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00:02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구별
1987. 6. 9. 새벽 <화>
본문:마태복음 13장 1절∼58절 그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성경에는 우리가 유혹받기 쉬운 그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또 무식한 사람도 다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거기에 사용된 모든 말들은 가장 서민이 쓰는 일반적인 그런 쉬운 말들입니다. 또 가르친 그 모든 방편도 가장 일반적으로 서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편을 써서 가르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뭐 하나님이 이 세상 학자들 모양으로 아주 자기의 높은 술어를, 아주 어려운 그런 말을 쓸라고 하시면 당신이 얼마든지 창작도 하실 것이고 얼마든지 하지마는 그렇지 않고 가장 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구원에 있어서 일반 교회들은 오늘까지 말하기를 구원이면 하나라 이렇게 말을 하고서 오늘까지 나왔지마는 또 거게서 깨달은 사람들은 ‘구원은 두 가지로 갈라야 된다. 순전히 자기 주관의 아무런 동작은 하나도 없이 순 객관의 역사로만 되어지는 그런 구원이 있고 또 객관 역사로 되어진 그 구원을 자기가 받아 가지고 믿고 안 믿고, 또 믿음의 그 정도와 보수, 또 자기가 그대로 실행하고 아니 하는 거기에 따라서 행위가 되는 것은 뭐 천층 만층뿐 아니라 그 층어리가 심히 많다.’ 이래서 이 구원을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서만 본인이 알기 전에 본인이 아무 관심도 있기 전에 이루어진 구원이 있고 또 이 구원을 받아 가지고서 자기가 믿는 데 따라서 행하게 되고, 행함에 따라서 변화되는 이런 구원을 주셨으니 이 구원을 둘로 나누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안하면 혼돈돼서, 하나인 자기 주관이 관련 없는 그런 구원의 방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생이 힘쓸 것이 하나도 없이 그저 “믿으면 된다” 이렇게 말을 해 놨고, 또 하나의 구원에 대해서는 “힘을 써야 된다” “죽도록 힘을 써야 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또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했으니, 이 구원을 둘로 나누어서 인생의 주관이나 그 모든 노력이 하나도 없이 이루어지는 그 구원은 무슨 구원이라 그것을 말을 해서 구별해야 되겠고 또 이 구원을 얻은 자는 다 같은 이 구원 얻었지마는 믿고 행함에 따라서 천태만상 천층 만층으로 이와 같이 달라지니 그 구원은 무슨 구원이라, 우리가 힘을 써야 이루어지는 구원도 있고 전연히 힘쓰지 안해도 이루어지는 구원이 있으니 그 두 구원을 구별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은 자기가 아무런 사람이 상관없이 힘 안 써도 된다는 그 구원을 주장하면은 예수 믿어서 그거는 마음대로 살지 그저 알고 믿는다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럴 게 뭐 있겠느냐? 이러니까 이 구원이 혼돈돼서 실패하기 쉽다.
또, 죽도록 충성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야 구원이 된다고 하는 이 구원을 아무 인간이 상관 없어도 노력이 없어도 구원이 된다는 이 구원과 혼돈된다면 힘쓸 자가 힘쓰지 안할 수 있고 또 안 써야 될 것을 또 힘을 써야 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부득이 해서 이 두 구원을 구별해야 된다.
구별해야 되니까 하나는 기초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이거는 기본구원이라 하고 그 기초적인 구원을 얻은 구원 위에다가 자기가 이 기초적인 구원을 힘입어 가지고서 자기 주관이 관련되는 그 전심 전력 기울여서 이루는 구원이 있으니 이 구원은 건설구원이라고 구별을 지워야 되겠다, 또 성경에도 그 건축가의 말로도 했고 여러가지로 주님이 교훈하신 일이 있으니 이걸 부득이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으로 나누어서 구별해야 되겠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또 이렇게 또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래 서 가지고 있는 것은 예를 들면은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을 나누는 우리들의 이 깨달음이 틀렸다, 구원이면 구원 하나이지 뭐 둘로 나눠 하느냐? 여기에 이 깨달음의 교리가 하나되는 사람은, 이게 옳다 하는 사람은 이렇게 나누지 안하는 진영에 가 가지고는 제가 암만 있어도 이 교리에 걸려서 만족지 안하니까 이 교리를 주장하는 데로 찾아오게 될 것이고, 또 이 진영에 있는 사람 중에도 ‘그거는 틀렸다, 구원이면 구원이지 무슨 구원을 뭐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둘로 나누느냐?’ 이렇게 자기 양심상 깨달아진 사람은 이곳을 떠나서 다른 데로 가야 할 것입니다.
또 이뿐만 아니고 뭐 전부가 막 그런 게 많은데 이제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영에 대해서인데 그러면 영은, 영은 마음도 아니요 고기덩어리도 아니다. 마음과 고기덩어리는 둘을 합해서 육이라고 한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것이 영이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달리 말했고 살아나는 데도 달리 말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은 마음이 아니다. 영은 고기덩어리가 아니다. 마음은 영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 영관에 대한 깨달음을 가졌고 이 세상에 오늘까지 나오는 사람들은 영에 대한 깨달음이 다르니 이것이 하나의 또 교리입니다.
이래서 우리와 같이 나오던 사람들 가운데 영이, 영관이 달라서 우리와 갈라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또 영의 그 생사에 대해서 달라서 갈라진 사람들이 많았고, 영의 또 범죄와 범죄하지 않는 데에서 갈라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우리의 깨달은 교리와 신조가 하나되지 안하는 사람은 여게 있어도 오랑캐 노릇을 합니다. 여게 있어도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비꼬우고 반대합니다.
‘그뭐 조작배기 이렇게 뭐 이라는가? 오늘까지에 나오는 이 대대교파들 이런 교파들 또 대대신학자들 유명한 신학자들 그들의 말이니까 그게 맞지 이거는 아무래도 염려스럽고 따라갈 수 없다.’ 싶은 사람은 여게 있으면 이 진영을 깔볼 것이고 업수이 볼 것이고 여게 있어도 항상 존경은 딴데 있을 것이고 자기가 속한 이 총공회는 멸시하고 천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이 교리를 우리와 같이 깨달은 사람들은 아무리 다른 진영에 있어도 ‘이거는 틀렸다, 우리 진영에서 이거는 깨달음이 틀렸다.’ 이게 다르면은 모든 생활이 다르고 다 사상이 다르고 비판과 평가가 계획이 다르기 때문에 그는 거게 있어도 그 진영을 멸시할 것이고 우리 가는 이 진영을 사모해서 자기가 조만간에 옮길 것이고 옮기지 못하면 밥통에 달렸거나 어데 끌려서 원치 안하는 데 끌려 그렇지 그 양심상은 벌써 안 옮겨도 이곳에 와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어제도 말했지마는 아예 이 교리가, 교리와, 우리의 교리라 말은,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 말인데 우리의 깨달음이 이것은 이 깨달음에 반대되는 것 온 천하가 반대해도 요 깨달음이 옳다 하는 사람은 여게 속해 있는 것이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고, 또 ‘이거 깨달음은 틀렸는데 다른 진영에서 깨닫는 것이 옳은데 여기서 깨닫는 것은 이거는 틀렸다’ 싶은 그 사람은 여게 있으면 누구를 위해서 있어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여게 무슨 밥통이 달렸으니까 밥통 때문에 달렸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인간의 무슨 인인관계에 그런 게 끌려 달렸든지 그 사람도 이 진영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 언행심사 행동하는 것이 항상 이 진영을 멸시할 것이고 무시할 것이고 여게 대해서 언제든지 꾸중물을 일 것입니다. 일 것이고 또 이 교리와 신조를 깨달은 사람은 다른 데서라도 올 것이고 또 여게 있는 사람은 ‘이 우리 깨달은 진영이 제일이고 내가 영원한 문제가 우리 바로 깨닫고 못 깨닫는 데 속했기 때문에 이 깨닫는 것이 중대한 문제니 여게는 바로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여게서는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딴데 갈 수가 없고 나는 여게 있어야 되겠다, 진영으로서는 제일이다. 교파로는 제일이다. 이 깨달음은 제일 바르고 옳다.’ 하는 사람은 딴데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써서, 양심을 써서 가든지 오든지 할 일이지 머뭇거리고 있으면서 그라면은 만일 이 진영이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안하는 진영 같으면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혹 의가 되고 복이 될란지 모르나 그러면 냉정스럽게 아니라 하고서 박차고 선포하고서 그거 떠나야 자기에게 의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안하면 자기는 이중 생활의 거짓된 자요, 또 이것이 옳다고 하면 이것을 주장을 하고 ‘여게는 뭐 아무리 내가 어떤 뭐 세상이 다 소유와 몸과 생명이 희생돼도 이는 옳은 길이기 때문에 나는 여게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쳐서 살아야 될 길이다’ 이렇게 여기면 여기 사는 것이고 이러니까 정확하고 자기는 진실되고 정직하게, 거짓부리 이중 삼중 그런 가증스러운 일 하지 말고 정직하게 해서 가든지 오든지 해 가지고서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 그러고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을 주신 이 말씀은 이게 뭐 다른 무슨 어학의 책도 아니요, 또 무슨 논법을 가르치는 그런 책도 아니요, 또 이는 무슨 이상한 어떤 사람의 그런 장기를 드러낸 그런 책도 아니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요 정확무오 말씀이니 획 하나라도 변하지 안했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나는 살아야 된다, 요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그 사는 데는 이 말씀대로 살라 하다가 거슬려서 자기의 생명이 관계되면 생명을 버리고라도 이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이러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신구약 성경은 같은 성경이지마는 같은 성경을 보고 벌써 역사가 근 수천 년 지내 나오는 가운데에 수많은 교파들이 생겨졌습니다.
이러니까 성경은 같은 성경이지마는 보고 깨달음이 이렇고 저런 데에서 사람의 신앙 사상은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소망도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또 노력도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결과도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이 교리와 신조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하면은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투자해서 이 전부를 다 투자해 가지고 자기가 살아야 될 길이라고, 법칙이라고, 또 제도라고, 교훈이라고 이렇게 여겨지는 그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같지마는 깨달음은 각각 다르니까 ‘이 깨달음을 내가 택하나 저 깨달음을 택하나?’ 이래 가지고서 아무리 한 진영에 있어도 깨달음이 다르면 그 사람은 한 교회 있어도 다른 생활 하고 한 진영에 있어도 실은 사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고, 생애의 결과도 다르고, 또 구원 이룬 것도 다르게 되는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이 성경 보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몇십 년 살고 떠날 세상인데 떠날 세상인 그 세상 일도 자기가 잘못 알고 잘못 그 모든 것을 계획하고 또 노력하고 하면은 그 실패되기 때문에 어짜든지 잘못됨이 없이 바로 알고 바로 행동해 가지고서, 이미 버릴 성공이요 떠날 성공이요 자기는 상관 없을 성공이라도 이것을 틀림이 없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모든 일반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게 아니고 이는 우리가 성경 보는 것은 뭣 때문에 성경 보느냐? 우리는 이 세상 생활은 영원을 준비하는 세상 생활이니 이 세상에서 영원은 결정된다, 잘못되면 영원이 실패된다, 바로 되면 영원이 성공된다. 영원의 성패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그 깨달음이 세상 성패되는 그것보다도 우리는 몇 억억만 배도, 왜 그들은 짤막한 그 하루밤 나그네 같은 세상이지마는 우리는 영원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게 대한 그 평가가 더 높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보고 깨달음이라 하는 거 이런 중대한 문제가 있는 줄 알야야 되지, 뭐 우리 총공회서는 그렇습니다. 못 살아도 ‘성경에 대해서 바로 깨달으면 그 깨달음은 영원을 복되게 하고 구원을 이루고 잘못 깨달음은 영원을 망친다’ 이렇게 깨닫는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총공회입니다.
또, 그거야 깨달음이야 이래 깨달아도 되고 저래 깨달아도 되고 뭐 또 이래 깨달으면 이래 살고 저래 깨달으면 저래 사는데 이렇건 저렇건 그것은 일시 인간의 인심이나 얻고 인기나 끌고 다른 사람들이나 제 사람 만들고 일시에 자기의 승리나 하고 이런 하나의 이 나그네 세상의 처세술로, 처세의 방법으로 이렇게 이 교리와 신조로 깨닫는 자는, 우리 진영에 있는 자는 적입니다. 우리 진영은 그런 진영이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는 자는 우리 이 진영에 있으나 이 진영을 해치는 마치 암병균과 같은 그런 해독의 병균이지 그거는 절대로 우리 진영에 대해서 유익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모르니 모르는 아주 하나도 몰라서 깜깜하게 틀린 것뿐인 사람이라도 우리는 버리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와 가지고서 깨달아 배워 가지고서 자꾸 바로 될라 하는 사람, 또 아는 대로 다 몰라도 영원은 이 금생에 준비하는 거게서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깨닫고 바로 구원을 이루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한목 다 알지 못하니까 하나씩이라도 옳은 것을 배워서 알아 가지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사람은 뭐, 예를 들면 옳은 지식이 억만인데 하나만 배워도 그거 배운, 배운 그대로 요거는 옳은 것이니 내가 요거 가져야 되겠다 하는 그런 사람은 우리는 하나로서 버리지도 안하고 같이 동지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지식을 열 중에, 열 중에 열을 다 아는데 거게서 하나만 틀려서, 하나만 틀려서, ‘이거는 틀렸어’ 이거는 틀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틀린 그것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한 진영에 있어도 항상 서로 그 사이는 금이 나 가지고 있고 하나되지는 안하는 그겁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이 나중에 하나가 되면 속속들이 한 진영 신앙이 될 것이고 안 되면 그거는 언제든지 다르다는 것을 자꾸 이래 나타나 가지고 이라다가 언제 갈라져도 갈라지지, 이리 속해서 저걸 치워버리든지 저리 속해서 이걸 치워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로 가는 것이 또 양심이고 그게 아니면 구원 이루지 못합니다. 그건 거짓부리 장사꾼 모양으로 뭐 십중 뭐 몇십중으로 이중 삼중 그렇게 행동하는 그런 자이기 때문에 그거는 사기꾼이고 그거는 협잡꾼이지 하늘나라를 갈라고 하는 기독자의 종교는 아닙니다. 신앙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이 교리와 신조는 자기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 자기 소유보다 귀하다는 것, 자기 몸뚱이보다 귀하다는 것, 자기의 온, 전 자기 세상보다 귀하다는 것, 왜? 이것이 내가 온 세상살이를 내 세상과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여게 바쳐서 살아야 될 터이니까 여게 바칠 것이니까 그것은 내 생명보다 귀합니다, 왜? 생명은 거게다 바쳐 살아야 될 터이니까. 이런 것을 알고 우리가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궁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것은 백 목사가 깨달은 대로 다 따라오라 하는 말 아닙니다. 틀리면 틀리고 안 틀리면 안 틀렸고 이 일을 이만치 생명보다 중한 문제인 줄 알고 심각하게 궁구해서 죽기 전에 어짜든지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죽기 전에 가져야 되는 그것을 내가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나도 원하는 것이 내딴에는 옳다고 이러나 누가 틀렸다고 하는 그 사람을 내가 만나기를 원합니다. 옳다고 내가 옳다고 해서 가는데 옳다고 해서 가는 그 옳은 데에 찬동하고 오는 사람은 내게 대해서는 그저 동지자요, 알 지자. 뜻 지자가 아니고. 같이 아는 지식이 같은 사람이요 소망이 같은 사람이요 그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이니까 그저 한 형제로 이렇게 보고서 구원을 같은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 이런 사람으로 보고 있고, 내게 대해서 뭣이든지 틀린 것을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어쨌든지 내게는 지금 중대한 문제가 부딪혔다.
이러기 때문에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해서 내가 틀린 것을 고치게 되면은 그는 나에게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실패를 알려서 고쳐 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나 나의 선생님이요 지도자요 내게 대해서 선지자요, 또 그 사람이 잘못 알고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내게 대해서 하나 주의를 주고 하나 조심을 해서 한번 깊이 재심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줬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쨌든지 경고를 준 사람이라 해 가지고서 그 필요 있는 사람이지 없는 사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만 이 교리와 신조를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깨달아 가져야 된다 하는 그것을 지금 내가 오늘 아침에 말을 합니다.
그러고 이 13장을 왜 다 읽느냐 하는 것은 이 13장에는 그 비유 몇 가지를 가지고 말했지마는 그 범위가 넓어서 우리 신앙 생활에 전부를 다 말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아주 범위 넓은 이 교훈입니다.
이러니까 첫째로 내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은 이 13장에 여러가지로 비유를 말했는데 이 비유가, 우리는 이미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구별해 가지고서 우리가 지금 지식하고 있는 우리들이니까 이 13장에 비유 말씀 이 비유는 이 전부가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기본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이것부터 구별을 해야 이제 이 성경을 바로 알고 자기 구원이 바로 돼지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면은 그 사람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이것부터 구별해서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렇게 생각이 돼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 많이 지나갔으니까 그다음은 또 뒤에 시간있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말하겠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여기 교역자들이 다 우리 교역자회 모였는데 이 교역자들이 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서 이렇게 좀 진실을 걸어가야 되지 이 어리석게, 어리석게 사람 제 사람 만들라고 하다가 하나님 뺏기는 것을 모르니 우리 진영 신앙이 아닙니다.
또 사람의 서로 협동을 원하여 사람 협동을 노리다가서 하나님과 자기와 동거 동행하는 하나님 협동을 빼앗기는 이것도 우리 진영 신앙은 아닙니다. 천인 만인과의 관계가 돼도 하나님과 협동되는 이 협동이 크고 하나님과 협동된 이 협동으로서 사람과 협동되는 그것이 협동이지 하나님과 배치되고 사람하고 하나되는 그것을 원하는 자는 우리 진영에는 합당치 않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고신에서 나올 때에, 엊저녁에도 백파라 말이 났는데 나올 때에 처음부터 나온 것이 시비가 나. 내가 시비한 것이 지금 팜프렛트 해 놓은 것도 있고 또 그때 한 것을 지금 모두 다 죽었지마는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아예 우리는 좀 나그네 세상인데 오늘 끝날지 모릅니다. 제가 젊다고 뭐 ‘내야 젊으니까 지금 이래도 뒤에 어떻게 하지’ 하지마는 오늘이 젊은 사람의 마지막인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의 마지막인지도 모릅니다. 또 노인도 저보다 훨씬 오래 살아서 저 장례 지내고 몇십 년 있다가 또 죽을란지도 모릅니다. 그거 모릅니다. 그걸 성경이 말해 놓지 안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교역자들이 모였으니 지난번에 13장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는데 그말씀이 다 이러나 저러나 의문 가운데 있는 교역자들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러니까 여게 대해서 혹 참고로 삼아서 할 것은, 그러면 13장에 많은 비유, 씨뿌리는 비유도 있었고, 뭐 가라지 비유도 있었고, 곡식 비유도 있었고, 또 겨자씨 비유도 있었고, 누룩 비유도 있었고, 그물 비유도 있었고, 진주 비유도 있었고, 보화 비유도 있었고 이렇게 비유가 있었으니까 이것이 건설, 우리가 깨달은 대로는 그라면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자기가 믿는다고 하면은이는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인지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인지 이것부터 구별하고 나야 13장에 돼 있는 비유가 자기가 깨달아지지 이걸 구별하지 못하면 뿌럭지가 어데 붙었는지 그걸 모르는데 제가 무슨 연구를 할 것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마태복음 13장 이것이 비유 비유가 다 이것은 건설구원에 관한 것이라 기본구원에 관한 것이라 그것이 판정이 돼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순전히 건설구원에 관한 것이지 기본구원에 관한 것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다른 데는 보면 기본구원에 대한 것은 행함으로도 아니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된다고 했고 우리가 있기 전에 벌써 구원이 됐다고 말했고 이제 그 건설구원에 대한 것은 네가 행한 대로 갚는다 이렇게 말해서 심판도 공심판이 있고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어 공심판과 사심판으로 구별해 가지고서 사심판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만 심판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의 믿은 후의 그 행위에 따라서 갚는다 이렇게 말씀했으니까 나는 이 모든 성구에서 이는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자꾸 논하는 것이니까 이거는 행위구원에 대한 교훈이지 기본구원에 대한 것은 아니다 나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러니까 여기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은 저와 같이 가는 이 될 것이고 여기 대해 같이 가지 안하고 이거는 건설구원인가 기본구원인가 나는 모르겠다 하는 사람은 암만 한 진영에 있어도 껍데기는 악수를 하지마는 속은 합해지지 안할 것이고 이거는 기본구원을 말하는 것이지 건설구원을 말한 것이 아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다 망라해서 말한 것이다 하는 사람은 또 하나 안 될 것이고.
그러면 기본구원이라 하는 사람도 따로 있을 것이고, 건설구원이라는 사람도 따로 있을 것이고, 건설구원과 기본구원 둘을 말한 것이라는 사람 또 따로 있을 것이고, 이 따로 있는 이거는 이 교리상 세 가지로 갈라집니다. 그래 나는 거기 대해서는 뭐 모르겠다 하는 사람이 또, 모르겠다 하는 그 사람 또 수락 안 하니까 모르겠다 하는 사람 또 하나 있고 네 갈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총공회로 이와같이 이게 생겨진 것은 어데 지역이 달라서 우리 지방이 달라 가지고 그런 것 아니라. 뭐 부산 지방에서 내나 이거 생겨졌습니다. 또 무슨 선교한 그 선교 근원이 달라 가지고서 그런 것 아닙니다.
저도 다 같이 내나 한국에 믿는 사람이고 한국에 믿다가서 또 고신에 가입해 가지고 거기서 또 공부하다가 나온 사람이오.
무슨 분쟁으로, 분쟁으로 나와. 분쟁은 다른 분쟁 아니오. 분쟁은 똑똑히 알면 그 모든 교리와 신조에 대한 분쟁이었지 인간적으로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끼쳤거나 시비하거나 그런 일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내가 물질적으로나 인권적으로나 그뭐 그런 것으로 남한테 모욕을 줬거나 피해를 줬거나 이 가해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걸로 시비함이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교리와 신조 때문에 시비였습니다.
이러니까 나도 거게서 내 전부를 기울여서 고신에다가 여생을 바치기 위해서 이렇게 있는 것 다 애낌 없이 다 힘을 썼습니다. 제가 고신에 교회 끌어들인 걸로 말하면 몇째 안 갈 것입니다. 이랬지마는 그 교리 신조 깨달음이 다르니까 결국은 깨달음 때문에 자꾸 시비가 이래 나다가서 나중에 가서는 나뉘어졌습니다.
이러니까 여게 있어도 지금 그렇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아예 자기 깨달음과 같은 깨달음으로 옮겨 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옮겨 안 갈라면 이 진영에서 가만히 엎드린 사자 모양으로 그래 있지 말고 ‘이거는 틀렸다’ 해 가지고서, 틀렸으면 우리 총공회 진영에 틀린 것이 있으면 이것을 여게서 고쳐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치도록 해 가지고 그것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여기는 나쁘니까 ‘아이고 나는, 나쁘니까 그만 나는 나 갈 대로 가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저는 반대하는 주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고신에 있을 때에 거게서 안 나오고 끝까지, 전도사로서 일곱 노회에 문제가 됐습니다.
전도사로, 전도사는 한 교회 당회에 속했기 때문에 거게서 낼라면 내고 제거할라면 제거하는 것이지 그 큰 존재가 아닙니다. 이랬는데 일곱 노회에 문제가 있고 시비가 있었습니다. 총노회 때부터 시비가 있었습니다.
총노회는 고신이 처음에 한 노회로 시작한 그것을, 노회도 아니요 총회도 아니요 그거는 총회가 될 수 있는 제일 첫 노회로 모인 그 노회를 가리켜서 총노회라 했는데 총노회 때부터 시비가 돼 나와 가지고서 나온 것이 나중에 가서 마지막에는 결국은 자꾸 그라니까 자연히 갈라지게 되게 됐으니까 그래서 거기 이거는 제명을 해서 제명을 했기 때문에 그때 나와서 내가 그랬지 제명하기 전에 나는 거게서 뭐 외롭기가 많이 외로왔습니다.
이래도, 그라다가, 내딴에는 각오했어. ‘나는 이제 다시는 여게 대해서 말을 안 해. 할 말을 내가 다 해 놨기 때문에 듣든지 안 듣든지 했으니까 뭐 더 할 필요가 없다.’ 그라고 그날이 내가 머리 깎는 날입니다. ‘이제는 나는 아예 여게 대해서는 나는 완전히 선을 긋고 내가 다시는 내가 여게 대해서 뭐 시비를 내가 말하지 않겠다’ 했지마는 이미 말해 놓은 말이 많이 있으니까 거게 여파에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이래 가지고서 결국은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여게서 ‘이 진영에 틀렸으니까 나는 가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가지 마십시오. 틀린 것 어짜든지 고치고 가십시오. 고쳐 가지고서 고치다가 안 되면은, 안 받을라 하면은 우리가 쫓아내거든 나가지. 쫓아내거든 나가지 그저 자기가 스스로 자퇴하는 그런 일은 하지 마십시오. 그거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은 내가 알기는 늦게, 얼마 안 알아도 나하고 참 둘도 아닌 그런 거석했고, 이인재 목사님으로 말하면 뭐 생사를 같이 하자 할 만큼 그만치 하나가 됐었지마는 그때 나뉜 것은 그것도 뭐 인간 감정으로 나뉜 것 아닙니다.
그 나뉜, 나뉜 제일 원인을 알고 있는 분이 저게 ○○○장로님이십니다.
거게서○○○교회서부터 그리 됐었는데 교리 신조 때문에 그랬습니다. 거게는 중생된 영 때문에 그리 됐습니다, 중생된 영 때문에.
또 거게는 그때에 내가 ○○○목사님 그 시무하시는 데 대해서 같이 이렇게 협동하지 않는다는, 내가 그날 아침에 설교한 그것 때문에 서로 나뉘어졌습니다.
나뉘어졌으나 세월이 지나가니까 다 서로 깨닫고 이라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그걸로 가지고서 이렇게 나뉘고 이럴 필요는 없다 해 가지고서 다시 재화합을 해서 박윤선 목사님도 제가 존경하고 그분도 저를 기쁘게 용납하고 좋아하고 ○○○목사님도 그렇게 하고, 지금도 한국에 나오거들랑 우리 교회도 와서 한주일 예배 봐 달라 하는 그런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인지도 모르고, 백파가 무슨 죄 지어 가지고서 그래 몰린 백파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백파라고 하는 그게 이 부산은 고신의 근거지인데 고신의 근거지인 부산에 여게서 백파라 욕하는 이 서부교회가 그때부터 시비해 나와서 이랬지마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기 때문에 서부교회가 그것 때문에 망해지지 안하고 복음은 더 퍼졌습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자기 영원에 흥망성쇠가 지금 깨달음에 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바로 가지고 정직하게, 신앙은 진실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진실되게 ‘깨달은 이게 옳으냐 그르냐?’ 해 가지고서 확정을 지워야 되지 머뭇거리는 그거는 다 손해입니다. 확신이라 하면 확정보다도 앞선 것입니다. 확정 위에 확신이 생겨지는 거, 확정하고 난 다음에 확신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유에 대해서 지금 많이 엇갈리고 있는데 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게 기본구원에 관한 것이냐 건설구원에 관한 것이냐 하는 이것이 첫째 강령이 되는 중요한 문제고 그다음에는 이 행위에 모두 가라지니 이 모두 나쁜 거 이것은 택자라도, 택자라도 그 자기가 아무리 택자면 택자라 할지라도 행위를 가라지 행위 했으면은, 또 그물의 비유에 악한 자 행위를 했으면, 돌짝밭에 덤불밭에 뿌린 이런 행위를 했으면 그 행위는 지옥 간다, 나는 그거 확신합니다. 지옥 가는 행위 한 사람이라도 택자면 구원은 얻는다, 그것도 확신합니다.
이러니까 이 비유에 대한 것은 이 중대한 문제로 기본구원이냐 건설구원이냐 하는 문제인데 냉정스럽게 기본구원이 어찌되며 기본구원이 어찌되며 그러면 이 성경은 성경이기 때문에 이 성경 가지고 심판하니까 나는 이 성경으로 심판하면 나는 지옥을 가야 되겠느냐 천국을 가야 되겠느냐 나는 어떤 자인가 그것도 냉정스럽게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나따나 그저 둘러쓰여서 이렇게 그냥 지내 보내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보다 뛰어난, 고린도전서 4장에 말씀한 것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뛰어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가 가지고 우리가 심판을 받을 자 아닙니까? 그저 흐리멍덩하게 이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이라 말했습니다. 그분은 세밀히 구별하시는 분이오.
이런데 그냥 이렇게 속는 행위 하지 말고 냉정스럽게 해서 이게 옳다 싶으면 죽자껏 여기 바쳐 살아야 될 것이고, 이게 틀렸다 싶으면은 외쳐서 고쳐야 될 것이고, 고치다 못 고치면 자기가 힘이 약해서 못 고치겠다 싶으면 후퇴할 것이고, 그러면 그거는 패전자입니다. 자기가 죽든지 말든지 여기 생명을 바쳐, 모든 사람의 구원이 여기 있으니까 생명을 바쳐도 나는 이거 틀린 걸 나는 고치고 나가는 것이 내 사명이다. 그게 선지자입니다. 만일 틀린 걸 고쳤으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냉정스럽게 생각해서 오늘이라는 이 나그네 생활을 그저 지내지 말고 두려움으로 지내야 됩니다, 두려움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내가 깨달은 대로는 내가 아는대로 내가 숨겨 놓지 안하고 다 증거를 할라고 합니다. 이래서 가라지 행위 한 사람도, 가라지 행위 한 사람도 택한 자면 행위만 지옥 가지 또 택한 자면 그 영은 하늘나라 간다. 또 부활도 한다. 부활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부활한다 했지 우리의 공로로 부활한다고 하지를 안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놓지 말고 기도합시다.
그러고 우리 진영에 있으면 이기 옳은 줄 알면은 우리 생명 기울여 바쳐 해야 될 것 아니겠소? 자기가 확정짓지 안한 그런 교리를 어떻게 강단에서 가르치겠습니까? 그거는 이중의 사람이요 세상에서도 쓰지 못할 진실이 없는 사람이지. 자기가 안 믿는 것을 어떻게 가르치겠어? 그러니까 자기 믿는 대로 하고 또 틀리면 틀린 그걸 말해 가지고 서로 얼마든지 우리가 오늘 낮에도 교역자회니까 그걸 말해서 얼마든지 우리가 고쳐야 될 것입니다.
그러고 양성원 학생들 교역자회 참석합니까 공부를 합니까? 예? 양성원 학생들, 이게 내나 실천신학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거기서 공부하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여기 참석해서 이 교회들이 어떻게 되며 교역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떤 걸 하는가 이것을 참석하는 것은 실천신학이기 때문에 더 중요합니다. 다 참석하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