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주의 할 점


선지자선교회 1985년 12월 5일 새벽(목) 

 

본문 : 누가복음 17장 5절∼18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 "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나는 자꾸 저쪽에 본 것은 OOO씨가 오늘 아침에 안 보이는 거 같아서 자꾸  보니까 엎드려 가지고 있어서, 그래 오기는 왔습니다. 혹 어찌 됐나 해서. 저  OOO씨가 그렇게 뭐라고 쌓고 해도 그 속에 성령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거게 대해서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그 옆에 사람이 잘 안 앉습니다.

그래 그만 거석하면 자꾸 이 거석할 때 벌 소리들 하는 거 같이 이래 해  쌓하니까 수치스러워서. 저 먼저 누가 한 번 옆에 앉았는데 뭐 자꾸 욕하듯 이래  쌓고 하니까 남이 부끄러워서 그만 뭐 다시 아마 그 옆에 인제 안 앉을 겁니다.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믿음이 있고 역사합니다. 아주 그 새 생활이  굉장히 깨끗합니다. 또 그 뭐 하는 일이 철두철미합니다. 조절을 못해서, 영감을  받아도 조절을 못해 가지고서 그렇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지혜가 좀 있으면 뭐  기도할 때 나 그럴 때에는 소리 질러서 또록또록 이렇게 기도하는 그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인제 여기 여러 사람이 한자리 있으면서 그래 기도하는 것은 남에게  방해되는 기도가 되기 쉽고 또 자기도 해를 받기 쉽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무  그 사람이 기도하는 어떤 그 사건이든지 그 사건을 똑똑하게 그렇게 하나 하나  자꾸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다 장성하면 그 사람이야 똑똑히 말을 하든지 고함을  지르든지 그 사람 하는 일은 그 사람 하는 일 이고 나 하는 일은 나만  하나님에게 대해서 기도할 것만 기도하면 되는데 자꾸 그만 속에 이 부패성이  들어서 남이 말하는 그걸 듣고 싶다 말이오. 뭐이든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소리는 무슨 소리든지 그 소리가 듣고 싶어.

 그래서,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그러면, 들으면 다 차서 이제 들을 수가 없이,  차는 거 같으면은 이제 고만 더 듣고 싶지도 안하고 들을 수가 없을 건데  암만들어도 자꾸 듣고 싶다 그말이오. 테레비 보는 그런 것 도 자꾸 소리를  들으면 듣고 싶고 눈은 보아도 다하지 않는다고 눈은 보아도 뭐 또 보고 싶고  이만 하면 다 봤다 이렇지마는 그 모양으로 그런 걸 딱 제재를 해서 들을 것은  듣고 안 들을 거는 안 듣고 이렇게 돼, 훈련이 돼 가지고 있으면 옆에 사람이  아무리 그래 기도한다 할지라도 자기는 자기 할 일만 하지 그 말이 귀에 안  들어오지마는 무슨 소리가 나면은 듣고 싶은 고런 못된 습성이 있다 말이오. 우리  속에는 아직까지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말하는 게 자꾸 그게 암만 안들을라고 해도 막 안들을라고 어떤  사람 보면 뭐 이 야단을 지겨도 자꾸 그거 또 겉으머리는 안 들을라 하고 또  이성 판단으로는 안 들을라고 하는데 자꾸 그 듣고 싶은 대로 귀가 기울어집니다.

자꾸 듣고 싶은 그거 뭐이 그랍니까? 고것이 악습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자꾸  남의 말 듣던 고 악습이 들어서 이제 그걸 옆에서 무슨 말을 한다 할지라도 내게  상관 없는 말. 참 주님이 들으라 하면 듣고 듣지 말라면 안 듣는 고게 딱 연습이  돼 가지고 있고 하면은 그 듣는 악습 그놈을 죽여서 없애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뭐 옆에 그런 사람이 기도 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기 전에는  다 그런 침해를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장성한 신앙으로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럿 있는데 기도를 또록또록하니 자꾸 그래 하면은 다른 사람  기도 하는 것을 그만 막아 버리고 자기 기도하는 거게다가 이렇게 모두 다 집합  되도록 그 모든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집합되도록 하기 때문에 남의 기도에  방해되니까 안됐다 그것이고.

 또 다른 사람이 내 기도하는 데에 하나 모여들고 둘 모여들고, 눈을 감았으니까  그 뭐 보여져야 안하지만 그대로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본다 그 거야. 한  사람이 모여들어 두 사람이 모여들어 하나가 들어, 둘이 들어, 셋이 들어, 열이  들어 자꾸 이라면은, 들으니까, 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지  안하고 사람들 향해서 '들어나 봐라.' 이래 자꾸 이 기도 하면서 그만 기도가  아니고 하나의 설교가 돼 버리고 만다 말이오. 기도하고 설교와는 질이 다르기  때문에, 설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전달하는 것이 설교고  기도는 내 속에 영감이 나를 감동시켜서 영감이 시키는 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서 서로 의논하고 또 부르짖고 뭣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또 뭐 필요 있으면  또 간구하고 또 이런 이런 사정이 있으니까 어찌 됩니까? 이렇게 의논도 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데 고 만 그게 변해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변해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어 나 봐라' 하는 그런 또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옆에 대중이 있는 데는 큰 소리로 또록또록해 가지고 하는 그것이  남에게도 해 보이 기 쉽고 자기도 해 보기 쉽습니다. 아, 다른 사람이 듣든지  말든지 자기는 기도해 버리면 고만 그 손해 안 보는데 그라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이라 다 보면 '다른 사람이 듣고 있다.' 들으니까 사람들, 인제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들어라' 하는 그 설교가 돼 버리고 만다 말이오. 그러면  기도라 하는 거는 아주 그만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그러고 또 주의 하나 해 것은 이래 소리를 내서 하는 기도는 자기가 입으로  기도하고 또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고 어째 그만, 입으로 나와 가지고 귀로  들어오고 입으로 나와 가지고 귀로 들어오고 자꾸 이래 가지고 자꾸 자기 혼자  무슨 이래 시를 읊는다든지 자기 혼자 이렇게 뭣을 노래를 부른다든지 이렇게 할  때에 자기가 노래 부르고 자기가 또 자기 노래에 감상을 하고, 감상을 하고 이거  모양으로 고만 그렇게 되기 쉽다 말이오. 기도는 내 입에서 나와, 말로 하든지 안  하든지 내게서 나와 가지고 주님에게 가고 그러면 또 주님이 거게서 받아 가지고  또 나한테 대화로 또 이렇게 말하면 '이렇다' 하면 '아, 그렇습니까?' 또 '예,  그거는 그런데 또 이거는 이렇고 이런 조건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서로 자꾸  주고 받고 하나님하고 이렇게 얘기를 해서, 하나님은 대화의 기도를 제일  기뻐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이 따지는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너와 나와 변론하자 하는 얼마든지 하나님과 변론해 보자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이렇고 이러니까 이래야 안 됩니까?' 이랄 때에  하나님께서 '아, 그래 네 말이 옳다.' 부러 하나님께서 그거 그런 걸 안 그렇다고  이리 슬슬슬 둘러 대면 '아, 요거 요렇기 때문에 요렇지 않습니까 요렇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요래 요래 말씀하셨기 때문에 요런  말씀에 근거해 보면 요렇지 않습니까?' 자꾸 요래 말하면 나중에 가서는 주님이  만족하셔서 '그래, 그렇다' 이렇게 그 변론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서로  변론하는 거. 서로 자꾸 주고 받으면서 이 옳고 그르고 이래 변론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에게 서로 인격과 신격이 둘이 대화해 가지고서  또 모든 것을 의논하고 사정을 하고 간구를 하고 이렇게 해서 꼭 대화하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저런 뭐 산으로나 저런 데 기도하러 가는 그런 것은 처음에는 그  기도가 잘 안되니까, 혹 산에 가서 고요히 기도하는 때에는 자기가 거게서는 그저  고함을 질러 기도 하는 거 좋습니다. 아무도 없는 데는 가가지고서 고함을 질러서  이래 기도를 한참 하다 보면은 이제 기도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서로 대화하는  그 일이 시작이 됩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고함 질러 기도하다가 또 조용히  기도하다가 뭐, 주님 앞에 말할 때도 아 이들도 그렇지 안해요? 그 보통 이래  거석하다가 아버지 귀에 소근소근 얘기할 때도 있고 아버지가 옆에 좀  먼상바르면 그만 고함을 지르지 않습니까? 아이들 그만 아버지가 어데로 갔는지  모른다 그말이오. 어머니가 어데로 갔는지 모르면 '엄마?' 고함 지르지 않습니까?  이거 모양으로 그렇게 될 때도 있고, 보면 꼭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살 아 계시는 주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주고 받고 대화 기도해야 되지 똑  이 불교 사람들이 똑 이 저 돌무더기 속에다 나무로 깎아 놓은 장승 앞에 가  가지고서 이리 저 혼자대고 또 바위돌 앞에 가 가지고서 자꾸 손 비비며 말하는  거와 같은 그런 격의 기도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녜.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를 안하십니다.

 그러기에 고함 지르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 저 고요한 데 가서 기도하는 거 좋고  또 자기 마음이 이 주위 환경에 자꾸, 주위 환경이 산만하니까 이리 기울여지고  저리 빠지고 자꾸 이 마음이 흩어지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흩어지지 않는데  갈라고 그렇게 한적한 곳을 찾는 것입니다. 자꾸 이 사람 사람이 옆에 없어도 이  사람 생각하고 저 사람 생각하고 사건 이래 다 생각해져서 자꾸 내 마음이  헝크러진다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는 한적한 곳을 많이 찾았습니다. 한적한  곳은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아무 뭐 말하는 것도 없고 와서 침노하는 것도 없고  내가 또 생각할 것도 없고, 그런 곳을 찾았는데 사람의 소리가 여기 많이 들린다  이래도, 사람 소리가 들려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떠드는데 대해서는  그 침해가 적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들이니 그런 사람이 있는 데는 아무래도  거기 상관없을 수가 없고 또 말하는 데에 귀넘어 들을 수가 없고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고 자꾸 이라니까 자꾸 마음이 그리 흩어지니까 그래 된다 그거요. 그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그런 것을 자꾸 우리가 시간을 많이 가지도록 하고 또  고함 질러 기도 할 때는 고함 질러 기도해야 됩니다. 이래서 우리 OOO집사님  또 OOO집사님도 고함 질러서 그래 기도 하는데 그래 기도하는 분들 그  잘합니다.

 누가 또 언제 말하기를, 아, 기도하는데 뭐 그 이웃에서 이렇게 말하고 어짜고  하는데 인제 그것도, 말하는 그런 것도 조금 삼가야 되기는 되지마는 내게 누가  나한테 그런 말하기 때문에 대 퇴박을 줬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지금,'  저거는 지금 죄만 짓고 있는데 자꾸 '이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데 자기 속에 간절한 마음이 나와서 고함 질러 하는  기도를 뭣이 막아 막기를? 뭐 왜 그 막는 편으로, 대적되는 편으로 그래 말하고  있느냐? 그거 그라면 누구 대적이냐?' 그래 가지고 내가 코빵을 준 일이  있습니다. 내가 누굴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한테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래서  뭐 기도를 하십시오. 하되 그런 분은 함부레 자기 위치를 잡기를 자, 요 문 앞에  가서 대고 자꾸 고함을 질러 쌓아도 고것도 그럴거고 또 조 문 옆에 조리 가  가지고 해도 그래도 그럴 것이고 그러면 어데가 제일 나을꼬 해서 고함 질러도  괜찮고 좀 중앙에 고런 위치를 잡아 가지고 고게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여반으로 말하면 뭐 저 쪽에 가 가지고 가서 기도하면은 고함 질러도 여기 잘  들리지도 안 합니다. 멀어 놔서. 그렇지 안해요? 그러면 그 만침만 거리가 멀어도  또 괜찮다 그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영은 안팎에 눈이 있다. 영은 안팍에 눈이 있다 그말은 보이는  면이나 보이지 않는 면이나 모든 면을 골고루 골고루 빠진 면이 없이 골고루  골고루 심사해 가지고 거게 모두다 대응을 해서 이래 해야 되지 하나 알고 둘  모르면 안됩니다 그렇지 안해요? 사람의 그 정신이 정상적인 정신은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정신이냐 하면은 이거 고만 생각하면 이것만 알고 저걸 모릅니다.

그러면, 그거 신경 쇠약이라 신경이 약해서 이것 생각하면 저것 생각할 줄을  모르고 그래 사람들이 이래, (뭐 넘어졌나요? 어? 허허 졸다가 넘어졌어, 허허허  그 그럴 수 있어. 그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에 누가 그랬노 어? 어? 유두고  아니가? 어? 어? 그래 넘어졌지요. 넘어져도 다치지는 안했어. 죽었다  살아났어요.)  그래 인제, 저게도 하고 이래 먼데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장소를 잡아 가지고  어짜든지 기도할 때에는 아무데 제재받지 말고 그렇게 기도를 해야 되니까 그런  장소를 택하는 게 쫓아요. 그래 가지고 자꾸 연습을 해서 주님하고 나하고 둘이  교제할 때는 옆에 사람이 여러 천 명 만 명이 떠들어 쌓아도 그게 나하고  주님하고 교제 하니까 그런 게 다 그만, 그걸 듣고 싶어 또 '저 사람이 무슨  소리하나, 뉘 소리하나? 또 내게 무슨 소리하지 안하나? 또 무슨, 장 하는  소리하지 안하나?' 거게 전연히 소망을, 완전히 소망이 끊어져 버리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안해요. '내가 소망 가지지 안했는데' 이래도 자기의  심리를 똑똑히 파악을 못해 그렇지 아주 상관없는 말은 잘 안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어요. 청이 불문이라. 청이 불문이라. 들어도 들리지 안한다. 이 사람  마음은 지금 딴 데 생각이 있는데 옆에서 무슨 말해야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  속으론 이 사람 마음은 지금 여게 마음이 있어 가지고 자꾸 이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여기 무슨 말해야 안 들리고 또 자기는 여기다가 정신을  집중해 가지고 있으면 여기서는 불러도 안 들려. 그래, 청이 불문이라. 들어도  들리지 안한다. 들어도 들리지 안한다. 마음이 여게 있으면. 그와같이 주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요것이 연성이 돼 가지고 주님하고 교제할 때에 딴 말이 들리지  안하게 그렇게 돼지는 그것이 인제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그뭐 시장 한복판에 가 가지고서라도 이렇게 기도 할  시간에는 기도하고 이러면 다른 사람에게 침노가 안 되고 또 그게 연습돼  가지고서 암만 이 시장에 장사를 해도 주님하고 둘이 이래 교제하는 거는  교제하고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을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내가 주님하고 교제하는 그 교제는 외나 중심 정신은 거게 있고 이거는 뭐 그  정신이 주님하고 교제가 그리 되면 능숙해져서 사람 말 그거 는 몇이 말한다  해도 그거 뭐 밖으로 그저 주님하고 이래 하면서 슬슬 이래 들어도 그 들은 걸  다 판단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고 다 있습니다. 거게 대해서 어떻게 정당한 그런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습을 자꾸 우리가 평소에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엊저녁에 그 설교한 것이 아마 듣기에 재미없는 사람들이 좀 많이  있었는지 오늘 아침에는 새벽 기도 저 남반에도 좀 덜 나왔고 여반도 덜  나왔습니다. 잘 안 들리는가. 그게 잘 안 들리면 안 돼요. 엊저녁에 그 설교는  가장 신앙이 그렇게 좀 절정에 이르는 그런 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고 말귀를  알아들어야 됩니다. 고 말의 각도를 알아서, 말의 요 모배기를 말하는지  조모배기를 말하는지 그 각도를 고거 잘 알아서 깨달아야 되지 그런 말씀을 들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 생활하는 것이 항상 덩더꿍 이 신앙 생활입니다.

이래서 신앙 생활을 저 사람 잘한다 하지마는 보면 그 사람이 일반적 신앙  생활을 이래 해서 다른 사람에게 모두 수수하게 일반적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  그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깜깜해서 전연히 모르고 그저 이건가 저건가?  일반적으로 그래 하다 보니까 나중에 그런 사람 신앙이 어찌 되느냐 하면 도덕  신앙이 돼 버리고 맙니다. 도덕 신앙. 그저 이 도덕적으로 말이오. 이 도덕에  맞춰서 모든 일반적, 일반인들이 도덕이라 하는 그 도덕에 맞춰서 하는 생활을  하기 쉽고 또 이 사회에 맞춰서 생활하기가 쉽고.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  기독교 사회주의가 되고 기독교 도덕주의가 되고 또 기독교 정치주의가 되고  기독교 또 윤리주의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너거 혈통을 너무 강조하고 하기  때문에 혈통을 고조하기 때문에 혈통을 떠나야 되지 혈통을 벗어나지 못하면,  혈육 정실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걸 초월하지 못하면 신앙 생활 못한다.' 이러니까  그게 반대가 돼 가지고서 나간 사람 더러 있습니다. 여기 있다가 더러 나간 사람  그래 있습니다. 암만 나가도 바로 예수를 믿기 딱 시작했으면 혈육주의, 혈육주의  그걸 떠나지 안하면 신앙 생활에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도 지난밤에 말씀한 그 말씀을 계속해서 지금 더 보충해서  말씀하는 말씀을 지금 증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잘 여러분들이 들어서.

 여게 5절에 사도들이 주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 믿음을 좀 더해 주소서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자꾸 믿음 얘기를 하도 해 쌓으니까.

성공하는 능력은 믿음이, 믿음이 제일 성공하는 데에 제일 유일한 능력이다.

믿음이 성공의 유일한 능력이다. 믿음이 인간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에  제일 큰 능력이다 또 믿음이 모든 죄악을 정리하는 데에, 인간병 든 것을 고치는  데에는 믿음이다. 무디 선생은 '믿음보다 모든 면으로 더 큰 수입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 가진 그 사람이 제일 큰 수입을 하고, 많은 수입을 한다.' 이렇게  말한 것처럼 자꾸 믿음을 말하니 사도들이 제자들이 '아, 믿음이 보배로구나'  그러면 주님 앞에 돈을 구할 것도 아니고 권세를 구할 것도. 아니고, 사도 요한의  어머니가 와 가지고 '주님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우리 아들 둘을 하나는 오른  쪽에 하나는 왼 편에 좌의정 우의정. 오른 편에 있는 정승 왼 편에 있는 정승,  최고의 그런 자리를 앉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말을 한 것처럼 '그런 것도 필요  없고 믿음이 제일이로구나' 이거 똑똑히 모르고, 그때 제자들도 따라다녀야  몰라요. 몰라서 그저  그러니까 '환도가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 환도를 사라' 이라니까 이제  베드로가 있다가 '예. 여기 환도 두 자루가 있습니다.' 자꾸 주님이 지금 환난  환난 이래 쌓고 이런 그러다가 '환도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가지고 환도를  사라' 이라니까 '아마 이거 싸움이 일어나니까 그때 칼이 필요하니까 아마  그라는가 보다. 주여, 여기 환도 두 자루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만하면 족하다.'  그만하면 족하니까 그거 환도칼을 써라 하는 건 줄 알고 지금 환도를 단단히  강직해 다니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오니까 그만 베드로가 이 칼을 내어 가지고 한  번 썼다 그말이오. 말고를 때린다고 때리니까 귀를 때려서 그만 귀가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라니까 주님이 있다가서 그래. 나무라면서 '그 환도를 쓰는 자는  환도로 망한다.' 이라니까 그 환도가 아니라 그거요. 그라면서 귀를 주워 가지고  이래 붙여서 도로 완전히 치료해 주셨다 말이오. 예수님의 무리가 그랬으니까 그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완전 치료를 해 주시면서 '다시는 환도를 쓰지 말아라'  이랬는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그 나중에 오순절 성령의  은사를 받고 난 다음에 '아 성신의 칼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환도라고 말했구나' 그 뒤에는 그분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 성령의 검'  '성령의 검을 가지라' '성령의 칼 성령의 검을 가지라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가져라' 고렇게 해서 우리에게 알도록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도 따라다녀도 그 잘 몰랐는데, 여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라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명령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요 말씀이 아주 간단 명료한데 요 해석이 잘 안 됩니다. 해석이  잘 안 돼서 이 해석을 바로 해놓은 주석이 별로 없어. 나는 못 봤습니다. 별로  없습니다. 이런데, 고걸 다 범위가 넓어서.

 '겨자씨 믿음이라' 하면은 겨자씨 믿음이 있으면은 네가 뽕나무더러 명해서  바다엔 심기우라 명령할 것이요, 명령을 할 것이요. 명령하면 이 명령대로 고대로  복종하리라 이래 놨다 말이오. 이런데, 그러면 겨자씨 믿음이 어떤 것이 겨자씨  믿음인가? 겨자씨 믿음은 먼저 우리가 늘 해석해 주기를 그래 했습니다. 겨자씨  믿음은 생명있는 믿음이다. 생명있는 믿음이다. 생명있는 믿음은 생명은 어떤 게  생명이냐 하면은 다른 것은 다 땅 속에 들어가면 썩어 버리지마는 생명있는  종자는 땅 속에 들어가면 땅이 썩일라고 오는 것을 거기에게 해를 받아 가지고  썩지 안하고, 썩일라고 오는 그것을 오히려 잡아 먹고서 자체가 자라게 된다.

그런 것으로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고 겨자씨 믿음을 해석하기 위해서 그래 해  줬는데 오늘 아침에는 겨자씨 믿음이라. 이제, 생명 있는 믿음이라.

 그러면 생명있는 믿음은 어떤 게 생명있는 믿음인가? 생명있는 믿음은 어떤게  생명있는 믿음입니까? 생명은 뭐이 생명이지요? 생명은 뭐이 생명입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이 생명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과 연결된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면 겨자씨 믿음이라 말은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이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요렇게 해라 할 때에  고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우리에게 말해  주셨지마는 하나님께서 네가 이 시간에는 요 성구를 지키라 조 시간에는 조  성구를 지키라고 자기가 만난 자기 현재 현실 고게에 하나님께서 요 성구를  지키라 조 성구를 지키라 고렇게 해서 하나님이 고 현실에서 지키라고 하는  지키라 하는 고 성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한 것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한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고 명령 대로  행했으면 하나님과 연결이 돼 있습니까 없습니까? 연결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고게 생명있는 믿음입니다 자기는 신구약 성경에 있으니까 자기 현실에 신구약  성경을 뒤벼 보고서 '아, 이 성구를 지킬까 저 성구를 지킬까?' 이래 가지고서 '이  성구를 요 성구대로 해야 되겠다' 이렇게 자기가 깨닫고 했는데 고게 실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고대로의 그 성구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제 생각대로 지켜서  고거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순종이라 말이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순종,  그러면, 순종할 것을 요렇게 순종 하나 조렇게 순종하나.

 요거 좀 알아들어야 되지. 들려지지, 요걸 들으면 눈이 팍 뜨이고 '그래!' 요래 될  건데 그게 없으니까 이런 사람들은 뭐이냐? 고함만 지르면 눈이 뚱그랍니다.

이러니까 그런 사람은 고함 소리만 들으면, 고함이나 크게 지르면 허, 뭐 하면  '보자 어찌 됐노.?' 이라면 '아,' '어떻더노?' '은혜 있습니다.' 그자는 고함 소리면  은혜라 합니다. 고함 소리. 고함 소리면 귀가 뻐쩍 뜨이고 고함, 소리에게는 지금  자극을 받고 충격을 받으니까 이제 앞으로 환난을 때에. 환난이 올 때에  인민군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며 그 모든 뭐 검사든지. 판사든지 형사든지, 왜정  때는 형사가 다 취급했어요. 형사든지, 이래 뭐. 아, 요게서 막 책상을 이 쾡  거리며 뚜드리면서 고함을 지르면 고만 그때 고만 거게, 이 사람은 고함 소리에  항상 피동 되고 고함 소리에 피동되는 이것이 딱 습성이 되기 때문에 고함을  지르면 자 고함을 지르며 '이놈, 예수를 믿을래? 안 믿는다고 해.' 이라면, 뭐라  하겠소, 그러면? '아, 예, 안 믿겠습니다.'  이제 고함 소리에는 이거는 꼼짝도 안 하고 꼭 진리에는 따라서 피동되는 고런  것이 평소에 훈련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함을 암만 질러도, 진리로 판단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 뭐' 개 짖는 거와같이, 개 짖는 거와 같이 그렇게 들립니다. 개  짖는 거와같이. 또 이거 무슨. 목수가 지금 망치 가지고서 나무 두드리고 못 박는  거와 같은 그런 소리같이 들리니까 그 암만 그래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거기 자극이 없다 그말이오.

 고함 소리에 사람이 자극 받고 거게만 신경이 피동이 되지 하나님의 진리에는  피동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그것도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영감이 없으면 고함을 좀 지르기도  질러야 되요. 어짜든지 고함지르는 그거는 믿음 어린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요. 장성한 사람들은 고함 지르는 그런 거 고함을 큰 소리로 뭐 막  벼락같이 고함을 질러도 속에 진리 없으면 그거는 말도 아닌 걸로 알고 있고  아무리 모기 소리 해도 속에 진리가 있으면은 그거는 참 그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요 영감이요 동행하는 것으로 이렇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좀 깨달아야  돼요. 졸지 말고. 말씀할 때 조는 그런 사람은 진리를 못 알아 들어 그런  것입니다. 진리를 못 알아들어서.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의 법칙으로 주지 안했소? 신구약 성경 말씀을  '네가 어떤 현실을 닥치든지 요 법칙대로 해라'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법칙으로 줬다 말이오. 법칙으로 줬는데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법칙으로 준 요  많은 법칙. 법조문이 뭐 많지 않소? 이 신구약 성경에 법조문이 몇 개나 뭐  되는고 이래 세어 보지는 안했지마는 아마 자세히 세어 보면은 몇 만 될 것이고  더 세밀히 세면 몇 억 만도 넘습니다. 고 하나 속에 고 속에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수많은 조건이 예를 들면은 만일 만 법조가 일만 법의 조문이 법조가  있으면은 일만 법조가 있는데 거게 어느 요게는, 요게는 어느 법조가 해당되는 고  해당된 그 법조를 고대로 해야만 하나님의 뜻에 들어맞는 게 된다 그말이오.

들어맞는 게 되는데, 고 법조를 자기가 찾을라고 애를 써서 그 법조에 맞추면  되는데 법조에 맞추는 그게 뭐이냐 하면은,  그러면 우리가 법조를, 성경 말씀의 법조를 보고서 법조에 따라서 법조에  맞출라고 이렇게 애를 써서 법조에 맞출라고 애를 쓰니까, 그러면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법조를 따라서 행동을 하려고 법조를 찾는 것입니까, 그러면 성경  말씀에게 우리가 순종해서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그렇게. 성경 말씀이 말한  그 법조를 찾아 가지고 고 법조대로 하려고 지금 우리가 하는 신앙 행위입니까?  하나님의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명령하시는데 그 명령이  바른지, 그 명령을 내가 바로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 하나님이 명령을 이렇게  하시는지 저렇게 하시는지, 그 명령이 지금 무슨 명령이 내렸는지 그 명령을 내가  바로 듣고 바로, 그 명령을 바로 잡기 위해서. 그 명령을 바로 찾고 바로 잡기  위하는 데에 이 성경 법조는 참고가 되고 바로 찾고 잡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한  이 성경 말씀인지 성경 말씀에게 순종하는 것인지, 어떤 것입니까?  자, 그러면, 이 성경 말씀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가 행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감동시켜 지시해 주시는데 그 감동을 내가 받아 가지고 그  감동이 바른지 옳은지 그것을 심사하는 데에는 성경 말씀이 필요하다. 성경  말씀으로 심사해 가지고서 '아, 성경 말씀으로 심사해 보니까 성경 말씀대로는  말씀대로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심사해 보니까 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고것을 똑똑히 알아 가지고서 이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바로 내가 심사해서  하나님의 뜻인지 뜻 아닌지 바로 찾고 검사하고 심사 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고히 아는 데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성경 말씀인지, 내가 성경  말씀에게 순종하는 것인지 영감에 순종하는 것인지, 영감에 순종인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순종인지,  영감에 순종은 일호라 하고 또 말씀에 순종은 이호라 하고, 자, 그러면 요  둘부터 물어봅시다. 그러면 영감에 순종은 일호라 하고 말씀에 순종은 이호라  하고 이라는데 우리는 일호를 해야 되는가 이호를 해야 되는가 그것을, 자, 일호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예. 또 이호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알아듣기는 알아들은 모양이구먼요. 녜,  일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 또 하나 묻겠습니다. 일호 순종이 곧 이호 순종이요 이호 순종 이 곧  일호 순종이라, 일호 순종하면 이호 순종이 됐고 이호 순종을 바로 했으면 일호  순종이 된다. 자, 요거는, 요렇게 말하는 것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틀린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일호 순종이 이호 순종이요 이호 순종이 일호  순종이라 그거 다 한 순종이라' 이것이 틀린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또, 맞는다고 생각하는 분,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녜, 맞습니다.

맞습니다. 처음에는 순서를 말 하기를. 일호 순종이냐 이호 순종이냐 똑 그렇게  물을 때에는, 물을 때는 우리는 일호 순종을 해야 되지요. 일호 순종을 하는  그것이, 일호 순종하는 것이 이호 순종이 돼야 그게 바로 되는 거라. 우리는  똑똑히 모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을 당신이 법규로 주셨기 때문에. 일호 순종한  그것이 이호 순종에도 들어 맞아야 되지 그 안 맞으면 일호 순종을 바로 못  찾았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뜻을 바로 못 찾은 거라. 그러기 때문에, 일호 순종이  바로 되는 것은 이호 순종에도 바로 되고 이호 순종이 바로 되는 것은 일호  순종에도 바로 된다 고것이 맞다 그거요. 그 해석이 틀려요 맞아요?  이러니까, 이렇게 좀 구별을 해야 되니까 자꾸, 귀를 열어요, 자꾸 말귀를 열어  가지고서 귀가 뚫여야 돼. 요새 어떤 사람이, 저 오층에 제 밑에서 수고하고 있는  OOO집사가 있는데 OOO집사가 요새 이거 뭐 그 뭐꼬? 톰슨이가? 성경 공부.

성경 공부 문답 공부 그걸 자기가 하면서 말하기를, 아, 성경을 이래 이렇게  읽으니까 고 참 자꾸, 고 읽고 읽고 또 읽고 읽고, 답을 쓸라고 또 읽고 또 읽고  하니까 거게 참 진주와 보배가 나오더라고서. 그래 놓으니까 이 그렇다고. 보니까,  그 전에는 이 신앙을 덩더꿍이 신앙이라, 보면. 이래. 일반적으로 신앙  상식적이지, 딱, 요거냐 조거냐 물으면 도무지 구별성이 없어요 요거 조거 구별이  각도가 없어요. 전부 두루뭉성이로 이거고 저거고 이거도 저거도 다 범벅 그  비빔밥 신앙 인데, 그래서 내가 장 보면 '비빔밥 신앙이니까' 요 요거는 콩이라  팥이라 꼭 고 구별이 있어야 됩니다. 요게 말이오. 요라면 맞고, 요라면 틀리고,  요거 지남침은, 남쪽을 가리키는 지 남침이라는 요 지남침이 남을 가리킬 때는  쪼끔만 틀려도 나중에 가서 그게 갈수록이 여러 수십 리도 틀려 버립니다. 쪼끔  틀린 게 무서운 거라.

 그러니까, 이 아무나따나 일반 이렇게 뭐, 일반 농구야 일반 농구는 괭이 있지  딴소? 광이라 합니까, 표준어로? 괭이라 해? 괭이? 그 전에는 우리 배울 때는  광이라고 배웠는데 광이. 광이요 괭이요? 어? 괭이? 괭이? 광이 아니고? 괭이. 녜.

그런데 이 괭이 그거야 말이오 쪼끔 더 뻐드러져도 쓰고 덜 뻐드러져도 쓰고 또  오가도 쓰고 좁아도 쓰고 이래, 이래 하지마는 외나 아주 고급인 비행기. 비행기  그런 부속품 그런 것 보다도 원자, 관도 뭐 탄인가 그런 거 거게 대한 부속품  같은 거는 고게서 아주 초지장만침만 그 두께가 틀려도 안 됩니다. 그러면 절단나  버립니다. 고게는 아주 초지장 두께만한 고 얇아도 안되고 두꺼워도 안 되고 고  만침 길어도 안 되고 꼭 정확해야 된다 말이오. 자꾸 올라 갈수록이, 높은 기계  힘이 많은 기계 또 큰 능력을 가진 그런 기계 일수록이 세밀히 되지 안 하면  그게 안 됩니다. 그래 안 되면 안 돼요. 그거 모양으로 이제 우리. 구원도 자꾸  신앙이 자라갈수록이 그 세밀해서 털끝만치라도 틀리면 안 됩니다. 털끝만치라도  틀리면 안 돼요. 세밀해야 되지요.

 이러기 때문에, 이 도를 들을 때 요러냐 조러냐 세밀히 들어야 되지 이것도  저거고 저것도 저거고?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자꾸 그리 연습을  해 가지고서 재독을 자꾸 들으면 이 구별성이 나옵니다. 재독을 자꾸 들으면  되는데 고만 안듣고 뭐, '그러면 그렇다, 아, 한 소리 또 한다.' 한 소리 또 한다  한 소리 또 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무조건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너는 진리를 모르고 있다 단언 지울 수 있습니다. 몰라. 그 사람이 지금  모릅니다. 아, 다 같은 말 가운데 똑 같은 말 이래 하는 데에 똑 같은 말 이래  하는 데에 그 말이 같은 말이 아니라, 똑 같은 말하는 데에 그 말하는 사람의  속에서 영감이 또 처음에는 요렇게 말해 놓고 또 고 말을 또 해도 고 다음에  영감은 좀 더 강하게 또 영감이 역사해 가지고 하고 그 영감 역사는 뭐 얼마든지  변화되는데 외부의 귀로, 육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그 언어만 그 사람이 알았지,  언어만 알았지 그 속에 언어 속에 역사하는 진리도 그 사람이 상대도 못한  사람이고 영감도 상대 못한 사람이라.

 그 어떤 참 대학도 졸업 맡고 대학원도 졸업 맞고 아주, 박사는 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지마는 그런 사람인데 그 말하기를 '네가 그 교회가 부흥 안 되는  것은 설교를 잘못해 그렇다.' 아, 내가 개인으로 만나 가지고서 얘기를 하면서  '설교를 잘못해 그렇다.' 이라니까 '아, 설교를 잘못했다 하는 그거는 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이해가 안 되노?' '내가 목사님 설교한 것을 모두 서이나 너이나  다섯이나 여섯이나 막 대조를 해 가지고 필기 대조를 해 가지고서 혹 하나도  틀리지 안하고 말을 안 하는 것도 어 하는 것도 하나도 틀리지 안하구로 꼭 고걸  다 거석해 가지고서 고대로 그 말하자면 녹음기에다가 녹음한 녹음대로, 녹음이  이렇게 녹음에서 나오는 거처럼 고렇게 내가 꼭 고대로 하고 있는데 뭐 설교  잘하고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고 한 마디도 빠주지도 안하고 꼭 고대로입니다.'  그렇게 하기에 '그라면 그대로 하면 왜 꼭 같이 설교를 바로 하면 왜 안 되느냐?  그런데 그 왜 교인들이 네 설교를 듣지 않느냐?' '그렇기에 그게 뭐 내게 고장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고장이 있는 것이지 설교를 잘 못해 뭐, 다른거  때문에면 몰라도 설교 잘못해 그렇다는 거는 그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네가 말로 하는 그 말속에, 말속에 전능의 진리가 그 속에 역사하는 것을 네가  봤느냐? 또 진리가 역사하는 그 속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네가  봤느냐? 그러니까 그 사람과 같다 하는데 네 설교와 그 사람의 설교와 진리의  역사의 그 진리의 능력이 꼭 같더냐? 또 영감의 역사가 같더냐? 영감의 능력이  같더냐? 이러니까 껍데기, 껍데기는 같지마는 속에 알맹이가 첩첩이 들어 있는데  속에 알맹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을 네가 모르겠느냐? 그러니까  네가 껍데기 언어에 하나도 빠짐 없이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언어에 빠짐 없이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진리가 네 설교에 같이 하도록 애를 써라. 진리가 네  설교에 같이 하기를 애 쓰는 거보다도 하나님이 네 설교에 같이 하기를 애를  써라. 네가 설교를 가지고 이와같이 꾀 가지고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  하는 데에 거게서 성령이 나오고 성령에서 영감이 나오고 영감에서 진리가  나오고 진리에서 진리가 이 말씀으로 발표가 된 거게서 줄기가 나와 가지고서  너에게 요거 해라 하는 고것을 잡고서 네가 해라. 고거 잡고 네가 하고서 고 할  때에 네가. 암만 내가 말해도 진리가 역사 안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암만 말해도  영감이 역사 안 하면 안됩니다. 내가 암만 말해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안 하면 안 됩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가 역사하지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너는 껍데기 말뿐이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역사하는 그 속의 알맹이가  없는지 있는지 거게 대해서 네가 관심을 가졌느냐? 거게 대해서 있기를 원하기를  원했느냐? 그거 네가 그것이 있어서 거게 좌우된다는 것을 네가 알고 있느냐?'  이라니까 나중에 푹 수그러져요. '거게 대해 관심 가졌느냐?' '아, 나는 요대로만  하면 되는 줄 그거 뭐' 이러는데, 거게 대해 관심도 안 가지니 그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똑 바로 깨달아야지 깨닫지 안하면 안돼요.

 오늘 아침에 이 중요한 말씀하는데. 겨자씨 믿음은 뭐이냐? 겨자씨 믿음은  생명있는 믿음인데 생명있는 믿음이라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연결이  돼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 그거요. 여게 지금, 예를 들면 여게 큰 무슨 뭉텅이가  하나 있습니다. 쌀자루가 하나 있다 합시다. 쌀자루가 하나 있는데, 쌀자루가 여기  하나 있는데 그 쌀자루가 저 위에 오층에서 지금 줄을 달아내려 가지고 오층  줄에 쌀자루가 딱 붙들려 쌓여 가지고 있습니다. 예? 매여 가지고 있으면  오층에서 줄을 당기면 쌀자루가 올라갑니까 내려갑니까? 당기면 올라가고 놓으면  내려가고 거기서 흔들면 흔들리고 이래 될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 쌀자루에  줄이 매여 있지 안하고 쌀자루만 있으면은 그냥 있는 쌀자루와 오층에 붙들려  매여 가지고서, 줄에 매여 가지고 있는 쌀자루와 그 쌀자루 움직이는 것이 위에  오층에서, 두 쌀자루가 있는데 쌀자루 하나는 위에서 끌어올릴라면 올리고  흔들라면 흔들고 이라는데 밑에 그 매인 줄이 없는 그런 쌀자루는 그게  움직여집니까 안 움직여집니까? 안 움직여진다 그거야.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이 다 우리에게 법규로 줬지마는 그 말씀을 다 지켜도  다 지켜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되는 수 있습니다. 아 차례대로 이 시간은  창세기 1장 1절 지키고 2절 지키고 3절 지키고 4절 지키고 요한계시록까지 다 다  지켜서 나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지켰다 이래도 한 성구도 지키지 안한  사람이 있다 그말이오. 뭐이냐? 고 현실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거는 요 성경 말씀 범위 내에서 너희들에게 명할 터이니까 요 성경 말씀 범위  내에서 명하니까 내 명령을 네가 따랐으면 요 명령에 따라서 동하라 할 때  동하고 정하라 할 때에 정하면은 이건 전능이다. 전능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게  따라서 동해라. 요렇게 하면은, 그러면 네가 동할 때에 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바로 동하는지 바로 정하는지. 정한다 말은 멈춘다는 게 정한다 그말이요  동하는 것은 움직인다 말이오. 움직이고 멈추기를, 동하고 정하기를 네가 바로  하는지 안 하는지 고것을, 바로 됐는지 안 됐는지 그걸 네가 조사해 볼라면 요  신구약 성경 범위 내에서 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명하는 고것이 신구약 성경  범위 내 법조문에 있는 것이면 들어맞고 없으면 틀린 것이다. 이러니까 이제 내가  명령한 고것이 고 맞는가 안 맞는가 상고를 하려고 할 때에 법조문을 가지고서  고거 따져 봐라. 이거 안들리니까 잠이 오고 눈이 감겨. 안 들리니까. 이 각도를  몰라서 그래. 이 말씀의 각도 모르면 헛일이오.

 그런데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찾을라고 알라고 지금, 하나님  명령을 자기가 찾을라고 '아, 요 현실에서는 요렇게 해야 되겠다' 해 놓고 요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그러면 이것을 조사해 봐서 옳으면 전능의 능력이요  옳으면 전능의 능력이기 때문에 못할 것 없어. 그 하는 것은 뭐, 그게 안 될 수가  없고 천하가 대적해도 상관이 없어. 이제. 뽕나무를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할지라도 명령만 하면 그대로 된다 그말이오. 이게 전능인데. 이게 맞나 안 맞나  요렇게 자기가 그걸 대조해서 조사 해 볼라고 신구약 성경 법조문을 나빕니다.

법조문을 나비면서 이제, 이제 위에서 나에게 명령이 내린 요 명령이 마귀  명령인지 하나님 명령인지, 요 명령이 요게 바로 내가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고걸  찾아서 알기 위해서 신구약 성경의 법조문을 찾아 가지고서 이래 찾아 가지고  보니까 고것을 바로 맞아서 요 됐다 해 가지고서 그래 고대로 행하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내게 온 하나님의 명령 고것을 찾는 데에 참고로 삼아서,  고거 바로 찾았느냐 안 찾았느냐 고것을 참고로 삼기 위해서 신구 약 성경의  법조문을 이용하는 사람이요. 위의 명령이야 이런 명령이 내렸든지 저런 명령이  내렸든지 그거는 상관 없고 요 법조문에만 맞춰서 하면 되니까 요 법조문에게  맞춰서, 법조문이 요런 법조문 주니까 요 법조문 오늘 지키고 또 내일은 조  법조문 지키고, 요 법조문만 지키면 된다 해서 법조문만 자꾸 지키는 거, 그라는  사람은 법조문만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그 명령에는 상관없이 이  법조문만 가지고 제 마음대로 지켰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 고 명령과 이 법조문  지키는 것은 아무, 법조문 가지고 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거요. 이 법조문은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그 명령이 옳으냐 그르냐 고질 바로 찾는 데에 이용하는  법조문이지. 법조문이지 주님의 명령이야 어쨌든지 그거는 상관없고 이 법조문만  지키면 된다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알아 듣겠습니까? 요거 알아 듣겠소? 요거  구별해 알아 듣겠어요? 요걸 모르면 안 돼요.

 이래서, 너희가 성경은 사람들에게 배우지마는 어떻게 행할 것은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고 사람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그말은 뭐이냐?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지 못한다 그말이오. 그 사람에게 대해 네가 이 시간 요래 해라 조래 해라 하는  고거는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지 못해. 성경은 가르쳐 주지마는 성경에 이런  범위로 지금 말한 이 법칙은. 우리 법칙은, 생애 법칙은 이게 우리 생애 법칙이다.

이랬지마는 현실 딱 당한. 닥친 자기 현실에서 요래 해야 되느냐 하는 고런. 네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 요 하나님의 인도. 요것은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고  사람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왜? 사람은 못 가르친다 그말이오. 사람은 못  가르친다 누가 가르친다 했습니까? 고 성구가 어데 있습니까? 어? 1장 27절? 2장  27절? 2장 27절. 한번 했어 봅시다. OOO집사님은 잘 기억하고 있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가르칠 필요가 없고' 필요 없다 그말은 다른 사람은 가르쳐 주지 못하다  그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르친 거는 필요가 없어.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 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러니까, 이제  어떻게 행할 것은 성령님이 가르쳐요.

 그러니까 자,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성경 보고서 '이 성구 지킬까 저 성구  지킬까?' 성경 말씀을 보고 지켜야 됩니까? 자기에게 하나님이 성령으로  감동시켜서 가르치는데 그 가르침을 받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고게 대해서  요래라 하는 하나님 처리는 둘이겠습니까 하나겠습니까? 고게 대해서 하나님이  요래라 조래라 하는 것은 둘이겠소 하나겠소? 하나지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말이오. 그 완전한 처리면 고거는 이치에 맞소 안 맞겠소? 이치에 맞겠소 안  맞겠소? 고 처리는 완전합니까 좀 그저, 그저 좋습니까? 완전합니다. 완전합니다.

참된 진리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깰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깰 수 없습니다.

그게 전능입니다.

 그러기에 이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느냐면, 이 조금  잠깐만 하고 말겠습니다. 가지지 못하느냐? 그것은.-아, 고만 그래 중단하고 좀  뒤에 하든지 하지-요래야 이제까지 뭐 실컷 가르쳐서 올라와 놨는데 냅두면 또  흐려지니까 또 헛일이라 말아오. 요렇게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다고 했는데  요렇게 하나님의 명령 하나만되는 거, 하나만 되는 고걸 찾아 가지고 딱 한번 해  버렸으면 한번 했으면은 고게 대해서 뭘 보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딱  들어맞은 것, 하나만 되는 고 참인, 참인 고것을 고대로 딱 자기가 처리했으면,  행동 했으면 고 결과로 뭘 보겠습니까? 그 결과로 뭘 보겠습니까? 기적! 기적을  봅니다! 고래 했을 때에는, 아! 이 사람이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해서 하시는 그  초자연의 능력의 역사라 하는 것을 자기가 볼 거라 말이오. 또 두 번 했으면 두  번 기적 보지요 세 번했으면 세 번 기적 보지요. 열 번 했으면 열 번 기적을  보지요. 자꾸 이랬으니까 '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능치 못 함이 없다.' 죽음  앞에서도 뭐. 죽음이 상관이 없어.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데는. 그러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런 사람들이 고 일을 자꾸 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을 천지가 달라들어도 느부갓네살 왕 네가 크기는 크다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데 여게 대해서는 너를 만든 이 능력이기 때문에. 너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네 능력의 억억억억억만 배도 더 크기 때문에 너에게  굴하지 않는다. 고게 있다 말이오.

 자 이랬는데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다고 했는데 요거 하나님이 택한  하나만 되는 완전 요것을 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성경말씀대로. 성경 말씀에  있기는 있는데, 성경 말씀에 있는 법조문대로 하기는 했는데 완전자의 그 뜻에  맞지는 안했다 말이오. 알아듣겠습니까? 완전자의 뜻에 맞지 안한 걸 성경의  법조문에, 성경 법조문에 있기는 있는데 하나님의 그 지금 판결 완전한 뜻에는  맞지를 안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렇게 했으면 거게는 그 인도가 바로 내가  알아들었느냐. 그 인도를 바로 지금 받고 있느냐 잘못 받았느냐? 그러면 성령의  인도 받은 것을 그것을 재조사해서 바로. 정오를 따지기 위해서, 바른지 틀렸는지  그것을 따지는 데에 필요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까? 당신이 지도하는 그까짓  거는 상관도 없고 이 말씀만 가지고서 지키면 됩니까 어떤 것입니까? 예?  따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어린 교인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고것을 표준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왜 믿음  생활을 못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 그말은 그저 신구약 성경에 있는 조건은 이 시간이든지 저  시간이든지 이 장소서든지 저 장소서든지 장소와 시간과 환경과 형편과 사정과  저 O집사. 돈벌이 할 줄만 알고, 눈 똑 떠. 새벽 기도 나오기만 나오고 못  알아들으면 되는가? 예? 저 O집사. 눈 바짝 떠요. 그래. 그저 장소와 시간과  주위와 환경은 어떤 때든지 자기가 말씀 만 요대로만, 말씀대로만 또박또박 하나  둘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까 뭐입니까? 고라면 됩니까? 그라면 됩니까?  말씀대로만 하면 됩니까? 안 됩니다. 말씀대로 하면 됩니까? 됩니다. 그, 무슨  말이라? 말씀대로 한다는 이 말씀은, 이 성경 말씀은 요래라 조래라 하는 고것도  가르쳤지마는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성령이  너희에게 명령하신 고 명령을 따라서 해야 된다 고것도 성경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한다고 하면서 제 맘대로  성구를, 뭐, 주위 환경에 딱 들어맞아야 되는데. 주위 환경 형편에 고게 딱  들어맞는 거, 다시 말하면 그 주위 환경에 고 형편에서는 제일 옳고 바르고  참되게, 고 현실에서는,-이것도 어려운 말이오. 옳고 바르고 참되게 꼭 올바르게  고 현실에서 올바른 처리하는 거, 올바른 처리, 올바르게 거게 대해서 올바르게  자기가 행동하는 올바른 행동은 몇이나 있어? 한 서이 있을 수 있습니까 둘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열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녜? 혹 둘이 있을 수도 있지 안해요? 고 현실에 바로 옳게  하는 것, 딱 옳게 바로 참되게 바로 틀림없이 완전한, 올바로 바로 하는 고런  것이 혹 둘이 있을 수 있소 하나 있을 수 있소 서이 있을 수 있소? 예? 혹 둘이  있을 수 있지 안해요? 둘 있을 수도 있겠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둘 이  있을 수도 있고. 또 하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고게  맞습니다. 그때 어떤 사건이든지 있으면 그 사건에, 사람들이 사이비 하게 이렇게  처리하고 저렇게도 처리하지마는 고게 대해서 하나님이 기적과 축복이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다. 그러면 한  번 해 가지고 안 나타났습니다. 또 두 번해 가지고 안 나타났습니다. 세 번 해  가지고 안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이 자라겠습니까? 믿음이 자라겠소  의심이 자라겠소? 녜. 소망이 자라겠습니까 낙망이 자라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꾸  낙망이 자라고 의심이 자라고 이래 가지고서 예수 믿어가며 자꾸 이리 되고  이러니까 고게 맞춰 본 사람은 한 번 맞춰 보니까 '아 이상하다' 이거 저거  하려고 애쓰지 않고 이거 맞추는 그게 제일이라 말이오. 맞추는 거 아, 두 번 딱  맞춰 보니까 또 기적이 나오거든. 이러니까 이제는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서,  이 세상 인간들을 사귀어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요게 문제라 말이오. 요거 문제 가지고서 인제 맞았다 하면은 다 됐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 우리 신앙이 자라는 데는 자 맞은 것을 행해 보는데서  자라요, 또, 잘못 택해 가지고서 행하는 데서 자라겠소? 맞은 데서 자라겠지요?  그러니까 요 신앙을 자랄라고 하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뜻인 고 뜻을 행해 보면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뜻인, 확고부동으로  요거는 하나님의 뜻인 틀림없는 요하나만 되는 완전인 하나님의 뜻 고것을 한 번  행하면은 기적 한 번 보고 둘 행하면은 둘 보고 열 번 행하면은 열 번 보고 고걸  행하는 사람은 자꾸 믿음으로 자라가고 삐뚤어지게 행한 사람은 자꾸 의심 낙망  이래 가지고 나중에 가 가지고는 낙심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러니까  어짜든지 오늘 아침에는 요까지만 오고. 그러면 '틀림없이 요거는 하나님의  뜻이다. 더듬어 볼 것도 없이요거는 하나님의 뜻이다.' 요래 되는 것은 요것은  전능의 능력이기 때문에 고대로 행하면 기적을 봅니다. 기적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오늘 아침에 오고 내일 아침에 죽을란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한 마디만 더 합니다. 인제. 자, 그러면 예를 들어서 십 계명을 가집시다. 십  계명에 만일 우상 숭배하지 말아라 하는 거, 우상 숭배하지 말아라 하는 고것은  어떻습니까? 고 우상 숭배, 우상 숭배하라고 막 전부 천 명 만 명이 막 전부 우상  숭배를 다하고 하라고 이렇게 하는데 고럴 때 우상 숭배 안 하는 고거는, 우상  숭배 안 하려고 하는 것은 고것은 하나님의 그 뜻에 완전 뜻인지 들어맞았는지  혹 거게도 삐뚤어진 게 있는지 어떻습니까? 고거는 하나님 명령에 삐뚤어진 게  있는지 맞았는지 혹 의심이 납니까? 고거는 틀림이 없는 겁니까? 틀림없는  겁니까? 틀림없는 것이면 요거 하나님의 뜻에 틀림없는 것이니 고대로 하면은 뭘  봅니까? 고대로 하면 기적이 나옵니다. 기적이 나와. 이제 모든 계명은 다 이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고게다 전심 전력을 기울여 고거만 행하면 고 결과는 반드시 기적이나  축복이나 인간이 할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그 역사가 나타난다 그거요.

요것을 단단히 잡으십시오.

 녜. 오늘 아침에는 고만침하고 이제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어찌 됐든간에  배워서 알아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왜 같은 한 직장에서, 한 직장에서 한 사람은 웃고 있는데, 모세는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래서 죽을 지경입니까? 하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해 봤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이 말 귀를 못 알아 듣는 사람은 자기가 돈을 들여 가지고라도 주일날 재독하는  걸 자꾸 듣고 또 그런 사람은 이 새벽 기도한 요런 것도 녹음을 해 달라고  하는데 이거는 다 해 줄 수는 없어요. 다 해 줄 수는 없으니까 그거 다 비용을 다  할라면 다 해 줄 수는 없어요. 다 해 줄 수는 없으니까 그거하는 사람은 오늘  새벽 기도하는 요런 것도 재독 들을라고 녹음기 할라면은 만원 내야 됩니다. 만원  내야 돼. 그거만 자꾸 그거 하나 보고 이거 모두 직원 다 할라 하니까 만 원 내야  돼. 만 원 내고라도, 만 원 내고 재독 듣고 싶은 사람은 만 원 가지고 오면은 이  저 편집실에서 재독해 줄 겁니다. 그라고, 그러면 그 인건비가 많이 들어 그렇지  뭐 다른 돈은 아니라. 그러면 그 돈은 그거 인건비 다 지불하는데 편집실 수입이  됩니다  이제,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참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면 '야, 오늘 이 설교  이거는 녹음을 해 가지고 자꾸 재독을 요대로 자꾸 해 주도록 이렇게 하려고  하면은 요거는 십만 원이다.' 이라면, 내가 만일, 안 들은 소리 지금 그런 걸 내가  모르는 걸 이런 걸 새로 들은 거 '십만 원' 하면 내가 십 만 원 주고 단번에  합니다 백만 원 해도 대번 내가 지금 삽니다. 사. 그게 천하보다 보배가, 가치가  큰 데. 천천 금은보다 더 많은데. 이런데 이런 거 자꾸 귀넘어 듣고 졸며 듣지,  그러니까 재독을 자꾸 들으십시오. 듣고 또 성경을 자꾸 읽으면 귀가 열려요.

귀가 열리고. 자꾸 양심을 쓰면은 자꾸 양심에 지혜가 들어가 열려요. 이라면  우리 사는 것이 예수 안에 다 있는데. 딴거 뭐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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