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11:43
교역자의 설교준비
본문 : 고린도전서 2장 1절∼8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첫째로 주의한 것은 이 세상 인간들 지혜를 가지고 전할라고 하지를 안했습니다. 세상 인간들의 지혜만으로 가지고 전할라고 하지를 아예 안 했습니다. 또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만을 상대했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런 것은 다 사망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하여서만 오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만 전하고 딴것은 전하지 않기로 주의를 하고 작정을 했습니다. 또 셋째로 주의한 것이 그 전도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그 말씀만 전할라고도 하지 안 할라고 애를 썼습니다. 사람의 말로 전할라고 하지 안하고, 사람의 지식으로 전할라고 하지 안했고 또 십자가 외에, 대속의 공로로 통하지 안한 그런 것도 하나도 전하지 안할라고 애를 썼고, 또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만 계시 말씀만 전하는 그런 전달만 되지 안하도록 할라고 또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 그가. 이런 것은 다 그것만으로 전하는 그런 것이 되지 안 할라고 애를 썼고. 그가 힘쓴 것은 어디 있었는가? 4절에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러면, 자기가 세상 지혜는 의례히 그거는. 그거 가지고는 할려고 생각지도 안했고. 하나님의 말씀, 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때는 뭐 이렇게 다 기록이 이래 안 됐지만 그래도 구약은 다 완전히 완제가 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전하는 그 말씀 전하는 것만으로 하는 그것을 안 할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 말씀 전하면 뭐 말씀 안에 내재적 영감 있고 하니까 다인데, 그러나, 여게서 구별해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암만 해도 거기에 성령과 능력이 같이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의 계시 말씀 전하고 성령과 능력이 그 전함에 같이 동행하지 않는 그런 일이 되도록 안 할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심히 떨었다는 이게 두려워하기를 인간을 두려워했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두려워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자기가 바로 전하면 사람이 살고 바로 전하지 안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세상 지식 가지고 전하나,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오지 않는 그런 것들을 그들에게 전달해 주나, 또 성경 말씀을 가지고 전달하지만 성경 말씀 그 언어만. 그 계시의 말씀만 전달되지 거기에 성령의 동참과 능력 이 같이하지 않는 그런 전달로써 사람을 지식만 가지고 마귀도 하나님의 지식을 이용했기 때문에, 지식만 전달해 가지고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 하는 멸망시키는 그런 일이 될까 해서 심히 두려워 떨었고. 또 그가 그러기 때문에 꼼짝을 못 했습니다. 바울이 꼼짝을 못 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담대합니다. 뭐 무슨 일을 하다가도 그저 전하면 다 되는 줄 알기 때문에 그저 수사를 잘 꾸며 가지고 모든 말할 때에 수사학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또 모든 논리적으로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그것이 세상 지식을 전하는 것보다도 낫고 또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을 전하는 것보다도 낫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말씀만 전하고 거기에 성령과 능력이 같이하지 안하면 결국은 그 전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그 믿음이 되어 있고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이 같이하지 않는 그런 껍데기 외식 믿음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게 되면 자기는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그게 바로 마귀의 일군이고, 마귀가 그 짓 했지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그렇게 안 했기 때문에 비록 택한 자라도, 선지자의 입장에 있어도 그리 되기 때문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고 항상 꼼짝을 못 하는 그런 사람으로 지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예레미아서에서도 보면 말세가 돼 갈 때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성경에 있는 말씀을 다 활용합니다. 성경 말씀을 다 들어서 이용을 하는데,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거나 책망이 되거나 그들이, 옛사람 죄악의 사람이 좀 상해지고 깨지고 절단나는 그런 말은 언제든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듣기를 싫어합니다.
(○○○목사님, 어디 갔었었습니까? 어디 아픕니까? 예? 목욕하고 왔디만? 눈이 빠끔하게 다 죽어가는데 그 전에는 뭐 얼굴이 좋더니만 요새 뭐 좀 그만 교회가 좀 부흥되고 나니까 또 지금 콧노래 부르는 거로구만. 또 그라면 또 내려가, 뭐 별수 없이.) 내가 무슨 말하다 말았지? 예레미아서에 보면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님 빙자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뭐 어떻게 잘 증거하는지, 증거해서 그들이 다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만 가지고 증거하고 또 하나님을 들어서 말은 하고 이렇게 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내가 보내고 간 게 아니고' 그러면, 제대로 행동하고 제대로의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을 할 때에. 신구약 성경 말씀 중에 우리가 증거하지만 말씀을 선택할 때에 자기가 선택했다면 그거는 순전히 그 말씀에 적용은 인간대로 자기대로 된 것이지 하나님이 그 말씀을 당신이 적용시키고자 한 대로 적용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가운데 주님이 이 말씀을 하라 했는지 저 말씀을 하라 했는지 그것이 문제이니까 당신이 하라는 말씀을 증거를 해야 되지 당신이 하라는 말씀을 증자하지 안하고 제 마음대로, 이 말씀 증거할까 저 말씀 증거할까 제대로의 선택하기가 쉽다 그거요. 우리는 뭐 믿는 것이 전부,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을 증거 할 때에 하나님이 증거하고 자 하시는 그 말씀을 증거 해야 되겠고, 증거 하라는 말씀을 증거 해야 되지. 내가 내 생각대로 내 의견대로 내가 모든 주변과 배경을 보고 이 환경에 맞추어서 증거하는 내대로의 증거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 우리는 찍해야 해 봤자 그 생각뿐이고 또 그 정성뿐이지 딴거 뭐 있을 게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 생각과 그 정성과 그 소원 가지고 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증거하시고자 하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셔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입에 넣어 줘 가지고 전한다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그 말씀을 내가 전해야지' 하는 거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내가 내 생각대로 하나님 말씀을 자유 선택해 가지고 이렇게 하는 자가 될까 해서 그 면을 두려워하면서 그런 그 범죄를 하지 안할라고 애를 쓰는 그 이상 우리가 뭐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게 뭐이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넣어 줄 수 있는, 그에게 말씀을 주실 수 있는 그 준비가 된 것이고 또 자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애를 쓰고, 바울은 거기에다가 또, 하나님이 전하라는 그 말씀을 전하지만, 전하지만 전하는 데에 성령이 같이하지 안하고 또 능력이 같이하지 안하면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내차 성경 읽는 걸로 성경 말씀만 기억이 되어지고 알고 있지 그 속에 성령님이나 능력이 아무것도 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믿음이 전부 하나님의 지식적이요, 거기에 영감은 없고 능력은 없기 때문에 그런 믿음이 되지 않도록 그 전하는 데 받은 바의 그 사람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진리 지식이요, 지식이요 또 성령의 감화요 능력이요 이 셋이 하나가 되어 있는 그것이 전해지고 받은 사람 이 셋으로 되어진 사람이 돼야 될 터인데 단지 하나님의 지식만 가지고 전하는 그런 자가 되지 안하도록 할라고 심히 떨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아서에서도 하나님의 종들이 전부 하나님 말씀 가지고 전 하지만, '그거는 내가 보내 전하는 게 아니다. 그거는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너희들이 너희들에게 어짜든지 위로하는 말하고 듣기 좋은 말하고' 자꾸 듣지 좋도록만 합니다. 듣기 좋도록만 하고 위로만 줘서 그저 기뻐하도록 이러니까, 어떤 목사가. 지금 비참하게 됐습니다. 그랬는데 아주 젊을 때는 유력하게 일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분이 집회할 때에, 내가 소문 듣는 그분만 가 가지고 부흥회를 하면 막 노인들이 춤을 추고 온 교인들 이 춤을 추고 그렇게 한다고 그런 말 들었습니다. 집회만 하면 막 교인들이 전부 기쁘고 즐거워서 춤을 추고 아주 노래를 부르고 좋아서 이렇게 모두, 다 상이 펴지고 기쁘고 즐겁다 하는데. 그래 그 말을 듣고 저는 조금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아, 그렇게 참 천국을 보고 기쁘게 했으니까 옳은 집회일까? 또 현재로서 어떤 자리에 있으니까' 병든 예를 들면 지금 우리말로 말하면, 병든 것을 깨닫고 치료를 받아 가지고 기쁠까 그 병을 모르고, '너는 병든 자인데 의사가 말하기를, 딴데 가니까 '암병이라서 이거는 불치병이라. 너는 이 병으로 죽는다 하는데 어떤 의사가 말하기를 아, 이거는 암병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공연히 그것이 오진했지 병 하나도 없다 하면 그 환자가 기뻐하는 거와 같은 그런 기쁨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런 기쁨입니다. 그래 가지고 어짜든지 사람 좋을 말만, 자꾸 이래 하니까 뭐 걱정할 게 있으며 뭐 회개할 게 있으며 눈물 흘릴 게 있으며 고통 할 게 뭐 있으며 밥 굶을 게 뭐 있습니까? 이러니까 교인들이 좋아하지만, 그라니까, 그때는 좋아해서 일시에 대부흥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거창 함양 합천 이 삼 군 중에는 그 교회가 제일 부흥이 됐습니다. 뭐 그 교회 교인들은 모두 썽썽하이 기백이 장성하고 이랬었는데, 나중에 그 교회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고 그래 가지고, 회개 안 하고 자꾸, 속에 병이 들어 있는데 근치하지 안하고 껍데기로 발라 놓고 건강하다 평안하다 하다 하면 그 병이 없어집니까? 나중에 그 병이 심해지니까 결국은 망하고 말았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좀 전에 여게 여기 어디서 와 가지고 교회 한다 하던데 교회가 됩니까? 그거 완전히 바꿔야 될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에 기록한 종들도 그런 종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이 성경 깨달음이나 이 도리를 안 것은 뭐 최고를 알았습니다. 최고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서 그래 최고를 알았지 뭐 백 목사는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안한 사람이오. 최고를 알았습니다. 어제도 ○○○목사님이 증거하는 그 세 가지가 그것이 뭐 어디든지 가 가지고 듣는 말이 아니고 아는 말이 아닙니다. 또 오늘 아침에도 새것으로 사는, 내나 그 계통이 쪽 맞는 거라. 내나 그것이 지난밤에 설교나 오늘 아침 설교나 꼭 같은 설교라.
새사람으로 새것 가지고. 새것 가지고 새 생활 하고 새것 만들고 새 행복 누리는 거 그것이 전부 내나 주의 것으로 하는 거와 꼭 같은 것이라. 한 말이라 말이오.
우리는 알기는 이래 알아서 아는데, 우리가 전하는 이 전함이 만일 진리를 참 정화하게 깨달은 그 깨달음 거기에만 있고 거기에 성령이 동행하지 안하고 능력이 동행하지 안한다면 우리는 비참한 외식자가 되고야 말겠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묘한 설교를, 아주 깊은 진리의 묘한 설교를 할려고 애를 쓰는 것 그것도 좋기는 좋습니다만 그거 다 껍데기입니다. 또 설교해 가지고 교인들이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아서 아주 많은 감화 감동을 받으면 좋겠다 해 가지고 감화 감동을 받도록 그렇게 할라는 그것도 껍데기입니다. 또 설교해 가지고 자기가 이제는 참 인기를 끌어서. 설교 한번 잘 해 놓고 '이제는 일주일 동안 문제없다.' 그러면 자기 목회자 대우나 또 교회나 뭐가 다 평안하리라 이렇게, 보기에 평안하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도 다 외식입니다. 어짜든지 우리는 설교 할 때에 하나님이 전하는 말씀을 전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전하는 말씀을 전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은 설교를 월요일부터 설교 제목 내놓고 본문 거석하고 연구하고 모든 주석들을 참고해 가지고 오만 거 다 그렇게 또 놓고 떼고 정선하고 정서하고 정서하고 모든 거 다 수사해 가지고 그렇게 하는 그것도 좋지만 만일 그것뿐이고 그 속에 알맹이가 잘못됐다면 그것 도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 하는 사람들인고 그것보다도 성경은 평소에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성경은 성경대로 연구하고 다만 이 시간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오늘 주일날 이 양떼들에게 당신이 전파하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당신이 전파하라는 그 말씀을 전할라고 애를 쓰고. 내대로의 선택하지 안하고 그분이 전하라는 그 말씀을 전할라고 그분에게 '무슨 말씀을 정해 주실랍니까?' 묻는, 그분을 향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루고 이틀이고 일 주간이고 그렇게 그분을 향하여서 그분의 그 인도하심을 받을라고 애를 쓰는 고 마음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거 우리에게 있어, 설교자들은 그거 있어야 됩니다. 그거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여게 오백여 교회가 왔는데 다는 만나지 못했지만 한 삼사 백 교회 교역자들을 만나 가지고 얘기를 했었는데 얘기할 때마다 저는 그것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반사들을 양육합니까' 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런 특별히 양육하는 그런 것은 없고 다만 그저 주일날 설교하는 것. 대예배 때 설교하는 것, 새벽으로 설교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라니까 '야 그것만 가자고 될까?' 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뭐 제가 실지로 여기 반사들에 대해서 다른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뿐이지. 또 그 외에 더 반사 양성에 대해서는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는 것을 저는 확실히 압니다.
또 그라니까 말하기를 '그러면,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할 때 이것도 대개는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 많고 그럴 때에 눈을 바짝 뜨면서 이해를 가지는 그런 사람들도 종종 있기는 있기는 있었습니다. '왜 주보를 안 합니까?' '네, 저는 주보하는 것이 내가 뭐 주보하는 거 나빠 그런 게 아니라 주보를 하는 게 좋은 줄 알고 주보를 하고 싶지만 주보를 낼 만한 그런 지금 그 모든 준비가 없고 실력이 없어서 그래 못 냅니다.' 이라니까 그 사람들이 다 웃어요. '다른 게 아니고. 주보 내는 데에는 그날 설교 본문과 제목과 내용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지, 그 다음에 뭐 광고 어쩌고 하는 그런 것은 낼라면 낼 수 있는데 그걸 못 해서 못 냅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사람들이 이해를 안 해.
그러나 저는 중심이 사실입니다. 언제든지 주일날 설교는 무슨 설교든지, 내가 이 성경보고 이 설교해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내가 하는 것이 잘 못됐는지 안 잘못됐는지 그거는 뭐 내가 모르지만 내대로는 성경보고 이거 해야 될까 저거 해야 될까 그래 본 일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씀을 지금은 주실랍니까' 할 때에 주님이 나에게 그 성경에 대해서 '이 말씀을 증거하라' 하는 그것이 확실히 옵니다. 여러분들도 뭐 다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 주님이 이 말씀 하라 한다' 확고하게 압니다. '주님이 이 말씀 하라 한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라는 그 말씀 전했으면 벙어리같이 전하고 더듬으며 전하고 뭐 조직이 없고 또 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그저 전하라는 말씀은 전했으니까 그 전하게 하는 그분이 그 말씀을 통해 가지고 넉넉히 일하실 수 있겠지' 해서 선택하는 데 제일 중요합니다. 제일 중점적으로 참 좀 힘을 씁니다. 다른 거는 설교에 대해 다른, 성경 연구는 평소에 하고 기도는 평소에 하지만 설교 그것은 제목 얻는 것이 그것이 참 힘이 듭니다. 어느 설교하라고 하는가, 먼저 척 스미스 목사도 말하기를 성경을 계속해서 이렇게 내리 가르쳐서 주는 것은 참 제목을 얻을라 하는 것보다도 참 쉽다 이라는데, 그게 쉽습니다. 쉬운데 쉬운데. 저는 그것이 만족되지를 안해서. 그만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쭉 계속해서 가르치는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좋은 줄 아는데, 거기에는 그래 가지고 그분이 교회가 많이 부흥이 되고 이래 됐다 하니까 대단히 좋은 점이나마 나는 그래도 그 점을 따라가질 않습니다. 뭐 성경을 거석해 가지고 이래 하면 되기는 되지만, 그 좋은 점도 그때 많이 말했습니다. 저는 꼭,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시킬란가' 이래서, 한 오분 전, 십분 전 삼분 전, 이분 전,' 30분 전에 설교할 설교 제목을, 성경 본문을 얻는 일은 별로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 설교인가 할 때는, 저 양산동에 가서 기도를 하고 이래 내치 했었는데 주일날 설교할 것을 그저 제목을 뭐 주시는고 이래 가서 자꾸 하나님께 구하기는 구했는데, 그때에 한번 수월한 꼴 봤습니다. 지 난 주 내가 여기 설교한 것이 삼십 팔 년된 병자인가 거기 했지? 그랬는데 그것을 토요일날 한 여섯시 돼서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거 내나 많이 자꾸 많이 말씀한 말씀입니다. 줘서, 그걸 나는 주저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주님이 증거하라 하시는 것인 것을 알아서. 그러니까 그때부터 평안합니다. 그래 받고 난 다음에 그때 뭐 그날 오후에는 참 토요일에는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뭐 그라고 난 다음에야 뭐 그저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마음대로 뭐. 그 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당신이 무슨 말씀 전하라 하는가 그것을 찾는 고 어려움의 고통이 없으니까 그만 고 일을 터놓으니까 큰 일 추 놓으니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일이 없어.
그래 가지고 잠도 잘 자고 그랬습니다.
그라다가 그만 너무 낙관해 가지고 주일날 설교할 때 그날 아마 내가 조금 실수한 것 같습니다. 왜? 그날 그만, 어려워서 그때까지 애를 용을 쓰고 있다가 들을 때에는 설교할 때에 하나도 참 실수가 없이 내보기에는 하나님이 붙들고 이래 쓰시는데, 미리 안심하고 이제 됐다 하고 안심하고 난 다음에는 정 꺼꾸로 외의 일이 나온다 말이오. 무슨 실수가 있느냐 하면 그날 설교하면서 큰 소리를 해 쌓아서 내 목이 좀 쉬었어요. 쉰 그것은 소리를 남용했기 때문에 그래 필요 없는 소리를, 어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제가 목소리를 제 맘대로, 하나님이 내라고 하면 큰 소리 내지만 소리를 남용하기 때문에 '이놈아 내가 소리를 남용했으니까 이제 그 값을 받아라' 해 가지고 목이 쉬게 했다는 것을 그걸 제가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라는 그 말씀을 증거하는,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성경을 물론 성경대로 해석을 다 바로 해서 가르치는 것이 좋지만 해석을 바로 해서 가르치는 그게 그렇게 어디 뭐 쉽습니까? 또 해석은 또 이래도 하고 저래도 하고 넓은 범위에서 말하면 아무리 성경 해석 못 하는 사람이라도 그 해석이 바로 된 해석입니다. 성경은 넓은 범위로 말하면 거기에 대해서 다 그래도 근방에 간 그런, 그거까지 다 포함된 그런 넓은 범위에서는 그 해석이 다 바른 해석들이라 말이오,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하면은.
이런데, 거기에 이제 중요한 것은 성령이 같이 해야 되지 성령이 같이 하지 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그 능력이 같이 하기를 원하는, 그러니까, 한 번도 마음놓고 제 맘대로 설교할 수는 없고 그저 그분이 동참해서 인정하지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그분이 동행하지 안하면 뭐 전달돼야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또 능력이 없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했는데 그러면, 능력이 이게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내나 십자가의 능력 아닙니까? 십자가의 도인 이 십자가 도인으로 살아가는 그 능력이지 뭐 딴 능력이 없다 말이오. 그러면, 그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걸 예사로 들을 게 아니라.
왜정 말년에 선천 고을에는 예수 안 믿는 집이 뭐 네 집 있다 하는데 그 뒤에 ○○○목사님 동생 교회의, 동생이 목사인데 가 가지고 집회할 때에. 선천 사람이래요. 물으니까, 네 집이 그렇다는데? '아, 네 집이 아니고 한 집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거는 좀 전에 말이지 한 집도 없이 선천 고을에는 전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러니까 뭐 장이니 시장이니 그런 거는 의례히 안 돼요. ○○○목사님도 목사님이고 그 동생도 목사님인데 거기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 때에 신사 참배 안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니까 우리 교회서 어디 선천 사람이 와 있었던가 써 올렸어요. '목사님, 그거 너무 과격한 말씀입니다. 선천, 내가 선천 있는데 목사님들이 자 가지고 감옥에 가서 매도 많이 맞고 그랬습니다.' 그래 내가 뒤에 '그리면 오전 같은데, 매를 맞았으나 매 맞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신사 참배 안 한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매 맞고 굴복하면 그냥 굴복하는 거나 뭐 꼭 같은 것이지 딴 게 뭐 있느냐? 하나도 실은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말이 정확한 말이라 말이오. 그게 뭐이냐? 그게 능력 없는 믿음 아닙니까? 능력 없는 믿음. 자기가 주위와 환경에 따라서 피동되는 것은 능력이 없는 증거라 그 말이오. 능력이 없는 증거요, 능력이 없으니까 생명 없는 증거 아닙니까?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됐기 때문에 그래. 또 성신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래 지금은 지금도 그때입니다. 왜정 말년 때도 막 서로 감투 쓸라고, 장자 할라고 야단을 쳐 가지고, 그때도 뭐 총회장 할라 하면 운동을 상당히 했는데 그 총회장 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게 돈만 가지고 총회장 해 놓으니까 그때 신사 참배 때 어려움을 당해 놓으니까 그거 뭐 지체할 거나 뭐 있습니까? 전부 다 그들의 종이 돼 가지고, 앞잡이가 돼 가지고 야단을 지겼지. 여기 심지어 여기 저 ○○○목사님도, 내나 이 서부교회가 ○○○목사 교회서 나와 가지고 된 교회인데, 그 목사님이 우리 한국의 장로교 총회장 아마 뭐 칠팔 번 지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유력한 분입니다. 이랬는데, 왜정 말년에 붙들리고 이러니까 저 송도 앞바다에 가 가지고 천조 대신 이름으로 전부 목사들 모아 놓고 세례 다 줬습니다. 안 주면 위에서 죽일라 하니까 뭐 능력 없으니까, 새 생명 없고. 오늘 아침에 설교한 거와 같이 새것 없으니까, 새 피조물, 새 능력. 새 지혜. 새 소망.
새 사랑. 새 방편 없으니까 전부 옛사람 방편 가지고 예수 믿었으니까 그 방편 가지고 총회장 몇 번이나 됐지만 그 사람이 그런 생활 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이 새사람 옛사람 성경에 있기는 있지만 새사람이니 옛 사람이니 하는 이것을 강조해 가지고 새사람이 뭐이며 옛사람이 뭐 이라, 새 것으로 살아야 되겠다고, 새것으로 살아야 되겠다. 새사람으로 살아야 되겠다 새 소망으로 살아야 되겠다. 새 일 해야 되겠다, 새것 가지고. 새것으로 살고 새것 가지고 살고. 새것 가지고 새것 만들고, 새것 누리고. 새것으로 부강을 가지고 이라는 이것이 말은 쉽지만 그게 참 성령의 능력이 와, 가지고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벌써 이만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저 목사님은 자꾸 요새는 뭐 표적 안 말하는가? 대창골에서 오백 뭐 사십 몇 명이 나았다는 그거 나는 자꾸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뭐이냐? 우리 진영에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그거야 뭐 사람이 증거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같이 한다는 그걸 나타낸 거 아닙니까? 뭐 사람이 들어 그랬습니까? 어디 몇 사람 그런 거는 있을 수 있지만 어찌 오백여 명이 그 자리서 다 무슨, 안 나은 병이 없는데, 어떤 병이라도 안 나은 병이 하나도 병 종류 쳐놓고 백 열 다섯 종류인가 다 나았으니까 그게 하나님이 하신 거 아닙니까? 혹 마귀도 능력을 행하기는 행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마귀가 어떻게 와서 능력을, 마귀 역사를 할 수 있습니까? 이거는 의심할 수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거해 주시는 증거라 그 말이오. 또 진리도 하나님께서 '아. 맞다 인정하는 표현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여게서 힘을 얻고 일을 하는 데는 외식자가 되지 안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저 먼저도 말하기를, 지금은 표적이 필요한 때가 왔다. 왜? 말로만 가지고 교리와 신조만으로는 전부 신학자입니다. 옛날 신학자가. 뭐 어거스틴 같은 그런 사람들 대신학자라 하지만 어거스틴보다 지금 주일학생들이 훨씬 더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깨달은 그때 깨달은 것보다 지금 주일학생이 많이 깨닫고 있다고. 훨씬 진리를 많이 알고 있어 요 교리와 신조를. 사도들이면 성경 기록할 능력이 있지 사도들은 다 많이 안 줄 압니까? 아니오. 사도들 그때 사도들보다 지금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꾸 그렇게 가르쳐 이렇게 자꾸 새로 전개시켜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모두 다 교리와 신조적으로는 다 신학자요. 또 설교로는 대설교가요, 또 뭐 민첩하기로. 종교적 민첩으로 말하면 참 최고의 민활하게 됐고, 또 이거는 벌써 우리나라에 그런 어려움이 없고 지나간 지가 한 삼십여 년 되니까, 6.25지나간 지가 올해 뭐 몇 해 됩니까? 35년, 그러니까 한 34년 동안 평안 무사하게 지나가는 것이 우리 여기 지역으로서는 별로 없습니다. 장 무슨 환난이 있었지. 이런데, 그래 평안하게 지나가 고 나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뭐 아무 진가의 표시가 나지 안할 만치 지금 때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목사님이 설교할 때 전부 정통이라. 자기가 또 보수진영이라, 자기가 뭐 진리라. 사람마다 다 하니까. 다 하는데, 그만 설교를 들어 평가해 보면 뭐 그거 다 백점이오. 백점 아닌 사람이 없어. 이만치 된 이 세대인데, 그렇게 모든 외부의 전도하는, 설교적으로는 그런데 그게 다 성령과 능력이 같이 하면 좋기는 쫓지만 거기에 성령과 능력이 같이 하지 않는 그런 유사들이 많이 있으니까. 우리는 별사람입니까? 별사람이 아니라 말이오. 우리도 잘못하면 그런 사람되기 쉽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전하는 그 말씀을 자기가 가르침 받아 가지고 그 말씀을 바로 전할라고. 그 말씀을 전할라고 애쓰는 요기에 실상 목회하고 설교하는 것이 뭐 기름이 짜여지고 녹아나는 것이지 성경만 가르칠라면 성경 그거야 뭐 거석하지만 한 달 내내 열 달이고 뭐 자다 가르쳐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거 한번 알아 놓으면 그대로 알 면 되는 거지 뭐 딴 거 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시간 무슨 말씀을 전하라 하는지 그거는 암만 몇 십 년 숙달이 돼도 그거는 숙달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알려줘야 되고 안 알려주면 모르고 하기 때문에, 이거는 우리 주관 행위에서 되는 게 아니고 객관이 내게 알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참 항상 일 학년이라. 항상 일 학년 입학생이라. 이거는 항상 당신에게 묻는 것이니 처음 일이라 말이지요.
이렇지, 그러니까, 여게 우리가 힘을 써야 우리가 외식이 안 되고, 이 바울이 두려워 떨었는데, 떨었는데 우리는 거기 대해서 담대하다 말이오. 이는 담대함이 없이 우리가 떨려야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내대로의 내 말씀인지. 어쨌든지 성경 말씀이라도 제가 전했으면 제 말이지 뭐. 제 말 아닙니까?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도 성경 말씀 가지고 전했는데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만 그러나 문서 계시는 우리가 이리 저리 이용할 수 있지만 성령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이용당하지 안합니다. 그분은 생존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용당하지 안합니다. 그러니까, 영감이 같이 해 줘야 되겠고, 또 그 능력은 파괴와 건설의 능력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파괴할 것을 파괴하고 건설할 것을 건설하고 또 보수할 것을 보수하고 하는 그게 능력인데, 능력이 있는 믿음이 돼야 되지. 우리가 이 우리 진영이 이라니까 지금도 다 이렇게 말하고 서로 다 보수고 뭐 정통이고 이라지만 앞으로 아무래도 환난이 오기는 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진가를 물론 당신이 알고 있지만 세상에 있는 동안에 보여 가지고 그 진가를 알아서 다문 얼마라도 깨닫고 거기서라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이 그 진가를 알릴 그런 시험의 때가 을 것입니다.
제가 그때 망운산에, 남해 망운산에 가 가지고 얼마 동안 있으면서 기도할 때에는 앞으로 환난에 대해서 나에게 알려주시는데, '이번의 환난은 정금등대들만 당한다. 그 나머지기는 아무 환난이 없다. 정금등대만 이제 순교하고 나머지기는 순교가 없다 하는 그런 것을 제가 그때보고 자다가. 누워 잤는데 그걸 그렇게 외쳐 줘서 그래 내가 정금 등대라 하는 건 있기는 있는데 성경 어디 있는가 내가 몰라서, 성경 어디 있는가 몰라서 찾아 볼라고 성경 어디 있는가 몰라서 떠듬떠듬 거리며 이래하고 있으니까 그래 가르쳐줘서, 스가랴서에 있습니까? 예. 그래서 그때에 내가 성경을 그때 그만, 다른 걸, 뭐 깜깜한 그 그래 밤인데, 성경 어디 있는고 이라니까 스가랴 4장을 보라 하는 것을 거기에서. 그래 그때 내게 열어서 보고 '그러면, 정금등대가 돼야 되겠다' 해서 정금등대가 되고. 싶어서 그래 인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이제 의심 없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것은 우리가 벌써 확신을 가졌고, 또 우리가 배운 이 진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라는 걸 우리가 알고, 이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전하라는 그 말씀만 전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겠고, 또 우리가 전하는데에 성령이 동행하시기를 우리가 노력해야 되겠고, 또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노력을 해서. 우리가 전하는 그 전함을 받는 그 사람들의 믿음이 지식에 있지 아니하고 진리 지식과 성령과 그 능력에 있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실지가 이루어져야 되겠다 말이오.
그걸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이건 참고고-말하고자 하는 거는 그거였습니다. 내 나 사도행전 3장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그 이름이 무슨 이름이가? 그거는 어디 있지요? '나사렛 예수' 6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이 병을 낫게 했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낫게 했다, 그러면, 그 이름에 대해서 운동이라고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 나사렛 운동, 예수님의 운동 그리스도의 운동이라. 그러면, 이 운동을 믿을 때에 이 능력은 와 가지고 일하실 수 있었다.
그러면, 일해 주심을 받는 거는 뭐이냐? 예수로 말마암아 난 믿음이 받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 말씀을 가지고 오백여 명이 낫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요 말씀을 예사로 들을 게 아니라 가져야 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그 이름이 일할 수 있고 안 믿으면 일 못합니다. 그 이름을 믿는 일을 자기가 계속해 볼라고 하면, 계속해 볼라고 하면 가치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뭐 거기서는 무슨 과학적인 그까짓 과학을 다, 초과학의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그 운동. 그 운동을 인정하면 됩니다.
나사렛 운동이 뭐입니까? 나사렛 운동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가지고 모든 예정, 창조. 보존 섭리 다 그 이름에 들어갔고 나사렛이란 이름에 들어갔고.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나사렛에서 삼십 년 동안 사생활에서 우리를 대속하는 사생활을 베푸신 낮아지심에까지 거기에 까지의 모든 순서 그 전체가 어떤 운동인가? 그거 믿어야 된다 말이오. 믿어야 되는 것. 이 무슨 이거 지금 전쟁 난다 해도 저거는 저거대로 한다고 뭐 이렇게 하지만 그 모든 전개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대로 전개되는 거 아닙니까? 예정이라, 또 모든 존재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안 한 종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모든 창조와 모든 전개하는 모든 거 이, 전부가 다 이것이 나사렛 운동이라. 하나님이 지금 땅위에, 낮아지시기까지의 배푸신 모든 거기에 구비된 운동이라, 그라고 난 후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하신, 대속하신 공로. 대속하신 공로도 우리가 그리 쉽게 말할 게 아니라 자꾸 뭐 '이 외에는 알지 않기 작정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가 죽으심은 한 쪽은 부활이요 한 쪽은 죽으심이기 때문에 낮아지심과 또 이래 죽으심, 그러면,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절정입니다. 가운데 점. 한만당 한만당이고 정점인데 양쪽으로 이래 내려서 하나는 하늘에서 낮아지심이요 하나는 또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거,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낮아지심이요, 여기 십자가에서 최고 절정을 이루어서 승리를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사실을 믿을 때에 능력이 옵니다. 믿을 때에 담력도 오고 평강도 오고, 그러면, 거기 뭐 아무 돈이 드는 것도 없고 수속되는 것도 아무 것도 없고 그만 이 사실을. 이 큰 지극히 큰 운동을 믿으면 돼요. 믿으면 능력이 와 가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런 변화를 시켜서 사람병을 고쳐 주시는데, 이것을 예사롭게 새겨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 이 말을 자기가 깊이 새겨서 듣는 사람들. 자, 이 외에 알 게 뭐 있겠습니까? 이 외에 뭐 철학을 알 겁니까, 과학을 알 겁니까, 그까짓 어떤 신학을 압니까? 20세기의 신학 그까짓 퀘퀘 묵은 썩어진 것 같은 신학 그게 뭐 힘이 있습니까? 다 이게, 이 걸, 이 알맹이 가진 신학이라야 산 신학이지 이 알맹이 없는 것이면 그거 다 껍데기도 다 못 쓸 껍데기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 중대한 것을 자기가 새기고 새겨 가지고 이 사실을 믿는 일을 공부하면 평생 믿는 일 공부해도 또 미진 미진 미달 미달일 것인데. 이 외에 큰 게 없다 말이오. 이 큰 것을, 이게 크다는 것을 알았으면 소망이 꼭 같고 노력이 꼭 같고 표준이 꼭 같기 때문에 곧지만 사람들 이제 각각 다른 것은 뭐이냐 하면 소망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오. 제 장기가 달라, 지금. 목적이 다 예수 믿는 거 같지만 목적이 따로 있다 그 말이오. 목적 있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을 뭐 크게 말하면 주님에게 목적 있는, 주님 목적이든지 그리 아니면 제 목적이든지 둘밖에 더 있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마냥 주님을 위해 산다고 믿음 생활한다고 해도 전부 제 목적이라. 제 것이라. 이러니 때문에, 원수는 저입니다.
이래서, 이 큰 증거가 나타났으니까 우리가 어짜든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 운동을 자기가 명상해야 되겠고, 그 운동을 믿을 때에 우리는 커집니다. 믿으면, 믿을 때에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게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그렇지만 거기 뭐 무슨 뭐 인간적인 과학적인 무슨 작용이나 그런 게 있었습니까? 믿으니까 하나님이 와서 일했지.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그 이후로부터 목적을 위한 모든 운동의 전 운동은. 그 운동은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하기 때문에 그만, 역사해서 '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미리 아들 돼 버린 거라. 믿고 뭐이 되는 게 아니라 믿는 그게 바로 그 자체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이 은혜를 교만이 들어서 살리지를 못합니다. 다 포기해야 돼. 포기하고 여게 전심 전력 기울이십시오. 나는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이제 작정했다. 했습니다.
그 외에 뭐 있습니까? 그 외에 있는 거 그거 가지고 짜다라 뻔들빤들한 그거는 전부 수치가 됩니다.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다 있습니다. 아무 가치 없어.
오늘 아침에도 ○목사님 설교를 하는데, 조금 눈이 떨어졌어. 눈이 떨어져서, 아마 자꾸 산에 다니고 이래 쌓아니까 눈이 떨어져 조그매 지금 아름아름하니 새 세계를 지금 보는데, 그거 보는 것도 나중에 좀 있으면. 좀 있으면 나중에 가서 그만 속화돼 버리고 그만 더러워져요.
더러워지는데. 우리는 꼭 세 군데서 살아야 됩니다. 이 세 군데서 살아야 되 지 세 군데서 안 살면 안 됩니다. 하나는 뭐이냐? 하나는 병. 하나는 병. 병에서 살아야 되고. 또 하나는 고침 받은 고침 받음에 살아야 되고 또 하나는 병 고친 그 사이에 들어 있는 그 기쁨. 이 세 가지가 언제든지 병행해서, 제가 새로운 병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새로운 기쁨은 만나지 못할 것이고 새로운 또 고침은 받지 못합니다. 그거 없으면 그만 권태나고 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까지 올라 갔다가도 떨어집니다. 그러기에 앞선 자가 뒤선다 말은 올라가도 그것이 없으면 그만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뒤져 버리고 뒤선 자라도 올라가기 시작하면 그것만 가지고 계속하면 그만 잠깐 올라가 버리요.
자. 잠깐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작정을 합시다. 이제는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라 하는 고 말씀을. '주의 음성을 듣고 고 말씀을 내가 이제는 설교하지 내 맘대로 성경 보고 뒤적거리는 찾는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꼭 나에게 요 말씀 전 해라 하는 고 말씀을, 그저 제가 잘 듣든지 못 듣든지 어짜든지 자기 마음에 '아. 주님이 이 말씀 주셨다. 이제 전하라 한다' 그걸 확실히 알아집니다. '전하라 한다.' 그것을 받아 가지고 전할라고 애를 쓰고. 전하는데 성령이 같이 안 하면 아무 소용없다, 능력이 같이 안 해 주면 소용없다. 이라면 사람 속여서 죽이는 것뿐이다 하는, 요 세 가지를 단단히 작정하고 이제부터 요 출발하기로 하고 우리가 가면 반드시 광명을 볼 것이요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이 자기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를 시간마다 새롭게 하실려고 종들을 통하여 모든 것을 밝히 가르쳐 주시고 열매 맺게 해 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주의 주신 양떼를 맡아 가지고 있는 자인데 양떼에게 있는 그 모든 것은 내게 있는 흠점이 확대된 것이요 양떼에게 의로운 것이 있다면 이는 내게 있는 의로운 것이 확대된 것이요 내게 있는 의는 주님에게 있는 의가 내게 오셔서 비추어져서 이루신 것인 것을 저들에게 알려 주시고 무책임하고 방종하였던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새 것이 되었은즉 새 사람이 새 것 가지고 새 일을 하여 새 것을 만들어 새 것의 모든 행복을 누려 주님 앞에 영광 돌릴 것도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맡은 자들인데 주님이 때를 따라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을 또 한번 느꼈습니다.
저희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을 전할 때에 그때는 성령이 같이 하시고 그때는 능력도 같이 하셔서 듣는 자에게 진리와 성령과 능력이 그들에게 함께하셔서 그들의 모든 받은 것이나 들은 것이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나 가진 모든 것이 다 성령적이요 능력적이요 진리적으로 이루어서 다 영생이 되어지는 것도 이 시간에도 말씀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이제는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이 주님의 것인 것을 점점 연구해서 깨달아 아는 가운데 자라가게 하시고. 또 주님의 종인 것도 점점 깨달아 자라가게 하시고 주님의 성전인 것도 점점 깨달아 자라가게 하시고 주님의 지체인 이 존영한 것인 것도 깨달아서 자라가게 하시고 주님의 몸인 것도 깨달아 자라가서 몸으로 살고, 주님의 신부인 것을 깨달아 주님의 유일한 상대자로서 배우자로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제는 주께서 이 공로로 말미암아 주의 제사장이 되었사오니 주님의 제사장인 것을 알고 제사장으로 살고 주님의 선지자인 것을 알고 주님의 선지자로 살고. 주님이 세우신 왕인 것을 알고 왕으로 살아 단일 통치로써 저들의 남은 여생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수종 들고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거룩한 나라이며 주님의 거룩한 백성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거룩한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남은 때에 사는 저희들이 되도록 항상 깬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는 주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되오니 우리 각자 속에서 이 능력이 역사하사 이 모든 옛사람을 다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지금 이 시간 의논하는 데도 이 능력이 우리 안에 계셔서 모든 의사가 다 동일한 의사 곧 주의 의사가 우리의 의사가 되어서 의논 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일사 단결로 이렇게 이루어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