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에 제일 중요한 것

 

1987. 1. 31. 새벽 (토)

 

본문:시편 91편 14절∼1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지난 밤에 증거한 그 증거는 좀 어렵고 깊은 걸 말하다가 보니까 여러분들에게 듣지도 못하고 시간만 많이 갔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을 수가 있을 터인데.

신구약 성경은 다 하나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꼭 한 마디입니다. 한 마디인데 이리 말하면 이말 되고 저리 말하면 저말 되고, 그래서 마치 태양은 하나이지마는 그 태양 하나가 양사방 비추어 가지고 ‘여게도 햇볕이 있구나’ 이 태양이 딴것이 아니라 한 개가 그렇게 전 세계에 비췹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이 완전 하나가 들어서 모든 면으로 다 비추어 나가는데 비추어 나가는 반사되는 그 일면을 들어서 딱 말하면 사람들은 압니다. 그것은 알아듣기가 쉽고 압니다.

그 일면 그것보다도 더 밖으로 나와 가지고 인간들에게 작용되는 이 도덕에 대해서 말하면 잘 알아듣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직까지 보면 도덕에 머물고 도덕에서 그 신앙으로 들어가지 못한 그런 뭐 목사들도 많고 장로 집사들이 많습니다.

이 도덕을 헤치고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되는 신앙이 나오고 신앙을 헤치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그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그분이 어떠한 분인가 하는 것을 이렇게 아는 데 들어갑니다.

이랬는데 어제는 여게 시편 91편 14절로부터 요렇게 그만 요 본문대로 요렇게 해서 껍데기만 가르칠라고 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십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저가 나를 안즉” 그라고 난 다음에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 또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사람은 그 간구를 하나님이 듣지 안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뭐이냐? 지난 밤에 약간 말했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그 하나님의 신성과 신격을 우리가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성을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존자시며, 완전자시며, 영원 불변자시며, 단일성의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은 완전한 지식을 가졌고, 지혜를 가졌고, 완전한 하나님의 중심으로 모두 움직입니다. 또 사랑을 가졌고, 진실을 가졌고, 거룩을 가졌고, 의를 가졌고 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도 그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의, 인격이라 말하면 우리 사람에 대해서 그 격위를 인격이라고 말하고 또 신격이라 말하면 하나님의 그 격위에 대해서 신격이라고 말하는데 신격과 인격이 비슷합니다. 신격의 그 모형이, 신격을 닮은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신격을 가지셨고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격 닮은 그 인격을 가진 것이 우리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신격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람도 말이요, 사람을 서로 대할 때도 그 사람을 대하면 아주 바보를 대할 때와, 또 좀 아주 잘 치우치고 치우치는 그런 사람을 대할 때와, 또 그 사람이 말 같은 걸 조심하지 안해서 말 한 마디 해 놓으면 그 말이 굉장히 오전돼 나갈 그런 사람과, 또 그 사람은 무슨 감정의 사람이라 뭐 조그매 그 감정만 건드리고 일으키면 큰일날 그런 사람은 또 그대로 대합니다. 그 사람은 모든 면이 원만한 사람이라. 또 그런 사람 있습니다.

원만한 사람이면서도 그 사람은 그렇게 큰 실력이 없기 때문에 ‘뭐 원만해 봤자 저 원만하지 내게 무슨 상관 있느냐?’ 이렇지마는 그 사람이 그 권세가 있고 지혜가 있고 나와의 직접 그 관련이 돼 있으면 그 사람의 비위를 상하지 안하고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출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처음에 처녀들이 결혼했다고 하면은 결혼하면 자기 남편에게 대해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그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알아볼라고 애를 쓸 것입니다, 알아볼려고. ‘이 사람은 성질이 어떠하며, 마음은 어떠하고, 포부는 어떠하며, 사상은 어떠하며, 종교는 무엇이며, 또 그의 취미는 무엇이며, 그의 감정은 어떠한가, 그가 또 이미 기존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어떠하며 상식은 어떠한가?’ 이런 것을 여러모로 남편을 알아볼라고 애쓸 거 아니겠습니까? 알아봐야 그분을 바로 상대하지 뭐 남자니까 남자지 여자니까 여자지 그것만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것은 온전한 결혼은 안 됩니다.

결혼도 짐승 결혼 있습니다. 짐승 결혼은 그거는 그저 동류 결혼이오. 같이 있으니까 친하고 또 암컷 수컷이니까 또 이성적인 그런 면으로 거석하고, 그러니까 그거는 완전히 짐승 사귀는 것이고 사람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게 대해서 상대방의 그 모든 인격이 어떠한가 그것을 알아서, 쌍방이 인격이 같은 인격 돼 버리면 그거 못 나뉩니다. 인격이 같은 인격 되면은 그거는 벌써, 짐승 모양으로 육적으로 서로 부부가 되고 또 친구가 되고 그 이상이 없으면은 그거는 뭐 짐승같이 나뉘면 나뉘어져 버리고 없으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 사상까지 친하게 되면은 나중에 가서 그거는 나누어지지를 못합니다. 그 사상이 없어지고 사상이 갈라져야 나뉘어지지 그래 안 하면 나뉘어지지 못한다 그말이오.

내가 서울에 감리교 남산교회 집회 갔을 때에 그때에 그 박현숙이라고 하는 그분이 여자로서 장관입니다. 박현숙 장관인데 그분이 거기 장로입디다. 그래 그때 가서 인사를 하고 서로 좀 거석했는데 그분이 남편은 불구자입니다. 남편은 불구자고 아주 그뭐 경제적으로 무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하고, 그는 인물도 잘났어. 그때 우리보다 나이가 많고 그랬는데 그때가 육십 몇인가 뭐 칠십 몇인가 됐는데 아주 그 고운 여성이 하나 젊은 여성이 하나 인사를 하는데 장로라고 인사를 시키는데 그래서 그분의 나이를 물으니까 육십 몇인가 칠십 몇인가 됐어요. 됐는데 아주 미인입니다. 굉장히 미인이오. 미인인데 그 남편은 그런 사람하고 결혼했어.

‘왜 결혼했는가?’ 이래 물어보니까 그분이 독립 운동하는 애국자라. 독립 운동에 독립 운동하다가 그 몸이 상해서 불구자가 됐고 독립에 대한 그 사상이 극히 뜨거운 사람이오. 그 독립 사상이 같애 가지고 같이 결혼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사람들도 이래 사귀면 그렇지 않소? 사귀면, 그저 그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든지 내 주관만 가지고 사귀는 그런 사람은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그 사람을 자기가 사귀어도 아무 유익을 보지 못합니다.

이래서, 사람을 사귈 때에 ‘이 사람은 엉큼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꼭 단정은 안 짓지. 단정지으면 죄입니다.-엉큼한 사람 같다, 좀 엉큼한 기가 있겠다, 이 사람은 이중적이겠다, 이 사람은 외식이겠다, 이 사람은 좀 뭐 성깔이 급하겠다, 이는 감정이겠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평가적으로 움직이겠다, 이 사람은 장래 장래 길이길이 뒤를 생각하겠다.’ 이런 것을 이래 상각하기 때문에, 생각해서 교제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대해서 적당하게 다 태도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뭐 농담 좋아하고 이런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처음에 만날 때에는 부득이 그 사람 만날라 하니까 그 사람에 따라서 유우머도 하고 또 이렇게 해 가지고, 그러나 차차 차차 사귀는 가운데서 진실하고 거룩함을 자꾸 이래 가지고 사람을 가르쳐 나가는 것이라 그거요.

상대방의 인격을 생각할 때에 내가 할 말이 있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될까, 또 내가 태도를 어떻게 해야 될까?’ 자연히 그 쌍방이기 때문에, 상대방이야 어찌 됐든지 나만 되면 되지 그렇게 하면은 서로 교제가 안 됩니다. 이러니까 상대방을 따라서 내 마음도 말도 행동도 또 계획도 또 내 의사를 발표하는 것도 다 상대방에 맞춰서 이렇게 의사를 발표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이 화초를 보고 사귀는 것보다도 동물을 보고 사귀면은 동물은 좀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니까 움직임에 같이 이와같이 동해서 사귀니까 움직이기 때문에 이 식물에 대한 사귐보다는 동물의 사귐이 낫습니다. 동물의 사귐보다는 또 사람을 사귐이 나아. 사람이라는 거 이거 뭐 사귀는 맛을 봐 놓으면 굉장한 그 이상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뭐 이는 참 하나님 다음으로서는 사람이 제일 존귀하다고 여길 만치 사람의 존재라 하는 건 이상한 존재라 말이오.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상대방의 그 모든 인격을 내가 상대해 가지고 인격과 인격이 서로 교류되고 교제될 수 있는 이것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좋아하는 대로 우리가 따라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 상대방이 벌써 술을 좋아하면은 ‘이 사람은 술을 대접해야 될 터인데 나는 술 대접 못 하니 이거 참 뭘로 가지고 대접을 할까? 술 대신 뭘 대접을 할까? 이 사람은 취미가 있는 사람이니 나하고 취미가 정반대이니 어떻게 할까?’ 이 반대이니까 죄가 되지 아니하는 한은 자꾸 그 사람에게 서로 상호 서로 화합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 말이오. 그거 우리가 자꾸 전부 다 하지 않습니까, 그거 뭐? 잠깐 만나고 나뉘는 사람이든지 같이 사는 사람이라도 벌써 살면은 자꾸 인격이라 하는 것은 저 사람도 인격이 있으니까 그 인격을 무시하고 ‘까짓 거 그렇거나 말거나 그까짓 거 뭐.’ 이렇지 안하고 그 인격과 나와의 관계가 앞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은 그 사람에게 대한 인격성 또 속성 그런 것을 자꾸 내가 살펴서 연구하기 마련이고, 또 거게 맞추어서 내가 자꾸 이래 서로 대화도 하고 행동도 하고 ‘이 행동 하면 그분이 좋아하겠나 나빠하겠나?’ 이걸 그 상대해 가지고 이렇게 한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우리가 이 기도하는 데는 주님의 그 신격, 주님은 어떠한 분인가 하는 그 신격을 그를 내가 인정하고 연구하는 게 중요합니다. 연구하고 인정하면은 그분을 목석만치 인정하면은 내가 그분에게 대해서 이 교제하는 대화하는 것이 목석을 대해서 대화하는 것같이 될 것이고, 또 그분을 아주 좀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같이 대우하면은 그 사람에게 내가 사람만치 내가 주의하고 내가 조심해서 내가 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이 인간을 초월한 전지자요 전능자로 이렇게 참 믿으면은 전지 전능자기 때문에 그분을 상대할 때는 내가 전지 전능자로 상대하니까 나는 내대로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분에게 대해서 실언하지 안할라고 또 삐뚤어진 걸 하지 안할라고 자꾸 이렇게 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성자를 만나면 나도 거게 대해서 성자적인 그런 무슨 대화를 할라고 애를 쓰게 되고, 또 정치가를 만나면 정치적인 대화할라고 말을 쓰고, 또 무슨 아주 유흥적인 이런 창기같은 그런 사람이면 또 그런 사람으로, 나로서는 죄되지 안하는 한 그런 사람으로 또 이래 상대할라고 애를 쓰고 자연히 이 사람이라는 건 인격과 인격이 만나면 상대방의 인격과 자기 인격이 서로 조화가 맞도록 할라 하는 이것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있는데 뭐 하나님은 별 하나님이 아니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영원 자존하시고 전지자시고 전능자시고 완전자시고 그는 사랑에 완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 완전 무한이 다르지 우리에게 속성 여덟 가지는 하나님하고 같은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원형적 속성이요 우리는 모형적 속성이오.

네 가지는 하나님은 원형적 속성이요 우리에게는 그런 속성이 없는데 앞으로 회개해서 고쳐 가는데는 하나님의 원형 속성을 닯아갑니다. 완전성이 우리에게는 없지마는 이제 해 놓은 거 성화된 거는 완전성입니다.

뒤로 돌아보면서, 만들어 놓은 거는 완전성이고, 만들어 놓은 거는 멸망의 것이든지 그리 안 하면 완전한 것이든지, 하나님의 공통성 없는 비공통적인 네 가지 이 하나님의 속성과 나와 닮고, 현재와 앞에는 그런 것이 없고 자꾸 내가 하나님의 따라가고 닮아가니까 뒤로 회고적으로 뒤로 돌아보면은 이미 되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비슷하게 된다 그거요.

이래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만치 내가 기도하는 데에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기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꼭 같애요. 요 사람을 우리가 상대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상대할 때 꼭 같은 사람으로 상대합니까, 어데? 사람을 열 사람을 상대하면 열 사람이 다 같은 사람 아니라. 뭐 교인을 백 사람을 상대해도 백 사람을 상대하는 데도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러면 상대방을 상대할 때에 자기가 거게서 ‘이 사람은, 이 사람에게는 껍데기를 열 껍데기를 두고 사귀어야 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있고, 이 사람은 열 껍데기뿐 아니라 몇십 껍데기를 두고 지금 사귀어야 되는 사람 있고, 그러면 그 몇십 껍데기 있으니까 껍데기 껍데기하고 그 사람을 사귀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이 껍데기 없이 내게 있는 솔직하게 다 털어 놓고 이렇게 속에 아무것도 없어 탁 털어 놓고 사귀어야 되겠다.’ 하는 사람 있다 말이오.

그러면, 상대방이 다 털어 놓고 사귀어야 될 수 있는 그런 지금 인격자에게 내가 거게서 벌써 뭐 하나 가루고 말하면 상대방은 알고 있다 말이오. 벌써 ‘요거는 네가 요거 가루고 지금 말한다. 요거는 다 흉금을 열어 놓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 상대방이 나를 완전히 그 평가할 줄 아는 사람, 나를 완전히 평가할 줄 아는 그 상대방이라 하면은 그 상대방에게 대해서 내가 숨겨 가리지도 못하고, 그러면 거게서 또 내가 지혜를 써서 ‘요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수단과 그런 지혜를 쓴다 말이오. 지혜를 쓰면 어찌 되느냐? 상대방이 완전자라 하면은 ‘네가 요렇게 요래 조래 지혜를 쓰고 또 말을 빈적거려 만들고’ 이러면 천하게 보입니다. 멸시당해요.

저보다 인격이 참 훌륭한 그런 상대를 말할 때에는 그저 솔직한 게 제일입니다.

솔직한 그저, 바로 된 대로 그저 아무 거짓이 없이 솔직히 다 말할 때에는 그분이 상대해서 고쳐 주고 뭐 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사람도 다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까? 권사님들이 암만, 이 권사님들도 말이지요, 이 백 목사를 대할 때도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너와 나와는 그 사이에 껍데기가 한 껍데기 있다, 너와 나와는 두 껍데기가 있다, 너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애도 껍데기가 있다, 껍데기 하나도 없다 이거 다 안다 그말이오. 그게 인격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 사람은 한 껍데기 두고 말하니까 이 사람에 대해서는 한 껍데기 둔 그만치 상대해야 되지 그 이상 상대하면 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한다.’ 이래서 서로 인격과 인격이 교제하는 데에는 상대방의 인격에 대해 가지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그 인격에 모순되지 않는 교제를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거 아닙니까, 그 교제? 무슨 일이든지 건설적으로 일을 해 나갈라 하면 그렇다 말이오.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은 ‘네까짓 거야 이런 인격이나 저런 인격이나 너하고 나하고 사귈 것도 없다’ 하고 아예 절단내고 마구 끊고 상관없이 이래 지내는 거는 그렇지마는 앞으로 상관을 가지고 그 관계를 가지고 지낼라고 하는 데에는 상대방에 대한 인격을 자꾸 연구하고 충분히 연구해 가지고 그와 나와의 이 벌어지지 안하도록, 벌어지지 안할 수 있는 것을 연구하고 깨지지 안 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깨어지지 않게 벌어지지 않게 상하지 않게 그에게 다소라도 유익이 돼지고 서로 화친이 돼지도록 자꾸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인격 교제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인격 교제하는 거와 같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은 완전한 인격자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인 하나님을, 그분은 희로애락을 아시고, 지정의를 다 가지고 계시고, 또 우리의 말에 대해서, 그냥 ‘무슨 말’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말에 대해서는 그저 당신이 우리 하는 말에 대해서 그 동기, 처음에 이게 뭣 때문에 동기가 됐으며 목적이 무엇이며 이 방편이 무엇이며 우리 말에 대해서 하나도 남음이 없이, 우리는 벌로 말해도 우리 말에 대해서 확 다 파악을 다 하고 계십니다. 다 파악을 다하고 계시요.

이 사람도 그렇지 않소? 저는 벌로 말해도 ‘저거는 지금 벌로 말했다. 벌로 말하다가 그만, 말하다 보니 툭 튀어 나왔다. 저 말하고도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듣는 나는 그걸 알게 된다 말이오. 그보다 좀 인격이 높고 수양이 높으고 한 사람은 듣는다 말이오.

‘저거 벌로 튀어나왔다, 그거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런데 솔직하기는 하다, 조금 어리석다, 저 사람은 실수가 많겠다.’ 그걸 바로 알아야 그 사람에게 대해서 지도를 바로 하고 관계를 바로 가지고 이래 돼지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대해서 그의 신격을 내가 인정하는 것만치 그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소리로 말합니까 뭐 형체로 말합니까? 그분은 그런 걸 가지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목석같이 생각하면 그분이 내게 대해서 아무 대화가 없습니다.

그분이 대화 없습니까? 나에게 자꾸 말하고 또 말하는 데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부절히 우리에게 말하고 계시지마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쉬지 않고 우리에게 자꾸 이렇게 저렇게 자꾸 우리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같지마는 이제 거짓부리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너 이거 거짓되니 이거 고쳐라’ 이렇게 말하는 게 그분의 사랑이고, 또 아주 죄를 지으니까 ‘너 왜 이런 죄를 지었느냐?’ 책망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고, 또 그 낙망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분의 사랑이 위로를 하면서 ‘소망을 가지라’ 하는 게 그분의 사랑이고, 또 교만한 자에게는 ‘네가 이렇게 저렇고 이런 나쁜 일인데 네가 뭐 한다고 내게 뭐 잘났다고 네가 교만하느냐?’ 겸손하게 하는 게 그분의 사랑이라. 한 사랑이지마는 천태만상의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랑이 천태만상의 작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그 인격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나와 서로 마주 대하는 인격 존재, 인격 존재, 인격은 우리 사람에 대해 인격, 사람 인 인격이라 하는 것이고, 신격이라는 건 하나님 신 그 신격이라 말이오. 신격이나 인격이나 격은 꼭 같습니다. 격은 같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형적이고 우리는 모형적이라 말이오.

하나님은 원형적이요 우리는 모형적이니까 그분의 인격은 원바탕이고 우리는 그와 원바탕을 닮은 거라. 그분의 그 모든 그 신격은 생화라고 말하면은 우리는 생화를 보고 만든 조화라 그말이요, 조화. 그와같이 지금 차이 있는 것이지 그분을 닮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나 또 그냥 생활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나는 나 혼자 생활하는데 하나님이 소경이네, 보겠느냐?’ 이라지마는 나 생활하는 것을 다 살피고 있는 줄 아는 것이 그것이 성도입니다.

이래서 아가서에 보면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창살틈으로 나를 엿보고 있다” 그러면 자기는 혼자 이래도 주님은 어느 지금 모퉁이에서 지금 나를 보고 있는지, 그 창살틈에서, “창살틈에서 엿보고 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어.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했지만 뭐 요새 사람들은 결혼하면 막 서로 한테 이래 다 알지마는 옛날은 결혼해도 삼 년이 돼도 얼굴 잘 못 봅니다. 얼굴 잘 못 보니까 결혼한 사람이 자기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기 위해서 방에서 가만히 문을 닫고 바늘로 문구멍을 딱, 바늘로 딱 뚫으니까 그뭐 밖에서 보입니까? 요래도 딱 눈동자를 딱 대고 보면 밖에 보인다 말이오. 자기 신랑이 마당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니까 아, 키는 얼마만치 크다, 사람은 어떻게 생겼다 환하게 다 본다 말이오.

환하게 다 보는 것처럼 이제 그와같이 나는 모르지만 주님이 어느 틈에선가 지금 내 언행심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그분이 보고 계시니 그분의 그 신격을 내가 상대해, 그 신격을 상대해서 사는, 그분이 무소부재라, 계시지 안하는 곳이 없다. 그분이 여게도 계신다. 그분이 여게도 계시고 저게도 계신다. 그분은 나를 내게 관심을 가지고 너를 보고 계신다. 내가 말한 것도 그분이 들었다. 내 하는 행동도 그분이 들었다.

이제 그분을 인격 그 신격의 존재인 그분인 것을 자기가 자꾸 알고 그분을 내가 눈이 어두워서 몰랐지마는 자꾸 보니까 보여진다 말이오. 어린아이가 처음에 나 가지고는 어머니인지 뭐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이랬지마는 차차 이거 한 달 두 달 돼지니까 어머니를 안다 말이오.

어머니 처음에 할 때에는 어머니가 그만 검은 옷을 입고 오면은, 검은 옷을 입고 오면은 웁니다. 어머니 아니라고 우요. 울다가 나중에 보니까 오랫동안 또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검은 옷 입고 오는 이가 내게 필요하고 좋은 걸 주는구나’ 이라다가서 나중에 그 어머니가 흰 옷을 입고 오면 그만 또 안 오고 자꾸 울다가 요래 그만, 어머니가 오면은 좋아하는데 어머니 아니라도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오면 막 웃어 쌓아며 이래 좋아합니다. 그거 지금 눈이 쪼그매 떨어져 알아진다 말이오. 이런 거 모양으로 차차 이라다가 나중에 얼굴을 알고, 또 사람의 얼굴을 알지만 얼굴 가운데서도 아, 이거 우리 어머니다, 어머니다, 아니다 얼굴을 알게 됩니다.

자꾸 이와같이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인격 존재를 내가 상대해 가지고 그분을 점점 아는 가운데서 이래 자라가야 되지 그분을 신격 존재로서 내가 상대하지 안하고 이래 사는 그 신앙 암만 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살지 안하는통에 안 되고 기도도 또 응답이 안 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래서, 이거 또 뭐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하는데, 그분은 인격 존재니까 인격 존재니 그분의 그 인격을 자꾸 내가 그분의 그 인격, 그분의 신격이라 말은, 이거 신격이라 말이나 인격이라 말이나 같은 말인데 이걸 모르기 때문에 자꾸 말합니다, 이거. 우리 인격과 같이 그분은 완전하신 신격을 가지신 분이라 그말이오.

가지신 분이니까 그분이 성미가 이런가, 그러면 이래 보니까 이래 보니까 성미를 알라고, 그분의 그 신격의 모든 신격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라고 하니까 그분이 선포해 놓으신 이 신구약 성경을 알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분을 이 신격으로 상대하게 되면은, 제일 처음에 우리가 기도할라 하면은 그분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주님’ 이렇게 부르고 주님 앞에 기도할라고 벌써 우리가 나서서 말이지, 기도할라고 앉든지 무릎을 꿇든지 이라고 나면은 그분은 벌써 내가 말하기 전에 당신이 벌써 응답을 해 주십니다.

응답해요.

응답해 주시는데 그분이 ‘이런 분이시다’ 하는 그분의 그 인격을 이렇게 묵상을 하고 눈을 감고 ‘그분이 이런 분이다’ 이랄라 하니까 먼저 뭐이 떠오릅니까?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러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누구한테 물어야 알겠소? 그분이 어떤 분인지 누구한테 물어봐야 알겠습니까? 물어야 알 데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성경이 뭐라고 말했느냐?’ 그 성경이 말한 대로 주님이 `네가 배운 것을 네가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읽었느냐?’ 하는 그것이 내게 떠오른다 말이오. 주님을 상대할라 하니까 ‘성경에 뭐라고 했더라? 설교를 뭐라고 하시더라? 또 가르침을 내가 어떻게 받았다. 어떻게 들었다.’ 자연히 이것이 일호적으로 내게 생각이 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는 신격 존재요 전지 전능자요 그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이런데 요새 지금 대통령이라도 한번 오면은 대통령을 만나면 자기가 이 보통 서민 만나는 거와 다르지 않겠습니까? 또 이제 일반 주일학생을 만나는 것과 또 목사를 만나면 또 좀 생각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런데 주님에게 대해서 생각을 어떤 사람은 ‘주님은 하나 그런 말만 있는 것이지 하나 책에다 기록, 성경에 기록한 그저 서적적 인물이고 또 하나 논리의 인물이지 실상은 아니라.’ 하나님을 실상은 아니라 이래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그 실상의 그 신격 존재라 하는 것을 자꾸 생각해서 그분을, 그분이 완전 신격 존재인데 내 인격과 서로 이 교제할라 하다 보니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첫째로 문제라 말이요.

그러니까 내게, ‘주님은 어떤 분이지? 어떤 분으로 내가 지금 상대해야 그분이 노하지 안할 건가?’ 그분이 예를 들면은 정반대 되는 거석하면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분의 정반대 되는 내 의사나 내 사람이 되면은 그분이 좋아하겠습니까? 정반대 되지 않소? 처음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어떤 남편인지 부인이 어떤 부인인지 모르고 정반대로 해 보십시오. 그러면 첫날 밤에 서로 나뉘어 버리고 맙니다. 나뉘어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거게다가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데 대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거게 대해서 알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은 신격 존재로 알고 내가 그분과 상대할라고 하면은 제일 일호에 그분이 내게 대해서 응답해 주는 게 뭐이냐? ‘네가 어떻게 배웠느냐? 어떻게 들었느냐? 성경에 뭐라 했느냐?’ 이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주님은 어떤 주님이라고 했지?’ 자꾸 이걸 찾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찾게 돼요. 인제 그 응답을 바로 받았어.

그라고 나면은 둘째로는 무슨 응답을 해 주시느냐? ‘그러면 너는 지금 어떻게 했지?’ 하는 것을 말씀하게 됩니다. 요엘서 2장에 보면 “네가 옷을 찢지 말고 그 마음을 찢어서 네가 회개하라. 네가 모든 뭐 신혼 부부들도 다 나와서 회개하라. 다 금식하고 회개하라.” 이래서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노하고 계시는 게 뭐인가? 하나님의 노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노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인격 존재로 상대할라 하니까 이분이 싫어하는 게 뭐인가? 내게 싫어하는 게 없는가? 싫어하는 게 없는가? 그렇지 안해요? 여러분들이 이거 뭐, 보니까 자기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해 돌아올 때가 되니까 어떤 부인도 보니까 누워서 이와같이 지금 이래 있다가도 자기 남편 퇴근해서 돌아올 때가 되니까 뭐 낯 씻고 세수하고 또 화장 바르고 또 옷도 갈아 입고 이래 가지고 남편에게 잘 보일라고 그와같이 애쓰는 것이 이거 인격 존재의 필연성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이 뭐 내게 노여워하는 게 뭐이지? 내게 섭섭한 게 뭐이지? 내가 주님을 아주 섭섭하게 노엽게 한 게 뭐인가?’ 이걸 자연히 찾게 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둘째로는 뭐이냐 하면 ‘주님이 뭘 기뻐하시지?’ 요게 연지를 찍어 기뻐할 상바르면 연지를 찍을 것이고, 또 구찌베니를 발라서 기뻐할 상바르면 구찌베니를 바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 남편은 요게 까만 사마귀 있는 걸 요걸 좋아한다’ 요라면 또 까만 사마귀 그걸 또 새까맣게 칠을 해 새카맣게 만들 것이고 자꾸 요래 가지고 지금 상대방이 좋아하는 게 뭐인가 그걸 또 연구하게 되고, 노여워한 걸 알게 되고, 노여워한 걸 ‘하나님께서 이런 걸 노여워하신다’ 그게 뭐이냐? 주님이 내게 응답하시는 거라. 주님이 내게 말씀한 거라, 말씀한 거.

‘너 왜 낯도 씻지 안하고 그까짓 거 눈썹이 눈꼽이 기비비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금 해? 옷이 뭐이야? 그까짓 거 막 똥칠하고 이래 지저분하이 똑 행주같은 걸 입고.’ 그래 남편이 노할 거라 말이오.

또 ‘이 남편이 어떻게 하면 좋아하지?’ 옷을 갈아 입고 지금 ‘우리 남편은 푸른 옷을 좋아한다, 붉은 옷을 좋아한다.’ 이러기 때문에 지혜 있는 부인은 자기 마음대로 옷을 사서 입지 안하고 그 옷을 가져와서 선을 보인다 말이오. ‘요 옷이 어때요? 요 옷과 요 옷이 어때요?’ ‘요 옷이 어떻다' 하면 그 옷 산다 그말이오.

옷을 살 때도 옷을 주인에게 말하고, 그리 안 하면 원단 쪼갱이를 가져오든지 가져와 가지고 그 남편에게 ‘이 옷이 있는데 지금 같이 가 좀 사요’ 이런데 같이 가 살 시간이 없으면 원단 쪼갱이 가져와도 ‘이게 좋습니까 이게 좋습니까?’ 그 남편이 좋아하는 그걸 옷을 사고 말이지.

또, 남편이 뭘 좋아하는가? 좋아하는 ‘남편은 뭘 말을 해야 되는가? 음식을 줘야 좋아하는가, 또 믿는 사람들 믿음 좋은 걸 얘기하면 좋아하는가, 성자 얘기를 해야 좋아하는가, 아주 망하는 자 못쓸 자 그런 얘기를 좋아하는가?’ 자꾸 그걸 상대방에 대해서 그 싫어하는 것을 연구하게 되고, 또 좋아하는 거 연구하게 되는 그게 뭐이냐 하면 응답이라 말이오. 그게 상대방을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내게 말없이 그때 말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라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나중에 가서 자꾸 이래 교제하는 가운데에서 상대방이 뭘 원한다 하는 걸 그걸 내가 ‘이거 하겠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

당신이 내게 가르치는 첫째는 말씀을 나에게 깨닫게 하는 그것이 주님의 응답이요, 둘째로는 말씀을 가지고 당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걸 점점 알 때에, 알구로 하는 것이 당신이 나에게 대해서 요구하시는 거라 말이오. 알면 좋아한다 말이오.

남편이 이래 뛰하이 있는 것은 아내하고 불통하니까 그래. 불통인데 이거는 예를 들면 아내가 그 깔비나 한짐 해 짊어지고 와서 툭 부들트리면 ‘아이고 오늘 수고 했습니다’ 이라지마는 도무지 이거 남편이 정치가인데 정치에 대해는 생각이 없으니까 이거 안 맞는다 그거요. 그 날은 오니까 ‘요새 이 나라에 뭐 데모 사건이 있고 이거 뭣이 사건이 있는데 복잡하겠는데 얼마나 머리를 앓습니까?’ 이라니까 좋아한다 말이오.

내가 언뜻 말 들으니까 저 ○장로님이 떡-내가 자꾸 감옥에 갔다 온 걸 자랑해요.-그라고 나서 딴 장로 됐어요. 떡 감옥에 나오면서 자기 부인이 뭐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삽시다’ 이라니까 웃으면서 `여보 당신이 하늘의 소망을 가지다니, 정말로 하늘의 소망을 가지요?’ 뭐 음식도 돈도 가져오는 그것보다도 그 부인이 하늘의 소망을 가지니까 좋아서 ‘여보 당신이 하늘의 소망을 가지요?’ 이러며 기뻐하더라고. 그것을 권사가 나한테 소개해요. 그 말 했어요,○장로님? 그말 했어. 그거 그 좋아하는 게 따로 있다 그말이오.

이래서, 제일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서 당신이 어떤 분인가 이걸 알도록, 그 다음에는 말씀을 생각하니까 ‘네가 내게 어떻게 했노?’ 이거 알아서 당신을 노엽게 한 이것을 생각하는 것을 우리에게 응답해요. 그걸 생각해라, 그걸 좀 깨달으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했다고 그거는 생각도 안 하고 지금 이라느냐?’ 섭섭한 게 있는데 섭섭한 그거는 해결하지 안하고 ‘여보시요, 이거 뭐 주십시오.

어떠시요. 이거 잡수시요.’ 게워나오고 토해나오고 안 된다 말이오. 그걸 해결해야 된다 말이오. ‘내가 이거 지금 잘못한 거 이거 용서하십시오, 그때 사실이 이렇고 이렇고 이리 돼 가지고 그리 됐는데 이거 잘못했다.’ 솔직하게 그럴 때는 그게 다 풀린다 말이오. ‘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풀린도 말이오. 그 잘못된 거.

또, 자기가 어떻게 요구하는 거, 주님이 어떻게 요구하는가, 뭘 요구하는가? 이렇게 또 요구하는 거.

그러면, 말씀으로서 당신을 알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걸 알고 말씀으로 당신이 나에게 요구하고 원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그러면 몇 가지 알았습니까? 성경으로서 몇 가지 알았어? 성경, 다음에는 내가 잘못한 거, 또 하나 주님이 내게 원하시고 주님이 기쁘시게 하는 거 세 가지 알았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뭐라 했습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것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 그것을 ‘내가 요렇게 하겠습니다’ 요라면 그때 주님의 응답은 뭐이 온다 했습니까? 현실 줍니다, 현실 줘요.

현실 주면은 그 현실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 영화롭게 하려는 거 그 일을 하다 보니까 돈벌이는 언제 하고? 그 일 하다가 보니까, 그 일 하다가 보니까, 뭐 했어? 신명기 28장에 보면은 제가 축복 받아 ‘나 축복 주십시오, 축복 주십시오.’ 이 말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단지 주님의 말씀하시는 거 그대로 지켜 행하니까 주님이 네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자기 하는 일에 축복하시니까 그 일이 잘 됐지 그 일을 뭐 수단 있게 해서 그렇습니까 연구해 그렇습니까? 단지 하나님 섬기는,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말씀 지킬라고 애를 쓰고 그말을 한번 지킬라고 애를 쓰니까 당신이 모든 하는 일에 축복을 해 주시니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났다 말이오. 축복 달라 소리 하지도 안했어.

또 그 다음에도 3절에 보면은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치우치지 안하고 그래 지키니까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뭐 성읍에 복 달라 했소? 또 모든 자손이 복 받고, 육체가 복 받고, 모든 짐승의 소생이 복 받고, 소유가 복 받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축복 받고 자꾸 복 받아 가지고 이래 되는 것이지.

이러니까 또 그러고, 보십시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갈 때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뭐 달라고 간구하지 안했소. 자꾸 따라가기만 따라가. ‘여게 있거라, 그만.’ `따라 갈랍니다. 따라 갈랍니다.' 따라가니까 이제 때가 되니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있다가 말하기를 ‘나를 하나님께서 올려가기 전에 네 소원이 뭐꼬? 무슨 소원이 있어 나한테 따라오느냐? 네 소원이 뭐꼬?’ 이래 물어. 소원이 뭐꼬 물을 때에 영감을 소원하니까 ‘그러면 네가 이런 이런 방편으로 나를 올리워 갈 때까지 보지 안하면은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를 바라봐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소원에 줬다 말이오.

또 베드로도 보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니까 그 말씀만 이래 듣고 있는데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저 너거 고기 잡아라.’ 이렇게 말씀했어.

이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인격으로 상대하면 주님이 첫째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뭐입니까? 주님이 내가 인격으로 지금 상대하는, 기도는 주님하고 나하고 상대하는 것인데 상대해 첫째로 그분이 나에게, 내가 그분을 상대하니까 그분이 내게 응답해 주는 것이 뭐입니까? 첫째 응답이 뭐입니까? 첫째 응답이 뭐이요? 성경. ‘네가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읽었느냐?’ 이것을 당신이 말하고, 그럴 때에 내가 말하기를 ‘이렇게 이렇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읽었습니다 이래 말하면 읽었습니다 하는데 벌써 내게 깨달아진다. ‘읽었습니다.

내가 이런 걸 잘못했습니다, 이런 걸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됐는데 이렇게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걸 쭉 말하고 나니까 당신이 또 답하기를 ‘그러면 네 할 일이 뭐이지?’ 또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할 일이 이렇습니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했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런 일을 못 했습니다. 할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라고 나면 ‘그라고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이제 그런 것은 안 하고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자꾸 대화라 말이오. 주님하고 나하고 주고 받는 자꾸 대화라 말이오. 그것이 응답이라, 대화라.

대화하면은, 그라고 난 다음에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이 지금 말로는 ‘잘못됐습니다, 내가 이런 걸 안 했습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자꾸 이렇게 서로 말로 가지고 자꾸 이리 대화를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니까 당신이 나에게 응답할 때에는 뭐이냐 하면은 현실 주신다 말이오.

현실, 그때 이래 자꾸 주님 생각하고 있는데 자기가 그 현실이 닥칠 때에,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산에서만 교제하는 게 아니고 그 교제 하나 주님과 기도하는 것이 길에서고 뭐이고 상구 당신하고 이렇게 그 인격 결합의 교제라 말이오.

이러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그 현실을 줘. 현실 줄 때에 그 현실을 줘서 그때 그대로 실행을 하면, 실행을 하면은, 실행하면, 말씀 듣는데 그 말씀 들어서 실행하는데 하나님께서 엉뚱이로 복을 줍니다.

또 자꾸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요렇게 하겠습니다’ 하고서 고거 행하는데 하다가 `고기 잡아라’ 또 이래 자꾸 엘리사가 엘리야만 따라가고 있는데 따라가니까 갑자기 하는 말이 ‘엘리사야 너 내게 소원이 뭐이냐? 뭘 소원할 거야?’ 묻는다 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주님으로 노력해서 주님이, 내가 주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는 걸 당신이 `이렇게 해라' 할 때 `녜,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때에 현실 주시고 현실 줘서 그대로 행할 때에 그 행하는 가운데에서 ‘너 이거 해라’ 가르쳐 줍니다. `너 고기 잡아라' 또 `너 소원이 뭐이냐?' 소원이 뭐이냐 할 때에, 내게 벌써 소원이 뭐이냐 할 때에 그때 벌써 교제가 돼 가지고 있으면 ‘소원이 뭐이냐?’ 할 때에 `무엇을 소원해라' 하는 그 소원을 영감으로 내게 줘 놓고 ‘소원이 뭐이냐?’ 한다 말이오. 그럴 때 `뭐 소원입니다’ 다 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오늘 아침에는 어짜든지 그분을 서로 인격대 인격으로 이렇게 인격 상대를 하지 안하는 신앙은 이거는 죽은 신앙이지 이거는 부처와 같이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거는 우상 종교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뭐라고 해? 기도에 대해서 조심할 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기도에 대해 조심할 거 감상 기도도 소용 없는 것입니다. 감상 기도도 그건 유익은 있어요. 성화는 좀 돼요. 그거 기도는 아니라. 기도와 성화되는 거는 차이가 얼마나 많으냐? 기도 들으면, 기도를 들어 주시면 얼마나 큰 성공입니까? 감상 기도, 또 이제 들어라 봐라 하는 설교 기도, 또 자꾸 주문을 외우는 주문 기도, 이거 다 소용이 없어. 장 버릇이 돼서 줄줄 줄줄 장 버릇하는 그거는 주문 기도라. 꼭 기도든지 신앙 생활이든지 주님의 그 신격을 상대하지 안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분의 그 신격을 상대해서, 그러니까 길 가다가도 그분과 문답이 있어, 그분이 있는데 ‘이거 잘못 됐습니다.

이거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이거 이럴 건데 잘못해서 이거 실수를 했습니다.’ 또 그분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람에게 말 안 하고 ‘주님 내가 이거 잘못됐습니다.’ 길을 가든지 일을 가든지 앉아서 성경을 보든지 꼭 그분을 신격 존재의, 그분의 속성을 생각하면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열두 가지 속성 우리가 배우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그분을 이런 신격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고 그대로 인정하고 행하는 게 뭐입니까? 그분을 그런 신격으로 내가 상대해서 행동하는 것이 그것이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전지자로 알면서 내가 행하는 것은 그분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자로 이래 상대하는 그것은 그거는 행하는 게 아니라 말이오. 그분의 그 신격을 알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내가, 알고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내가 그분을 이 목석같이 상대할 수가 없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것같이 상대할 수 없어.

그분의 그 신격을 찾아서 신격과 나의 인격이 교제하는 이 일이 있고 난 후라야 기도의 응답도 있는 것이고, 생활에 교정도 있는 것이고, 또 그에게 어떤 계획에 대해서 동행도 있는 것이고, 어떤 모든 환경 어떤 게 한다 해도 담력도 나오는 것이고, 소망도 나오는 것이 나오는 것이지 그분의 그 인격 상대가 되지 안하면은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거게 대해서 혹 집에 가서 아 볼라거들랑 시편 91편 14절로 15절을 아 보면 잘 알 수 있고, 또 이사야 1장 19절로 20절에 보면은 순종하면 복받고 거역하면 망한다 이렇게 말해 놨습니다. 요엘서 2장 12절로 17절에 읽어 보면은 그 포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15절, 21절, 24절을 읽어 보면은 주님은 어떠한 분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녜.

또 신명기 28장 1절로 6절, 열왕기하 2장 9절 10절, 누가복음 5장 4절로 6절에 보면은 당신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어떻게 인도하는 것을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인격 존재로, 살아 계시는 인격 존재로 대우하는 것을 당신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당신을 이 목석같이 부처같이 이렇게 무시하는 그것을 제일 노여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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