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4 11:27
교리논쟁-육체의 욕심의 정의
1986. 11. 20. 새벽 (목)
본문: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읽어 내려가면서 필요한 때는 한 마디씩 해석을 붙여서 깨우치게 하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이 내가 *하는 것은 성경 기자 바울이 기록한 것인데 바울이 말한 것이나 바울의 말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주님이 다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바울이, 기록하기는 *바울이 *기록했지마는 말씀은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영과 육체가 순종해서 성령의 인도대로도 살고 또 마귀가 인도해서도 내나 그 육이 삽니다.
성령의 인도는 영과 육이 다 하나가 돼 가지고서 인도를 따라서 살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는 육체 생활은 영은 거게 가담하지 안합니다. 반대합니다. 그러나 이 심신 이거는 어리석습니다. 심신 이거는 어리석어서 마음과 고기덩어리 이거는 성령을 따라서 움직일 때도 있고 악령과 악성, 악성은 인간이 타락해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것이 악성이고 악령은 하늘에서 타락해 내려온 악령, 마귀. 그걸 따라서 삽니다.
이래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는 육체의 욕심이라 말은, 요거 잘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과거에 이 육체라 하는 것은 그 원어가 싹스인데 ‘싹스는 부패성이라’ 다 이렇게 모두 해석을 했었습니다. 고려신학교 제가 다닐 때에 ‘육체는 원어가 싹스이기 때문에 그거는 부패성이라’ 이렇게 다 온 학교와 그때에 고신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았었습니다.
이랬는데, 제가 그때에 성경 해석한 거는 다 이것을 부패성으로 보지 안하고 이 몸으로 봤기 때문에 저한테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는고로 제가 그때 그걸 변호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르친 것은 틀렸다 이라니까 그거 하나 틀렸다면 다른 교훈이 다 틀렸다 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내게는 큰 부담이 됐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쳤으면 사람들을 잘못 가르친 건 큰 심판 받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됐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어를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육체라는 것이 뭐인가? 모두 다 그거는 부패성이라 이렇게, ‘그 원어가 싹스인데 부패성이란 뜻이다. 부패성을 싹스라 한다.’ 이렇게 모두 다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깨닫고 다른 사람을 가르쳐 놓은 것이 정반대가 돼 있습니다.
이래서 그거 내가 그걸 알아 보고 과연 잘못 됐으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모두 다 가르친 데다가 말을 해서 이거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까 이거 고쳐 달라고 그렇게 뭐 어떻게 하든지 알려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 부담에서 그때에 원어를 아는 사람, 지금 ○○○목사가 같이 그때 신학교 다니면서 내게 배운 사람인데 그래서 그 원어를 좀 찾아보라 이랬습니다.
원어를 찾아보라 하면서 ‘육체라는 그 원어가 싹스인데 그 싹스가 무슨 뜻인고 찾아 봐라’ 그라면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를 것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거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육신 그것도 내나 이게 싹스가 아니겠나 해서 찾아 보니 그게 싹스였습니다, 싹스.
그래서, 그러면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그런 말이냐? 그거 어째 싹스를 거게는 그러면, 그러면 부패성으로 모두 다 해석하고 있는데 부패성으로 해석한다면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육신 그것이 싹스니까 그러면 하나님 말씀이 부패성이 돼 가지고 땅에 왔다 말이냐 하는 그것으로써 아주 아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열어 주셔서 그 성구를 원어를 찾아보라 해 가지고 그 원어가 그것이 싹스인데 예수님이 말씀이 부패성 돼 가지고 오지 안했습니다. 말씀이 이게 내나 몸, 인간의 육이 돼 가지고 왔다 그런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그것이 완전히 그때에 전부 고쳐졌습니다. 아마 그후로는 육신의 원어 싹스를 부패성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 고신 진영에서는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이라면은 이 싹스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말인데 그러면 싹스의 욕심을 이루지 안하리라 하면 그 싹스가 부패성이라 부패성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모두 다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몸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이 육체라 하는 것은 어떤 걸 가리켜 말한 것인고 하니 지난밤에 말한 대로 우리의 영육은 다 독립성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지 안했고 다 피동성 있도록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무엇엔가 피동을 당하고 지배를 당하도록 그렇
게 했지 혼자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만들어 놨는데 영은 특별히, 사람의 영은 특별히 하나님에게만 피동되지 마귀에게도 피동되지 안하고 어떤 피조물들에게도 피동될 수 없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왜? 사람의 영은 믿는 사람의 영이나 안 믿는 사람의 영이나 그 영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제일 근본이 탁월해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그 영물들도 있고 땅에 있는 영물들도 있지마는 그 영물보다 높이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은 사람을 형상대로 지을 때에 다른 것은 그만 하나님이 그대로 일률적으로 지었지마는 사람을 지으실 때는 특별히 “우리가 이 사람을 어떻게 지어야 되느냐?” 하는 특별 삼위일체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회의 있은 게 거기 나타났고, 그래 가지고서, 하기를 “우리 형상대로 짓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자 이랬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자 말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짓자. 하나님의 속성대로 짓자. 하나님의 본성대로 짓자. 이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모형적 본성입니다. 또 우리의 이 속성도 하나님은 근본 원속성이요, 원속성이요 우리 사람은 그와 꼭 같이 되어 있는 모형적 속성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이라. 그말은 예를 들면은 이거는 생화요 참꽃 생화요 그와 꼭 같이 만들어 놓은 조화라 하는 말과 같이 하나님은 근본 자체가, 자체가 자존하신 자체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에게 지음 받기를 하나님과 꼭 같이 지음 받았다 이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자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 지배받지 안하면 마귀에게 지배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만 지배받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지배받게 돼 가지고 있고 모든 피조물보다는 탁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배를 받지 못하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어데 가서 뭐 지배를, 마귀의 지배를 받겠습니까 어떤 피조물의 지배를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거는 지배받지 못하게 돼 가지고 있는데 다만 하나님에게만 지배받는 게 사람의 영인데 하나님에게 지배받는 그 관계가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써 끊어졌습니다. 끊어져서 끊어진 그 영은 다시는 아무 것에게도 지배를 받지 못하고 존재하기만 존재하지 그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어 있습니다. 기능은, 기능이라는 거는 하나도 움직이지, 움직이는 거는 전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불택자들의 그 영은 영원히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거는 죽은 그 영으로서 하나님과 끊어져 아무 기능 작용이 전혀 없는 존재로서 그 심신의 육하고 한테 이래서 심신의 육에게 실려 다닙니다. 심신에 육에게 실려 다니면서 작용이라고는 전혀 없고, 이 택자들은 중생될 때에 그때에 다시 하나님과 새로 연결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연결이 돼 가지고 연결된 그 영은 이제 하나님에게만 꼭 피동이 되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중생된 사람에게 있는 영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고 다른 것에게는 피
동되지를 못합니다. 또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은 아무 것에게도 피동될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죽은 영이 이 심신하고 같이 함께 있는 것이 그것이 중생되지 안한 불택자들의 영육입니다.
이래서, 영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 피동 관계가 끊어지면은 아무것에도 피동되지 못하고 그거는 있으나 없는 거와 꼭 같이, 기능적으로는 없는 거와 꼭 같이 완전히 죽어서 완전히 동작을 하지 못하는 그런 영으로 영원히 불택자들은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중생된 그때부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또 영감과 진리 이 셋에게 연결이 돼서 이 셋에게만 피동됩니다.
그러면 중생된 사람의 영은 언제든지 이 셋에게만 피동되지 중생된 사람이 범죄한다고 해 가지고 그것이 마귀에게 피동돼서 중생된 영까지 범죄하는 것 아닙니다.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않고, 중생된 사람은 범죄합니다. 그러면 중생된 사람은 범죄하는 것은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안하고 중생된 사람의 심신은 범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된 영이 범죄하나 안 하나 하는 문제가 우리 전국에서만 소동될 뿐만 아니라 세계에 이것이 가 가지고서 많이 퍼쳐졌습니다. 이래서, 중생된 영이 범죄하나 안 하나, 범죄하지 않는다 해 가지고서 제가 ○○노회에서 정죄를 받았었는데, 거기서 노회에 정죄를 받았었는데 그 ○○노회원들도 그뒤 정죄 받고 난 다음에 약간 말은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는 것들을 제 밑에 있는 모든 목사님들이 가 가지고 얘기하니까 ‘우리는 그거 모르는데 백지 그때 그만 그래 결의가 됐다’ 이라고 말없이 가만히 둬 두니까 지금 ○○노회에 있는 노회원들도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의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그때 또 ‘중생된 영이 범죄 안 한다 하는 것은 잘못이라. 이단이라.’ 이래 가지고 정죄할 때에 ○○노회에 그때에 그 노회서 그 역사를 한 이가 누군고 하니 ○○○ 목사님이 주장을 했고 거게서 또 ○○○목사님이 같이 거게서 하나가 돼 가지고서, 내나 그 노회 있었기 때문에 주장을 했고 ○○○ 목사님은 그 배후에 배경이 돼 가지고서 주장을 해서, 그 뒤에 말하기를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잘못이라. 이단이라.’ 이렇게 말만 했기 때문에 그 논문을 쓰라고, ‘논문을 좀 내서 이렇게 좀 기록을 해서 서면으로 기록을 해 놔야 모든 사람들이 이걸 보고서 그 시험에 들지 안할 것 아니냐?’ 해서 그걸 논문으로 내겠다고 하는 것을 ○○○ 목사님이 논문으로 내겠다고 했고 ○○○ 목사님이 논문으로 내겠다고서 그렇게 말을 선언한 것을 제가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그뒤에 그분들이 다 미국을 갔습니다. 미국 가 가지고서 벌써 ○○○ 목사님은 오래 지냈습니다. 미국 가 가지고서 아마 한 약 십 년 됐는지 십여 년 됐는지, ○○○ 목사님은 서울 와 가지고 이랬는데 저하고 그뒤에 만났습니다. 만났는데 그런 말 일체 하지 안하고서 그 논문이 안 나왔습니다.
내 뒤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걸 논문을 내든지 해서 이래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확실히 알 건데 자꾸 이렇게 사적으로 집회할 때나 얘기하고 무슨 신문에나 이렇게 내지 안하고 이러니까 모두 다 알지 못하고 이라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거 논문을 좀 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제가 그때 대답하기를 ‘나는 거게 대해서 논문 낼 생각이 없다. 왜? 너희들이 내가 논문을 안 낸다 하니까 아마 확신이 없어 그라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내가 논문을 안 낼라 하는 것은 내가 논문을 내 가지고서 안 그렇다 그렇다 자꾸 시비를 하면은 도로 아직까지 깨닫지, 별 사람이 아닌데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지마는 아직까지 깨닫지 안한 사람이 그만 왈칵 반대하고 나면 그뒤에 돌아오기가 어렵다, 자꾸.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서로 이 다투는 것은 결국 그것이 유익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거기 대해서 논문 쓰지 않겠고 누구든지 논문을 내면은 내가 그 논문에 대해서 답안의 내가 논문을 내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데 그뒤에 논문이 하나도 안 나왔습니다.
○○○ 목사님이 미국 가셨는데 미국 가서 연구해 가지고서 논문을 낼라고 연구를 하고 하면은 반드시 논문을 못 냅니다. 아마 연구를 했으면 지금은 벌써 중생된 영은 범죄할 수 없다 하는 것을 벌써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 뒤에 아무 말이 없습니다.
육체의 욕심으로 살아서 안 되는 우리이걸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된 것인데 불택자들의 영, 말하자면 중생되기 전의 영은 기능적으로는 아무 작용을 전연히 하지 못하는 완전히 죽어 있고, 기능적으로는 죽어 있고 영원히 작용 못 해, 활동을 못 하요. 영의 기능은 활동을 못 합니다. 완전히 그 기능이 죽어 버렸습니다. 죽은 시체로 돼 있습니다. 시체로 돼 가지고 있고 다만 고기덩어리,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 하는데 육이 살아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지 중생되지 안할 때 움직이는 것은 영육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육만이 마귀에게 피동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택자들이 중생된 후에는 영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영감과 진리를 따라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마는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이라 하는 이것은 그 영이 주인은 주인인데 영에게 순종해서 영에게 피동, 피동이라면 거게 따라서 움직인다 말이오. 이거 지금 종이 이라면 이거 종은 내게 피동됩니다. 나는 원동이고, 이거 움직이는 원동이고 이거 내 움직이는 팔 움직임에 이 종이 따라서 움직이는 이걸 가리켜서 피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요런 단어는 여러분들이 익혀 놓고 있으십시오. 원동이라, 능동이라 말이나 원동이라 말이나 같은 말이고 피동은 그 말이 피동되는 거 따라 움직이는 거, 원동은 이것을 움직이는 거, 따라 움직이는 거는 피동이라. 이거 움직이는 거는 원동이라 또 능동이라 이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걸 가리켜 능동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영은 언제든지 예수님의 피공로, 세 가지 대속과 영감과 진리 이 다섯 가지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지마는 영원히 변동을 안 합니다. 급할 때나 슬플 때나 아무리 환경 속에서도 고기덩어리 심신 이게 어리석게 죄를 짓지 영은 영원히 죄짓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은 영생으로 중생했습니다. 영생으로 중생했다 말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끊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중생된 사람이라도 영은 변동 없이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성령과 진리를 따라서만 영원히 움직이지마는 중생된 사람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이 육은 영을 따라서, 중생된 영을 따라 움직일 때도 있고 또 이것이 영을 따라 움직이지 안하고 망령되게 영을 배반하고, 제 주인인 영이 지도하는 영의 지도를, 인도를 배반하고 이 간교한 악령, 악령이 들어서 꾀웁니다.
꾀워 가지고서 ‘악성으로 살아라. 악성으로 살아라.’ 이러니까 고기덩어리하고 마음하고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에게 말하기를 요거 잘 안 들으면 요거, 성령의 인도가 있는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바짝 눈이 떨어지고 그만 꽉 잡혀집니다. 그게 아직까지 고기덩어리로, 영이 약한 사람과 강건한 사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의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육이라, 육체라 이라는데 이것이 중생된 영을 따라서 움직일 때에는 자기 주인에게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게 정상이요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신 요것도 유한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심신 요것이 중생된 영에게 따라 순종할 수도 있고 중생된 영을 배반하고 ‘네 중심으로 살아라’ 이 마귀란 놈이 와 꼬와 가지고서 ‘마음 너 좋도록 살아라. 고기덩어리 너 좋도록 살아라.’ 이라니까 아무리 이 술먹는 것이 안된 짓은 안된 짓이지마는 고기덩어리 이놈은 술을 먹고자 한다 말이오. 그러면 그 마귀란 놈이 ‘너 고기덩어리 좋은 대로 먹어라’ 또 영은 ‘그거 먹으면 그거는, 사람이 그걸 먹게 되면은 마음이 다 그만 어두워지고 이래 가지고서 어두워진다.’ 그러기 때문에 술을 먹으면 사람에게 의의 마음이 없어지고 그만 탁해지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붉은 술을 보지도 말아라” 이랬습니다. “보지도 말아라”1
그러면 그 붉은 술이라 말은 그거 그때는 포도주를 말한 것인데 예수님이 그뒤에 포도즙을 성찬에다가 당신의 피와 살로 인용해서 그 성찬할 때는 우리가 포도주를 먹지마는 다른 때는 먹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붉은 잔을 보지도 말라” 이랬습니다. 그거 왜? 해독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왜 성찬은 그라느냐?
예수님이 그것을 성찬은 당신의 피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 포도즙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성찬할 때만 먹지 다른 때는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 여기 와 가지고 포도주를 담아 놓은 것이 한 말가웃이나 말국만 짜놓은 게 있었는데 그걸 안 먹고 그냥 둬서 그때 십 몇 년인가 뒀습니다. 십 몇 년인가 안 먹고 그대로 뒀다고 나중에 그거 다른 사람 줄 수도 없고 이래서 그걸 전부 변소에다 다 들이 부어 *버렸습니다. 변소에다 버려서, 지금은 그때에 그 깨닫고 난 *다음에, 성찬식 하니까 다 그걸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다 포도주 이런 거는 먹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저는 먹지 안했습니다. 지금 안 먹은 *것이 한 약 한 삼십 년 돼 가지 않는가 그래 싶습니다.
지금은 또 어떤 데에서는 맥주는 먹는다, 또 뭐 포도주는 먹는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분들이 지금 그렇다고 그거 죄지었다 막 이래 떠들어 그거 맥주를 먹는다 어짠다 떠들 게 아니고 그거 깨닫지 못하면 다 그래. 그래 가지고 깨달으면 차차 차차 안 먹을 수 있다 말이오.
언제 어떤 진영에 교수들이 맥주 먹었다 해 가지고서 시비가 일어나 가지고 많이 있다고 그걸 저한테 와서 어떤 사람이 묻습디다. ‘그것은 그거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분들이 확실히 깨달으면 안 먹는다. 그러니까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훼방하지 말고 안 먹는 자는 먹는 자들을 그렇게 업신여기지 말아라” 성경에 다른 것을 그래 말했다 말이오.
내가 그 성구를 말하면서 ‘그러니까 그분들이 깨닫지 못해 그런 것이니까 거게 대해서 너무 그것을 두고 시비할 필요가 없다. 담배 피는 거 가지고도 그거 몰라서 그런데 그거 가지고서 뭐, 담배 피면 죄 다 지은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거 몰라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고칠 것이 아니냐?’ 지금은 그 진영에서 교수들이 그거 일체 안 먹습니다. 그때 그런 말이 나고 난 다음에는 안 먹는 줄 알고 있습니다. 맥주를 지금 안 먹는 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여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리라” 하는 요라면 요만치 해석을 했으니까 이 육체라 하는 것은 부패성을 말합니까 사람의 심신의 육체를 말합니까? 뭘로 지금 이 시간에 배웠지요? 이 육체라 하는 것은 원어에 싹스인데 그것은 인간의 심신 육을 말합니까 부패성을 말합니까? 부패성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심신으로 되어 있는 그 육을 말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녜, 요렇게 확정을 지우십시오.
요것도 참 물의가 많았습니다. 그때 제가 그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아주 요것 때문에 ‘보라, 원어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무식한 소리 안 하느냐? 그거 원어에 싹스인데 싹스를 몸으로만 이렇게 해석을 해 가지고 이래 가르칠라니까 전부 이 틀리지 않느냐?’ 이래 놓으니까 내 교훈이 막 박살이 나고 만다 그말이오.
이래서 그때 그러면 내가 그걸 뭐 어서, 박살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어서 그거 사과를 해야 되겠고 신문을 내도 내야 되겠고, 이거 다 많은 사람이 배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 아닙니까?
이랬는데, 그래서 그걸 그때 내가 ‘요걸 뭘 가지고 물어야 요리 될까?’ 요래
보니까 그때 알 만한 그 성구가 내가 두 군데에 나타났었습니다. 하나는 요한음 1장 14절에 아마 그것이 원어에 싹스가 돼 가지고 있겠다 싶어서 그걸 내가 물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하는 그 육체 그걸 봐야 알기 때문에 육체 그걸 가지고 말하니까 그분들이 말하기를 ‘이 육체는 예수님의 육체가 아니고 인간들의 육체를 말한다’ 자꾸 이렇게 말해.
인간들의 육체를 말한다 하는데 그걸, 그리 그렇게도 말하면은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지마는 그래 우겨댈 때는 내가 그거 판명을 똑똑히 못 하겠다 그말이오. 그래 요한복음 1장 14절 가지고 하니까 그거는 그만 꼼짝을 못 하게 딱 돼서 확 고쳐져 버렸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깨닫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이시지 제가 깨달은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자가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에게 대해서 제가 교만할 수 없고 자랑할 수 없고 제가 높은 척하면은 하나님께서 ‘이놈아, 너한테는 다시 깨닫게 안 해 준다.’ 깨닫고 난 다음에 교만을 지기는 자는 그 교만 지기면 그 사람 망하기 때문에 다시 깨닫게 안 해 주고 겸손한 자에게 자꾸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만한 자, 깨닫고 난 다음에 제 단독으로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교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더 이상 깨닫게 해 주시는 일이 없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 자살 행위 아닙니까? 그래 자랑할 수 없다 그말이오.
그래서, 그러면 이 육체라 하는 것은 원어가 싹스인데 싹스는 부패성이 아니고 내나 인간의 심신으로 된 육을 가리킨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했는데 여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 하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 하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부패성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이 심신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어느 말이지요? 심신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로 그렇게 알려지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녜, 그겁니다.
그러면, 이 육체는 뭐이냐? 육체가, 우리 중생된 사람의 육체가 무엇에게 지배받을 수 있다 했지요? 무엇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다 했지요, 뭐? 지도 받는 것이, 중생된 자의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이 육이 몇 가지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고 몇 가지가 자꾸 서로 인도할라고 애를 쓴다 했습니까? 고거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시이소. 예, 잘 알았습니다. 요 둘입니다.
둘인데, 하나는 성령. 성령하고 우리 중생된 영하고 두 쪼가리입니까 한 덩어리입니까? 두 덩어리입니까 한 덩어리입니까? 한 덩어리입니다. 한 덩어리라서 중생된 영의 인도는 내나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러기에 인제, 그래서 로마서 8장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육에게 증거한다” 그렇게 거게 똑똑히 그 한 성구가 쓰여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게 있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다” 하는 이 육체는, 육체 이것은 그러면 중생된 영의 인도를 받고 있는 이 육체입니까 중생된 영의 인도를 받지 않는 육체입니까? 무슨 육체이지요? 중생된 영의 인도를 받지 않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알겠습니까?
육체의 욕심이니까 그러면 이 육체는 제 단독이 지금 행동하는 제 단독 욕심입니까 그것이 중생된 영을 따른 욕심도 아니고 성령의 욕심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했으니까 이 육체의 욕심은 이것은 육체 제 단독 욕심입니까 이 욕심은 그 육체가 악령에게 지도를 받은, 지배를 받은 그 육체의 욕심입니까 이 욕심은 무슨 욕심입니까? 여기 남반에? 제 단독 욕심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봅시다. 하나도 없고. 그러면 그거 그 심신으로 된 그 육체는 성령의 인도도 아니고 중생된 영의 인도도 아니니까 악령의 인도라고 깨달아지는 분들 남반에 손들어 봅시다. 다 들고.
그러면 여반에도 그것은 성령의 인도도 아니고 중생된 영의 인도도 아닌 그 육체가 성령과 중생된 영의 인도를 받지 안한 그 육체의 욕심이니까 그 육체의 욕심이 육체의 단독 욕심이라고 생각하는 여반들 손들어 봅시다. 녜, 단독 욕심은 아닙니다.
왜? 단독으로는 이 육체가, 육체나 영이나 단독으로, 인간의 영육은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배웠습니까 움직일 수 없다고 배웠습니까? 움직일 수 있다고 배웠습니까 없다고 배웠습니까?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러분들 요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걸 또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이게 그렇게, 암만 신학에 공부를 암만 해도 이게 거게 그렇게 똑똑히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나타나기는 나타나 있지만 또 아는 사람들을, 읽어도 모르기 때문에 잘 모른다 그말이오.
그런데, 사람의 영과 육은 단독으로는 움직이지 못하고 꼭 어떤 것에게 피동되도록만 하나님이 만들어 놨다 그말이오. 만들어 놨는데, 그러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이 육체, 이 육체는 영이 함께 들었습니까 영은 안 들고 심신만 들었습니까? 이 육체는 영이 그 한테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영은 한테 있지마는 움직이는 데에는 영은 반대되고, 영의 지도를 안 받으니까. 영과는 반대되고 이 심신 육 제 단독이, 단독, 그것은 단독은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으니까 그 심신이 영과 성령의 지도를 안 받고 지금 욕심을 내고 있으니까 그 욕심은 무슨 욕심이겠습니까? 그 욕심은 그 심신이 무엇에게 지배받은 욕심이겠습니까? 악령에 지배받은 욕심입니다.
그래서, 요 육신의 욕심이라 하는 요것은 악령에 지배받은 욕심이라 하는 거를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 성경에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이래 자꾸 육체를 많이 말했는데 요걸 지금 똑똑히 구별해서 똑똑히 모르게 되면은 성경, 마귀란 놈은 고거 모르면 고거 가지고 그만 설설설 뭉케 가지고 전생활을 버리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기독자가 여게서 지금 도둑 맞는 것이 십분지, 예를 들면은 십분지 오 이상을 도둑 맞고 있습니다. 십분지 오 이상을 이걸 잘 모르는 통에 도적을 맞고 있다 말이오. 이렇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러나 이걸 사람들이 예사로 여긴다 말이오.
그러면 여게, 이러니까 육체의 욕심이라 했으니까 육체의 욕심이라, 우리 심신의 욕심이라고 이렇게 말하면 그거는 ‘심신이 그거 어데 나쁜 것이냐? 심신이 성령에도 인도함을 받는데.’ 그거 그라면 안 되니까 ‘요것은 육신의 욕심은 나쁘다고 말한 거는 분명하니까 육체의 욕심이라는 이 육체를 부패성이라고 해석해야 되겠다’ 해 가지고서 ‘이 싹쓰는 부패성이라' 그렇게 모든 신학자들이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해 가지고 온 모든 신학자들이 그 ‘육체는 원어가 싹스라’ 그렇게 다, `부패성이라' 그래 가지고 다 공통 지식을 다 가지고 왔더라 말이오. 왔었는데 거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게 싹스이기 때문에 ‘이것도 그라면 이 부패성이냐?’ 하는 데에서 완전히 뒤비지기를 여기만 뒤비진 게 아니라 아마 거게도 다 뒤비졌을 겁니다. 다 그게 고쳐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진리 깨달음 하나 잘못 알면 전체가 망하고 만다는 걸 이렇게 말하지마는 여러분들이 모르기 때문에 이 중대하게 이렇게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중대하게 여기고 이걸 심각하게 여기라 하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부득이 그 역사를 뚝 이거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거 말하다 보니까 여러분들 때문에 그 역사 말하니 이 설교록 보는 사람은 거게서 깨닫는 사람은 ‘이게 과연 이렇게 됐구나’ 하고서 깜짝 놀래 깨닫지마는 껍데기 보는 사람은 이거 또 모든 사람은 ‘제가 제일이다. 천하에 유아독존이다.’ 이래 가지고 또 ‘그놈 교만한 놈이다. 독선주의다.' 이래 가지고 또 자꾸 몰리게 된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제가 그 이름이 ‘안하무인이다, 한국의 엘리야다, 유아독존이다, 독선주의다, 교만한 자다.’ 이렇게 명패를 붙인 것이 어데서 어떤 양반이 붙였습니다. 그거 내가 세상 떴는데 내가 말하지 않습니다. 다 알고 있어. 왜? 저 고려고등 성경학교 가서 말을 했고 또 신학교서 말을 했고 이라기 때문에 그 말을 하고 여기 서부교회 오는 고려고등 성경학교 학생들과 고신에 학생들이 여기 서부교회 새벽기도 나오면은 정학을 시켰습니다. 정학 시킨 그걸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요것밖에 없어요? 뻐뜩 들어 봐요. 지금은 아는 사람이 있지마는 좀 있으면 아는 사람들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 말 하면은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역사가 지내가면 그러기 때문에 가끔 가다 말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여기 못 왔소, 정학을 해서. 이렇기까지 된 그런 모든 논평들이 있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잘못 알면 죽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교리라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교리를 따라서, 교리 따라서 그 교파가 가는 것입니다. 교리가 삐뚤어지면 그 교파는 다 삐뚤어지게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우리를 끌고 있지 않습니까? 이 교리와 신조가 우리를 끌기 때문에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게,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게 나쁘다 말이요 좋다 말이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으니까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나쁘다 말이요 좋다 말이요?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나쁘다고 말한 것으로 이렇게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나쁜 것이라 그말이오. 나쁜 것 아닙니까? 나쁘다 말 않습니까?
그러면 그 육체의 욕심을 나쁘다 했으니까 그 육체의 욕심 그 육체가 고기덩어리와 이 심신의 욕심을 나쁘다 해, 그 심신의 욕심, 심신 단독 욕심을 말합니까 심신이 성령과 중생된 영에게 순종하지 안하고, 순종하지 안하고 그게 심신이 움직여지니까, 사람의 심신을, 육을 지도할 것은 둘밖에 없는데 성령의 지도를 안 받으니까 누구 지도 받았습니까? 악령의 지도. 요렇게 똑똑히 구별해서 딱 알라 그말이오.
이거 새벽기도 안 나오면 몰라. 오늘 아침에는 좀 많이 나왔는데 새벽기도 안 나오면 몰라요. 오늘 아침에 나온 사람들은 한 구백 몇십 명 돼. 아직 오늘 아침에도 천 명은 안 돼요. 천 명이 약 될란가 안 될란가 이런 정도라. 안 나오면 죽어. 안 나오면 모르니까 어짭니까?
이걸 그렇게 알기 쉬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줘 그렇지 그렇게 온 세계에 미국에서 그런 신학교서 다 했으니까 이게 그렇게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말이오. 이게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요. 그때 신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싹스는 부패성이라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어. 다 알고 있었는데 그때 그것 때문에 싹스가 부패성이라는 말이 슬그머니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싹스를 부패성이라고 했는데 이거 잘못 알았다. 이것은 싹스는 부패성이 아니고 이것은 몸이다. 이 몸인데, 몸의 행동이 나쁜 게 아니라 몸인데 몸은 두 가지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몸이 성령의 지배받지 안했기 때문에 그거는 악령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모든 욕심과 소행이 나쁜 것이다.’
요렇게, 우리는 잘못 깨달았다 하는 것을, 자기네들 잘못 깨달았다는 것을 이것을 발표를 하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이거는 이렇다 이렇게 드러냈으면 뚜렷이 드러내서 하나님 앞에 상이 있겠고 확 이게 회복이 될 터인데 그저 그래 놓으니까 그만 안듯 모른듯 슬그머니 그래. 자기가 틀린 것은 여러분들 ‘에, 틀렸으니까 슬그머니 그래 할 게 아니다.’ 그건, 그러면 똑똑히 드러내야 됩니다.
그래서, 뭐 제가 설교할 때에 뭐이든지 말을 잘못한 거 뚜렷이, ‘말이 헛나왔는가보다’ 그뭐 그 이름을 바꿔 말한 것 많이 있어요. 내가 그 말이 헛 나와. 그런 거는 편집실에서 고쳐서 말하고 이라는데 요한계시 19장과 20장에 있는 천 년이라는 것이 그것이 제가 말하기를 ‘천 년 그것이 지금 하나는 곧 예수님 재림 후 천 년 그것을 말한다’ 그렇게 늘 했는데 ‘재림 전 그거 천 년인지도 모른다. 천 년으로도 할 수 있다’ 하는 그것을 말했는데 그것을 ○○○선생이 ‘요거 이래 놨는데 어찌 됩니까?’ 요렇게 말을 해서, 그것은 내가 지금 그때 뭐인가 깨달아졌는데 지금도 그걸 요렇게도 말할 수 있고 요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요 천 년만 아니라 요 딴 천 년이 있다. 요거 요것을 지금 그 말 하고 싶지마는 그걸 말 못 하는데 틀렸다 확정을 지으면 내가 틀렸다고 말하겠는데 틀렸다고 그렇게 지금 할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연구 중에다 두고서 그 시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 년이라 하는 것은 년수를 말한 게 아니고 장기간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천 년이라 말은 여러 군데 이래 써 놔서 그걸 아직까지 거석하고, 하나라도 틀린 게 있으면 틀린 것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발표를 하고 여러 사람이 알면 여러 사람이 아는 대로 발표해야 됩니다. 그래 놓지 않으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된다 말이오.
만일 자기가 틀리게 말한 것을 열 사람이 들었으면 열 사람에게 알려야 됩니다. 알려 주면 심판이 없습니다. ‘내가 이거 틀렸다.’ 알려 주면 심판 없지마는 안 알려 주면 거기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달으면 슬그머니 하는 게 아니고 그거는 똑똑히 자꾸 자기, 잘못한 걸 자기가 말하면 자기에게 영광이 됩니까 수치가 됩니까? 자기 잘못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못 가르친 것을 이걸 말을 해서 발표를 하면 수치가 됩니까 영광이 됩니까? 수치지 무슨 영광이 돼요? 수치야, 수치.
수치인데 그 수치가 큽니까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영원히 변동 못 할 그 수치가 큽니까 어떤 게 큽니까? 변동 못 할 그 수치가 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사는 사람은 그때 심판대 가 가지고 나타날 그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수치가 당하고 어떤 매장을 당해도 지금 당해야 된다 그거요.
그런데, 과거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신 것은 그 교훈 듣고 알았다 말이오. 교훈 듣고 ‘그분은 우리 교훈과 다르다’ 알았는데 그때 자기네들이 그 교훈이 옳고 우리 교훈 틀렸다 하면은 자기네들은 수치입니까 영광입니까? 수치 되지. 그 수치를 당하지 안하기 위해서 그만 자꾸 냈들바람에 예수님이 자기네들 비만 지적하니까 자꾸 대립하고 미워했습니다.
이라다가 예수님이 자, 십자가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온 군인들이 다 봤고 했으니까 그때는 메시야인 걸 확실히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러면 알았는데 그때 ‘우리가 모르고 십자가 못박아 죽였는데 이 죽으신 이분은 메시야다. 우리가 메시야를 죽였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에게 벌이 옵니까 안 옵니까? 제사장들에게 벌이 옵니까 안 옵니까?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입니까 안 죽입니까? 돌로 쳐 죽일 거라 말이오. 죽이니까 죽기가 두려워서 번연히 알지마는 돈을 줘 가지고서 그 일을 덮어 묻었습니다.
묻으니까, 자, 그 교훈에게서 깨달을 때에 그때에 자기네들의 잘못을 발표를 했으면 그 벌이 큽니까, 그 당하는 해가 큽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알아서 증거하면 벌이 큽니까 두 벌 중에는 어느 게 크겠습니까?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잘못을 발표한 것이 벌이 크겠습니까 어느 게 벌이 크겠습니까? ○○○목사님? 부활 후가 큽니까? 나는 이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못 알아들었는가 싶어서 그래 못 알아들으면 오늘 한번 코빵 한번 줄라고 딱 했더만 잘 알아들었구만. 부활 후가 큽니다.
또, 부활 후에 그 사람들이 안 나타냈습니다. 안 나타냈는데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그거 나타난다 말이오. 저거가 나타내지 안할라 해도 환하게 나타나. 그러면 그때 심판 때 가 가지고 나타나는 것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것과 벌이 어느 게 큽니까? 심판에가 큽니다.
심판 전에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나타냈으면 그들에게 무슨 벌 옵니까? 무슨 벌 옵니까? 돌로 쳐 죽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메시야인 줄 아는데 지도자들이 죽이라 했기 때문에 죽였으니까 그거 알면 돌로 쳐서 죽여 버립니다. 돌로 쳐 죽이요. 돌로 쳐 죽일 거라. 돌에 맞아 죽는 그것이 벌이 큽니까 심판 앞에 가 가지고 영원한 정죄가 큽니까? 영원한 정죄가 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심판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땅위에서 자꾸 이렇게 숨겨 버물거릴라고 하는 것이지 자기 잘못을, 자기 혼자 잘못은 자기 혼자 회개하지마는 자기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잘못 가르친 잘못은 이것은 땅위에서 회개해서 발표하는 것이 그게 수치가 적은 것이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면 큰일 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은 “어서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잘못한 걸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해라.”2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사화하지 안하면 하늘나라 가서 잘못이 나타나면 그때는 변동할 수 없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하는 전체는 주님이 구름타고 오실 때에,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때 바라보고서 그때에 잘못될 것을 지금 알아서 수습하고 준비하는 *것이 오늘이라 그말이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육체의 욕심이라는 거 하나 배웠습니다. 요걸 똑똑히 가져요. 이 모르면 안 돼. 모르면 *구원에 십분지 오 이상이나 실패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