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근원

 

1981. 11. 23. 월새

 

본문 : 에베소서 1장 3절 - 12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선생왔어? ○○○, ○○○목사님 사모님 안 나왔습니까? 내가 묻는 것은 이런 교리를 말할 때에 잘 들어서 그러면 ○목사님이 왔을 때에  도움이 되겠다 해서 그래 내가 묻는데 안 나왔구만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또 자존하신 사랑이, 또 자존하신 기쁨이, 자존하신  뜻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했다' 말은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기를 그리스도적으로 깨끗하게 그렇게 하려는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했다' 그말은 그 목적이 그리스도같이,  예수님같은 자, 그리스도같은 자 되게 하려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이요 영원전 이름입니다.

또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계신다" 하는 이 말씀도 신구약 성경 말씀이 아니고  영원전 하나님의 자존하신 자의 이름입니다. 자존하신 자의 이름을 성부라  성자라 성령이라 여호와라 또 그리스도라 말씀이라 이렇게 성경에 나타나 있는데  이는 다 한 하나님이시요. 본체는 하나신데 이름이 여럿이고 또 위가  여럿입니다. 그 위가 삼위로 되어 있는데 이름은 여럿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또 말씀이라 사람되어 오신 후에는 예수님이라 그렇게 성경에서  구분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이라 말은 뜻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그 이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 그리스도는 영원 자존하신 분이 목적을 정하실 때에 그 목적을 어떤 목적으로  정했느냐? 목적 정하실 때에 그 목적을 그리스도적인 목적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적인 목적으로 정했다' 말은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이 도성 인신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님이 세상에서 삼십 삼 년 사 개월 동안 일하시고 그 다음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셔 가지고 영원히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어떤 역사를 하시느냐? 그리스도의 역사를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 뜻을 아무도 몰랐으나 그저 기름부음이라는 말인데 그 뜻이 신정  국가인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 때에 그 직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때에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야 제사장이 되고 또 기름을 부어야 선지자가 되고 기름을 부어야  왕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 기름부음은 곧 제사장과 선지자 왕으로 장립시키는 그 역사를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역사라.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그렇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자존하신 분이 목적을 정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정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했다' 그말은 그 정하신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그리스도의 그 직분에 성질, 그리스도의 그 직성대로의  자들을 만드실려고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또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예정하신 대로 창조되어 있는 이것을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또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섭리하시는 그 섭리 안에 그 전에 목적을 정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한 이 그리스도에서 사람이 되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제 이 성자가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오신 분이 곧 그리스도가 사람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 이름을 '메시아라 하라.

임마누엘이라 하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정해줘서 나타냈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기록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라고 이렇게도 기록될 때가 있고  또 "그리스도 예수" 라고 그렇게 기록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라고  기록된 것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도성 인신해서 사람에게 나타나셨다 하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실 그 이상의 그 근원부터를  순위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서 말할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라. 그리스도  예수의 역사라' 이렇게 말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 라고 이렇게 나타낼 때에는  예수님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난 다음에 이 공로를 밑천 삼아 가지고 구원을  하되 '어떤 성질의 것으로 어떤 종류의 것으로 구원을 하시나?' 그리스도의  종류의 것으로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드신다. 그리스도의 역사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역사로 만드신다 하는 그런 뜻인데 그말은 기름부음의  역사를 역사로 만드신다.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만드신다' 그말은 제사장으로  만드신데 선지자로 만드신다, 왕으로 만드신다 하는 그런 공로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 이루어지는 그 과정을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 그렇게  말했고 또 예수님이 도성 인신하신 그 근원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 예수" 라  그렇게 성경에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섭리 중에 예수님이 도성 인신하셔 가지고 우리의 대속을 했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잘못 들으면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그 하나님과의  존재적으로 그 존재적으로 시간 차이가 있는가? 순위의 차이가 있는가? 또 무슨  권능이나 영광이나 존귀나 이런 면에 차이가 있는가?' 이렇게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워서 다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요. 또 그 본체도 하나신데 그의 위는 삼위요 이름은  여럿입니다. '그 이름은 위나 같은 것이여서 이 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 가지고 일하는가?' 나타나 가지고 역사하시는 그 역사대로의 이름을  하나님이 나타냈습니다. 이 이름을 가진 하나님으로 나타낼 때에는 그 이름에  이름과 같은 역사를 했고 또 저런 이름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그 이름으로  나타나신 그 이름과 같은 역사를 하나님이 하신 것뿐이지 하나님은  한분뿐이십니다.

그러기에 내나 영원 자존하신 분, 자존하신 분이 사람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분이 '이분은 자존의 사랑, 자존의 기쁨, 자존의 그 뜻  이렇게 네 가지로 말하니까 네 가지가 종합해 가지고 된 분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쉬우나 이 네 가지로 말하는데 이분은 이 네 가지가 하나입니다.

단일성의 분이십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이 자존하신 뜻이요. 자존하신 뜻 그가  내나 자존하신 하나님이요. 자존하신 사랑이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뜻이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요. 내나 한 하나님이신데 그렇게 역사하는 그 속성을 말할  때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이렇게  자존하심에서 시발된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이 자존하신 분에서 시발된 이  구원인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해야 되고, 그러기에 다른 종교나 그런 거와  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이종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또 종교보다 좀 작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상들이 있고 또 사상이라고 그렇게 사상은 사상이지마는 사상 축에도 가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는 그 마음  중에 좀 간추려 가지고 좀 큰 마음을 가르쳐서 유명한 가르쳐서 사상이라. 또  사상은 수없이 많지마는 사상 중에 좀 더 권위가 있어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점령하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서 종교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불교라는 그 종교나 어린 아이가, 이 아이는 이 마음 가지고 있고  저 아이는 저 마음 가지고 있는 것이나 같은 종류들인 것입니다. 같은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다 같은 사람의 마음이지마는 이 사람의 마음은 좀 거리가  있어가지고 많은 사람을 점령해서 제 마음과 서로 공통되도록 이렇게해서 마음과  뜻이 합해지도록 이렇게 만들고, 어떤 자는, 못난 자는 자기 마음 하나를 가지되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지 모든 사람은 그 마음은 멸시를 받아서 한 사람도 점령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두 사람을 점령해서 저거 내외는 그 마음이 한 마음  한 뜻이 딱 돼가지고 있는 한 사람, 점령한 사람 있소.

어떤 사람은 한 사람 부부는 점령했지마는 부부 그것도 점령하지 못해서 자기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아내 마음은 아내 마음대로 또 어떤 사람은 좀 힘 있으면  부부의 마음이 점령이 됐고 또 그 다음에 좀 힘이 있으면 가족들의 마음들은  점령이 됐고 또 좀 더 그 실력있는 사람은 그 동리나 지방이나 사회에 마음들은  점령을 해 가지고 하나를 했고 이 그보다 더 거석한 사람은 그 나라의 여기  저기에 퍼져 있지마는 백 명이고 이백 명이고 그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을 해서  자기와 같은 사상이 돼서 많은 사람들을 점령했으면 그것을 가르쳐서 이제는  '사상이라. 개인 마음이라. 곧 사상이라' 이렇게 말하고 그것보다도 그것이 일  년만 아니라 십 년, 백 년만 아니라 그 시대만 아니라 그 다음 시대를 흐르면서  역사적인 권위를 가지고 이렇게 활동을 했을 때에 그것을 가르쳐서 종교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종교라는 그 모든 종교들은 그 사람의 어떤 사람의 마음에 유력한 그  마음들을 마음들을 말해서 그것을 '종교라 이종교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하실 때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하실 때에 그것이 다 한꺼번에 같이 창조된 것이요 또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실 때에 예정의 순서대로 그것이 자꾸  진화도 돼나가고 성장도 돼나가고 확대도 돼나가고 이 하는 것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정하신 그 순위대로 또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창조된 그것들 중에  하나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도, 이 기독교와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이종교나 모든 사상이나 모든 주위나 모든 예술이나  학문이나 하는 그런 것들은 어데 속했느냐 하면 그거는 움직임에 속한 것입니다.

움직임에 그거는 움직임에 속했고 그건 존재에 속한 것이 아니고 그건 움직임에  속한 것인데, 그 움직임에 속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정하신 그 예정대로 그것이 움직여서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또 존재는 이런 형체를 가졌든지 저런 형체를 가졌든지 신령한 형체를 가졌든지  물질의 형체를 가졌든지 보이는 형체를 가졌든지 보이지 않는 형체를 가졌든지  보이지 안한, 보이지 않는 형체라 하면 뭐 '보이지 않는 형체가 뭐인가?' 혹  의문 가질 것을 보이지 않는 형체라면 우리 몸에도 힘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힘인데 이 힘도 보이지, 육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육의 생명을 창조하신 것이지마는 물질의 신비한  것인데 물질의 신비성을 가지고 창조가 된 것인데 이 생명이라 하는 것도 제일  중요한 것이지마는 힘있는 것이지마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 보이지 아니하든지 보이든지 그 실존되어 있는 그 실지로 그 존재되어 있는  실존되어 있는 이것들을 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인데 이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요, 모든 사람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그  주위나 이 모든 정치나 이런 것들 이것은 다 운동속에 움직임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 예정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 이  예정대로 이것들이 움직일 때 그것을 가르쳐서 종교라, 사상이라, 철학이라,  정치라, 모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들이 언제 있었느냐? 존재적인 존재적인 그 순서로, 존재 순서로  말하면 이것이 언제 있었느냐? 우리의 구원인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이 목적을 위해서 예정한 그 예정 속에 든 것들인 것이며 또 이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신 그 창조 속에 든 것들이지 그것이 우리의 구원인 이 기독교와  유사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독교를 위해서 있는 것들인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이 근원이 어데서 부터인가?' 이것을 언제든지 기억하고  우리의 구원은 거기에서 부터 근원이 되고 그 시발된지 오랜 후에 우리가 시험을  받았고 그 목적 안에서 지음을 받았고 또 예정대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 행동에 이렇고 저렇고 하는 데에서 이 구원이 거기에 근원 돼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우리가 내게 대해서는 예정이 어찌 되었는가 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세상살이 하는 데에서 과거가 어떻게 예정됐다 하는 것을 다소 짐작할  수가 있고 또 이 세상살이에서 앞으로 무궁세계에 내가 어떻게 예정돼 가지고  있겠느냐 하는 그것을 이 한 토막 세상살이에서 다소 우리가 짐작하고 추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의 이 근원을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하고 이 근원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생각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소원도 가지고 담력도  가지고 힘도 가지고 또 역사도 해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는 우리의 구원의 이  광대함을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 구원의 광대함. 제가 기도할 때에 '우리 구원의 광대함' 이라는 말을 종종  기도하는데 그걸 혹 '무슨 말인고?' 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이럴 때에 해석을  들으면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에 광대하다는 것은, 근원이 자존하심에서부터 시발됐으니까 그 이상이  없는 거기에서 또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존재, 우리가 만나보는 모든 존재 이  모든 존재 이것이 영계도 있고 물질계도 있고 굉장한 수만은 존재들이 있는데 이  존재가 벌써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시 가지고 이것을 대비시켜놓고  이걸 다 구비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볼 때에 이런 존재가 있으면 그만 그것이 뭐인지 모르고 크면 그 앞에다  머리 숙이고 그 앞에 벌벌 떨고 그만 거기에 속하게 되고 놀라게 되고 이 구원을  그만 집어던지 버리고 날뛰지마는 우리의 구원의 광대성이 우리 구원이 나는  몰랐는데, 어떤 것이 보여집니다.

보여지면 아! 이것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것이 지음 받아서 존재했는데 지금  내가 알고 나한테 나타나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실 때는 영원전에 지었는데  요사이 지금 원자 발명이 돼가지고 사람들이 여기에 놀래고 이 힘을 아주  무서워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는데 그것을 우리는 볼 때에 이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것이 창조된 그 하나의 원소인데, 이것이 또 하나님의 예정하신 그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이 광대함을 우리가 언제든지 믿고 있어야 됩니다.

존재의 그 수많은 존재 그것이 우리 구원 위해서 쓰기 위해서 그걸 지었습니다.

수많은 움직임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정의 그 모든 순위를 가지고 있고 모든 존재의 그 존재를 가지고  있는 이 큰 구원, 이 범위가 넓은 구원, 이 광대한 구원 또 자존하신 분에서  부터 나타나서 영원무궁까지 영원무궁 끝이 없는 영원무궁 영생, 영원무궁의  무궁의 가득찬 이 광대하고 이 큰 구원인 것을 언제든지 우리는 기억하고 이  구원을 연구하고 이 구원을 상대하고 이 구원을 바라보고 이 구원의 역사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구원에 근원과 이 구원의 그 넓이와 이 구원의 깊이, 이 구원의  길이, 이 구원의 길이는 영원무궁입니다. 영원무궁, 영원 자존, 영원 자존에서  영원 자존자에게서 부터 시작돼서 영원무궁까지가 우리의 구원에 길입니다. 우리  구원의 넓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예정 그 전부의 가득찬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의 깊이는 어데까지나 이 구원의 깊이는 자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 거기에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까지의  기쁨입니다. 거기까지의 깊은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완성하시기 위해서 목적을 정하실 때에  목적을 정하실 때에 그분 안에서 목적을 정하셨는데 그분이 누군데?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정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시는데 그리스도라는 그 하나님 역사  안에서 목적을 정하셨다.

그러면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 목적이 되어진다.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역사로, 그리스도와 같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예정하시고 섭리하시고 보존하시고 이러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도성 인신하셨다. 그리스도가  사람되어 오셨다. 이래서 말씀이 사람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났으니 곧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라 말씀이 사람되어 우리에게 나타났으니 그 이름을  그리스도라 합니다.

그러면 그런고로 이 그리스도 역사를 하시기 위해서 제 이위 말씀이신, 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인데, 그 이름을  말씀이라고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내 주셔서 우리가 그 이름을 말씀이라  이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말씀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 창조된  것이 그가 없이는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 말씀이 창조했다.

그러면 '말씀이 창조했다'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이 창조했다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으로, 또 여기에는 우리에게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 사람들이  자체가 있고 자체에 있는 그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말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볼 수 없는 하나님을 피조물들이 볼 수 있게 알 수 있도록 나타내시는  그 역사를 할 때에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 이렇게 나타내서 말씀이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 이 창조하신 것은 이 창조를 인해서, 자존하신 분이 이 창조로  인해서 자존하신 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하게 되고 또 이 모든  예정하신 그 예정대로 순위가 이루어 질 때에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 걸 우리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예정한 것이 영원무궁입니다. 단번 예정이 영원무궁해. 이러기  때문에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이요 나중이라. 시작과 끝이 없어.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그분은 언제든지 영향의 분이시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따라서 오늘 알 것은 오늘 알지마는 내일 알건  내일이 돼야 알지 내일 되기는 모릅니다. 한 시간 후에 알 것은 한 시간  지나가야 알지 그전에는 모르지마는 하나님은 그것의 제한이 없는 전지자라  그기요. 그러면 예정으로 전지자를 우리가 알 수가 있고 창조로 전능자를 알  수가 있고 이 창조로 당신이 어떠한 분인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서 알리고,  이렇게 알리나 이 모든 것은 알리기 위해서 창조도 예정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리기 위해서 거기에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요 중심은 아닙니다.

예정도 창조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어름 어름하게 이래 나타내는  하나님을 나타내서 하나님을 알리는, 하나님을 알려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에  보조 역할이 되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똘똘 뭉쳐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는 그 역사가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곧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도성  인신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에 "볼 수 없는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그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느니라" 그랬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이 누군데? 독생하신 하나님을 예수님을 가르쳐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이 하나님의 목적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정해졌는데 이 그리스도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많은 공작의 역사를 베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완성하시기 위해서 이 타락도 택자들을 완성하기 위해서 타락을 줬습니다.

하나님의 예정대로 타락이 된 것입니다.

타락은 피조물이 죽는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이것이 타락이요,  또 사는 것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을 알려준 것이 예수님으로 보이신 것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역사가 죽은 것이 살아나는 데는 어떻게 살아나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루어진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해져 가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역사가 있었으니 그 역사가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셔가지고 십자가상에서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이제는 영원한 자본을, 완전한 자본을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저촉된 것을 영원히 완전히 완전 해결을 지웠고 또  그 피조물들이 자기 뜻대로 하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말살시켜서 이 유일하신  이분의 뜻 하나에 따라 움직이는 이 역사를 완성해 놨고 또 이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원한 화친, 영원히는 변할 수 없는 이 화친으로  완성을 해 놓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이제 어제 오전에도 말한 대로 말한 대로  자존하신 분에서부터 모든 움직이는 역사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역사는 이 예수님의  대속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대속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뭣  했느냐? 예수님의 대속이 그리스도의 것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그러면 무엇인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그리스도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이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입니다.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해 가지고, 또 그 일을 우리에게 적용을 적용을 시켜  가지고 우리에게 와 가지고 완성을 일으키는 이 완성을 일으킬 그 역사가 있으니  이 역사를 맡은 하나님을 가르쳐서 "성령이라 보혜사라 성령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을 보증으로 주셨다 하는 이것이 곧 성령이 이 일을  맡으셨다는 것이오.

맡으셨는데 맡으셨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이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인 진리로 한다. 이래서 성령과 진리가 증거한다 보증한다.

그러면 성령과 진리가 보증을 해서 이 일을 완성을 하면 완성하면 무엇을  근거해서 하느냐? 피를 근거해야 한다. 피를 근거해야 한다. 사죄, 칭의, 화친  이 세 가지를 근거해야 한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근거하면 그래 가지고 재생해서 만들어낸 조성의 것을,  만들어낸 그 성품은 어떤 것이냐? 조성된 것은 어떤 것이냐? 조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 그말은 제사장의, 제사장의 형상을 본 받아  제사장의 모형, 선지자의 모형, 왕의 모형,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본체요  원형이요, 제사장의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원형이요 선지자의 원형이요, 또 그  왕의 원형이요. 원형이요 근본이시요.

우리는 그 모형으로 제사장의 모형, 제사장과 같은 모양의 제사장이 우리가  돼져가는 것이고 선지자의 그 원형대로 원형을 닮아서 그 선지자의 원형을 닮은  원형의 모형적 선지자가 돼가는 것이요, 모형적 제사장이 돼가는 것이요, 모형적  왕이 돼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을 가르쳐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예수님의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 이렇게 말씀했지마는 너무 거리가 머니까 사람들이 이 이것을 연관을  시키지를 못하고, 그 연관을 바로 체계적으로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이  기독교의 교리와 신조는 아직까지도 끝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끝을 본다는  말은 그거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왜? 무한하심이기 때문에 그때 그때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합당하게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무한 한도를 상대할 수도 있고 상대해 봤자 소용도 없고, 이 시대 그러기에 칼빈시대에 그때에 하나님이 구원할 자들에게 필요한 교리를 줬지 그  후 삼백 년이고 사백 년이고 칼빈이 혼자 담당을 시킨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후는 또 그 후 시대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 가지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잘못하면 그 시대에 하나님이 계시하시 가지고 구원하신 그 역사의  역사의 영감은, 영감은 받아 상속할 수 없기 때문에 영감은 받아 상속하지  못하고, 영감은 그때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상속되는 그런 그 피동의 존재가  아닙니다.

영감은 상속하지 못하고 그때에 역사한 그 역사한 그 형체, 역사한 그 외모, 곧  문서만 이것만 만져 가지고 전달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만 전달해 나가는데  전달해 나가면서 그 문서를 받았으면 이 문서를 깨닫게 하시는 그 영감을 자기가  받기로 이 문서를 깨닫게 하신, 깨닫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니까 그  삼 사 백 년 전에 이렇게 깨닫게 하신 그 하나님이 삼 사백 년 후에는,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이 세상도 발달이 돼서 죄악도 굉장히 발달됐고 인지도 굉장히  발달돼서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이 천국을 가려면 그 원자만 타고도 갈 수가  있는데 뭐 하필 예수 믿어 갈 것이 뭐 있느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어두어져  가지고 있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문서만 받아 가지고 오고 문서를 깨닫게 하신  그 하나님과 또 자기에게도 느껴지게 용기있게 그 생명적으로 역사하게 하시는  이 영감을 사람들이 상관하지를 안했기 때문에 그만 그 줄거기만 가지고  있으니까 쾌쾌묵은 것이 돼버리고 역사가 없다 그말이오.

그 시대에 깨닫게 해주시는 이 성령님이 오늘에도, 오늘에 또 이십 세기의  과학을 능가하고 이십 세기의 문화 속에 빠져있는, 이 음행의 포도주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이 교리와 신조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이것을  생각지 안하고 그것만 이제 자꾸 가지고 그것만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의 우상과  같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말이오.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합해서 도성 인신으로 나타났고 수많은 것이 도성 인신이라는  조그만한 구멍으로 나왔고 조그만한 구멍으로 나와 뒤로 콱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 대속의 공로가 설정됐고 이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데 대속의 공로가 오기까지의 그 밑뿌럭지가 얼마인가?  뒤로 돌아보면 그 무한한 밑뿌럭지가 있는 이 밑뿌럭지가, 밑뿌럭지가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이 촛점,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이 촛점에 집결되어서 이 촛점으로  나타나 가지고 이 촛점을 통과한 데에서 얼마나 앞으로 벌어질 것이냐? 과거의  무한한, 같이 앞으로 무한하게 벌어지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의 도는 이렇게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무한한데  이것을 사람들이 깨닫지를 아니하고 뭐 유교나 불교나 이 기독교나 이것도 한  종교 중에 하나라. 종교 통일이 돼야 된다. 종교 중에 하날. 또 그 예수님도  있던 성인 중에 하나라. 이런 망령을 부리고 이런데 여기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 그렇츰 사람들이 이거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도 적고 느끼는 사람도  적다 그말이오.

마귀는 마귀는 이 기독교의 이 근원을 잊어버리도록 하고 이 권위를 없애도록  하기 위해서 미국에는 뭐 일곱 종교인가? 그 한 집을 지어 놓고 이 문으로  들어가 이 무슨 무슨 종교는 뭐 불교, 힌두교, 뭐 유교 또 기독교, 마호메트교,  뭐 뭐 무엇인가? 내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큰 집을 하나 지어 놨는데 이 문에는 불교 들어가는 문 저 문에는, 또  유교가 들어가는 문 저 문에는, 기독교가 들어가는 문 들어갈, 들어가는 문만  달렸지 그 안에 들어가면 한 집이랍니다. 안에 통해요. 이렇게 돈을 들이 그  집이 제일 큰 집이라 하는데, 나는 미국에 가서 보지는 못했어도 내가 어뜩 말만  들었는데 어떤 선교사에게 말을 들었어. 들었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와 같다  이렇게 큰 돈을 들여서 집을 이래 지놨으니까 들어가는 구멍은 다르지마는 속에  들어가면 같다' 이 모든 종교들이 이 종교 저 종교 시비하고 있지마는 종교의  종말은 하나다. 이 큰 미혹을 줬다 그말이오.

이래 가지고 그 문선명이는 이걸, 그 마귀의 일꾼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는 종교  통일을 주관, 주관 신문이라는 그 신문은 문선명이 통일파에 나오는 신문인데 그  신문은, 종교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그 신문입니다.

인제 종교 통일을 주장하기 때문에 아!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어짜든지 지금  권위가 있다.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권위가 있으니까 이제는 '민주주의  공산주의도 통일이 되자' 하는 주장을 합니다.

어리석은 그 어리석은 것 중에 제일 어리석은 것이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역사가 주님 재림때까지 하나가 둘로 갈라지고 둘이 서이로  갈라지고 서이가 너이로 갈라지는 그것이 현실이지 갈라지던 것이 합해지는 것은  절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이런데 마귀의 착각에 미혹 받아 가지고 이와같이 돼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이 유별되어 있는 것, 아주 구별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기독교의 그 넓이와 깊이와 길이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이 조그만한 구멍으로  구멍에다가 이 큰 것이 다 머리를 넣어 가지고 요 똘똘 뭉친 촛점이 됐다  말이오. 비유하면은 촛점이라.

촛점이라는 것은 그 비치 넓은 것이 여기에서 이리 저리 하면서 다 이래 구멍에  똘똘 뭉쳐 하나가 돼가지고 퍼져 나가는 것을 흩어져 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표현해 촛점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돼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으로 영원무궁토록 무한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건설돼 나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된 이 구원이 어떤 것을 만드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이  정해짐 같이 예수로 통해서 그리스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으로서 그 하나님은 제사장의 원형이요, 원형이면 우리는  그 제사장의 모형, 선지자의 원형이면 우리들은 선지자의 모형, 왕의 원형이면  왕의 모형, 모형인데 모형이 마치 생화있고 조화같은 조화가 있어서 생화와 같이  만드는 조화 모양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모형이 되는데 뭐이냐? 그로  말미암아 그로 말미암아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되어져서 그분과 우리가  되어지는 방법이 뭘로 되어지느냐?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되어지는 방편이 믿음으로 되어져. 믿음이라는 것은 그에게 피동되는 것, 그로  인하는 것 이것이 믿음인데 그의 그 제사장 원형으로 인해서 그 원형에 연결  되어서 원형에 피동된 제사장 원형에 피동된 선지자, 원형에 피동된 왕.

이래서 우리가 영원히 왕노릇하되 그분이 보이지 않는 그 완전자로서 그분이  통치하는 그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타나니 이 통치가 억만이라도 그분의 한분의 통치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되어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이러기에 요한계시 21장으로 부터 22장까지에는 이것을 나타냈지마는 이것을  사람들이 이 넓이와 깊이를 사람들이 그 착안하지 안했기 때문에 이십 이장,  이십 일장, 이십 이장에 대한 해석이 다 그것이 원해석과는 아주 얼토당토 안한  해석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기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내 자체가 제사장이요 또 제사장 역사를 우리가 해야  됩니다. 제사장이요, 우리는 선지자요, 우리는 왕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이 모든 행동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이 하나님 역사를 할 때에는  말로 합니다. 손으로 하지 말고 하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이 무한한 측량 못할 이 배경, 이 뿌럭지에서 뿌럭지에서 연결된  우리의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연결된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데 그 연결된 말을 우리가 할  때에는 이는 세상을 깨트리고 세우고 뽑고 심으고 합니다.

이래서 요한계시 8장에 보면은 "그 그향은 성도의 기도인데 그 향을 이  향로에다가 담아 가지고 그 불을 땅에 부으니까 땅에다 번개와 지진과 뇌성이  나더라" 이것이 뭐이냐? 그대로의 성령의 역사와 그대로의 변동 역사, 그대로의  멸망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성도의 이 옳은 말이라는 거는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 그말이오. 우리가 전하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무한함이 똘똘 뭉쳐 가지고 우리에게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한한 함이 우리를  통해서 나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살리면 살고 우리가 죽이면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을 느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 죽도록 하고도 자기의 하지  못함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항상 떨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초상이 났는데 이 좋은 분인데 세상을 떴습니다. 아홉 시까지 장례차가 이  예배당으로 예배당 앞에 오니까 이 우리는 아홉 시까지 이 교회로 모이면 그때  이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 장례식에 같이 갑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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