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12:06
교회 척량
본문 : 벧전 1:5-7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7절에 있는 말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연단이라는 말은 불에다가 구워 가지고 좋지 못한 것은 다 제거하고 좋은 것만 남겨 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연단입니다. 쇠를 연단할 때는 쇠에 나쁜 쇠는 다 제거하고 쇠 중에 좋은 쇠를 선택하려고 쇠를 연단하는 것이요, 또 금을 연단하는 것은 금 중에 섞여 있는 모든 잡것을 제하고 순금만 남기기 위해서 불로 구워서 이렇게 하는 것을 연단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믿음의 연단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의 연단도 있고, 또 쇠의 연단도 있고, 금 연단도 있고 뭐 연단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연단이라는 말이나 사람에게 대해서는 혹 시험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을 가졌습니다. 사람도 시험을 치르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시험을 치러서 거기에 합당치 아니한 인물들은 다 제거해 버리고 합당한 인물만 선출해서 등용하려고 그렇게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단은 이러한 것인데, 연단을 하면 못쓸 것은 못쓸 것으로 드러나 가지고 아주 그것은 연단 받기 전보다 천해지는 것이고, 또 좋은 것은 연단 받고 난 다음에 숨어 있던 좋은 것이 드러나서 아주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이 말은 불로 금을 연단해서 금 중에 순전한 순금만 남기고 다른 잡철은 다 태워 버리는 것 이것도 참 아주 깨끗한 연단입니다.
금을 도수를 높여서 구우면 거기에 섞여 있는 흙도 돌도 다 타 버리고, 쇠도 타고, 구리쇠도 타고 주석도 타고 은도 타고 다 타 버리고 금만 남습니다.
이러니까 금 연단에도 다른 잡것은 다 타고 순금만 남는 이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연단하시는 것은 더 심하게 연단하십니다. 그래 연단하면, 금을 연단해서 순금만 남는 것 그것보다 더 믿음을 연단할 때는 참 온전한 믿음만 남고 온전치 않은 믿음들은 다 제거되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금보다 더 보배롭다 그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졌는데, 하나는 금을 불로 연단하는 것보다도 더 정밀한 연단을 믿음 연단을 하신다, 더 정밀히 믿음 연단을 하신다 하는, 그 연단의 아주 선별성, 연단 이 아주 그렇게 깨끗이 연단한다 그런 깨끗성을 가리켜서 하나는 말하고, 또 하나는 금을 연단하면 잡철보다야 참 가치 있는 그런 금이 나오지만, 그것도 연단해서 불에 탄 거와 타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금과 비교하면 그 가치가 많이 차이가 있지만 그것보다도 믿음을 연단해서 이 연단으로 없어지는 그 믿음과 없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믿음은 그것은 남은 금보다도 비교할 수많이 가치가 높다 하는 이 두 가지 뜻을 여기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연단을 해 가지고 없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으면 그 믿음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 믿음은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것들이요 피조물들에게 칭찬 받을 것들이요, 또 하나님의 무한한 그 영광을 피조물들에게 환하게 드러내는 것들이요 또 자체가 피조물에게 크게 영광을 받는 것들입니다.
아주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들입니다. 또 이렇게 연단해서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 다음에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존귀하고, 그 다음에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존귀하고, 그 다음에는 연단 받아서 남아 있는 이 믿음이 존귀한 것입니다. 아주 귀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그 우주보다 귀하다고 하는 귀중성, 그 귀중성이 연단해서 남아 있는 요 믿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과 같이 믿음을 연단할 때에 이 믿음이 타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그 믿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고 하니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지극히 값이 큽니다.
그러기에 시험을 쳐 가지고 합격하면 어떤 시험은 그 대학에 입학이 된다. 인제 그 학교에 가 가지고 자유로 공부할 수가 있고, 또 시험쳐 합격되면 그 회사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다. 또 시험 쳐서 합격되면 그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학생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다. 시험 치는 그 결과에는 다 영광스러운 것 존귀한 것이 붙어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수치이고 합격만 되면 이렇게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시험이 내나 시련인데, 믿음의 이 시련에 남아 있는 것은 영원히 칭찬 받을 것들이요 영광스러운 것들이요 존귀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연단한다는 말은 믿음의 잡것을 제한다는 말인데 믿음의 잡것이 어떤 것이 믿음의 잡것인가? 믿음은 두 가지가 그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요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 지식이 아닌 다른 이의 지식을 자기가 인정해서 다른 이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그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따라가는 것이 이것이 믿음의 반쪼가리요, 또 그 지식대로 실행하는 것이 또 믿음의 반쪼가리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다른 이에게 따라 움직이는 그것이 믿음인데, 사람을 믿는 것, 상관을 믿는 것, 부모를 믿는 것 이게 다 그런 성질의 것인데, 여기에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 내가 지식하는 그것이 믿음의 반쪼가리요,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옳다 인정하고 그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는 것이 이것이 믿음의 반쪼가리요, 또 그 지식대로 내가 행하는데 내 힘만 믿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을 내 지식 삼고,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 삼아 가지고 지식하는 대로 그대로 실행하는 요것이 믿음의 반쪼가리, 지식으로 된 반쪼가리 행함으로 된 반쪼가리 요 두 반쪽을 한하면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그 요소가 지식과 능력인데, 믿음 속에 알맹이는 지식과 능력인데 믿음은 별 종류 많습니다. 불교에도 믿음이 있고 유교에도 믿음이 있고 사회에도 믿음이 있고 이런 단체 저런 단체도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단체가 없고 믿음 없이 그 모든 것이 움직여 가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종류 중에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이 믿음은 그 속에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무슨 두 요소로 되어있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습니까? 손가락 한번 가리켜 보십시오. 네, 믿음은 요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어.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데. 믿음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하나는 지식, 또 믿음의 하나는 능력, 이러니까 지식도 수많은 지식이 있기 때문에 믿음의 종류도 수많이 있습니다. 또 힘이라는 이 힘의 종류도 수를 헬 수 없을 만치 그 힘이 많습니다. 아이의 힘 어른의 힘 뭐 돈의 힘 과학의 힘 도덕의 힘 이종교의 힘 별별 힘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힘도 종류가 많고 지식도 종류가 많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은 종류가 심히 많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런데 그 중에 여기에 기록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런데 여기에 기록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여기에 기록한 믿음은 어떤 지식으로 알맹이를 삼은 믿음이며 어떤 능력으로 알맹이를 삼은 믿음인가? 하나님의 지식으로 알맹이를 삼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알맹이를 삼은 그 믿음을 가리켜서 여기에 믿음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종류가 많은데 믿음 연단이니까 믿음이 백 가지가 있으면 백 가지 믿음을 믿음을 연단하는 그 시험을 가지고 믿음을 연단합니다. 시험을 가지고 믿음을 연단할 때에, 별별 수많은 지식으로 수많은 능력으로 만들어진 믿음이 수십 종류 수백 종류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의 종류는 별별 것을 가지고 믿는 그 잡탱이 믿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잡탱이 믿음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잡탱이 믿음 그것을 그대로 두면 그 사람이 잡탱이 믿음 그것이 믿음인 줄 알고 안심을 하고 가 가지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이 다음에 하늘나라 가 보면 가짜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것처럼 다 불타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믿음을, 믿음의 잡믿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련을 해야 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시험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여기에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여러가지 시험, 이 시험은, 시험은 믿음의 시험인데 이 믿음의 시험은 잡믿음을 다 불로 태워버리고 참 순금보다도, 잡철을 태우고 순금을 남긴 것 고것보다도 더 깨끗하게, 잡믿음은 전부 다 태워버리고 온전한 믿음만 남겨 두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앞으로 살아갈 때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오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은 믿음을 연단하는 믿음이라. 연단하는 시험이라, 믿음을 연단하는 시험이라, 잡믿음을 다 태워 버리고 순전한 믿음만 남겨 두시기 위해서 시험하는 모든 시험들이라 하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요것을 똑똑히 깨달으면 시험을 당할 때에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금을 연단하는, 불로 연단하는 연단을 하는데, 여기에는 믿음 연단인데, 금을 불로 연단할 때에 불에다가 자꾸 많이 구우면, 여러차례 많이 구우면 죽는 것은 무엇이 죽습니까? 금이 죽습니까 금 아닌 것이 죽습니까? 금 아닌 것이 죽지 금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로 연단할 때에 많이 곤란을 당합니까 금 아닌 것이 곤란을 당합니까? 금 아닌 것이 곤란 당하지요. 연단을 할수록 금은 좋아하겠소 금은 근심 적정 하겠소? 좋아하고 근심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연단하는 그 모든 시험이 오면, 시험이 오면 그 시험에 죽어나는 자는 어떤 자가 죽어납니까? 순전한 믿음이 죽어납니까 잡탱이 믿음이 죽어납니까? 잡탱이 믿음이 죽어납니다. 이렇게 믿음을 시험하는 온갖 시험이 오면 근심 걱정 고통하는 것은 잡믿음이 근심 걱정 고통 거기에서 잘단납니까 참 믿음이 절단이 납니까? 잡믿음이 근심합니다. 시험이 올 때에 근심이 되거든 잡믿음인 줄 아십시오. 시험이 올 때에 고통이 되거든 잡믿음인 줄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시험이 올 때에 자기에게 고통이 되고 근심이 되고 불안이 되고 염려가 되고 손해가 되고 깨어지고 절단이 나면 깨끗한 것 순전한 것 그것이 그렇게 절단납니까 없어야 할 잡것들이 절단이 납니까? 요것만 잡으면 되는데 이걸 이 시간에 말로는 대답을 하지만 믿지 않기 때문에 낭패가 되는 것입니다.
금을 연단할 때에 연단을 할수록 금은 자꾸 좋습니다. 안만 연단 해 봐야 제게는 손해 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연단을 할수록 저만 가치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사이비한 것들이 공연히 들어서 가치를 가리웠는데 거짓부리들이 없어지니까 저는 가치만 있어지지 손해 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유익될 것뿐이지 손해갈 것은 하나도 없소. 이와 같이 믿음을 연단할 때에는 참 믿음은 좋고 기쁘고 참믿음은 유익될 것뿐이고 기쁠 것뿐이고 손해 갈 것은 하나도 없고, 거짓부리 믿음은 이것은 근심하고 걱정하고 손해가고 절단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복음 연단을 받을 때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절단이 나야 될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평안하게 살아야 될 사람입니까? 절단나야 될 사람입니다.
믿음의 시련을 받을 때에 이 시련으로 말미암아 깨지는 그것은 깨져야 할 것이 깨졌습니까? 깨지지 아니할 것이 깨졌습니까? 깨지지 아니할 것은 깨지지 아니합니다. 천하가 달려들어도 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 연단은, 이 믿음 연단은 믿음을 인하여 아주 어려움이 오는 그 어려움인데 이 어려움은 그 어려움을 보내신 이가 주님이시요, 이 어려움을 뭐 하려고 보냈느냐? 믿음 속에 잡믿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잡믿음을 제거하니까 손해인가? 잡믿음을 제거하지 않았으면 그게 믿음인 줄 알고 일생 동안, 그 믿음은 만들기가 쉽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집이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집보다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 믿음으로 만드는 믿음은 쉬우니까 놀며 만들어도 되고, 자며 만들어도 되고, 제 욕심 생활 다 하고 만들어도 되고, 모든 수지 진짜는 제 욕심대로 다 살고 나머지기 찌꺼기 그거 가지고 만들어도 되니까 사람들이 안심하고 그 믿음이 믿음인 줄 알고 죽는 날까지 만들었는데 막상 딱 떠나 가지고 가보니까 전부 껍데기입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지어 놨소.
영 잡탱이오.
이러니까 믿음의 생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믿음의 시련이 자주 있는 것이 좋습니까? 없는 것이 좋습니까? 자주 있는 것이 좋다고 대답을 했지요? 고 대답이 옳습니다. 그러면 이 시련을, 믿음의 시련을 받을 때에 없어질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없어질 것이 지금 이 믿음 시련에서 없어지면 좋습니까,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잘 유지가 되면 좋습니까? 없어지면 좋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없어지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없어지면 없어진 줄 알지만 없어지지 아니하면 항상 있다고 배짱부리고 자랑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련을 가하면 없어질 믿음이 얼마나 많은지, 없어질 믿음, 없어질 믿음인지 없어지지 아니할 참 믿음인지, 믿음의 종류가 없어질 것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 이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는 것도 사람들이 모르고 일생 동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믿음의 두 종류가 있으니 가짜 진짜가 있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 복이 있고 모르는 사람은 불쌍하고, 그저 '믿사옵나이다' 하는 사람들은 대개 모르고 갑니다. 대개 모르고 지나가요. 기도원에 있는 사람들, 뭐 별스럽게 지금 불파에서 말하는 사람들 대개 보면 복음의 이 종류를 분석하지 못하고 그저 그대로 막바로 밀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으로 나갑니다.
믿음에는 참 믿음 거짓 믿음 이 두 가지 믿음이 있다 하는 믿음의 종류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요거 알아야 되겠고, 믿음이 좋지만 되나 안 되나 '믿사옵나이다' 하면 다 되는 게 아니라 믿음의 종류는 수없는 종류가 있는데, 그 종류는 참 영생을 가진 아주 능치 못함이 없는 이 믿음도 있고, 전부 불타 버리고 망하고 사람을 속이고 꾀우고 절단나게 하는 그런 믿음도 있고, 믿음은 사람을 살리는 믿음도 있고 죽여서 망치는 믿음도 있고 이렇게 믿음을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지 아니하고 '뭐 이 믿음이나 저 믿음이나 믿음은 보배다. 믿고 살아야 된다.' 언제 방송에 들으니까 '우리 민족은 모두 믿고 살아야 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떼였다고 그러는데 모두 믿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됩니다.' 이 사람들 믿음은 덩덕꿍이 믿음이오.
믿음에 대해서 핵심에 깊이 들어가서, 믿음은 크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라 죽이는 믿음도 있고 살리는 믿음도 있다는 그 궁극에 들어가지 못하고 껍데기에서 말하는 이런 믿음에 속기 쉽다 그거요.
믿음은 크게 분류하면 참 권위를 가진, 영생을 가진, 능치 못함이 없는 이 믿음이 있고, 가짜 믿음, 인간을 속이고 꾀워서 죽고 망치는 믿음이 있고, 인간을 살려서 행복되게 하는 믿음이 있고 믿음의 종류를 나누면 크게 말하면 두 종류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살려서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뿐이요, 망치는 믿음은 여러 수천 수만 가지입니다. 이종교의 모든 믿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속이고 죽이고 망치는 믿음이요 하나님에게 속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믿음이. 그 믿음이 좋은 믿음인지 나쁜 믿음인지 연단 받을 때 가면 그만 타 버리고 남아 있으니까 남아 있는 것은 좋지만 타 버린 것은 아주 못써 버립니다. 그만, 한 번 타면 그만이오, 한 번 타면 못씁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에, 신사참배는 하나님께서, 믿음 연단으로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주신 것인데 그 시험에 전부 불타 버리고 말았다 말이오. 거기에 전부 타서 신사참배 다 하고 말았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때에 신사참배해서 불탄 것은 8.15 해방 전에 신사참배 한 믿음은 다 믿은 것 다 헛일입니다. 이제 새로 믿어야 되지 왜정 말년에 믿은 것은 다 불타 버리고 없다 그거요.
그때에 그 연단에서 타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해방 후에 생명 운동한 사람들이 다 그 믿음, 산 믿음 가진 사람들이 생명 운동을 해서 이렇게 교회가 번창해졌지, 생명 없는 믿음은 내나 지금도 죽은 운동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이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죽이는 믿음은 종류가 심히 많다. 산 믿음 살리는 믿음은 종류가 하나뿐이다. 그러면 믿음 속에는 무엇이 둘이 들어 있다 했습니까? 믿음 속에는 무엇이 둘이 들어 있다 했지요? 지식과 능력.
그러면 믿음 속에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없는 믿음이 있으니 요것은 진짜 믿음이요 살리는 믿음이요 이거는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이요. 가짜 믿음은 인간의 수많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수많은 종류의 지식이 그 알맹이고 수많은 인간의 능력, 뭐 천 명 능력이든지 만 명 능력이든지 억억만 명의 능력이든지 숫자를 뭐 말할 것 없고 모든 피조물들의 능력, 원자의 능력, 인간의 능력, 과학의 능력, 원자의 힘이 크다 하지만 그까짓 능력도 다 죽이는 능력이요 죽은 능력이지 영생하는 능력은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을 살리는 참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뿐이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받아서' 하나님의 능력,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에 있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 이 큰 성공을 했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믿음이라고, 우리 전부 믿는 사람인데, 믿는 사람인데 믿음이라고 좋다고만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는 이것은 참 덩덕꿍이 믿음이요 이거는 어리석은 바보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배다' 그 다음에 할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저 ○○○집사. 그래.
요러는 사람. '믿음이 보배다' 하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그 다음에 뭘 알아야 되겠소? '믿음은 지극히 큰 보배 믿음도 있고 지극히 해로운 독소를 가진 믿음도 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믿음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러니까 '불교 믿음이나 유교 믿음이나 이종교 믿음이나 기독교 믿음이나 믿음은 믿음이지, 믿음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따르는 게 믿음이라.' 이러니까 믿음은 다 같은 종류인 줄 아는데 믿음은 크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 하나는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 산 믿음 살리는 믿음, 수많은 종류 그거는 무더기 금으로 도매금으로 하나인데. 수많은 종류 있지만 그까짓 거야 천이든지 만이든지 하나라. 그 믿음인데 그 믿음은 죽은 믿음 죽이는 믿음, 멸망시키는 믿음, 속이는 믿음.
이러니까 믿응이 보배라, 믿음이 보배인데 믿음 중에는 크게 해독스러운 믿음이 있고 크게 참 보배로운 믿음이 있다 이걸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로 생각할 것은 보배로운 믿음과 해독이 가득찬 믿음이 있으니 보배로운 믿음은 어떤 믿음이며 해로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그 믿음 속에 있는 요소를 봐야 된다. 믿음의 요소를 봐야 된다. 그러면 믿음의 요소가 백 가지가, 천 가지가, 만 가지가 몇 가지고? 믿음의 요소는 몇 가지입니까? 몇 가지? 저 뒤에요.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저 뒤에, 네, 두 가지 요거 보배롭소. 예사로 듣지만 여러분들이 참 천천 금은보다 보배입니다. 보배로운 말씀입니다. 믿음의 요소는 두 가지라.
그러면 살리는 보배로운 믿음과 무서운 해독이 있는 믿음 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는데, 믿음의 요소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요소를 가진 것이 보배로운 믿음이며 어떤 요소를 가진 것이 멸망할 믿음인가? 그 믿음의 요소 중에 하나 지식은 절대자 하나님의 지식이 그 지식이 되어있는 지식이 되어 있고,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능력 되어있는 이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 믿음은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이요 산 믿음이요 살리는 믿음이라,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믿음이라.
그러면 죽은 믿음, 멸망시키는 믿음, 가짜 믿음, 모든 사람을 속이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 믿음의 요소는 뭐인가? 그 믿음의 요소는 인간 지식, 인간 지식, 모든 피조물의 힘, 인간 지식과 피조물의 능력으로 되어있는 이것이 다 죽은 믿음이요 썩은 믿음이요 망치는 믿음이요 살해의 독소가 있는 믿음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믿음 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수많은 이종교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20세기의 문화가 인정하고 자랑하는 믿음들은 어떤 믿음인가? 모든 사람들이 유물주의로 과학 만능이라고 따르고 있는 그런 모든 믿음들은 어떤 믿음인가? 그거는 멸망할 믿음 멸망시키는 믿음들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믿음의 요소까지를 이제 배워서 우리가 확정지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연단은 이런 잡된 믿음은 다 없어지고 참된 믿음만 남아 있게 하는 그런 현실을 주신다 그말입니다. 믿음의 연단은 잡된 믿음을 다 그것은 제거되어 버리고 온전한 믿음만 남아 있도록 하는 현실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지식하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연단시킬 때에 3단계로 믿음을 연단시킵니다.
3단계로.
제 1단계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지식과 내게 있는 지식, 하나님의 능력과 내게 있는 힘 두 가지가 두 가지로 분리되지 아니하고 두 가지가 합해 가지고 그 현실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알아듣겠습니까? 그런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그 현실 주실 때에 보니까 하나님 말씀도 이래 하라 했고 자기가 볼 때에 그리 해야 되겠고 또 그대로 자기도 하고 싶어 하고 하나님 능력도 같이 하고 하니까 그 일이 잘됩니다. 잘 되면 그 사람에게는 '아,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라.' 이제 이 믿음은, 이 믿음은 하나님의 온전한 믿음과 인간들의 잡된 믿음과 두 가지 믿음이 섞였습니까 한 가지 믿음입니까? 두 가지 믿음이 섞였습니까? 한 가지 믿음입니까? 네, 두 가지 믿음이 섞여 있습니다.
잡탱이 믿음입니다. 잡탱이 믿음.
이것은, 온전치 못한 모든 가짜, 살해의 독이 있는 믿음만 가지고 사는 자를 예수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믿음과 처음에 이렇게 둘이 결합이 되어야 무슨 일이 되기 때문에 이 결합을 시키기 위해서, 단합을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단합시키는 역사를 하느라고 두 지식이 두 힘이 함께 움직여서 그 현실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이러다가 얼마 동안 연습이 되니까 하나님의 지식도 자기는 동행해야 되고 자기 지식도 동행해야 되고, 하나님의 지식 자기 지식 둘이 하나가 동행해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 자기 능력 두 능력이 동행해 가지고 이렇게 살게 되니까 아무 어려움 없이 자기 지식도 보배로 하나님의 지식도 보배로, 자기 능력도 보배로 하나님의 능력도 보배로 이만침 자기는 둘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이러고 나면 이제 그 다음 단계에서 어떤 현실을 주시는고 하니, 하나님의 지식과 자기 지식이 둘이 동행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자기 지식과 둘이 동행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 능력이 둘이 동행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우리에게 만들어 당신이 주십니다.
그럴 때에 사람이, 그럴 때에 사람이 자기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고,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을 하면 이제는 둘이 분류가 되면 아주 힘들지 아니하고 쉽게 산 믿음, 참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이 이루어져 가고, 또 죽이는 믿음 해독이 있는 믿음도 그렇게 큰소리치지 아니하고 쉽게 수술이 되어서, 못쓸 믿음은 제거되는 줄로 그렇게 큰소리 나지 아니하고 제거 되고, 큰 난리를 치지 아니하고 그 믿음은 제거되고 요렇게 보배로운 믿음으로 이게 슬슬 바꾸어집니다.
이러니까 요게서, 요 단계에서 사는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 단계에서 그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고 보니까 그 일이 안 되겠는데, '내 힘 같으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아니겠느냐'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인해서 요 자리에서, 2학년 때 말이오, 2학년 단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능력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고 하나님 능력을 인정함으로 이 신앙 걸음을 걷는 사람은 그것이 이렇게 죽은 믿음이 큰소리 치고 난리를 치지 아니하고 이것은 서서히 제거되고 산 믿음이 서서히 수립이 되어서 성장되어 나간다.
그러나 요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달랩니다. 요 자리에서 '네가 여기에서 듣는 게 좋다. 여기에서 바꾸는 게 좋다. 여기에서 고치는 게 좋다.' 오랫동안 시간을 걸쳐서 우리를 개조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믿음 개조를 시키려고 애를 써요.
애를 쓰다가 안 되면 이제 3계단에 가 가지고는 어떤 일이 닥쳐지는 고 하니, 자기가 자기 지식대로 하려고 하면 살겠고 하나님의 지식대로 하려면 죽겠고, 하나님의 지식대로 하는 것은 참 이는 태산을 날아 올라가는 것만치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고 자기 지식을 부인하기는 어렵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기는 심히 어렵고 자기 능력을 부인하기도 어렵고, 이러니까 사람이 마지막에는 이무래도 안 되니까, 안 되니까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을 부인하고 자기 지식 자기 능력을 따라서 갑니다. 갑니다.
가다가 그 걸음 가는 그, 거기에 따라서 가는 걸음에 고 다음에 하나님이 주는 현실은 어떤 현실인고 하니 그대로 따라 나가다가 박살이 돼 버립니다. 이제 박살이 됩니다. 깨져 버립니다.
이러니까 이 단계에서는 자기 지식과 자기 능력을 부인치 아니하다가 삼 단계에 가 가지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치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고 자기를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인정하기가 심히 어렵고 자기 부인하기가 심히 어려우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능력대로 나가다가 큰 낭패가 되어 바싹 깨지고 난 다음에야, 실패와 낭패를 당하고 난 다음에야 이제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해서 후회합니다. '인간은 무능이라, 인간은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는 인간이다. 내 지혜대로 생각대로 그때에 했지만 나는 능력이 없어서 안 됐다.' 그때사 자기 능력을 부인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셔 가지고 '봐라. 나하고 꼭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그래 그래 해 가지고, 믿음으로 해 가지고 성공을 했고, 나는 내 생각대로 요리 요리 써 가지고 실패를 했다.' 이래서 모든 닥치는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은 자기 인정했던 것이 절단나고, 자기 능력으로 해 나갔던 것이 절단나고, 믿음으로 해 나간 것이 성공되고 하는 이것을 일생 동안 경험하고 체험해서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현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는 사람 이 사람은, 스무 살 때에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스른 살 때에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서른 살 때에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오십 세 되면 부인하고, 오십 세 되어서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에야 부인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기의 지능을 조그만한 손해도 당하지 아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있고, 조그만한 손해 보고 자기 지능을 부인하는 사람 있고, 자기가 큰 손해를 보고 자기 지능을 부인하는 사람 있고, 이제는 자기 있는 것을 전부 다 실패 다 당하고 난 다음에 자기 지능을 부인하는 사람 있고, 이렇게 자기를 기어코라도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부인 시키고야 맙니다.
하나님을 인정 시키고야 맙니다. 부인과 인정이 일찍 되느냐 늦게 되느냐, 자기 인정이냐 하나님 인정이냐, 자기 부인이냐 하나님 부인이냐? 부인과 인정이 이것이 빨리 정리가 되느냐 늦게 정리가 되느냐? 할 수 없을 때에, 낭패 다 되고 세월 다 지나고 이제는 소용없을 때에 그때에 이제 이것이 바로 되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는 것은 전체가 자기 망하고 자기 가족 망치고 자기에게 속한 자 망치고 금생 망치고 내세 망치고 다 망치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런 사실을 일찍 아는 사람 늦게 아는 사람, 죽을 때 아는 사람, 마지막에 숨질 때 그때에야 아는 사람.
이걸 바로 알기는 알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일이 언제라도 되기는 되는데 일찍 되는 사람 늦게 되는 사람 그 차이만 있지 되기는 됩니다. 일찍 된 사람은 구원을 많이 이루었을 것이요, 늦게 된 사람은 구원을 적게 이루었을 것이요. 아주 이룰 수 없을 때에 된 사람은 되기는 됐지만 구원은 한 내끼도 이루지 못하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모든 좋아서 어려움 나빠서 어려움, 우리가 믿음 지키는 데에 어려워지는 모든 어려움이 오는 것은, 이 모든 어려움이 오는 것은 이것이 믿음의 연단이라 요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모든 봉착되는 그 모든 어려움은 믿음을 연단하는 어려움이라, 또 쉬운 것도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쉬운 것을 주신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봉착된 모든 현실은 믿음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이다 하는 것을 요것을 볼끈 잡아야 그 다음에 실마리가 풀려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닥쳐지는 것은 세 단계로 닥쳐진다. 제일 처음에는 자기도 하나님도 둘 다 인정할 수 있는 현실, 또 자기 능력도 하나님 능력도 동행할 수 있는 현실, 요 현실을 줄 때는 하나님을 모르던 자가 하나님과 이렇게 가까이 둘이 한테 합해서 잡탱이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 이것을 합니다. 처음에는 순전히 나쁜 믿음뿐인데 좋은 믿음 나쁜 믿음 둘이 한테 섞어 가지고 이 섞인 이 잡탱이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가 제일 좋습니다. 둘째는 힘들지 아니하고 신구 약 성경 말씀을 보므로 깨닫고, 설교 말씀을 들음으로 깨닫고, 자기 양심 속에서 감동시키시는 영감을 인하여 깨닫고 요렇게 깨달아서, 어렵지 아니한 이 평범한 생활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렇고 내 지식은 이렇고,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가 봤자 큰 낭패 날 것은 없고 내 지식을 따라가 봤자 큰 낭패 날 것은 없고, 하나님의 지식을 부인해도 별일 안 날 것 같고 내 지식을 부인해도 별일 안 나고,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해도 별 손해 갈 것 없고 내 지식을 인정해도 별 손해 갈 것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도 내 능력을 따라도 별로 그렇게 큰 마찰되는 것이나 낭패되는 것이나 그렇게 큰 파동이 일어날 그런 일이 없는 요 평범한 생활, 평소의 생활, 요 평범하고 평소의 생활 요 지극히 작은 요 사소한 생활 여기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징계받을 것이 솔솔솔솔솔 자꾸 되어 나갑니다. 이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이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세상 행복을 자기 딴에는 가득 갖추어 가지고 있으면서 이것도 하나님 말씀 위해서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난 다음에는 지극히 작은 것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그저 자기 부인은 나타나면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능력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이렇게 평범한 생활, 일반적인 생활 여기에서 요 믿음을 바꾸는, 믿음 바꾸는, 믿음 연단하는 요 생활을 해 나간 사람은 그 사람은 일생 동안의 그이에게 고통이라 어렵다 하는 그런 시험이 닥치지 않습니다. 고통이라 어렵다 하는 그런 시험이 만나지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에 집어넣는 그 시험이니까 우리가 볼 때에 '아따, 다니엘 참 큰 시험 만났다. 고통스러운 시험을 만났다.' 이렇게 싶지 다니엘에게는 벙긋 벙긋 웃으면서 '이제 때가 됐다. 기쁘고 즐겁다.' 감사하면서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해서 종전과 같이 매일 세 번씩 기도를 했지 그에게는 어려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믿음이 제일 복있는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생활을 바꾸지 아니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느냐 사느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억세고 어려운 큰 파동이 일어나고, 큰 마찰이 일어나고, 큰 소리가 나는 이 어려움의 고비에서 자기가 바꾸게 됩니다.
그러면, 어려움에서 바꾸게 되면 그 사람은 수입이 많고 좋으냐? 어려움에서 바꾸게 되는데도 유익은 극히 적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죽을 지경으로 생명 내놓고 죽을 고생을 해서 믿음을 바꾸었는데, 이렇게 힘들여 바꾸었는데 이 믿음에는 상급이 크지 아니할 것인가?' 그렇게 생명을 내놓고 이래 큰 고통을 당하면서 믿음을 바꾸었는데 큰 고통당한 그놈이, 그놈이 죽일 놈이 고통당했습니까? 살 놈이 고통당했습니까? 죽여야 될 놈이 고통당했기 때문에, 제가 그놈을 길러서 그놈 고통이지 그 고통당한 것은 상급은 하나도 없어.
여기에서는 모르지만 시골에서는, 지금은 참 불우의 이웃돕기라는 좋은 미풍이 있습니다. 옛날은 그렇지를 않았어요. 약간 있기는 있었지만,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갑자기 호주가 죽어 버렸습니다. 일군 호주가 죽고 나면 전부 그만 논밭이 다 묵습니다. 그분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 토지에 잡초를 보지 못했는데 그만 그분 한분이 죽고 나니까 그 밭에 전부 곡식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지심이 나 가지고 전부 지심뿐이라.
이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사랑에 만나 앉아 가지고 말하기를 '아무것이 그 사람이 살았으면, 참 토지를 면경알 같이 그렇게 깨끗이 붙인 사람인데 그분이 죽고 나니까 지나가며 보니까 곡식은 파묻히고 지심만 우북하이 있으니, 우리 토지들은 다 말갛게 제초가 되어 있고 도무지 안 됐다. 우리가 안 됐다. 내일은 암만 급한 일이 있어도 우리가 가 가지고 그것을 제초를 해 주자.' 몇이 단체를 해 가지고 가서 매 줍니다.
매 놓은 걸 보면 참 일한 것 같습니다. 아주 골에 잡초를 매서 재 놓은 게 수북수북하고 곡식은 애른 애른하이 보일 듯 말 듯 하고 이러니까, 잡초를 매 놓은 것이 얼마나 그만 무더기가 됩니까? 억세게 밭을 매고 세게 밭을 맨 것 같지만 유익은 없습니다. 그때 뭐 곡식이 자라 가지고 뭐 됩니까? 이러기 때문에 농부가 잡초를 매서 잡초 무더기가 밭골에 수북수북 재였으면 농사는 궂혔소. '아따, 밭 잘 매었다. 억세다. 막 잡초를 저렇게 골이 수북수북하이 매 붙여 놨구나.' 억센 것 같지만 곡식은 절단나고 수입은 없습니다.
잘 짓는 농부는 평생 잡초를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해. 이게 위에 자세히 보니까 요만침 머리가 올라오려고, 잡초 대가리가 요만치 올라오려고 하니까 가 가지고 농기구 가지고 들들들들 긁어 버리니까, 이게 똑 콩기름 모양 연하게 해 가지고 이래 올라오던 것이 이래 긁으니까 전부 이게 전부 동가리가 다 나 가지고 다 죽어 버리고, 생전 그러니까 뭐 풀 베 놓은 풀이 보여야지? 풀을 안 보고 매는 농부는 농사를 잘 짓고, 마구 풀이 무성한 것을 맨 것은 억센 것 같지만 유익이 없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시련이 평소에 자기 생각과 자기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둘이 대립이 될 때에 평소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해서 그 지식으로 내 지식을 삼고,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요렇게 사니까 아무 소리도 없이 나가니, 이것으로 말하면, 농부로 말하면 지심을 보지 아니하고 제초를 하는 농부와 같은 농부이고, 이럴 때는 부인하고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네가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큰 문제가 나니까 죽느니 사느니 놀래서 죽을 지경이고,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되겠고 인정하려면 기가 차고, 주님 말씀대로 살면 가정이 낭패가 되겠고 이래 가지고 아주 억세게 생명과 모든 걸 다 내놓고 척 예수를 믿으니까 아주 억센 것 같지만 그것은 묵밭을 이제 잡초가 무성하고 난 다음에, 일찍 제했으면 눈에 보이지 않고 요래 버리면 다 죽는데, 이럴 건데 억세게 길러 가지고 한 것이기 때문에 힘도 들고 억세지만 곡식의 수입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러기 때문에 억센 믿음을 가지려고 말고 지극히 작은 데서 믿음을 가져야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농사지으면, 제가 있는, 거기 있을 때에 조경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참 지혜가 있는 사람이오. 항상, 그때는 탕건 쓰고 다닐 때인데 탕건 떡 쓰고 좋은 옷 입고 기다란 부채 하나 들고 이래 다닙니다. 그런데 곡식은 일등이라. 어째 짓는 고 내가 한번 가 봤습니다.
가 보니까 기다란 것, 다른 사람은 막 땀을 쭐쭐 이래 흘리는데 기다란 것 가지고 밭에 가서 이래 이래 이래 하는데. '풀도 없는데 뭐 하려고 맵니까?' '풀이 없는데 매면 이 사람아 움이 올라오다가 다 끊어지네 보래.' 이래 가지고 휘떡 뒤비니까 노랗게 마치 콩기름이 올라가는 걸 그만 이래 버리니까 콩기름 머리가 딱 끊어져 버리니까 안 나는 것 한가지라 보니까 밑에 노란데 그게 만일 올라 왔으면 굉장할 거라. 그래 장 이래. 놀면서 슬슬 이래 이래 하니까 그 사람은 농사지을 때에 일등 농사짓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이 평소에 지극히 작은 데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능력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일하는 것,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면 된다.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이것이 기독교라 그말이오.
우리 신약 교회의 시발이 어떤 게 신약 교회 시발인고 하니 동정녀 마리아가 시발 아닙니까? 마리아에서부터 시발돼 가지고 거기에서 탄생한 예수님이 신약 교회에 시발 아닙니까? 이랬는데 동정녀 마리아 믿음이 뭐이냐 하면 얼토당토 아니한 것이라, 이거는, 이치에 맞지 않아. 남편도 없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아? 그런데 아이 낳는다 했거든. 이치에 안 맞는 일로 왔소. 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만일 아이를 낳는다면 이거는 당장에 큰 참 지독한 사형이라. 아주 자기가 그만, 자기가 아주 사망하는, 사망하는 죽음으로 왔다 그말이오. 셋째로는 대대손손이 누명을 입고 있어야 돼. 대대손손이 누명을 입고 있어야 되는 이 누명으로 왔어. 이 세 가지로 온 것이 신약 교회의 시발입니다. 종자요.
이럴 때에 마리아는 내 보기에는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그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보라, 엘리사벳이 늙은 할머니가 되어 가지고, 젊었을 때에도 아이 못 낳았지만 아이 밴 지 육 개월이다' 이런 증거를 대 주니까 마리아가 자기를 부인하고, 용감스럽게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자기 부인하고 딱 믿음 지키니까 거기에서부터 신약 교회가 이제는 종자가 시작됐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이 올 때에는 반드시 썩은 인간 이치에 반대되는, 인간 이치에 반대되는 비 이치적으로 옵니다. 이치가 아닌 이치에 반대되는 비 이치적으로 오요, 비합리적 이라. 비합리적으로 옵니다. 오고, 또 자기가 손해가는 그런 것을 띠고 오고, 자기가 수치스러운 그런 것을 띠고 오고, 띠고 오기 때문에, 띠고 오는 것은 이것이 죽어 있고 거짓부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걸 살리려 하니까 죽은 것의 반대되지. 거짓부리를 이것을 고치려 하니까 바른 것이 되어 따리지 이것이 또 수치스러운 것을 고치려 하니까 수치스러운 것의 정반대로 오지. 반대로 올 수밖에 없어.
이러니까 부인할 수밖에, 부인으로만 따라가지 부인이 아니고는 따라갈 수가 없는 지라 이러니까 부인하고 따라가니까 됩니다. 그러니까 해 보고 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즐거워 해. 처음에 닥칠 때에는 근심하지만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는 것은 없는 믿음을 생기게 하고, 잡탱이 믿음을 제거해서 온전한 믿음을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쉽게 말해서 내게 죽을 지식, 죽을 힘, 요 죽을 인간 요거 제거하고, 산 지식, 영원한 능력, 영생하는 사람 요것을 세우기 위해서 현실을 주시는 것이니까, 자, 그러면 죽음에 속한 것, 가짜에 속한 것, 옛사람에게 속한 것 이것은 없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있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이거 중한 문제인데 없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없어지는 것이 좋지요.
많이 없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조금만 없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많이 없어지는 것이 좋지.
그러면 많이 없어지는데 한몫 많이 없애는 것이 쉽습니까 조금씩 없애는 것이 쉽습니까? 조금씩 없애는 것이 쉽습니다. 조금씩 없애도 나중에 다 없애기는 없습니다. 이런데 한몫 다 없애려 하는 사람은 없애지 못하고 말아 버렸소.
이러니까 우리 현실에는, 그러면 우리 현실에는 인간 지식 인간 생각에, 인간 지식 인간 생각에 배치되지 아니하고, 자기 욕심에 배치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배치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 세상살이, 세상 인간들이 생각할 때에 아무런 대립이 되지 않는, 대립이 안 되는 그런 현실이 오면 좋을까요 이것에 대립이 되는 현실이 오면 좋을까요? 어떤 게 좋습니까? 이 세상 사람대로의, 세상 사람대로의 이치, 세상 사람대로의 형편, 이 세상 것 이런 것이 깨어지는 것으로 오면 좋습니까? 이것이 북돋워지는 것으로 우리 현실이 닥쳐오면 좋습니까? 어떻습니까? 요 자리는 알아도, 여러분들이 요걸 가지면 보배가 되는데, 인간 지식이 깨어지게 오는 것이라야 좋지 인간 지식이 보존되게 오는 것이면 저는 죽습니다. 알겠습니까? 인간 지식이 깨어지게 하는 현실로 와야 좋겠고, 또 자기 능력을 부인하는, 부인하는 그 현실로 와야 좋겠고, 하나님의 지식을 많이 취하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힘입을 수 있는 요런 현실로 오면 현실이 복된 현실이 되겠지요. 이런데 사람들은 논리로는 이렇게 알면서 망할 것은 좋아하고 사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지식으로 죽은 지식이 있고 산 지식이 있다. 죽은 능력이 있고 산 능력이 있다. 죽은 내가 있고 산 내가 있다. 죽은 생활이 있고 산 생활이 있다. 살지만 이 시간 망하며 성공하는 생활도 있고 살며 성공하는 생활도 있다.
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인식하고 요것으로써 자기 생활을 비판하고 평가 하는 사람이라면 다 생명 길을 다 갈 수 있습니다. 다 갑니다.
판단하면 판단할 만한 능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이런데, 판단하면 판단할 수가 있는데 판단하지 못하도록 마구 복잡하게 만듭니다. 좀 생각하면 알겠는데 생각할 여가 없이 이 사람이 찾아 와 가지고 부릅니다. '이거 내가 오늘 안에 좀 기도 좀 해야 되겠는데, 이거 좀 생각해야 되겠는데' 이 사람이 옵니다. 또 자주 오지 않던 친구가 옵니다. 뭐 사건이 옵니다. 마귀 이놈이 이것 저것 요것 조것 자꾸 엮어 대요. 엮어 댈 때에 요걸 알아야 됩니다.
'주여! 이 마귀 뭐이 오든지 쏵 떨어 버리고 뭐이 와도, 사람이 와도, 친구가 원수가 되고 부모가 뭐 장례가 와도, 뭐 재산이 절단 나도 에! 오늘은 단절!' 돌아 뿍뿍 갈 수 있는 이 용단을 가진 사람이라야 됩니다. 다 이런 용단이 없으면 이 생명길로 옮겨 서지를 못하는 것이오. 그렇게 합리주의로 요런 것 저런 것 아주 물 샐 틈 없이 인간 비위 다 맞추어 가지고 인화주의 합리주의 그것 가지고 사람이 무슨 신앙 걸음을 걷는다 말이오? 구원은 천리 만리 거리 먼 밖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 우리 현실은 내 지식과 내 능력을 부인하는 이것이 내 수입이다. 그러니까 부인할 것이 없는 현실은 내게 수입 없는 현실이다 부인할 것이 많은 현실은 수입 많은 현실이다. 내 전부를 싹 부인해 버려야 될 현실은 전부 완전히 산 걸로 바꿀 수 있는 수입이 최종적으로 전부가 되는 현실이다.' 요것을 확정 짓고 가자 그말이오.
이런데 요걸 생각하지 못하게 마귀라는 놈이 자꾸 우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이래 가지고 요 사람이 와서 꾀우지, 요 사건이 닥치지. 조것이 오지 이러니까 기도하려 하니까, 그 사람이 기도하려고 기도한다고 들어가 보니까 '아이구, 나는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왜?' '생각해 보니까 이 일이 낭패되고, 누가 약속한 게 있고 뭐 있고 뭐 있고' 그놈을 그만 자꾸 귀중하게 여기니까, '기도하러 올 때 뭐 하러 왔노? 내비둬라, 좀, 낭패되면 되지. 그까짓 거 낭패되면 뭐 큰 것이가?' 이러면 '아닙니다. 뭐 있고' 뭐 이게 와 가지고 어떻게 복잡하고 필요하고 중요한 거라고 제게 알려 주든지 견딜 수가 없어서 '안 됩니다. 내가 갔다 와도 갔다 와야 되지 안 됩니다.' 갔다 오기는 뭘 갔다 와? 가면 고만 이놈이 붙들고 저놈이 붙들어 가지고 잔치해 버립니다. 잡아먹어 버려요.
이러니까 명상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자기와 자기 생애 전부를 빼앗기는 줄 알아야 됩니다. 기도 시간 빼앗기는 것은 이 모든 걸 다 빼앗기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좀 기도하고 명상 가운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여유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이 승리는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지킬 것은 마음이니 모든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나오느니라'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잘난 사람이 예수 믿소. 몇닢푼치 안 되는 것, 환경이 닥치면 주체성도 없이 이렇게 저렇게 끌려가는 그 까짓 거는 예수 믿을 자격이 없어.
내가 어제도 어떤 사람 만나 가지고 이야기를 했어 사람이 자기 주체성이 없어서 그거는 그만 이 사람 만나면 이리 턱 끌려 버리고 저 사람 만나면 저리 끌려가고, 자존심도 없고 주체성도 없고, 팔방미인이라 말은 욕입니다.
팔방미인은 창기라 그말이오. 이 남자 닥치면 이 남자 좋게 하고 저 남자 닥치면 저 남자 좋게 하고 이거 모양으로 팔방미인적인 인격, 이래 가지고 아무 주체성 없이 어데든지 닥치는 데 그만 거기에 따라가 가지고 이렇게 화합하는 것, 민첩하기는 민첩하지만 창기성이라.
그 사람 인격은 창기성, 그 사람의 인격성은 민첩하지만 상인성, 장사꾼이라 말이오. 상인성, 그 사람은 영웅성, 그 사람은 농부성, 그 사람은 공업성, 그 사람은 교육성. 그 사람은 도덕성, 그 사람은 성자성, 그 사람은 믿음성. 이거는 뭐 아무것도 아니라. 믿음성, 하나님 그분에게만 피동되고 그분에게만 속하여 있소. 아무것도, 보면 어떨 때는 나하고 딱 들어붙는 것 같지만 나와 하나님과 다를 때 보니까 천리만리 거리가 멀어서, 그분은 하나님만 딱 들어붙어 가지고 그분에게만 피동되는 믿음성 가진 사람이라. 별별 종자가 있습니다.
사람은 주체성이 있어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신앙의 자존성이 있어야 됩니다. 자존성이 있어야 돼. 안 꺾여야 돼. 내 하나님 외에 큰 자가 없고 두려운 자가 없어. 그분 외에 높일 자가 없어. 아무 곳에서도 내 하나님 모시고 주님과 나와의 관련된 법칙인데, 자기 신조와 교리를 어떤 자가 와 가지고, 뭐 돈 준다고, 권세 준다고, 지위 준다고, 직장 준다고, 목숨을 끊는다고 자기 신조와 교리를 버려? 그거는 자존심 없는 그런 창기 같은 인간이오. 상인 같은 인간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상인도 좋은 사람 있지만 상인, 장사들은 자기 이권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말이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잘 좀 생각해 가지고 삽시다. 믿음 연단, 오늘 믿음에 대해서 배웠는데 굳게 잡고 놓치지 말아요.
믿음은 두 종류. 죽음에 속한 믿음은 가지 수가 천 개도 만 개도 넘습니다.
믿음의 요소는 두 가지 요소.
하나는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 우리의 현실은 믿음을 연단해서 잡믿음을 제하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만 남아 있지 나머지기는 다 없애 버립니다.
하나님의 방편으로는 1학년 방편 있고 2학년 방편 있고 3학년 방편 있는데 2학년에서 자라가는 그것이 제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