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12:05
교회 역사
1987. 5. 7. 오후집회(목)
본문:열왕기상 13장 1절∼34절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호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내가 천천히, 빨리 읽지도 못하고 천천히 읽어서 여러분들이 벌써 읽은 나만침이나 다 그 내용을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로보암 왕은 솔로몬 왕이 죽은 뒤에 너무 학정한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이 두 지파와 열 지파로 서로 나뉘어졌습니다. 두 지파는 그래도 하나님의 그 은혜를 보수를 해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 왕을 삼았고 열 지파 이스라엘은 르호보암 그 솔로몬 아들이 그 아버지 솔로몬보다도 더 포학한 정치를 할 것을 선포하는 그로 감정되어서 그 솔로몬 왕의 계통을 버리고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을 청하여 왕으로 삼아서 열두 지파는 열 지파와 두 지파로 나뉘게 됐습니다.
이래서 두 지파로 되어 있는 그 나라를 유다 나라라 이렇게 이름했고 열 지파로 되어 있는 그 나라를 이스라엘이라 이렇게 해서 갈라졌었습니다.
이랬는데 여로보암 왕과 르호보암 왕은 한 솔로몬 밑에서 한 민족이요 한 나라였으나 감정으로 인해서 서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감정으로 인해서 두 지파와 열 지파가 갈라져 가지고 정치가도 둘이 돼서 두 지파에는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고 열 지파는 여로보암이라는 그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지내는데 그 한 민족이요 한 나라였지마는 평생 그 두 나라는 늘 대립이 돼 가지고서 항상 싸움이 계속 했던 것입니다.
이랬는데 여로보암이라는 그 왕이 왕노릇 하기를 감정적으로 하나님의 전통을 배반하고 저희 감정주의대로 하는 그 사람들의 통치자가 되었고 두 지파는 아무리 르호보암의 그 포학한 정치에도 자기네들이 그 한 사람의 포학한 정치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늘 계통적으로 나온 그 계통을 버릴 수가 없다 해 가지고 두 지파를 모여 가지고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 그렇게 지나왔었습니다.
그후에 늘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있다가 그후 오랜 후에 북쪽에 있는 열 지파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앗수르 나라에게 다 포로되고 학살되고 해 가지고 그 종적이 없이 아주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혹 그 뒤에 혹은 남은 역사에 북쪽 열 지파 이스라엘이 혹 어데 남은 흔적이 있는가 그렇게 찾아봐도 연구한 학자들 말에 의하면 그 종적이 없다고, 아무래도 어데 갖다 놔도 그 풍속이나 그 민족성이 그것이 없앨 수 없는 것인데 도무지 역사에 그 열 지파의 남은 민족성이 없다고 그렇게 해서 그는 전멸됐다 그렇게 모두 보고 있습니다.
여게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혹 한 사람 두 사람의 잘못한 그 과실로 인해서 감정적인 충돌이 있을 수 있고 또 자주 발생할 수도 있고 그것이 뭐 계속되는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그 인간 감정의 충돌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통 신앙 계통을 버리고, 신앙 계통을 버리고 감정적으로 이렇게 이탈돼 나간 그런 족속은 북쪽 이스라엘을 봐서 그 결과가 좋지 못했다 해서 사람들이 감정을 인해서 자기 믿는 신조와 교리를 배반할 수 없다, 또 자기의 신앙 계통을 배반할 수 없다 그렇게 모두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후에 이 교회사들도 보고 지금도 보면 그 교파가 많은 교파들이 지금 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교파들이 되어 있는데 대개 그 교파들이 분열된 것을 보면 감정으로 분열된 그런 분열파들도 많이 있고, 또 교리와 신조상 서로 달라서 서로 갈라져서 파들이 생겨진 것도 있고, 혹은 자기의 지방을 따라서 자연히 지방이 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오랜 세월 지나가면 차차 차차 거리 멀어지게 되는 것처럼 지역상 그렇게 갈라진 것들도 있고, 또 복음 역사를 하는 데에 그 복음 운동을 한 주체가 달라서 주체를 따라서 그렇게 달라진 것들도 있습니다.
있는데, 지역을 따라서 달라진 것이 별로이 그 손해가 없고, 또 교리와 신조를 따라서 갈라진 것은 잘못된 교리는 절단났고 좋은 옳은 교리는 오히려 그 전통에서도 개혁해 가지고 나선 것은 더 끝이 좋아진 것도 있고, 또 그 지역으로나 그 사업 근거로 인해서 된 그런 것은 별로이 표가 안 나지마는 감정적으로 이래 가지고서 갈라진 그런 교파는 대개는 절단나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도 우리가 잘 참고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어느 진영에 속해 있든지 그 진영에 속해 있으면 그 진영에서 잘못 나가는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거게서 충고하고 얼마든지 또 간청도 하고 끝까지 탈선되지 안하도록 탈선되는 그 길에서 바로 가도록 할라 하는 이런 노력을 계속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소속해 있던 진영에서 자기의 사욕의 악,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 당을 짓기 위해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해 가지고서 그 교파에서 갈라져 가지고 당을 세운 것은 그것은 수명이 멀지를 못합니다. 얼마 안 가서 그게 차차 차차 비참하게 다 녹아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옳은 것을 자꾸 이렇게 말을 하고 자기가 소속한 그 진영을 하나님이 거게 세워 줬고 그게 또 아무리 잘못 나간다 할지라도 자기가 거게 깨달았으면 자기가 거게 대해서 파수꾼의 사명을 하나님이 맡기신 줄 알고 거게서 옳은 것을 자꾸 주장하고 또 잘못돼 가는 것을 권유하고 자꾸 이렇게 말을 하다가 아무리 안 들어도, 아무리 안 들어도 거게서 있다가서 끝을 마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거게서 용납지 못하게 쫓아낼 때에는 거게서 자꾸 대항하고 싸우지 안하고, 쫓아낼 때에는 그때는 자기는 그저 조용히 나와 가지고 따로 복음 운동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파나 교회나 다 같습니다. 자기가 그 교회에 소속해 있었으면 그 교회가 잘못 나가면 끝까지 자기는 잘못 나가는 것을 책임지고 그 교회를 바로 잡을라고 애를 써도 안 듣고 어떻게 핍박을 한다 해도, 안 듣고 어떻게 핍박을 한다 해도 쫓아내기 전에는 거게서 자기의 사명인 줄 알고 거게서 끝까지 바른 것을 말하고 이렇게 하다가 하나님이 혹 긍휼히 여기셔서 또 그것을 바로잡아 주시면 사람은 자꾸 변해지기 때문에 그 교회를 바로 잡아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잡다가서 안 된다고 거게서 반대하고 이래 가지고 서로 갈라져서 나가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교회나 교파나 꼭 같습니다.
혹 또 그런 수는 있습니다. 한 진영 안에서 한 교회가 오랫 동안 새끼를 치지 안하고 그 교회가 오랫 동안 개척교회든지 이런 것을 세우지도 안하고 복음 운동 하지 안하고 저거끼리만 똘똘 뭉쳐 가지고서 이제 등따시고 배부르니까 좋다 하고서 이 복음 운동을 잊어버리고 그저 자기네들 현상 유지나 하고 등따시고 배부른 격으로 그와같이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다가 내란을 일으켜 줍니다. 내란을 일으켜 가지고 문란하게 합니다.
그럴 때는 거게서 모든 그 행정을 관리하고 주장할 만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은 일을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분을 일으키신 것이니까 빨리 서로 나눠 가지고 일하도록 해야 된다 해 가지고서 그 교회에서 단 개척교회를 다시 세우고 다시 분교를 세워 가지고 교회를 세워서 나가면 하나님께서 거게 같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그 모교회나 또 나간 지교회나 다 한테 있을 때의 그 교회보다도 나가서 나뉘어 나가는 그 교회가 오히려 그 교회보다 더 크고 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교회들이 자꾸 이렇게 분열되는, 교파들이 분열되는 것이나 교회가 분열되는 것이나 이것을 잘 알아서 이렇게 마치 온상에 있는 모종을 자꾸 이렇게 나누어서 심으면, 이속을 해서 옮겨서 심으면은 그 수획도 있고 성과가 좋은 것처럼 그럴 수도 있으나 교회라 하는 것이 꼭 감정으로 이래 돼 가지고서 하는 것 위험하고 또 그 교리가 틀린 것을 일시 어떤 웅변과 열변과 그런 사람의 그 말을 따라서 자기 양심에 옳지 않다는 그 교리를 따라가 가지고서 이렇게 나가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런 것을 이런 데서 좀 참고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얍복강가에서 얻은 이름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하고 다퉈 가지고서 하나님을 이긴 죄값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를 맞고 난 다음에 회개했다 하는 뜻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야곱에게 네가 이러니까 안심하고 가라고 해도 꼭 세우고 밤새껏 하나님의 사자로 더불어 시비하고 신강하다가 마지막에 한 대 맞아 가지고 환도뼈가 위골되고 난 다음에사 돌이켜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해서 ‘아이쿠 내가 하나님을 대항했다’ 하고서 `하나님을 만났으나 내가 죽지 안한 게 다행이다’ 하고서 그때에 그가 하던 주관 행위를, 그 주관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하고 피동하지 안하고 순종하지 안하고 주관으로 대항하던 그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이제는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해서 그 이름을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름은 좋은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이름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자기 주관대로 살다가 매맞고 난 다음에 회개해서 하나님에게 복종하기로 한 그 이름이 이스라엘 이름입니다. 그 이스라엘은 좋지마는 창세기 49장에 보면은 이스라엘이라는 그 뭉텅이 속에 알맹이가 있었습니다. 알맹이가 있었는데 그 알맹이는 이스라엘의 그 열두 아들 가운데에 유다라는 그 아들이 있는데 유다가 그 안에 생명체요 중심이었습니다.
이래서 그것이 그리그리 지내나오다가 오랜 후에 이스라엘 껍데기는 갈라져서 열 지파가 되고 거게 유다라는 그 지파는 두 지파가 겨우 갈라져 가지고 유다 나라가 됐는데 거게서 우리 메시야가 나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는 모든 것을 망라해서 광대하게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요한계시록에 천사가 그 잣대를 주면서 성전에 밭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만 측량하고 그 나머지기는 세상에 줘 가지고서 마흔두 달 동안 짓밟히게 하라 그렇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 도면을 보면 성전에 밭마당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큽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제단과 성전과 경배하는 자는 작습니다. 그 성전이라는 마당은 넓은데 성전은 조그만합니다. 그 몇분지 일이나 되는지 그거는 제가 그렇게 재어보지는 안했는데 혹 누가 계산해 봤습니다. 몇분지 일이나 됩디까? 예, 거게 대해서 별로이 생각을 안 가진 줄 압니다.
이래서 성전 밭마당은 내나 성전은 성전이지마는 성전 밭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성전, 바로 성전과 제단과 거게 경배하는 자들만 측량하라 했습니다. 그 말은 그것만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나머지기 성전 밭마당에 있는 많은 숫자의 교회와 신자들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안하고 그거는 세상 앞잡이로서 세상에게 짓밟혀 세상을 따라 움직이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서 움직여 세상에 속한 그 속화된 교회로 그렇게 있을 것을 그것이 요한계시 몇장입니까? 11장에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그것도 우리는 무심히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세계에 믿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성전과 제단과 경배에 소속한 신자들과 교회들이 있고 또 교인들이 있고 또 교파들이 있다고 그렇게는 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파라도 그 교파에 참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에 속한 그런 잘 믿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신약 교회도 많은 양은, 많은 양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안하는, 세상에게 내 준 그런 교회가 있고 하나님이 세밀히 간섭해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징계해 가지고서 “사랑하는 자는 내가 몇이든지 징계하겠다” 징계하는 교회들이 있고 교인들이 있고 하나님의 징계가 없는 교회들이 있는 것을 벌써 성경에 말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조그매라도 잘못하면 하나님의 징계의 그 간섭이 있는데 자기에게는 범죄해도 징계의 간섭이 없으면 버린 자식인가 하고서 놀래서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야 되지 나는 실수 범죄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 그런 재앙 없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는 몇 번이든지 징계하는데 너에게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이렇게 무서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래서 가라지나 곡식이나 다 그 밭에서 같이 자라는데 마지막에 구별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에 곡식에 속한 참 교회와 가라지에 속한 이 속화된 이 교회의 구별은 그의 결실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그의 하는 소행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왜정 말년 때에는 신사참배 하고 안 했는데 한 것은 그것을 가라지로 봐야 되겠고 또 안 하고 사수한 그런 사람들은 곡식이라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그물 비유에서, 그물 비유에서 못쓸 것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져 넣는데 던져 넣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악한 자들이라, 악한 자들은 자기 중심으로 예수 믿은 자들이다. 자기 중심으로 예수 믿은 자들은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짐을 받고 그때에 의인들은 해와같이 비췸을 받고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을 누린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라지도 있고 곡식도 있기 때문에 거게는 가라지 노릇 해도 괜찮은데 나만 가라지 노릇 못 할 게 뭐 있나? 그래서 시편 73편에 보면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죄짓고 사는 사람도 괜찮은데 자기는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양심에 가책의 징책을 받고 또 조그매만 잘못 행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이렇게 되니까 괴로와 못 살겠다. 나는 왜 이러냐? 이렇게 생각하는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밀한 간섭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참 행복인 줄 알아야 되지 거게 대해서 불만 불평하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가운데에 아무나따나 뭐 예수님 이름을 가지고도 주일을 뭣을 지키는 것이 상관 없고 또 주일날 매매하는 것이나 또 자기가 술담배 먹는 것이나 자기가 뭐 남녀 이성면이나 모든 면에 뭐 장사하는데 거짓말 수단 방법 뭐 가리지 안하는 이래도 사는 그런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을 저래도 살아도 되는데, 저래 살아도 되는데 하필 우리 목사는 그렇게 못 살게 하고 우리는 또 그렇게 못 살고 까다롭게 그럴 것이 뭐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를 말을 했고 또 그물 비유로서 그렇게 우리가 요번에 공부한 대로 그물 비유에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 2장으로부터 3장까지에도 보면은 일곱 교회를 대해서 말씀했는데 그 일곱 교회는 신약 시대 교회 전부를 다 총칭해서 신약 시대 교회에 { 안팎의 어떠한 그 형태와 진상이 있을 것인 것을 낱낱이 간단 명료하게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의 뜻을 깨달으면 신약 교회의 그 외형과 내용과 그 질과 양이 어떻게 될 것이라 하는 것을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거게도 보면은 일곱 교회 가운데에 라오디게아 교회 하나는 두 쪼가리가 아니고 다른 여섯 교회는 다 두 쪼가리입니다. 하나되는 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는 거게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네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성경 말씀 가지고 너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너거 생각대로 판단해서 너거 지식대로 판단해 가지고 우리는 부요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하는 자들아 너희의 가난한 것, 참 알면 너희의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미직지근한 속화 교회, 이 속화 교회일수록이 그 교회가 서로 두 쪼가리가 아니고 한 쪼가리로 이렇게 나가는 것이 그것이 계시록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내가 이 말 하는고 하니 언제든지 교회가 산 교회는 두 쪼가리입니다. 그거는 필연한 것입니다. 죽은 교회는 한 덩어리입니다. 그것이 외부에 나타나지 못해서 죽은 세력이 강한 것도 있고 산 세력이 강한 것도 있으니 죽은 세력이 강한 교회는 죽은 세력이 패권을 잡아 가지고 야단을 지기고 산 세력이 강한 교회는 산 세력이 패권 잡으니까 그런 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마는 있기는 있습니다.
반드시 당회도 두 종류, 또 제직회도 두 종류, 반사회도 두 종류 이렇게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그렇게 속화돼서 아주 하나님의 간섭 없고 쉽게, 말만 교회지 세상이나 다름없는 이렇게 사는 그 사람들의 형통한 걸 보고 부러워하지 말고 ‘원 둘이 있다. 저거는 가라지다. 저거는 마지막에 그물에서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져 넣을 것들이다.’ 다른 사람을 그래 보는 것보다도 그 행위는 그렇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으니 우리는 언제든지, 내가 이 말 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이 있거들랑은 지체하지 말고 빨리 옳은 데로 귀속해야 됩니다. 요걸 내가 말하기 위해서 말합니다.
그 제직회도 볼 때에 ‘이 제직 중에 아무것이가 그래도 말을 바로 하고 사상이 바르고 옳다. 나는 옳은 데로 속할란다.’ 얼른 속해서 재빨리 들어붙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멸망 가운데 빠지지 안해서 자기 심신의 기능을 멸망시키지 안하지 그리 안 하면 심신의 기능을 멸망시킵니다.
환하게 압니다. ‘저거는 인본주의요 저거는 세상주의요 자기 인간 욕심 가지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저걸 싫어할 것이고 인간들은 좋아한다.’ 이거 환하게 한다 말이오. 그럴 때에는 빨리 옳은 데로 귀속해서 붙어야 되지 그것을 알고 그렇게 거게 붙어 가지고서 나가는 것은 그게 뭐이냐? 당짓는 것입니다.
당짓는다고 성경에 말한 것은 예수당, 피와 성령과 진리로 한덩어리 되는 그 외에 거는 전부 당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 지파와 두 지파가 갈라진 것을 말했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가리켜서 열두 지파 이스라엘이라고 말했지마는 끝까지 견딘 그 알맹이는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요.
창세기 49장에 축복한 걸 보면은 야곱이 다 예언을 해 놨습니다. 예언해 놓은 그것은 그들의 모든 현상을 보고 그대로 현상을 정평 정가해서 말한 것이지 예언이 아니라 정평 정가해서 말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의 미래를 환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 유다가, 유다 나라에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섬기는 원 줄기의 계통을 가지고 있으니까 저희들은 또 거게 그라면 한 하나님이니까 거게 속해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하고 저들이 그 정치는 그렇게 할지라도 종교에 대해서는 나뉘지 안하고 그렇게 정치는 나눴을지라도 종교는 일치하지 안하고 종교까지 나눴습니다. 나눠 가지고 저거는 저거대로의 산당을 짓고 거게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렇게 하면서 조짜배기 하나님 모두 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게 저거 하나님이라 하면서 이래 섬기고 자꾸 이래서 그만 종교가 삐뚤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에 유다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를 하나님이 시키셔서 저 여로보암이 저렇게 죄를 짓고 제 맘대로 성전이라고 지어 놓고 제 맘대로 하나님 섬기는 제단을 쌓아 놓고 또 제사장은 하나님의 법에서는 레위 족속으로 제사장을 삼아라 했는데 저거 마음대로 뽑아서 제사장 삼아 가지고 저와 같이 섬기고 있으니 저것을 네가 가서 예언해라 해서 유다에 하나님의 사람 그 선지가 가서 예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벧엘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니까 마침 여로보암 왕이 제사하려고 거게 와 가지고서 제사드리는 판인데 하나님의 선지가 가서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때 우리 육안으로 보듯이 이렇게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다 영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영감으로 말씀하는 것을 그들이 다 귀로 듣고 하는데 그 귀는 양심의 귀입니다. 양심의 귀로 들어 가지고서 그때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판정했습니다.
이랬는데 하나님의 그 음성을 양심의 귀로 듣고서 거게 가서 그런 말 하면은 여로보암 왕은 세력이 강하고 나라도 크고 이러니까 거게서 생명이 바쳐지는 일이지마는 하나님이 그렇게 가라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어서 벧엘로 내려갔었습니다.
내려갔는데 마침 가자 여로보암이 거게 제사하려고 그때에 와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 주신 것이 분명하구나. 와서 보니까 이거 여로보암 왕이 이 산당에 제사지낸다고 지금 와서 있구나.’ 거게서 물론 이 하나님의 선지는 더 자기가 들은 대로 생각하고 온 대로 실상이 이루어졌으니까 좋아서 담대히 예언합니다.
예언을 하면서 ‘이 제단에다가 이렇게 제사하는 모든 제사장들을 이 제단 위에다가 다 불살라서 제사드릴 것이고 또 모든 너희들의 인간들의 뼈를 여게 다 사룰 것이라.’ 이렇게 하니까 여로보암이 분개합니다.
또 말하기를 ‘이 제단이, 내 말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가 아닌가 너희들이 이것으로써 증거를 봐라. 이 제단이 갈라져 가지고 이 제단 위에 재가 마구 쏟아질 것이다.’ 이랬는데 그 예언을 하니까 여로보암 왕이 그 소리를 듣고 분해서 ‘이뭐’ 그때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지를 아주 업수이 봅니다.
그 보면은 정치가들이 대개는 종교가들을 업수이 봤습니다. 업수이 봤는데 그 정치가들이 종교가를 업수이 본 그 정치가들은 다 망했습니다. 정치가 쳐놓고 성공한 정치가들은 정치가이면서 그 종교인들, 말하자면 제사장 서기관 그런 사람들에 못지 않는 그런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과 성의를 가진 그런 사람들은 성공을 했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정치가지마는 그때에 종교가 제사장 서기관 그런 사람들보다도 하나님 앞에 훨씬 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도 오늘도 교회에, 교회는 종교와 정치로 이렇게 엄밀히 분리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정치와 종교로 분리할 수 있는데 장로들로 말하면 정치에 소속했다고 볼 수가 있고 목회자로 말하면 종교에 소속했다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거 역사에 보면은 서로 대립돼 가지고 싸우는데 그 싸우는 데는 모두 정치가들은 종교 나쁘다 종교가들은 정치 나쁘다 이래 나오지마는 통계를 해서 그후 세대 사람들이 판정해 보면 그래도 종교가의 과오가 적고 정치가들의 월권 과오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 서기관 이런 분들이 부패하지 안하고 이런 분들이 그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종교가들이 정치가들을 지도하고 정치가들을 압도하고 있고 정치가들을 통치하는 그런 시대는 가장 행복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정치를 통치하지 안하고 정치가들이 권세를 가지고서 종교가들을 통치하고 종교가들은 거게 멸시를 받고 압박받고 있는 그 시대는 안 망한 시대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뭐이냐? 그 교회들이, 종교라 말은 교훈을 책임맡은 목사들인데 목사들이 단단히 서서 교훈을 책임진 목사들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굳게 서서, 굳게 서서 모든 그 정치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장로들을 통솔하고 장로들이 그 교훈에 다 복종하고 거기에 압도되어 있는 교회는 부흥됩니다.
반드시 부흥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종교 맡은 교훈을 맡은 그 사람들이 게을하고 권위 없어서 벌써 정치가들에게 붙들려서 이리 저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교회가 아무리 커도 그까짓 것 잠깐 망해버리고 맙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유명하다 유력하다 크다 하는 그런 교회들이 그래 되는 걸 얼마든지 봅니다.
이래서 성경은 다 그런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보자, 저 교회는 어찌 되나? 저 교회는 정치가 권위가 크냐 교훈이 권위가 크냐?’ 교훈이 정당한 교훈을 가지고 있으면 정치가 교훈보다 권위가 클 리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훈이 빈약해지면은 정권들이 일어나 가지고서 교훈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 되면 그 교회는 커도 작아도 결국은 망해지고 맙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한국에도 보면은 그래 가지고 유명한 큰 교회가 뭐 형편 없이 그만 절단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고 그 교회가 다 부흥되는 교회는 정치는 교훈에 복종하고 교훈은 정치를 통치해서 그 교훈이 온 교회를 끌고 나가는 그런 교회는 뭐 작아도 좀 있으면 부흥됩니다. 이치에 맞습니까? 실상과 맞습니까? 맞아. 맞아.
거게서 지금도 성전 밭마1당과 알맹이 성전, 제단, 경배하는 알맹이가 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서도 껍데기 열 지파가 있고 알맹이 한 지파가 있었는데 거게 소속한 것 두 지파가 알맹이가 있었다. 그것이 남아 있지 껍데기만 되면 망한다. 알겠습니까? 껍데기만 되면 망한다. 성전 밭마당 되면 망한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교회서 어떤 일 하든지 하나님 편과 인간 편 둘이 반드시 네 앞에 보여지나니 빨리 재빨리 하나님 편으로 얼른 들어붙어야 되지 인간 편에 붙어 가지고 있어서는 아무리 그 날이 좋고 평안하고 뭐 세력 있다 할지라도 조만간에 전멸되고야 만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지금 제가 깨달은 대로 증거합니다.
인본과 신본, 요새는 그런 말이 없어집니다. 요새는 강단에서 인본이니 신본이니 하면 ‘저거 호랑이 담배 필 때 말 지금 하고 있는 케케묵은 설교 하고 있다.
저거는 시대에 맞지 않는 설교 하고 있다.’ 저한테도 시대에 맞지않는 설교한다고 시대에 맞은 설교하라고 뭐 일조목 이조목 삼조목 이래 가지고 이대로 고치라고 하면서 신고함에도 써넣는 사람 많습니다.
있어요. 그래도 나는 거게 대해서 보기는 봅니다. ‘정말로 보자. 그게 참 개정이 돼서 좋아지는 것이냐 그게 속화된 인본이냐?’ 그거 살펴봐 가지고 인본이면 그까짓 것 발로 싹 문태 버립니다. 그까짓 하거나 말거나 뭐, 몇이 한다 해도 눈도 뜨지도 안하고 그저 가만히 냅두요.
그러기에 이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 옳고 그른 것이 보여지는데 옳은 것인 줄 알고 그것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거 뭐 하는 것입니까? 뭐 훼방하는 죄입니까? 그게 성령 훼방하는 죄라. 알겠소? 성령 훼방하는 죄는 옳은 줄 알고 그것을 반대하는 건 성령 훼방하는 죄입니다. 그거 하면 망해요.
그러기 때문에 옳은 줄 알면 뭐 인간 예의 체면 안면 뭐 그런 것 암만 많고 요리집에 가서 요리도 많이 얻어먹었고 또 자본도 얻어 쓰고 또 그 사람의 밑에서 여러가지 세상적 유익을 많이 봐도 틀렸으면 싹 돌아서서 옳은 데로 속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저 뒤에 알겠습니까?
그래, 이랬는데 그만 여로보암 왕이 이거 ‘이놈 네까짓 놈이 뭐야, 이놈?’ 잡아 죽여버린다고서 그만 거머쥐고 잡아 태기를 쳐서 죽일라고서 잡을라고 이래 그라니까 그만 하나님께서 그 손을 바짝 마르게 해서 당장 펴 가지고 오그리지를 못했습니다, 빠짝 말라서. 혈기가 말라서. 이란데다가 예언한 대로 단이 꽝 그러며 갈라지더니마는 그만 재가 줄줄 흘러내려가니까 이 여로보암 강퍅한 여로보암 왕이지마는 놀랬다 말이오.
어짤 수 없어서 빌기를 ‘네가 너거 하나님 여호와에게 기도해 가지고 내 이 손이 낫도록 그렇게 해 달라’ 이라니까 그 선지가 기도하니까 나았습니다. 어째 보면 그만 그래 좀 냅두면 좋을 건데 기도하니까, 기도를 잘못했으면 하나님이 안 들으실 터인데 바로 했기 때문에 들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그럴 때도 용서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게 옳다 하는 그런 것을 여게서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자기로 인해서, 자기로 인해서 복받은 것이 되어야, 자기로 인해서 복받은 것이 남아 있어야 되지 아무리 잘못됐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잘못됐다 할지라도 자기로 인해서 사람에게 해를 지운 해가 되고 손해보고 망하게 된 그 결과를 남기는 것을 큰 수치로 하나님 앞에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족속에 가 가지고서 자기 아내 때문에 이제 거게서 아내를 그만 그들이 사로잡고 이 아브라함은 그 말을 아내라 소리는 못하고 누이동생이라고 이래 말하니까 ‘그라면 내가 아내 삼겠다’ 이래 가지고서 거게서 아브라함을 욕을 보이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뺏들었다 말이오.
뺏들었는데 하나님이 지키신 걸 보면은 선을 넘어서 죄짓는 데까지는 가지 안했지마는 그만 뺏들었다 그 말이오. 뺏드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몽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내 종인데 그에 그런 죄를 지었으니까 너희가 만일 그걸 회개치 안하면 내가 너거들을 멸하겠다’ 이라니까 얼른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했지마는 그때 그 값으로 모든 태를 봉해서 아이 밴 것도 나오지 못하고 배지도 못하고 그만 멸종이 돼 버려, 그만.
이라니까,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이해 가지고 그랬으니까 꼬시겠다 이랬는데 하나님 보실 때에 아브라함을 사랑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만일 이래 가지고서 이런 오점을 남궈 두면 이 아브라함에게 흠과 점이지 이것이 영광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귀띔을 했습니다. ‘지금 저래 가지고 있는데 네가 그대로 내비두면 저거는 태가 막혀 가지고 다 죽어버리고 씨종이 망할 터인데 네가 위해서 기도해라. 기도해라. 기도하면 내가 그 태문을 열어서 치료해 주겠다.’ 아브라함이 ‘그놈들 괘씸하니까 좀 그래 냅둡시다' 하지 안하고 ‘아, 예.’ 하고 아브라함도 원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니까 그만 그 사람들 태문이 열렸습니다. 태문이 열리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온 축복이 뭐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줬습니다. 그게 창세기 몇 장에 있지요? 19장 끝에 태문 열리고 20장 초에 이삭 선물로 받았습니까? 아, 그래. 20장 끝에 치료되고 21장에 거게 이삭 받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 사람이야 어쨌든지 자기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고 좋은 효과 났고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어짜든지 복받는 그게 남아 있어야 우리가 안면이 있지 아무리 그 사람이 어떤 나쁜 일 했을지라도 나와 관련돼 가지고 있는 일에서 그에게 불행스러운 그것이 맺혀 있으면 그건 재미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그것을 두고서 꼭 그게 없어지도록 할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얼마나 깨끗게 하실라고, 뭐 얼마나 흠점이 없게 하실라고 한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가 기도하니까 여로보암의 팔이 낫고, 나았습니다. 이라니까 여로보암이 그만 그때사 깨닫고 하나님의 선지를 만류하면서 ‘우리 집에 가서 쉬고 또 음식도 먹고 좀 피곤도 풀고 그래 가면은 내가 자기에게 큰 예물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선지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지? 8절.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의 절반으로 내게 줄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곳에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였음이라 하고” 이거 참 눈 밝을 때 뭘 해야 되는데 다 세월 지나가 버리고 나니까 눈이 어두워서 잘 안 돼요.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서 오던 길로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인제 이랬는데 이 하나님의 사람 이 여게서부터 약해졌어요. 자기가 ‘아, 나는 안 간다.’ 하고 그만 거부하고 가 버리면 그만이지 뭐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해서 떡도 물도 마시지 말라 했고 또 이래서 내가 갈 수가 없다.’ 이게 벌써 약점이라.
하나님을 그만하면 봤지 안했소? 오니까 여로보암이 왔지, 그대로 예언하니까 여로보암 왕이 팔을 내밀다가 팔이 말랐지, 또 기도하니까 나았지, 벌써 왕을 한접 꺾어놨고 벌써 하나님의 권능을 맛봤다 말이오. 맛봤으니까 그만하면 좀 배짱이 있어야지. 믿는 사람 배짱 좀 있어야 돼요.
있어 가지고, ‘떡 먹으러 갑시다’ 뭐 이라면은, 그 말은 괜찮아. ‘내가 너거 집의 절반을 준다 해도 나는 안 간다.’ 얼마나 씩씩해요. ‘나는 떡도 물도 마시러 안 가겠다. 너거 집 안 간다.’ 이라면 될 터인데 아마 하나님이 이래 하셔서 못 먹는다 하는 것 보니까 벌써 약해진 것 같애. ‘왜 안 먹나?’ 이라니까 하나님을 핑계 대야 말해야 되지 그리 안 하면 못 견디겠다는, 못 견딘 모양이라. 여게서도 살살 약한 면이 드러나요.
그랬는데 거게 참석한, 그 지방에 늙은 선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늙은 선지가, 자기 아들이 참석하고서 그 광경을 다 얘기를 했어. 얘기를 하니까 이 늙은 선지가 듣고 ‘그러면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안장을 지워 달라’ 안장을 지워 달라 해 가지고서 안장을 타고서 갔어. 갔는데 간 동기는 어째 갔는지 그거는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가서 길에서 만났어. 이거 그만, 보니까 무슨 나무 밑에 앉았소? 상수리나무 밑에 앉았소? 14절에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는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이래서 못 먹는다” 이랬다 말이오.
여기도 보면은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쉬지도 못하겠고, 먹지도 못하겠고,’ 이게 지금 속에서 뭐 속에 알맹이가 뱄어. 알맹이가 뱄어. 감사함에 넘치지 못하고 불만 불평이 거게 들어 있다 말이오.
인제 ‘하나님이 그래서 나는 못 들어갑니다’ 하는 것이 벌써 정권자에게, 그런 기적을 보고도 압도돼 가지고 있어. 그 압력에 눌려서 압력에 눌려 가지고 있고 또 이 늙은 선지 만나 가지고 이러니까 ‘나는 배가 고프고 뭐 기진하고 죽을 지경이지마는 나는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먹지도 못하겠고’ 가련한 소리를 하는 거라. 가련한 소리를 하는 거. 이래 사람은 약해서 다 절단납니다.
그라니까 그 늙은 선지가 있다가 말하기를 ‘나도 선지자다.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내게 보내 가지고서 선지 네가 배고프고 심히 기진한 것을 알고 그래 나를 보내서 너를 모셔다가 떡도 먹이고 물도 마시고 그래 쉬어서 보내라고 그렇게 말씀했다. 가자.’ 이라니까, 배도 고프고, 또 피곤키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이랬는데 또 선지를 만났지 또 머리가 허연 선지니까 믿을 수 있다 말이오. 젊은 선지 같으면 경솔히 하지마는 나이 많은 선지니까 믿을 수 있어. 이래 가지고 꼬임받았어.
그래 가지고 들어가서 떡을 먹고 마셨는데, 그라니까 하나님께서 그 선지에게 영감시켜 가지고 ‘이 사람이 이와 같이 지금 가다가 시체가 길 가다가서 죽을 것이고, 사자가 와서 죽일 것이고 장사하지 못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떡 먹고 나는데 그 상 앞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말이오. 얘기를 했는데, 이 사람은 그만 그뭐 섭섭하기는 하지마는 안장 지워 타 가지고 가다가 그래 사자에게 찢겨 가지고 절단이 났습니다.
내가 이것을 왜 말하느냐 하면 그때 구약 시대에 영감은 이 신약 시대에 영감과 다릅니다. 신약 시대에 영감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신약 시대에 영감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영감은 그사람들 안에 있지 안하고 밖에 있습니다. 밖에 있어 가지고서 밖에서 영감으로 가끔 가끔 이렇게 영감시켜서 알려 주고 또 알려 주고 난 다음에는 그만 모릅니다. 알려 줄 때는 알고 그 알려 주는 일만 끝나면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 영감은 그 외재적 영감이라고 할 수가 있고 신약 시대에 영감은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약 시대에는 성신의 감화가 어데 계십니까? ○장로님? 우리 안에 어데? 껍데기 안에? 마음 안에. 마음 안에 있다는데 맞아요 안 맞아요? 맞은 사람 손들어 봐요. 오늘 요번에 마치고 나면 인제 사모님한테 이 볶인다. 볶여서 인제 그것이 걱정이 꽉 될 것이로구만. 우리 안에 있는데 마음 안에 성령이 계시면 다 됐을라고? 우리 영 안에 계시고 마음 안에는 왔다 갔다 해요.
와 가지고서 이래 내재해 역사하면 일이 되는데 그만 그렇지 안하고 영에는 항상 영 안에는 계시지마는 이거 마음은 배척을 하거든, 자꾸. 배척을 해 쌓아서.
그래서 문을 두드리노니 열어 달라 하는 것은 마음문 두드리는 거라. 영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 마음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 그 말이오.
영접하라 그 말이오.
내재적 영감이요 외재 영감이요 이렇게 영감이 다른데, 그러고 신약 교회는 단번 영감입니다. 영에게 들어오는 성령은 단번에 들어오고 두 번 아니라. 한번 들어와서 나가지 안해요. 항상 우리 중생시킨 영 안에 계셔요.
영 안에 계시고, 구약 시대 사람들은 영이, 외부에 계시기 때문에 왔다 갔다 이래서 중복적으로 이렇게 자꾸 거듭 거듭 이래 오지 항상 와서 계시지 안하고 왔다가 갔다가 또 새로 왔다 가고 왔다 가고 자꾸 이렇게 됩니다.
이라는데 그분들이, 이 선지자가 벧엘에 가 가지고 아주 큰 일을 했습니다. 예언도 생명 내놓고 예언을 했고 또 그라다 보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여로보암 왕을 그 억센 왕을 꺾어서 아주 꺾어뜨리고 굴복을 하도록 하고 고패를 드리도록 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 선지와 같이 할 때에는 이렇게 권위 있었지마는 그만 이 선지가 하나님이 먹지 말아라 오던 길로 돌아가지 말아라 했는데 망령부리고 그 길로 가고 먹고 마시고 하다가 죽어버렸습니다. 사자에게 찢겨서 죽어버렸어.
죽였는데 사자와 그 나귀가, 사자 보면 나귀가 겁이 나 도망칠 건데 도망도 못 치고 사자도 또 먹지도 안하고 가지도 안하고 거기 지키고 있어. 왜 그렇습니까? 여게서 마귀란 놈은 어짜든지 만일 거기서 사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죽여놓고 가 버리고 나귀도 달아났으면은 그거 아니라고 그렇게 엉뚱이로 두터쓰일 터인데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언대로 됐다는 것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자와 나귀는 그 곁에 서서 있었습니다.
이런데 이 선지는 이렇게 능한 일을 했지마는 그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가지고 나에게 그와 같이 한다’ 해 가지고서 그 말 듣고 가서 떡 먹다가 죽었습니다. 이러니까 요게서, 하나님의 사람 선지가 이렇게 능한 일도 하고 유력한 사람인데 아깝게도 사자에게 찢겨 죽었으니까 그 죽은 이유가 뭐이냐? 어떻게 돼서 그리 됐느냐? 선지가 유혹을 받은 것은, 아주 자기가 증거를 받은 것은 가니까 여로보암 왕이 거게 와서 있었지, 또 그렇게 그거는 당장 죽이는 일인데 그 왕이 자기 나라를 그거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데 그 단을 헐어버리니까 그 정치에 전 전력을 다 멸시하고 파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죽는 예언입니다.
여로보암을 가서 만난 것도 기적이요, 그 예언을 한 것도 기적이요, 또 그 단이 갈라져서 재가 흐른 그것도 기적이요, 또 그 선지를 잡을라고 할 때에 손이 마르는 그것도 기적이요, 말랐는데 위해서 기도하니까 낫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또 자기에게 먹고 마시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것도 또 기적 아닙니까? 오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가라는 그것도 기적입니다. 이것 뭐 하나님 앞에 오만 기적 다 봤고 자기 눈으로 봤고 증거도 확실하고 이런데 이 선지가 미혹받아 가지고 죽었습니다.
미혹받은 것은 어째 미혹을 받았느냐? 미혹받게 된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 혼자 이스라엘 나라의 정권자한테 가 가지고 예언을 하니 그 나라에서는 자기 편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편 하나도 없고 원수 나라에 갔는데 원수 나라에 정권자가 자기와 원수되어 있는 그 나라에 가 가지고서 이렇게 이런 예언을 했으니까 기적은 보기는 봤지마는 잔뜩 외롭습니다. 알겠습니까? 이렇게 그 기적을 나타내기는 나타냈지마는 외롭기는 외롭다 그 말이오. 외로와. 외롭지 않겠어요, 그거? 외로와.
외로운데 외로운 데다가 또 ‘내가 선지라’ 하면서 선지가 하나 왔으니까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외로울 때에 자기 동지 만나는 것은 참 반갑습니다. 제가 고신으로 더불어 이렇게 투쟁할 때에 나와 한편되는 사람은, 처음에는 개혁하자고 해서 내가 들고 일어났으면 그때 사분지 삼은 나를 따라와 버리요. 이러나 나는 그런 짓을 하나님 앞에 할 수 없어 안 했어. 안했는데, 이러니까 마지막에는 똘똘 뭉쳐서 외로운데 나 동지 아무것도 없어.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어. 그럴 때에 내 동지라고는 김수복 조사님 그분 한 분밖에 없었어요. 또 그 사이는 이인재 목사님 한 분 있었고.
이랬는데 그 외로울 때에 외로울 때에 그때에 자기 같은 선지라 하면서 오니까 그 외로울 때에 자기 동지를 만나니까 그만 거게서 미혹받은 것이 하나됐어.
알겠습니까? 이래서 우리 신앙 걸음에 고독할 때에 주의해야 됩니다. 고독할 때에, 고독할 때에는 반드시 마귀란 놈이 고독할 때에는 나에게 위로하는 것을 갖다 주는 줄 알아야 됩니다. 고독할 때는 위로하는 것을 갖다 줘. 이랬는데 또 그 선지가 왔는데 머리가 허여이 벌써 많은 성상을 지내서 온갖 경험 체험을 다 한,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고 많은 세월을 거쳐서 다 노숙한 사람이니까 또 거게 대해서 빠졌다 그 말이오. 그만 이 선지가 유혹을 받았어.
이러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아무리 그 조건을 볼 때에 이런 면을 봐도 좋고 이런 면을 봐도 좋고 세상 어떤 면을 봐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어떤 면을 봐도 용납하지 안하고 주님이 먹지 말아라 마시지 말아라 그길로 돌아가지 말아라 했으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역력히 맞습니까? 딱딱 들어맞았어. 이러니까 주님 말씀 아니면 받지 안해야 될 터인데, 외로운데 자기를 동정하는 동지 오니까 그만 거게 약화됐어. 또 왔는데 백발노인, 백발노인이 왔으니까 그 백발노인의 많은 경력과 많은 경험 체험이 있기 때문에 철없이 행동하지는 안할 것이라 하는 나이 많은 데 또 유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 걸음으로 아무리 하나님 앞에 능한 일 하고 위대하게 쓰여진다 할지라도, 위대하게 쓰여져서 큰 일을 했다 할지라도 자기가 거게서 고독감을 느끼면 벌써 위험합니다. 그런 줄 알아야 됩니다. ‘어째 내가 그 고독, 외롭고 쓸쓸하고 외롭다.’ 그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셔서 말하는 대로 척척 하니까 팔이 빠짝 말라, 자기를 해하는 자는 팔이 빠짝 말랐지, 또 말하니까 쭉 펴여져 버렸지 이만하면 그런 권능의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데 왜 외롭겠소? 우리가 신앙 걸음을 가다가서 고독감을 느낄 때 그때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고독감을 가질 때에 그때에 위험합니다.
제가 그럴 때에 모든 사람들이 와 가지고서 ‘이러니까 얼마나 외롭겠느냐?’ 하면서 위로하러 오는 사람들은 나한테 눈물 쭐쭐 흘리면서 위로하러 오는데, ‘이렇게 모두 손 골에 돼지 몰리듯이 이렇게 몰리고 하니까 얼마나 그러냐? 그래도 뭐 하나님이 안 계시냐?’고 위로하는데 위로하러 왔다가 내가 원청 자신만만하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도로 힘을 얻고 갔습니다.
외로운 게 가끔 가끔 오는데 외로움이 올 때에 그 선지가 외로움을 고독감을 느꼈는데 그 고독을 물리치는 그런 비결은 뭐이겠습니까? 그 고독감을 물리치는 비결이 뭐이겠습니까? 뭐이겠지요?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셨는데 말씀하는 대로 가 보니까 여로보암 딱 만났거든. 또 말씀한 대로 단이 갈라져 가지고 재가 흘러내렸거든. 말씀하는데 자기를 대항하는 자가 팔을 내니까 팔이 바짝 말랐거든. 기도하니까 성하게 낫아 줬거든. 이만하면 이분 모시면 외로와요 안 외로와요? 안 외로와. 이만하면 돼. 이만하면 돼. 외로울 것 없어.
기독자가 외로울 때에 그때에 외로움을 위로하고도 넘치는 주님을 거게서 찾지 못하면 저는 꺼꾸러집니다. 신앙 걸음에 고독을 가졌을 때에 이걸 찾지 못하면 꺼꾸러집니다.
이러니까 그가 와 가지고 ‘하나님의 천사가 내게 와 가지고 너를 만나라 이렇게 해서 떡 먹이고 물 마시우고 쉬어 보내라고 하더라’ 이라니까 이 사람이 ‘이상하다. 어떻게 이렇게 딱 들어맞았노? 내가 나 아무도 모르게 오던 길로도 안 가고 나 혼자 이렇게 훨훨 오는데 어떻게 알고 내게 찾아와 가지고 딱 만났느냐? 기이하다. 이상하다.’ 그렇지 안해요? 와서 딱 만났으니까 기이하고 이상하지 않소? ‘야, 이분이 어떻게 나를 알아서 이래? 참 하나님의 천사가 보내 가지고 오기는 왔는갑다. 기이하고 이상하다.’ 우리가 고독해서 피곤한 신앙 걸음을 갈 때에 땅위에 이런 것 이런 징조 저런 징조, 이런 징조 저런 징조 어떤 징조라도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거 하나님의 섭리인갑다.’ 네가 폭풍같은 섭리가 있어도, 지진같은 섭리가 있어도, 불덩이같은 섭리가 있어도 거게 여호와가 계시지 않는다. 세미한 음성에 계셨다.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 듣고 자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 를 세워서 하사엘이 복수하지 못한 것은 예후가 할 것이고 예후가 하지 못하는 것은 엘리사로서 너의 완전히 복수를 다 하고 승리하겠다 하는 것은 세미한 음성에서 들어서 여호와 만났지 다른 데는 못 만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늙은 선지도 뭐 ‘조건이 그렇다.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있는데 이런 저런 섭리 보니까 그럴듯 하다. 이 사람은 노숙한 사람이 말하니까 그럴듯 하다. 그분이 천사가 와서 그렇다고 말하니 그럴듯 하다. 나를 어찌 찾아와 가지고 여기서 딱 만나? 이상하다. 그럴 듯 하다.’ 아무리 그럴듯 하다 하는 것 천 조건 만 조건이 나서도 네게 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있으니까 그분이 말하는 그 말이라야 되지 그 말 외에 딴걸 뭐 듣고 작정하겠다고서 하느냐? 너도 선지자니 네게 벌써 말해 가지고서 이적과 기사를 많이 보지 안했느냐? 그러면 네가 공연히 이 조건으로 약화되고 저 조건으로 약화되고 이라는데, 배가 자꾸 고파서 배는 고픈데, 배는 고프니까 이것도 또 유혹 중에 하나라. 배가 고픈데 떡 먹으라 하니까 배가 고픈 그것 때문에 떡 먹으라 하니까 더 거기 구미가 당겨서 유혹받기 쉽다 말이오. 목마른데 또 물 마시라 하니까 또 유혹받기 쉽다 말이오. 피곤한데 쉬라 하니까 또 유혹받기 쉽다 말이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동하고 정해야 되지 자기 형편이 이렇고 저럴 때마다 그런 것은 반드시 마귀가 이용할 수 있는 이용물이지 나에게 이용은 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내가 배고프고 굶주리고 피곤하면 마귀는 그놈을 이용해 가지고 나를 유혹하지 그것이 내 신앙 생활에는 도움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굳게 서서 거게 영향을 받지 안하고 거기에 충격을 피동을 받지 안해야 되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떡 가서, 그뭐 이라니까 모든 걸 자꾸 제 인제 주관대로 해석합니다.
주관대로 이것 보니까 ‘이상하다. 어찌 나를 찾아 만났느냐? 또 그분이 천사가 와서 그란다고서 벌써 떡 먹어라 물 마시라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내가 여기서 안 먹을 줄 어찌 알고 배고플 줄 어찌 알고 내가 안 먹을라 하는 줄 어찌 알았는고?’ 그것도 이상하다 말이오.
그렇지 안해요? ‘너 그리 안 해도 너한테 먹지 말라 했는데, 먹지 말라 했는데 천사를 나한테 보내서 내가 청해 가지고 먹이고 마시고 쉬어 보내라고 그렇게 하더라.’ 그것도 이상해. ‘하, 이상하다. 어떻게 주님이 나 떡 못 먹구로 물 못 먹구로 해서 내가 못 먹고 피곤하고 이렇게 외로와져 있는 것을 알고, 또 요리 온 것을 또 알고, 야,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자꾸 이상이 생깁니다. 여러분들 우리 신앙 걸음에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놈 따라가다가는 죽는 줄 아십시오. 이거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찌 나 물 안 마시고 떡 먹지 말라고 주님이 하신 것을 이 사람이 알고 말할까? 이 사람이 알고 말할까? 그것도 보니까 확실하다. 가자. 안심하고 먹자.’ 갔다 그 말이오. 요걸 여러분들이 깊이 깊이 느끼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환난을 거쳐서 면류관을 바라보고 가는데 참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런데 그래 가 가지고 먹고 마시고 그라고 나니까 그만 그 선지를 통해서 말을 해서 ‘너는 사자에 찢겨 죽으리라’ 말한 대로 오다가 찢겨 죽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그 찢겨 죽은 선지가 그렇게 능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지마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무엇을 사용했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무엇을 사용했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자기 주관과 모든 환경에 있는 주위 환경 그것에게 피동됨으로 죽었습니다. 자기에게 피동되고 환경에 피동됨으로 죽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분이 어데다가 관심을 두지 안해서 죽었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음성 들어 오는 자가 하나님 음성 듣는 데에 관심 두지 안해서 죽었습니다. ‘내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음성에 달렸다. 천만이 나를 죽일라 해도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안하면 못 죽인다. 천만이 나를 구원할라 해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지 안하면 안 된다.
내 죽고 사는 거는 주님의 음성 여게만 달렸다.’ 요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죽고 사는 거는 하나님의 음성에만 달렸다.’ 이렇게 다른 데에 자기의 생사화복의 모든 게 주권이 되어 있지 안하고 주님에게 주권되어 있어서 자기에게는 주님의 음성 듣는 것 거게서만 모든 생사화복은 결정된다는 것을 요걸 잊어버렸습니다. 고거 잊어버렸어. 주님의 음성 듣는 걸 잊어버렸어. 주님 음성 들어서 행하고 주님의 음성 들어서 움직이고 주님 음성 들어서 작정하고 해야 될 터인데 주님의 음성 듣지 안하고 다른 이런 모든 조건들에게 피동됐어.
다른 조건에 피동되면 우리는 망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절단났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어야 듣지요. 만일 그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은 죽겠습니까? 아이고 배고프고 시장타. 네가 그래도 죽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죽는 것보다 나으니까 따라가지도 말고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라 했을 것이라 말이오.
그분이 그뭐 그냥 이래 그만 쭐쭐 따라가려고 그래 본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그래도 그 사람도 쟀을 것이라. 요래 재고 저래 재고 쟀을 것이라. 안 그렇습니까?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저도 그런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도 답답해서 애를 써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내가 그런 것 많이 해 봤어요. 제비 뽑는 것 이래 가지고 이래 막 이래 가지고 많이 해서 스무남은 개 이래 만듭니다. 스무남은 개 만들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서 이제 요랄까 조랄까, 길이 똑 둘뿐이라. 요 길로 가든지 요 길로 가든지 두 길인데 ‘어디로 갈까?’ 이랄 때는 이걸 만들어 가지고 몇십 개를 던지면서 ‘주님이 바람을 주관하고 계시오니 바람을 불어서 내 제일 가까운 데 떨어지면 그것인 줄 알고 내가 주워서 작정해 고거 보겠습니다.’ 한번 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처음에 그리 온 걸 주으니까 요렇다 했거든. 안심할 수 없어. 또 한번 해 봐. 나중에는 또 요렇다 하거든. 또 던지니까 또 요래. 이래 가지고, ‘어라 그라면 자, 숫자 많은 걸 세자.’ 이래 가지고 지금 빼고날을 치는 거라.
‘요리 가라 하는 것이 숫자가 많고 요리 가라 하는 것이 숫자가 적으니까 요리 갈까?’ 그래도 이리 가라 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배가 되게 고프고 가고 싶고 자꾸 가고 싶고 이러니까 그리 선택하지 냉정스럽게 시원하게 그래 가지고는 할 수가 없다 그거요.
이라다가 나중에 참 하나님 앞에 이 탄식이 돼. 이놈의 귀가 있어야 뭐 듣지.
귀만 있으면 그만 당신에게 물으면 ‘주여’ 이렇게 구하면 주님이 `이래라' 할 것인데 이 귀가 없어 탈이라. 귀가 없어서. 귀가 어두워 탈이라, 어두워서.
내가 눈이 어두워서 기막히는 꼴 한번 봤어. 제가 해방 사 년 전에, 해방 사 년 전에 제가 그때에 기도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팔월 십오일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팔월달에 해방된다 이랬어. 사년 후 팔월달에 해방된다 이랬는데, 새소식이라 하고서 신문에다 나를 기록해 주는데 사 년이라 하는 건 글자를 커다랗게 써서 똑똑히 보여 주고 팔월달이라 하는 것도 아삼하게 보이는데 며칟날인지 그거는 암만 봐야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해. 암만 볼라 해도 눈이 어두워서 보이지를 안해요. 이라다 그만 그 장면을 거석해서 제가 글을 썼습니다.
글을 써서 ‘사 년 후면 팔월달이면 이거 해방은 된다. 그런데 남북으로 갈라져 된다.’ 하는 그것을 보고 제가, 꿈에 하도 기이한 거는 기록해서 꿈 기록책에다 기록해 놨어요, 지금도. 그때 기록한 걸.
이랬는데, 그거 눈이 좀 밝으면 그걸 보겠는데, 그래 내가 기도했어. ‘주님이여, 왜 이렇게 눈이 어두워 이걸 보지 못합니까?’ ‘네가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 했는데 아직까지 네 눈병이 다 고쳐지지 안했으니까 안약을 더 써 발라야 보게 된다.’ 이래요. 그 내가 이 성경 보는 데 대해서 탄식을 했어.
요새도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선지를 생각하면서, 선지가 그때 묻기는 물었을 거라. 아마 제비를 뽑지는 못했을지라도 묻기는 많이 물었을 거라.
‘주님이여, 떡 먹지 말라 했는데 또 당신이 그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 가지고서 나를 오라 한다고, 하필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게 딱 들어붙여서 딱 찾아왔지, 또 내 비밀을 어찌 압니까? 주님이 먹지 말라 하고 이랬지마는 나를 통해서 먹으라 했다 이렇게 말하지, 이러니까 이 말 들어야 됩니까 저 말 들어야 됩니까? 천사를 보냈다 하지, 또 그분도 늙은 선지자지, 또 경력이 많은 늙은 선지자지, 나는 젊은 선지자인데 그는 늙은 선지자지, 들어야 됩니까 안 들어야 됩니까?’ 이렇게 묻기를 아마 많이 물었을 거라.
물었을 상바릅니까 안 물었을 상바릅니까? 어때요? 그만 배고프고 이라니까 훅 따라갔을까요? 가고 싶기는 가고 싶지마는 묻기는 많이 물었을 거라. 물었는데 그만 그 선지의 귀가 어두워서 못 들었어. 귀가 어두워서. 귀만 밝았으면, 귀만 밝았으면 ‘가지 마라’ 하는 음성을 분명히 들었을 터인데 귀가 어두워서 못 들었다.
내가 이걸 보고서 이거 참 그 일곱 교회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렇게 말씀으로서 성경마다 어려울 때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씨뿌리는 비유에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러니 이 귀 있는 자는 듣는데 양심이 밝으면 이거 모든 것 다 영통이 다 돼 가지고 다 알겠는데 양심이 둔하고 어두운 이것이 제일 문제다. 이거 참 육안이 어두운 게 문제 아니라 양심의 눈이 어두운 이게 문제다. 이래서 양심을 가꾸고 양심을 길러야 되겠다.
내가 지난주에는 여기 어데 가서 일주일 동안 좀 있었어요. 일주간 있을 때 여기 와서 설교할 준비는 하나도 못했어요. 하나도 못하고 이거 귀 어두운 게 문제라서 좀 귀를 밝게 해 달라고, 그 귀를 밝게 해 달라고 양심에 대한 것 자꾸 와서 그 설교도 하고 양심에 대해서 기도하다가 왔습니다.
이 선지가 귀가 있었으면 들었어. 귀가 있었으면, 분명히 묻기는 물었을 터인데 들었을 터인데 귀가 어두워 못 들었어. 하나님께서 그를 강제로 듣도록 하니까 이래 들었지 제가 물어 가지고서 듣는 그걸 못 들었다 말이오. 제게 필요한 걸 들을라 해도 못 들었어.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거야 섭리로 뭐고 강제로 우리가 안 받을 수 없고 모를 수 없지마는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야 이 하나님의 음성을 영감을 들을 터인데 우리 양심 어두우면, 양심 어두우면 이 선지 모양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자행대로 하기 쉬워.
우리 피곤하니까 우리 얼싸절싸 좋도록만. 여게도 재독이나 듣고 새김질하라 하니까 외로와 못 견디겠어. 이렇츰 사람이 많이 있지만 외로와 못 견뎌. 외로와 못 견디니까 옆에 사람하고 웃고 닳고 찧고 주물고 또 웃고 닳고 밀고 당겨야 이래야 좀 흐뭇하게 좋지 이래 가만히 있으면 외로와서 못 견딘다 말이오.
이런데 이거 이 외로움의 위험성, 헐벗은 위험성, 굶주린 위험성, 피곤한 위험성, 모든 내 이웃을 통해서 오는 수많은 모든 미혹의 위험성 이것을 우리가 다 헤치고 거쳐서, 이 선지가 사자에게 찢겨 죽은 것이 누구냐? 곧 내요 여러분들이요 우리들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여기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고, 물었고, 물었으면 알 수 있고 물어도 귀가 어두우면 못 들을 거라. 구하라 주실 것이라 했지마는 물어도 귀 어두우면 못 들어요.
암만 기도해도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해, 보면. 그 분명히 기도하기 전에도 ‘이 사람은 이게 문제다’ 이게 문제다 해서 저걸 깨달을란가 해도 뭐 금식도 하고 암만 해도 뚱딴지같이 엉뚱한 짓만 하지 그거는 깨닫지 못해. 양심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해.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 안 하는 것도 문제고, 기도 안 하는 것도 문제. 기도 안 하고 주위 환경에 피동되는 그것은 참 자살 행위입니다. 전체가 멸망이지 하나도, 그 환경, 이 선지가 주위 환경 거게 끌려 가지고서 주관적으로 환경 그것 보고서 환경이 몰아치니까 이상하다 이상하다 많이 하면 절단나 버려. ‘이것도 이상한데. 이상히 그 우연히 들어맞았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뭐 이래 됐는데.’ 하나님의 음성, ‘영감 성경의 진리대로 요거다’ 성경 진리로 자기에게 확고하게 깨달아지는 것 그거 외에는 우리가 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거 외에는 피동될 수 없어.
이것을 우리가 아는 데에는 어째야 알아요? 양심이 밝아야 양심이 실력 있어야 아니 우리가 이거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이 양심에 있는데 이 양심을 이걸 가꾸지 안하고 양심을 마구잡이로 이래 가지고 둔해 놓으면은 우리가 사자에 찢겨 죽은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찢겨 죽어 가지고서 일생 동안 예수 믿었지마는 남아 있는 거는 없어. 저 심신의 기능은 전부 죄 짓는 것만 했기 때문에 지옥불에 가서 타고 호소하고 있어요, 고함지르고 있어요.
영은 같이 안 가고 심신의 기능만 가도 심신의 기능 저거끼리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소원도 하고, 이단도 하고, 당도 짓고 뭐 얼마든지 하고 있습니다. 껍데기가 없다고 그 기능이 말 못 하는 줄 압니까? 껍데기가 하는 게 아니라 기능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것이 지금 모두 다 인제 나가면 마구 왁짝거릴 건데 왁짝거려도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안해.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확신해.
이래서 아무래도 우리는 위험한 곳을 이렇게 험한 길을 걸어서 이 선지와 같은 그런 위험한 일이 뭐 한번 두번이 아니라 총총 있는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묻지 안하고 하면은 탈나겠고, 묻지 안하고 기도하지 안하고, 기도하지 안하고 뭣을 작정하는 것, 기도하지 안하고 환경 따라 작정하는 것, 우연 따라 작정하는 것, 이상 따라서 작정하는 것,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내가 신임하는 사람이 말해도 작정하는 것, 성경에는 말하기를, 또 우리 ○○이 선생 알아요? 요한일서 몇장에 있지? 기름부음이 너를 가르치리라 하는 거 몇장에 있어요? 2장 27절. 잘 알았어. 여게 말씀하기를 그래 놨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사람에게 묻고 사람에게 들으라 했어요, 자기 행동할 것을?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랬어.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구름타고 와서 불이 타도 담대함을 준비하는 것, 주 안에 있는 것,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 뭘로 해요?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라” 의를 행할라면 어떻게 의를 행해요? 의를 행하는 게 뭐인데? “사람에게 묻지 말고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옳고 바르게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해야 의가 된다. 그대로 해야 주 안에 있게 된다. 그대로 해야 환난 올 때에 담대함이 된다. 다른 길은 없다.” 요렇게 말씀해 놨어.
이러니까 우리가 이 양심을 참 가꾸어야 되고 길러야, 양심이 장성해야 우리가 주 안에도 있을 수 있고, 환난 때에 담대함을 가질 수도 있고, 의의 거하는 바 의인들을 인도할 때 우리는 그 반열에 참여할 수도 있고, 주 안에 살 수도 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이래 놨어. 이러기 때문에 ‘이래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 `이래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못해요. 못 해서, 말하면 ‘예, 성경에는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했는데, 성경에 이렇고 이렇고 하는데 그거 그렇게 그 참고로 삼아서 한번 생각해서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이러니까 우리가 그때 이 사자에 찢긴 것은 전멸당하지 안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묻지 안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님에게 묻는다고 해도 귀가 어두우면 들리지 않는다는 것, 못 들으니까, 제가 들으면 물을 때에 제가 들었으면,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들을 줄은 모르고, 없고, 선지자가 와 가지고 들었다고 하니까 따라갈밖에는.
남에게 따라가지 말아라. 꼭 주님에게 들어 가지고 너한테 말하는 것 듣고 왔지 너한테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능한 일을 예언해 가지고 그대로 딱딱 맞았고 너와 같이 하는데 왜 네가 네 일은 너한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지 누구를 통해서 가르쳐 줄 거라고서 다른 사람 말을 듣느냐? 들을 수 없어! 그런고로 우리는 양심을 가꾸지 안하면 안 됩니다. 저는 그거, 내게 있는 남은 힘은, 내게 있는 남은 힘은 삼분으로만 쓸라고 하고 있어요. 내게 있는 남은 힘은 하나는 성경 궁구해서 하나님의 뜻 찾는 데 쓰고, 하나는 기도하는 데 쓰고, 하나는 말씀 증거하는 데 쓰고 요 세 군데 외에는 허비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그대로 살려고 하기는 하고 있어요.
양심을 가꾸는 것이 뭐이요? 양심을 가꾸는 것이 어떤 것이 양심을 가꾼다 했지요? 양심을 가꾸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까? 양심을 가꾸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까? 양심을 가꾸는 것은 양심을 찾고 등용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을 가꾼다면 국회의원 ‘아무것이가, 아무것이를 국회의원 내야 된다.
아무것이가 국회의원 해야 된다.’ 자꾸 그 사람을 옹호하고 그 사람을 자꾸 들어내고 선전하고 자꾸 그 사람을 세울라고 애를 쓰는 것이 그 사람을 기르는 것 아닙니까? 어데서든지, 욕심이 쑥 나옵니다, 욕심이라는 놈이 쑥 나와. 우리 마음에는 그 분자가 많습니다. 욕심이라는 마음도 있고, 감정이라는 마음도 있고, 이성이라는 마음도 있고, 뭐 기억이라는 것도 있고 오만 게 다 있습니다. 오만 게 다 있어. 다 있는데 그것을 등용하지 안해.
그것을 등용 안하고 이제 그라면 ‘보자’ 욕심이, 욕심이 돈욕심이 `이래 하자.
우리 이래 하자.’ 이라니까 ‘안 된다. 어라 양심 불러라. 양심 불러라.’ 또 있다가 감정이 있다가 ‘이래야 됩니다 이래야 됩니다’ 막 역설을 하니까 `안 된다. 양심 불러라.' 자꾸 무슨 움직임이든지 마음에 움직임에 마음에 회의가 있을 때마다 의논이 있을 때마다 양심을 앞장세워서 양심을 등용해 가지고 ‘양심에게 물어라. 양심을 세워라. 양심을 앞장세워라. 양심을 우리 통치자로 세워라.’ 자꾸 양심을 이렇게 높여서 찾고 등용하고 양심에게 맡기고 양심을 자꾸 등용해서 양심 세월이 나도록, 양심 세월이 나도록, 아주 양심이 약방에 당감초 모양으로 이렇게 막 쓰이도록 막 양심을 자꾸 찾고 양심을 자꾸 위합니다. 이것이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양심을 헐어 짓밟은 것이 뭐입니까? ‘그거 그래 가지고는 안 되겠는데’ `안 되기는 뭘 안 돼?’ ‘그 양심상 가책이 안 되나?' `양심을 뭐 양심을 자꾸 찾아 쌓아? 돈벌이만 하면 되지.’ 이것이 양심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자꾸 양심을 자꾸 어데서든지 마음에 문제가 있거든 ‘야, 내가 오늘 가야 되겠다.’ ‘양심 물어보고, 양심한테 물어보고.' 또 `오늘은 좀 돈벌이해야 되겠다. 오늘은 그놈하고 싸워서 한번 복수해야 되겠다.’ ‘아니다. 양심한테 물어보자.' 말만 하면 양심, 말만 하면 양심, 말만 하면 양심, 일어나면 양심, 뭣이든지 할라 하면 양심, 이래 놓으니까 이 몸에 여러가지, 마음에 모든 기관장들이 많이 있어. 기관장들이 많이 있지마는 이 기관장이 말해도 ‘가만 있거라, 가만 있어. 양심 불러라. 양심 불러라.’ 저 기관장이 그래도. 이거는 양심만 세월이 나고 양심만 자꾸 찾고 등용하지 다른 것은 꼼짝을 못 하게 하니까 떡 와 놓으니까 양심이 있다가 ‘그라면 안 된다.’ 또 양심이 `그래 하면 된다' 하니까 이 양심 이거 자꾸 독권을 준다 말이오. 양심 독권을 주는 그것이 양심 가꾸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양심 독권 주는 것이 가꾸는 것이오.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양심이 그래 하라 하는 대로 한번 딱 행하고 나면은 그것이 뭐이냐? 양심이 그만치 자라게 되는 것이라. 권위를 얻었어. 제가 떡 시켜 가지고 그대로 달성했으니까 권위 있을 것 아닙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그 한 일은 제대로 된 것 다 아니겠소? 이래 가지고 양심을 길러.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단행하는 것이 기르는 것이요 양심을 가꾸는 것은 자꾸 양심만 등용하는 것이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가꾸는 데에 양심대로 할라 하면은 참 너무 어려워서 큰 희생이 되는데, 큰 희생이 되는데, 양심대로 할라 하면 재산이 절단나겠다. 직장이 절단나겠다. 이 모든 형편이 다 낭패되겠다. 낭패되는 것이 이만치 낭패가 됩니다.
‘이만치 낭패돼 가면서 양심대로 할 것 뭐 있느냐?’ 이만치 많은 낭패지고서 그걸 양심 시키는 대로 해서 이만한 걸 손해봐 가면서 양심대로 했으면 양심은 그만치 컸는데 이만치 큰 양심은 이런 것 억억만 배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양심대로 해서 어떤 것이 희생돼도 희생된 그것보다 양심을 길렀으면 그 기른 양심은 그것의 억억만 배도 더 큰 보배로운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지식하지 않으면은 이 걸음 걷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고 양심 가꾸지 안하면은 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나니 너희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저를 대적하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우리가 우리 앞에 사자가 마구 우는 사자와 같이 어글어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삼키워 찢겼지마는 몰라. 하루 종일 살면서 자기의 심신의 기능은 찢겨서 완전히 시체가 돼 버렸지만 몰라. 이 시체 시체 이것이 모여 가지고 유황불 구렁텅이에서 이를 갈면서 호소하고 있어.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어.
이러니까 오늘 오후에는 우리가 이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준 것이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양심을 가꾸지 안하면은 우리는 두루 삼킬 자를 찾아서 우는 사자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여기에 삼켜지지 안할라면 우리는 기도해야 되고 양심의 인도를 받아서 해야 됩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아 하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양심의 인도받아 하면 그게 믿음이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다 같이 잠깐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세상과 마귀와 죄와 사망과 실패를 이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