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09:28
깨달음-결실
1984. 3. 10. 토새벽
본문: 히브리서 10장 26절-31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우리가 내일 주일은 성찬을 베풀기로 그렇게 작정을 하고 기도하고 나오는 셈입니다. 성찬을 먹는 것은 그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그 의식입니다.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피와 살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의식을 행해서 기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찬을 베풀 때에 그 떡과 포도즙은 직접 주님의 피와 살이 되어, 주님의 피와 살의 실상의 그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을 했습니다. 인식을 해서 교리에다가 교리적으로 성찬에 먹는 먹과 포도주는 바로 주님의 피와 살의 그 실상이라 그래서 성찬을 먹을 때에는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피와 살로 화해진다. 그래 가지고 화육설이라는 그런 교리가 생겨서 천주교에서 그렇게 화육설을 주장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라면 사도들이 믿는 바로 사도들을 계대해선 속사도, 사도의 계속해서 믿는 속사도 교부들이 믿고 따라 나오는 그런 바로 사도 직후에 교회를 가리켜서 초대 교회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는 사도 시대의 교회에 그 모든 깨달음의 교리와 신조가 바로 전해오고 있는 그런 때의 교회들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들이 화육설이라고. 성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 화해진다 하는 그 화육설을 주장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 뒤에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하나의 그 의식으로 실지의 그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주님의 피와 살을 우리가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 화육설이라는 화육설을 주장하는 것은 이것은 성경에 합당치 않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배제했습니다. 그래서 화육설을 말하는 것은 그거는 정통이 아니다. 그래서 그전 이단으로 정죄를 했습니다. 공회들이 모여 가지고 정죄를 해서 그 다음부터 이 화육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나오다가, 천주교가 심히 타락하고 난 다음에, 천주교에서 이제 개혁교로 개혁할 때에 그때에 개혁교에 나온 사람들은 다 화육설을 부인했습니다.
화육설을 부인하고, 다만 그 물질 그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의 피와 살은 어떠한 피와 살이며, 또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피와 살인가, 주님의 피와 살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에 무엇 때문에 죽으셨으며, 또 어떤 그 어려움을 주셨으며, 무엇을 담당하시고, 무슨 결과로 그렇게 되었으며. 또 예수님의 피와 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입혀진 그 공로는 어떤 공로며 입혀진 그 공로는 어떤 공로며, 또 그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되었으며. 또 예수님의 피와 살의 공로를 입은 우리들의 피와 살은 어떻게 살아야 되며, 또 우리들의 피와 살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기 이전과 믿은 후는 우리의 피와 살은 누구의 것이며,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살아서 무슨 일을 해야 되는가 하는 그것을 깨닫고, 마음에 느끼고 그대로 행동하는 그 행동을 계속해야 되는데, 우리의 마음은 자꾸 약해지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로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해서, 우리의 그 신앙을 새롭게 해서 주님의 피와 살과 우리와의 그 관계를 새롭게 하는 그것이 성찬식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화육설은 너무 지나쳐서 그거는 성경대로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정죄해서 이 개혁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육설을 주장해서 나왔는데, 그 뒤에 또 주장하는 사람, 거기에서도 반대하는 사람, 이래서 갈라지기도 하고, 지금도 또 그대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지금 요새는 어디까지 와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개혁교에서도 여기 양산에서, 양산 출신인 ○ 조사라고 하는 사람이 은혜가 있는 사람이고, 또 그 사람이 아주 권위가 있었고 신학교 다닐 때에도 재주도 특수해서 모든 학생들 가운데에 대 인기를 끌고 지식도 있고, 권위도 있고 그런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 화육설을 나중에 주장을 해서 그것 때문에 요 경남 일대에 있는 신자들은 그 영향을 많이 받아 가지고서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랬는데, 그 뒤에 그분이 아야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분도 그만 나중에 그것을 모두 정죄할 때에 정죄를 받아서, 회개하지 안하고 그것을 가지고, 고집해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끝이 아니라는 것으로 탈선된 그 탈선하는 그런 그 시험에 든 그것으로써 그것이 이단이라고 정죄받고 다시 일어서지를 못하고, 그래 지금은 이 개혁교에는 화육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 성찬에 대해서 깊이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만 그 생각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고 간절히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그게 조금 깨달음이 탈선돼 가지고 화육설적으로 '이 포도주와 떡은 바로 예수님의 피와 살이다.' 그 피와 살은 아닙니다. 피와 살은 아니고, 그 피와 살을 기념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그 실상의 피와 살로 그것이 피화되고 살화된 거는 아니지마는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내가 대해서 먹고 마신다는 이것을 실상으로 우리는 느끼기는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에서 그런 그 화육설 주장 까지 나와서, 초대 교회와 천주교에서는 거의 그대로 생각하고 나왔기 때문에, 이 아주 성찬에 대해서 엄격하게 그렇게 사람들이 늘 생각하고 시행해 나왔습니다.
저는 그 ○씨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을 보지는 못했고, 벌써 제가 믿고 난 다음 해방 후에는, 그때 해방 후예 이 교계에 성도의 서로 교통이 있었지, 그전에는 한 골짝에서 믿었고, 이 전국 성도들의 교통이 전연 없었습니다.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벌써 보지 못했고, 그 사람들은 벌써 정죄 받아서 끝난 그런 때인데 한 상동 목사님이 거기에 대해서 언제 한번 그는 이 학육설 주장을 ○ 무엇이라고 이름은 제가 잊었습니다. 그 조사님이, 그리고 ○ 조사 ○ 조사해 가지고 아주 유명한 분인데, 그렇게 잘못 깨달음을 말을 했다고서 그래 가지고 그 경남 일대에는 잘못된 유혹이 많았다고 그런 말 하는 소리를 듣고, 그때에 신앙생활 하던 그런 사람들을 제가 종종 만나서 이렇게 좀 물어 봤습니다.
물어 보니까 그 ○ 조사라는 사람이 아주 유력하고 뭐, 은혜도 있고 신앙도 독실한 신앙인데 그만 고거 하나가 잘못돼 가지고 탈선되어서 그 사람의 신앙이 그토록 절단나 버리고 말았다는 말 들었습니다.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 우리가 성찬을 먹을 때에 그만 상습적이 돼 가지로서 예사롭게 그렇게 생각하고 성찬을 대하는 그런 아주 잘못됨이 많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그 교는 주일마다 성례를 거행합니다. 주일마다 이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그것도 초대 교회도 아주 사도 시대의 교회도 그렇게 했으나, 그때에는 사도들이 깨달은 것도 잘 깨달았다고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받아서 성신의 감동으로 성경은 기록하기는 기록했지마는 그때에 그 심령이 어린 때입니다. 에덴동산 때에는 가장 어렸고, 그 다음에 벌써 이스라엘이 생겨진 아브라함 후에는 더 장성해서 깨달음이 장성해졌고, 또 이스라엘에 마지막 그 예수님의 탄생할 그 무렵에는 깨달음이 좀 구비해졌고 많아졌고 장성해졌습니다. 그러나 탈선돼 잘못된 깨달은 탈선된 점도 있지마는 또 잘 깨달은 그런 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으로 난 사람으로서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하는 말은 세례 요한이가 아브라함보다 크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고 예수님에게 대한 깨달음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대한 깨달음에 대해서는 구약에 모든 성도들이 이 메시야 깨달음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만침 깨달은 사람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의 최종에 있는 그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교회의 마지막 선지자이기 때문에 많은 그 교회들의 각자의 깨달음과 경험과 그런 것을 다 총괄해서 은혜를 받은 때이기 때문에 많이 장성한 제일 장성한 시기에 났고 그러기에 깨달음이 제일 많았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이 세례 요한보담 더 크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가 하늘나라에 가서 제일 작은 자 되어 있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그런 분도 천국에서 제일 작은 자 되어 있단 말 아닙니다. 고 말대로 고 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으로 말하면 구약 교회의 모든 성도 중에는 세례 요한이가 제일 큰 구원 얻어 가지고서 있고 하는 그 말로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제 말한 대로 예수님을 중심하고, 예수님에게 대한 그 깨달음으로서는 세례 요한이가 아브라함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것은. 벌써 아브라함 후에 많은 선지자들이 나 가지고서 그렇게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자꾸 나타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많기 때문에 구비한 지식을 가졌지마는 아브라함 때는 그저 하나님께서 직접 받아서 이래 가졌고 구비한 지식을 다 종합해서 교류해서 그 깨달은 지식에 교류가 되지 안했기 때문에 그때는 초대니까 예수님에 대한 깨달음의 지식은 그렇게 아주 어렸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하늘나라에서도 아브라함이, 다 성도들이 간 때에 어디 가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그 신앙에 소속해 가지고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계통 아래에 속했다 하는 그런 말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하는 그런 말은, 천국은 이 다음에 우리가 부활해 가지고 가는 그 천국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신약 시대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느냐?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같이 있을 때도 있고, 떠날 때도 있고, 이렇게 했지마는 신약 시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속하신 그 이후입니다. 이후가 신약 교회입니다. 그 신약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도와 이렇게 같이 있다가 나뉘었다 하는 일이 없고. 영원히 같이 있는 일이 시작된 것이 신약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감화도 구약 감화 영감과 신약 영감이 다릅니다. 구약 영감은 중복적으로 영감이 됐다가 안 됐다가 이러나, 신약 교회는 영감이 그대로 계속입니다. 구약은 중생되지를 아니하고 중생된 모든 요소를 가지고서 오만 은혜를 다 하나님이 끼쳐서 은혜를 입었지마는 예수님이 그 부활,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그 사활이라는 그 공로가 있기 전에는 늘 한 예표의 짐승 제사를 드려서 이렇게 바라봤기 때문에 그렇게 미결에 있다가 예수님이 실지로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그때부터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표시로 성전과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갈라졌고, 또 바위가 터졌고, 또 자던 성현들이 무덤에서 나왔고 한 그런 것으로 하나의 이제는 구약에서 예표로 바라보던 그 외식이 이제는 실상으로 이루어졌다 하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를 폐하려 온 것이 아니고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율법을 온전히 이룬다 그 말은 구약에 있는 것이 다 율법이라면 율법이요 예언이라면 예언인데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실상화 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실상화 시키셨습니다.
그런고로, 깨달음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 최초에는 하늘나라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나타내 보이는 그 가르치는 계시도 다 이 물질적으로 가르쳐서 이라다가 차차 차차 장성함에 따라서 신형한 것으로 가르쳤고. 또 구비하고 세밀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이 신약 시대에도 말세지 말이 된 이 때에는 가장 많은 깨달음들이 종합되었고, 또 많은 깨달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주셨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해서는 옛날보다 더 많이 깨달아서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은 지금으로부터 사오백 년 전에 있던 그 시대에 난 칼빈이기 때문에 칼빈이 깨달은 그 깨달음과 지금 깨달음이 칼빈 깨달음이 틀리지 안한 그 깨달음에 칼빈이 깨닫지 못한 그런 것까지를 지금은 점점 깨달아서 이 시대가 달라지기 때문에, 칼빈은 그 시대를 감당했지마는서도 지금 시대는 지금 시대를 감당해야 되기 때문에 깨달음이 더 구비해지고 더 세밀해지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그렇게 점점 깨달아지는데 사람들이 강퍅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그 무슨 일이라도 처음에 닥치면 그 일에 대해서 놀래는 그런 일도 여러번 닥치면 거기에 대한 그 감각이나 그런 그 느낌이 적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그 감정이라 하는 것은 그게 좀 예민한 것이기 때문에 잘 무뎌진다 그거요. 그러니까, 처음으로 보면, 처음으로 보든지 듣든지 접촉하든지 하면 깜짝 놀랠 만칩 그렇게 우리에게 그 자극이 강한 것도 그만 차차 차차 여러번 이렇게 접촉하게 되면 면역성이 돼 가지고서 그 감각이 아주 둔해져 버립니다. 무슨 전쟁 난다 하는 그런 말도 전쟁 난다는 그런 말도 처음에 들을 때에는 아이구 전쟁 나면 어쩔고? 마음에 우리 감각이 좀 강해졌다가 자꾸 그 말을 한번. 두번. 열번, 백번 들으면 나중에 가도 예사로 들려지면서 거기에 대한 감각이 별로이 그만 없어지기 쉽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벌써 이 성찬식이 시작된 지가 근 이천 년이 돼 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차차 차차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그 공로도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고, 또 의식에 대한 그 실효성이나 엄중성이나 그 성결성이나 그 진리성 이는 점점 더 심해지면, 우리가 그 자체가 변해지는게 아니라 우리 자체가 차차 바로 된다면 우리 자체가 이와 같이 성화되어서 장성해 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감각이 더 강해져야 되고, 또 거기에 대한 느낌이 강해져야 될 터인데, 논리적인 지식으로는 점점 장성해지나 실상은 퇴보돼 가지고서 아무 감각적으로는 아주 퇴보되기가 쉽다 그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깨달은 사람들은 다 성신의 감화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성신의 감화를 받아 가지고 깨달은 그 실상을 인간의 말로 표시합니다.
자기가 영감 받아서 깨달아진 그것을 그렇게 사람들이 성신의 감화를 받아 가지고서 깨달은 사람이, 자기는 영감 받아 가지고 깨달은 것을 말할 때에, 그 말할 때에 자기도 영감 받아 가지고 깨달은 사람과 같은 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자기의 정성을 다해서 내가 그 사람이 영감 받아서 깨달은 것을 내가 그 사람이 영감 받아 깨달을 만침 그만침 자기가 주님에게 대한 진실함으로써 이렇게 기울어지지를 못해도 그 사람이 영감 받아 깨달은 것을 말해 줄 때에 그 말해 주는 고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그분이 영감 받아 깨달은 거와 같은 그런 깨달음을 가지기는 쉽다 그 말이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 들으면 헛일이라. 영감 받아서 깨달은 사람이 그 깨달은 것을 말을 할 때에, 그 사람은 말만 하는게 아니라 말과 영감을 같이 말하는데,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안하고 성신의 감동과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하는 것은 말을 표시하면서 이 성신의 은혜와 권능은 이거는 이런 물질 모양으로, '아나, 이거 받아' 이렇게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집을 수 없고, 잡을 수 없고, 눈에 보일 수 없는 것이니까 그 인격에 간절한 기울임으로써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것도 이 진리의 말씀만 말씀은 다 귀로 들을 수 있다 말이오. 귀로 들을 수 없는 말만 전할게 아니라, 귀로 들을 수 있는 말만 전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하는 데에, 자기가 받은 그 성신의 감화 감동과 권능도 같이 이렇게 전해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전하지마는, 전함을 받는 사람이 그 전하는 사람이 자기가 지식으로 깨달은 표현하는 그 지식만이 아니고, 그 속에 성신의 감화 감동을 받는 거기에까지 자기가 영접할 수 있는 그런 자기 준비가 있고, 자기 그릇이, 자기 마음 준비가 있어야 그게 되어질 것인데 이것이 없으면 안 된다 그거요.
안 되는데, 고 지식은 말했으니까, 요새 녹음하는 것 모양으로, 지식으로 말하는 고 말은 글로 써 가지고서 단단히 그것을 익혀서 고걸 외울 수도 있고, 그것을 단단히 기록할 수도 있고, 문서에 기록 해 놓으면 수 천 년도 내려갈 수가 있겠지마는서도 그 영감은 붓으로 기록한 글로 써 놓은 그 글 속에 붙들려지지를 안 한다 말이오. 붙들리지 안하고, 거기에 매이지 안하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암만 귀로 들어 가지고 고 진리는 들어서 외우고 뭐 몇백 번 증거를 한다 할지라도. 그 영감은 그 사람의 인격을 기울이지 안하면 그 영감이 그에게 가지를 않는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문서만 남아 있고 그 영감은 전달되지 안했기 때문에 교리와 신조적으로 이렇게 지식적으로는 사람들이 자꾸 장성해서 알고, 널리 알고 이래 알았지마는서도, 그러면 지식면, 이 영감면과 지식면 두 면이 있는데 이 지식면은 자꾸 그것이 문서로 써서라도 기록해서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요렇게 말하고 요렇게 말해서 자꾸 요렇게 되어지기 때문에, 지식면은 자꾸 보급이 되고, 발달이 되고, 자꾸 이렇게 성장되고 확대되고 더 세밀해질 수가 있다 말이오.
되는데, 이 영감은 그와 정 반대로, 들으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마음에 자극이 강한 것도 두 번 들으면 차차 차차 그 자극이 쇠퇴해져 가지고 차차 쇠퇴해지기 쉽기 때문에 이 성찬식에 대해서도 마음으로 실감하고 마음에 자극을 받아서 그 감동을 받는 이 감동은 자꾸 여러번 들을수록이 쇠퇴하기 쉽다 말이오, 자꾸 쇠퇴해지기가 쉽기 때문에, 오늘에는 이 성만찬에 대해서 뭐 해석하는 것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그런 면은 더 발달이 되고 성장이 됐지마는, 이 성찬식을 하는 데에 이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여기에 대한 성신의 감동의 실감은 빈약하다 말이오. 실감은 빈약해서 하나의 의식으로 지내 버리기 때문에, 말세에 그리스도교라 하는 이 교파에서는 매일 성찬을 먹는, 그거. 하나의 의식에 지내지 못해 버리고 도무지 거기에 대해서 실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여기에 대해서 참 죄를 짓는 일을 자꾸 하는 일이 되기 쉽다 그겁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주의 피와 살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먹고 마시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그래 가지고서 약해지는 사람도 있고 병드는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약해지는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죽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잘 살펴서 주님의 피와 살을 욕되게 해서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게 아니라 죄를 먹고 마시는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서 벌을 받아서 징계를 받아 가지고서 몸이 세례 받고 난 다음에 성찬식 참석하고 난 다음에 몸이 약해지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조심해서 살피고 먹으면 징계를 안 받지마는서도 살피지 안하고 벌로 먹으면 징계 받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징계 받는데' 이게 다 나중에 심해지면 그만 처음에는 차차차 교회가 타락하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지 안한 성전 밖마당이 되는 그 교회에서야 성찬을 뭐 어째 먹든지,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없으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이 같이 하는 교회는 반드시 징계가 있다 말이오. 징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살피고 그렇게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 주일은 성찬식이 있으니까 이제까지 우리가 이 성찬식을 준비하느라고 성찬 먹을 준비를 하느라고 오랫동안 준비 하다가, 또 기한을 연기하고 연기하고 연기해서, 이래 가지고 지금 맞이하게 됐습니다.
이러니까 내일 주일은 연기가 없이 성찬식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또 모르겠습니다. 혹 연기가 될런지 안 될런지 주님이 연기되게 하려면, 성찬 베풀라 하는 저에게 또 하나님께서 뭐 꼼짝 못하게 해 버리면 못 베풀거라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그 징계에 이르지 안하고. 징계에 머물지 안하고 은혜를 받아서, 이 성찬식은 내가 주님의 피와 살인, 주님의 피와 살이 무엇 때문에 왔으며. 주님의 피와 살이 무엇 때문에 나 위해 십자가에 못을 박혔느냐? 내가 죄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내 죄 때문에 못 박혔느냐? 이 죄로 인해서 어떤 내가 형벌을 받고, 형벌 가운데 있고, 또 형벌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형벌을 받으셨느냐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거룩하고, 어떤 분이 이 천한 내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대속의 이 역사를 이루지 안하며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더냐 하는 것.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것을 대신할라 하니까 죄인 되었고, 비참의 고통을 당하게 됐다, 또 이랬는데. 이렇게 비참하고 가련한 것을 댓가 내기 위해서. 주님이 그 비참과 가련을, 당신이 대신 받으셨고, 또 이렇게 비참하고 가련한 것을, 아주 참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도 정죄받지 않는, 완전히 깨끗하고, 죄가 없고, 하나님과 밀접한 그런 친밀에 직접 참 친밀이 되어서 하나님과 서로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서로 대화할 수가 있고. 우리가 구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이렇게 하는 그 밀접한 것, 이렇게 더러운 것이 이렇게 지극히 존귀해졌으며, 주님이 이 더러운 것을 이것을 대속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으며. 나를 이렇게 존귀케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이것을 실지로 자기가 아는 대로 성경을 들 써 가면서 깨닫고 느끼고, 깨닫고 느껴서, 자기의 더러움에, 대해서 무슨 일을 어데까지. 자기가 어떻게 됐다 할지라도, 어떻게 존귀한 일을 하고 성결한 일을 다 할지라도, 자기가 어떤 죄인이, 어떤 것이.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을, 주님이 대속한 것을 인해서 평생 머리를 들지 못하고 겸손한 마음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나를 대형 대행하셔 가지고서 대속하신 이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 가운데에 죄송하고, 감사하고 그 마음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주님 앞에는 머리를 들 수가 없어서 사도 요한이가 죽은 자와 같이 되어진 그와 같은 그 요소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는 그 원인을 자기가 깨달아서 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겸손이, 이 겸손의 결과가 이루어지는 이것이, 우리에게 우리 심령속에, 이 마음에 심령이 있어야 되고. 또 주님이 이렇게 대속한 걸 인해서 도무지 주님 앞에 참 머리를 들 수 없고, 아무리 뭐 어떻게 하고도 그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난을 많이 당했지마는서도 그 고난 가운데에 주님이 자기 위해서 고난 당한 것을 생각할 때에 그 고난이라는 것을 한 번도 고난이라고 느끼지를 못하고 '죽어도 마땅하다.' 옆에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 올라가지 말라고 그렇게 할 때에 '나는 주를 위해서 나는 죽어도 죽고 죽고 나는 몇 번 죽어도 나는 마땅한 사람이요 내가 죽음 가지고서 주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내가 그 찬양함이 모자란다.' 이렇게 말을 한 그것이 우리에게 느낌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이오.
느낌이 있어야 되고, 또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천한 것을 존귀케 해 주기 위해 가지고서, 존귀케 해 주기 위해서 주님이 사람되시기까지 해 가지고서 이 공로를 베풀어서, 이렇게 천한 자를 이렇게 존귀케 했고, 이렇게 참 희망없는 지옥에 영원한 가련한 자를 지극히 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데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며, 기뻐하며, 이 구원을 우리가 보존하기를 다시 내가 땅 위에 무엇을 인해서, 땅 위에 뭐, 나 좋도록, 내 중심, 내가 내가 아니고 그는 나를 죽인 나 아닌 옛사람 내인데 이놈이 들어서 유혹해 가지고 내인 줄 알아서 그놈 중심으로 살아서, 이렇게 온갖 원죄와 본죄를 범한 이것을 생각하고서, 다시는 그 원죄의, 원죄 노릇을 안한다 그 말은 자기가 자기중심으로 자기 위주로 살지 안한 것이 원죄 노릇을 안 하는 것입니다. 또 본죄를 짓지 안한 것은 그로 인해 가지고서 내가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에 이탈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본죄를 범하지 안하지 것인데 이 노력이 있고, 이 겸손이 있고, 이 죄송이 있고, 이 감사가 있고 이 기쁨이 있고, 이래서 나는 피와 살로 구속한 차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죄와는 상관없는, 죄와 상관없는 자라. 죄와 상관없는. 죄를 먹고 마시고 이라면서도 죄와 상관없는 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속된 것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예수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요. 성신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사람이라 말이요. 밟으면 이 사람에게는 뭐이 남았느냐? 하나님께서 원수로 삼았고 대적으로 대적으로 인정을 했고, 소멸할 불을 가지고 멸망시킬 그 멸망을 가지고서 대합니다.
이 대한다는 요것도 여러분들이 알기 어렵습니다. 이 교리라는 것이 그렇게 지금 일반 조직 신학에 나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조직 신학에 나와 가지고 안 있지마는서도, 옛날도 성신의 감화로 다 깨달은 사람은 다 깨달았지만 그 깨달은 것을 글로만 써 가지고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무능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거요.
이렇게 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큰 긍휼을 입었지마는서도 긍휼을 입은 것만치 하나님이 긍휼을 입히시고. 대속을 한 것 만치 우리를 애껴서. 우리를 사랑하셔 대속하셨고, 애껴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반면에, 우리가 어떤 사람도 되기 쉬우냐 하면, 하나님이 처음에는 하는 것이 몇 번이나 자꾸 가르치고, 또 깨닫고, 자꾸 이러니까 깨닫고 조그매씩 깨달아지면 참 재미가 있지마는서도, 도리어 업신여겨서 뭐 그저 '주님의 피로' 무슨 죄를 자꾸 지으면서도 '주님의 피로 사해 주옵소서' 자꾸 이러니까 주님이 어떻게 됐던 자를, 어떤 그 참 고난으로 사랑으로 대속해 가지고서 어떻게 만들어 졌는데, 이것을 도무지. 이거 뭐, 아주 천한 똥덩이 같이 생각하고 이렇게 헌신짝같이 이렇게 예사롭게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에 섭섭하시다가 오랫동안 자꾸 그래도 자꾸 그러니까, 섭섭하던 것이 마음에 그 마음에 좀 괘씸한 마음이 들다가, 괘씸함이 들다가는 나중에 마지막에는 분한 마음이 들다가, 분한 마음이 들어서 이제는 원수가 돼 가지고서 불쌍히 여긴 것 만침 미워하겠다 그 말이오. 불쌍히 여긴 것 만침, 미워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대속했기 때문에 그거는 반복해서 다시 취소가 안 됩니다. 안 되기 때문에 천국 가기는 가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이 돼 가지고 간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땅 위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노를 우리가 하나님의 노를 풀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는 참 섭섭함이 심하다가 분해지고 분해짐이 심하다가서 그 하나님이 원수 취급을 하고 이래 있는. 그런데 제딴에는 자꾸 '하나님이여' 뭐, 이렇게 날, 감사합니다.' 하면서 무슨 죄 짓고 금방 또 '사해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하니까, 어떻게 해 가지고 이 죄를 사했는데, 그렇게 죄를 쉽게 '죄를 사해 주옵소서' 하고서 입에 발린 말로 그와같이 하는 것이 너무 분개하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범한 죄가, 알고 있는 죄를 짐짓 짓는 죄라 했습니다. 알고 짓는 죄. 알고 짓는 죄가 짐짓 범하는 죄가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이랬습니다.
이거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속죄하지를 못한다 그말입니다. 공심판에서 속죄하지마는서도 그리스도의 심판에 속죄가 되어야 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속죄 안 되니까 지옥은 가지 않고 천국은 가기는 가지마는서도 천국에 아무런 대우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의 노를 풀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고, 불쌍히 여길 수 있고 또 우리에게 대해서 기뻐하실 수 있는 이것이 되어져야 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세상에 있든지 죽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된다 말은 주님이 나를 기뻐하실 수 있느냐?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자꾸 하는 그 일만 하니까 주님이 날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는 당신이 돈을 달라합니까? 무슨 권세를 달라 합니까? 무슨 노동력을 달라 합니까? 그저 아닙니다. 주님이 내가 어떤 자로 인해서 나를 사랑함으로 당신이 어떤 고생을 해 가지고서, 나를 어떻게 그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대속을 주셨는데 이것을 생각하고 자기가 죄 인되었다는 그걸 생각해서 겸손해지고 하나 주님 앞에는 항상 머리를 들지 못하겠고. 죄송하고, 또 당신이 그와 같이 해 준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님이 이렇게 해 주신 구원이니까 이 구원은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이 구원은 다시는 내가 대속의 사죄나 칭의나 화친을 내가 조그만치라도, 보존하는 데에, 조그만치라도 내가 힘을 덜 써 가지고서 이 대속을 내가 더럽히거나, 이렇지 않겠다. 주님이 이 힘들여 가지고 나에게 이 구원을 주셨으니까 이 구원 이루는 데에 내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할 때에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보고서 동정이 되어서 마음에 안스러워지고 안스러워지고, 마음에 찰 만족이 되어져서 당신이 얼마든지 도와주실 수 있는 이런 일이 되어질 수 있도록, 이제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사은의 행동이 있고, 감사와 감정이 있어야 된다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짐짓 죄, 짐짓 범하는 죄가 됩니다. 짐짓 죄를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그리 되면 이 성찬을 참예하는 것이 이것이 그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다 정도가 같지는 안 합니다. 이 신앙의 장성한 사람도 있고, 또 신앙 지식이 이렇게 또 넓은 사람도 있고, 세밀한 사람도 있고 다 각각 다르니까, 꼭 같지는 안하지마는서도 자기 정도로서는 내가 어떤 죄인이었던 것을 느끼고. 또 주님이 어떻게 이 죄에서 대속하셨다는 것을 느끼고, 이러니까 나는 이런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안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자기대로는 느껴서 주님이 보실 때에 내가 너에게 깨달음 주신 것이 요만큼밖에 깨달음 안 줬기 때문에. 네게 깨달음 준대로는 그래도 네가 힘을 다 써서 네가 죄인되었던 것을 깨닫고, 그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안하려고 애를 쓰고, 이제 그 죄를 대항하려고 애를 쓰고, 주님에게 대해서 그런 형벌을 대속했었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이걸 느끼고 하는 제대로는 말이오. 어려도 제대로는 됐을 때에. 주님께서는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또 동정하실 수 있는 그것이 되어져 가지고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이 피와 살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예사롭게, 우리가 뭐, 주님의 피가 있기 때문에 번연히 죄인 줄 알고 죄를 짓고서는 '아 주여 이 죄 지었습니다. 사해 주옵소서' 너무 입에 발리고 그런 것이, 어떻게 큰, 어떻게 해 가지고 대속한 것인데 입에 발려 가지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너 무 가증스럽다 그 말이오. 그것이 주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속된 것으로 여긴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깨달음으로 역부러 겸손해 하는게 아니라, 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어도 그 죄 지은 자에게 그저 그 사람을 교훈하기 위해서 좀 나무래기도 하고, 어쩌고 하지마는서도, 나무래도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라는 것이지 나는 나무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자입니다. 하는, 그 자기 대로는 주님 보실 때에 자기는 참 주님 앞에 겸손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가야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또 주님이 이렇게 해 주셨으니까 있는 전심전력 다 기울여 가지고, 이렇게 큰 힘 들여서 대속해 준 것을 내가 더럽히면 안 되겠다하는 전심전력 기울여서 보존하는 사람으로, 주님이 주신 그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이것이 있는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기쁨이 되어지는 것, 당신에게 위로가 되어지는 것이고 당신을 대접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할 일은 이 일이오. 이 일을 할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고, 또 베풀 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하면 전지전능자, 만유의 대주재자가 내게 주실라고 하면 모자라는게 뭐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믿는 사람이 돈이니 권세니 이런게 다 그 마음 기울이는 그거는 삐뚤어진 일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분이 주지 안하면 아무 것도 없소. 이러기 때문에 그분이 안 주는 것은 죄로 인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욕심을 가지고 취해서 하는 것은 사망이 그 결과가 사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우리는 내가 죄인된 것을 얼마나 느끼는 것이 우리 할 일에 하나, 또 이 형벌이 얼마나, 내 형벌이 얼마나 크다는 걸 그걸 평상 연구하는 것이 나 할 일 중에 하나. 주님이 이 죄를 대신하셨으니까 어떻게 정죄 받은 것을 연구하는 것이 연구할 것 하나. 주님이 어떤 고난을 받으심으로 됐다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하나. 이 네 가지. 이 네 가지를 소극적으로 연 구하고, 적극적으로는, 나를 이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를 화친케 해서 어떤 그 존영한 자로 나를 만드신 것을, 하나. 이것 때문에 주님이 어떤 그 실행을 하셨는가? 어떤 순종을 하셨는가? 하나. 나를 지극히 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모든 걸 다 내어 놓으신 나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당신은 절망으로 버림을 당한 이것은 항나님이 하나님이 사람됐으니까 그 면은 뭐입니까? 하나님이 사람 됐으니까.
하나님의 모든, 다 가난해지지 안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근본 부요하신분이 가난해짐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했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큰 소망에 대해서 이 소망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힘을 쓰셔 가지고 했다는 것. 이래서 이 네 가지. 소극적으로 네 가지, 적극적으로 네 가지 이것을 우리가 항상 깨닫고, 느끼고 해서 이 구속을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그 심정 합당한 태도. 합당한 그 행위 합당한 노력 이거 하는 것이 주님의 대속에 대해서만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기만 대해서 할 일이오. 여기만 대해서 할 때에 나머지기 그 까짓 거야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또 줘도 안 되고, 이 대속 받은 사람이 뭐, 거기에 대해서 그걸 탐할 수가 있습니까? 높아지기 위해서 다 그런 죄를 지었고.
부요하기 위해서 지었고, 내 사욕 때문에 그렇게 그 큰 결과를, 맺어놨는데, 이 사욕의 것을 어떻게 하면 생각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할 수가 없어. 요렇게 되어지는 것이 요것이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네. 잘 준비합시다. 잘 준비해서, 잘 준비하면 이번 성찬으로 우리가 아주 깨끗해질 것이고, 주님과 이전에 없던 아주 주님과 밀접한 연결이 있을 것이고 그 연결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모든 오는 은혜가 이전보다 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면으로 힘을 씁시다. 힘을 써 깨끗게 하고. 이거 우리가 성찬을 이렇게 해도 자꾸 이래 됐는데, 올해는 이렇게 준비하고, 또 언제 아마 이거, 세례 베풀고, 총공회 하고 어쩌고, 이거 전부 이 한 몫 이래 몰려서 이래 되어 놓으니까. 일이 자꾸 형식으로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못하지 아무런 실질적인 이거 노력이 없어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언제 한번 그 성찬식에 따로 또 날자를 정해 가지고 그때는 우리가 금식 기도도 하고, 좀, 또 산 기도도 하고. 또 자기가 복잡한 것이라도 업도 좀 쉬고 이래 가지고서 한적한 그런 시기를 맞추어 가지고 이렇게 해서 어쩌든지 이 성찬식에서 하나님의 피와 살이 내 피와 살이 연결되어서 내 피와 살이 하나님의 피와 살이 되어 가지고서 예수님의 피와 살이 어떤 지극히 거룩한 이 역사를 이루신 거와 같은 우리 피가 그렇게 이룰 수 있는 이 권능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는데 이번에도 다를 때보다는 준비를 하나님이 좀, 시키셨지마는서도 자꾸 복잡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럴 여가가 없어. 이번에도 축복을 받고 징계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될 것입니다. 징계 받는 사람은 없도록 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