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6 14:28
기독자의 망하는 것은 악으로 망한다
1987. 9. 23. 밤(수)
본문:시편 1편 1절∼6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
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을 때에 잘 깨닫고, 깨닫는다 말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자기 살 것을 깨달은 것이 깨달은 것이지 그저 나와의 상관 없는 진리를 아는 것은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지식하는 것이지.
그러고 또 성경 본문대로 읽어서 외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성경을 좀 깨닫기 쉽도록 해석을 하는 것이니까 그 해석이 그 성경에 맞나 안 맞나 그것을 잘 상고해 가지고 해석이 성경에 맞으면 성경 말씀을 믿는 데에 크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만일 그 해석이 안 맞으면 그 사람은 성경과 맞지 않기 때문에 번민이 되고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또 ‘나는 성경을 잘 모르니까 그저 설교하는 대로 무조건 나는 따라가고 설교를 따라가겠다, 그대로 나는 순종하겠다.’ 이렇게 하는 사람도 속담에 눈먼 망아지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가듯이 하는 격이기 때문에 그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 가운데에 열심이 있으나 그 지식으로 깨닫고 지성적인 신앙이 아닌 그런 신앙은 가다가 크게 낭파를 당하고 또 자기가 큰 멸망 가운데 빠져도 빠진 줄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안 되지마는 그래도 설교를 듣고 나서 집에 가면 ‘오늘 성경 본문을 어데 봤는데 이 성경을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이 해석은 성경에 맞나 안 맞나, 엉뚱한 소리를 해 놨나 성경대로 해석했나?’ 그것을 잘 살펴 가지고, ‘성경대로 해석은 안 됐으나 다른 성경에 있는 대로 그대로 했다, 그러면 요 본문과는 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대로 맞지 안해도 이 해석은 여기에 가질 수 있겠다, 이는 얼토당토 안 한 해석을 했다.’ 이렇게 자꾸 알라고 애를 쓰면 차차 자라서, 어데 가서 설교할 때에 그저 사경회 하면 일주일 내내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가서 한 시간 딱 들으면은 ‘이는 어데로 가는 길이고 어데까지 갔고 지금은 괜찮아도 어떤 사회가 되면은 그때 이 사람은 신앙은 절단난다. 이 사람의 신앙은 어떤 그 시대에 절단난다.’ 그런 것을 다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잘 깨달을라고 애를 써야 되지 그냥 앉아서 귀만 내대고 소리만 듣고, 깨달을라고 애를 쓰지 안하면은 다 참 그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그 원수가 노리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꼭 깨달을라고 여러분들이 애를 써야 합니다.
이 시편 1편을 여러번 증거했는데 차차 차차 이제 쉬운 데서부터 증거를 해 가지고 이제는 더 정확한 데로 간추려서 나가는 것이니까 여러분들이 잘 들어야 됩니다.
이 성경은 전인류에게 주신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한 성도, 중생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경입니다. 중생되기 전에는 이 성경 말씀을 봐야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중생된 사람이 이 성경을 보고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깨닫고 바로 믿어서 자기 마음과 몸에 성화구원 곧 건설구원 행위구원 이 구원을 잘 이루어 나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오늘 밤에는 세 가지를 증거할라고 하는데 첫째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망하느냐 하는 그걸 첫째 말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망하느냐? 4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망하는 이유를 4절 이하에 기록해 놨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하는 말은 위에 “의인은 복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형통하다” 하고 난 다음에 4절 초두에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하는 것은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한데 악인은 형통치 않다 그런 말입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그러면 믿는 사람이 망하는 이유는 다 악인이 되는 까닭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영육에 금생 내세에 망하게 되는 것은 다 악인이 되는 이 악 때문에 망하게 된다 요 기록해 놨습니다. 악 때문에 망합니다.
악 때문에 망하면 망하는 것은 어떻게 망하느냐? 망하는 원인은 악 때문에 망하는데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랬습니다. 겨가 바람 불면 다 날아가 버리고 그까짓 거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멸망케 하는 거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그것을 가리켜서 바람으로 비유했습니다.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해서 다 겨가 날아가도록 한다. 절단나도록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람을 분다, 이 말은 하나님은 악인을 멸망해서 없어지도록 만든다. 없어지도록 만든다. 없어지는 것은 차차 없어지지요. 처음에는 지위가 없어지고, 권세가 없어지고, 소유가 없어지고, 명예가 없어지고, 위신이 없어지고, 대우가 없어지고, 가치가 없어지고 자꾸 그래 가지고 차차 차차 자꾸 없어진다 그 말이오.
겨는 사과 궤짝에 쌀겨를 거기다가 넣고 사과를 모두 안 넣습니까? 바람 불면 그거 다 날아가 버리고 없습니다. 그거 모양으로 악인은 그 모든 것이 다 날아가서 없어진다. 망해버리고 만다. 망하기는 누가 망하느냐? 바람 부는 거는 하나님이 불리는데 하나님이 악인을 망하게 하기 때문에 악인이 망해진다 그 말입니다. 바람을 불어서 망하게 된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도 겨가 아니고 알곡이 되면은 바람이 불어도 알곡은 날아가지 안하고 알곡은 차랑차랑하게 그대로 있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참 책을 암만 읽어도 그 실물 교재만 못해요. 실물 보고 배우는 것만 못하고 책 보고 배우는 거 그까짓 거는 아무 가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시에서 대대학을 졸업맡은 그 사람보다 저 시골에 농촌에 있는 사람이 언제든지 장자는 다 차지합니다. 미국 같은 나라도 공부하는 거 가지고서 안 돼요, 아무 문명국이라도.
가을에 타작할 때 보면은 풍구를 가지고 막 활활활 바람을 부쳐서 바람이 활활 붑니다. 그라면 쭉정이는 다 저 날아가서 거머다가 불에 태워버리요. 알곡은 바람이 불면 알곡 가치가 내려옵니까 올라갑니까? 알곡은 또록또록하이 그러니까 알곡도 아닌 것이 알곡인 척하고 있는 거, 알곡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그뭐 쭉정이 그런 거는 다 날아가 버리고 알곡은 깨끗하게 알곡 가치가 아주 또록또록하게 나타납니다.
이런데 악인이 왜 망하느냐? 하나님이 망쳐서 망한다. 또 하나는 자체에 망하지 아니할 수 있는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망할 것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망한다 그 말입니다. 자체가 망하도록 돼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이 망친다 그 말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 해석이 맞아요? 쭉정이는 바람이 부니까 날아가서 다 날아가서 절단나 버리고 또 그 자체가 망치는 건 자체가 알곡이 됐으면 안 날아갈 터인데 쭉정이가 됐기 때문에 날아가 버린다 그 말이오.
악인이 되면, 악인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람인데 악인이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망치고 또 자신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은 어떻게 합니까, 저 ○선생? ○○○인가? 뭘? 자신은 어때? 뭐라 하노? 여기 중간에 전달 좀 해 봐. 자신도 망한다 해?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하느냐 말이요? 자기는 자기를 어떻게 하는고? 자신은 자신을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내가 귀가 그래 그런지 말 끝이 좀 또록또록하면 그거 들릴 건데 안 그럴 건데.
자, ○○○장로님 악인은 자신을 어떻게 해요? 악인은 자신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뭐 자기를 위해, ○○이? 자기를 망쳐? 망할 요소만 만든다 하는 거 한 구십점이나 됐는데 그래도, 그 쉽지 안해요? 쭉정이 만들지 안해요, 쭉정이.
껍데기. 껍데기 만들어요. 자신을 자신을 껍데기 만들어요. 쭉정이 만들어, 쭉정이.
사람이 악인이 되면 하나님은 자기를 망치는 하나님이 되고 자신은 자신을 껍데기 사람 만듭니다. 그러면 이 해석이 잘못 됐어요 바로 됐어요? 껍데기 사람 만든다는 말은 알맹이가 뭐인가? 알맹이는 우리가 늘 공부하는 대로 열여섯 가지 하나님의 구속, 곧 신적 요소, 완전 요소, 영원 요소, 불멸의 생명에 속한 요소 이 열여섯 가지가 알맹이입니다. 알맹이가 없으니까 날아가지.
알맹이 없이 뭐 했는고? 쭉정이만 만들었지, 껍데기. 껍데기만 만들었지. 항상 생활에 껍데기만 만들었지 하나님이 멸망시킬 때에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하는 말씀대로 온 전국이 다니엘을 멸망시킬라고 막 달라들어서 참 태풍이 불었는데 태풍 분 이 태풍을 인해서 다니엘의 가치는 굉장히 존귀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속에 알맹이가 탄탄하니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안합니다. 도리어 가치만 높아집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사는 이것은 우리 구속의 열여섯 가지에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를 가지는 것은 열여섯 가지 구속에 정반대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 구속을 가지게 되면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놈이 막 뿌숴집니다. 견딜 도리가 없어.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자기 중심 자기 위주도 가지고 열여섯 가지 구속도 가지고 그래 가지지는 못합니다.
열여섯 가지 구속을 가질려고 하면 자기 중심이 깨지고 자기 중심 할라 하면 열여섯 가지가 있지를 못해서 밀려 나가야 되고, 자, 영감이 자기 중심 위주로 사는 자에게 영감이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리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사죄의 자유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못 해. 사죄의 자유도 같이 못 해.
또 마귀에게서 완전히 해방돼 자유하는 그 마귀에게 자유하는 그것도 하지 못해.
사망에 자유하는 것도 하지 못해. 하나님의 율법의 공심판 통과도 같이 못 해.
하나님과 화친도 같이 못 해.
하나님의 사활의 구속도, 도성인신하신 구속도, 창조의 구원도, 예정의 구원도, 선택의 구원도 자기 중심 가진 자는 이것은 가질 수가 없어요. 둘 다 가질 수 있어요 없어요, 우리 ○○○목사님? 둘을 한목은 절대 못 가집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악인이 되고 보니까 열여섯 가지 구속은 자연히 원수가 되니까 열여섯 가지 구속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지지도 안하고 또 열여섯 가지 구속과는 서로 대립이기 때문에 둘은 한테 있을 수가 없어. 이게 깨지든지 저게 깨지든지 둘 다 한테 있을 수는 없어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람이 되면 자신이 망할 요소만 자꾸 만들지, 지위 만들고 권세 만들고 뭐 이래서 그 일국의 권세가 제일이다, 돈은 그 나라에 제일 재벌가다, 그 세계에 과학자다.
자, 그것이 하나님이 멸망시킬 때에 멸망 안 할 수 있는 알맹이가 됩니까 안 됩니까?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데 그때도 과학이니 학문이니 정치니 뭐 권세니 재벌이니 미인이니 미남이니 예술가니 꽉 차 흔했지마는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홍수에 멸망하지 안하고 그 피할 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어.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데에 멸망치 안할 수 있는 것은 열여섯 가지 구속입니다.
열여섯 가지 구속은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멸망 속에 갖다 넣으면 멸망합니까 더 또록또록하게 빛이 나고 광채가 나고 윤기가 납니까, 그 멸망시키러 하나님의 심판이 가면은 멸망을 합니까 거기 더 또록또록하게 더 광채가 납니까 어떻습니까? 이거 이해가 돼요? 이해가 돼야 돼.
제가 제 중심이 돼 놓으니까 속에 멸망치 안할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날아갈 쭉덩이만 있으니까 하나님이 멸망시키니까 확 멸망받지. 노아 홍수 때에 홍수로 멸망시키는 멸망을 보내 버리니까 노아의 여덟 식구만 따글따글하게 남아 있지 나머지지는 다 멸망 받았어.
이와 마찬가지로, 망하는 것은 악으로 인해서 망한다. 기독자들이 망하는 것은 악으로 인해서 망한다. 기독자들이 망하는 것은 악으로 인해서 망한다. 악으로 인해서 망하면 누가 망치는고? 망치는 것이 몇이 망칩니까, 손가락으로? 몇이 망칩니까? 서이? 몇이 망칩니까? 이 둘이라야 돼, 둘.
하나님이 망치고 제 악이 망치고, 하나님이 망치고 악이 망치요. 제 악이 저를 망쳐. 왜 제 악이 왜 저를 망쳐? 제 악이 제 중심 제 위주 그것이 하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을 가지지 못하게 하거든.
열여섯 가지 구속은 전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인데 자기 중심 자기 위주하고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하고는 정 대립 아니요? 싸우니까 누가 깨지겠어? 이러니까 하나님이 같이 싸우면 멸망시킬 것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하시고 전부 저 혼자 있으니 멸망만 자꾸 만들지요.
이러니까 기독자들이 망하는 것은 순전히 악 때문에 망합니다. 악 때문에 망하는 것은 두 가지가 망치는데 하나님은 그것에게 재앙을 내려 가지고서 망치고, 바람 부는 거는 재앙을 말해요. 재앙을 내려 가지고서 망치고 저는 저를 어떻게 망치는가? 저는 하나님의 재앙에 망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재앙에 또록또록하게 더 유명해질 수 있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그 기회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다 보니까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재앙에 더 또록또록하게 남아 있어 가지고 영광스럽고 가치 있게 될 것을 만들지 못하고 전부 하나님의 재앙에 멸망받을 껍데기 쭉정이만 가지게 된다. 껍데기 쭉정이는 뭐인데? 세상주의, 세상에 속한 것 그런 것이지.
그러니까 기독자는 악으로 망한다. 악으로 망하면 누가 망치느냐? 하나님이 재앙으로 망치고, 또 하나는 제 악이 저를 망친다. 제 악이 어떻게 저를 망치는가? 제 악 그놈이 하나님의 재앙에 멸망하지 안할 수 있는 열여섯 가지 구속을 만들 수 있는 그 기회에 껍데기 이 세상 위주 세상 본위 세상에 있는 거, 하나님의 심판이 오면 멸망받을, 하나님의 재앙이 오면 재앙을 이길 수 없는 땅에 속한 이런 것들만 자꾸 만들어 버리고 영원히 멸망하지 안할 거 완전한 거, 영원한 거, 불변한 거, 진리, 영감, 심판에 통과하는 의, 사죄, 칭의, 화친 이런 것은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그거요.
그러면 자기 악이 자기를 망치는 것은 자기 악이 들어서 망하지 아니할 수 있는 그 요소를 만들지 못해서, 그놈 때문에 꼬임받아 가지고 만들지 못해서 망했기 때문에 자기 악이 자기를 망치는 것은 자기 악이 자기를 꾀워 가지고 그 악에게 꼬여 가지고 하다 보니까 망하게 된다. 요거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기독자가 망하는 것은 악 때문에 망합니다. 기독자가 망하는 거는 악 때문에 망하요. 자기 중심 때문에 망하요. 벌써 사람을 접촉해서 자기 중심의 사람이면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말 저런 말 하지마는 그 사람에게 손을 잡고 일하든지 도움을 받든지 하는 그런 거는 아예 손 딱 떼 버립니다. 그거는 만나 봐야 백해 무익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 위주는 저 망하고 남 망치는 그 요소인데 그거 같이 접촉하면 다 망할라고? 그러기 때문에 아예 사람을 접촉해서 얘기하다 보면 벌써 악이면 그 사람은 접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접하지 안하요. 그저 허허 그만 이래 가지고 설설 뭐 덖어 이래 버리고 말지 그걸 뭐 쓸모 있다고 거게 무슨 덕을 볼라고 거게 뭐 이용을 해서 좀 뭐 심부름이나 시킬라고 뭐 서로 협동을 해서 뭐 해 볼라고 아예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안 해요.
기독자가 망하는 것은 악 때문에 망합니다. 왜 악 때문에 망하느냐? 자기 악이 자기를 망치는 것은 자기 악이 들어서 영원히 망하지 안할 예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을 만들고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놈이 가지지 못하게 하니까 열여섯 가지 구속에 속한 것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이 땅에 있다가 없어질 것 그런 거, 껍데기 겨와 같은 거 그런 것만 자꾸 만들도록 하다 보니까 ‘나는 이 세계에 지금 제일 강대국의 대통령이다’ 말하지마는 그것은 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거는 풀과 같은 것들이다.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그 영광과 존귀는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그러면 그 꽃의 아름다움이 다 없어진다. 모든 부강한 자들의 그 영광도 이와 같다. 성경이 말했어.
자기는 하나님의 재앙과 멸망에 멸망치 않을 것은 만들지 못하고 멸망할 것만 만들도록 그 악이 들어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기 가진 악이 자기를 망치고 또 그렇게 한 자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서 망쳐버립니다.
자체는 쭉정이기 때문에 날아갔고 또 쭉정이라도 안 날아갈 건데 하나님이 바람 불려 날아갔고, 그러니까 하나님 때문에 절단났고 자체가 쭉정이기 때문에 절단났다. 그거는 다 악 때문에 그러하다. 이치가 맞아요? 해석이 딱 맞습니까? 저게도 이해가 돼요? 이해가 돼야 돼지 이해 안 되면 헛일이라. 이해가 돼야 되지.
예수 믿는 걸 요래 하나 하나씩을 똑똑히 배워 가지고 이래야 될 터인데 껍데기로 예수 믿으니까, 예배당에 왔다가, 뭐 무슨 고함 지르면 ‘아이고, 오늘 은혜 있더라’ 또 무슨 정서나 읊어놓으면, 명신홍 목사님이, 내가 서울 가서 그때 집회할 때인데 서울 생긴 이후로 그때 그 집회로서 이천 명 모인 집회가 서울 생긴 이후로서는 처음이오. 한국으로서는 처음입니다. 그 집회 제일 처음에 제가 인도했어.
했는데, 와 가지고서 ‘여기 어떤 목사님이 참 은혜 있다’ 해서 한번 가 봤어요.
가 보니까 뭐 지금, ‘지금 이북에서는 창 밖에 비는 줄줄 흐르고, 친척들은 다 떠나서 없어지고’ 이라면서 무슨 그 말 몇 마디 하니까 애앵 그러면서 막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오더래요. 그게 은혜라. 그거는 아무 은혜가 아니오.
요 예수 믿는 이치를 똑똑히 깨닫고 그 이치대로 하는 그것이 구원 이루는 것이고, 이치 깨달은 것이 그것이 은혜 받은 것이고, 이치를 깨닫고 그대로 살 수 있는 그 간절한 소원과 능력 받은 것이 그게 은혜 받은 것이라.
이래서, 이 가르치는 도리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돈 따라서 딴데 못 가요. 살기 좋은 직장 따라 딴데 못 가요. 이사도 못 가고 도망도 못 치고 죽어도 여게서 믿어야 돼. 안 들으면 어데 가면은 이 도리 가르치는 그런, 이 도리를 가르치는 그런 교회 찾아가야 되지 그냥 뭐 불이 온다, 방언을 한다, 예언을 한다 하는 그런 데는 미혹받아 가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 하나 배웠어요. ‘기독자들이 망하는 것은 악으로 인해서 망한다’ 요거 자꾸 가서 새김질해.
또 둘째로, 여게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는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요거는 비유한 말입니다.
시냇가에 심었다 요 비유는 이 냇가에 심었다 그 말, 냇가에 심으면 떠내려가 버리요. 냇가에 심었다 말이 아니고 요 시내는 냇물을 보를 막아 가지고서 토지에 댈라고 봇도랑 만들어 놓은 봇도랑 봇둥천, 봇도랑 둥천을 가리켜서 여게 시내라 요렇게 말한 것입니다. 요러기 때문에 요 시내라 하는 요 시내는 관수의 언덕이라, 물을 댈라고 만들어 놓은 그 봇둥천이라 그런 뜻입니다. 봇둥천이라야 가물면 물 대니까 가물음 타지 안하지, 비가 많이 오면 또 봇둥천은 물을 에워버리기 때문에 봇도랑에 물이 빠짝 마릅니다. 물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러니까 물이 없으면 물을 대 주고, 물이 많으면 또 물을 빼 버리고 요렇게 관수를 하기 때문에 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무성하게 잘 자라지요.
그래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말은 이 봇도랑에 심겨진 과실나무와 같은 기독자는 “시절을 좇아서 과실을 맺으며” 하는 시절 좇는다 말은 그 기회 기회마다 결실을 맺고, 기회 기회마다 결실을 맺고, 종별 종별마다 결실을 맺고, 시작하고 경영하는 일마다 결실을 맺고, 모두 다 성공한다 말입니다.
성공할 기회는 다 성공 다 하고, 또 계획한 것이든지, 또 시작한 것이든지 뭣이든지 그 사람의 하는 모든 일이 다 전부 성공되고, 성공 안 되는 시간도 성공 안 되는 종류도 없이 다 성공된다 하는 그걸 가리켜서 “때를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때를 따라 과실을 맺으며” 요 해석을 내가 지금 시기, 또 형편, 사업, 경영, 그 모든 것이 다 성공해서 성과를 맺는다 요 해석이 바르요 못 바르요? 요 해석이 발라요 못 발라요?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요 그 해석이 바로 됐소, ○○○씨? 바로 됐어? 바로 됐습니다.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성공하는 것을 가리켜서 과실을 맺으며 요렇게 말했고, 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같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안하고 그 잎사귀가 항상 청청하다. 그 잎사귀가 항상 청청하다. 청청하니까 자라지요. 그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믿었다가 낙심했다가 믿었다가 낙심했다가 그렇지 않고 그 믿는 믿음이 항상 청청합니다.
하나님을 뭐, 천인 만인이 낙심할 만한 그런 형편을 만나도 그 믿음이 요동치 안하고, 항상 그 믿음이 요동치 안하고, 항상 하나님을 소망함이 요동치 안하고, 또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도 요동치 안하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요동치 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요동치 안하고, 참고 견디는 것도 요동치 안하고,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 행위가 조금도 뭐 굴곡이나 변동이나 또 약화나 그런 것이 없이 언제든지 한결같이 청청하다. 모든 신앙 생활이 청청하다. 신앙 생활이 날로 날로 새로와지고 자라가고 있다 그것을 가리켜서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것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서 과실을 맺으며” 시절이라 하는 때 시(時) 자는 때마다 아니요? 때마다 과일 맺고, 절기라 하는 절기라 하는 건 좀 커다란 때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몇 절기가 있습니까, 저 ○선생?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 몇 절기 있어? 사절. 옳지, 사절기. 저게 뭐 나는 뭐 할 거 같은데 저게 지금 무슨 준비는 하는지 몰라도, 보자, 돈 얼마 벌어 놨나? 한 일억 돼? 어? 엔간히 돼 가? 뭣하고 있어, 그라면? 그래 가지고 얼른 예배당이나 한 일억 들여 지어 놓고 가서 얼른 목사노릇 해야지 뭐 그것도 안 하고 그러면 뭐 밥만 먹고 살아? 절후는 그래 사절, 춘하추동 사절 이게 절후라, 춘하추동 사절. 또 사람으로 말하면 학생 시절, 중학 시절, 또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 또 이제 대학원 시절, 유학 시절, 또 사회인 시절, 중측 시절, 늙은 시절, 그런 거 절, 절이라 말은 저 범위 넓게 말은 거라. 때는 짤막짤막한 토막을 말하고 시, 절, 절기라 그 말은 절이라 말은 범위를 넓혀서 말하는 것입니다.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는 마르지 아니함 같도다” 잎사귀가 항상 청청하다 그 말이오. 이거는 뭐 금방 믿었다가 금방 낙심했다가, 금방 소망했다가 금방 절망했다가, 또 금방 맡겼다가 되찾았다가, 또 의지했다가 아이구 의지 못하겠다 말았다가, 순종하다가 말았다가 이거는 골케골케해 가지고서 그 잎사귀가 만날 말라 떨어지고 떨어지고, 났다 떨어지고 났다 떨어지고 그까짓 게 뭐 일을 추겠어?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일이 다 형통하다. 그 형통하다 말은 아무것도 방해하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형통하다 말은 이 세상 일도 형통하지마는, 그 사람이 이 열여섯 가지 구원 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해.
좀 살아볼라 하니까 요 마귀가 와 가지고 그만 죄 가운데 폭 끌어들여서 그만 죄 가운데 폭 빠집니다. 또 그 사람이 ‘내가 받은 영감대로 계속 살아 볼란다’ 영감 받았는데 그때는 배나 마귀가 오고 마귀 친구가 와 가지고 날뛰어 쌓아서 그만 영감 다 뺏겨버렸어. 영감 다 뺏겨버리고 자꾸 폭폭 촉분을 질러버리니까 영감은 떠나버리고 악령 감화의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돼 버려. 그런 건 다 형통치 못한 것입니다. 형통한 것은, 방해할 것이 없고 “열린 문을 두었다” 하는 말과 같은 말이오.
이러니까 열여섯 가지 구속 생활을 할라 할 때에 하나도 거리끼지 안하고 세상이 뭐 어떻게 불어온다 할지라도 그대로 꼭 일관으로 계속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리로다. 그러니까 그 사람 하는 일이야 사업도 형통하고 세상 일도 형통하고 하늘나라도 형통하고 전부가 다 형통이지 뭐 불통이 없어.
요것은 여러분들이 체험해야 됩니다.
요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복있는 사람으로 할 때에는 뭐 자꾸 결실이 맺소. 누가 제가 일합니까? 하나님이 일해, 제가 일 못 해요. 딱 되면은 하나님이 여게서 일하고 저게 일하고 자꾸, 자꾸 일을 해 줍니다. 자꾸 일을 해 줘. 자꾸 일을 해 줘요.
그걸 여러분들이 해 보면 알아요. ‘이상하다. 내가 좀 조심해 신앙 생활 하고 보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같이 하는 것이 보여진다. 이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것도 또, 안 될 거 같았는데 도리어 그게 뒤에 보니까 더 좋아져 버렸고. 안 될 거 같은 게 더 좋게 되고 안 될 거 같은 게 더 좋게 되고 자꾸 그게 돼지고, 또 아예 됐다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끝이 없어. 그만 기한 전에 과실이 떨어져 버려.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셔서 세상 일도 그러하고 믿음 생활 일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아무 방해하지 못하고 자꾸, 방해 같은 것이 도리어 유익이 되고, 해치는 게 또 이익이 되고, 나를 대적한 것이 오히려 응원이 되고, 나를 미워해서 욕한 게 도리어 축복이 되고 자꾸 그렇게 돼지니까 그거 누가 그거 감당하겠습니까? 이런데 여게 대해서 둘째로 여게 대해서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나무가 시냇가에 심어지는 것이 제가 심어지고 싶어 심어집니까 주인이 심어서 심기워졌습니까? 어때요? 나무 제가 ‘나는 시냇가에 심어 주십시오’ 나무 제 소원대로 됐습니까 주인 마음대로 심었습니까? 주인 마음대로 심었어.
또 과일 맺는 거, 과일 맺는 거, 저는 제가 맺고 싶다고 과일이 맺혀집니까, 저는 맺고 싶은 것뿐이지요. 그런데 과일 맺는 것은 비도 와야 되고, 또 햇빛도 쪼여야 되고, 공기도 있어야 되고, 영양분의 양분도 있어야 되고 다 있는 거라. 그런 모든 조건이 있어야 과실나무가 과실을 맺지 자기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자체는 그저, 자체는 되고 싶은 것뿐이라. 자체는 되고 싶은 것뿐인데 되게 하는 것은 자기 아닌 모든 것들로 인해서 다 되게 된다 그 말이오.
또 잎사귀가 자꾸 마르기 싶지요? 마르기가 싫고 잎사귀가 청청하고 싶지요.
청청하고 싶지마는서도 청청하도록 환경에서 그렇게 도와 주지 안하면 안 돼요.
바짝 마른 땅에 제까짓 게 뭣을 청청해? 보면은 이놈이, 여름에 가 보면 밭을 매러 가 가지고서 지심을 잡초를 매 가지고서 뒤벼 놓습니다. 뒤벼 놓으면 이튿날 아침에 가면은 얼마나 살라고 애를 썼던지 이튿날 아침에 가 보면 새뿌리가 내려 가지고서 밑으로 벌써 내렸어.
주인이 또 요걸 훼딱 또 뒤비쳐 놔 버린다 말이오. 그만 빠짝 말라 죽어. 소용 없어. 제가 암만 살고 싶다고 해도 이 풀 한포기 한가지라요. 살고 싶다고 해도 그 주인이 살게 해 줘야지 살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돼요.
청청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과실 맺는 것도 나무 저 혼자 맺는 게 아니라 과실 맺을 수 있도록, 또 그 나무가 클 수 있도록 저 아닌 다른 것들이 모든 다 구비 조건이 돼 가지고서 응원을 해야 되지 응원 안 하면 안 돼. 저 혼자 살고 싶다고, 저 혼자 열매 맺고 싶다고, 저 혼자 잎사귀가 청청하고 싶다고, 저 혼자 하고 싶지마는서도 저 아닌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지 도움을 받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요걸 둘째로 배워야 돼요.
기독자가 영과 육에 모든 금생과 내세에 행복되고 성공되는 것은 저는 되고 싶지요. 저는 하는 건 되고 싶은 것뿐이라. 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것뿐이지마는 그 되도록 시냇가에 심은 것도, 나무 저는 잘되고 싶은 것뿐이지 시냇가에 심은 것도 주인 뜻대로 했기 때문에 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안한 것. 주인 맘대로 했지 제게 속한 게 아니라.
저는 어찌됐든간에 좋은 데 심겨지고 잘 살고 싶지마는서도 그거 가지고 청청하는 것도 아니고 열매 맺는 것도 아니라. 그 주인이 그 모든 다른 걸 다 좋게 해 줘야 된다 말이오.
거름 안 주면 그까짓 거 놀놀하게 해 가지고서 그만, 물 안 주면 죽고 거름 안 주면 놀놀해 안 됩니다. 여기 이런 거 옥상에서 지금 하는데 이거 주인이 거름 줄 때 거름 주고, 물 줄 때 물 주고, 햇빛 쬐일 때 햇빛 쬐우고, 또 너무 쬐우면 그늘을 또 가뤄 줄 때 가뤄 주고 이 전부 주인의 혜택으로 이것이 되어지는 것이지 저는 살고 싶은 그뿐이라. 생의 애착욕뿐이라. 그거뿐이지 제 힘으로는 하나도 안 돼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자들이 행복된 것은 제가 행복되고 싶은 그 마음이고 행복되고 싶어하는 고거뿐이지 행복되게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 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풀 이놈이 안 말라 죽을라고 애를 써도 주인이 마르게 해 버리면 말라진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흥망 성쇠가 순전히 하나님에게 달렸지 제게 달린 거는 하나도 없다 요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요걸 알아야 되니까 흥하고 망하고 흥망 성쇠는 다 하나님에게 달렸으니까 이분이 잘해 줘야 되겠다 하니까, 자, 그분이 잘해 주면 되고 그분이 잘못해 주면 망하고 하니까 그분에 내 흥망 성쇠가 달린 줄 아는 사람은 그분 비위를 거슬려요 그 비위를 안 거슬려요?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봐요. 안 거슬린다고, 그분에게 흥망 성쇠가 달린 줄 아는 사람은 그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봐요. 다 그래요. 다 그래요. 이걸 알아야 돼요, 이걸 알아야. 흥망 성쇠가 그분에게 있어.
‘내가 학력이 뭐 학식이 얼마나 있고, 내가 과학이 얼마나 있고, 기술이 얼마나있고, 내가 지금 건강이 얼마나 있고, 지혜가 얼마나 있고’ 그라면 하나님께서 ‘얘 요놈의 새끼, 네가 고러니까 요놈의 새끼를 바짝 말려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망한 게 모든 예수 믿는 사람이 망한 것들이라. 그게 벌써 그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이 망치도록 망할 징조라, 그게.
이래서 두번째로 배울 것은, 우리 기독자들이 행복된 것은 절대 하나님 그분에게 매였지 내게 매이지 안했다. 이러니까 ‘그분의 긍휼이라야 된다.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겨야 된다. 그분이 나를 사랑해 주셔야 된다.’ 이래 가지고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분의 긍휼과 그분의 사랑의 그 은혜라야 되지 그분이 아니면 안 된다. 요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 알겠습니까? ‘내 흥망 성쇠는 그분에게 매였다, 내 행복은 순전히 그분에게 달렸다, 그분이 나를 행복되게 해 주셔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요걸 깨닫고 그분이 나를 행복되게 해 주도록 할라고 그분의 비위를 맞출라고, 그분의 비위에 하나도 거슬리지 안할라고, 그분이 노여워하는 그런 행동을 안 할라고, 저거 둘이 하지마는 주님은 안다 그 말이오! ‘조게 어떻게 하나?’ 주님만 아니고 주님의 사람들도 알아요.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인 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해서 ‘이분에게 거슬리면 나 망하고, 내 가족 망하고, 내 교회 망하고 다 망한다. 이분에게 거슬리면 안 된다. 이분의 노를 풀어드려야 된다.’ 그분의 노를 풀어드려야 될 줄 알고, 그분에 노를 끼치지 안해야 될 줄 알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될 줄 아는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 그 사람은 점점 높아져요.
이래서 오늘 저녁에 두번째 배우는 것은 뭐이냐? 이것은, 나무가 시냇가에 심어지는 것도 제가 심기고 싶어서 심겨지는 게 아니고 주인이 심었기 때문에 심어진다. 주인이 심으지 안하고 모종을 들어서 팽개쳐서 내던져 버리면 저 날아가 가지고서 나무 위에 걸려 가지고서 말라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아무 실력 없어. 하나님이 저를 복되게 하시면 복되고 하나님이 ‘네 이놈!’ 하고 내던져 버리면 그만 말라 뒈져버려요. 아무 소용 없어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제가 제야 살고 싶기야 뭐 나무 위에서도 살고 싶고, 또 뽑혀 가지고도 살고 싶고, 살고 싶기는 꼭 같이 살고 싶지마는 땅 속에 들어간 놈은 살고 또 시냇가에 심은 놈은 더 잘 되고 이래요.
이러니까 그것이 제가 심기고 싶어 심긴 게 아니고 주인이 심어 줬기 때문에 심어졌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를 시냇가에 심어 주시옵소서.’ 당신에게 있는 줄 알고 당신의 비위를 안 거슬리고 당신이 나를 잘해 주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자비를,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라고 애쓰는 그자를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로 아시고 축복하십니다. 뭐 하나님이야 뭐라 하든지 ‘내가 잘나서 그런데’ 하는 그자는 언제 망해도 망합니다.
열매 맺는 것도 조건을 맞춰 줘야 열매를 맺지, 잎사귀가 청청한 것도 조건을 맞춰줘야 잎사귀가 청청하지 제까짓 게 암만 잎사귀 청청하고 싶다고 되는가? 농부가 청청하도록 만들어 줘야 되지. 그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셔야 되지 안 해 주시면 안 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행복은 순전히 ‘우리가 암만 되고 싶어도 안 된다.
기독자의 행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하나님께 달렸다. 이러기 때문에 그분 앞에 교만한 자는 물리침 받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도록 해야 된다.’ 하는 요것을 둘째로 배워서 기억하십시오.
셋째로는ㅡ 이거 좀 많은데ㅡ 셋째로는 그라면 자 하나님이 나를 시냇가에 심으도록, 열매를 많이 맺도록, 잎사귀를 청청하도록, 그 행사가 다 형통하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시도록 할라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것이 있어.
우리 자신이 자신을 행복되게 할라 하는 거는 절대 안 되고, 자신이 자신을 행복되게 할라고 할수록이 하나님은 밉상이라고 자꾸 더 망쳐버리요. 자신이 자신을 행복되게 할라 해도 안 돼요. 이러니까 아예 ‘나를 행복되게 해 주실 이는 주님이시다. 이러니까 주님이 나를 행복되게 해 주시도록 하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이 1절로부터 2절에 있어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또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또 그 다음 뭐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또 그 다음은 뭐이요? 주야로 묵상하는 거.
요 다섯 가지 일 하면은, “묵상하는 자로다” 이라고 “저는” “저는 시냇가에” 저는 누구를 저는 말합니까, 저는?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같이” “저는” 하는 건 누굽니까? “저는” 하는 건 누굽니까? 이 다섯 가지를 한 그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이 다섯 가지를 한 사람은. 이 다섯 가지 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만 그 주위, 환경, 형편, 사정, 처지, 현실, 분위기, 전부를 하나님께서 마구 좋도록 만든다 말이오.
시냇가에 심으니까 그뭐 거게는 모아 놓은 것이니까 땅도 흐분흐분하게 좋지, 물 좋지, 또 비올 때는 또 물 잘 빠지지. 이거 모양으로 주위, 환경, 형편, 사정, 처지, 분위기, 현실, 전부를 다 좋게 해 준다 그 말이오. 이 해석이 틀려요 맞아요? 이 해석 맞아요? “시냇가에 심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우리에게 형편, 사정, 처지, 분위기, 주위 환경, 모든 접하는 사람들, 만물들, 이 기후들, 천연들, 자연들 이 전부가 다 우리 잘 되도록 그 전부를 하나님께서 해 주는 것을 가리켜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이렇게 말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시냇가에 심었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환경과 주위와 형편과 사정과 처지, 모든 관련된 사회, 관련된 사람, 관련된 자연, 관련된 천연, 전부 이것들을 다 좋게 이래 만들어 주니까 열매 맺고 잎사귀 청청한 것처럼 그 행사가 다 형통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거 해 줍니까? 몇 가지 있는 사람에게 이거 해 줍니까, 손가락으로? 이라면 다 됐어. 다섯 가지 있는 사람 해 줘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섯 가지.
“저는” 하는 건, 다섯 가지를 말해 놓고,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저는” 3절에 “저는” 이 다섯 가지 행한 “저는” 이 다섯 가지 행한 “저는” 어데 심어요? 시냇가에 심어요. 시냇가에 심었다 말은 모든 주위, 환경, 분위기, 자기 근원, 소속, 관련, 자연, 모든 천연, 이 기후, 전체 분위기를 다 잘되록 만들어 주신다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요 다섯 가지만 우리가 하면 됩니다.
녜, 시간이 많이 가서 그만, 다섯 가지는 집에 가서 많이 생각해요. 또 다섯 가지는 내일 아침에 또 말해요. 다섯 가지 또 말하는데, 이제 가서 끙끙거리고 짜다라 사업만 부지런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되지 ‘내가 새벽기도 나가면 오늘 장사 못 한다’ 장사 못 하면 너는 장사 가지고 살아라.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 축복 가지고 살라 하는 사람은 새벽기도 나올 것이고 축복 아니고 제가 부지런히 해 가지고 산다 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가야지, 뭐. 그것도 좋지마는 하나님 축복 받는 것만 못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하겠습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도록 합시다. 이번 공과는 지난 주일 공과를 다시 공부합니다. 또 삼십 분 기도를 꼭 빠지지 말고 계속합시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나오도록 합시다.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도 계속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