라 아! 안할랍니다. 나는 안갈랍니다. 마음에 암만  허가를 시켜도 안듣습니다. 그러면 내 봐라 다른 사람은 그대로 합니다.

토요일 되니까 엿새 동안 일한 것을 탁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서 딱 줘서 받아  가지고 얘 봐라 네 하면 너는 이틀 했으니 이틀 것 받아라, 사람이 그렇게  조브라와 가지고 어떻게 하노? 믿어라 믿어. 예, 그래요. 그러면 저도 일하러  보내 주십시오. 이러니까 일주일은 합니다. 이러다가 또 회사에 들여보냈습니다.

주말이 되어도 돈 한 푼도 안줍니다. 나 안갈랍니다. 아, 거기는 회사이기  때문에 아마 보름간 주든지 그리 안하면 한 달간 주일 거다 보름 기다려 안  주니까 안갈라합니다. 안갑니다. 나중에 한 달이 지나고 나서 제 월급은 고대로  일한 것만치만 나왔습니다. 이런 것은 쉽지요. 이렇지마는 사람에게 네가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네가 상관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현재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네 선배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이 사회에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라 이런 것은 시켜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이거는 아무 효력없이 일 년도 이태도 삼년도 참 십년 만에도 효력이 나고 그  사람이 십년동안 어데 쳐박혀서 아무도 모르고 다른 사람 등신 바보라고 천치  바보라고 말했지마는 십년이라는 그 세월이 지나가는 가운데에 그 사람의 해  놓은 일이 하나도 흠점이 없고 그 사람의 인내라든지 그 사람의 진실이라든지 그  사람의 계속성이라든지 그 사람이 조급지 안한 원만하고 그 관용하는 것이라든지  그분이 입을 다물고 사람의 교제에 있어서 아주 든든히 사람으로 더불어 친교와  그 신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든지 암만 봐도 그런 인물이 없다 말이오. 십년 만에  크게 등용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은 사회에 하나님이 등용하십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음을 지켜보면 탄식은 자기가 조급한 것이 탄식이고 경거망동한  것이 탄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도 자기보다 앞선 사람에게 대해서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 그보다도 이 큰 사회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길이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 그것보다도 조물주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라보고 견디지 못하는  것, 이것이 탄식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경험을 자기가 했을 때에 하물며 나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겠느냐? 주여 내가 당신을 향하여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일  년에서 끝나고 십년에서 끝나고 환경의 이런 파란과 곡절에서 요동된 이 못쓰고  경거망동하고 믿음 없고 믿을 수 없고 사귈 수 없고 상대할 수 없는 도무지  인품과 인질이 못된 나를 주여 사해주옵소서! 이걸 언제 고쳐 주실랍니까? 하는  탄식이 생겨져 하나님께 대해서 길이 길이 참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지키지 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큰 믿음을 가질만한 이런  깨달음도 이런 경험도 이런 체험도 이런 사람도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 적은 것을 말씀할 때에 성도들이 의식주에 대해서 끝까지 믿지를  못하고 끝없는 끝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끝없는 믿음 한없는 믿음 끝까지  믿는 믿음이 의식주에 대해서 끝까지 믿는 사람이 생겨지는 것을 당신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14장 31절에 보면 베드로가 바다 물 위로 걸어 가다가  처음에는 더벅 더벅 걸어갔는데 고만 이 풍랑과 모든 부는 폭풍을 보고 물결을  보고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만 무서워서 물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주님이 오라 해서 믿을 때에는 자기가 물 위로 걸어갔는데 이 풍랑과 물결을  보고 무서워서 고만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니까, 고함을 지르면서 주여 나를  도우시옵소서! 이러니까 주님이 와서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시면서 하는 말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꾸중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나님의 진실 하나님이 절대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의  신실 이것을 믿으면 그때 자기가 이래 걸어가는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오라 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요 세 가지고 구비했는데 물에 빠져 들어가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신실이 절단 나 버리지 하나님의 신실이 절단 납니다. 자  풍랑이 일었고 일고 야단을 치는데 하나님이 오라고 하셨으니 오라 하신 말씀이  신실한가 끝까지 책임을 지는가 보자 그 능력이 책임지는가 보자 여게서도 안  빠지고 하는가 보자 봐라 오라 봐라 보고 걸어가라 풍랑과 물결은 그를 삼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생애 참 초인간적인 생애 무슨 세상이 보는 일로  초인간의 생활을 말하는 그거는 가치가 적고 세상이 모르는 신령한 면에  초인간의 생활을 이렇게 해 나가다 자기에게 이런 파란과 저런 곡절과 장기간의  암흑과 그 모든 수많은 절망이 밀려올 때에 그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이 믿음이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끝까지 계속하지 못하고 이  복 있는 걸음을 걷다가 이 걸음을 성공하지 못하고 중단되는 이 안타까운 이면에  믿음이 적을 이것을 주님이 걱정을 하시고 여게다가 이 계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다 위에 걸어가는 거와 같은 이런 이 역사에 없는 초자연적인 생애,  초자연적인 인내, 초자연적인 소망, 초자연적인 담력, 초자연적인 그 성별,  초자연적인 그 신앙생활 도덕생활, 초자연적인 소망생활, 이렇게 초인간적으로  이렇게 해나가는 일이 이것이 죽는 날까지 요동치 아니하고 그 신앙으로  계속하다가 끝을 마치면 하나님도 그 믿음을 가지고 굉장한 일을 하실 수가  있고,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그에게 믿음의 이 가치로 하나님은 영원히 크게  등용해서 하나님에게는 참 쓸모 있는 당신의 수족같은 쓸모있는 기능의 사람이  되어지겠고, 또 하나님의 갚는 그 도수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놀라면서 하나님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의 그 효력이 이렇게 크구나! 영원무궁토록 모든  피조물이 놀래면서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지려고 표본이 될 터인데 이런 신앙이  없는 것을 탄식하는, 이 신앙을 우리는 가져야 됩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는 그것이 세상에 없는 일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발아래 밟고 세상을 부인하고 세상에 떠서 세상을 초월해서 이 세상  소망을 초월하고 세상 모든 기능을 초월하고 이 세상에 모든 희로애락을 다  초월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의 인도대로 따라 죽는 날까지 의심치  아니하고 이 신앙을 지켜 가는 이 사람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찾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이 신앙의 질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를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세상이 이해 못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되 걸어가는 그 효력이 세상에서 하나도 보이지 안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 자기에게 점점 더 큰 십자가만 오고, 이래도 거기에서 의심치  아니하고 요동치 아니하고 낙망치 아니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이 생애가 죽는 날까지 계속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이 사람을 하나님이 찾습니다.

우리는 이런 끝없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 사람은 세상이  모르는 것을 얻습니다. 받은 자 밖에는 알 자가 없다 이랬습니다. 받은 자  밖에는 알 자가 없다. 그이에게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피조물보다 크신 하나님을  상대해서 만족하고 없어질 지나갈 모든 세상보다 세상 위에 있는 신령한  세계에서 그는 살면서 평강을 누리고 모든 자연의 신보다 순전히 하나님 혼자의  그 능력으로 그 기능으로 사는 그 생애를 산 것이 다 믿음의 사람들.

에녹도 믿음으로 살아서 그는 세상에 있을 수 없어 가버렸습니다. 세상에 있을  곳이 없어 그분이 거처할 곳이 없어 그분에게 거처할 곳을 주는 데에는 그분은  생명의 세계 영계 밖에는 하나님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갔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주님이 믿음 적은데 대해서 어떤데 믿음 적을 것을  말씀했느냐? 귀신 들려서 귀신 쫓아내는 데에 대해서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다가 끝까지 믿지를 못하고 중단하는 데에서 귀신에게 다시 정복당하는  이면에서 믿음 적은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은 공중에 권세 잡은 귀신이 전부 점령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해놨어요. 믿지 않는 사람은 귀신이 점령해 있지 안한 사람  한 사람도 없다 했습니다. 믿는 사람도 귀신이 그 사람을 주장할 때가 있고  성령이 주장할 때가 있고 성령이 주장하다가 귀신이 주장하고 귀신이 주장하다가  성령이 주장하고 믿는 사람도 끝까지 귀신이 주장하고 믿는 사람 중에도 끝까지  성령이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귀신 문제, 이 귀신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님이 어떤 주님이신 것을 자꾸  알면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변동될 것이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오면서 요단강을  바짝 말리고 한가운데서 대짐매기 돌을 한 지파에 한 개씩 짊어지고 오라 해  가지고 여리고성 입구에다가 열두 개를 포개놓고 한 바퀴 돌고 난 다음에는 이  돌 봐라, 아! 저 돌 어떤 돌이지 요단강 물을 버쩍 말리어서 우리가 그 육지같이  오면서 이 돌 짊어지고 오지 안했는가? 그래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셔. 요단강  물을 말랐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은 진실하고 신실해. 약속에 틀림이  없어. 한 바퀴 돌자 한 바퀴 돌고 나도 여리고성이 아무 소용없고 안에서는 막  궁퉁거리고 팅팅거리고 야단을 지기니까, 또 마음에 의심이 좀 들어올 때에 또  그 돌을 봤습니다. 이래 가지고 여섯 바퀴 돌고 마지막에는 일곱 바퀴를 계속해  도니까 여리고성이 제대로 무너져버리는 것이 그것이 가나안의 첫 기적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가 귀신문제가 이것이 큰 문제인데 의식주 문제가 큰 문제, 그래도  이거는 새끼 문제, 그 다음에는 초인간적인 생애를 하는 초자연적인 생애 하는  이것도 다음 문제, 이것이 제일 쉬운 문제는 의식주 문제요, 고보다 어려운  문제는 이 초자연적인 생애가 어려운 문제요. 제일 어려운 문제는 무슨  문제입니까? 귀신 문제입니다. 귀신 문제가 제일 어려운 문제요. 귀신 문제가,  아! 정신만 딱 차려서 이스라엘이 열두 돌을 보는 바라보는 것처럼 주님을 따라  보고 주님은 전능자시라 창조주시라 주제시라 만왕의 왕이시라 생명의 주시라  나를 향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분이시라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시라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 이 하나님을 다시 사귀어서 바라볼 사귈 때  바라보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또 기쁘고 즐거움으로 순종하게 되고 이럴 때에  왔던 귀신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자기가 주님 바라보기 전에는 이게 좋아서 이 소원이 안 되면 안 된다고 그것을  취하고 싶고 하고 싶었지마는 주님 바라보고 이렇게 주님 쳐다보고 생각하다  보니까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그분만 바라보고 세상에 바라볼 게 하나도 없어.

또 그분만 의지하게 돼. 주여! 명하시옵소서! 당신의 인도대로 따르겠습니다.

나에게 영감 주옵소서! 영감대로 살겠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내가 소원하던  소원도 내가 감정을 품던 감정도 품었던 원수도 가졌던 두려움도 가졌던 원망  시비 불평도 모든 짜증도 모든 피곤도 고만 어디로 가버렸는지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놈 달아나니까 그놈을 가지고 온 귀신 그놈이 달아나서 그런 것입니다. 근심  귀신, 두려움 귀신, 욕심 귀신, 명예 귀신, 재물 귀신, 병 귀신, 염려 귀신,  허욕 귀신, 의심 귀신, 원망 불평 귀신, 시기 귀신, 복수 귀신, 악한 것을 자꾸  기억해 내는 귀신, 이놈이 들어서 다 이 짓 하게 됩니다. 귀신 이놈이 들어서 이  짓 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 귀신을 쫓아내는데 대해서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고만  믿음을 가져다가 중단하는 여기에 대해서 주님이 탄식을 하시고 꾸중을  하셨습니다. 끝까지 믿음만 가지면 이제 성공을 하는데 의식주에 대해서 끝까지  믿는 믿음 이 초자연의 권능의 생애를 하면서 끝까지 믿는 믿음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 없는 마음으로 귀신 없는 사람으로 귀신이 참가 못하는 귀신 없는 생애로  이렇게 하는 이 생애를 끝까지 계속하는 이 믿음 가지는 것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에 대해서 끝없는 믿음을 가집시다.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믿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을 야고보서 1장에 말씀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어디서든지 이 믿음을 가지라. 의식주에 대해서도 초자연 생애에 대해서도 귀신을 대항하는 생애에 대해서도 네가 끝까지 계속해라 이것만 끝까지 계속 하다 보면 너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네가 됐다 말씀했습니다.

  선지자선교회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는 작정합시다. 이제 의식주에 대해서 주여! 나에게 가난을 줘 보십시오. 내 믿음이 요동되는가. 나에게 헐벗는 것을 나에게 어떤 그 역경을 줘 보십시요. 내 믿음이 요동되는가 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됩시다. 의식주에 대해서 요동치 않는 믿음 의식주에 대해서 적은 믿음 되지 맙시다. 의식주에 대해서 적은 믿음 되지 맙시다. 의식주에 대해서 큰 믿음 가집시다. 초자연적인 이런 초인간적인 신앙 생애에서 우리는 큰 믿음 가집시다. 고만 중단하는 적은 믿음 되지 말고 큰 믿음 가집시다. 귀신을 용납지 않는, 귀신을 대항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없는 생애, 이 생애에 적은 믿음 가지지 말고 끝까지 계속되는 이 믿음 가집시다. 이 세 가지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안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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