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생활(쪽발,새김질)


선지자선교회 1983년 9월 14일 수새

 

본문 : 골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크게 말하면 세상과 천국이 싸우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과 천국이  싸우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 속한 세상 군대가 있고 천국에 속한 천국  군대가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데도 속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 은밀한 것을 말하면 악령과 하나님이 싸우는 세상입니다. 악령과 하나님이  싸우고 있는데 하나님의 군대가 있고 악령의 군대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 지식이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에  소속한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지식편에서 싸우는 자도 있고 세상 지식에 속하여  세상 지식의 종이 되어 세상 지식편이 되어 있는 자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불택자, 택자라도  아직까지 중생함을 입지 못한 자 그들이 다 한편입니다. 택한 자 중에 중생되지  못한 자들과 또 불택자들, 영원히 구원에 참여 못 할 불택자들 이 둘은 한  편입니다. 또 한편은 하나님 앞에 택함을 입고 중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또  한편입니다.

 이러기에 세상에는 사람도 두 편, 영도 두 편, 나라도 두 나라, 지식도 두  지식, 그러기에 인간의 행위도 둘, 이렇게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자, 택함을 입고 또 중생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편에 속하여  하나님의 군대인데 망령을 부려 가지고 악령에게 유혹을 받아  악령의 군대가 될 때 많습니다. 악령의 군대, 다시 말하면 세상 군대 인간  지식에 속한 자 이런 자 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택한 자로 중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군데만 귀속되지 아니하고  양편에 여게 속했다가 저게 속했다가 그렇게 되는 항상 기로 중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처음에 믿을 배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악령으로 끝마친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마친다 그말은 악령으로 끝마친다 말이요 인본으로 끝마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두 싸움 틈바구니 속에 들어 있어 하나님께서는 부절히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입혀서 우리의 갑옷이 되게 해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 공로를 입혀 이 공로를 입은 자는 세상이 해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이 갑옷을 입어 아무것이 와서 해할래도 해할  수 없도록 이렇게 갑옷을 입으라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으라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라 말은 벌거벗은 해를 말합니다. 벌거벗은 해 도덕적으로는  수치요 권능적으로는 죽음입니다.

 횐옷을 사서 입으라 그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사서 입으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은 공으로 입는 것인데 왜 사서 입으라 하는가? 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값이 없어도 사라' 이렇게 말씀했어, 값이 없어도 사라. 값이  없어도 사라 그말은 댓가 될 만한 것이 너희에게 없지마는 그래도 사야 된다.

그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네가 입으려면 뭘 내놔야 된다 그말입니다. 댓가는 안  되지마는 자기를 완전히 내놔 버려야 됩니다. 자기를 하나님에게 내놔서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주권을 다 맡기니까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하나님에게 내 맡긴 자라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을 수가  있지 맡기지 안한 자는 공로를 입을래야 입을 수가 없습니다.

 안 줘서 못 입는 게 아니라 제가 입을 실력이 없어서 입으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시키는 대속이요  영생할 자를 살려 기르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에  바울이 말하기를 '이 두 사이에 끼어 있어 괴로움 당하는 것을 너희들이 알리라  차라리 이 두 사이에 끼어서 고난 당하는 것보다 그만 주님 앞에 가기를  원하지마는 주님 앞에 가면 이제 두 편의 고난이 없고 하나님 한 편에 속하게  되지마는 내가 세상에 두 틈바구니 속에 쫄리고 이렇게 고통받는 그것이 너거  구원에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 둬 두시고 나는 괴롭지마는 너거 구원에  유익하기 때문에 그 구원을 생각하고 세상에 있는 것도 좋게 여긴다 차라리  떠나서 주와 함세 있는 게 좋지마는 너희들의 믿음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더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요 저것이 아니면 이것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레위기 11장에 '쪽발로 걸어가라. 쪽발로 걸어가는 것만 거룩한  자가 먹을 수 있지 쪽발로 걸어가지 안하는 것은 거룩한 자가 더럽기 때문에  먹지 못한다. 그러면 거룩은 하나님의 거룩을 말하고 성도들이 거룩에 속했으면  너도 쪽발 그것만 네가 취하고 그것만 양식 삼아야 되지 쪽발로 걸어가고 새김질  하는 것이라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친 잣입니다.

 에스겔 1장에도 보면 '다 네 영물이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독수리 같고 사람  같은데 그 발이 두 쪽발이라, 곧게만 걸어가고 앞만 보고 향해서 걸어가는데  번개와 같이 빠르더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성도들이 쪽발을 말하는 것은  성도들이 걸어갈 때는, 성도들이 생활할 때는 말이오. 성도들이 걸어갈 때는  쪽발로 걸어가야 된다. 이 시간에 말이든지 행동이든지 마음이든지 움직이면  그만치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걸어가는 것은 발로만 걸어가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걸어가고, 말로도 걸어가고, 행동으로도 걸어가고, 정신으로도  걸어가고 이제, 이제까지 있는 데에서 새것이 하나 된다 그거요. 그거는 앞으로  전진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쪽발로 걸어가야 된다 그말은 두 쪽으로 걸어가야 된다 하는  말입니다. 두 쪽으로 걸어가야 된다 말은 무슨 말인고? 네가 신본이냐 인본이냐  이 두 쪽입니다. 신본이냐 인본이냐 이것을 생각하고 그래 네가 한 자욱이라도  내디뎌야 되지, 말 한 마디라도 신본이냐 인본이냐 그것을 네가 생각하면서, 이  두 쪽을 생각하면서 네가 말 한 마디라도 해야 된다.

 말 한 마디 하면 그만치 앞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말 한 마디 함으로써 지옥을  한 발자국 걸어갔든지 천국을 한 발자국 걸어갔든지, 멸망을 한 자욱 걸어갔든지  구원을 한 자욱 걸어갔든지 말 한 마디, 또 우리가 마음의 생각이라 이래 했다  말이오. '사람의 뜻과 생각' 마음 안에는 생각도 있고 뜻도 있고 여러가지 뭐  감정들이 있는 것인데 마음은 크게 통틀어서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라는  그 자루 속에, 마음이라는 이 존재 속에는 생각도 들어 있고, 욕심도 들어  있고', 뜻도 들어 있고, 감정도 들어 있고, 기억력도 들어 있고 오만 것이 이  마음 속에 들어 있다 그거요.

 그런데 '마음의 뜻과 생각을 하나님이 감찰하신다 또 '뜻과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 그래 말했어. '행한 대로 갚는다' 해 놓고 그 행함의  정의를 나타내기를 사람의 뜻이나 마음이나 그런 것을 행함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자의적으로, 여게 '자의적으로' 골로새 2장에  말씀했습니다. '자의적으로' 제 맘대로 인간 제 맘대로, 절대자이신 주인은 따로  계시는데 이분은 집어치워 버리고 저거끼리 모여 가지고 뭐 '아주 이는 영광이  있다 이는 낮다' 영광과 겸손, 또 '이거는 복이다 이거는 해다' 그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법에 그분의 뜻에, 그분이 앞으로 처리할 그 처리를 맞춰서 하지 안하고  그거는 하나도 맞추지 안하고 인간 저거끼리 말해 봐야 모조리 유황불  구렁텅이에 들어갈 것 뿐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자기가 마음 하나를 가질 때도 두 쪽으로 두 쪽 발로 네가 내디뎌라.

이거냐 저거냐 하는 것으로서 네가 내디디라. 네가 생각 하나를 가져도 그  생각을 그저 아무나 따나 너는 그만 네 눈에 돈이 보이면 무조건 돈만  생각합니다. 네 눈에 어떤 기술만 보이면 기술만 향해서 전부가 다  기울어집니다.

 어떤 자는 지금 자기에게 무슨 감정 돋구는 일이 있으면 그만 무조건 감정  그것만 생각해서 감정 거기만 귀속해 가지고 감정 그것을 근거해 가지고 감정을  근원으로 삼아 가지고 감정적인 생각 마음 뜻 계획 욕심 그것을 가집니다. 그게  다 전부 자의적이라 말이요, 자의. 제맘대로 스스로 만든 것이지 절대자에게  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쪽발로 걸어가라. 네가 마음도 말도 생각도 '자, 이것이  신본주의 말이냐 인본주의 말이냐? 이거 천국주의 말이냐 세상주의 말이냐?  이것이 인간 지식적인 말이냐 하나님의 지식적인 말이냐? 성신의 감화의  마음이냐 악령의 감화의 마음이냐?' 이 두 가지를 녜가 생각할 때에 이거냐  저거냐 생각을 해 가지고 거게서 '이거라 저거라 판정해 가지고 네가 걷지  안하면 너는 거룩한 가운데에 들어갈 수 없다 거룩에 삼켜질 수가 없다. 거룩의  입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네가 미직지근해서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 그말은 거룩한 생명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게서는 다 토하여 나온다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두 쪽발로 걸어가지 안하는 것은 먹지 말아라.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라. 거룩한 것은 두 쪽발로 걸어가고 두 쪽 발로만 걸어가도 안  되고 새김질하고 두 쪽발로 걸어가야 된다.

 도야지는 발은 두 쪽발이지마는 새김질 안 하기 때문에 그는 거룩지 못하니까  먹지 말아라. 또 말은 새김질은 하기는 하지마는 발이 두 쪽발이 아니기 때문에  먹지 말아라.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마는 발이 두 쪽발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먹지 말아라.

 그러면 노루나 사슴이니 이런 것은 두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됐기 때문에  먹어라.

 그런 하나의 형식물을 가지고, 하나의 그 물체를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친 것이 구약입니다. 어리니까 그런 걸 가지고 가르쳐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바로 알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 내가 이러면 마귀편이 되나 하나님편이 되나? 이러면 세상을  속해서 멸망할 세상을 지금 건설하는 자가 되느냐 천국을 건설하는 자가 되느냐?  내가 이러면 인간 지식대로 하는 자가 되느냐? 하나님의 지식대로 하는 자가  되느냐? 내가 이러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있느냐 벗고 있느냐?' 뭐  전체를 생각하면 둘 아닌 것 하나도 없습니다. 뭣이든지 둘입니다.

 하나만 생각지 마십시오. 성경도 성경을 요렇게 해석하면 위에 속한 것 되고  요렇게 해석하면 땅에 속한 것 되니까 '내가 성경 말씀 이렇게 해석하면 어데  속한 것이 되느냐? 내가 지금 이것을 좋아하는 것은 마귀적이냐 세상적이냐  자의적이냐 멸망의 것이냐, 구원의 것이냐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두 쪽 아닌  게 없다 말이오. 뭣이든지 둘로 네가 생각해라. 무엇이든지 둘로 생각해 가지고  네가 출발하고 둘로 생각해 가지고 일보라도 내디뎌 가라.

 또 새김질하지 않는 것은 다 더러우니까 그는 거룩한 자 속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새김질하는 것은 반성을 말합니다. 반성. 자기가 과거의 생활을 한 번 했으면  그거는 다 됐다 할 게 아니라 과거를 자꾸 과거 전체를 반성해 가지고, 과거는  과지로 지내보내는 게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로 끝나버리는 게 아니고 과거에  제가 아무리 성자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그 과거를 또 현실에 새김질합니다.

과거를 현실에 새김질해서 ' 과거에 내가 이기기는 이겼는데 이겼다는 이름만  있지 실상은 거게 죽은 게 들어 있다. 이기기는 이겼지마는 그것은 오십점밖에  안 됐다. 이기기는 이겼지마는 팔십점 밖에 안 됐다. 이기기는 이겼지마는  구십점밖에 안 됐다 이기기는 이겼는데 요 면이 나빴다. 이기기는 이겼는데 저  면이 나빴다.' 이러니까 그것을 네가 새김질해서 현실에 요 면 나쁜 것을 고쳐서  요 면을 고쳐서 현실에 바르게 해라. 네가 오십점 짜리를 고쳐서 육십점  칠십점을 해라. 이렇게 과거에 전부를 자기가 반성해 가지고 그 현실로 고쳐서  현실에는 과거 모든 것보다 나은 그 현실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하는 그것이  새김질입니다.

 그러면 과거 그것을 그렇게 새김질하면 미래에 대한 것은 자기가 얼렁뚱땅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과거를,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까 제가 알기 때문에  과거를 반성해서 세밀히 새김질하고 보니까 미래도 바로 보인다 그말이오. '내가  과거를 보니 미래에 또 이렇게 넘어지겠다. 과거로 보니 미래에 또 이렇게 또  지나쳐 넘어가겠다. 과거를 보니 미래에 이런 것을 이렇게 얼렁뚱땅 해 가지고  실패하겠다.' 이렇게 해서 하는, 과거를 또 고치고 고치고 과거를 고쳐, 한번  했다고 다 된 게 아니라. 과거를 고치고 고치고 하면 그걸 고치고 고쳐서 그러면  온전함에 나 아가고 과거를 새김질하고 반성해서 그것을 과거를 반성할 때에  거게 고칠 것이 있어야 네가 앞으로 거룩에 들어갈 수 있고, 과거를 새김질할  때에 잘못된 게 있어야 네가 앞으로 거룩에 들어갈 수가 있고, 과거를 볼 때에  미달점이 있어야 네가 거룩에 들어갈 수가 있지 과거로 이것은 만족하다 족하다  하면 너는 거룩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깨끗하게 깨끗하게  이렇게 온전케 되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새김질 안 하는 것도 거룩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대구집회 때에 제가 설교한 것을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아이구, 그  영감이 얼마나 할 말이 없어서 그 성경을 보고 또 그말 하고 또 그말 하고 또  그말 하고 자꾸 그 말하더라. 얼마나 할 말이 없어서 그래 할까?' 그러면서  답답해서 하고 '아이고 지루해서 듣기 싫어서' 그래 그러는데 그 사람은 말  구경하는 사람이요, 말 구경하는 사람.

 그러는 것은, 자꾸 그말 하는 것은 뭣 때문에 그말 하느냐 하면 '자, 네가  과거에 대해서 이 말대로 했느냐? 과거에 대해서 이 말대로 네가 됐느냐? 과거에  네가 이 말대로 안 된 것 그것을 네가 찾아 가지고 이 말대로 고쳐라. 또 네가  현재에 이 말대로 하느냐? 또 네가 앞으로 이 말대로 할 수 있는 자냐?'  지난번에 간단하게 말했는데 한 가지 말하면 하나님과 자기와, 현실은, 현실은  하나님과 자기와 둘을 평가하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현실이다. 현실은 인간들의  여론과 하나님의 뜻과 두 가지를 구별하고 평가하는 현실이다. 현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조건들 좋은 그 조건과 하나님의 축복과 둘을 비교하는 현실이다  그것을 예를 들어 말하면 그 말은 그것이 한번 두 번 아니라, 제가 귀가 먹었고  제가 죽었소. 벌써 속에 성령이 떠났다 그거요, 그 사람 그렇게  말하는 사람 그 떠났소. 지금 제가 현재도 죽고 있어. 현재도 하나님과 자기와  비교할 때에 자기는 하나님은 까뭉케-버리고 제가 지금 주장이 돼 가지고 하고  있기 때문에 벌써 죽은 자의 말이라 그말이오. 뜻도 지금 현재에 그와 같은  말하는 그게 그것이 사람의 뜻이겠소 하나님의 뜻이겠소? 지금 현재에 범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거요. 대구집회 때 많은 것을 말하지 안했는데 그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될 것이오. 평생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제가  부흥사가 뭣 때문에 부흥사가 나중에 나이가 많고 난 다음에는 부흥사가 안  되느냐? 뭣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뒤에 나이가 많으면 버림을 받아 가지고  은퇴를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은 쪽발로 걸어가지 안하고 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구집회 때에 그렇게 말하지마는 나는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이 있는 것이  무슨 자신이 있느냐? 대구집회를 내가 인도하고 난 다음에 내 병도 많이 나았고  내게 더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전보다 나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다.

진리로 충만하다.' 저거는 듣기 싫어해도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로 충만한  것이 내게 확실히 내가 잡고 내가 인정이 됩니다. 왜? 내가 과거에 아브라함  설교를 수십 번 뭐, 수십 번 했을 것이지마는 이번에 대구 가 가지고  '아브라함과 롯과 둘이 당한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현실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이 둘이 이렇게 서로 시비한 그것이 뭐이냐? 우리  현실이다.

 우리 현실에는 아브라함과 롯의 현실이 있으니 내가 아브라함에게 속하느냐  롯에게 속하느냐 요것이 현실에서 결정된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롯이 다른 게  무엇이었더냐? 아브라함과 롯이 다른 것은 세 가지가 달랐다. 세 가지가  달랐다.' 그것을 내가 이제까지 예수를 믿어도 깨닫지를 못했고 나는, 나는  깨닫지를 못했고 또 그런 증거는 증거하지를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시시하게  들어도.

 이게 또 미친 소리 같지마는 '한국에서 성경을 제일 깊이 깨닫고 연구하는 이는  백 목사라' 다 하지는 안 하고 욕하는 사람은 욕하고 하지마는 이렇게  말하지마는 내가 대구집회 전에는 그대로 깨닫고 그대로 증거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대로 증거한 일이 없었어. 뭐 아브라함과 롯에 대해서 증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도 은혜를 받고 이렇게 한 사람들 많지마는 제가  그렇게 나로서는 내가 깨달은 게 없다 말이오.

 그러기에 그 깨달음에서 나는 새로와졌고 나는 더 죄인되었고, 깨닫고 보니까  죄인되었고, 깨닫고 보니까 새로와졌고, 깨닫고 보니까 벌받을 게 아직까지 많이  있고, 깨닫고 보니까 축복이 됐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설교를 어떤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라도 설교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든지 그 자리가 아니면 바깥에 나가서라도, 강단에 내려와서라도 반드시  새김질이 없으면 저는 거룩한 가운데 들어가지 못합니다.

 새김질이 없으면 거룩한 자 가운데 들어가지 못한다 그말은 거게 거룩한 자는  사람들을 거룩한 자로 말했지마는 실은 주님을 묘사해서 말한 것입니다.

 새김질을 안 하는 사람은 주님 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말이오.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안했습니까? 네가 더웁지도 안하고 차지도  안하고 미직지근하기 때문에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 그말은, '우리는 주님에게  잡아먹히는 밥인가?' 녜, 잡아먹히는 밥입니다. '아이고, 그러면 다 먹어 씹히고  나는 썩어버리면 안 되겠다.' 그거 비유요. 하나의 묘사의 말이오. 죽은  밥이지마는 그 밥을 내가 먹으면 그 밥이 내 피와 살이 됩니다. 살아서 강단에서  고함을 지르요, 죽은 밥이 살아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 밥이 죽은 반이  내 입에 들어가서 하면 내 피와 살이 되고, 내 정신도 되고, 내 말도 되고, 내  힘도 되고 다 된다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가 새김질하고 과거를  반성해서 그것을 그 현실에서 새김질해서 그것을 고치고 고치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 된다. 예수님의 지체가 된다.

 이 말해야, 이 땅에 있는 말하면 눈이 번쩍 뜨이지만 안 뜨인다 말이오. 이것  모르면 제가 앞으로 환난에 절대 못 이깁니다. 어림이니 있습니까?  뭐 지금도 벌써 거짓부리들이 총회장 다 됐고 노회장 다 됐고 거짓부리들이 다  장자 소리 다 듣고 있소. 거짓부리들이 지금 그 운동 다 하고 있소. 앞으로  공산주의가 오면 저거들이 이 도망을 가든지 그렇지 많으면 거게서 머리를  숙여서 굴복을 하든지 둘 중 하나지 딴것 없어.

 이러니까 오기도 전에 벌써 겁을 쥐먹고,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겁을 쥐먹고 도망가 가지고 외국에 가서 시민권 얻어놓고 시민권 딱  얻어놓고 여기 나와서 지금 하다가 쾅 하면 '나는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타고 가야 됩니다.' 하는 그런 피난처라고 하나님이 그걸 모를진대야 우리  하나님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그런 등신 아니오. 그자는 그자를 그걸로 가지고  싹 흘카서 딱 망하도록 그렇게 만드는 하나님이라 그말이오. 시민권 때문에  그걸로 망하도록 그렇게 만든다 말이오.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한 머리 속에 컴퓨터를 천억을 만들어서 넣어 가지고 한 머리를  만드는 그분이 그렇게 둔한 줄 압니까? 둔하지 안하요. 그런고로 우리가 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쪽발로 걸어가야 되고 새김질하는 것으로 걸어가야 되지  새김질이 없으면 주님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새김질이 없으면 주님에게는 필요  없소. 다시 말하면 과거를 반성이 없으면 주님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반성해서,  아무리 잘해도 보니까 '또 잘못했다.' 또 설교하고 나서 보니까 또 잘못했고.

그래, 어떤 사람이 나한테 걱정을 하기를, 이 이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것이  지금 그 목사님이 깨닫고 진리에 이제 서기는 섰고 잡기는 잡았는데 이 설교를  한 시간 반하고, 한 시간 한 시간 반, 또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자꾸  이라니까 교인들이 듣기 싫다고 슬슬 훠어져서 간 사람들이 딴답니다. 가는 것은  가야 좋습니다.

 그래 내가 그 사람에게 말했어. '그러면 그 교회가 어찌 되겠느냐?' 말하기를  '앞으로는 잘될 겁니다마는 그것 좀 걱정입니다. 앞으로는 잘될 겁니다마는  걱정입니다.' 나는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그 ○○교회를 걱정을 했고 ○목사를  걱정을 했었는데 이제는 걱정이 하나도 없다. 걱정이 하나도 없다. 이제는 그  교회에 대해서 걱정이 하나도 없다. 이제는 그 교회가 살고 그분이 산다.'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또 어떤 사람은 또 말해요. 설교를 하려고 실컷 준비해서  '이만하면 두 시간 설교하겠다' 했는데 설교를 시작하? 고 보니까 그만 한  시간밖에 안 돼. '이거는 또 이거 요만하면 한 시간 설교는 충분하다' 했는데  설교를 딱 시작해 가지고 하니까 그만'여기까지는 했지'했는데 할 게 없어 떡  그치고 보니까 반 시간이라. 또 설교는 많이 준비했다 싶었는데 한 이삼십 분  하니까, 한 이십 분이나 하고 나니까 그만 끊어져 버려. 그게 좋은 건 줄  압니까?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영감 주지 안하고 자기에게 자꾸 반성이 없고  새김질이 없기 때문에, 금방 말을 금방 그 자리에서 설교를 했지마는,  설교했지마는 반성의 새김질의 은총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아까는 요렇게  설교를 했지마는 금방 설교 시작할 때 이래 했지마는 안 됐다 미진하다 또 요래  증거해야 되겠다. 또 증거해야 되겠다.' 자꾸 새로운 새김질이 나오기 때문에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잔소리가 아니라. 그게 들리지 못하는 건 새김질 안 하는  자라 그말이요, 죽은 자라 그말이오.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귀에 들리지 안하는  것이라. 아무나따나 자꾸 할 말이 없어 자꾸 주 대는 줄 압니까? 성령이 가르쳐  주는 대로만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나따나 말하는 것 아니오. 그 말한 것을 녹음을 해 놓고서 성경에 보지,  그것 성경이 아닌가 성경인가? 성경에 틀린 게 있는가? 성경과 배치되는 게  있는가? 성경과 배치되지 않는 것을 자꾸 계속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하면 그것이 마귀가 한 것이요 하나님이 한 것이요? 어리석어. 내가  이제는 여기 양성원 학생들, 허영들이 있으니까 허영의 배가 툭 터지도록 할  것이고 이제는 참으로 그들을 좀 때려 부려서 무엇을 해야 되겠다.

 이래서 아마 목회자 양성원에 졸업하기가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서 세계  신학교서 제일 어려울 것이라. 제일 어렵고 제일 실력 있을 것이고. 제일 어려울  것이오.

이제 앞으로 우리 진영에서는 목사되기가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과거에  목사되기로 하던 그 조류 계단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대로 취급해서 그대로  이제 장립을 시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자는 이제는 새롭게 할 터이니까 참 힘들  겁니다.

 너무 신령한 것만 말해 가지고 이러니까 그것은 뭐인지 가치를 몰라. 그래 내가  어제도 내가 생각하기를 이것 순전히 육덩이로서 세상 것만 행해 가지고 싸우고  하던 이런 사람들을 세상 줄을 딱 끊어버리고 이것 복음으로만 살도록 해  놓으니까 몸부림을 치고 발동을 하고 마구 이것 뭐 권태가 나고 지루증이 나고  아무런 취미가 없다. 이러니까 이것 세상일을 하던 것을 세상일은 십분지 구나  하고 복음의 일은 십분지 일 하던 자를 세상 일 십분지구 하던 걸 싹 말살시켜  버리고 십분지 십을 다 복음의 일만 하라 하니까 영 몸치가 나고 주리를 틀고  아무런 일도 안 하고 그 힘이 어만 데로 배출이 돼 버린다 말이오. 어만 데로  배출돼서 어만 일만 하게 된다 그말이오. 어만 일만 하게 돼. 어만 일만 하게  된다는 그것 남반사들 여반사들 알런지 모르지. 알면 알 수 있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은 그래 허투로 그래 믿는 것 아닙니다. 그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러니까, 여게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 같이  나타난다.' 이러니까 그리스도로 살수도 있고,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리스도의 분자로. 그리스도의 분자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의 새끼로, 그리스도의 모양으로. 그리스 도로 사는 자도 있고,  그리스도의 반대인 세상 지식대로 세상 의문대로 자의적으로 인간의 명령으로  이렇게 살 자도 있으니까 우리가 이거냐 저거냐 그것을 분별하지 안하면 안 된다  그거요.

 왜 뭣 때문에 쪽발이 났느냐? 쪽발이 난 것은 2장 20절 이하에는 보면은 세상은  이렇다 이제 그거는 결국이 어떻다. 또 3장 1절에는 보면 너희들이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아났다.

 이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다른 생활 둘이 있으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다른 생괄 둘이 있으니 이거냐 저거냐? 내가 하면서 지을 이 시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말이냐 그리스도직의 말이냐, 제사? 말이냐? 이 시간 말하는 것은  제사장 말이냐 선지 말이냐 왕의 말이냐?  그것도 그렇게, 이렇츰 가르쳐도 모른다는 그거는 그래요.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안하면 몰라요. 제가 그거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백번 천번 가르쳐도 하나님의 성령이 깨닫게 하지  안하시면 못 깨닫습니다. 못 깨달아요, 그거는. 암만 가르친다고 되는 것  아니라. 그래 내가 그것을 경험을 했어. 이거는 아무래도 누구보다도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가르치려고 아무리 애를 써 여손 수백 번 가르쳐도 가르칠수록이  정반동적으로 반대적으로 나가, 납득을 안 하고.

 그러나 여러분들이 깨어서, 오늘 아침에는, 그리스도로 사느냐? 그리스도직을  반대함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직의 생활이 아닌 생활을 함으로  영원한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그것을 그리스도기 대신 그 직책의 안 한 벌로  죽었고 대신 그 직책을 행해 가지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살아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또 벌써 다 잊어버렸어. 잊어버리니까 그래 쉽게,  여러분들이 쪽발로 걸어가고 새김질하는 것 그거나 하나 이제 한번 해 보십시오.

새김질 하는 것. 과거를 반성하는 게 있는지? 과거 반성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는  소용이 없어. 어떤 사람은 설교하는 데 보니까 그래 놨어 '과거는 과거로 다  청산해라. 과거는 잊어버리라. 과거는 잊어버리고 청산해라.' 그 어리석은 말,  그런 걸 사람을 줘 그러니까 '하, 과거에 모든 일한 것 과거는 과거로 청산해  버리고 잊어버리고 이제 앞으로 새로 살아라.'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안  됩니다. 기독자는 과거를 먹고 사는 것이오. 과거를 먹고 사는 것이오. 과거를  반성해서 그것을 현실에서 먹어야 되지 안 먹으면 안 돼. 안 먹으면 거룩한 자  속에 들어가지를 못해. 또 한 자욱이라도 걸으면서 '이거냐 저거냐? 내가 이래  하는 것이 이 말 하는 것이 멸망을 지금 만드느냐 구원을 만드느냐? 이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 이것이 인본이냐  신본이냐? 이것이 악령적이냐 성령적이냐? 이것이 회개를 하는 것이냐 강퍅을  부리는 것이냐?' 뭐이든지 둘을 주 대요, 자꾸 이래 가지고 쪽발로 해 가지고  쪽발로 심사해 가지고 이거냐 저거냐 먼저 심사하고 그 다음에 한 자국 내디디라  그거요. 쪽발로 심사하고 난 다음에 네가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사람 접촉도 해라. 또 네가 이 현실을 과거 모든 것을 네가 이 현실에서  반성해서 그 과거의 모든 것을 이 현실에 새김질해서 현실에 네 양식을 삼지  안하면 너는 주님 앞에 상관이 없다 반성 없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쪽발 없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났으면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마라. 위엣 것을 찾으라 너희는 죽었다. 여게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가 죽었고 뭣 죽었다 말이요? 너희는 죽었고 뭐 죽었다 말이요?  '너희는 죽었고 너희는 죽다니? 뭐이 죽었다 말이지요? 잘 조는, 자꾸 말해  쌓아니까 듣기 싫다고 하는 그 사람 하나 똑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암만 말해야  가 르쳐도 모르니까. 너희가 죽었고 누가 죽었다 말이지요? 자, 남반에 한번?  한번 말해 봐, 남반에. 여기 중간반 반사들 한번 말해 봐요. 너희가 죽었고'  누가 죽었다 말이요? 그래. 초등학문으로, 의문으로, 인간의 명으로,  자의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과 같은 사람으로 사는 그자는 죽었다  그말이오. '살아 있는데?' 살아 있지마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대신 죽었기 때문에 네가 죽은 자이니, 네가 죽은 자이니 죽은 자로  살아야 될 터인데 네가 죽은 자 되는 그것이 네가 한 가지 할 일 중에 한 가지  할 일이라 그말이오.

 네가 죽었는데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세상에 있겠느냐? 어떻게 의문을 네가  순종하느냐 말이오. 네가 죽었는데 어떻게 의문에 순종하느냐? 이러니까 우리  애는, 이 세상 사람과 같은 살이로 과거 예수 안 믿을 때에 진리와 영감 외에  다른 걸로 사는 사람은, 다른 걸로 사는 나는 죽은 송장과 같이 털끝만치도  움직이지 안하고 그놈은 완전히 죽어서 조금도 그게 주장하지 못하고 나타나지  못하도록 요렇게 해야 되니까 요게 쉽소 어렵소? 쉽소 어렵소? 대구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 그 사람들 몇 내가 아는데 그 사람은 자기 전 생활이 자금 인본의  생활이라. 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바라고 취급을 하고 사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죽었고 그말은 세상적으로 사는 안 믿는 사람 그 사람의  생활이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된다 말이오. 이게 얼마나 힘드는지  압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까? 세상 사람으로 죽은 사람이, 세상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신사 참배가 오면 무슨 문제가 있으며 인민군이 오면  무슨 문제가 있으며 뭐 있습니까? '자, 인민군이나 그 사람들이 오면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도 봐, 물으면 다  낙제지. 죽일 권리가 있소 없소? 어? 어? 그것 다 거짓부리로 믿은 거라. 왜  없어? 인민군이 오니까 죽이기만 잘 죽입디다. 나 위천에서도 보니까 오십 명  묶어 가지고 앞세워 가지고 따바리종 들고 이래 가지고 그 산만당에 가 가지고  저거더러 파라 하니까 저거가 다 파. 그래 가지고 한 구덩이 넣고 다 죽입디다.

왜 못 죽여? 인민군이 우리를 못 죽인다 말이요?  자, 인민군이 오면 공산주의가 오면 우리 죽이요 안 죽이요? 죽일 수 있소  없소? 죽일 수가 없어? 없다는 말 그 말도 낙제인지 합격인지 그것도 또  모를러구만.

 녜 공산주의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에 속한 자를 죽이지  '너희들의 육체의 생명을 끊고 그 이상 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육체를 죽이고  영을 죽이지 못하고 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과 혼을 다  지옥불에 보내는 자를 두려워해라 말했어.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죽이지  못합니다. 옛사람 죽이요. 그러면 그들이 해는 누구를 주요? 옛사람 해 주요.

그들은 그러면 그들은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그 사람을 그들이 몽둥이로  뚜드리면 해를 보였소 유익을 보였소? 유익 보였어? 감옥에 가두면? 죽이면?  유익 보여. 정말로 믿어? 믿으면 문제없어, 믿으면. 이거라, 이거.

 이러니까 말로는 그렇지마는 실지로 그래 믿어야지? 닥치면 그래 돼야지?  그러니까 신사참배 다 했지. 그러니 6·25때 다 죄 다 지었지. 자기가, 순교자  복자전이라고 있는데 그 순교의 그런 책들을 좀 받아 보십시오, 사서. 그런 걸  보고 '나는 이리 되면 어찌 될 것이냐?' 이렇게 그것이 부럽고 한 사람은  순교하고, 그게 겁이 나는 사람은 주님을 배반하고, 배반해도 기본구원은  있지마는 건설구원은 한 내끼도 없습니다.

 이러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걸 생각해 보면 정신이 빠짝빠짝 차려질 것인데  잠이 오니까 그 사람은 그 세계는 상관없어. 돈벌이 말하면 눈이 바짝바짝  뜨이지. 여게는 세상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말하는 것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현재에 쪽발로 안 걸어가면 죽은 생활한다 말이요, 제가 뭘  하든지. 쪽발로 걸어가는 것과 새김질하는 이것은 계속해야 돼. 이것이?  끊어지면 안 돼.

 이러니까 믿는 사람은, 그러니 자꾸 뭣이 변해져 갑니다. 반성하니까 또 고치고  또 고치고, '한번 말하면 변하지 안하지.' 한번 말해도 자기 희생될 것은 변하지  안하지마는 하고 난 다음에 뒤에 보니까 또 잘 못되면 또 새롭게 또 좀 또 좀 또  좀 자꾸 개량이 돼 나갑니다. 자꾸. 그게 아니면 주 앞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도하고 나갈 때에 남반은 여게 파이프가 있는데 그것을 인부들이 옮기려  하니까 너무 많고 힘이 들어서 우리 교인들이 여럿이 나가면서 그것을 요  지하실로 옮겨놓고 가고, 어제 다 끝을 내려 했는데 조금 남아서 오늘 해야  끝나겠습니다.

그러고 여반들은 어제도 얼마 안 나왔는데 나와서 이제 마지막이니까 빗자루  가지고 자꾸 쓸어요. 쓸고 닦고 해서 예배당 부근이 아주 반들반들 하도록 그래  하고. 또 여기 삼층에는 테레비 다 설치해 놨습니다. 인제 오늘밤부터라도  삼층에서 철야기도 할 수가 있고 또 삼층에 거기서 재독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하는 데는 페인트 칠을 해 놔서 좀 휘발유 내가 독하고 이러니까  그걸 와서 좀 닦아요, 자꾸. 나와서. 여러번 닦으면 오늘밤에 거기서 있을 때에  괜찮을 것입니다. 여반은 저란 남반은 이란, 인제 철야기도 언제든지 거기서 할  것이고 새김질도 하면 거기서 할 것이고, 거게도 한, 몇 평이 된다 하더라? 몇  평? 예? 한 군데 칠십 평. 칠십 평이니까 뭐 철야기도 암만 해도 되겠고,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좀 닦아요, 오늘 봉사원들 나와 가지고서 닦고 빗자루 가지고  와서 소제도 하고 반들반들하게 이 부근을 해 놔야 되지 지금 뭐 집짓느라고  이래 놨으니까 그것 다 치우고 깨끗이 하고 또 길도 트인 것 우리가 다 길도  닦아서 다 도로도 잘 수축을 하도록 그렇게 하고 이래 가지고 할 터이니까 오늘  봉사단이 많이 나오고 그래 하도록 합시다. 나가며 남반은 파이프 옮겨 놓고.

요 말씀대로만 실행을 하면 막 속에 기쁨과 재미가 충만하고 힘이 나오고 무슨  일이든지 그래 하면 가치가 있어. 공장에 하면서도 이 속을 가지고 새김질하고  쪽발로 걸어가면 재미있고, 일하면서 일을 내나 그 공장에 그 일 하면서도  '이러면 내가 쪽발로 걷는데 이러면 뭐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러면 내  맘대로 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냐? 이러면 천국 건설이 되나 안  되나?' 이것을 하면서 하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수입하는 일인데 새김질 쪽발  그 둘이 없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생활이오.

 돈 그까짓 걸 보고 어찌 사요? 인간을 보고 어찌 사요? 세상을 보고 어찌 사요?  오늘 죽을지, 오늘 끝날지 안 끝날지 모르는 그걸 가지고 어떻게 보고 살겠소,  살기를? 쪽발 새김질 요것만 오늘 아침에는 기억하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4916 그리스도인의 구원/ 요한복음 12장 23절-28절 / 1977년 25공과 선지자 2015.10.25
4915 그리스도인의 눈이 밝아지는 방법/ 베드로후서 1장 4절-11절/ 1976년 26공과 선지자 2015.10.25
4914 그리스도인의 목표/ 히12장 1절-13절/ 1974. 6. 2. 제22공과 선지자 2015.10.25
4913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디모데전서 6장 17절-21절/ 831120주전 선지자 2015.10.25
4912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디모데전서 6장 17절-21절/ 831120주후 선지자 2015.10.25
4911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디모데전서 6장 3절-10절/ 820929수야 선지자 2015.10.25
4910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마가복음 10장 23절-27절/ 1977년 3공과 선지자 2015.10.25
4909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디모데전서 6장 3절-10절/ 1982년 40 공과 선지자 2015.10.25
4908 그리스도인의 변화/ 빌립보서 3장 17절-21절/ 1975. 4. 13. 제 15 공과 선지자 2015.10.25
4907 그리스도인의 보배/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1975. 9. 7. 제 36 과 선지자 2015.10.25
4906 그리스도인의 복/ 마태복음 5장 1절-12절/ 1974. 11. 10 제45공과 선지자 2015.10.25
4905 그리스도인의 부요/ 고린도후서 8장 8절-15절/ 1975. 12. 28 제 52 공과 선지자 2015.10.25
4904 그리스도인의 생명/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1975. 10. 5 제 40 공과 선지자 2015.10.25
4903 그리스도인의 생애/ 로마서 12장 1절-2절/ 1977년 20공과 선지자 2015.10.25
4902 그리스도인의 생의 법칙/ 마태복음 6장 25절-34절/ 1975. 6. 22. 제 25공과 선지자 2015.10.25
4901 그리스도인의 생활/ 골로새서 2장 20절-3장 11절/ 830917토새 선지자 2015.10.25
4900 그리스도인의 생활/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1976년 23 공과 선지자 2015.10.25
4899 그리스도인의 생활/ 유다서 3절-4절/ 1976년 35공과 선지자 2015.10.25
4898 그리스도인의 생활/ 요한계시록 2장 18절-29절/ 890810목후집회 선지자 2015.10.25
» 그리스도인의 생활/ 골로새서 3장 1절-4절/ 830914수새 선지자 201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