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건설구원

 

1984. 9. 20. 목새

 

본문: 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우리 구원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이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기본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만 되어지는 것이 기본구원이요 건설구원은 이  기본구원을 자기가 입어 가지고 기본구원의 혜택을 입어서 자기가 언행 심사를  하는 그 행위를 통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구원이 건설구원입니다.

건설구원이라고도 하고 성화구원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성경에 말들을 합니다.

 기본구원은 꼭 같고 건설구원은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하는 것이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이나 늙지도 쇠하지도 죽지도  병들지도 않는 것은 꼭 같습니다. 그건 다 기본구원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가 가지고 실력도 다르고 영광도 다르고 대우도 다르고 권세도 다르고  모든 부강도 다릅니다. 모든 존재들이 환영하고 존대하고 따르고 기다리고 하는  그런 것들은 다 각각 다릅니다. 다른 것을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  성화구원이라. 또 행위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행위구원이라 말은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이라 해서 행위구원이라 말하고. 건설구원이라 말은  자기가 건설한 대로 된다 해서 건설구원이라 그렇게 말하고, 성화구원이라 말은  자기가 거룩하게 변화된 대로 된다 그래서 성화구원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초를 반석 위에, 모래 위에 놨다 하는 그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은  우리 건설구원의 기초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초가 반석도 될 수 있고 모래도 될  수 있다.

 모래로 말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켜서 모래로 말합니다. 건설구원의  근거가 피조물인 것을, 또 건설구원의 동기가 피조물인 것을, 건설구원의 그  시발한 그 움싹이 모든 피조물인 것을, 자기의 모든 비판이나 평가나 그런 것의  발원한 그 발원이 다 사람에게서 피조물에게서 시작됐으면 그것을 가리켜서  모래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돈 때문에 움직였을 때에는  그 움직인 그것의, 돈이고 기초가 되는데 돈 기초는 그것이 모래로 기초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거는 다 형편에 따라서 그것이 헐어져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행동한 고 동기가 하나님으로 인하고 영감으로 인하고 진리로  인하면 그것은 기초가 반석으로 비유한 그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설구원의 시발, 원인, 동기, 또 근거, 뭘 뿌럭지로 삼고, 뭣을  뿌럭지를 삼아 가지고 하는가 하는 그 뿌럭지 그런 것을 가리켜서 다 기초라,  그런데 그것을 이 피조물로 삼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대속의  공로로 삼는 사람도 있으니 이 세 가지로 삼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거와  같고 피조물로 삼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또, 풀과 나무와 짚으로, 금과 은과 보석으로 이렇게 한 것은 그 터 위에  무엇으로 건축하느냐? 건축하는 재료와 방편을 비유해서 풀 나무 짚, 뭐 금은  보석으로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한 것은, 자기가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은 다른 것으로  이루어지지를 안하고 자기 언행 심사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말로 가지고  건설구원은 이루어지고, 자기 행함 가지고 건설 구원이 이루어지고, 자기 행동  가지고 건설구원이 이루어지고, 자기가 비판하고 평가하고 소원하는 그런 모든  마음의 움직임 몸의 움직임 가지고 건설구원이 되어집니다. 또 자기가 들을  때에, 들을 때에 거기에 깨달아지는 시각, 들을 때에 깨달아지는 것. 또 볼 때에  깨달아지는 거, 접촉할 때에 깨달아지는 거 그런 것이 다 건설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료가 되는 것이요, 그런 것들이 다 방편도 되고 재료도 되는 것인데,  금과 은과 보석이 재료 됐다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없어지지 아니 할, 들어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도 '그것 네가 잘못 들었으니까 심판받아야  된다' 해서 삭제될 거 그런 것은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비유한 것이고,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들을 때에 바로 깨달아서 고 깨달음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들 그런 것들은 다 금은 보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자기가 접촉할 때에, 어떤 사람을 접촉할 때에 거기에서 자기가, 사람을  접촉하든지 돈을 접촉하든지 사건을 접촉하든지 접촉할 때에 고때에 자기가 바른  깨달음, 바른 깨달음을 가졌으면 바른 행동 하게 됩니다. 바른 깨달음 가지는  그것이 다 뭐인고 하니 금은보석의 건설구원의 재료라, 또 자기가 볼 때에 그걸  보고 깨달은 것, 보고 그걸 깨달은 것은 어떤 것이 바로 깨달은 금은보석으로  짓는 재료가 되겠는가 하면 그거 볼 때에 그걸 봄으로써 자기 구원에 유익이  되도록 바로 깨달은 것.

 어떤 사람이 지금 아주 텔레비전을 볼 때에, 보니까 아주 희희락락하게 그렇게  아주 참 재미있는 프로를 합니다. 재미있는 프로를 할 때에 그걸 보고서 '아,  재미있다. 나도 한번 그렇게 저래 한번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고 재미있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소망이 되어지고 그것이 부러워지고 거기에 마음이 기울어졌으면  그것을 봄으로, 봄으로 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에 '아,  사람들은 저래 가지고서 모두 귀중한 시간과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이로구나. 나도 저런 실패하는 길 걷기 쉽겠다. 대단히 위험한  세상이다.' 보면서 자기는 저런 데에 빠지지 안 해야 되겠고 저런 유혹에 들지  안해야 되겠고 저기에 재미있다고 해도 저기에 육신의 재미요 없어질 재미요,  모든 기쁨도 없어질 기쁨이지, 그게 다 불 탈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모든  그런 재료들이다 이렇게 깨달아서,  한자리에서 보는데 한 사람은 믿음을 떠나게 되고 한 사람은 믿음에 더 강하게  되고. 한 사람은 그만 세상이 불어서 세상이 자꾸 속에 쌓여지고 소원이  되어지고 한 사람은 그거 볼 때에 그것이 점점 배격이 되어지고 하늘나라가 더  사모되어지며 다 같이 보는데 하나는 믿음으로 강해지고 하나는 세상으로  강해지는 그런 차이 있는 그거, 믿음으로 강해지면은 보고 잘 깨달은 것이고,  말을 들음으로 잘 깨달은 것이고, 또 접촉을 함으로 잘 깨달은 것이고, 잘  깨달은 것은 자기 구원에 유익되도록 깨달아져서 믿음 이, 믿음에 도움이 되면  그거는 잘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재료가 금은보석의 재료가 되겠고,  그것을 보고 깨달음으로 자기의 믿음이 식어지게 되고 세상이 자기에게 강하게  되면 그것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된 재료가 되겠습니다.

 또, 자기의 그 마음의 생각이나 소원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그런 것이 다  진리대로 되고 영감대로 그것이 됐다고 하면 그것은 금은보석이 되겠고 고  자기의 깨달은 것이나 소원하는 것이나 그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을 내 속에 있는 진리와 영감이 하질 안하고 영감대로 돼서 내가  영감에게 맡겨서. 하나님에게,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하는 대로  맡겨서, 내 속에 있는 영감이 그 모든 것을 주장했고 또 나를 가르쳐 주었고 또  나타난 성경 말씀이 가르쳐 줬고 가르쳐 준 대로. 나를 지도한 것이, 생각을  지도하고, 마음을 지도하고, 뜻을 지도하고, 소망을 지도하고. 욕심을 지도하고,  희로애락을 지도하고 지정의를 지도한 그 지도한 지도가 영감과 진리와 주의  피의 능력이 지도를 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초가 바로 된 것이고 그 바른 지도에  따라서 자기가 움직인 생각을 가졌고 비판을 가졌고 했으면 그거는 금은보석으로  된 재료가 되겠고 다른 것들이 가르쳐서 됐으면 그 기초가 모래가 되겠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여서 됐다고 하면은 고거는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우리의지 정의, 뜻이나 정이나 또 자기의 의사나  그런 것이 상관없이, 희로애락이나 감각이나 기억이나 그런 것이 상관없이  순전히 되어 있는 그 구원이 기본구원이요, 나에게 있는 그 모든 내 요소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인해서 그 구원에게 피동이 되어서 구원으로 인해  가지고서 내 모든 것이 움직여져 가지고 영원히 정죄받지 안하고 불타지 안하고  잘못됨이 없는 거,-죄가 없이 된다는 말은 잘못됨이 없이 되는 것이요, 의롭게  됐다 말은 주님에게 피동대로 의는 어떤 것이 의인고 하니 하나님의 그 뜻에  피동 된 것을 가리켜서 의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칭의 주신 것은  하나님에게만 순전히 피동되어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본체라 말이오.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어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했다  순전히 아버지에게만 피동됐지 당신이 능동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만 피동된 그것이 기초요 또 거기에 피동됐기 때문에 잘못됨이  없는 그 모든 것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지 아니하고 금은보석으로 지은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을 이만하면 얼마든지 잘 분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또 기본구원은 내가 상관없이 이루어진 구원이니까 그거는 상관이  없고 꼭 같습니다. 뭐 사도 바울의 구원이나 우리 구원이나 모세의 구원이나  의심했던 그 도마의 구원이나 또 예수님을 아주 잘못 믿는, 제일 잘못 믿는 사람  그 사람의 기본구원이나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인제 건설구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건설구원은 그 건설구원이 기본구원에서 힘이 나와 가지고  기본구원에서 힘이 나온 힘이 나를 통해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 건설구원  입니다. 그러면, 건설구원이 내가 이루어 가지고 이루어지는 구원이 건설  구원인데, 내가 이루지마는 이루어지는 그것의 발원이, 원천이 그 시발이 그것이  인적 요소가 되면 그거는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것이 이 때문에 타 버리고  맙니다. 내가 하기는 하지마는 겉은 내가 하지마는 속에 하는 알맹이 그 능력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피의 능력의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난  것뿐이지  마치 내가 여기에서 말을 하니까 저 스피커 있는데 마다 말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스피커가 말한다 이렇지마는 스피커가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말이  스피커로 통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진리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내 언행 심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이 내 언행 심사의  내것이 되어지면 헛일이라 그 말이오. 내것이 되어지는 그것은, 꼭 같이  했지마는 내것으로 된 그것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 됐고, 나를 통해서  나타났지마는 내것이 아니고 순전히 기본구원. 기본구원에서 나온 거.

-기본구원은 어떤 것이 기본구원 인고 하니 주님의 대속의 공로와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우리에게 오게 된 영감과 진리. 우리가 중생된 것 이런, 중생된 것도 다  기본구원입니다.

 그러면, 이 기본구원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때에 그것이 건설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때에 한 번 나타난 것은 그것은 다시  없어지지 안하고 한 번 나타난 것은 나타난 것만치 그 근거 성령과 진리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나를 통해서 나타난 그 뒤에는 나타난 그것은 다시는  그것이 삭제되지 안하고 그것이. 나타난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안하고 그 연결이  그대로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요. 그것이 내가 건설해 놓은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건설구원을, 전부 건설구원을 사람이 행해 가지고서 이루어  놓은 것인데. 그 건설구원을 그것을 분류를 한다고 하면은 그 건설 구원을  그것을 죽음이라는 죽음에다 대고 삶습니다. 죽음이라는 죽음에다 대고.

죽음이라는 죽음의 가마 속에다 대고 건설구원을 삶습니다. 삶아 버리니까 모두  삶겨서 죽어져 버리고, 삶으니까 삶겨서 죽어져 버리는 그런 것은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재료를 삼아 가지고서 한 거고, 이 가마에다가 이렇게 삶아도  죽지도 타지도 안하는 것 그런 것은 그것이 인적 요소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적  요소, 진리의 요소, 예수님의 대속의 요소 그것으로 됐기 때문에 그거는 다  완전성이요 영원성이기 때문에 그는 없어지지 않는 것 그런 것을 가리켜서  비유컨대 금과 은과 보석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심사라는 그 가마에다 대고 푹푹 삶으니까,  하나님의 심사라는 그 청강수 물에다 대고서 들이 넣어 가지고서 이와 같이 물에  집어 담구니까 은도 타 버리고 구리쇠도 타 버리고 쇠도 타고 이 모든 신주도  타고 다 모두 탑니다. 타나 금만 안타고 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에다 대고 이렇게 심사를 하니까, 거기에 보니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공로로  된 그것은 어떤 청강수, 어떤 아주 뜨거운 어떤 용광로에 갖다 두고서 아주 태워  재껴도 금만, 금은 안타고 다른 거는 다 탑니다.

 그와 같이 용광로 소산수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있을 때에 이런  어려움을 주시고 저런 어려움을 주시고 하는 그런 것이 말하자면 청강수와 같고  소산수와 같고 또 뜨거운 불과 같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자기 의지로 만든  것이나 자기 도덕심으로나 자기 뭐 힘으로 가지고 만든 거는 다 불 타 버리고  순전히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의 능력 이 능력으로 되어진 것은 어떤 환난이  와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시험을 가리켜서 연단하는 것이라, 금을 연단하면은  잡것은 다 타 버리고 금만 순전히 남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에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할 때에 사람들은 싫어하지마는 어려움 당하는  그것은 무엇 때문에 어려움을 주느냐? 그것은 우리를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또  잡것을 털기 위해 가지고서 어려움을 주니까 그 어려움은 인본주의로 돼  버렸으면 그것이 없어져 버리고 고 순전히 세 가지의 능력으로 됐으면 그것이  타지 안하고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만나거든, 네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는데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준비를 해라.

인내의 온전함을 이루라 이것은 온전하고 구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  참사람, 순전히 신적 요소로서 이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만하고 피조물들을  능가 할만하고 피조물들 위에 피조물들을 발등상으로 두고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들이 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너를 연단해서 네게 너 아닌 거, 또 영원한 것이 아닌 것. 또 너  아닌 너 고놈은 다 죽여서 나가 버리고, 또 영원히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아닌 것은 아예 다 닦아서 제해 버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니까  기쁘게 여기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건설구원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내 지정의 내 심신  이것을 통해서 움직여진 것이라야 건설구원이 되어지는 것이지 움직여지지  안하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 보기에는 내가 언행 심사를 해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건설구원입니다. 건설구원인데, 속에 심사를 해 보니까 한  사람은 인간의 요소 가지고서 그게 됐고, 한 사람은 보니까 인간 요소로 된 게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그 신적 불변의 요소로 진리의 불변 요소로, 십자가의  대속의 영영한 불변 요소로, 완전 요소로 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는 남아 있고  하나는 없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불변의 요소로 한 것은 이런 저런, 바람 불고 비오고 창수  난다 그 말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 오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라는 바람이 불었고 또 아주 창수가 났고  이라니까 선천 고을에는 한 사람도 없이 다 믿었는데 전부 모래 위에 집을  지어서 다 둥둥 다 떠내려 가 버렸고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안했다 그 말이오. 그  신앙생활. 과거에 보면 이북에서 복음이 들어와 가지고, 이북에 복음이 많이  먼저 선정이 됐고 또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믿어 가지고 육신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이남 사람들은 믿은 숫자도 적고 또 육신의 많은 축복을 못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사 참배라는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대개  그때에 승리한 사람들이 이남 사람들이지 이북 사람들을-승리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왜? 그거는 복음을 들을 때에 복음을 잘못 들어 가지고. 요렇게 구별해서 듣고  바로 힘을 썼으면 되는 것인데 바로 힘쓰지 안하고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복  받고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 그런 것만 말하니까, 자꾸 설교를 하되 땅의 복음을  말했고 땅의 축복을 말했고 인간 요소로서 이렇게 말했지 인적 요소 속에 신적  요소를, 인적 요소가 끝나기 전에 신적 요소를 만들어라 또 인적 요소로 되고  신적 요소로 됐을 때에 시험을 만나 가지고서 인적 요소는 다 타 버리고 신적  요소만 남겨 놓고. 또 고다음에 그렇게 자꾸 만들면서 연단 속에, 뭘 만들면서  만들어 가지고 또 청강수에 또 담궈 가지고서 또 담구고 나니까 자기가 만든  것이 어북 크단 하이 어북 주먹 덩이만치 만들었는데 만들어 놓고 나중에  청강수에 담궈 보니까 똑 꿀밤만치 남아 있습니다. 나머지기는 다 타 버리고.

또. 또 좀 만들어 가지고 또 담구고 자꾸 만들어 가지고 자주 담구고 자주  만들고 담구고 이런 것은 나중에 보니까 자꾸 자주 담궈서 시련을 하고 연단을  하고 불에다가 연단했기 때문에 나중에 보니까 남은 것이 그것이 불 탈 것이  없는 순 금만, 순금으로 된 거 남았지마는 이걸 청강수에 시험하지 안하고 자꾸  아무나따나 뚤뚤 뭉쳐 만드니까 쉽기는 쉽지마는 나중에 검사할 때에 청강수에  집어넣으니까 사르르 다 녹아 버리고 아무것도 없고 나머지 속에 조그매밖에는  없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연단 없는 그 교훈을 가졌기 때문에  이북에서 있는 그 신앙들이 다 넘어졌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삼팔 이북이 저와 같이 되고 삼팔 이남이 이와 같이 된 그것이  다 그냥 일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원인 있어 결과 되는  것이고 그것이 다 필연성으로 모두 되는 것들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하시는 일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주님이 혼자 주권적으로 하시는 것이고 이  궁극적인 그 범위를 벗어 나와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필연히 그렇게 안될래야 안 될 수 없는, 그 순서를 통해 가지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을 알겠습니다.

 그러면, 건설구원도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이  건설구원의 기초가 되어 있고, 또 건설구원의 재료와 방편은 또 어떤 것인가?  재료와 방편도 역연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속과 이 진리가 내나 재료요  방편입니다.

 그러면, 뭐하려고 기초와 재료로 그렇게 말을 했는가? 그러면,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보고서 열 사람이, 열 사람이 그 같은 입장에 닥쳤는데. 닥쳐서,  '자, 이제는 신사 참배를 안 하면' 예를 들면 알기 쉽기 때문에 '신사 참배를 안  하면 너희들을 목사 노릇도 못 하게 할 것이고. 또 신사참배 안 하면 사업도 못  하게 할 것이고, 신사 참배 안 하면 감옥에 가둬서 얼마든지 고생을 줄 것이고.

너 자유대로 가정에서 가족끼리 살지도 못하고 그렇게 어려움을 주겠다.' 이렇게  가르쳐 줬습니다.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명령을 하니까 거기에서 한 목사는 자기가 깨닫기를 '나 하나 뭐, 그렇게  하면은, 신사 참배 안 하면 나 하나는 좋은 구원을 이루지마는 나 하나 좋은  구원 이루기 위해서 가정도 돌보지 안하고 그라면 교인들도 다 양 떼도 다  흩어질 터인데 양떼도 돌보지 안하고 그렇게 해야 되겠느냐? 그건 이기주의로나  하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지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이 안 된다. 이러니까 나는 신사  참배를 해도, 그 구원을 좀 잘못 이루고 좀 금덩이 구원만 못한 은덩이 구원을  이루어도 내가 교인들과 모든 가족들을 위하는 구원을 이루지 내가 나 하나  금덩이 구원 이루려고 이제 가족이고 모든 교인들을 돌보지 안하고 내가 감옥에  갇히는 그런 일 하지 않겠다.' 그렇게 깨달은 목사가 있고,  또 하나는 '내가 무슨 내 가정이며 교회며 그것이 내 힘으로 무엇이 되느냐?  내가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요, 주님이 다 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니까 내가 지금 이 신사 참배 안 하는 것이 주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주님에게 나와 내 가정과 모든 전부 교인을 맡기는  것이니까, 이것이 맡기는 것이니 주님이 잘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이 잘 해 주실  것이다 이라고 생각을 하는 고 깨달음을 가진 목사가 있고,  요렇게 아무래도 가족이나 모든 교인들이나 이들을 생각해서 내 구원이 좀 백  점짜리가 안 되고 한 칠십 점짜리가 될지라도 이들을 생각해서 나는 신사 참배를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깨달음이 있고, 또 안 하는 이것이 모든 가족이나  교인을 생각하는 것이고 내 자신도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잘 생각하고  섬기는 것이 된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도 있는데.

 요렇게 깨닫고 저렇게 깨닫고 했는데 그 깨달은 그것은 기초가 됩니까, 그것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건축 재료와 방편이 됩니까? 고  기초가 됩니까? 뭐이 됩니까? 그것이 건축재료가 된다고 생각 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아니야. 틀렸어. 고 깨달음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재료가  아닙니다. 기초입니다. 기초. 그것이 반석이라 그 말이오. 그것은 내가 깨달음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올바른 깨달음이 없어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고, 진리가  깨닫게 해 주었고, 주님의 피공로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고 깨닫게 된  그것이 기초라 말이오. 기초라는 고걸 구별해서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지금  그렇게 답을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말을 들을 때에 각도를 모른다 말이오.

말에 대해서 각도를 몰라.

 그러니까, 말을 해야 그 각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만 잠도 오고 아무 재미가  없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얼마 전에 모두 새벽 설교 또 이래 수요일  금요일 설교한 그 설교를 내가 비판을 해 줄 때에 어떤 사람은 들을 때에 '저  설교 말씀 한 거 가지고 자꾸 이렇게 비판하고 그러는가? 우리는 은혜가 되던데'  이러나 그것을 제자가 아니라면 내가 그런 것을 비판해 주면 도로 역효과가  나겠지마는 내가 가르쳐 가지고 만들어야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못한 그걸  고쳐 줘야 되지 고쳐 주지 않으면 나중에 헛일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교회가 처음에 시작할 때에 한 달 부흥 되는 사람, 석 달 부흥 되는  사람, 삼년 부흥 되는 사람 그것이 뭐이냐? 자기의 도의 깊이가 자꾸 얕기  때문에 거기에까지는 갔지마는 그다음에는 이제 뿌리를 박지 못 하기 때문에 다  말라 버리고 마는 것이라 말이오. 그래서 그것을 다 비판 하는데 그 비판에  대해서 '아 과연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이 나무를 뿌럭지만,  둥치만 이래 둥그리 띄웠지 가지 하나도 없어. 어떤 사람은 가지 굵닥한 가지만  이와 같이 돼 있지 잔가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못 삽니다. 살라면  잔가지가 새로 나야 됩니다. 이렇게, 이것을 바로 말을 들을 줄 모르면  헛일입니다. 바로 들으면 그 사람은 요동치를 않습니다.

 또, 자기가 그렇게 신사 참배를 해야 되겠다 안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하고서  자기가, 신사 참배를 하는 사람 안 하는 사람, 안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 또  하고 자유롭게 모든 걸 돌보는 사람, 이랬는데, 자기가 그렇게 신사 참배 하고  안 한 그것은 기초에 속했습니까? 건설 재료에 속했습니까? 예? 그거는 뭐이요?  건설 재료에 속했소? 기초에 속했소? 그것이 기초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아니라 말이오. 그거는 건설, 건축 재료에, 건축 재료에  속한 것이고 건축 설계나 모든 방편에 기술에 속한 것이라 말이오. 기술에 속한  것.

 그랬는데, 자기가 신사 참배 해야 되겠다고 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니까 짓기도 쉽고 커단하게 짓지마는 감옥에 갇혀도 그렇게 하지 안한  사람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사람이 된다 그거요. 건설구원에 대해서.

 이러니까, 그만하면 알 수 있지 않아요? 이래도 모르는 사람은, 이래도 모르는  사람은 그거는 자기가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알게 해 주시는 때가 돼야 되지 그리 안 하면 모른다 그거요. 이렇츰  말해도, 요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어찌 됩니까?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건설구원이 우리의 전부 아닙니까? 건설구원이  전부인데, 건설구원에는 기초면이 있고 또 건축면이 있다. 건축, 건물이 있고  기초가 있다. 그러니까, 건물은 뭣 뭣이며 기초는 무엇 무엇이라, 건물은 뭐로  하며 기초는 뭐로 해야 된다 그것을 다 가르쳤지. 이제 그러면, 기초도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그 세 가지 대속이고, 또 재료도 내나 이  세 가지입니다. 재료도 세 가지, 내나 이게 재료되고 기초되고 되는데 이  은혜가, 세 가지 예수님의 대속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와 이 세 가지 은혜가  내게 기초적인, 건설구원의 기초적인 역사를 할 때도 있고 건물적인 역사를 할  때에도 있다 요걸 알라 그 말이오.

 이제 묻기를 이거는 기초에 속했습니까? 하니까, 건물에 속했는가 기초에  속했는가 하니까 건물에 속했다고 손드는 사람도 있고 또 꺼꾸로 이렇게 손드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걸 구별 못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건축 기초가 되고 건물이 되는데 이 둘이 어디 있습니까?  이 둘이 어디 있다고 했지요? 어디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쪼갤래야 쪼갤 수 없는 것이고,  이거는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로서 영원히 쪼갤래야 쪼갤 수 없지마는 우리가  논리적으로 분류한다고 하면은 이 신구약 성경은 곧 예수님의 삼대 대속이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요 진리라. 진리가 이 안에 이렇게 한테 이래 합해진 거라  하면은 또 말이 모순됩니다. 이래 나뉘었던 거 합한 게 아니고 하나가 이 진리  여럿으로 나타났다 그 말이오.

 그런데,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있을라고 하면, 이 시간에 대속을 입으려면 어떻게 하면 대속을 입느냐? 이  시간에 대속을 입으려면 이 시간에 거기에 내게 해당된 고 진리를 내가 버리지  않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있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안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어떤 게 모시는 것인가? 내 현실에서 내 현실에 해당된 고 진리를 내가  버리지 안하고 고 진리를 모시고 진리에게 복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보호를 입는  것이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그거요. 또 내가 내 현실에서 현실에  해당된 요 성경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 이제 한 가지 남았는데  그것이 무엇에 연결되는 것이며 어떻게 행하는 것이며 무엇을 접촉하는  것입니까? 이제 두 가지 말했고 한 가지 남았는데 뭘 접촉하는 것이오? 삼위일체  하나님 말했고 예수님의 대속 말했고 이제 하나 뭐 남았어? 진리 남지  안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 자꾸 머리가 좋아집니다.

지금 제가 요번에 많이 아프고 이래 놨지마는 내 총명이나 이거 지혜나 그런  것은 아프기 전보다 훨끈 나아진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모든 걸 생각하는  것이나 이렇게 판정하는 것이나 그렇게, 이것은 늙지 안 하요. 이 혼에 속한 것.

고기 덩어리는 늙어서 비틀비틀 하지마는 이 혼에 속한 거, 벌써 마음 위치에  속한 그런 것은 늙지 안합니다. 자꾸 새로워지고 자꾸 강건해지고 장성해집니다.

 이러니까, 금방 세 가지를 말했는데 둘 말해 놓고 하나 뭣 남았습니까? 하니까  남은 걸 뭘 모른다 말이오. '뭘 말하는가?' 이러니까 자꾸 말하는 거와 듣는  말이 틀려요.

 그런데, 요번에 내가 그 설교를 모두 시켜 놓고서 듣는데, 설교를 시키려고 할  때에 내게 이상한 것이 하나 지나갔어. 지난 건 뭐이냐 하면은 뭐 저기에 아주  좋은 물이 있고. 아주 필요한 음료수가, 좋은 물이 있는데 그 물을 지금  저기에서 거기에다가 시설을 해 놓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데 '이 물을 지금 이리  옮겨야 되겠는데. 이리 옮겨야 되겠는데' 하고서 내가 옮길라고 옮길 장소를  보고 '여기에 옮겨 놔야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용을 하고 편리하겠는데  이 수도물을 옮겨야 되겠다' 하고서 옮길라 하니까 그 거리가 어떻게 먼지 뭐 그  공사비가 굉장히 많이 들겠는데, 옮길라고 이렇게 옮길 장소를 이래 보면서 내가  옮길 장소를 보다가 돌을 하나 휘뜩 뒤비트리니까 거기에서 물이 쾅쾅 나와.

내나 저 위의 물이 나온다 말이오.

 보니까 물이 나오는데, 그래 내가 있다가 말하기를 '아, 내가 옮길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벌써 주님이 이거 시설을 해서 여기다 다 시설을 해 놨구나'  이러니까, 내가 돌을 휘뜩 드니까 물이 쿵쿵 나와. 그래서 내가 옆에 있는  누구인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다가 여기에다가 관을 붙여  가지고서 모두 다 배관을 해라. 배관을 하면은 이 모든 사람들이 넉넉히 먹고  남겠다.' 그렇게 생각을 고 하고서 비몽사몽간에 그게 지나가 버렸는데,  그 뒤에 제가 설교를 시키기를 이제 ○목사님을 시켰고 고다음에 ○ 목사님을  시켰고 이렇게 시켰는데. ○목사님은 처음부터 다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서 생수  구멍을 뚫어서 이래 하고 있는 그게 조금 약간 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생수 구멍을 그전에는 몰랐는데 그 생수 구멍을 조그매 뚫었다  말이오. 뚫었으나. 뚫었으나, 이와 같이 뚫어 놓고 난 다음에 '이 생수 구멍을  누가 뚫었겠노? 이 생수 구멍보다 더 좋은 구멍이 있겠느냐' 거기에 대해서  가난성이 없어져 버렸고 그만 교만해졌다 말이오. 교만해져 놓으니까 그 생수  구멍을 뚫기는 뚫었는데 이리 저리 치우쳐 가지고 외나 진짜는 하지 안하고  둘째, 고다음에 둘째 진짜를 했고 첫째 진짜는 하지 못해서 내가 수정해 줄 때에  이거 첫째 진짜 이것이 들어야 되지 이게 안 들면 안 된다 그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보니까 자기네들이 샘을 파 가지고서 그 생수 구멍을 뚫고 있어. 그래서 그  뒤에 내가 깨닫기를 '아, 이제 이들에게 이 영감의 은혜가 이들에게도 다  전달돼서 이들도 지금 나가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일군들이 돼 나간다.' 이리  저리 시켜 보니까 그때 시킨 사람들은 모두 다 잘 해요. 다 잘해서. '이만하면  이 세상에 나가 가지고서 다 목사 노릇을 할 수 있겠다.' 이래서 내 마음에 '아,  이걸 보이는갑다. 이렇게 여기에도 시설이 돼 가지고 벌써 나도 모르게  주님께서는 다 그 안에 시설 돼서 ○목사를 통해서 뭘 나타내고 ○○○집사를  통해서 뭘 나타내고 또 ○장로를 통해서 뭘 나타내고 모두 다 교인을 통해서  나타내는 이런 역사가 이제 벌써 다 준비 돼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렇게 내가  생각을 가지고 마음에 참 흐뭇한 그런 기쁨을 잠시 누려 봤습니다.

 이렇게, 들으면 그것을 바로 들어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목사님이, 저  ○○교파, ○○교파 제일 머리되는 사람입니다. ○○신학교 교장이요 ○○신학교  이사장입니다. ○○신학교, 여기 밑에 부산에 있던 ○○신학교는 폐교를, 그  사람들이 폐교를 해 버리고, '○○신학교 우리 안 하겠다.' 폐교를 해 버리고  ○○대학으로 인가를 맡았고, ○○ 신학교는 폐교를 했을 때에 ○○○목사가  문공부에 가 가지고 얼른 줍기를 '이 ○○신학교 폐교한 그거는 우리가 하겠다.'  인가를 맡아 가지고서 ○○신학교는 ○○○목사님이 인가를 맡아 가지고  ○○신학교는 법적으로 거기 가 ○○신학교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문공부에 법적으로는 거기서 인가를 맡아 가지고서, 그전에 여기 인가했던 걸  취소했고 인가를 맡아 가지고 하는데. 실지로 ○○신학교는 그거는 여기인지  저기인지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비판하기 싫습니다. 비판하면 말썽이 있을  것이고, 이제 이 법적으로 된 거는 딱 법적으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거요.

 그분은 말하기를 그래 말해요. 여기 ○○○ 저 집사님이 저기 있어요. 말하기를  그분이 그래 말하더래요. 그때 그 밑에 그 교회에 있었었는데, 말하기를 '아,  나는' 그때 내가 조사인데 '백 조사님 설교 하나 들으면 나는 설교 삼십 개씩  한다.' 그 사람은 하나 들으면 삼십 개 한다 해요. 똑 잡아 떼 놨으니까, 그게  이렇게 이 싸 놓은 걸, 싸 놓은 걸 여기에 수박을 싸 놓은 걸 말이오, 요걸  한꺼풀 일으키기만 일으키면 요대로 일으키면 쪽 다 일어나지 않습니까?  내가, 설교를 증거하는 것은 대개는 자꾸 깊이 들어가는 걸 말하기 때문에 고  층어리를 깨달으면, 고 층어리를 깨달으면 고 층어리로 일으키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얼마든지 일어나.

 이번에 그 장로님들 집사님들 설교하는 것이 모두 다고 층어리 자기 층어리를  찾았다 말이오. 층어리를 찾아 가지고 그 층어리를 일으킬 줄을 알더라 그  말이오. 그 층어리를 일으켜 나가는 그 법을 배웠어. 층어리를 일으켜 나가는  법을 배워서 고 이치는 고 이치로써 고 이치를 이렇게 표시할 수 있고 저렇게  표시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이제 고걸  가리켜서 '생수를 파는 그 법을 배웠다.' 그래서 내 마음에 만족했다 그 말이오.

 그 ○○○목사님은 한 번 들으면 그렇다, 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오. 저도 한 상동 목사님의 설교를 그렇게 듣지 안했지마는 집회  하고 난 다음에 묻기를 '요번에 무슨 은혜 받았노? 설교 무슨 설교 하더노'  이러니까 뭐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데 그저 다 모두 좋은 은혜이지마는  외부적이고 껍데기고, 다 껍데기라 말이오. 누가 하나 말하기를 '한 상동  목사님은 자기는 평생 마태복음 28장 끝절, 20절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같이  있으리라 하는 고 말씀을 붙들고, 고 말씀을 붙들고서 모든 환난도 다 이겼다고  합디다.' 고럴 때 나는 고거 하나 딱 잡았어. '요번 집회에 요게 제일 열쇠되는  말씀이다.'고 말씀을 잡고 고 말씀을, '주님이 한 상동 목사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안하고 맡겨 놓고 그분으로 의논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과 동행하고 아무리 외로울 때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자기가 바라보면서  의지하고 동행했기 때문에 그분이 승리했다'고 하나를 가지고서. 그러니까 고  하나 가지고 뭐 설교 백도 할 수 있고 뭐 천도 할 수 있고 평생 그 한 성구  가지고도 살 수도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자꾸 깨달아져야 되는 것이지, 하나 깨달으면 그것만 또 두고  그것을 응용할 줄 모르면, 그렇지 않소? 우리가 산수를 배울 때에 계란 한 개에  한 개를 보태면 두 개다 그거 배웠으면 계란 한 개에 한 개 보태도 둘, 돌 한  덩이 한 덩이 보태도 두 덩이, 밤 한 개에다가 밤 한 개 보태도 둘, 둘이라 하는  거는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 된다는 그거는 어디든지 써먹을 수가 있어. 요 집  한 채, 한 채에 한 채 보태면 두채 사람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사람 보태면  몇 사람이오? 예? 몇 사람? 예? 두 사람, 그거 내나 어디든지 적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거요.

 이러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은 참된 이치이기 때문에 요 이치를 하나 배워  놓으면 그 이치가 요 생활에도 가서 고 이치가 나를 가르치고 있고 조  생활에서도 고 이치가 가르치고 있으니까 고 이치가 나를 가르치는 것은 천 군데  만 군태인지 얼마나 가르칠란지 모른다 그 말이오.

 그러면, 요게 말씀한 그것만, 어떤 사람 말하기를 '야 이거 계산 해 봐라'  '그게 뭐인데요?' '이 밤 하나에 하나 보태면 이거 얼마인고 계산 해 봐라.'  '아, 나는 학교에서 배우기를 계란 배웠는데, 계란은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  되지마는 이 밤, 내가 밤은 하나에 하나 보태면 얼마 되는지 나는 모르는데요.

안 배웠는데요.' 그 학생 그거는 글을 암만 해 봤자 책 보따리지 그거는 산  적용성이 없기 때문에 생명 역사가 없다 말이오. 그거는 컴퓨터라. 컴퓨터는  암만 명철해도 컴퓨터는 아무 작용이 없습니다. '너 요거 기억해라' 하면 고거만  딱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요거 요거 요거 계산 하라 하면, 계산만 하고 있지  자기가 능동적으로 뭐 하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컴퓨터 자랑하지마는 컴퓨터라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 속에는 천억 컴퓨터가 있다든가 그래 놓으니까 우리가  뭐이든지 작용을 하고 있어서 한 번 기억하면 요런 거 저런 거 기억하고 있으면  컴퓨터는 딱 요거 가억해라 하면은 기계만 상하지 안하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암만 복잡할 때라도 딱 '뭐라했지?' 딱 고대로 다 기억한 것이 답안이 딱 나온다  그거요.

 그래서 여러분돌이 중요한 것은, 그러면, 이 기초도 셋이요 건축 재료도 셋이요  또 방편도 셋이라. 셋인데, 이 셋은 합하여서 하나인데 이 셋이 우리가 접촉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이 셋을 접촉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고, 또 진리를 접촉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접촉할 수 있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접촉할 있도록 우리에게 나타나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 뒤에. 저 집사님, 우리가 접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나타나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뭐이요? 자, 이 남반에. 신구약 성경말씀!  이거 중요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알도록 이거 이렇게 자꾸 가르치는 것이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를, 이 양복을 입고 있으니까  이래 가지고서 이걸 이라면서 (주: 양복 옷자락을 만지심) '이게 뭐이냐?'  '아버지라.' 이라면서 '이게 누구고' 이라면 저거 아들이 있다 가서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이게, 이게, 이 양복 자락이 아버지입니까? 양복을 입고  있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도 아니요, 신 구약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삼대 대속도 아니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진리의 다도  아니오. 그러나 이 안에는, 이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재 해 계시고 대속이  내재해 있고 또 진리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요 현실애서 내가 현실에서 내게  그때 해당된 고 진리를, 고 진리를 내가 당할 때에 요리 해라 조리 해라 내가  아는 대로의 성경 지식 가지고서, 내가 아는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이 요래라  저래라 나에게 명령한다 그 말이오.

 다니엘은 이제 '기도한다 해라. 기도 안 하면 안 된다.'고 성경 말씀이 제게  명령한 것이라 말이오. 고때 명령한 고 진리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훈이니까 이  교훈은 내가 지킬 수도 있고 안 지킬 수도 있고, 이 교훈은 자기가 지켜서 될  줄로 아는 게 아니고 그 교훈이 자기를 지킨다, 교훈은 자기보다 무한히 크다  이걸 얼마전에 공과에 가르쳤지요.

 이러니까, 고때에 나라난 고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누구를 배반하는 것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오. 또 그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뭣 배반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배반하는 것이오. 또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고 말씀을 배반하는 것이 뭐 배반하는 것입니까?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지요.

고때에 고게 해당된 고 진리에게 내가 복종을 하면은 그 복종하는 것이 주님에게  복종하는 것이요, 주님의 대속을 내가 입고 있는 것이요, 내가 진리에게  복종하는 것이라. 이러니까, 이 세 가지와 하나 된다 말이오. 이 세 가지와  나에게 하나 될 수 있도록 내가 가장 접하기 쉽도록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을 하나님께서 연구하셔 가지고 그렇게 가장 접하기 쉽고 좋은 방편으로  우리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렇게 나타나 가지고서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그 말씀은 진리이지 인격성 있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리라 할 수 있다 말이오. 하나님은 진리라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마는 진리는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라 진리는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하면 잘못이오. 진리는 하나님이라 할 수는 없고 하나님은 진리라고는  할 수가 있다 말이오. 예수님의 대속은 진리라 예수님의 대속은 진리라,  예수님의 대속은 말씀이라 할 수 있고,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이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말이오.

 그러나 그 안에 이래 돼 가지고 접촉하기 쉽도록 이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건설구원의 기초도 이 세 가지요, 건설구원의 방편과 재료도 이 세 가지요. 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건설구원의 기초 역사를 할 때도 있고,  건축 재료 역사를 할 때도 있고, 건축 방편 역사를 할 때도 있는데, 그거는 언제  하느냐 하면은 우리 현실이라는 현실에 하는 것인데, 현실에 그라면 그 재료를  어디서 가지고 오겠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그 대속의  공로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네가 그 현실에 그때에 너에게 명령해서 너는 요  시간에는 요렇게 지키라 요렇게 순종해라, 이 현실에 나에게 지키라고 명령하는  그 명령, 그 계명, 그 진리 그 교훈 그것이 막바로 그 교훈에 순종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대속을 입고 벗지 않는 것이요, 그것이 진리에게  복종하는 것이니까 그때 그렇게 됐으면 그것이 건설구원의 기초가 됐든지 건축  재료가 됐든지 건축 방편이 됐든지 해서, 그렇게만 해 나가면 나중에 가서 보면  기초도 잘 됐고 건축 건물도 잘 됐고 그래 가지고 온전한 건축이 되어진다 하는  것을 가르쳐서 지난밤에 가르쳐 말씀했습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기억하고  그러면, 고 방편을, 그러면, 그 말씀은 이 세 가지 기초요 건축 재료의 방편이  다 되는데, 이렇게 접할 때에는 내가 현실에서고 말씀 접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을  접하는 것이 되어지는데, 접해 가지고서 접촉이 되는데 접촉 되는 그 방편을  지난밤에 말하기를 어디. 성구 어디를 말했습니까? 요한복음 8장 31절에 보면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내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지식으로  알고 '요 말씀에 순종해야 되겠다. 요 말씀을 지켜야 되겠다 요 말씀을 지켜야  되겠다' 하면, '요 말씀을 이행해야 되겠다, 요 말씀대로 이행 실행 해야  되겠다' 요렇게 실행을 하고 나면은 실행하는 고 실행을 통해 가지고서 자기가  뭐이 된다 했습니까? 실행하는 실행을 통해서 자기가 뭐이 된다고 했어? 예? 참  제자가 되고, '내 말에 거하면' 내가 너희에게 요 현실에서 말한 요 말을 실행을  하면은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성화가 되어지고, 성화가 되고 나면은 또 뭘  안다 했오? '진리를 알지니' 처음에 자기가 알고 실행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성화되고 나서 아는 진리 내나 고 진리를 또 새로 알았다 말이오.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처음에는 지식 진리로만 왔지마는 고다음에는 영감과 동행하는  한 번 실 행을 하고 나니까 고 말씀 안에 성령이 내재해 계시는 성령과 고  말씀과 둘을 접했다 말이오. 접했으니까 이제 그걸 통해서 권위 있는 하나님과  진리와 나와의 이 셋이 이래 딱 접해 있으니까 고 다음에는 뭘 한다 했습니까?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자유케 한다 말을 고다음에 해석을 하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요 죄가 어떤 죄가 와도 죄를 범하지 안하고 죄를 이긴 자는 그 주인이  되어지는 것이니, 종 된다는 말은, 자유한다 말은 무슨 말이라 했습니까? 그거  무슨 말로 한 것입니까, 자유한다 말이? 예? 죄를 짓지 않는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 죄의 종이 아니면, 종은 자유가  없지 않습니까? 종은 자유가 없지 안해? 종은 자유한다 그 말은 종이 아니라 그  말이오. 종이 아니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죄의 종이 안 된다 그 말이오. 죄의  종이 안 된다 그 말은 죄를 범하지 안한다 그 말이오.

 이래 가지고 자꾸 접촉해서 깊이 깊이 자꾸 이 말씀을. 껍데기 말씀을  상대했는데 상대해 가지고 그 말씀을 배반치 안하고 보니까 그 안에 영감  상대했고 영감 상대해 가지고서 고대로 동행하니까 죄와 상관없는 세 가지  대속을 입고 있는 사람이 되어졌더라 그거요. 이러니까, 접촉하는 방편이  점차적으로 그렇게 점점 깊이 깊이 견고히 견고히 이렇게 접선하게 되고  연결되게 된다.

 그런데 연결되는데에 그 순서를 뭐라고 가르쳤습니까? 그 순서를 어디다  말했습니까? 누가복음 l6장 10절, 그 순서를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라.

언제든지 큰 거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고 현실에서 요 사소한 거, 여러분들  고거 여러 번 많이 느낄 것입니다. 사소한 것, 지극히 사소한, '아, 그까짓 거  그런 데 뭐 하나님 말씀 말할 거 뭐 있느냐?'고 사소한, 아주 고거야 뭐 할라면  하기도 아무 힘도 들지도 않는데 사소한 거기에 '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되겠다.' 요것을, 제일 사소한 요 일을 조심해서 여기에 실수하지 않도록,  요것으로써 주님이 기뻐 하시도록, 요것으로써 주님의 뜻에 맞도록 그렇게 하고  보면 내가 변화돼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을 행하는 데에서 자기가 성화되는 그런 경험이  있지 큰 거 해 가지고 성화된 일은 별로 없습니다. 큰 거 하고 성화됐다 해도  성화된 것만치 나중에 교만해 뚝 떨어지니까 박살이 돼 버리고 말고 지극히 작은  데 거기에서 성화되어지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을 조심하는 그 사람이  위대해지고 성공해지지 지극히 작은 그것을, 그것을 조심하지 안하는 사람은 안  돼.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그러니까 사람이 금방 요래 있다가서 또 '아 아니다.'  요래 또 고치고, 요래 또 '아, 아니다.' 자꾸 주님과 밀접한 교제 하는 사람은,  그 교제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말이오. 다른 사람이 몰라.

보니까 그 사람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그것이 성령의 인도대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라는지 저라는지 모른다 말이오. 그러나 그것을 참 바로 되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돼서 고 인도하는 대로 된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 더  잘됐습니다. 성령의 인도대로 된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잘됐고 나중에 보니까 참  그것이 유익이 됐고 이렇게 그때 그걸 그렇게 했던고 싶게 다행스럽게  잘됐지마는  성령이 인도한다 하고서 잘못되면 착각해서 자기 주관이 자기를 주관 하기 쉽다  말이오. 자기 주관이 주관을 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자기 주관이 자기를 시키는 대로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불건전한 신비주의라  이랍니다. 그러면, 고거는 알 수 있다 말이오. 자기가 요래야 되겠다 했는데  고래야 되겠다 한 고 일을 시간이 지나가고 보면 고 일이 잘 됐느냐 못 됐느냐,  고 일이 구원에 유익이냐 또 고 사람이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바로 돼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이냐 나쁜 일이냐 고걸 보면 안다 말이오.

 그러면, 처음에는 뭐 자기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성령이 가르쳐 주신  것인지 그때는 모르지마는 자기가 한 그것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보면 부끄러울  일이요 삐뚤어질 일이요 실패되는 일이요 망하는 일이요 다 이 결과가 그렇게,  결과를 보면 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나무를 알지 못하거든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알라 그 말은 자기가 동기로 시작 행동을 모르지마는. 자기 주관이  했는지 성령의 감동에 피동돼 했는지 그것을 모르면 네가 해 놓은 그 행동의  결과인 그것을 두고 봐라. 그게 어찌 되는고? 그게 틀렸다 말이오. 틀려도  이거는 성경에 번연히 틀린 짓을 하고도 이거는 하나님의 성신이 감동시켜서  내가 한 것이라 하면 벌써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 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쿠, 이거 내가 그때 한 그게 내가 성신의 감화가 아니고 이것이 내  주관이로구나. 내 주관 이놈에게 내가 속았구나' 이래 가지고서 다시는 자기  주관을 부인해서 이제는 자기 주관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신용하지 안하고,  경험을 해 봅니다. '이래야 된다 하는데 이라면 어찌 되느냐?' 안 하고 있어 봐.

있어 보니까 지나가 버렸어. 안 하고 나서 그 뒤에 지나 보면 '아,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은 건데 그렇게 안 해서 탈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좋을 뻔 했다.'  그러면 그것이 영감입니까 자기의 주관입니까? 영감이라 그 말이오. 또, 그래  보면'아 그때 꼭 해야 될 거 같았는데 그렇게 했더라면 낭파 될 뻔 했다. 죄를  짓는 일이 될 뻔 했다.' 고라면 영감입니까 고게 자기 주관입니까? 예? 자기  주관 아니오?  이래서, 자꾸 자기를 자기가 연구해 가지고 자기를 시정해 나가야 되지 누가  시정해 주겠습니까? 자기 구원은 자기가 이룹니다. 자기 고치는 거는 자기가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천국도 자기가 만들어야 되고 자기 거룩도 자기가  만들어야 되고, 자기 평강도 자기가 만들어야 되고 자기 진실도 자기가 만들고  전부 자기 것은 자기가 만들어야 돼지는 것이지 누가 만들어 주는 것 없다  말이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할 일 만 당신이 하는 것이지 나 할  일까지 당신이 해 주시는 거 아니라 그 말이오.

 이래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하는 것을 이번에 말했는데, 그런  것을 잘 해석해서 해야지, 그만 두루뭉실로 주께 맡기라 하면 좋습니다. '모든  걸 주께 맡겨 버리라' 이라니까 그 말만 들으면 '아, 주님이 다 해 주신다'  이러면 좀 책임성 있는 진실한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 뭐 주님이 다 해 줄  턱이 있나? 그럴 리가 없다.' 다 거짓부리로 듣고 또 거짓된 자는 주님이 해  준다 하니까 문제없다. 일용할 양식이니까 뭐 하루 양식 다 주님에게 맡기니까,  밥을 안 먹고 이래 굶고 있으니까, 어째 하루를 굶고 있으니까 쌀이 한 움큼  들어와서 밥을 하니 '하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먹여 주시는 것인데'  굶고 있으니까 그 옆의 성도가 보고 애가 터져서 못 견뎌서 양식은 없고  이러니까 조그매 한 주먹 갖다 주니까 먹어 놓고 '아, 주님이 이렇게 먹여  주시는데 먹을 거 염려할 게 뭐 있느냐' 그렇게 하는 그 신자 탄식이고 참 그거  걱정덩어리라 그 말이오. 그런 사람 되면 안 돼요.

 이러니까, 자꾸 연구를 해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건축해 나가야 되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기는 다 하셨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궁극적으로는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은혜가 자기에게 이루어질  때에는 꼭 자기가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되고 자기가 해서 된 거와 같은 그런  방편을 통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염려를 맡겨 버리라 이라고, 염려를 맡겨 버리는 그 사실을 잘  해석을 해 주면 그만 그때는 복잡하니까 '아이구 복잡하다. 뭐 잔소리한다.'  그게 와 잔소리라, 하나님의 진리인데? '잔소리한다. 복잡하다' 그만 머리  아픕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것인데 뭐, 그럴진대야  하나님께 맡기는 것보다 더 힘들다.' 맡기는 것보다 더 힘들지요. 맡기는 것이  제가 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요. 옳게 하는 거는 그렇지 않습니까? 힘이 들어도  자기에게 힘드는 힘 다 해서 해야 되는 것이니까 힘들지, 놀고 뭐 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진리를 꼭 바로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건축에. 건설구원에 대해서 지난밤과 오늘 새벽에 계속해서 이래 했으니까  그것을 자꾸 새김질해 가지고 고걸 실지로 하려고 하면은 들어맞을 거라. 자기가  실행을 하려고 하면 들어맞고, 어떤 가르침은 그 때는 좋지마는 실행할라  하니까, 실상 실지로 행할라 하니까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벙벙해서 모르겠다  그 말이오. 그거는 잘못 가르친 거라 그거요. 알겠습니까?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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