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 탄생

 

1985. 12. 24 화새벽

 

본문:누가복음 2장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늘에 속한, 영계에 속한 천군 천사와 그외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다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하늘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는 그 찬송이 충만했습니다. 또 이 물질계인 땅에도 기쁨과 평화가 충만했습니다. 이것은 사망의 정반대입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사망에 속한 것은 원망 불평 낙망 훼방 대적 복수 사망 이런 것들이고, 이것은 다 사망에 속한 것들이고, 그것의 정반대는 감사 기쁨 평화 생명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크게 나눠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이 두 가지라 이렇게 할 수 있고, 또 모든 존재들이 다 좋아하고 기뻐하고 행복스러워지고, 또 모든 존재들이 다 불만하고 불평하고 불행스러워지는 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다 이 두 가지 길에서 모두 다 싫어하는 것이 그 나쁜 그 길을 다 싫어하고 모든 사람들은 다 좋은 그 길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길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는가? 예수님 한 분이, 예수님은 신성은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죄만 없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신성과 인성, 신인 양성 일위의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이 신성은 하나님의 본체신데 위로 아버지를 위하고 아래로 모든 피조물을 위해 당신이 낮아지셔 가지고 피조물 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오셔 가지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위로 아버지 위하고 아래로 모든 피조물 위해서 다 희생했습니다. 다 투자했습니다. 이것 가지고 하늘과 땅에는 이렇게 행복과 생명과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차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 외부만 요렇게 알고 그 내면을 확실히 논리되지 못하면 그 힘이 가다가 중단돼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신성이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셨고, 또 신인 양성 일위로 계실 때도 아버지의 뜻을 털끝만치도 거스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또 아버지 앞에 당신 마음대로 뜻대로 소원대로 한 일도 주장한 일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엄격하게 전부를 다 들여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섬기는 일 했습니다.

여게서 우리가 하나 깨달을 것은 뭐인고 하니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격위는 셋입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자신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다 하나님이십니다. 또 존재도 영원 전 자존하셨고 또 본체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 하나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 격위를 가지게 됐습니다.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이 셋 격위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이 셋 격위는 영원 전 자존하신 그 격위입니다. 그러나, 이 본체이시지마는 격위를 가졌을 때에는 그 격위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빌립보 2장 5절 이하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고 피조물 되어 죽기까지 복종했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성자의 격위를 입었을 때에 성부의 격위에 대해서 절대 복종이고 그만 위해서 그에게 속해 살았습니다. 또 성령도 그 격위가 성자의 역사를 돕는 격위이기 때문에 성령도 성자의 역사를 돕는 그 격위의 일 외에는 털끝만치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여게서, 하나님의 그 본질과 본성은 일단 자기가 가진 지위, 자기가 가진 지위에는 의무와 책임과 모든 본분들이 있는 것인데 거게 대해서 엄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체니까 뭐 성자의 격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렇게 위 아래를 따질 게 뭐 있겠나 했지마는 거게는 절대의 위 아래를 따졌습니다. 여게서, 하나님의 그 질서의 본질을 우리가 여게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 질서 지키는 걸 여게서 볼 수 있고, 거게서 한 걸음 이제 나와서 왜 하늘의 그 기쁨과 평화와 감사와 영광이 충만했고 모든 이 물질계인 이 우주에도 감사와 기쁨과 평강이 충만했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한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역사가 어떤 건가? 그 범위나 또 종류는 한 없지마는 한말로 말하면 당신은 당신의 가진 그 전부를 다 가지고, 당신은 당신의 가진 온갖 전부를 다 가지고 둘을 위해서 다 투자했습니다. 위로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분의 명령대로 따라서, 한말로 말하면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또 아버지 하나님을 위함이 되는,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당신에게 맡겨 주신 그 사명인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구원하시는 이 일, 피조물 위하는 일 이 일을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가진 것 전부를 다 기울여서 이렇게 투자했습니다.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늘과 이 물질계, 하늘과 땅에 감사와 기쁨과 모든 평화와 생명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도 행복이요 땅에도 행복이요, 아버지도 행복이요 모든 피조물도 다 행복이었는데, 그러면 당신은 어찌됐느냐? 당신은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우편을 점령하게 됐고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가지셔서 홀로 하나님노릇을 해야만 하는 그런 지위와 권세를 가졌습니다. 이래서, 인자됨을 인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다 단독 가지셨고, 또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고 영원히 맡아서 봉사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여게서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가지시고 당신이 위와 아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기울였을 때에, 기울였을 때에 하늘과 땅에는 이렇게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생명이 넘친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우리의 남은 생애 방편으로 삼는 것이 제일 첩경되는 바른 방편입니다. 요 생활 방편을 우리가 삼는 것이 요것이 첫째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이 생활 방편과 정반대되는 방편입니다.

마귀라든지 악령이나 악성이나 모든 피조물의 그 생애의 방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자기를 위하여 자기 위 아래에 있는 모든 것으로 자기를 위하는 것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 이 사망의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방편은 살겠다고 사는 방편이나 그 방편은 행한 것 전부가 다 사망뿐이지 하나도 생명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게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 첫째 아담에게 속한 모든 생애 방편은 타락한 천사에게 속한 생애 방편인데 타락한 천사가 이 생활 방편을 썼고, 또 그후 아담 해와가 그 생활 방편을 써서 이 사탄과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전부도 다 이 생활 방편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 생활 방편은 전부가 다 죽는 생활 방편이기 때문에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죽었고,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죽었고 점점 죽는 거 외에는 이루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게서,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이 생애 방편을 당신이 먼저 행하시고 이 방편을 첫째 아담이 첫째 아담에게 소속한 자손들을 그렇게 한 것처럼 둘째 아담도 당신이 이 둘째 아담의 생애 방편을 취하시고 모든 소속한 자들로 하여금 이 생애 방편을 하도록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둘째 아담에게 속해서 둘째 아담이 취하신 이 생애 방편을 우리의 생애 방편으로 삼아서 살면 영계도 물질계도 모든 존재도 다 감사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으로 영생으로 충만해지고 자체도 심히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셔서, 내나 하나님의 본 지위에 올라갔지마는 인자됨을 인해서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와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다 가지시고 모든 것은 다 예수님에게 속해서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살도록 된 이위의 성공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생애 방편은 위에도, 위에도 그 이상 없는 완전 만족의 행복이요, 성공이요, 또 아래도 그 이상이 없는 만족의 행복의 성공이요, 그 자체도 이상 없는 만족의 영광의 성공이 된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방편이 둘째 아담이 준 방편이기 때문에 이 방편을 우리 생애 방편으로 삼아서 사는 그 생애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고, 우리가 어데서든지 어떤 현실에서든지 우리가 요 방편을 쓸 때에요거 단단히 알아야 됩니다어떤 현실에서든지 어떤 환경 주위 어떤 것을 상대하든지 둘째 아담이 쓰신 이 생애 방편을 우리가 쓰면 고것은 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요 방편을 쓸 때에는 언제 어데서 쓰든지 쓸 때에는 요것은 산 믿음이 되는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산 방편을 쓸 때는 의심 없이 이는 산 믿음의 생활이기 때문에 이 행위는 전능의 행위요, 전지의 행위요, 완전의 행위요, 무소 불능의 만능의 행위요, 완전 승리의 행위인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믿어서 어떤 현실에든지 요 방편을 취해서 요 방편 생활할 때에는 우리는 담대히, 요거는 산 믿음의 생활이기 때문에 요 생애를 나아갈 때에 가로막는 것이 뭐 크든지 작든지 방해물이 어떻든지 또 그 일의 중량이 크든지 무겁든지 그런 것은 우리가 상관치를 말아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요렇게 산 믿음으로 사는 요 생애는 전능, 전지, 창조의, 이는 만능의, 완전 승리의 이 행동이요, 이 실력이요, 이 직위요, 권위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는 그것이 산 믿음으로 들어갔던 거와같이 우리도 둘째 아담의 요 생애 방편을 어떤 현실에서든지 취할 때에는 요것이 산 믿음이 되는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진 것인 것을 우리는 믿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믿으면 이루어지지마는 믿지 안하면 헛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가치나 공로나 그런 실력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해 주신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다 받는 것이고, 그 받을 만한 무슨 공로나 자격이나 수고가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믿을 때에 그 바다물은 자기의 발판이 되었고, 믿음이 흐려졌을 때에 그 물은 자기를 삼키는 것이 됐습니다. 빠져 들어갔습니다.

믿으니까 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믿고 가니까 그 바다물은 딴딴한 육지같이 돼졌지마는, 그거 주관 행위입니다. 자기 마음에 의심할 때에 그만 그 물은 빠져들어 가는 물이 된 것을 우리에게 실물로 보여 줘 가지고 우리를 경고시켰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 이것은 과연 내가 위로 주님을’ 주님은 아버지를 위했지마는 우리는 주님을 위하면 됩니다. 위로 주님을 위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곧 인간과 만물을 구원하는, 자기가 자기 위해서 하지 안하고 주님과 모든 이웃을 위해서 하는 것, 자기의 많은 기능이나 많은 지위나 권세나 뭐 소유나 어떤 것이든지 자기와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과 타를 위해서 하는 일일 때에는 그것이 산 믿음의 행위요 전능의 행위이기 때문에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그거 아낄 것 없이 있는 대로 다 기울여서 하면 곧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그거 하다가 다 기울여서 끝낸 그것이 다 이룬 것이요 완전 승리인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그 속에, 그저 일반적으로 나가는 사람은 고래 나가면 되지마는 좀 더 깊이 나가는 사람은 가다가 또 해이심이 생겨서 절망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아, 세상에는 그와같이 모두 요새도 불우 이웃 돕기라고 이렇게 말하고 하는데, 그러면 모든, 자기를 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다 이런 권위와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붉은 것을 보태면 자꾸 붉은 것이 자꾸 많아져 붉은 것이 많아집니다. 또 흰 것을 보태면 흰 게 자꾸 많아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생명으로 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그가 당신이 완전하시면서 다, 당신은 살았고, 완전이요, 무죄요, 성결이요 이렇게 완전하신 그분이 위로 아버지를 위하고 아래로 모든 택자들과 인류와 피조물을 위해서 투자하니까, 자꾸 투자하니까 그것이 생명이 되고 그것이 영광이 되고 평강이 되고 또 행복이 되었고 됐지 당신은 희기 때문에, 당신은 완전이기 때문에 완전을 자꾸 이와같이 투자하니까 완전이 되었고, 생명을 투자하니까 생명이 됐던 것입니다. 깨끗을 투자하니까 깨끗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을 자꾸 투자하면 어찌됩니까? 더러운 것 투자하면 어찌됩니까? 더러운 걸 자꾸 투자 하면은 뭐이 커집니까? 아, 말을 해 봐요. 검은 것 자꾸 주 모으면 얼마 됩니까? 검은 걸 주 모으면 희집니까 검어집니까? 검어지지 않소? 그런 건 선뜩선뜩 대답하라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모를 것 같기 때문에 내가 하나 묻는 거라. 그러기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사망 아래 있는 것이오.

죄 아래 있는 것이요 저주 아래 있는 것이요 전부 더러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암만 봉사해야 안 됩니다. 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도 자꾸 썩은 것만, 썩은 무더기만 커지고, 죽은 무더기만 커지고 죄 무더기만 커지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사죄를 입은, 사죄 받은 것과 칭의 받은 것과 하나님과 화친된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확실히 믿고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대속 받은 자인 것을 깨닫고, 이제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것이라 말은 공연히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그와같이 하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안하고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를 위해서 살라 하는, 내가 내것이 아니고 이는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제 주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주님의 지체가 됐고, 주님의 몸이 됐습니다.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대속을 확실히 믿으므로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생활 방편을 취할 때에는 우리는 그것은 전능의 생활이요, 전지의 생활이요, 그는 하늘과 땅의, 자기와 하늘과 땅 이 삼각이 다 행복과 평강과 영광으로 점점 충만해지는 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요 방편을 우리 방편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방편으로 우리가 살면서 깨달을 것은 예수님은 그는 깨끗하시고 완전하시고 생명에 충만하시기 때문에 이 방편을 취하니까 생명으로 점점 충만해지고 완전으로 평강으로 충만해졌지마는, 만일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우리들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아니하고 이런 것을 한다고 하면은 점점 더러워지고 점점 악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중심이나 자기 위주나 그런 것으로 하면 안 됩니다. 완전히 나는 주님의 피에 팔린 주님의 것이 된 주님의 것으로 해야 되지 이 땅 위에서 기독자들이, 흉내내는 이 모든 둘째 아담의 이 생애 방편을 본받아 가지고 하기는 하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와 연결을 끊고 제것으로 이 일을 할 때에는, 제 자율로 제 기분으로 제 주관으로 할 때에는 이것은 악 중에 악이요, 독 중에 독이요, 사망 중에 사망인 것입니다. 큰 해독을 이루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잘 깨닫고 하도록 합시다. 이래서, 우리는 매일 생활이 이 생활입니다. 둘째 아담의 생활이 우리 생활입니다. 그 생활에는 한 것만치 반드시 영광이나 평강이나 생명이 거게 쌓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제가 어제 어떤 교회를 물어 보니까 그 보고가 왔는데 ○○교회는 장년반이 한 팔십 명 모였고 또 주일학교가 백 팔십 명 모였고 이랬는데, 어제 그 사람들은 지난 주일날, 주일날 그날 떡국 잔치를 했더랍니다. 떡국 잔치를 했는데 아직까지 뭐, 그러니까 철이 없었을 때는 또 여러 가지 몰라도 그만, 교리와 신조가 다 안 맞아도 돼요, 그건. 그래 그날 떡국 잔치를 했는데 그날은 그렇게 그래 가지고 모두 다 분위기가 참 좋고 그렇게 했다고 말 들었습니다. 또 저 ○○○ 교회도 주일 학생은 백여 명 왔고, 또 장년반도 한 사십여 명이 모였고, 이거 뭐 아주 쉽습니다. 아, 몇십 년 돼도 안 되는데, 또 ○○○ 교회도 장년반은 구십 칠 명, 주일 학교는 삼백 명 이래 모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위에나 아래나 자체나 이 삼각이 위, 아래, 자기 이 셋이 평강과 기쁨과 영광과 생명과 이 축복으로 충만해지는 고 방편은 자기가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이 위 아래를 위해서 다 투자하면 이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것이 둘째 아담이 쓴 방편입니다. 첫째 아담은 자기와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위도 생각지 안하고 아래도 생각지 안하고 자기 위해서 산 것으로서 요렇게 좋을 줄 알았는데 전체는 다 망했어. 자체도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생활하나 그게 산 믿음이 될 수도 있고 산 믿음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결과는 한 없는 영광과 평강과 기쁨과 생명과 축복으로 넘칠 수도 있고, 외모는 그런데 되지 안하고 빠작 마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목회를 하는데, 다 같이 수고를 했는데, 다 같이 반사노릇을 하는데 외부의 생애 방편은 비슷하나 그 내부에 있어서 깨끗지 못한 거 가지고 하니까 자꾸 깨끗지 못한 것이 되어집니다. 더러운 거 하니까 자꾸 더러워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뭐 깨끗한 게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깨끗하고 완전합니다.

왜? 예수님의 대속의 것을 입어서 예수님의 대속의 것이 확실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것이 완전히 되면 우리는 완전한 깨끗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둘째 아담의 생활 방편은 상하와 자기, 삼각이 다 행복된 이 생애 방편인데 다만 우리가 주의할 것은 더러운 것으로 이렇게 하면 자꾸 더러운 것이 자꾸 모여지고 자꾸 더러운 게 커집니다. 커지기 때문에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고 배나 그 악한 결과가 맺습니다. 그러나,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 되면, 주님의 것이 됐으면 깨끗하고,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깨끗하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깨끗을 다 가지고,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이 깨끗이 깨끗이 이래 깨끗해 가지고, 온전해 가지고 이렇게 할 때에는 그 효력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먹이고도 남았으니까 오만 명 먹이면 또 백 이십 바구니가 남았을 것입니다. 또 오십만 명 먹었으면 천 이백 바구니가 남을 것입니다. 자꾸 더 남습니다. 많이 먹을수록이. 이런고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요것이 다 꼭 같은 진리입니다.

그런고로, 요걸 생각하면서, 어제도 수고를 모두 많이 하셨는데, 무슨 수고를 하시든지 수고하다가 믿음이 더해지는 방편은, 양을 먹이든지 밭을 갈든지 하고 난 다음에 ‘앉아서 먹으라’ 하지 하고 기다리면 그 믿음은 헛일입니다. 갈다가 오면은 주인 먹을 것을 예비하고 먹는 동안에 수종들고 난 다음에 제가 먹어야 됩니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우리가 아무리 둘째 아담의 생활 방편을 취해 가지고서 무슨 일을 했든지 하고 난 다음에 고다음에 ‘이만치 했으니까 알아 주겠지, 이만치 했으니까 대우해 주겠지, 이만치 했으니까 무엇이 좋은 보상이 오겠지.’ 보상을 바라고 인정을 바라는 그것이 믿음을 죽이는 행동입니다.

왜? 예수님은 얼마나 거석했는데, 그 큰 것을 큰 빚 진 자가 이렇게 무익한 종이라, 예수의 큰 대속을 생각할 때에 죽도록 충성하고도 진정은 무익한 종인 것을 깨닫고, 주인 먹을 것을 예비한다 그말은 그래 하고 난 다음에 내가 지금 무엇이 주님이 내게 맡기신 뜻이며 주의 뜻이 무엇인가 그걸 찾아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저, 하고 난 다음에는 주님의 뜻 찾고 또 충성하고 난 다음에 또 충성할 것 찾고, 충성하고 난 다음에 충성할 거 찾고 봉사하고 난 다음에 봉사할 것 찾고 주를 위해서 하고 나서는 또 주를 위해서 할 것 찾고 자꾸 이것이 연속되는 것이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지 거게서 오만한 자리에 앉으면 다 헛일이고, 우리는 또 그런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하다가 그 일에 대해서 어렵다고 낙망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 걸음은 산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전능의 능력의 걸음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우리는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 권사님 구역에 초상이 났는데, 여덟시 반까지 교회로 오시면 같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꾸 초상이 납니다. 초상 난 것은 일은 다 이제 습니다.

이제, 이제 우리가 장례만 지내면 고만 거기 대해서는 염려를 놨지마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참 문제입니다. 왜? 오늘 예수 잘 믿는 것이 내일 마귀 자식이 될 수도 있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나 자타를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 위해서는 걱정하고 항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데서든지 둘째 아담의 생활 방편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이거는 평생 잊어버리지 안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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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9 권능역사의 대적들/ 요한복음 11장 25절-44절/ 820515토새 선지자 2015.10.25
4998 권능을 얻어 증인되기/ 사도행전 1장 8절/ 84020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5
4997 권세/ 마 5장 14절-16절/ 1978년 19공과 선지자 201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