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심판대


선지자선교회 1982년 2월 27일 토새

 

본문 : 고후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 구원은 준비가 있고 마지막에 결승이 있는 구원입니다. 준비에 잘 했으면  물론 마지막 결승에도 잘 되겠지만 준비에는 힘을 쓰다가 마지막에 그것이  결승되는 그때에 마음을 풀어놔 가지고 실패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평소에  준비를 계속하고 있는 분은 결승이 되는 마지막을 잘 해야 구원이 되지,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고 밤중이 온다, 최고로 어려움이 온다 하는 이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지내다가는 마지막 실패하기 쉽습니다.

 이래서 밤중 비유로 한 것도 차차 어려워지지만 그때에 신랑을 맞이하는 때는  아니고 가장 어두운 마지막 밤중에 그때에 신랑을 맞이하고 쫓겨나고 하는 그  결말이 지워졌습니다.

 이런 비유는 신앙 준비를 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차차 차차 어려워진다,  신앙생활이 세상 무슨 일처럼 잿만당에 구루마를 끌고 올라가는 것처럼  올라가다가 잿마당을 척 넘기면 그만 그때는 도리어 내려갈려고 쌓아서 힘드는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니라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까지 신앙생활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고, 또 어떤 사건도 그 사건이 완전히 승리하기까지에는 점점  어려워진다 하는 그런 것을 비유해서 밤중 비유 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그러고 빌라델비아교회에도 보면 "네가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 네가 연약한 힘으로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고 내 말을 지켰은즉  내가 너에게 열린문을 주노니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다" 이미 완성 같은 이런  말씀을 하시고, 또 끝에는 말하기를 "네가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마련해 놓은 면류관, 완성해 놓은 그 면류관을 네가  빼앗기지 아니하도록 노력을 해라, 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기  쉽다" "된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라"  이스라엘이 그 무서운 바로왕에게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방을 받아 참  권능의 홍해를 건넜고 이적의 물과 떡과 고기를 먹었지만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무리들을 다 광야에서 멸하게 했다 이것이 너희에게 거울이 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또 시대적으로나 보면 밤중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세상 일도 그 일이 반드시 제일 어려운 절정인 그 고비가 있어서  그때에 그만 잘못되면 다 실패를 하고 맙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미리 예비 지식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갈 것이다. 그러면 어려워져 가는 그 어려움을 아무도  이길 자 없다. 그 어려움을 이기는 방편은 하루 하루의 기름준비 하는 이 평소  생활을 승리해 나가지 못하면 마지막 승리는 할 수 없다'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 한국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이 세계에 투쟁하는 참 절정이라고  할 수가 있고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만큼 동족들이 이렇게 대립이 되어  가지고, 그들이 준비한 게릴라전은 세계에 일위가 된답니다. 이번에도 의외에  미국 국무성에서 발견을 했는데 땅굴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성질의 전쟁 준비가  얼마나 많이 되어 있고 또 게릴라전을 하기 위해서 뭐 무슨 비행기인가 그것도  많이 사들여 가지고 이번에는 10만명을 남파한다 하는 그런 말이 들려지는  그것이 누가 그 일을 조정하고 계시는가?  자기네들끼리 하는 것 같으면 암만 그것이 억세 봤자 인간만치 억세지만  자기네들이 그 일을 단독 경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그  일을 경영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기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무신론주의지만 무신론주의가 생겨진 것도 하나님의 영원 전  예정대로 된 것이요 그 예정은 우리 구원에 필요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니,  주님이 단독 그 일을 경영도 하시고 그렇게 점점 성취해 나가시는 것이니 그것을  우리가 무심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에 제일 급박하고 냉혹한, 공산주의자 가운데도 김일성같이 그렇게 행정  독재하는 그런 공산주의는 세계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하신 것이니  남한에 있는 이 교회에 대해서도 주님이 세계에 없는 제일 절정 발단에 주신  한국교회라 그렇게 우리가 봐야 되겠고, 그쪽에 대적이 강해지는 것은 우리  신앙편에 신앙이 강해지기를 원하셔서 강해지도록 하나님이 독려하시는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겠고, 그쪽이 냉혹할수록 그런 아주 냉혹한 그런 현실을 만날  때에 그 냉혹함을 이기고 날 만한 그런 신앙을 재촉하고 준비시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에도 보면 쓸모없는 필요없는 환난이 없었고 반드시 어려움에는  승패의 결정이 나왔고 그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큰 상벌로 베푸신 것을  우리는 다른 데서도 늘 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금 같은 이런 평온한 이런 입장으로 계속되리라 생각을  가지지 않아야 되겠고, 또 이런 입장으로 계속해서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준비를  했든지 안 했든지 같이 따시게 먹고 배 부르게 먹고 살다가 그만 병들어 죽든지  늙어 죽든지 뭐 어떻게 무슨 변사를 하든지 이런 것으로 끝을 마친다고 하면 참  기독자의 구원 이루는 것은 심히 힘이 들겠습니다.

 자기가 전심을 기울여 짐을 지는 데는 무거운 짐, 자기 전심을 기울이지  아니하면 지지 못할 무거운 짐을 자기가 지고 전심 기울여지는 그것은 쉬울  것이고, 등에 짐은 없는 그 가벼운 짐을 지고 자기의 전심 전력을 기울인다는  그것은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환경이 우리의 전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이길 수 없는  그런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해 주시는 그 조성된 환경에서 전부를 기울이기는  쉽지만 그런 어려움이 하나도 없는 그런 데에서 순교적인 신앙, 다 주님에게  바쳐 주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신앙 준비라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편으로 볼 때에 이렇게 평온한 것으로 일생이  끝마쳐지기를 원하는 그것이 참 믿음면으로 볼 때는 농사지어 봤자 추수 없는  농사짓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승패가 없는, 승패  없는 그런 훈련 받는 것과 같이 무가치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도 실은 신앙으로 볼 때에 너무 평안한 것으로 지내는 그것도 무너질  장막집에만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지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을 소망하고 사는 그런 삶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점점 우리의 대적으로 강하게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할 만한 승리할 만한 그런 신앙의 정도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께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려면 지금 이래 가지고는 영광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런 무슨 어려움이 있어야, 마치 다니엘을 통하여 바사  나라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게 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것이 없으면 영광이 되지를 못하기  때문에,  출애굽을 보면 하나님이 당장에 한 번만 기적을 재앙을 베푸시고 그때에 그들이  회개하고 내 보내겠다 할 때에 그만 그대로 둬 뒀으면 단번에 해방을 시킬  것인데 뭣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또 한차례  항복하고 또 강퍅하게 만들어서 또 한차례 항복하여, 이렇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해서  책임지심에 대해서 이렇다는 것을 몇번이든지 경험하고 체험하게 하셨고, 또  애굽 나라에서는 그들이 몇번이나 거듭거듭 해 봤기 때문에 참 하나님은  두려우신 하나님이며 그는 대항해서는 안 되는, 대항하면 끝까지 대항하는  것만치 자기네들은 망한다는 그런 것을 만민에게 인식을 시킨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그 방편이요 순서입니다.

 이런 것을 봐도 남북에 이렇게 어려움이 점점 높아져 가는 것을 예사롭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어느 모를 봐도 저렇게 대적이 강해지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경고시키고 우리를 그들을 인해서 강한 신앙으로 준비케  하려는 이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어떤 분이 말하는 대로 죽음 이편을 소망하고 여기에 관한  준비의 그런 신앙도 있고 아예 죽음 이편 것은 소망하지 아니하고 죽음 이편의  것은 그것 위해서 노력하지도 아니하고, 죽음 이편의 것을 상대해서 사는 그 전  생활이 죽음 너머 부활 후 영원한 나라에 그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위하여  이루는 이 현실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설교도 이 만당을 넘은 설교가 있고  만당 안에 있는 설교가 있고, 신앙생활도 만당을 넘은 참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는 죽고 난 다음에 부활한 것인데 죽고 부활한 그 부활에 속한 신앙 설교가  있고 아직까지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 전에 이 편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신앙생활도 설교도 있다 그렇게 구별지우는 것과 같이 과연 우리가 그러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앞으로 어떤 현실을 우리가 만날런지? 그것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현재에 벌써 이런 형편을 당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떤 신앙이 필요한고 하니 죽음 이편의 것을 소망하고 사는  그 신앙생활은 시험이 있어서 그 시험에 낙제를 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은 그  자체가 아직도 땅에 속한 신앙입니다.

 여기에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몸에 거할  때에는" '몸에 거할 때에는' 그 말은 아직 자연은총, 땅에 있는 장막집 '이  장막집 안에 살 때에는' 그말입니다. '땅에 거할 때에는' 이 장막집 안에 살  때에는, 이 장막집에 속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주님과 따로 있고 주님과 영원 불변의 결합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주님과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영원 결합,  완전 결합, 영이 진리와 성령과 하나가 된 것처럼 이런 결합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로, 이 결합을 소망하고 이 결합을 바라보면서 있는 것이지 이 결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이다.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보이는 이  현실, 땅에 속한 것 이것 상대해서 살지 않는다. 이것 상대해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 말은 하나님께서 이런 이런 소망이 있다 말씀하신  그 소망을 인정을 하고, 그게 믿음이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그 소망을 거짓되다 이렇게 듣지 아니하고 그 소망을  참되고 실상인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반쪼가리 믿음이요, 인정하고 그대로  조성하려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하나 순종한다. 그것이, 몸으로  순종하는 그것이 이제 반쪼가리 믿음으로 온전한 믿음이 되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소망이나 방편이나 우리를 도와 주시는  그 은혜 약속이나 이 모든 계약을 마음으로 굳게 인정을 하고 몸으로 이  계약대로 실행을 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보이는 이 지상 현실의 것, 땅에 속한 장막집 이것 상대해서 살지  않는다. 믿음으로 산다. 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보이는 이 장막집을 상대해서 이 장막집에 있을 때에는  주님과 영원 완전한 결합은 된 것은 아니다. 결합을 하려고 하면 결합할 수 있는  이런 가능성있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이제 완성의, 완료의 끝이 난  완료의 결합된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이 땅에 있는  장막집 생활이 끝나고, "몸을 떠나" 장막집 이 장막 생활이 끝나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그러면 장막집 생활 이것이 끝나고 없어지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

 장막집 생활이 끝나면 끝난 것만큼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인데, 장막집  생활이 끝나는 데는 참 장막집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저 함이 아니다.

만일 장막집을 장막집 그대로 훌떡 벗어 버리면 이는 희망이 있는 장막집도 다  뺏겼기 때문에 이는 참 영원 완전한 실패다. 벗고저 함이 아니다. 그러면 벗고저  함이 아니다. 또 벗고저 하고 있다. 벗고저 함이 아니다. 왜 벗고저 함이  아니냐?  벗고저 함이 아닌 것은 이대로 장막집을 벗어 버리면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한다.

다시는 자기의 장막집은 영원히 뺏겼다. 자기의 마음의 기능도 다 뺏겼고 몸의  기능도 뺏겼고 자기의 모든 소유나 활동이나 성취해 놓은 일이나 그런 것 다  뺏겼다. 왜 뺏기느냐? 땅에 속한 장막집은 다 무너질 집이요 땅에 속한 것들은  이것은 한정이 있지, 하늘의 것을 준비하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고 그  기간만 있는 것이지 그 기간 지나가 버리면 헛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벗고저 함이 아니다.

 또 "몸을 떠나" 어서 벗어야 되겠다. 그러면 벗고저 함이 아니다. 어서 벗어야  되겠다. 그러면 벗고저 함이 아닌 것은 뭐인가? 벗어 버리면, 벗어 버리면  다시는 이것을 만나 보지 못하고 영원 멸망이 되고 만다. 이러기 때문에  벗어서는 안되겠다. 벗어서는 안되는데 몸을 떠나기를 원한다. 벗기를 원한다.

왜, 벗지 않으려고, 벗어지면 안되기 때문에 벗지 아니하려고 하는데 왜 또  벗기를 원한다 말인가? 이것입니다.

 그저 땅에 있는 장막집을 벗어놔 버리면 그만이라. 땅에 있는 장막집을 벗어  버리면 그만이라. 우리의 마음의 기능 이것은 영원무궁한 세계에서 우리가  사용할 마음의 기능인데, 이 마음의 기능 이것인데 이 기능을 개조받지 못하면  이 기능은 둘째사망의 해로 영원히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사람마다 그 사람의 이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 마음의 힘  몸의 힘 이 두 가지 가지고 인간 가치가 평가되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지식이 많아서 유식하다.' 그 사람은 유식이 마음의 기능이요 몸의 기능이오.

'이 사람은 하나도 배우지 않아서 아주 무식하다.' 그 사람은 마음과 몸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보지도 못하지 사용도 못하지 알지도 못하지, 이렇게  유무식의 사람의 실력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무궁세계에 영원한 차이가 있는  것인데, 자기가 썩어질 장막집 무너질 장막집 이것이 있는 것만치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아 가지고 만들어 줍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걸 증거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자꾸 가는데,  우리의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집, 영원한 집,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 이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똑똑히 말하기를  진리와 영감에 결합이 되는, 결합되는 그저 그편에 속해지는 것 이것만이 아니고  그분이 만드신다고 했는데 그 만드시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  현실에서 진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진리를 모시고 진리에게 속한 자로,  진리의 것으로 그 현실을 통과해서 진리의 것이 되어진 것으로 끝나는 것,  손양원목사님의 그 생명이 그들이 '이러면 지금이라도 살려 준다.' 살려 준다  할 때에 그들이 살려 준다는 그런 것은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손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진리의 것이 되는 그 생명으로, 영감의 것이 되는 그  생명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그 생명으로, 손목사님의 그 생명이 있든지  떠나든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 현실을 통과하려고 애를 쓰고,  만일 그때에 하나님과 연결된 것이 그것이 변해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보다 세상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끝을 마치게 하려는 이것을, 세상은 모든  면으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했고 하나님과 중생된 영과 손목사님의 그 심신은  하나님의 것으로 끝을 마치려고 애를 쓰는 이것이 두 투쟁이라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벗고저 함이 아니다. 벗고저 함이 아니다.' 벗고저 함이 아닌  것은 왜 벗고저 함이 아니냐? 벗고저 함이 아닌 것은 그것 가지고 땅위에서  여전히 땅에 있는 그 장막집 살이가 그리워서 그 살이를 계속하려고 그 장막집을  벗지 아니하고 그대로 입고 살기 위해서 벗고저 함이 아닌 것이 아니라, 벗고저  함이 아니니 땅에 있는 장막집을 벗기를 싫어합니다. '벗기를 싫어하니까 그러면  벗지 않으려면 이 집을 네가 입고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싶으냐? 그러면 살아라.'  '아닙니다. 벗기를 원합니다.'  '이 장막집을 벗으려느냐?' '벗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이 장막집을 네가  벗지 아니하고 입고 있겠느냐?' '아이구 입지 아니하고 벗고 싶습니다.'  이것입니다. 벗기를 원하느냐? 벗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 장막집 땅에 있는 처소  이것은 몇번이든지 해석을 했기 때문에 이것은 벌써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는 다 무너질 집입니다. 땅에 있는  집입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 사망과 저주 아래에 있는 은혜들입니다.

사망과 저주 아래 있는 은혜들이요 첫째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벗고자 하느냐?' '벗지 않습니다. 벗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벗기를 원치 않으면 그러면 입고 이대로 살고 싶으냐?' '아닙니다. 입고  살기를 싫어합니다. 벗고저 합니다.' '벗기를 원하느냐?' '아니 벗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입도록 해 줄까?' '아니 입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벗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입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벗기를 원하느냐? 아닙니다. 벗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벗고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원하는 바는 벗고저 함이 아닙니다. 벗기를 원치 않습니다. 벗기를 원치  아니하면 그러면 입고 살고 싶으냐? 아닙니다. 입고 살기 싫고 벗기를 원합니다.

"몸을 떠나, 차라리 몸을 떠나" 벗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벗으라 하니까 벗기도 싫다 하고, 그러면 입혀 줄까 하니까, 입고 살려느냐  하니까 입고 살기도 싫다 하고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벗겨 줄까 해도 벗기를  원치도 않는다 했지, 그러면 또 입혀 둘까 이러니까 '아이구 입고 있기도  싫습니다. 벗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대체 너는 뭐이냐? 벗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대로 훌떡 벗어 버리면  다시는 만나보지 못합니다. 이는 둘째사망의 해로 완전히 저주 아래에 사망  아래에 속한 것으로 끝나 버렸으니까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으로 벗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면 입고 있고 싶으냐? 아닙니다. 멸망 아래에  속한 것으로 입고 있다가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벗어져야 되는,  누구든지 벗어야 되는 그런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입기를 싫어합니다.

 원하는 것은 벗는 이것이 벗는 이때에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있는 처소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증거한 이 증거에는 원한 것이  뭐입니까? 벗기도 싫어한다, 입고 사는 것도 싫다 원한 것은 뭐인가? 하늘에서  오는 이 처소로 변화함을 받는 것으로 벗기를 원한다. 변화함으로 받는 그 벗는  것을 원한다. 이대로 입고 있어도 이것 다 절단나는 것, 그저 벗어도 절단나는  것, 이대로 입고 있는 그것도 언젠가 벗게 되는 것, 그대로 벗으면 소용없는 것,  입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덧입은 것같이 되어져도 아직까지  시험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실패가 될런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처소로 덧입는, 이 처소로 덮어 입어서, 하늘에서 오는 이  처소 속에 들도록, 하늘에서 오는 이 처소 속에 싸여지게, 싸여짐으로써 땅에  있는 처소가 끝나 버리는 것을 이걸 원한다. 이것을 원하는 것이 이것이 성령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우리는 진리와 연결이 되고 영감과 연결이 됐으면 그저 그것은  무슨 물건을 결합시킨 그대로, 우리 자체 그대로의 것이 하나님의 법에 합법적인  것이 되어졌고, 또 하나님의 영감에 대립이 안 되고 영감과 통일되는 이런 것이  되어진 그것으로써 내 자체가 참 땅에 속한 이런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졌던, 하나님의 법을 대립하고 세상법과 일치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법과  일치가 된 이것으로서 나는 나대로 이와같이 있는 것, 나는 나대로 이와같이  있는 것이 하나님과 진리에 연결만 되고 거기에 소속만 되는 이것인가? 이것이  아닙니다.

 위에 보면 사람이 지은 것이, 사람의 손으로 지었다 말은 사람의 힘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니까, 하나님이  지은 영원한 처소이니까 어떻게 지으실런지? 그분은 엿새동안에, 엿새동안에 이  우주를 다 창조하신 그 능력이, 또 그때 지으신 그 진리나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진리나 능력도 같고 나오는 데도 같이 나왔고 꼭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진리가 짓는다, 하나님이 짓는다 이러니까, 엿새동안에 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그런 창조인지 어쨌든지 당신이 우리가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다는 그 덧입는 방편은 우리가 그 현실을 당해서 없어지는  현실에서 그저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 진리의  것이 되고 영감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어서, 주님이 대속하신 죄없는  것이 되어, 의로운 것이 되어, 또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되어 끝나는 것, 것이  되어 다시 이런 시험을 받지 아니하고 이 시험을 이 생명에 속한 것으로서 끝이  나는, 이것으로서 완료가 되는 이것을 우리가 원해서, 이것과 하나가 되어 끝이  나면 어떻게 만들어진런지, 하나님의 그 능하신 솜씨가 어떻게 만드실런지,  우주를 엿새동안에 만드신 그 능력 가지고 만드시니까 어떻게 만드실는지?  우리 요대로의 마치 공산주의 있던 자가 민주주의로 경계선을 넘어서 온 것처럼  요렇게 그대로의 것이 하늘나라에 그대로의 것이 될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대로의 것이 이리 옮겨질 때에는 거기에 창조하신 창조주가, 인간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가 만든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빌립보 3장에  보면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 능력으로 당신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우리를 요 현실에서,  우리 현실에서 내가 내 사욕의 것이 되지 아니하고, 내 주관의 것이 되지  아니하고, 내 자율의 것이 되지 아니하고,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의 것이 되지  아니하고, 내 사업이나 이 현실에 그 어떤 그것이 원하는 대로 내가 그것에게  속한 것으로서 끝을 마치지 아니하고, 나를 구속해 주신 주님의 세 가지 구속과  진리와 성신의 감화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이 되어져 이것들의 원하는 대로,  이것들이 원하는 대로, 이것들이 요구하는 대로, 이것들이 교훈하는 대로,  이것들이 인도하는 대로, 이것들이 명령하는 대로, 이것들이 약속한 이 약속을  바라면서 이것들의 것으로 내가 끝을 마치는 여기에 전력을 기울여서 요것  하나만을 일편단심으로 전력을 기울이는데,  그러기에 이걸 원하지 이걸,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땅에  있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 속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이것에게 속한 것으로 땅에 있는 것도 원치 아니하고 차라리  원하는 것은 이것에게 속한 것으로 끝이 나기를 원한다. 왜? 끝이 나면 이것은  진리에게 맡긴 것이요,  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에 말씀하신 것같이 '내가 의탁한 것을 내가, 그이에게  의탁한 부탁한 것을 그날까지 지켜 주실 것을 내가 믿는다.' 부탁한 것.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나 한테 맡기려면 내가 맡으마. 맡기라'  하는 때가 평소에도 맡기라고 하시지만 이제 완전히 맡겨서 당신이 완전히  책임지는 것은 언제 책임지느냐? 요 현실에 끝장날 때에 당신이 책임졌으면  완전히 책임졌고 그 안에 책임지신 것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자유성이 있으니까  책임을 지웠다가도 도로 찾는다 말이오. 도로 찾을 수가 있어.

 찾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을 져도 도로 네가 맡겼지만 찾아가려  하면 도로 되맡길 수 있는 (이걸 모르면 헛일입니다. 마구 청산유수로 좔좔  대통에 물 쏟듯이 쏟아 내려가면 뭣을 아는 줄 압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알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을 내 말로는 표시를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 영감이 와 가지고 그것을 지금 잡고 의존하는 그것이오. 녹음에 그게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다. 어리석소.)  자기가 평소에 아무리 진리에게 맡기고 영감에 맡기고 하나님께 맡기고, 사죄의  것이 되고 칭의의 것이 되고 하나님과 동행의 것이 되어서 성령과 물과 피에  내가 맡겨서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의 것이 되었다 할지라도 당장 그 시간에  도로 되찾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맡겨놨지만 내 주십시오.' 이러기 때문에 맡으시는 하나님도 이것을  최종까지 책임지고 완전히 맡기는 것으로 안심하고 맡지를 못하시고, 언제 또  달라 할런지 되찾아 갈런지 모른다 그거요. 맡긴 자기도 오늘은 맡겼는데 내일  내가 도로 원치 않아 가지고 도로 찾는 일이 있으니 내게도 안심이 안되고  하나님도 안심이 안되고 이것은 완성이 아니라.

 그러나 이 현실에서 끝나는 것으로, 당신에게 맡기는 것으로 끝나 버렸어. 나는  세상의 것으로 완전히 거기에 인연을 끊는 것으로 끝나 버렸어. 그러면 나도  뒤에 다시 반복할 수 없는, 변동할 수 없는 것으로 맡기고 당신도 변동할 수  없는 것으로 나에게 맡는 그 시간이 뭐이냐? 자기의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그 시간이라 말이오, 무너지는 그 시간.

 그러기에 무너지는 그 시간이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당신에게 맡겨 놓은  것으로서 이대로 살기도 싫다. 또 없어지는 것도 싫다. 이 두 가지 다 싫고  원하는 것은, 당신에게 맡겨 놓은 것으로 산다는 이것도 뒤에 무슨 반복이 되고  변동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도 안심이 안돼서 싫다. 이러니까 땅에 있는  것을 당신에게 맡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 끝나는 이것을 원한다 하는 이것이  여기 소원되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그러면 담대는 무슨 담대인가? 무너뜨린다, 없앤다  그것입니다. 안 준다, 무너뜨린다 없앤다 그 두 가지 공포로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고 기독자의 공포가 다 이 두 가지뿐입니다. 이 두 가지 공포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 이것 잘 건설 안되면 어쩔까?' 땅에 있는 장막집이 건설 안될까  걱정, 건설된 것이 무너질까 걱정 이 두 가지 근심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은 어떤 기쁨으로 사느냐? 땅에 있는 장막집이 다시 건설되는 요  욕망 요 재미, 건설된 이 땅에 있는 장막집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이 재미,  건설되는 이 재미 보존되는 이 재미로 땅에 있는 사람들은 살고 있고,  기독자들도 거의가 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 다시 더 건설되어서 지식 하나 있던  것이 둘 되고, 집 한 채 있던 것이 두 채 되고, 지위 낮은 것이 한층 더  올라가고, 쾌락 없는 것이 하나 더 생기고 이렇게 모든 땅에 있는 장막집이  하나씩 둘씩 더 커져가는, 구비해져 가는 요 취미로 살고, 또 요것이 없어질까  하니까 벌벌 떨다가 그것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보존되게 되었다 하니까 그  기쁨, 보존되는 기쁨 이것이 건설되는 기쁨 이 기쁨 가지고 불신자들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이것, 안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또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느냐? 땅에 있는 장막집 이것이 더  증축이, 더 개축이 안 될까 해서, 더 좋아지지 못할까 해서 이것 때문에  걱정합니다. '내가 이번에 시험에 떨어져서 한층 더 올라갈 터인데 올라가지  못할까?' 이것 걱정입니다. 또 자기가 사업을 하는데 이 사업에 재량이, 물질의  양이 더 커지지 못할까 하는 이 근심, 더 키우지 못할까 하는 이 근심, 또  만들어 놓은 것이 이것이 줄어질까 절단날까 이 근심, 이 근심이 땅에 속한  근심이요 이 기쁨이 땅에 속한 기쁨인데,  여기에 "우리가 담대하여" 이 담대는 무슨 담대입니까? 두려움이 없어진  담대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진 담대인데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 땅에 있는 장막집이 마련이 안될까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담대합니다. 왜 거기에 대해서는 담대합니까? 왜  담대하지요? 자 ○○○목사님이 깨닫는 중에는 아마 첫째간다고 할 만할 것인데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왜 담대합니까? 왜 담대하지요? 왜 담대합니까? 저  상남교회 ○조사님 왜 담대합니까? 왜 담대하지요? ○○○목사님? 네, 그 담대도  거기 속하기는 속했습니다.

 담대한 것, 첫째 담대는 과거에는 땅에 있는 장막집 이것 못 지을까 싶어서,  이것 중축 못할까 싶어서, 아름답게 더 좋게 짓지 못 할까 싶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주일도 범하고 거짓말도 하고 신조와 교리도 버리고, 예수믿는  신자라는 그 모든 자기 행위도 자기의 인격도 다 팔고 이러는 것은 이 무너질  장막집 이것 지으려고, 이것 더 아름답게 지으려고, 얼마나 급했던지 신조와  교리도 자기의 인격도 다 팔아서 좀더 사례라도 더 받고 뭐 명예라도 더  올라가고 지위라도 더 올라가고 좀 인정받으려고, 이것 마련 안될까 하는 이  두려움이 모든 세상 사람이 그 두려움 가지는데 이 두려움이 없는 담대입니다.

 왜 그 두려움이 없습니까? 이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 더해  주시리라" 이것은 우리 할일이 아니라는 것을 딱 알아 놨다 말이오. 땅에 있는  장막집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 할일이, 자기 할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가 하는고, 그거는? 전능자가 이 일을 하기 때문에, 세상이 협박  주기를 '너 이러면 땅에 있는 장막집 이것 안된다. 안된다. 이것은 협조 안해  준다. 이것 건설 안된다.' 위협을 줍니다. "야 딴소리 말아라.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 집 건설은 내게는 상관없어. 그것은 상관 없어.' '이 등신 봐요.

네가 건설 안하면 어쩔 것인데?' '그것은 전지전능자이신 신실하신 주님이  이것은 해 주신다고 했어. 땅에 있는 장막집을 위해서는 구하지도 말라고 했어.

이것은 당신이 해 주신다고 했어.' 이러기 때문에 땅에 있는 장막집 건설을  위하여 협박주는 위협주는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졌습니다.

 또 땅에 있는 장막집을 무너뜨린다고 하는 데 대해서 또 담대합니다. '이것  무너뜨려 버린다. 이것 무너뜨려 버린다. 이것 절단낸다.' 이러니까 절단낸다는  그 말에 협박을 받을 줄 알았는데, 절단 낸다고 하는 그 말에 겁을 낼 줄  알았는데, '땅에 있는 장막집을 무너뜨린다.' '아이구 무너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거 무너지면 어쩝니까?' 땅에 있는 장막집을 무너뜨린다고 협박을  주니까 그 협박에 눌려서 지금 겁을 낼 줄 알았는데 땅에 있는 이 장막집  무너뜨린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말에 겁을 내지 아니하고 지금 겁은 딴 데 내고  있습니다. 겁은 딴데 내고 있어. 탄식을 하고 무거운 짐진 것같이 지금 근심  걱정은 딴데 하고 있습니다.

 어디다가 하고 있습니까, ○○○목사님? ○○○목사님 어디다 하고 있습니까?  네. 덧입지 못하고 벗을까, '하, 야 벗긴다 한다. 이땅에 있는 장막집을 벗긴다  한다. 벗긴다 한다. 좋은 기회 만났다. 벗긴다 한다.' 벗긴다고 '벗긴다 벗긴다'  위협을 주니까 속으로는 춤을 추고 좋아하면서 이제 '아, 벗긴다. 됐다. 기회는  됐다' 이런 데 걱정이 옵니다. 뭐이냐? 요 벗길 때에 덧입지 못하고 벗을까  싶어서 겁납니다. 덧입지 못하고 벗을까 싶어서 겁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벗고저 함이 아니라' 덧입지 못하고, 덧입지 못하고 벗으면  뭐이 어쩌는데 겁이 나? 덧입지를 못하고 벗으면 어떻게 된다고 겁을 내? 덧입지  못하고 벗으면 뭣 되는데? 덧입지 못하고 벗으면 뭣이 되는데 그렇게 겁을  냅니까? 예? 뭐라 하노? 덧입지 못하고 벗으면 무슨 손해가 가기 때문에 벌벌  떠는고? ○○○선생, 뭐이지? 썩어 버린다? 여기 여반 한번 대답해 보이소.

덧입지 못하고 벗어버리면, 벗어버릴까, 벗기는 벗는데 벗는 기회에, 벗긴다고  자꾸 쌓아니까 벗어질 것 같다 말이오.

 이 벗어질 귀한 기회, 벗긴다고 하니까 벗긴다는 그 위협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벗긴다고 하니까 속으로 춤을 춥니다. '아, 벗는 기회가 되었으니까 좋은 기회  만났다.' 뭘?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덧입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제는 그 벗긴다는 데 위협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벗긴다는 그 말에  대해서는 기쁨을 가지고 담대함을 가지고,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덧입지 못할까  싶어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탄식과 간절한 소원이 이 소원이 여기 있다  말이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덧입지 못하고 벗을까 벌벌 떨고 덧입는 거기만 지금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벗긴다는 데 대해서는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 담력을 가지게  되는 그 이유, 뭣 때문에 덧입지 못하고 벗을까 벌벌 떱니까? 덧입지 못하고  벗으면 뭣 되는데? 이거라! 벌거 벗은 자!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무궁세계 가 가지고 무식한 자, 무궁세계 가서 무능한 자, 무궁세계  가서 천한 자, 무궁세계에서 권세 없는 자, 무궁세계에서 영광 없는 자,  무궁세계에서 가난한 자, 무궁세계의 것을 지금 입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땅에 있는 이대로입니까? 이것을 주면 개조를 받습니다.

전능자가 만드시는 솜씨껏 만드시는 그 만듦을 받은 이것은 가면 알지. 우리가  지금은 약속으로 믿지만 우리가 주님이 실상으로 나타날 그때는 우리가 이렇게  약속으로 받는 이 모든 것이 다 실상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우리가 지금은 문서로 영감으로 이래 받고 있지만 그날에는 주님이  어떤 주님이신 그분과 꼭 같을 줄을 안다, 그분과 같을 줄을 안다 이랬습니다.

요한일서 3장에 말씀했습니다. 같을 줄을 안다.

 그러면 그분이 받아 가지고 만들면 얼마나 잘 만들 것인가? 성경에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거룩하심같이, 하나님같이 된다 했어.

이것을 늘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거룩하심같이 깨끗하심같이 깨끗하다 하는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리 제가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그렇게 지킬  수가 있느냐? 이 말씀은 아무리 제가 위대한 인간이라도 이 말씀에게 정죄를  받아서, 이 말씀에게 정죄를 받아서 뉘든지 이제는 하나님의 요구한 법을 다  행했습니다. 할 자가 없도록 최종적으로 정죄하는 율법이다. 아무도 여기에서  자기는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을 다 지켰다고 할 수 없는, 이 명령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 정죄받는, 펠라기우스 운동 그런 사람도, 자기의 행위  완전으로 이렇게 본 그들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가  온전하냐 하는 그 말에 정죄된다. 이것은 정죄의 율법이다' 하는 것으로써  유력한 학자들의 해석한 주석을 제가 봤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구원은 얻지만 하나님같이 된다느냐?' 하나님은  안되지만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은 성경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 했으니까 하나님같이 된 것 아닙니까? 이것이 뭐입니까?  하나님이 짓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집이라" 이 하늘이 이것은 땅이고 저 공중을 하늘이라 하니까 이  공간적으로 높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오. 여기 하늘을 말하는 것은  평가적으로 높은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최고, 권능적으로 최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요 이러니까 최고의 것에서 하나님 다음가는 이것이, 성경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이라, 교회는 몸이라.

 이렇게 현실에서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집을 입는 것인데, 내가 마지막 끝마칠 때에 어디다가 맡기느냐? 누구에게  맡길 것이냐? 누구의 것으로 끝이 날 것이냐? 누구의 것으로 끝이 나느냐?  네것으로 끝이 날 것이냐, 네게 있는 욕심의 것으로 끝이 날 것이냐? 어떤  인간의 요구의 것으로 끝이 날 것이냐? 네가 끝이 날 때에 누구의 것으로 끝이  나겠느냐?  이러니까, 끝낸다 끝낸다 하니까, 끝낸다 하니까, 과거에는 안 믿는 사람들은  끝낸다 하니까 '아이구, 끝내지 말아 주시옵소서.' 끝낼까 겁이 나고, '그러면  건설을 안 시킨다. 더 확장 안 시킨다. 확대 안 시킨다. 더 증축 안 한다. 더  성장 안 시킨다.' 이러니까 '아이구 그러면 어쩔까요?' 다 머리를 숙이고 꼼짝을  뭇하는데, 성장을 안 시킨다 하는 데 대해서도 담대합니다. 이 담대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네가 그래 하면 내가 이제는 너를 도와서 더 승격하도록 내가  원조해 주지 않겠다. 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네 사업이 성장되도록 확대되도록  해 주지 않겠다. 내가 너를 그와 같이 하면 합격이 되어서 공부하도록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것을 건설하는 데에 건설되도록 건설시켜 주지 않겠다 할  때에 '이 불한당 이 가증스러운 자야! 이 가증스러운 자야 네가 건설하느냐?  너는 건설할 권리 없어. 나도 건설하지 않아. 이 건설은 주님이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담대해. 상관없어.' 이 담대가 있어야 되고,  '너 지금 건설해 놓은 그 장막집 그러면 무너뜨려 버린다.' 무너뜨려 버린다  하니까 벌벌 떨 줄 알았는데, 피부빛을 보니까 새파라이 벌벌 떨 줄 알았는데  무너뜨린다 이러니까 떨기는 커녕 기쁨이 충만합니다. 무너뜨린다 하는데 지금  마음이 딴데 가 있습니다. 무너뜨린다 하니까 지금, 무너뜨린다 하니까 얼른  지금 돌아서고 지금 기뻐서 돌아가 가지고 딴일하고 있습니다. 뭐? '아이구  이때가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을 때인데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지  못할라.' 덧입지 못하면 어쩌는데? 무궁세계에 벗은 자로 나타난다.

 이러기 때문에 덧입지 못할까 싶어 마음에 탄식하면서 무거운 짐 진 것같이  이렇게 이제는 땅에 있는 근심 걱정은 없어지고 담대해졌고 하늘에 있는 근심  걱정이 와서 그로 인해서 벌벌 떨면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근심 걱정이  되어지는, 이것이 전환되어야, 이것이 바꾸어져야 예수믿는 사람이고 이것이  결실이 있지 이것 없이 예수믿어 땅의 것 잘되도록 하려고 날뛰는 것은 저는  헛된 수고합니다. 이래 왔으면 제가 해서 된 줄로 이래 알지만 그것도  어리석었어. 제가 해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죄를 지었어. 하나님이 안  주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온전히 담대하여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고로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는 무궁세계의 제사장으로 살고 선지자로 살고 왕으로 사는 이 중보자로 살  터인데,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 살 터인데, 내가 땅 위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의  실력을 얼마나 갖췄으며 왕의 행위를 얼마나 해서 왔으며, 해 놓은 그것은  무궁세계에 나에게 세마포 옷이 될 것이고, 해 놓은 이력은 옷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내가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 한 혜택을 입은 그것들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내 영광이 될 것이고 내 아름다운 옷이 될 것이고, 이것을 연습한  그 실력, 이 연습한 실력은 무궁세계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 할 그 실력이  되는 것이니, 이 실력도 없어,  그 사람이 몸은 크기는 여섯자나 되지만 지식의 실력은 하나도 없어. 기술의  실력은 하나도 없어. 쬐그만한 요만한 것이, 요만한 것이 하나 나오더니, 전부  수백명되는 직공 수천명 되는 직공에 요만한 것이 하나 나오더니 '이래라저래라,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온 전체가 벌벌 떨고 나오라면 나오고, 몸뚱이가 큰  각기둥 같은 인간이 나오는데 '너는' 이것 시키니까 이것도 못한다 저것도  못한다 아무것도 못한다 하니까 '구루마나 끌어라.' '구루마 끌지만 길도  모릅니다.' 그것은 뭣하겠소? 다 같은 그래 몸이 커지만 실력이 없으면 그와같이  돼.

 이 모양으로 무궁세계에 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지옥의 그림자로, 하늘나라의 영광의 그림자로 수치의  그림자로, 하늘나라의 무능의 그림자로, 자기 앞에 절름발이로 걸어가는 그  절름발이를 볼 때에 하늘나라의 절름발이를 연상하지 못하고, 자기 앞에  앉은뱅이로 걸어가는 자를 보고 하늘나라 앉은뱅이를 연상하지 못하고, 땅에서  인간 중에 제일 천한 인간을 보면서 하늘나라의 천한 인간을 연상하지 못하고,  땅에 있는 아주 존귀한 자, 준비를 잘해서 존귀한 자 그자를 보고 하늘나라의  존귀를 연상하지 못하면 자연계시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가르치고 모든 자연들이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담대가 무슨 담대인가 물어도 모르는데 어찌 될겁니까? 이 담대가  있는지? 몸을 떠나고저 하는 이것이 있는지?  떠나기가 싫고, 떠나기가 싫고 떠나는 것을 좋아하고, 왜? 떠나는 이 기회에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지 않으면 헛일이라. 영원히 헛일이라. 덧입지 못하면  것되는데? 무궁세계에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자.

 그 나라에 가 보니까 기능을 하나도 입지 못했어. 지혜를 하나도 입지 못했어.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도 입지 못했어, 하나님의 신빙을 하나도 입지 못했어,  만물의 신빙을 하나도 입지 못했어. 만물의 환영을 하나도 입지 못했어.

아무것도 없어. 저 혼자뿐이라, 하나님도 본둥만둥 만물도 본둥만둥, 여기 가도  초면 저기 가도 초면, 여기 가도 필요없고 저기 가도 필요없고, 죽지는  않습니다. 영생은 합니다. 굶지는 않고 먹고는 삽니다. 인생의 가치가 먹는 데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면서 평소에 마음에 참 아프게 간절한 탄식과 소원,  탄식으로 간절한 소원,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은 탄식으로 생명에게 삼켜지기를  이렇게 계속 명상하고 명상하고 또 기도하고 명상하고 자기 혼자 생각해 보고  명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자기 현실에서 정말로 나에게 이루어졌는가  현실을 만나서 한번 실험해 보고 한번 시험해 보고, 만나니까 전체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땅에 있는 장막집 건설 안될까 떨고, 땅에 있는 장막집 무너질까  떨고, 이 바울이 담대한 이 담대의 반대의 비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자기 현실  생활,  분명히 영원히 부끄러울 일인데 '너 이렇게 부끄러울 일 하지 마라. 이것  잘못됐다. 이리 해라.' 이러면 기쁘고 즐거울 터인데 위신 깎는다고, 위신  깎는다고. 교역자에게 가 가지고 '교역자가 이런 이런 일을 잘못했다 하는데 이  일은 정말로 조사님이 이렇게 잘못했습니까?' 나는 지금 자기 살려 주려고  '잘못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잘못했으면  이것을 대중 앞에 자복을 하십시오.' '네. 잘못했습니다.' 자복까지 시키기는  시켰습니다. 시켰습니다.

 시켰는데 그것이 딱 오그라져 가지고 '하, 내가 교인 앞에서 이렇게 내가  위신을 이렇게 떨어뜨려 위신이 떨어져 놨으니, 떨어져 놨으니 내가 여기  목회하겠습니까? 어디로 이동을 시켜 주십시오.' 참 생각도 못할 썩은  생각입니다. 누구 위신을 떨어뜨렸소? 잘못하는 그놈 위신을 떨어뜨렸지,  잘못하는 그놈을 절단을 내고 박살을 내 버렸고, 그러니까 잘못한 그놈이  옛사람입니까 새사람입니까 ○○○씨, 옛사람 그놈을 절단냈으니까 새사람은  일어났소, 좋겠소 안 됐겠소? 좋지.

 이러니까 자기 주장과 사상은 '아, 조사님도 저 보니까 목사님 와 가지고  조그매 잘못한 것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는 것 보니까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  있으면 이거 사과 안 하면 안 되고 잘못했으면 조사님도 사과하는데 잘못하면 이  수치가 얼마나 되겠느냐?' 이다음에 자기가 잘못하는 걸 없애는 직책인데  잘못하는 것이 없어지니까 얼마나 일 춥니까?

 여러분들, 오늘 아침 이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우리는 어떤 담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비겁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지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담력을 바꿔야 됩니다. 이 공포와 비겁을, 이 공포심, 이 공포심을 바러야  됩니다. 바울에게 공포심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소? 있었소? 공포심이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탄식하면서 항상 죽을 지경입니다. 공포심이  있었어. 공포심이 있는데 또 여기는 왜 담대하다 합니까? 그러면 담대함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담대를 우리가 가지고 있고  어떤 공포를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인가? 우리는 혹 바울과 정반대의 담대와  반대의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반대의 것 가지고 있으면 옛사람입니다.

 이것을 암만 말해도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딱 오그라지지 않는  것 보니까, 공포가 생겨져야 될 터인데 공포가 생겨지지 않소. 그 담대는 다  땅에 속한 담대에 지나지 못합니다. 지금이라도 공산주의가 밀고 내려왔다  삼팔선이 터졌다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상이 새파래질 터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담대한 담대는 다 딱 오그라질 담대인데, 내가 보니까. 사도 바울이 담대한  그 담대가 아니라. 그 담대를 지금 갖추어야 됩니다. 그 담대는, 그 담대는  하늘에 속한 이 두려움에 공포에 맺어지는, 이 공포에서 맺어지는 담대입니다.

이 공포가 없으면 그 담대는 맺어지지 않습니다. 담대가 없는 것은 이 공포가  없다는 증거요.

 오늘은, 오늘은 이 공포가 있어야 되는 우리들입니다. 벌벌 떨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뭐? 세상 건설 안된다고? 아니오. 세상 것 무너질까?  아니오. 벗은 자들로 나타날까 떱니다. 그 기회에 덧입지 못할까 떱니다.

탄식하면서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덧입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탄식하면서 무거운  짐진 것같이 되는 것은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 위해서, 그것 못할까  싶어서 떨립니다.

 그런고로 지금은 한 말로 말해서 땅의 복음과 하늘의 복음이 종류가 다르니  땅의 복음을 벗고 하늘의 복음으로 어서 바꾸어 가져야 되지 땅의 복음 가지고  아무리 큰소리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요만한 조그만한 일에 땅의 복음이 오니까  땅의 복음은 좋아하고 기뻐하고 막 환영을 해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제가 양도천목사의 주최로 한강에, 그때 10만명이라 하는 것은 역사에 없는  모임입니다. 지금은 뭐 백 만 명 뭐 뭐 지금은 뭐 얼마 오 백 만 명 이래 쌓는데  이렇지만 그때 10만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딴데는  물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모임이 없었습니다.

 이랬는데, 그렇게 은혜를 받기 위해서, 변영태 장관의 부인이 말하기를  '보이소. 저렇게 저래 진리에 갈급한데 어쩌려고 서울 안 올라오고 그럽니까?'  이럴때 내가 말하기를 그렇게 대답했소. 그때 나도 뭐 그거 생각 못하고 그런  대답 했소. '거기에 10만명이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든지 가서 하늘의 복음을  전하면 세 시간 전하면 거의 다 달아나 버릴 것이고, 거기서 혹 처음으로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은 남아 있을는지 몰라도 거기서 은혜받겠다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세 시간만 하늘의 복음을 전하면 다 도망쳐 버리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늘의 복음을 원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압니까?  집사님조차도 그런 사람입니다.' 내가 그분에게 ○○교회인가, 그때 현장로님이  목회하는 그 교회 가서 집회를 하면서 그 사택에서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목회자들이 해도 이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어쩌든지 큰 교회나 가기를 원하고 뭐  인기 끌기나 원하고, 이렇게 저렇게 거짓말을 하고라도, 누구를 매장을  시키고라도 자기 인기나 끌고 그것이 전부 땅의 복음 아닙니까? 그게 땅의 소망  아니오?  "온전히 담대하여" 이 바울이 두려워한 이 두려움과 바울이 담대한 이 담대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이것을 바꾸어야 되지, 세상 사람들이 가진 담대, 세상  사람들이 가진 공포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내나 그  사람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 벌써 설교를 한 시간 반을 거의 했어. 이래도, 이래도 못 깨달으면  희망은 없습니다. 이래도 깨닫지 못하고 이래도 작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안해  주시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앞에 설 때에 이 담대가 있어야 됩니다. 공산주의 앞에 설 때에 이  담대가 있어야 자기 신앙생활이 헛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인데 공산주의 앞에 이  담대가 있으려면 이 담대가 열려지는 나무는 무엇입니까? 이 담대가 열려지는  나무는 탄식하며 간절히 사모하는 것,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탄식되어지는 것  이것이 없으면 그 담대는 만들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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