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18:21
구원의 방편
1980. 8. 6. 수야
본문 : 마태복음 14장 22절 - 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그런고로 이 본문에 기록한 여기는 우리의 구원 얻는 이치를 여러 면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다 증거 하지 않고 그 중에 몇 가지만 증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다가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혼자 산에 가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노를 저으면서 가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얼마를 떠난 다음에 풍랑이 일어서 그 배가 가지를 못하고 제자들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가지 벌써 우리나라 이 수로 말하면 육지에서 수십리 바다 깊은 속으로 배는 들어가 가지고 있지 풍랑은 점점 심히 일고 배는 목적지로 가려고 해도 도무지 가지지 안하지 이래서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고 놀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 해변 어부의 자손들인 고로 갈릴리 바다에 그 수심을 잘 압니다. 그렇게 풍랑이 일고 거기 파선이 되면 암만 헤엄을 잘 친다 해도 그런 풍랑에서는 어쩔 수 없고, 그 바다에서 고만 다 몰사한다 이렇게 얘기도 많이 들었고, 그런 것을 실지로 보기도 했고 해서 아주 심히 두려워 떨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따로 산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같이 있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럭 저럭 하다가 밤중이 됐습니다. 밤중이 됐는데 이 제자들은 그 두려움이 점점 심해지고 참 견디기 어려운 그런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 몸은 떠나 있지만 제자들과 영으로는 함께 계십니다. 제자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시고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 있는 그 배 가까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러니까 제자들은 자기네들이 그 풍랑 속에서 크게 고통 당하고 목적지에 가지 못하고 있는 그 어려움 당한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 하머나, 하머나 기다리다가 그들이 항해도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구원 하실려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에 그 제자들은 권하려고 오는 예수님이지만 저희들의 지식대로, 저희들의 지식대로 저희들의 경험대로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실려고 오신다고 하면 그들이 놀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시기는 오시는데 이 제자들 선입 지식과, 기존 관념과, 모든 경험, 또 모든 통계에 의하면 이는 사람이 물 위로 그렇게 깊은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실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물귀신 온다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이 이제는 죽겠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 가지고 '두려워 말아라.' '안심하라.' '내다.' '내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물귀신인 줄 알았은데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이제 바라보니까 고만 뭐 바다 가운데인지 바람이 부는지 어찌 되는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안하고 고만 평안뿐입니다. 그만 그들에게 평안뿐입니다. 뭐 평안과 용감뿐입니다. 완전히 두려움은 없어져 버렸고 그들에게 소망과 용감만 충만했습니다.
그것은 그 베드로가 배에서 물 위에 덜퍽 뛰내린 걸 보면 그들이 뭐 얼마나 평안했으며 담대했으며 주로 말미암은 소망이 충만한 그 용감이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요것이 본문에 기록되 있습니다.
여게서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은 이 제자들은 주님이 떠났으니까 저희들 혼자 있는 줄로 알고 그렇게 놀랬지만 주님은 몸은 떠나 있었으나 그들과 함께 계셨고 또 그들의 사정을 잘 아시고 그들에게 연단을 되고 경험은 될지언정 낭파는 되지 아니하도록 주님이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시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혹 사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자기 신체 상으로 여러 가지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온갖 어려움을 만날 때에 우리는 주님이 이 어려움을 아시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경고시키는 이 계시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해서 유익이 되도록만 우리를 구출하시는 이 주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안하지, 주님은 나를 보시고 어느 처지에 있든지 주님은 나에게 구원에 적당한 시기도, 적당한 장소도, 적당한 그 방편도 다 가지시고 가장 내 구원에 적절한 그런 시기, 그런 순위, 그런 형편, 그런 정도에 주님은 우리를 오셔서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이 형식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있어도 주님은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내게 대한 관심과 생각을 가지는 것보다 주님은 우리 각자들에게 대해서 관심이 뜨겁고, 또 모든 면이 세밀히 당신이 취급을 하고 계십니다.
또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모르고 심지어 자기의 둔한 마음이 마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자기의 둔한 마음까지 자기를 모르는 그런 은밀한 것도 주님은 떠나지 아니하시고 늘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든지, 좋은 일을 당하든지, 우리가 죄를 짓든지, 의를 행하든지, 우리 형편이 어떠한 형편이든지 주님은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살피시고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헤어날 수 없는 참 수많은 원수 속에 첩첩이 우겨싸서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수십리 그 지하에 들어 있어도, 수십 길 그 물 속에 들어 있어도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이 구원하실려고 우리를 역사하십니다.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들은 어떤 형편에서라도 주님이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떨어지는 지경은 없습니다. 역사에 지나간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런 경우에서 넉넉히 우리를 구출하시고 남음이 무한하신 주님이십니다. 같이 있던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모르는 자기 혼자만이 어떤 궁지에 빠졌을 때도 주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게 대한 모든 사실을 세밀히 당신이 간섭하시고 주장하시 가지고 구출하시려고 합니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구원에 대해서 어데서든지 절망을 가지면 이것이 큰 불신의 죄입니다. '아 내가 이 지경까지 됐으니 주님이 여기서야 나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불신의 큰 죄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일할 수 없습니다. 어데서든지 주님은 능히 나를 구출하시고 무한히 남음이 있습니다.
또 주님은 택한 자들은 어떤 반석 같은 성을 싸고 튼튼한 인간의 협조 찬동으로 인성을 첩첩이 싸고 그 속에 왕 같이 들어 앉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패역할 때에 그를 그 속에서 잡아내서, 그 속에서 잡아내서 사막에 있는 한 짐승처럼 고독한 자리에 갔다가 끌어다가 놓을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주의 구원에 능치 못할 것이 없으니 이것을 항상 믿어야 되고, 주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들이 세상 일이 뭐 물질로 튼튼한 성을 쌓아놨다, 사업으로 든든한 성을 쌓아놨다, 자기 직장으로 튼튼한 성을 쌓아놨다, 많은 인간들이 자기를 찬동을 한다 이렇게 내 성이 첩첩이 견고하니 여간 하나님을 배반하고 어떻게 해봤던들 하나님이 날 어떻게 하겠느냐? 고런 망령된 생각을 우리는 가지지 말아야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당시 세계에 제일 강대국의 대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루 동안에 그를 잡아다가 저 들판에 놔서 짐승처럼 풀을 먹고 온 전신에 털이 나고 짐승과 같이 칠 년 동안 이슬을 맞으면서 짐승 노릇을 하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러하신 우리를 극히 사랑하시고 놓지 아니하시는 무한하신 이 하나님이 우리 배후에는 계시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낭파를 당하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그를 높이십니다.
아무도 없는 밤중 바다 속이지만 주님은 연락을 아무도 한 것 없지만 당신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 아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덜 놀래게 하시고 일찍 오시지 고만큼 좀 시련을 당하고 하는 것이 제자들의 믿음에 구원에 유익되기 때문에 사경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조정하시는 이 주님이 우리 배후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걸음을 걸어가면서 어떤 환경과 배경에 대해서 염려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어데서든지 안심하고 뿍뿍 걸어갈 것입니다.
역사에 여게서는 구출된 일이 없다 한 그 속도 상관 없습니다. 주님은 능히 구출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불 속에 인간이 들어가 가지고 타는 것이 역사지 안 타는 그런 일은 없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한 이것은 성도야 세상을 네가 믿음으로 걸어갈 때 인간 이치에, 인간 통계에, 이 세상 모든 경험 체험에 절대 불가능한 그 구출도 당신은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걸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좋은 면도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망령과 패역을 부려서 나갈 때도 어데까지 높은 자라도 끌어내려서 진토에 우겨 넣겠습니다. 인간 중에 제일 천한 자의 발로 밟도록 만든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의지할 자는 이분 외에 의지할 자가 없고, 두려워할 자는 이분 외에 두려워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리석고 미련해서 이 주님을 주님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고, 주님보다 의지하는 것이 있지 이것은 다 어두운 소행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의롭게 갈라 할 때에 모든 창조물을 능가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지음 받았고 또 구속받은 이 중에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불택자와 달리 믿는 사람들이 주님을 등한히 하고 패역을 부리고 나가면 나가는 속도에 따라서 그이의 패망은 그 속도대로 이루어집니다. 고속으로 타락해 나가면 고속의 보응이 오고, 저속으로 타락해 나가면 저속으로 보응이 오는 주님이십니다.
다음으로 여게서 보여주시는 구원 도리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을 구원하려고 오시는 구주인데 그때는 예수님 밖에는 구원할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할 자가 없어.
저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이신데 왜 그들 눈에는 물귀신으로 봐 가지고 배나 두려워 기절할 만침 놀랬습니까? 저희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이신데 왜 저희들 눈에 저희들 생각에 물귀신으로 보여져서 그렇게 놀래고 죽을 지경이니까 고함을 질렀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그들에게 있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지식을 가진 그 지식이 들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로되 천부께서 허락지 안하면 그 생명이 끊쳐지지 않는다 너희들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다" 이런 말씀을 벌써 주님이 많이 하신 때입니다. 주님의 지식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지식만 저희들이 지식으로 알고, 그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결정했더라면 풍랑 아니라 우 풍랑이 와도 '주님이 허락지 안하면 우리의 생명은 꼼짝도 없다.' '우리는 머리털까지도 당신이 다 세고 계신다 했기 때문에 염려 없다.' '풍랑이 불어서 한번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물 속까지 푹 한번 들어가 봐라.' '보자 한번 주의 권능의 솜씨를 한번 구경하자'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그들이 물귀신이라고 그래 두려워 떨면서 그리 됐겠습니까? 그것은 저들에게 있는 이미 있는 그 지식이 들어서 그렇게 물귀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 위로 사람이 걸어 오다니 귀신 외에 딴게 있겠는가?' 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것을 많이 보여줬고 많이 말씀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못 올 것이고, 물 위로 걸어 못 올 것이고 주님은 물 위로 걸어 오니까 주님이다.' 이렇게 바로 깨달을 수가 있을 터인데 왜 그들이 물귀신이라고 그렇게 그 오인을 하고서 그렇게 떠들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에게 받은 지식이 아닌 인간에게 받은 지식 그 지식대로 비판하고 평가하고 그 지식대로 결정한 데에서 그렇게 된 것인 것입니다.
또 그분들이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니 주님이 되라 하는 데는 죽은 자도 살아나고 모든 다 되리라 하는 대로 다 되는데 주님이 말씀해도 안 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배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했으니 가 지는 것이 그것이 필연한 일입니다.
배 타고 물 건너로 가는 것이 죽은 자 살아나는 거 보담 어렵겠습니까? 이제 주님에게 배우고 들은 대로라면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는데 그들이 바람 보고 두려워 떨고 항해하지 못하고 여게는 물이 여러 수십 길입니다. 여기서 어부들이 얼마나 죽었다고 이런 풍랑 만나 가지고 파선만 되면 다시 살지 못한다.
저희들이 그때에 풍랑에서 두려워한 것도 저희들의 주관이요 예수님 보고 물귀신이라고 유령이라고 고함지르고 두려워한 것도 저희들의 선입적 지식의 그 주관이요.
저들이 주님이 가라고 하셨으니까 가라는 그 음성 듣고 배 탔으면 노를 젓지 안해도 갑니다. 주님이 가라 했으니 갈 것을 소망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서 이러면 배가 스스로 갈 터인데, 이것들이 배 젓는다고 날뛰다가 옛날 솜씨, 배 젓으니까 배 저으므로 가지 주님이 물 건너편으로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는 그 명령, 그 권위에서 가는 것이라는 것은 차차 잊었습니다.
잊어버리고 배가 안 가니까 오만 수단 방법 다 부리요. 부릴 수록 그들의 전 신경과, 천 힘과, 정신과 인격은 안 믿을 때에 노를 저어 가지고 건너가는 그 방편에만 집중하고 예수님도 잊어버렸고, 예수님의 명령도 잊어버렸고, 또 예수님의 저들에게 정해준 목적도 잊어버렸고, 완전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고 예수 믿기 전 저들과 저들의 행동과 저들의 기술로만 가지고 지금 배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풍랑은 더 일었습니다. 배는 더 안 나갑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걸 네게 더하시리라" "너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인 줄 아시느니라" '독생자도 애끼지 아니하시고 화목 제물로 주신 이가 하물며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공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 인도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의 생활인데, 이것은 다 없어져 버리고 인간 저들만 남았기 때문에 풍랑과 두려움과 항해 못하는 이것만 소부래기 남았습니다. 그들은 죽을 지경이요. 그 예수님은 하나도 거기 섞여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세상에서 망하는 길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명하신 것, 내 목표가 어데라는 것, 내 사명이 무엇이라는 것, 내 법칙이 내 생애 법칙이 무엇이라는 것 이것을 잡고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으로, 온전한 행위로, 자체 행위, 이력, 이 성화의 구속만을 저희 소망으로 목표로 살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 그는 일초도 허비하지 아니하고 나그네 생활로 길가는 이 행인 걸음을 걸어서 점점 구원에 도달하고 구원이 성장되 나가고 환란은 없습니다.
환란이 없다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요 앞에 두고 있을 때에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에 참 기이한 구경을 할 수 있는 기쁨의 때이었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환란이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라고 할 때에 믿음 없는 자들에게는 큰 환란이었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는 환란되지를 안했습니다. 풍랑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래보고 의지하고 순종해서 주님 안에 있는 이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자에게는 풍랑은 없습니다. 중단은 없습니다. 침략은 없는 것입니다. 침략이 그것이 협조 아닌 것 같은 협조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도라' "멸망할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 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으로 우리를 구원하는데 이 구원을 볼 때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보면 구원이기 때문에 기쁜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칙 이 진리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이 구원을 보기를 마귀가 주는 그 지식 가지고 보니까 하나님 주신 구원은 '너 멸망시킬라 한다' '멸망시킬라 한다' 이래 보니까 멸망으로 보여집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풍랑 일게 한 것도 저들의 주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하신 거는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예수 밖에서 체험, 경험, 인간들의 통계 이것은 인간을 다 멸망시키는 것이요 속이는 것이요 죽이는 것이지 하나도 살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다니엘을 시기해 가지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모략을 꾸며 가지고 다니엘을 죽이려고 그렇게 한달 동안 다른 신에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꾸몄는데 다리오 왕이 턱 넘어가 버렸다 그말이오. 이랫는데 다니엘은 죽을 지경이라. 다리오 왕은 '네가 한달 동안 기도하지 말아라.' '속으로 기도해라.' '기도하지 말라 그러면 내가 이놈들 꼬임에 넘거갔는데 내가 너를 살려 고 분을 풀겠다.' 다리오가 다니엘을 구원하는 구원이 있고, 하나님은 '다니엘아 네가 계속해서 변동 없는 기도를 계속해라.'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이 계속 기도하라는 이 구원은 다니엘을 사자밥이 되게 해서 죽이는 것으로 세상이 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까? 다리오 왕이 기도하지 말라 하는 대로 하는 거, 그거는 세상 사람이 다 봐도 다리오 왕이 참 다니엘을 살릴려고 하는 것으로 보여졌는데 하나님이 다니엘을 구원하는 그 구원 방편은 인간이 볼 때에 다니엘을 사자밥 되어서 죽이게하는 방편으로 보여졌지만 그것이 살리는 방편이라 그말이오. 결과적으로 살리지 안했습니까? 자 그래서 사자구디 들어가서 사자가 못 먹게 살아 나오니까 하나님이 다니엘의 원수를 하나님이 직접 죽이지도 안했고 저거 손에 붙여두고, 다니엘은 사자구디에 하나님 믿음으로 들어갔고 들어갔는데 사자들로 하여금 다니엘을 먹지만 못하게 만드니까 죽이기는 저거 손으로 다 죽여버렸습니다. 다니엘의 원수를 다 죽여서 사자밥이 되게하지 안했소. 하나님의 구원은 이렇습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어떤 그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이 구출하시는 그 구출은 하나님이 당신의 법에 맞도록 당신의 법에 맞춘 당신의 법을 가지고 진리 가지고 우리를 구출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 진리 가지고 구출할라 하시는 이 구출을 진리인 성경 지식을 가지고 비판해 보면 구출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성경 지식 가지고는 그것을 그 비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식의 정반대인 인간 지식을 가지고 비판해 보니까 하나님이 살리는 길은 인간들은 죽이는 것이다 이러고, 또 하나님이 죽는다 하는 건 인간들이 사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 인간들이 전체가 멸망받고마는 거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들이 어떤 그 어려움에 있을지라도 그때에 우리를 구출하시는 그 구출의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에 방법이기 때문에 그 법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판해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지식으로 볼 때에 구원이 되는 것 아닙니다.
이런데 하나님은 진리로 우리를 구원할라 하는 이 구원을 인간들이 마귀에서 나온 인간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비판하니까 이는 하나님이 날 구원하는 아니라 날 망하게 하는 것이다 하고서 이 구원을 다 버려서 인간들이 환란 가운데 구원을 못얻는 것이고, 실패 가운데 성공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고, 미혹 가운데에서 승리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령으로 그들이 본 것은 분명히 저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인데 왜 유령으로 봤느냐? 우령이 아닌데 왜 유령으로 봤느냐? 유령으로 본 그것이 그들이 이제까지 가졌던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이요. 그놈이 들어서 유령으로 보이지게 했고, 놀래게도 했습니다.
이러기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 강도라 그 말은 주님이 영감 도리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도리 외에는 인간을 전부 하나님 옆에서 범죄케 하고 내세를 다 멸하게 하고 내세보다 금세 영도 모르고 욕 창조주도도 모르고 피조물 인간의 죽음과 부활의 심판에 무궁도 모르고 현재 살아 있는 요거 이러기에 전부 속이는 지식이요 속는 지식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 외에는 우리를 살리는 지식이 없고, 옳고 바르게 지도하는 지식이 없고, 인간의 지식은 다 속이고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게 복종을 하면 이 죽은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 죽은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게 지배를 받고 이용을 당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지도를 받고 지배를 받고 이용을 당하면 이 지식이 삽니다. 그러나 이 지식이 하나님에게 생명을 얻지 못하고 요 지식만으로 날뛰는 것은 죽음 뿐이요. 섞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 외에는 사망 외에는 섞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 지식은 물리의 지식은 맞지만 인격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안하고 관련을 잘못 가지기 때문에 광도에 원자탄을 던진 그 발명가가 자숙을 하고 그 다음에 다시 과학을 손 땠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구원하러 오시는 그 방편이 그 사람이 그 말이 인간 지식으로 보면 원수같이 물귀신같이 자기 망치는 것 같이 보여, 그렇게 보여지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의 반대인 타락한 인간의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그 삐뚤어진 지식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지지 성경 지식으로 보면 틀리지 않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사업이나 경제나 가정이나 신체나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목숨이나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구출 못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이신데 구원하러 오실 때에 제가 인간 지식만 가지고 그 구원을 보니까 구원이 아니라 멸망 시키는 거 까지 보여지기 때문에 이 구원이 왔지만 사람들이 이 구원을 받지 안하고 다 막 차서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요것을 여게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몇 가지를 더 말하려고 했는데 벌써 여러분들이 더 많이 가지면 실패하겠습니다. 요것만 가집시다.
그 배 타고 가는 그들이 와 처음에는 배가 술술 잘 갔는데 왜 차차 차차 안 갑니까? 와 바람이 입니까? 주님은 잊어버리고 저희들이 나타납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그 권위는 없어지고 저희들의 권위만 나타납니다. 주님의 말슴 의지는 없어지고 저들의 수단 방법만 나옵니다. 이러니까 이것은 풍랑을 일게 하고 배를 가지 못하게 하고 그거 뭐입니까? 그것이 저들의 지식과 저들의 기존 기술과 방법 하나님 잊어버리고 저희들이 왕이 돼서 나서는 거 고것이 모든 인간의 풍랑과 실패 마찰 방어, 방해에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무엇 때문에 기독자들이 평안하게 즐겁게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두려워 떨립니까? 그들이 왜 바다 가운데서 놀랬습니까? 내나 그것도 저들의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경험, 체험, 통계 꼭 그런데 사실인데 그래도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로선 맞지 않습니다. 맞지 않소. 옛날 그 통계나 모든 것은 예수님이 없이한 것이고, 예수님이 '너희들이 지금 가라' 할 때에 없는 가운데서 '천지야 생기지라' 하니까 천지가 생겨졌는데 그 권능에 말씀인데 '가라' 할 때 가지지.
이 권능의 말씀은 그들에게 다 삭제했어. 없어졌어. 이것이 들어 없앴습니다.
자기의 주관이 들어서 신앙을 다 절단내 버립니다. 자기의 인간 지식이 들어서 하나님의 지식을 다 부인케 합니다. 인간 제 힘으로 뭘 해볼라 하는 이 망령에서 하나님 의지하는 그것이 다 절단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랬는데 그것 가지고 암만 인간 지식, 인간 기술, 인간 경험, 체험, 인간의 모든 것 다 똘돌 뭉쳐 봤자 두려운 것뿐이고 놀라는 것뿐이고 하나도 전진은 못했고 이랬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떡 들어 '내로라' 하는 주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려졌습니다. 주의 음성이 들려지니까 주의 음성에 다른 것 그때는 다 잊어버리고 주의 음성에 집중했소. 주의 음성이 들려 주의 음성에 집중 됐소.
'내로라' 하니까 주님만 바래 봤소. 모든 거 저희들의 다 '배를 이래 몰아라' 뭐 '사공을 이래라' 뭐 '바람을, 키를 이래 잡아라.' 오만 것 다 집어 던져버리고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 하는 주의 음성에 그들의 모든 마음이 다 집중되서 주의 음성에 집중됐소.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주님을 바라보는데에 그들의 시선은 집중됐습니다. 저들의 감각과, 저들의 시선과, 저들의 욕망과, 모든 전 인격이 주의 음성과 주님에게 집중되었을 때에 그때 얼어난 뭐입니까? 그만 평안입니다.
당장 두려움이 다 어디로 가 버렸소. 아 베드로 척 있다 말하기를 '아! 주여 나를 물 위로 오라고 한번 명하십시오' 주님의 명 아니면 동하지 못할 줄 알고 주님의 명 아니면 명령에 못할 거 없다 하는 걸 자신이 생겨졌어. '오라' 물 위에 터벅 내려섰어. 당장 변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인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 영감 도리와 주님에게 우리의 전 인격이 집중될 때에 모든 문제는 해결입니다. 평안과, 담력과, 용감과, 공연이 위안제 주관 행동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능력이 함께 해 풍랑이 잔잔하지 안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이 지식을 바꿔야 합니다. 지식을 바꿔서 무엇이든지 성경대로 생각합시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비판하고 성경대로 소원해요. 성경이 소원하라는 것을 소원하지 안하고 천하 인간들이 다 소원하라 해도 소용 없어.
우리는 그대로 따라 가면 죽어. 성경이 소원하라 하는 것이면 소원하고, 성경이 소원하지 말라는 것이면 소원하지 말고, 성경이 복되다 하면 복된 것으로 알고, 성경에 복되지 안하면 복되지 안한 것으로 알고, 성경이 안 죽는다면 안 죽는 걸 알고, 세상이 아무리 산다 해도 그건 소용이 없어. 성경이 죽는다면 죽는 줄 알아야 돼요. 성경이 말씀하신 요대로 자기는 아는 요것이, 요것이 기독교의 기초적인 구원입니다. 이대로 자기는 아는 요것이, 요것이 기독교의 기초적인 구원입니다. 이대로 알고 그대로 살면 돼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꾀가 많고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속아 놓으니까 에누리 많이 하고 꾀 많게 고렇게 제 꾀대로 제 생각대로 날뛰는 자 저만 속습니다. 이래 가지고 일생을 속고 마요. 밥이야 먹고 살지. 하늘의 것이 이루어져야지요. 제가 돈만 보고 아당아당하니까 돈이 온 줄 압니까? 하나님의 정한 액수 외에는 하나도 못 옵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그렇게 안 살아도 하나님이 정한 금액 고 액수는 그대로 꼭 오고야 마는 것이요. 저만 죄짓지.
(기도)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의 인도만 따라서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고 행할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성령님으로 감동시켜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