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3 11:49
겨자씨 믿음의 능력
본문 :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신앙생활은 감정의 신앙이 있고, 또 의지의 신앙이 있고. 모든 운동에 따라서 일어나는 운동 신앙이 있고. 지식 신앙이 있습니다. 제일 좋은 신앙은 어떤 신앙인고 하니 차차 차차 지식이 자라가고, 자라가는 지식에 뒤 따라서 확실히 인정하는 확인이 자라가고, 확인이 자라가는 거기 따라서 실행이 자라가고, 실행이 자라가는 데 따라서 자체가 진리대로의 성화로 자라가는 그 신앙이 제일 좋은 신앙입니다. 감정으로 나아가는 신앙은 처음에 시작은 잘해도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감정 신앙보다는 의지 신앙이 좀 견고합니다. 의지 신앙은 고등 지식에 미혹을 많이 받습니다. 높은 지식들이 말할 때에 그 의지는 지식에게 지배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지 못한 지식이 왔을 때에 그 지식을 이해 못 했으면 그 지식에게 정복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 모든 풍파적인 이런 신앙은 그것은 대부분이 다 자연의 것들입니다.
대부분이 사람의 기분과 기타 모든 주관들과 모든 피조물, 존재들, 사람이 많으니까 거기 따라서 움직이고, 경치가 좋으니까 거기 따라서 움직이고, 환경이 자기 성미에 맞으니까 거기 따라서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니까 움직이고 하는 이런 것은 다 땅에 속한 신앙이어서 그런 신앙들은 힘을 못 씁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여기 와 가지고 이 집회에 참석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바라고 왔는가 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어떤 감정에다가 목표를 두고 감정을 제일 좋은 가치로 그렇게 두고서 여기서 자기의 감정이 한번 움직이고 자기의 감정이 크게 작용하는 변동되는 그런 것을 목표로 하고 온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마 여기가 재미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재미가 없고 다른 데 어디 그런 것을 또 위주로 해 가지고 하는 그런 집회들이 있습니다. 그저 찬송도 그거 나쁜 거는 아닌데, 찬송도 손뼉을 치면서 하고 나중에 또 기분 좋으면 일어서서 춤도 추고 뛰고 굴리기도 하고 마음대로 고함도 실컷 한번 질러보고 이런 거 다 좋기는 좋은 줄 알지만 그것이 제일 으뜸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정에다가 가치를 두고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어짠지 자기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원해서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뭐 이거 저거 아무것도 다 냅두고 자기 마음이 뜨거워져야 은혜가 되지 뜨겁지 않으면 그거는 은혜가 아닌 것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것을 가치로 삼아 가지고 거기다가 소망을 두고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믿는 믿음을 암만 열심을 낼라 해도 열심이 나지 안하니까 이제는 좀 열심을 얻었으면 좋겠다 해서 믿음에 열심이 생기는 그 열심에다가 제일 귀한 가치로 두고 그 열심을 얻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기서 예수 믿는 지식 그것을, 지식을 좀 세밀히 구비하게 좀 얻기 위해서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기서 세상에서 듣지 못하는 무슨 철학이라든지, 또 유명한 무슨 신화라든지, 또 세상이 잘 알지 못하는 유명한 명언, 유명한 이름 있는 사람 또 그런 사람들의 말, 그런 것을 가치로 두고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실상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 실상은 아니고 실상을 찾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그러면, 실상은 뭐이 실상인가? 실상은 예수님의 대속과 또 대속으로 말미암은 영감과 진리 이대로의 사람이 되려는 것이 그것이 실상입니다. 우리가 영감 받는 것이 영감뿐이라면 소용없습니다. 영감 받는 것도 성경 지식을 아는 것도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도 간절한 것도 또 힘이 나오는 것도 열심이 나는 것도 그 모든 것의 목적이 뭐인고 하니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입은 사람이 되고,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성령의 사람이 되고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 곧 나타나신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형상과 같이 그런 형상으로 되어져서, 예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형, 예수님의 모형, 예수님과 같이 되어지는 그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자리 와서 모든 것은 참 목적인 곧 예수님과 같은, 예수님의 형상의 사람 그것이 목적입니다. 이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부르셨다. 또 그의 형상을 덧입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참석하는 그 목적이 다른 데에서 여기서 낙심하고 헛일했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기쁘고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가 가치를 어디다가 두느냐 하는 거기서 이제 그것은 다 일어나는 작용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을 때에 제일 처음에는 아, 이 말씀을 듣고 성경대로냐 성경대로가 아니냐? 이렇게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성경대로의 말씀을 자기가 잡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대로의 말씀이 아니면 그 말씀을 자기가 몰라서 혹, 성경대로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니까 자기가 이미 받은 말씀과 다를 때에는 그것을 반드시 연구 제목으로 내 놓으십시오. 또 자기가 이제까지 알지 못하는 지식을 우리에게 넣어 주는데 그 지식을 내가 몰랐고 발표는 못 했지만 발표하는 그 지식을 듣고 보니까 아멘이 되어지고, 이 지식은 과연 성경 말씀대로다 하는 것이 인정이 되거든 그대로 받아서 강직하고 그것을 놓지 안하도록 애를 쓰십시오.
암만 성경대로의 지식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 지식이 어려서 깨닫지 못하게 될 때에는 이 말씀이 성경대로의 지식이냐 성경에 배치되는 지식이냐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바로 덜큼덜큼 삼키다가는 죽기 쉽습니다.
그런 것은 연구 제목으로 기록해 놓고 그것을 성경에게 물어 보면 압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물어 보면 알고, 사람에게도 물어 보면 아는데 사람에게 묻기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 오늘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바리새 교인과 같은,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똥이라도 제것은 옳다고 좋다고 주장을 하고. 다른 사람이 연구해서 발명한 것은 무조건 틀렸다고 할려는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만일 그 사람에게 가서 물으면 그 사람이 잘 가르쳐 주면 다행이지만 그 사람이 자기 것을 선전하고 자기 것 아닌 것은 도매금으로 다 틀렸다고 정죄할란지 모릅니다.
요새 교역자들은 양도둑이 많기 때문에 양도둑을 안 맞으려고 애를 씁니다.
양도둑이 많다는 말은 교인들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는 다니지 안하고 믿는 사람에게만 찾아가 가지고 믿는 사람 유혹시켜 가지고 자기 교인 만들라 하는 그런 것이 양도둑인데, 하나 대표로 세운다고 하면 여호와의 증인같은 그런 사람들은 꼭 믿는 사람 집에 찾아다니지 안 믿는 사람 집에는 찾아가지 않습니다. 가 가지고 그거는 다 틀렸고 여호와의 증인으로 그렇게 믿는 것이 옳다 해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시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간판을 붙여 놓고 모든 사람들이 아는 양도둑이지만 정통파에 속해 가지 그 있는 양도둑도 많습니다. 교역자들도 많습니다. 자기가 몰라서 상대방의 것을 모른다고 하는,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게 정직하고, 틀렸으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정직하고 옳으면 옳다고 하는 게 정직한데, 자기는 옳은 줄 알고도 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양을 붙들기 위해서 틀렸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묻는다는 것은 대단히 좀 염려스럽고 온전하지를 못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어도 성경에게 물으십시오.
성경에 물을 때에는 우리가 주님 앞에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렸는지 옳았는지 주님이 이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혹은 내가 둔하니까 사람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바로 가르쳐 줄 사람을 만나게 하시든지 혹은 성경을 보고 깨닫게 하시든지 해 가지고 바로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데따나 가서 집회 가서 참석하고 뭐이든지 마구 좋은 거나 나쁜 거나 마구 둘러 마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기가 준비하기를 내가 이 은혜를 받을라 할 때에 은혜는 뭐 뛰는 것도 은혜는 은혜지만 뛰는 것도 그렇게 진짜 은혜는 아니요. 또 마음이 뜨끈뜨끈하고 열심이 나는 것도 외나 그것이 최고의 은혜는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이 감정이 우러나서 울고 웃고 하는 그런 것도 좋은 것이지만 그런 것도 최고의 은혜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어느 집회라도 가서 은혜를 받을라고 하면 그 집회갈 때에 마음을 바른 마음을 가지고 가야 은혜를 받지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바른 마음은 어떤 마음인고 하니 '나는 우매무지하니까 주님께서 올바로 나로 하여금 배우게 해주옵소서. 잘못 가르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알게 하사 그런 것을 다 피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성경대로 바로 배울 수 있고 잘못 가르치는 것은 피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자기가, 성경대로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그대로 살기도 하고 그대로 죽기도 하고 그런 각오를 가지고 바로 알기를 위해서 주님에게 기도하고 이렇게 해야 시험에 안들지 뭐 바르든지 삐뚤어졌든지 말았든지 내 감정에만 좋도록, 내 성미에만 맞도록. 내 비위에만 맞도록, 내 성품에만 맞도록 이렇게 해서 기분에만 맞도록 이렇게 하는 것을 원하는 그자는 죽을라고 자살하는 행동입니다. 그거 자살 행동이오.
또, 나에게 열심이 있기를 말하는데 열심으로 말하면 세상에 열심이 사망의 열심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망의 열심도. 우리가 알기를 불교에는 생명이 없는 줄 알지만 불교에 열심이 얼마나 있습니까? 사울이 그거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잡아 죽일라고 대표로 나서 가지고 뭐 숫자를 헤아리지 안하고 마구 죽이기로 나섰으니까 그 열심이 얼마나 있습니까? 생명 없다고 열심 없는 줄 압니까? 사망의 열심도 있습니다. 생명에만 열심 있는 게 아니라.
그러다가 사울이 스데반 죽이고 난 다음에 다메섹에 가다가 도중에서 주님 만나고 난 다음에 그가 놀래서 눈도 멀어 버렸고 거기서 증거를 하고, 예수 믿는 걸 증거를 하고 잡아 죽일라고 하니까 들창문으로 달아 가지고 내려와 가지고 아라비아에 가 가지고 그는 이 세상을 다 버리고 그곳에 가 가지고 삼 년 동안을 그렇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뜨거운 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사울로 있을 때에 스데반 죽일 때에 그때에 열심도 열심인데 그때는 다 마귀의 열심이요 사망의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후 다메섹에 가다가 주님 만나서 사도가 되고 난 다음에, 다메섹에 가다가 사도됐습니다. 아나니아가 기도하고 할 때에 그때에 그는 사도가 됐습니다. 사도가 되고 난 다음에 그 후에 있는 그 열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열심 그것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삼아도 안 되고 감정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삼아도 안 되고, 사람 많이 모인 그것을 가치로 삼아 도 안 되고, 기분 좋은 것을 가치로 삼아도 안 되고, 눈물 나오는 것을 가치로 삼아도 안 되고, 첫째 가치로 삼을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바로 아는 지식을 얻어 가지겠다 하는 이것이 좋은 가치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 지식대로 내가 믿고 행하고 이 지식대로의 사람이 되어지는 데까지 되어지기를 원하는 이것이 이제 이 말씀이 오셔 가지고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가치를 거기 두십시오. 가치를 거기 두면 들은 말씀을 처음에는 지식으로 알았지만, 그 다음에는 인정하는 거로 알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내가 받아야 되겠는데, 능력으로 받아야 되지, 그라고 난 다음에는 내가 그와 같은 사람으로 완전히 성화되기를 바라서 하니까 그 성화가 단번에 됩니까? 이러니까 성화는 그 부분의 성화는 그 부분에 대한 진리 말씀을 자꾸 또 새김질하고, 또 새김질하고, 또 내가 믿고 믿고 또 새김질하고, 믿고 새김질하고, 믿고 새김질하고 또 행하고, 또 믿고 새김질하고 또 행하고 자꾸 이렇게 반복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자꾸, 지식대로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여기서나 본 교회 돌아가서나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지식을 구경하는 것으로써 구경하는 그런 표준으로 여기 참여를 하지 말라 그말이오. 또 여러분들이 사경회를 가도 교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구경시키는 그런 것으로써 하지 말라 말이오. 자기는 하나님 말씀을 구경만 한 사람은 제까짓게 암만 하나님 말씀을 구경 많이 만 안 시키고 저는 구경만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도록 시킬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됩니다. 제가 실행하지 안하고 구경했으면 구경해서 제가 두 번 구경하면 권태 나고 세 번 구경하면 권태 나서 그만 볼 것도 아무것도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제 자신이 그래 되면 그 말씀을 교인들에게 증거를 못 합니다. 두 번째 증거할라고 하면 힘이 없어 증거를 못 합니다. 세 번째 증거할라 하면 싱거워서 증거를 못합니다. 네 번째 증거하면 내 자신도 거기 대해서 증거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증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항상 새 설교해야 돼. 새 설교. 껍데기 설교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참여하는 것이나 예배당에 가 참여하는 것이나 예배에 참여할 때에는 반드시 말씀을 먼저 알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내가 인정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말씀대로 내가 행해야 되겠고 말씀대로 행했으면 다입니까? 행했으면 다입니까? 그저 내가 성경에 있는 지식을 처음에는 옳으냐 그르냐 비판하고, 성경대로 옳은 지식이면 그 지식을 내가 지식하고 놓지 안할라고 애를 쓰고, 그 다음에는 그 지식을 내가 그대로, 믿을라고 인정할라고 노력을 하고, 인정하고, 노력하고 난 다음에는 그 지식대로 네가 살 수 있는 능력 받을라고 노력을 하고, 능력 받고 난 다음에 자기가 실행을 하는 일에 애를 쓰고 힘을 쓰고, 이러면 자기가 그렇게 하는 그것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구하는 것이오. 그렇게 구함을 따라서 주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는 그 말은 우리의 건설 구원에 있어서는 구하는 대로 주시지 구하지 않는 것을 주시는 것은 특수하게 있기는 있지만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겨자씨 믿음을 말했는데, 겨자씨 믿음이 자라가는 것도 첫째는 지식이 자라갑니다. 믿음의 지식이 자라갑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의 소산이요, 또 기독자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믿음의 소산입니다. 그러면 지식의 소산이라 믿음의 소산이라 그게 무슨 소리인가? 기독자의 지식은 믿음의 소산이라 하는 것은 기독자들이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는 것이 믿음인데. 참되다 인정함으로 이제 우리가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음은 지식에서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다음에 안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이 먼저입니까 인정이 먼저입니까? 예? 어떤 사람이 인정이 먼저라 이랍니다. 하나님은 참되다 옳다 인정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자기에게 믿어지는 것이지 인정 아니면 신구약 성경을 부인해 버리면 지식은 올 수 없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지식은 올 수 없다.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 지식했는고로 믿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라간다. 자라가는 데 따라서 자라가는 데 따라서, 혹 누가 여기서 오늘 아침에 설교 가운데에 의문이 있어서 물어 볼 만한 그런 것 없습니까? 무조건 뭐 백 목사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거는 완전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라가야지, 그렇습니까? 혹 거기 의문나는 것이나 틀렸다 그렇게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있으면 손을 들어서 표해 주십시오. 네, 여기 ○○○목사님이 의문이 난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네 의문 나는 점을 한번 좀 말해 보십시오. ○○○목사님이 아침에 제가 가르친 데에 대해서 그게 그런지 안 그런지 좀 의문이 난다고 그래 지금 질문이 나왔습니다, 무슨 질문인고 여러분들이 잘 들어봅시다. 네 한번 말해 보시이소.
예, 녜, 됐습니다. 오늘 아침에 가르치는 가운데에 자라기를 조그만한 솔씨를 심었는데 솔씨가 차차차 자라 가지고 낙락장송이 되는 거와 같이 그렇게 자라가는 것이냐, 장기짝을 한 개 두 개 포개니까 한 개에 또 한 개 포개니까 두 개되고 두 개에 열개 포개니까 열두 개 되 그 자꾸 포개포개 놓으니까 자꾸 장기짝이 키가 커집니다. 자꾸 키가 커지지 않습니까? 하나하나 자꾸 거석하니까. 밑에 하나 디디고 둘 놓으니까 또 높아지고, 셋 놓으니까 또 높아지고 자꾸 높아지니까 이제 그렇게 장기짝같이 그렇게 자라간다 이라니까 그 의문이 생겼다고. 네, 그 의문이 생길만 합니다. 또 그것을 그냥 덮어놓고 가는 것보다는 그것도 좋습니다. 그 의문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소나무는 생명있는 것이라 생명이 자라가는 것이지만 장기짝으로 말하면 바짝 마른 나무로 만들어 놓은 거니까 생명이 없는 것이니 생명 없는 게 자꾸 포개져 가니까 그것도 의문이 될 그런 것입니다. 네, 의문이 될 만 합니다.
그 장기짝을 가지고 묘사해서 가르친 것은 뭣을 가르쳤는고 하니 그 생명은, 거기서 그 비유에서 생명을 가르친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비유는 어디까지를 한정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은혜든지 하나 받아 가지고 받으면 뒤에 은혜를 새로 받는 게 아니고 하나 받은 그 은혜가 자꾸 이 세상에서 연단하고 연성해서 세상을 먹고 그 은혜가 점점 자라 가지고 커지는 그런 것으로 이 소나무 자라듯이, 소나무는 소나무 씨 하나가 그러면 그것이 자꾸 그것이 커져 가지고 한 개의 솔씨 그것이 자꾸 커져 가지고 자라는데, 크는 것은 흙을 먹고 자꾸 커져 가지고 자라면 솔씨 그것이 자란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고거와 다르다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장기짝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장기짝으로 비유한 것은 어디 중점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그 받은 은혜, 그 은혜에 더 하나님 은혜가 없고, 그 은혜 그게 점점 확대해 가지고 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받은 은혜와 같은 그런 은혜를 또 받고 받고 해 가지고 은혜로 점점 많아지고 충만해져 간다. 그래서 우리가 자라갈 때는 하늘에서 새것이 내려와 가지고 또 우리에게 보충 보강을 해 가지고 자라가는 것이지 하늘에서 한번만 내려온 그것이 뒤에 다시 더 내려오지 안하고 그것이 자꾸 성장해 나가는 것은 아니라 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장기짝으로 이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장기짝은 한 개 놓고 또 한 개 놓으면 암만 놔 봤자 한 개 높이 뿐이지 두 개 높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한 개 놓고 또 한 개 놓으면 두 개 높이면 밑에 한 개 그거 높은 것을 두 개 높은 것이 그걸 힘입고 그것을 이용해 가지고 열 개를 높이면 장기짝 열 개 높이가 되는 것은 밑에 있는 모든 그 높이의 그것을 다 힘입고 이용해 가지고 위의 것이 열 개가 높아지는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뭐 그런 것도 비유하지 안하고 다만 거기서는 우리의 은혜가, 기독자의 은혜가 한번 하늘에서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그것이 자꾸 이와같이 지금 그것이 확대해 나가고 성장되어 나가고 그것이 불어 나가서 이제 되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교파들도 있고, 또 교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논쟁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한번만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받아 가지고 그 은혜가 내나 자라가는 것이지 한번 받은 은혜 있고, 또 그 은혜와 같은 은혜가 또 이제 와 가지고 또 은혜가 은혜에 은혜가 보태 가지고 은혜가 둘 되고 셋 되고 자꾸 이래 자라가는 거는 아니고 그 하나가 점점 확대되고 성장돼서 자라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말하는 것을 그것을 배격하고. 그것을 소나무같이 자라는 것을 배격하고, 은혜 하나, 하늘에서 은혜 하나 받아 가지고 하나 가졌는데 그 뒤에 이제 자라가는 거는 또 은혜 새로 하나 받아 가지고, 새로 하나 받아 가지고 합해서 은혜 둘이 됐다. 그러면 또 열을 받았으면 열이 합해서 열 둘이 됐다. 이래서, 자라가는 거는 순전히 하늘에서 새것이 내려와 가지고 자라가게 됐다.
그러면, 이 세상에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런 것은 죽은 것이 다 성화로 변화도 되고 그런 것은 다 변화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로 영생 완전으로 자라가는 것은 이미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거룩하게 변화되고 신령한 것으로 변화됨으로 그것이 구속을 받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첫째 아담의 것이 변화되는 것이고. 썩어질 게 썩지 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변화돼 나가는 것이고, 자체는 변하지 안했는데 그 자체에다가 그 붉은 색깔을 물들였던 그 베쪼가리와 같이 된 것을 이 붉은 색깔을 빼 버리고 이제는 거기다 새파란 색깔로 염색하는 것처럼 이 악령, 악성, 악습으로 이제 빨갛게 이 사망으로 물이 들어 가지고 있는 이 원단과 같은, 우리의 원단과 같은 이 심신에게 그걸 빼 버리고 이제는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새파란 생명 있는 새파란 이 물로 가지고 들여서 이 붉은 것이 완전히 새파란 베쪼가리가 됐다.
그러면 베쪼가리는 그거는 변하지 안하고 있지만 붉은 물 들였을 때는 붉은 베쪼가리가 됐고 그걸 빼 버리고 푸른 물을 들였을 때는 푸른 베쪼가리가 됐다.
그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라. 거기다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이 있으니 그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고, 첫째 아담에게 속하는 것을 뒤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변화시키는 작용도 있지만 하늘에 내려온 것이 새로 내려와 가지고 새로 우리에게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로 오는 것이 있다. 그러면 변화시키는 거 아니고 새로 오는 것이 있다.
그러면, 새로 오면 제일 처음에 온 것을 가리켜서 그것을 은혜의 씨라, 은혜의 씨라 말한다. 은혜의 씨면 그 은혜의 씨 그것이 자꾸 자라는데, 그게 자꾸 자라는데 그 자체가 은혜의 씨가 자라면 한번 은혜를 받은 그 은혜가 그것이 자꾸 자라 가느냐? 은혜의 씨가 자라는 것은 이것은 장기짝 포개듯이 여러분들 알기 위해서 해 놨는데 딴 데 나가면 그거 이해 못 하면 또 아주 정죄 받기 쉽습니다. 장기짝 포개는 거와같이 이제 하늘에서 내려온 새 은혜가 하나 있었는데 그 은혜는 하늘에서 내려온 새것으로만 자꾸 자라가게 됩니다. 새 것, 새 은혜가 와 가지고 또 새로운 은혜가 두 번째 왔으니까 이제 처음에 온 은혜하고 두 번째 온 은혜하고 둘이 합해 가지고 서 이제 그만치 커졌습니다. 또 세 번 왔으면 세 번 온 것이 커졌습니다. 네 번 오면 네 번 온 것이 커졌습니다.
커졌으면 아, 그거는 그러면 종합체로구나. 한 개 두 개 자꾸 주 모아 종합체로구나. 종합체인데,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것은, 내려오는 것은 한 번 오고 두 번 오고 내려오기는 내려 왔는데 그것은 종합체가 될 수 없는 것이 그것이 다 단일성의 것입니다. 단일성의 것 단일성의 것이기 때문에 단일성의 것이 오니까 여기 오는, 부딪히는 것이 늦어져 그렇지, 늦어져 그렇지 내나 생명도 하나요 본질과 본성도 하나요 다 완전이요 다 거룩이요 영원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다른 비유로 또 하나 할라고 하면 그 사람이 지식이 자랄 때에, 이 세상에서도 한번 기역 배웠습니다. 일 학년에 처음에 입학 들어 가지고 기역 배웠습니다. 기역을 배웠으면 그 기역이 기역 한번 받은 그 기역이 들어서 자꾸 박사가 되는 게 아니라 기역에다가 니은이라는 또 지식을 더하고 니은에다가 디귿이라는 지식을 더하고 디귿에다가 미음이라는 지식을 더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가나다라로 자꾸 이래 배워 가지고 자라가는 거는 지식에 지식이 보태져 가지고 자라가는 것처럼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형과 대행과 대화친의 이 대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왔는데 그 무한하신 은혜가 우리에게 끄트머리. 끄트머리 새 끄트머리 움싹이. 마치 송곳으로 말하면 끄트머리가 가늘지 안해요? 송곳이 끄트머리가 가는데 가는 끄트머리에 시발된 것이 그게 중생입니다. 그게 중생인데, 인제 중생인데 거기서부터 주욱 은혜 된 거는 저 무한하신 대속의 은혜까지 연결됐기 때문에 그 대속의 은혜가 자꾸 거기서 새로 오고 오고 해 가지고 우리에게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충만해지는 것이지 한번 온 그것이 뒤에 오지 안하고, 그것이 자꾸 자라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새 은혜가 자꾸 오는데. 새 은혜가 와도 그 은혜는 본질과 본성이 하나요, 생명이 하나요, 단일성의 것이요.
다 완전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와서 연결되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 연결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 오고 둘 오는 것이지 근본은 한 덩어리라. 한 덩어리가 우리에게 오는 순서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는 그 무한함이 마치 비유컨대는 끄트머리는 빼쪽한데, 끄트머리는 빼쪽한데 이것이 만일 이래 삼각으로 돼 가지고 있으면 저 끄트머리는 보니까 그 손가락만 손 넙덕이만 한데. 이게 자꾸 이래 자꾸 벌어져 가지고 커져 갑니다. 그러면 십 리나 가면 그거 얼마나 굵겠습니까? 십 리나 가면 얼마나 크겠소? 손바닥만 하겠소, 몸뚱이만 하겠소? 어? 십 리를 가면. 십 리 가면 한발도 넘고 십 리 가면 십 리 가면 십 리나 벌어지지요. 광이 십 리나 안 되겠소? 백 리 가면 더 벌어지지요.
신구약 성경 말씀도 그런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이 육십 육 권으로 간추려 가지고 온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지혜가 우리에게 움싹 터 가지고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이 삼각의, 말하자면 삼각의 절정 끄트머리가 왔습니다. 삼각의 끄트머리가 빼쪽하지 않겠습니까? 빼쪽하지만 그 삼각을 자꾸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가서는 그 삼각이 이 산만 하고도 뭐 지구 땅덩어리만하고 얼마든지 커질 거 아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도 이 명문 된 그 성경을 자기가 읽고 읽으면 자주 거기 '사랑' 하니까 '사랑' 하니까 하나지만 사랑을 파고 들어가니까 사랑 이 넓기도 넣고 크기도 크고 강하기도 강하고 자꾸 이렇게 해서 사랑을 이렇게 파고 들어가니까 자꾸 그 사랑이 커집니다. 커지는데 그 가운데 문서 속에서 점점 무한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성령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문서로 나타난 것이 이 신구약 성경인데. 이 성경에 나타난 이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아이구 불교는 뭐 팔만 대장경이 있는 데 이 성경은 육십 육 권뿐이니 그렇게 간추럽다. 팔만 대장경은 자기들이 여러 수십 명이 자꾸 이렇게 저렇게 말해서 주워 모아 놓은 거 암만해야 문서에 기록된 거 그것뿐이지 그 이상은 없지만 우리 성경은 여기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인 제일 끄트머리 움싹으로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이 성경을 거머쥐고 들어가면. 들어가면 인제, 들어가면 그 다음에 또 그 진리가 있고 또 들어가면 진리가 있는데, 나중에 자꾸 가르쳐 주는데 그 가르쳐 주는 이가 누구냐면 보혜사 성신, 성령님이십니다. 이러니까 이 성경 뿌럭지는 무한입니다.
이 성경 뿌럭지는 무한이요, 이 뿌럭지는 진리인데 진리는 우주에 가득 찼습니다. 이 뿌럭지는 영감입니다. 영감은 피조물에 가득 찼고 피조물을 푹 싸고 있습니다. 또 영감의 그 속에 들어가니까 영원 자존자이신 완전자이신 그 형체가 없는 무한의 존재가 그 안에 계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짝으로 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한번만 와 가지고 그 은혜 역사를 자꾸 우리가 자꾸 작용하고 하면 그 은혜가 자꾸 성장돼 나가는 솔씨 모양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연속적으로 새 은혜 오고 새 은혜 오고 은혜에 은혜를 보태 가지고 자꾸 그것이 자라간다. 그러면 예를 들면 지식도 말이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하나 알았는데 하나 알았으면 하나 안 그 지식이, 하나 안 그 지식이 자꾸 커지고 늘어나가 가지고 그와 같이 된다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지식 하나 가졌는데 하나 그게 자꾸 많아지고 커지면 그놈이 어떻게 변동될란지 압니까?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하나 왔는데 그 지식을 자꾸 키워 놓으면 키우는 거는 세상이 키우고 키우는 거는 내가 키울 터이니까 그 키우면 키워 놓은 게 잡탱이 뭐이 될란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도, 하나님에게서 새로 나오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이오. 나온 것으로 자꾸 장기짝 보태듯이 자꾸 보태고 보태고 해 가지고 자라간다는 거는 이거는 하나님의 완전에서 나온 그것이 새로 성장되고, 한번 나온 그 은혜 그것이 자꾸 확대해 나가지 않는다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을 하기 위해서 그 비유를 말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이것이 많이 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리는 개별 섭리를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개별 섭리를 하고 하시고 계신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한번 자동차를 만들어 놓은 거 모양으로 한번 턱 이래 모든 만물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서 이제 이 시동을 걸어 놓으니까 이것이 제대로 자꾸 움직여 나가고 있다, 한번 하나님이 딱 창조 해 놓은 이것이 그것이 이제 제 자동으로 이와같이 움직여 나가고 있다 이렇게 믿는 그 신앙들도 있고, 우리가 믿는 거는. 제가 믿는 거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그것 있는데, 그것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하나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하나님으로 직접 하나 하나가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 하나 만들어 놓은 그것이.
한번 만들어 놓은 그것이 제맘대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게 백 년 천 년 만 년 움직여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때 그때 계속해서 연결돼 가지고 움직여 나가는데, 그러기 때문에 다른 게 뭐이냐면 하나님과 딱 끊어지면 그때부터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그게 한 분에게 한번 떨어져 나와 가지고는 그것이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면 하나님 이별하고도 몇 십 년 몇 백 년 그것들이 움직여 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것을 우리가 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관이, 창조관, 섭리관이 일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거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개미 한 마리가 나고 죽는 거, 수염 하나를 요리 움직이고 조리 움직이는 것도 이것도 하나님의 전부 예정 속에 다 든 그대로 한 예정 한 예정이 한 순서 한 순서로 나오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믿습니다.
또 그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게 아니고 대충 원 강령만 떡 하나님이 예정해 놓고 그 나머지기는 다 제대로 예정이 돼 가지고 있고 제대로 가지고 되는 것이다.
예정도 예수 믿는 구속 도리에만 예정하고 있지 구속 하에 있는 그런 것들은 다 예정 안했다. 오늘 누구하고 뭐 잡은 것이 낫다 사기 협잡이 됐다 어떻다 하는 그런 거는 예정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정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에 국한해서만 예정돼 있다. 그 다음에는 예정되지 안하고 있다. 또 신앙에 국한돼도 신앙도 원 강령적인 줄기 그것만 예정돼 있지 나머지기 지저분하게 그 사람이 뭐 믿다가 낙심하고, 또 뭐 꺼꾸로 하고 옳게 하고 하는 그런 지저분한 자자란 그런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믿는 것이 오늘까지의 정통 신앙에서 대개 믿어 나오는 교리들입니다. 신조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단번에 예정하셨는데 세상 것만 예정한 것이 아니고 영원무궁까지를 예정하셨는데 그 예정은 무한의 예정이요 영원한 예정이라. 무한한 예정, 영원한 예정을 하셨는데 그 예정대로 하나씩 둘씩 그 순서대로 이루어져 가고있다.
그러면 예정에는 빠진 게 있느냐? 예정에는 빠진 게 하나도 없다. 또 크고 작은, 이루어지는 것은 누가 하느냐? 사람이 하든지 뭐이 하든지 실은 하나님이 혼자 하신다. 하나님이 혼자 없는 가운데 지으신 그 사람을 이걸 이렇게 이용하고 저렇게 이용해 가지고 이렇게 하는데, 마치 큰 회사에 공장에 기계가 수만 대가 있다 할지라도, 모타가 하나라면 그 전력으로 인해서 그 모타 하나가 돌아가니까 그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것이 움직이고 지어지고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지 제 개별 단독으로 일어나는 순서나 역사나 존재는 하나도 없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의지의 예정과 주권 능력의 성취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공장에 이와같이 지금 전기로 이와같이 모타를 해놓고 이러니까 다 시설 해 놓고, 다 시설해 놓고, 전기 장치 다 해놓고 이제 모타가 있으니까 그 전기로 삥삥 돌아간다. 삥삥 돌아간다. 그러니까 이제 전기 발전기도 다 해 놓고했으니까 발전기도 다 만들어 놓고 거기는 다 기름도 얼마든지 무진장으로 할 수 있도록 이래 내놓고 이래 놨으니까. 그러면 한번 시동만 턱 걸어 놓으면 그 전기가 발전 계속하지 또 그 전기가 계속 모타를 돌리고 또 그 모타는 공장에 있는 수만개의 그 모든 기계를 움직여 돌리고 그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해 놓고 난 다음에는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보면서 그거 참 내가 잘 만들었다, 그거 잘 돌아간다. 이렇게 구경하고 있다 이렇게 믿는 신조와 교리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만일 그것으로 비유를 한다고 하면 전기.
전기 그것을 만든 이가 곧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계속 그 전력을 계속 나타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다. 휘발유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전력을 나타내 가지고 하나님의 그 하나 하나의 힘이 쭉 뻗쳐 가지고 저 말단의, 피조물의, 저 말단의 그 하나의 지극히 작은 것의 움직이는 것까지 그분의 힘이 거기 가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믿는 게 우리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은 현재의 이 세상의 교리와 신조와는 많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연구하면 그런 것은 다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성에 다 그런 것들이 포함되고 다 나오고 있습니다.
뭐 왔습니까? 뭐 질문 왔소? 예? 네. 그라고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꼭 바로 가르치시지만 내가 혹 심부름을 잘 못 해서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내맘대로 말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지 모르니까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보고 틀렸다 싶으면 말해 주고 틀린지 안 틀렸는지 의문이 있으면 말해 주고 그라면 우리가 함께 합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가고 마귀의 뜻은 다 박살을 내도록 그리 하겠습니다. 저도 기도는 했습니다. 내 뜻대로의 하는 말 하나도 하지 안하고, 내 생각대로 내 말 하나도 안 할라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고 오기는 왔습니다. 왜? 내가 거기 속은 걸 분명히 압니다. 이런 종류로 속았든지 저런 종류로 속았든지 나중에 계산을 대 보니까 전부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으로 속았는데. 나 아닌 나 그놈으로 인하여 산 것은 다 속은 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 아닌 나 이제 주의 피와 성령과 진리, 그로 인한 것 아닌 것은 다 사망에 속한 옛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데에 유혹 받지 안할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장기를 가지고 말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현재에도 개별 섭리를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개별 은혜를 자꾸 주어서 이와같이 되는 것이지 은혜 하나 받은 그것이 자꾸 확대되고 성장되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전부 개별 은혜를 주시는 건데. 은혜는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 오면, 비유컨대는 하나님의 것이 내게 하나 오면 하나님과 나와 노끈이 하나 생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하나 왔으니까 하나님과 나와 한 노끈이 하나 연결됐습니다. 백 왔으면 또 노끈이 백 개 연결됐습니다. 이래서 하나님과 나와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것이 내게 다 와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 다 돼서 이용물이 되고 하나님은 내게 다 와 가지고 하나님의 큰 충만이 내게 와 가지고 이제 이것이 나를 통해서 만물에게 나타나니까 만물이 나를 볼 때는 하나님이라고 봅니다.
왜? 하나님이 하시기를 똑 그래 하니까. 만물이 나를 볼 때 하나님이라고 보고, 그거 하나님이 만물에게 나를 통해서 나타나니까,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나타날 때에 우리는 투명물과 같이, 맑은 유리와 같이 투명물과 같이 그렇게 이제 하나님이 그대로 나타나지 못하고 내가 중간에 조그만치라도 가감의 조화가 있을까 싶어서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조화가 있으면 조그만한 조화가 있는데 저 밖에 나가면 큰 조화가 생기고 큰 차이가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착오가 없을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저 먼저 작년에 언제 여기서 우리의 심신은 무색의 것이라. 우리의 심신이 처음에 지음을 받을 때는 무색의 것이 그 악령과 악성이 승리했기 때문에 거기 소속한 인간이요 그 죄악에 참가한 자기 때문에 이제 무형의 존재가 악령 악성으로 물이 들어서 악령 악성의 것이 되고 말았다. 제일 처음에 논리 순서로서는 무색의 존재가 이제 악령, 악성, 악습으로서 유색됐다. 유색된 그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그것을 탈색을 다 시키고, 사죄로 탈색을 시키고 대행으로 다 이제 다시 유색을 만들었습니다, 대형으로 탈색을 시켰고. 대행으로 다시 하나님으로 물들여서 이제는 주님의 보배 피를 인해서 하나님과 진리로 우리가 물이 들어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 형상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처음에는 무색의 존재가 이제 뱀과 첫째 아담이 정죄 받은 데에 물들어 가지고 이제 감염돼 가지고 사망의 물이 들었다. 이랬는데 그것을 탈색을 시키고 생명의 물을 들여 가지고 생명의 꺼풀을 입히는 것이 새사람 입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무색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이해를 못 해서 질문 오는 일은 내가 들어 봤는데, 그때 질문이 왔었는데, 그때 내가 간단하게 말을 하기는 했었는데 그것을 혹 집에 가서 여러분들이 연구를 해 봤는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이라는 이거는 육인데 육은, 그러기 때문에 육이라 하는 것은 모든 학자들 가운데서도 '이 육은 죄가 없다' 그렇게 보는 학자도 있고, 또 '이 심신은 근본부터 죄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근본은 죄가 없었는데 죄를 입어서 죄의 물이 들어서 죄가 됐다. 죄는 됐지만 죄를 입어서 죄 그놈이 죄지 우리 심신 자체가 죄화된 거는 아니다. 그 색깔을 입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완전히 탈색을 시켜 버리면 우리는 그 죄가 없어지고 의로 산 자가 되어진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물을 들여서 새사람 입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동안 지나가면 하나님 되는 것이냐? 아니다. 언제든지 피조물이요 창조주는 아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다 누가 혼자 다 알지 못하게 해 놨어요. 하나님께서 참 아주 지혜가 있어요. 혼자 다 알게 했으면 그거야 하나님처럼 날뛸터이니까, 아예 눈하고 귀하고 이래 지을 때에 하나에게 권세를 다 주지 안하고 권세를 각각 줘 놨거든. 그래 놓으니까 이 지체가 저 지체에게 자랑 못하고 이 지체가 저 지체를 무시하지 못 하고, 필요성으로 느끼지 안할 수 없고, 이러니까 그게 합해 가지고 한 몸을 이루어져 간다 그거요. 우리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한몸인데, 이래서 은혜 받은 것이 각각 달라 가지고 저 은혜 아니면 나 못 살고 나 은혜 아니면 저 못 살기 때문에 서로 귀중히 여겨서 하나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몸을 이루어 가야 되는 것인데, 마귀 요놈이 달라들어 가지고 우리를 유혹시켜서 이제 내 교파 네 교파, 내가 깨달은 거 네가 깨달은 거, 뭐 내 교리 신조 네 교리 신조, 그게 순전히 내것이라 하면 그놈은 죽은 놈입니다. 내것이라 하면 죽은 놈이오.
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소속한, 속한 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분자라고 하는 데 있어서는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 역사로 분자된 것이지 우리 본체 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분자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분자된 거는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피조물이요, 예수님은 피조물도 가졌지만 피조물 아닌, 자존자의 본체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어찌 돼요? ○○○목사님 그거 장기짝이라 하는 것 좀 이해가 됩니까? 그거 잘못하면 말이오. 그거 안돼. '생명이 없는 건데' 네, 생명 없는 그거는 말한 게 아니고 거기는 다만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새 은혜가 자꾸 와 가지고 된다.
이래서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원한다 하는 그 말은 고린도후서 5장에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원한다 그 말은 하늘에서 와서 내 심신이 하나님화되는 거, 진리화되는 거, 내가 진리는 것이 아니고 입어 가지고 하나님을 입고 진리를 입고 영감을 입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 가지고 내 속에 본질과 본성은 따로 있지만 그것이 그 입은 데 따라서 점점 화된다 그거요.
그래서 새사람 옛사람을 그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우리의 심신을 하나님에게 드리면 의의 병기가 되고 죄에 드리면 죄의 병기가 된다 이랬습니다. 죄의 병기가 된다.
우리는 아무, 우리 심신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안경 한가지라면, 안경이면 이 안경을 강도가 쓰면 강도 안경되고, 이 안경을 목사가 쓰면 목사 안경이 되고, 이 안경 이거는 아무 권리가 없어. 강도가 쓰면 강도 안경되고 목사가 쓰면 목사 안경 되는 거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심신이라는 것은 마귀가 이용하면 마귀에게 도구되고, 이제 그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령에게 이용을 당하면 의의 병기가 됩니다. 우리의 심신은 의의 병기도 되고 죄의 병기도 되고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우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이것은 여기 물들면 더러워지고 저게 물들면 좋아지는 것이지 이 자체가 좋은 데 물들었다고 그것이 하나님되는 것도 아니고 나쁜 데 물든다고 그게 마귀된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것만 잡아 벗겨 버리면 괜찮아.
벗기면 괜찮기 때문에 사람의 심신이라는 이것은 악이 아니다. 죄가 아니다.
이래서 그것은, 이 심신은 다 물질은 다 악이기 때문에 물질 개악설이라고, 물질을 악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다 성경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말이지요, 아, 그런 거 공연히 소용없는 거 자꾸 말해 가지 그 시간 간다. 그런 거는 필요 없습니까? 여러분들, 우리의 이 신앙 싸움은, 신앙 싸움은 행함의 싸움, 행함의 싸움보다 그 위에 가 가지고는, 무슨 싸움이냐? 논리의 싸움입니다. 논리, 이치를 따지는 싸움입니다. 이치를 따지는 싸움인데 이치에 지면 그거는 일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거 와도 이치를 논리해 가지고 그 이치를 이기고 남는 것이 기독자의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뭐 지금 말할 필요가 있는가 말 할 필요가 없다 하기 때문에 그만 뭣이 오면 덜퍽덜퍽 지고 신사참배가 오니까 덜컥 져 버렸지.
6.25가 오니까 덜컥 져 버렸지. 지금 그 천주교와 개혁교가 합동 번역한다 하니까 그것도 그만 다 줘다 하지. 이러니까 마구 비빔밥으로 지금 합작돼 가는데, 이럴수록 오늘에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고 권위 있는 것이 되어집니다.
뭐 권위가 되어 있는 것은 세상을 점령한다는 말 아니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말이요,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인정을 받는 다량으로 통과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콩팥을 세밀히 나눠야 돼요. 그러기에, 신앙이 도덕적인 신앙도 있고, 화합적인 신앙도 있고, 또 윤리적인 신앙도 있고, 사회적인 신앙도 있고, 모든 정치적인 신앙도 있고, 이런데 우리는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거는 지금은 말하지만 나중에는 말 많이 못 해요.
흙은 겨자씨를 죽일라고만 하고 죽여 가지고 흙 만들라고만 애를 쓴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게. 믿음인고 하니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것과 영감을 믿는 것과 진리를 믿는 그것이 우리의 교리요 신조요 우리의 주장인데.
그러기 때문에 대속의 그 사죄에 합당하게, 칭의에 합당하게. 화친에 합당하게, 영감에 합당하게. 이제 진리에 합당하게, 나타난 신구약 성경 말씀에 합당하게 이렇게 살라고 하는 이 생활을 땅은 땅 만들라고 애를 쓰는 것처럼 겨자씨 비유에 온 세상은 나를 세상 만들라 그 애를 쓴다. 세상 만들라고 애를 쓴다.
나는 주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로 살고 자라갈라고 애를 쓰는데 세상은 나를 세상 만들라고 애를 쓴다. 거기는 전투가 있다. 반드시 완력이 있어 가지고 때리는 것도 있고 죽이는 것도 상하게 하는 것도 있다. 그들은 세상 방편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방편으로 한다. 우리의 방편은 뭐인고 하니 인정하고 믿고 그대로 행동하고 기도하고 참고 견디는 그거밖에 없다. 남에게 바늘 한 개도 꼭 찌르지를 못 한다. 우리 방편과 그들의 방편이 다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달라들고 우리는 그런 거 못하다 보니까 어찌 되는가? 그래도 털끝만치도 해는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을 해도 그들은 우리를 해를 하지 못한다. 왜 해를 하지 못합니까? 죽였는데 해를 하지 못해요? 예수님을 죽였는데 해를 하지 못해요? 아, 죽였는데 예수님을 죽였는데 해를 하지 못해요? 아, 죽였는데 예수님을 존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점령하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사망에 속한 것을 다 점령하고 완전히 살으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를 해합니다.
왜? 내가 그거 잡아먹습니다. 잡아먹어요. 주님의 이 세 가지 대속과 영감과 진리로 내가 양보하지 안하고 그대로 살게 되면 세상은 내 밥이 돼서 홀딱 다 둘러 마셨습니다. 그거는 완전히 내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내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잡아먹을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털끝만치도 해할 수 없다는 이것도 성경대로의 지식으로는 이치에 딱 맞지만 세상 사람의 이치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일서 3장에 우리의 구원은 세상이 알지 못한다 했습니다.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지요. 우리 구원도 모르지요. 우리 생활도 모르지요.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은 그들은 천한 걸로 봅니다. 그들이 가치로 보는 그거는 우리는 부끄러움의 것이라고 그렇게 평가를 합니다. 영 그만 딴 세계요, 아주 다르요. 이게 이해가 됩니까? 그저 빨리빨리 고쳐야 됩니다. 빨리빨리 고쳐야 되지 너무 오늘은 믿음을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제도 잠깐 말했지만 요새는 도무지 강단에서 인본이니 신본이니 하는 말이 없습니다. 인본 신본 말하면 '저 켸켸묵은 소리하고 있다.
또 저 까다로운 거 하고 있다. 아, 조거는 언제든지 까다롭게 꼬집게' 누가 그랬습니까? 시드기야니 모두 말할 때에 그때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자꾸 조거는 자꾸 밉상스럽게 꼬집기만하고 자꾸 티만 뜯고 고란다.' 뉘요? 잡아 갇혔지. 미가야. 보는 견해가 다르니까 다 모두 그 소리 들을라고 하지 안해.
'그거 들을 필요가 뭐 있는가 수수한 게 더 좋지. 아, 뭐 합동 번역도 좋고, 성경 말씀을 알아듣기 쉽도록 이야기 번역도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뭐 다 좋지.' 하는 사람은 또 그대로 견해하고 살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
구별해야 되지 하나님의 성경 말씀 하나만을 성경 하나를 고수해 가지고 거기는 가감하지 말고 그저 원본 그거, 원본 그대로를 하나 보수를 해놔야 기독교에 생명이 있지 고거 아니면 다 기독교는 죽는다.' 하는 것을 이것도 확고하게 가진 사람도 있고 안 가진 사람도 있다 그말이오. 맞아! 그것을 확고히 보수하고 있어야 돼. 원본 그것만은 우리가 그대로 고수하고 있어야 되지 그것이, 흐려지면 우리 기독교는 다 흐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세상으로 더불어 싸워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뭐이냐? 믿음이라.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라 하는 그말은, 믿음이 그라면 능력이 있습니까? 믿음이 능력이 있습니까? 믿음은 능력 있는 것 아닙니다. 믿음은 능력 있는 것 아니오. 믿음은 세 가지 능력을 우리가 끌어 올 수 있는 방편입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과 영감과 진리는 다 무한한 능력을 가졌는데 나를 위해서 있고 나를 위하고 있고 영원히 나를 안보하고 있고 영원히 나의 선생님이고 나의 생명이고 나의 지능이고 이렇게 되어 있는 이 사실을 내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내가 가지고 그대로 살 때에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뭐이 이기게 합니까? 뭐이 이기게 합니까? 믿음이 이기게 합니까? 믿음이 이기게 합니까? 마구 삼키면 안 돼요. 믿음이 이기게 하는 거 믿음은 우리 주관입니다. 믿음은 우리 주관이요, 하나님의 선물이 나 주관입니다. 그 자체가 전능의 힘도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데 다만 그것은 자존자, 전지 전능, 완전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 이 실상을, 실상을 내것으로 내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가지고 살면 그 능력이 나를 구원합니다. 하나님과 화친된 그 능력이 나를 구원합니다. 나를 대행한, 칭의를 준 그 영감이 나를 구원합니다. 대형해서 죄 없는, 죄 없다는 대형, 대형 그 능력이 나를 구원합니다. 대형 그 능력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이거 아무것도 모르고, 하루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 모양으로 이게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뻘떡뻘떡 돌아다닌다 말이오 뭐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지성소 앞에서 마음대로 들랑달랑 들랑달랑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 어떤 놈이 와 가지고 들락거리고 있어, 이거 죽여 버려라.' 죽여 버릴라고 떡 보니까 뭐냐 하면, 뭘 가지고 있습니까? 사죄를 가지고 있어. '왜 나를 죽여요?' '너 이놈 죄있지 않느냐?' 왜 내가 죄가 있어요? 죄 없는 사람 죽이는 심판이 있어요? 죄 없는 자에게 자유를 구속시키는 것이 있어요? 죄가, 내가 어디 죄가 있어요? 네가 왜 죄가 없어, 이놈아.
엉만진창의 죄를 지어놓고.' '여보. 그런 소리하지 마시오. 나는 죄 하나도 없소.' '어째 없노?' '아, 죄에 대해서는 그 죄의 형벌 다 받았으면 죄 없을 것 아니요?' '형벌은, 네가 하나 손가락도 꿈쩍이지도 안한 놈이 무슨 네가 형벌을 받았다 하느냐?'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형한 것이 좋지. 꼼짝 못 하는 거라.
예수님의 대형이 능력 있어. 내가 믿는 믿음이 능력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
믿음은 이제 믿을 때에 그 대형의 능력이 나를 구원하고 대행의 능력이 나를 구원하고 화친의 능력이 나를 구원하고 믿을 때에 성령의 능력이 와서 구원하고 진리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니까 믿음이 능력 있다고 그렇게 오해하면 안 돼.
믿음은 그 능력을 내가 내것 삼느냐 안 삼느냐. 하나님이 계약을 그래 놨기 때문에 내것 삼으니까 삼는 그것이 능력 있는 게 아니라 내것 삼으니까 그 실상 그 능력이 나를 구출해서 내게 능력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음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내것 삼는 유일의 계약의 방편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걸로써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내것 삼기 때문에 그 은혜가 나에게 능력 있게 역사하는 것이지 뭐 믿음 그것이 역사하는 것 아니오. 암만 믿어도 그거 없으면 안 돼.
소용이 없어.
이러니까 우리 믿음도 천 층 만 층인데, 그 믿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만 분의 일을 믿는 것도 있고 천 분의 일을 믿는 것도 있고 자꾸 그거 백 분의 일을 믿는 것도, (○ 조사님, 제일 많이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요? 제일 많이 믿는 사람, 한번 알아봐. 잘, 명철한데. 자면 소용없어. 자면 모르지. 자면 소용 있는가?) 그래, 이제 믿음도 층어리가 많습니다. 믿음이 층어리 많다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의 구원은 세 가지라 합시다.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세 가지인데 이제 이 믿음의 차이가 있다 말은 뭐이 차이 있다 말입니까? 이 세 가지에 대한 지식이 차이 있다 말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지식이 차이가 있어. 저 사람은 하나밖에 모르는데 이 사람은 둘 알아.
그거 차이가 있어. 저 사람은 둘밖에 모르는데 이 사람은 백 개를 알아. 백 가지.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도 백 가지를 알고, 영감에 대해서도 백 가지를 알고, 이 사람 백 배나 더 알고, 하나가 하나 아는 것이 자꾸 커져 가지고 그래 압니까 새것을 알아 가지고 되는 것입니까? 새것을 자꾸 받아서 알아 가지고 돼요 하나 그게 자꾸 늘어져서 그래 됐소? 그것을 가리켜서 장기짝으로 비유했는데. 그거 생명 있는 거는 아니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 그 말은, 믿음이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안에 있는 능력을 내가 믿기 때문에. 그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 하시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그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로서는, 계약돼 있기 때문에, 역사 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내가 믿기만 하면 그 능력이 와 가지고 일을 냅니다.
암행어사가, 옛날 얘기 들었지요? 암행어사 얘기 들었어요? 암행어사 얘기를 들은 사람 손들어 봐요. 아는 사람, 암행어사 얘기들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은 다 들었을 건데. 암행어사는 그 힘도 센 거 아니오. 공부하느라고 해 놓으니까 노리탱탱하게 빼짝 마른 게 힘 도 없어요. 이런데 여기 그 나라의 왕이 떡 특령을. 특권을 줘 가지고 떡 해 놓은 걸 뒤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짊어지고 다니는데, 이제 떡 이래 가지고 어디든지 가 가지고 불법한 게 있으면 그만 그 지방에 있는 그 모든 군졸들을 다 이걸 턱 가지고 명령을 내면 그 명령은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까짓 거 암행어사 그까짓 거 주먹으로 때려 주면 대번 죽을 건데 이렇지만 그 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그 특권을 받았는데 그게 문제라 말이오. 특권 이거 특권만 이거 떡 '자, 암행어사' '암행어사다!' 이라면서 '여기 군졸들아 모여들어라' 하면 그 군졸이 싹 모여드니까 뭐 정승이고 뭐 그 죽이라 하면 죽인다 그말이오 세력이 얼마나 큰지. 제 자체가 힘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왕이 그에게 정해서 준 그 특명 내놓은 그 특명이 권리 있다 말이오.
그 특명은 뭐이냐 하면, 우리에게 특명이 있는데, 그 특명을 내가 쓰는 것이 믿음이라. 그 특명을 받은 줄 알고 특명을 쓰면 그만 지극히 큰 역사가 와서 역사하는 것인데, 그거 내가 이런 특명을 받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안 쓰면 할 수가 없어. 어사가 힘이 있는 게 아니라 그 특권의 특령 그것이 힘이 있고, 특령이 힘이 있는 게 아니라 누가 힘이 있어요? 왕이 힘이 있어. 그 힘이 하나님의 힘이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힘이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으로 더불어 현실을 만났을 때에 겨자씨가 싸우는 거와 같이 현실은 나로 하여금 생명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나로 하여금 산 자로 살지 못하도록 할라고 애를 쓰고, 나는 안 죽을라고 애를 쓰고 안죽을라고 애를 쓰는 것은 내가 주님의 대속을 벗지 안하면 안 죽어요. 내가 영감을 버리지 안하면 안 죽어요. 진리를 버리지 안하면 안 죽어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진리대로 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 영감대로 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을 이 화친을 입고 있는 것이 사는 것이라. 이렇게 살면 세상이 마구 달라듭니다. 세상이 달라 들어요. 세상이 달라듭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돼요. 이래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데 나는 진리를 버리지 안하고 진리를 모시고 진리대로 살라 하고, 영감대로 살라 하고.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라 하고 이라는데, 예수님의 대속이 뭐입니까? 예수님의 대속 속에 뭣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속 속에 거기 굉장한 게 다 들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대속의 이 광대를 알게 해 주옵소서.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해방 준 해방을 다 알게 해 주옵소서, 어디까지 해방했는지.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알게 해 주옵소서, 이것을 밤새껏 기도하고 날마다 기도해서 자꾸 알아 나갑니다. 자꾸 알아 나가.
거기 예수님의 대속에 오만 거 다 들었어. 하나님이 주체자지, 하나님이 주체자지, 그 다음에 제이위로 존재한 하나님의 목적이 거기 또 거기 있지, 하나님의 예정이 거기 있지, 하나님의 창조가 거기 있지, 하나님의 보존이 거기 있지, 하나님의 섭리가 거기 있지. 이걸 가지고 우리 첫째아담에 속한 것이 잠깐 연단 받기 위해 가지고 이것이 마귀와 죄와 사망으로 미혹 받아 가지고 패전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완전히 대신 완전 복구를 시켜서 완전히 원상 복구로 해 놓은 게 그 안에 있지, 이러니까 이 밖에 있는 거는 뭐입니까? 이거 밖에 있는 거는 뭐이요? 자, 이거 밖에 뭐이 있습니까? 이거 밖에 있는 거 영계도 있고 물질계도 있고 나라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는 것인데, 다 있는 것인데 이제 속에, 어떤 황소가 있으면 황소 고깃덩어리에 속에 생명이 있는데 생명 떨어지면 그까짓 거 아무것도 없어. 생명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어. 이런데 모든 존재의 생명이 우리의 대속 그 속에 들었어. 이 생명의 근원되시는 자존하신 하나님이 거기 계셔.
이러니까, 우리가, 오늘 아침에 가르쳤지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오늘 아침에 말하지 안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가르쳤지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똑똑히 알아야 돼요. 그 대속을 벌로 알고 있어. 그러면 대속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또, 영감이 뭡니까? 영감이 없는 가운데 떡 나섰습니다. 영감이 척 나서 가지고 모든 걸 예정을 턱 했습니다. 영감이 단번에 예정을 했어. 또 영감이 이제 만물을 창조해라 호령을 하니까 영감에서 사신이 나왔는데, 영감에서 사자가 나왔는데 그 사자가 나오니까 사자 이름이 진리라. 진리인데, 그 진리가 또 그 진리가 나타났는데 그 진리의 이름이 말씀이라. 하나님의 말씀.
제 이위,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이라는 그 말씀은, 그 로고스는 대문자 로고스인데 그거는 자존자 제 이위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말하는 거는 소문자 로고스, 이제 말씀을 말한다 그말이오. 말씀이 나타나 가지고 '하늘이 되라, 땅이 되라, 만물이 되라, 그 여문 것과 무른 것이 나뉘어져라.
밤낮이 되라. 자꾸 말하는 대로 다 되지 안했어요? 말하는 대로. 그 말씀. 그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면 진리입니다.
어제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아, 말씀과 진리와 영감과 그런데 어찌 다릅니까?' 어제 말하기를 성경 말했고, 또 말씀 말했고, 진리 말했고 영감 말했고. 하나님 말했으니까 그게 어째 다릅니까, 그것을 물으러 왔어. 물으러 왔는데 그 교인들 좋은 교인이라. 한 교인은 뭐 ○○○교회 교인이고, 한 교인은 ○○○교회 교인이라 하던가, 그래 그거 좋은 교인이라. 그래. 물어서 어제 그것을 간단하게 말을 해 주니까 알았느냐? 알았다. 이래요. 성경 속에는 말씀이 들어 있어. 말씀 안에는 진리가 들어 있어. 말씀은 사람이 이렇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만 진리는 볼 수 없게 무형의 존재라. 진리가 말씀을 입고 나타났다 그거요. 이해가 돼요 어두우면 헛일이야, 어두우면. 심령이 어두우면 몰라. 진리는 피조물에게 떨어져 나왔을 때에 진리요, 하나님께서 바로 나올 때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켜서 영감이라 그렇게 말해요. 영감이라.
이러니까, 우리가 현실을 당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라고 하니까 말씀대로 하면 죽일란다, 어짤란다 협박을 놓습니다. 협박을 놓을 때에 그때에 믿음으로 이겨야, 믿음을 가지면 이깁니다.
무슨 믿음을 가져야 이기요? 죽일라고 할 때에. 내가 말씀대로 할라 하니까 죽일라고 할 때에, 이 말씀대로 할라 하니까 죽일라고 합니다. '네가 이 말씀 부인해라 그리 안 하면 죽일 것이다.' 저 구등터 잿만당에서 변판원 선생님이라고 주일학교 선생님인데 이 위에 ○○교회 거기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인데. 구등터 잿만당에 나무로 이래 떡 십자로 이래 달아 놓고 난 다음에 성경 말씀을 끄집어냅니다. '너 이 말씀을.' '믿습니다' '너 이놈 이 말씀 부인 안 할래?' '부인 못합니다' 이러니까 칼로 푹 찌르고. 종이를 쏵. 성경을 잡아 찢어 버리고 이래도 부인 안 했어. 그 사람은 뭘 믿느냐? 자기가 주장하고 있는, 자기가 주장하고 배반하지 안하니까 성경하고 하나 돼 있고 성경 말씀하고 자기하고 하나 돼 가지고 있고 진리하고 자기하고 하나 돼 있지 않소? 하나 돼 가지고 있지 않소? 하나 됐는데 자기가 그만 죽기를 두려워하므로써 그 진리를 내놓으면 진리하고 이별이 돼 버렸지.
그러나 자기는 죽어도 진리를 떨어지지 안할라 하니까 진리하고 하나되지 안했소? 말씀하고 하나요 진리하고 하나지. 처음에는 성경보고 하나 됐지만 들어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고 하나 돼. 말씀하고 하나가 되고, 보니까 참된 이치 진리라 말은 참된 이치라 말이오. 참된 이치하고 하나가 됐습니다. 그럴 때에 참된 이치하고 하나될라고 하니까, 떨어지지 안할라고 하니 떨어지지 안할라고 한다고 칼로 푹 찌릅니다. 그럴 때에 그 변판원씨는 뭘 믿었을까요? 뭘 믿었소? 예? 진리를 믿었어. 진리를 믿었어. 내가 동행할라 하는, 내가 동행할라고 하고 있는. 동행하고 있는 이는 없는 가운데 천상 천하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와 동행하는 이가 지었어. 너도 이가 지었어. 내가 썩어질 생명 그거 그럴 거 아니라 네가 지금 이 진리하고 나하고 똘똘 뭉쳐서 한 덩어리가 되도록. 이 진리하고 나하고 한 덩어리가 되도록, 생명까지 투자해서 한 덩어리가 되도록, 육체까지 투자해서 한 덩어리가 되도록, 네가 나를 이 진리하고 한 덩어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니까 감사하다. 이 피조물 작은 자가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한 그 지극히 큰 진리하고 자기하고 한 덩어리가 됐으니까 커졌소 작아졌소? 커졌어. 이걸 믿기 때문에 담대한 거야. 이걸 믿어야 돼요.
이걸 믿어야 됩니다. 믿을 때 그 진리는 역사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분은 순교했는데, 6.25 때 아마 순교 쳐 놓고는 그분 순교가 제일 좋은 순교 같아. 배추달씨 그 순교도 그도 조금 어리고, 변판원씨 순교가 제일 좋은 거 같아. 또 박기천 조사님의 순교도 좋지만 좀 그런 거 같고, 그분은 직접 이래 당그러 매 놓고 한 성구 보고 '네가 이 성구 부인하면 살려주마.' '안 된다 그 성구는 내가 믿는다. 그 성구는 하나님 말씀 진리다. 내가 진리를 배반하고 너거에게 복종하겠느냐? 진리하고 나하고 동행이다.' 이라니까 칼로 한번 푹 찌르고. 또 집어 뜯고, 또 자꾸 요긴한 성구를 대며 거석할 때에 자꾸 '믿는다, 믿는다' 이라니까 이제 찢으면서 나중에 마지막에는 이놈의 새끼 뱃속에 뭐이 들었냐 하면서 뱃구멍 있는 데를 확 헤벼서 구멍이 이만지 뚫혔더래요. 뭐 등삼아리 뼈까지 다 끊겨 버렸어. 그만 이만치 뚝 떼 버렸어.
그래 거기서 죽여 버렸어요. 이랬는데 그걸 누가 봤느냐? 하나님이 고거 증거하기 위해서 거기 갔던 사람 가운데, 죽일라고 사형 받아 갔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살아왔는데 그 사람이 와서 동리 와서 얘기를 하고. 그래서 가보니까 그래 죽었어. 그래 가지고 장례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부산 있어서 가지는 못하고 장례에 가지는 못하고. ○○교회에 있는 모든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변판원 집사가 솔직하게 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솔직하게 이 복음을 받고 언제든지 제가 삼봉산 거기 칼바위 뒤에 거기 가 기도하러 가면 밤중에라도 반드시 올라옵니다. 그 뭐 험한 산인데 거기서. 밤에도 올라와. 비호라. 훅 올라와. 그랬는데 그 사람이 세상에 살 때는 자기 집에서 핍박을 받아서 그때 그 흔한 고무신을, 하, 고무신 한 켤레 못 사 신었어. 돈을 안 주니까. 일은 소같이 잡아 부려먹습니다. 쇠죽 다 끓이라 하지, 풀 혼자 다 베라 하지, 농사 다 지으라 하지. 이라고도 돈은 한 푼도 안 줘. 돈 한 푼도 안 주니까 신고 다니기는 뭐 신고 다니느냐 하면 그때 송판, 산에 산판 할 때 송판을. 송판이 뚜꺼부리한 거 우리는 한 짐 돼요. 들면. 뚜꺼부리한 거 이거 이래 가지고 구멍 서이 뚫어 가지고 여기다가서 삼으로 막 꼬아서 삼도 이만해요. 뚜껍하게.
이만하게 이래 가지고. 그거 일본말로 '게다'인데, 그 '게다' 그거 신고 풀 베러 다녔어요. 풀 베러 막 산에 가서 풀 베어 가지고 한 짐 지고 돌아다닐 때도 날아다녀요. 키도 그리 크지 않애 새카마이 조그만한 게 말이오. 그만 그 사람 들어가면 그 골짝이 덜썩덜썩해요. 어떻게 찬송을 불러 재끼는지.
그 사람 좋아하는 성가 하나 있었는데, '산곡의 백합화 성도들이여' 그 찬송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 사람. 칠 년 대환난 일기 전에 나는 가노라.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 그 찬송 잘도 불러 쌓더니만 환난 전에 가 버렸어. 한번도 걱정이나 근심이나 슬퍼하는 꼴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는 것은 내가 세상과 같이 살면 저희 것이라고 나를 사랑하겠지만 요한복음 15장에 말씀한 것같이 내가 세상과 같이 살지 안하고 세상을 죽인. 세상 왕을 죽인 마귀를 죽인, 그와 대립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살라고 하지 영감을 입고 살라고 하지. 진리를 입고 살라고, 진리대로 살라고 이래 하니까 그런 박해가 오니 내가 박해 당하는 것은 진리 때문에 당하는 것이요, 영감 때문에 당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 때문에 당하는 것인데 그들이 협박도 하고 유혹도 하고 다 하는데,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유혹을 해도 진리보다 더 좋은 게 없어. 진리보다 더 아름다운 게 없어. 영감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어. 주님의 대속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어. 이러니까 좋은 데에 미혹을 당하지 안해. 암만 좋아 봤자 암만 좋아 봤자 그거 다 진리가 만든 것인데. 진리가 만든 것인데 진리와 나와 하나가 되면 진리가 만든 건 다 내거라. 우주의 것도 내거요, 영계의 것도 다 내거라. 한국도 내것. 세계도 다 내 것이라. 그 좋은 거 다 있는데 한목 몽땅 다 차지하지 그 까짓 거 뿌스러기 하나 차지할라 하다가서 나중에 가서 거지될라고? 그러기 때문에 그분에게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게 다 있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걸 가져와도, 그분에게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 미혹을 받지 안 할 수가 없어.
그래 평소에 자꾸 우리가 그걸 공부하는 것이라. 그분이 가지고 있는 거는 더 좋다, 더 좋다, 이 말로만 좋은 게 아니라 실효, 더 좋다는 것을 확실히 연구해서 안다 그거요. 이것 때문에 만날 그 생각하지. 그게 명상이라. 또 그들이 막 위협을 가지고 세력을 부립니다. 세력을 부리는데 콧똥을 뀌요.
콧똥을 뭐, 비웃습니다, '야. 엿새 동안에 만든 게 너거들이라. 엿새 동안에 만든 너희들이라. 엿새만에 만든 그분하고 나하고 합작이야. 그분하고 나하고 한 덩어리라. 뭐 야단 쳐?' 그래도 그 너무 야단치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대로 좋게 자꾸 받습니다. 좋게 받아서,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어서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
그러나 당신의 뜻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이 일을 위해서 불가불 너희에게 내가 있는 게 유익하기 때문에 내가 더 있다.' 말했어.
세상에 믿는 기독자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면 뭐 있을 이유가 뭐 있습니까? 더 좋은 거 다 점령해 놨는데. 우주도 내거요, 영계도 내거요, 모든 거 사망도 내거요, 생명도 내거요, 이제 것도 내거요, 장래 것도 내거요 천사도 내거요 천군도 내거요, 모든 성도들도 내거요, 교회도 내거요, 다 내 것인데 주님하고 한 덩어리 됐으니까 내것 됐지. 그렇지 안해요? ○집사님 주님하고 한 덩어리 됐으니 내것 됐지? ○집사님 말이요. ○집사님은 남편 재산 많으니까 '남편 재산이 내 재산이니까 재산 많지' 그것도 좋지만 그까짓거는 몇 닢푼치 안 돼. 큰 부자하고 하나가 돼 놓으면 그만 큰 부자 것이 다 내것 돼요. 알겠어요? 예수님의 것으로 내것돼서 부자감을 느껴 봤어요? 예수님의 것을 내것 삼아 가지고 그 부자의 감을 느껴 봤냐고? 부자의 기쁨을.
부자의 만족을, 부자의 배짱을 한번 내 봤느냐고? 사람 앞에 못 해도 내 봐야 돼요, 내 봐야 돼요, 그거. 다 모두 안 믿으니까. 믿으면, 믿으면 배가 쑥 나와서 뒤로 자빠지지만 그라면 덕이 안 되기 때문에 안 그런 척 하고 있지 땅 위에 부러워할 것이 뭐 있다 말이요 부러워할 것이. 땅 위에 큰 것이 뭐 있습니까, 있기를?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끼지, 주님의 것이요 내것이기 때문에 아끼요. 다 아끼고 사랑하고 상할까 싶어 그렇지, 뭐 주님보다 큰 거 어디 있으며. 주님보다 좋은 거 어디 있으며. 주님보다 두려워할 것이 무엇 있으며, 주님 보다 탐할 것이 어디 있으며, 주님보다 사모할 것이 뭐 있다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어.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세상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것은 뭣 때문에 투쟁한다는 그것을 알고 투쟁해야 됩니다. 그저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하고 대립된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세상하고 뭐 대립이 됩니까? 세상이 우리 것인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데 왜 대립이 돼? 다만 나는 주님으로 더불어, 영감으로 더불어, 진리로 더불어 살라고 하니까 그들이 이해 못 해서 대립을 하니 될 수 있는 대로 대립을 안 하도록 자꾸 살살 달개고 간접으로 해서 대립을 안하도록 이렇게 할라 해도 대립을 하면 어짤 수 없고. 대립을 하면 실패인 줄 알고 대립을 안 하고 그들 이 나에게 설득을 받아 가지고 나와 같이 이렇게 하나 돼서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과 하나되도록 그렇게 만들라고 애를 써도 안 되면 부득이 아타까운 마음 가지고 하다 하다 안 되면 '주님이여 이것들이 알지 못해 그런 것이니까, 이것들이 이제 나를 구원한 것처럼 구원하시면 이들도 똑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도 주님과 진리와 영감과 하나되고, 땅 위의 그런 죄악과 악령과 악성과 하나되지 안 할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간청을 하고, 내 것 상할까 싶어. 그게 내 것이니까. 핍박하는 그것도 내 것이라.
핍박하는 김일성이도 내것. 김정일이도 내 것, 다 내 것이라 그말이오. 이래서 상할까 싶어서 이것 멸망하지 안하고 예수님의 피공로 입으면 뭐 거기는 숫자 많다고 모가치가 준 것도 아니야. 그거는 숫자가 많다고 모가치가 줄어지는 것도 아니야. 이 세상에는 둘이 차지하면 모가치 적겠다 싶어 시기하고 질투하지만 거기는 시기 질투할 필요가 없어. 모가치가 줄어지다니? 아, 많이 갈수록 얼마든지 있어. 무한히 있어. 이러니까 그것도 내것으로써 좋은 것으로 내것되면 좋을 터이니까 상할까 해서 모든 존재는 다 자기의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싸울 때에는 내가 어느 편에서 가지고 뭣 때문에 싸운다는 그것을 언제든지 새롭게 깨달아야 됩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이래 투쟁하면 못 써요. 싸울 때는 '내가 뭣 때문에 싸우느냐?' '돈 때문에 싸우지 않느냐?' '그래, 어째 보니까 돈 때문에. 아니 그까짓거 치워 버리라. 돈 때문에 거석하면 돈 그거 치워 버려라.' '너 명예 가지고 싸우는 거 아니냐, 지위 가지고 싸우는 거 아니냐, 권세가지고 싸우는 거 아니냐. 다른 사람이 너를 환영하고 인정하나 안하나 그것 때문에 네가 시기 싸움 아니가?' '선생님, 나사렛 예수에게 따라다니며 세례 받는 사람이 여기보다 더 많습니다.
그래 둬 되겠습니까?' 약발을 올려서 충격을 줄려고, 그때 그렇게 하는 사람은 고거 누구의 일군이요? 마귀의 일군이라. 마귀의 일군이고. 세례 요한에게 '아, 저 나사렛 예수가 세례 주는 것이 선생님 세례 주는 것보다도 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 자꾸 사람이 끌려듭니다. 이거 분한 일 아닙니까? 분한 일 아닙니까?' '아, 아무것이가 부흥회하는데 거기 사람이 많이 붙고 그 교회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 분한 일 아닙니까? 이 어째 방비해야 안 됩니까?' 그럴 때에 세례 요한이는 뭐라고 말했어요? '그는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 그렇게 말한 것은 자기는 할 일 다 했기 때문에 이제 자기보다 큰 자에게 붙이는 것이 옳기 때문에 큰 자에게 붙일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
우리도 그런 일이 있으니까 약발을 잘 받아요. 이래 놓으니까 밑에 교인들이 그래 놓으니까, 뭐 전부가 교인들이 그래 놓으니까 교역자들이 다 그거 돼 가지고 뭐 '아, 그거는 이단이다. 그거는 이단이라 가면 안 된다. 거기 인사도 하면 안 된다. 인사도 하면 안 된다. 이단이라 거기 가면 안 된다. 그거 이단이다.' '무슨 이단입니까?' 이라면 무슨 이단이라고 가르치는 거는 뭘 가르치는지는 모르지만 그거 다 마귀 그놈에게 꼬여 가지 그 제 발가락 제가 쪼고, 제 눈 제가 뽑고, 제 대가리 제가 깨고 귀신들려 놓으니까 돌로 가지고 대가리를 툭툭 때리지 안해요? 이거 뭐 전부 귀신 들린 노름이라. 그거 다 귀신 들린 노름.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하고 싸울 때에 내가 뭐 때문에 싸우느냐 하는 그것을 밝혀야 됩니다. 또 내가 뭣에게 속해 가지고 내가 싸우느냐 그것을 밝혀야 됩니다. 내가 속하는 것은 셋에게 속하면 완전에게 속했는데, 셋에게 속하지 안하고 하나에게 속했든지 둘에게 속했든지 이래 속했으면 거기는 그 위험성이 아주 심히 큽니다. 내가 주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에 속해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라면 진리는 이 모든 천상천하 만물보다 진리는 강합니까 약합니까? 진리는 강합니까 약합니까? 그저 입에 발려서 '강합니다' 할 게 아니라 강하다 하는 것 이것은 강한데 얼마나 강하다는 걸 인정할라면 그 쉬운 줄 압니까? 강하다 하는 것을 인정하고 인정해 가지고 자기 속에 강한데 강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할 때는 고놈을 죽일라고 달라들어서 발발 떨면서 어떨 때는 자기 입을, 어떨 때는 자기 입을, 혀를 깨물고 자기 눈을 뺄라고 뭐 뚜드려서 퉁퉁 붓고 이렇게 막 지금 울분한 사람이라야 예수 믿지, 느릿느릿한 거, 느릿느릿한 거는 그 뭐뭐 살이나 찔까 아무 승리 못해.
이렇게 내가 뭣 때문에 싸우느냐? 그러면 나는 지금 어디 속했느냐? 내가 속한 자의 나와 함께 하는 자, 내가 속해서 나와 함께 하는 자와, 나를 대립하는 자와, 그 능력을 비교해 보고, 그러면 그보다 내가 속한 것이 능력이 무한히 크고, 그러면 그것들은 뭐이냐? 그것들은 내가 속한 것이 그것들을 만든 것인데 그것들은 내가 속한 이것들의 것이니까 그것들은 내것이라 그말이오. 내가 속한 것들의 것이니까 그것은 내것이라. 김일성이도 내 것이라, 김정일이도 내것이라, 모두 다 내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거기 대해서 내것이니까 어째야 됩니까? 아껴야 돼. 아껴야 되면 아끼는 그 방법은 뭐냐 그것을 범죄케 하는 것은 아끼는 게 아니고 될 수 있으면 범죄를 적게 하도록, 그것도 어떻게 좀 깨닫고 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만들라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요편에서 가지고 바로 되는 것이지.
고게서 그렇지 안하고 '저거 죽여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 버리면 내가 진리와 영감과 주의 피공로에 속했는데, 그라면 그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야 그래. 너 잘한다 칼로 찔러 버려라. 귀를, 말고 귀를 깎아 버려라.' 그라겠습니까? 그라면 주님의 피하고 영감하고 나하고 갈라집니까 합작이 됩니까? ○목사님. 갈라집니까? 분명히 갈라지지요. 그만, 내가 그게 뭐이냐? 내가, 그것이 새사람을 버려 버리고 옛사람으로 홱 돌아갔다 말이오. 그거 뭐냐 하면 옛사람 구습이라는 분개. 그 모든 시기, 질투 그런 거를 가지고 그만 착각을 해 가지고, 나와 나를 착각해 가지고 새사람 나로 살지 안하고 옛사람 그게 내인 줄 알고 자기에 대해서 착각해 버리니까 갑자기 옛사람으로 살고 나니까 영감 다 달아나 버렸어. 영감 다 달아나 버려서 어디로 간지 없어. 그 진리가, 환하던 진리가 감감해져 버렸어. 예수님의 피공로를 생각하니까 울고 불고 기쁘고 즐겁고 감사해서 어쩌든지 주를 위해서 죽어도 좋았는데. 그만 그 깨달음의 은혜가 다 나가 버렸어.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저는 이를 갈아 붙여 가지고 '네까짓 것들이 나를, 암만 범죄하라 해 봐라. 내 범죄 안 한다.' 이를 갈아 붙이면서 '나를 볶아먹든지 지져 먹든지' 마음대로 해라. 나는 이제 절대 나는 지지 않겠다.' 고럴 때는 고게 셋에게 속한 사람이요, 새사람이요, 옛사람이요? 새사람입니까? (옛사람) '내가 죄를 지을 줄 아느냐? 볶아먹든지 지져먹든지 구워 먹든지 마음대로 해라. 내가 너거한테 양보하고 범죄하고 진리를 어길 줄 아느냐? 신사참배를 할 줄 아느냐?' 그러면 고거는 옛사람이 하는 것입니까 새사람이 하는 것입니까? 예? 자, 그것이 새사람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뻐뜩 들어 봐.
뻐뜩 그래야 확신을 가지고 뻐뜩 들어봐 '뻐뜩 들어 봐. 봐 저 돌아봐요, 저 돌아 봐. 저 돌아 보라고 형편이 어떤지 알아 봐요. 저 돌아 봐. 자, 손 놔요.
그것이 진리를 가지고 진리를 안 어기겠다고 싸우지만 자기도 모르게 옛사람으로 살짝 바꿔져 가지고 옛사람이 지금 그렇게 악을 피우고 독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한 번 들어 봐요. 아이구 이게 적다 여기 남반은 이게 많아도. 이거 많애 우리 패전인데 큰일났네. 새로 한번 들어 봐요, 새로.
옛사람이 하는 것이라, 새로 한번 들어 봐요. 새로, 여기는 안 들어요, 여기.
똑똑히 들어요. 옛사람이 하는 거요. 옛사람이 하는 거. 손 놔요. 우리가 구별해서 싸워야 되지 구별해 싸우지 안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해방 후에 마산에 가니까, 마산에 그때 집회를 갔는데 저를 청해 가지고 집회해 달라 해서 그래 가서 집회를 갔습니다. 갔는데. 그때는 뭐 해방 직후이기 때문에 신사참배란 말이 많이 났습니다. 신사참배 했느냐 안 했느냐 어땠느냐 하는 그런 말이 많이 났어요. 가니까 들짱 나한테 묻기를 '아, 신사참배 어찌 됐습니까?' 그거 물어 아, 부흥사한테 그거 물을 게 뭐야. 내가 그때에 그것을 그저 뭐 '신사참배는 안 했습니다' 요라고 말았어. 그 사실을 내가 발표를 안 했어요. 발표를 했으면 나도 어느 끈터리에 끌려 갔을런지 몰라. '그런데 그래, 그러면 신사참배 어찌 했습니까?' 내가 이래 물었어. 물으니까 그 할머니들 몇이는 '나는 감옥에 가서 갇혀 가지고 있다가서 그래 내 보내서 나왔습니다.' '내 보내 나왔는데 그래 어떻게 해서 나왔습니까?' '네 이놈들 지져 먹든지 볶아 먹든지 구워 먹든지 찢든지 마음대로 해라. 내가 신사참배할 줄 아느냐?' 이래 가지고 이겼다고 그래 하는 할머니들이 많이 있어요. 노 집사님들이 많이 있어.
그래서 뭐 그걸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내가 웃으면서 '예. 그렇습니까? '그라고 말았지. 그거 옛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알겠소?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내가 뭣 때문에 싸우느냐? 내가 누구에게 속해 싸우느냐? 내가 속한 그가 누구냐? 그가 크냐 작으냐? 상대방은 뭐이냐? 상대방은 내가 속해서, 내가 이별치 안하고 죽어도 내가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내가 배반치 않겠습니다 하는 그분의 것이 상대방이라 알겠소? 상대방 나를 죽인다 살린다 하고 있는 그게 내나 뭐이냐면 그분의 것이라 말이오.
그분이 아끼고 있어 그분이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말이오. 그라면 욕을 해야 돼요 그것을 아껴야 주님이 좋아하요? 저 안경 쓴, 권사님이요? 아껴야 좋아해요? 아껴야 좋아해요? 원수로 삼으면 좋아해요? 그거 구별 못 되는 모양인데 원수로 삼으면 좋아해요. 주님이? 아끼면 좋아해요? '이놈들 죽이든지 살리든지 해라. 이 괘씸한 이놈들 막 하나님이 불을 내려서 막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좋아해요 그것을 아껴서 그걸 동정하면서, 그걸 동정해서 '그거 저것들이 저렇게 철 모르고 저렇게 하니 참 기가 찬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앞에 그것을 자꾸 돌이켜 알게 해 달라고 해야 좋아하겠어요? 예? 예? 어떻게 해야 좋아해요? 돌이켜 회개하게 해 달라 해야 좋아하지? 옛날 신자 같은데 그때 신사참배 때에 그렇게 막 악독 부리면서 이기지 안했어요? 악독 부려 이겼으면 그거 회개해야 돼.
그러기 때문에, 원수로 더불어 크나 작으나 원수로 더불어 싸울 때에는 내가 이 근본을 생각해서 상대방을 내가 안타까와 사랑하는 사랑이 없을 때에는 내 자신이 자리를 옮겨 서서 내가 변질됐는가 모릅니다. 변질되기 쉽습니다.
상대방을 사랑치 안하면 변질된 내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새사람 내가 아니고 나는 내가 새사람 내인 줄 알았는데 착각해서 변질이 된, 벌써 찰나에 옛사람으로 바꾸어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은 사랑이 없는 곳에 투쟁도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의지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에 대해서 새벽 기도 때에 가르쳤는데.
제가 아는 대로 옳고 바르고 참됩니다. 그대로 여러 분들이 믿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내가 뭣 때문에 싸우느냐 하는 것을 밝힐 때에 힘이 납니다. 그러면, 내가 어디 속해 가지고 지금 싸우고 있으며 어디 속해서 지금 내가 욕을 얻어먹고 있느냐? 어디 속해서 욕을 얻어먹는가 그것을 밝혀서 주와 및 모든 복음을 위해서 내가 욕을 얻어먹는다고 하는 것을 똑똑히 밝혀서 알게 되면 힘이 나옵니다. 그 힘은 내 속에 양심이 나를 힘있게 해 주는 것이고, 내 속에 영감이 나를 쾌활하게 힘있게 담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내가 속한, 내가 속하고 내가 바라보고 내 전부로 삼아 내 모든 걸 다 해서 사랑할라 하는 그가 세상보다 능력이 크다는 것을 자기가 알 때에 그때에 세상은 조그만하게 보이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큰 것을 보고 난 다음에 크신 그분과 저거와의 관계가 어찌 되느냐 하는 것을 연구할 때에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 크신 분이 그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이 나와 같이 될 수 있는 그 재료를 가지고 있는 것들인데 그것이 아직까지 미숙해서 그러니까 내 동생이라 그말이오. 내 동생. 내 새끼라 말이오. 나는 첫열매고 그거는 다음 열매라. 그 주님이 주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니까 그걸 이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가지니까 주님이 입이 방긋하이 생긋하이 좋아서 벌거이 얼굴 보니까, 피부 빛을 보니까 좋아하는 것 같고, 그걸 '이놈들, 괘씸한 놈들, 마구 멸해야 되겠다.' 하고 보니까 주님이 눈이 둥그러이, 해 가지고 섭섭하다 그말이오. 이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보니까 이것이 다 내것이, 장차 내것 될 것이요 주님의 것이요, 아, 장차 내 것 될 것이요.
주님의 것이요 영원히 이것 다 우리 것 될 것인데 사랑스럽다 말이오. 그 사랑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어쩌든지 나와 같은 구속을 받도록 할라고 해 가지고 마지막 죽는 그 시간까지 증거를 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인민군에게 끌려 가지고 감나무 골이라 하는 그 골에 가면서 중간에 가면서 그 모든 사람들이 지금 죽으러 끌려가는데 거기서 '여러분들,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으로 다가 아니고 오는 영원한 천국이 있는데 예수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갑니다.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만 믿으면 뭐 죽고 사는 그까짓 거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이라니까 '이놈의 새끼 뭐라 해?' 하며 총부리로 입을 때려서 입이, 이가 뭐 빠졌다는가 그랬대요. 총부리로 때려서. 그 소리 못하구로.
이라는 데에 손 목사님이 거기서, 그라며 피를 출출 흘리면서, 이제 곧 가면 죽을 터이니까 여러분들 예수 믿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외치고. 그 총부리로 때리는 자를 보고 말할 때에 '이는 알지 못 해 그런 것이니 이것도 나와 같은 자를 만들 수가 있지 않습니까? 주여 만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했으니까 주님이 그때 만족을 하셔 '아, 손 양원 목사야 너는 참 나의 사랑하는 자다. 네 목에서 한 구슬꿰미로 내 마음을 다 빼앗았다. 네 모가지에서 나오는 구슬 같은 그 진주 구슬 한 마디에서 내가 솔빡 녹았다. 네 보는 한 눈초리에서 내가 그만. 내가 마음이 끌리고 완전히 녹았다 네가 인민군 무리들을, 이 원수를. 너를 때려죽이려는 이 원수를 네가 이렇게 보는 그 네 눈초리 하나에서 내가 완전히 솔빡 녹았다. 네 목의 구슬꿰미와 네 눈으로 한 번 나를 봄으로 인해서 내 마음을 다 빼앗았다. 다 빼앗았다.' 이 세계가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뭣 때문에 싸우고 있느냐?' 그걸 알고 하면 힘 나오고 '내가 어디 속해 가지고 싸우느냐?' 그거 알면 힘이 나오고, 내가 속한 것이 세상과 비교해 볼 때에 무한히 탁월한, 초월한 능력을 가졌을 때에 두려움이 하나도 없어 보이고, 거기서 이 모든 것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하신 주님의 대속, 지극히 크신 분의 대속을 생각할 때에 그것도 나와 같이 구원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으니까 마지막 죽는 시간까지 그걸 사랑함으로 끝마치고, 그것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을 마치는 것이 사랑하는 주님을 대접하는 것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때는 그것으로써 끝까지 하다가 끝을 마쳤다 말이오. 성도들의 걸음은 이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라 하는 것은 올바른 지식, 지식이 먼저 자라가야 돼요, 지식이 자라가는데, 지식 자라가는 것이 어떻게 자라가요? ○목사님 지식 자라가는 게 어떻게 자라가요? 소나무같이 자라가요 장기짝같이 자라가요? 지식 자라가는 거? 장기짝같이 하나님의 지식 하나 와 가지고 하나 더 알고. 하나님 지식 하나 더 알고, 성경 한 절 보니까 더 알고, 두 절 보니까 더 알고, 자꾸 옵니다. 영감 한번 먹어 두 번 먹고 하니까 자꾸 이래 자라서 온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하나된 것, 한번 얻은 것 그것이 자꾸 그것이 뽀작 뽀작하게 되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새것으로 새것으로 오는데 새것이 오는 그 새것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것이 내게 옴으로 그 능력과 모든 속성의 모든 것이 내게 옴으로써 내가 점점 커지는 데 그렇게 커짐으로써 하나님의 본체는 텅 빕니까 하나님 본체 그것이 있습니까? ○○○조사님, 그대로 있어? 그대로 있는데 내게 또 와 있네. 그라면 그대로 있고 내게 있고, 그러니까 뭐이 돼요? 그대로 있고 내게 있고 하니까 그 사이 뭐이 됩니까? 그대로 있고 내게 있고 그라니까 그대로 있고 내게 있고 그게 뭐야? 그대로 있고 내게 오니까 연결이 되지. 연결이 돼 그대로 있는 그것이 내게 연결돼 가지고 언제든지 그분에게 있는 것이 내게 연결되고 내게 언결되고, 내가 입에서 여기서 말하면 저 스피카에 들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있는 것이 내게 쭉 와 가지고 연결됐기 때문에 내게 통해 가지고 이라는데 또 내게 통해도 나가면 더 많이 들립니다.
그래서 일천 척을 흐르니까 이제 발꿈치에 오고 또 일천 척을 흐르니까 무릎에 오고 일천 척을 오르니까 허리에 오고 일천 척을 흐르니까 이제 드부렁이 뜨고 모든 만 생명들이 살아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 알고 둘 아니까 주님과 나와의 연결이 차차 가늘해집니까 커집니까? 커져. 커져. 커져. 이래서 주님하고 나하고 떨어지지 못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것을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를 사랑하고 마지막에는 그를 구원하는 그 구원으로 '예수님의 복을 대 잇게 한다' 말은 예수님을 계대한다 말인데, 예수님을 계대한다 말은 예수님이 제사장, 선지자, 왕노릇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도 새끼 예수로, 새끼 예수로, 새끼 예수로 제사장, 선지자, 왕노릇한다 말입니다. 새끼 예수라니? 새끼 예수면 그러면 딴 존재인가? 한 예수의 것이 쭈욱 뻗혀 나와가지고, 햇빛은 하나뿐인데 햇빛 하나에다가 많은 것이 비추어 가지고 나왔는데 그 많은 광선이 비췄지만 태양 한 개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비유컨대, 이제 주님 한 분의 제사장, 선지, 왕 그것이 우리에게 연결돼 가지고 나를 통해서 내가 제사장 노릇하고 선지자 노릇하고 왕노릇 하는데 내가 통해서 할 때는 내 독단이 합니까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고 계셔요.
그러면, 한 억만 년 하고 나면 그때는 주님하고 나하고 떨어져도 제법 좀 있을 것 아닙니까? 떨어지면 떨어져도 좀 있을 수 있소, 떨어지면 떨어지는 즉시로 그만 없어져 버립니까? 어째? 떨어지면 떨어지는 즉시로 어찌돼요? ○집사.
떨어지면 떨어지는 즉시 어짜지? 잠만 성공하고 이거 성공 못 하면 되는가? 잠 성공하면 소용 있어야지, 잠 성공. 알아 듣고 해야지 그래 가지고 있으면, 모르면 무식한 신앙은 승리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는 대로, 무식한 신앙은 승리를 못합니다. 못하니까 무식한 승리는 낙망하고 말 것인가? 무식한 승리, 지식 이 하나도 없는 승리라도 겨자씨 모양으로 자꾸 자라가면 돼. 하나씩 둘씩 알아들어서 자꾸 하나씩 둘씩 들어 알고 귀넘어 듣지 안하고 정신차려 들으면 알고 알고 해서 지식도 자라가고 모든 것이 다 자라간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비유컨대 그런 일이 없지만 억만 년 제사장 노릇하다 가도 주님과 나와의 연결이 끊어지면 아무것도 없어. 사망 뿐이라. 아무것도 없어.
그러기 때문에 이제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기 때문에 주님은 머리요 우리는 몸이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머리의 모든 계획이 다 몸을 통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가 새것 와 가지고 하나 와 가지고 우리에게 쌓이고 둘 와 가지고 쌓이지 하나 왔던 것이 그대로 그게 자꾸 무슨 변동돼 가지고 된 것 아니요. 그러니까 전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주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새로 온 것입니다.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구원입니다.
자, 그러면 뭐 물어 볼 거 있어요? 그거 뭐인고 읽어 줘요. 나는 그거 읽을라 하면 시간 걸리는데. 마이크로 읽어 봐요. 아따 되게 많네? (첫째, 심신의 구원은 현실을 통해 단번 구원으로 끝난다면 그 심신의 요소 구원을 영원 둘째 사망으로 끝나는데 다시 회개하면 부끄러움은 없으나 능력 곧 기능이 없다고 하셨는데 다시 기능을 가질 수는 없는지요?) 그 심신의 구원이, 심신의 구원 기능이 한번 죽었으면 다시 부활시킬 수는 없느냐 그말이지요? 그거지요? 네, 심신의 기능 구원은 개별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회도 한번만 가지고, 구원도 한번만 하고 죽는 것도 단번에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신의 기능이 그 현실에 출동된, 그 현실에 출동된 기능은 그 현실에서 영원히 생명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그 생명을 벗어서 영원히 사망할 수 있는 것이 그 단번에 결정되고, 결정된 것은 다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또 못박히기 전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거는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얻은 그 심신의 기능은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같은 사람이나마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은 심신의 기능이 백분지 오십이 지금 살아 가지고 세상에서 생명 역사를 하고 있는 그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심신의 기능이 기분만 그렇지 하나만 살아 가지고 그렇게 유약해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 심신의 기능 구원은 단번입니다. 네.
(둘째. 예수님의 대속 부활 후, 영이 중생해서 성령과 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데 구약의 성도는 무엇으로 통해 영이 움직였는지요? 구약의 성도는 주님과 연결만 되면 된다 하셨는데 시간을 초월한 곧 아담이 범죄한 후 막바로 즉시 예수님의 구속을 입었는지요 영이 중생했는지요?) 그 내가 읽으는 것은 잘 모르기는 모르겠는데 대략 그 말을 들어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구약에 있는 신자들도 구원을 얻느냐, 또 멸망을 받느냐 하는 구원 멸망은 어디다가 근거를 두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에다가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라면 뱃속에서 그가 낙태했다 할지라도 선택됐으면 구원이 됐다 그렇게 우리는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많이 믿어서 목사까지 하고 뭐 어떻게 장로까지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선택받지 안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멸망을 받는 사람이라, 그렇게 그 근거는, 구원 근거는 선택에다가 근거를 둡니다.
그러고, 그들은 그라면 어떤, 예수님의 대속이 없을 때니까 어떤 대속을 입고 하느냐 하면, 그 대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짐승의 가죽을 입힌 것을 거기 나타냈고, 또 4장에는 그 짐승을 잡아 가지고 제사드리는 그 제사를 주님이 환영하셨는데 곡식으로 지은 것을 제사드리는 것은 예수님이 다 거부했습니다.
성경은 다 기록할라면 천하에 해도 두지 못할 만한 그만 한 많은 양을 신구약 성경에 간추려 기록했기 때문에 간추려 기록한 것은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 그만하면 다 알 수 있는 강령을 들어서 마치 움싹을 기록한 거와 같이 삼각의 정점을 기록한 거와 같기 때문에 그 속에는 심히 큰 것이 양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감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양의 대속. 양의 피로 가지고 대속의 제를 지내야, 대속이 돼야 되지 대속되지 안하면 죄를 사함은 받지 못한다.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대속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짐승을 잡아 가지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을 각론한 것을 성경에 기록되지를 안했지만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듣지 아니하시고 아벨은 그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것을 보아서 성경에 기록하지 안한 그들이 들은 그런 각론이 많이 있었다고 그렇게 우리는 추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속죄한 것을 그 후에 많이 말씀하셨고 로마서에는 더 밝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짐승의 피는 예수님의 그 대속을 예표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의 계약인고로 그 예표한 그 계약을 믿은 사람들은 그 계약의 혜택을 입었다가 그 계약이 언제 완성됐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휘장이 갈라지는 것으로써 표시해서 그때 완성이 됐고, 또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할 때에 무덤이 갈라져서 죽은 자들이 살아난 것으로써 이제 그때에 비로소 사망의 문을 열고 생명의 그 문이 열려진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네, 그만하면 됩니까? 예? 또?
(성령의 힘을 얻어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 본체 이외의 모든 권세를 얻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평생을 성경 말씀대로 행하고 죽은 사람과 마지막 죽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죽은 사람과의 영생한 후의 차이점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선지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어디 있습니까?) 새로 읽어, 봐. 무슨 말인지 내가 모르겠는데. 그거 무슨 말이라? 읽은 사람은 알 수 있거든. 뭐? 가만 버물리지 말고 그만 읽어. 하나 해야지. 하나 하나 해결해야지. 하나하나 해결해야지. 한 장을 써 있어도 가만있어. 하나씩 해야 되지. 그라면 뭐이라, 처음에 말해 봐. 그거는 뭐, (평생을 성경 말씀대로 행하고 죽은 사람과) 아, 그래 그래 그래 됐어. 자, 이거 또 해 줘요.
예수 믿는 사람이 평생 예수를 성경 말씀대로 믿고 산 사람과 또 마지막 죽을 때 한 삼 분 동안 일 분 동안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과 구원의 차이가 뭐이냐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자 그거는 여러분들 알아요 몰라요? (압니다.) 압니까? 알면 말할 거도 없는데. 그래도 혹 말이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 둘로 나눕니다. 기본 구원은 예수님의 선택과 또 예수님의 대속, 또 중생, 또 영생 하나님 아버지 아들, 또 영감을 받은 것, 진리를 받은 것 이런 것은 또 부활, 이런 것은 다 기본 구원입니다. 이거는 꼭 동등입니다.
삼분 믿고 죽은 사람이나 꼭같이 동등입니다. 동등인데 다만, 몸의 부활은 꼭 같지만 몸 속의 기능이 다릅니다. 사람들의 모든 체중도 같고 다 같지만 그 속의 기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체중은 똑 같이 십 관짜리 사람인데, 십 관짜리 사람 하나를 하루를 그 사람을 등용을 할라 하면 여러 수천 만 원을 들여도 안 됩니다. 수억만 원을 들여야 하루를 등용할 수 있다 말이오. 하루를 등용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꼭 같은 체중을 가진 사람이지만 삼천 원이면 그 하루 등용할 수가 있습니다. 수억만 원을 들여야 등용할 수 있다는 그 사람은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저 강대국에 원자나 중요한 거 뭐 하나 그 하나만 딱 가르치면 환하게 되겠는데, 그 사람은 억만 원 줄 터이니까 이제 하루 동안만 강의해 주도록 보내라 해도 그 나라에서 안 보내 줍니다. 억만 원 아니라 십 억을 줘도 백 억을 줘도 안 보냅니다. 그건 무슨 가치입니까? 아, 하나는 하루 종일 해야 삼천 원짜리인데 하나는 수억 원짜리 있으니까 그게 뭡니까? 속에 기능이라 말이오. 속에 기능. 기능의 가치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다음에 부활은 다 같이 하지만 부활한 자의 기능은 각각 다릅니다.
그 기능은 언제 기능을 살리는가? 우리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 내가 기능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능이요 영감의 기능이요 진리의 기능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기능인데 그 기능을 내가 받을 때는 언제 받느냐 하면 현실에서 받습니다. 그 현실에 그 기능을 내가 받아 가지고 그 기능으로 살라 하니까 세상이 와 가지고 못 살구로 위협도 하고 꾀우기도 할 때에, 꾀우고 위협할 때에 이 기능을 척 집어 던져 버리고 이 세상 그 좋은 것을 취한 거는 그 기능 버렸습니다. 그 시간에 받을 기능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에 살아날 기능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 세상이 죽인다 협박을 하고 달게 뭐 달콤하게 꾀우고 해도 그때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하나님의 온갖 기능을 버리지 안하고 내 이 심신이 그 기능을 버리지 안하고 그 기능을 내가 '나는 이 기능이 좋습니다' 하고 영접하면 그 현실을 통과했으면 그 기능은 그 현실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시간에 해당 된 기능은 그 기능이 받아 가지고 산 기능, 영생을 했고, 그 기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의 기능을 삼은 그 기능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으로써 부활은 같지만 부활한 자의 영광의 차이는. 그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말씀하시기를 그런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형체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는데, 형체라는 말도 같고 형체는 각각 다르지만 형체라는 말은 같지 않느냐? 부활이라는 말은 다 같다. 부활은 다 같이 한다. 그러나 부활한 자의 영광이 다르다. 그런데 형체는, 하늘에 속한 형체는 해 한 개도 형체요, 달 한 개도 형체요, 별 한 개도 형체인데, 하늘에 속한 형체도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고 또 해와 별의 영광이 다르고 또 하늘의 형체와 땅의 형체의 영광이 다르다. 하늘에서 해 한 개의 그 형체나 땅에 있는 무슨 똥덩이 한 개 형체나 또 자갈덩어리 이런 자갈 한 개의 형체나 다 형체는 다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가지고 있지만 땅에 있는 자갈 한 개의 그 형체의 영광과 하늘의 태양 한 개의 형체의 영광과 영광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 밑에 좀 대답해 봐요. 여기 대답, 여기 대답, 대답해 봐요, 대답. 달라? 몇 배나 다릅니까? 한번 말해 봐요. 몇 배나 해의 영광이 크겠지? 몇 배 나 클까요? 맘대로 말해 봐. 억억 억억억억억억억억. ○조사님 그래 할라 하면 일생해도 모자랍니다. 한말로 해 봐. 무한히 크요. 무한히. 끝없이 무한히 차이 있습니다.
무한히 차이 있어.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 오늘 애를 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문답. 뉘가 질문을 잘했는데 이제 이 말 듣고 오늘부터 허송 세월 한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허송 세월하지 말고 영광 있는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또 읽어 봐요. 개인 질문이 모든 사람 다 들으라고 지금 지금 뭐 하는 것인데 개인 질문이 되는가? 한번 공부 더 하는 것이라 좋지, 뭐. 좋지 않아? 또 물어 봐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아. 선지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또 그거라? 아, 그라면 뭐 평신도와 선지자의 차이는 그것은 하늘에서 상을 보면 선지자 상이 제일 많습니다. 선지자 상이 제일 큽니다. 왜 그러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뜻을 인간들에게 알렸는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그것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살아나고 하기 때문에 그 대목이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상을 베풀 때에 선지자 상을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제일 먼저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지자의 상이 제일 먼저라고 그렇게 볼 수 있어. 크다 작다는 것은 볼 수 없을란지 몰라도 제일 먼저라 그렇게 볼 수 있어요. 먼저 그 상을 베풀었으니까. 이러니까 그래서 목사 노릇하고, 그래도 주일학교 반사 노릇하고.
그래서 부장 노릇하고, 그래서 권찰 노릇하고 그래서 그래 하는 것이지. 집사는 그거 없어요. 돈만 거석하지. 이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사람을 전도하고 구원하는 그게 전부 선지자 상입니다. 그 선지자 상이 보니까 상이 큰지 작은지는 몰라도 선지자를 제일 먼저 불러 가지고 선지자의 상을 제일 먼저 베풀어요.
자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손들어 봐요.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 다 드네. 행복입니다.
행복이야. 주일학교 반사는 다 선지자요. 자, 주일학교 반사, 원반사 보조반사.
원반사 보조반사하는 사람들 손들어 봐요. 원반사 보조반사 하는 사람들 다 손들어 봐요. 다 손들어 봐요. 우리 ○장로님은 보조반사 안 하는가배. 아이고 불쌍한 장로다. 불쌍한 장로. 또 저 밑에도, 저 뒤에도 장로 또 반사 안하요? 아이고 불쌍한 장로. 자, 손 놓고, 이제 보조반사도 반사도 안 하는 장로님들 한번 손들어 보이소. 한번 손들어 봐. 손들어야지. 왜 ○장로님은 안 들어.
그래도 못 하는 것이지, 뭐. 그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해야지. 예, 그 참 좋은 말을 물었습니다. 이거 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 공부 아니요? 이러니까, 우리 교회서는 장로님들이 장성해 가지고 반사가 됩니다. 또 목사님도 장성해 가지고 반사가 됩니다. 우리 ○○○목사님은 반사한지 얼마 됐습니까? 한 삼 년 되는데 지금 몇 등 합니까? 이 등, 삼 등 해요? 하, 장합니다. 우리 교회 우리 장로님들은 이제 처음에 하다가. 교통지도 부장하다가. 그 다음에는 보조반사하다가. 그 다음에는 반사합니다. 서부 교회에 이제 반사된 장로가 몇 분입니까? ○○○선생, 원반사 여섯 분, 또 보조반사는? 아, ○○○장로님도 보조반사하는 갑데. 저 분교에 가 가지고 열심히 돈도 내고 뭐 설교도 하고 그라는가 보데.
어쩌든지 이상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 하는 데에서 자기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꼭 반사를 안 해도 이제 이 복음을 전할 중심을 가지고 자기 직장에서 이 복음을 빛내 가지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관심을 가지고 하는 어쨌든지 선지자직 이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할라고 하는 그 중심이 없으면 하나님은 기뻐 안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이 복음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이것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으면 반드시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줘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되겠다 하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진정, 계속 눈물은 안 나올지라도 가끔 가다가 그 눈물이 그 속에 없다고 하면 그는 천성을 가는 그노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노자가 없는. 천성 가는 노자가 없는 사람이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눈물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주 하늘나라 가는데 노자 없이 배가 쫄쫄 곯고 가는 사람이오. 인제 다, 질문 다 됐어? 예 그라면 됐어. 그거 인제 묻는 거 좋은데.
어쩌든지 묻고 복 적은 자 되지 말고 영광 많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다 힘을 씁시다.
그러고, 자꾸 여러분들이 여기서는 배우고. 또 기억하고, 조용한 산에 올라가 가지고 새김질을 하고 자꾸 그리해요. 그래서 하나라도 똑똑히 배우면 그걸 통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저는 본 교회서 가르칠 때에 성구를 여기 저기 여러 군데를 읽지 않습니다. 꼭 같은 것이면 될 수 있는 대로 한 군데를 읽고 자꾸 여러 것을 말해 가지고 그렇게 가르칠라고 애를 씁니다. 왜? 그러면 그 성구를 기억하라 그말입니다. 같은 것이라도 여기 저게 읽는 것으로 그라면 그만 하나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성구는 간추려서, 성구는 그 숫자를 줄이고, 거기 대해서 구원 도리는 깊이 깨닫고, 이래 가지고라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에 갈래길이 없이 가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오. 하나 광고합니다. 우리가 예배마치고 난 다음에는 새가 와서 주워 먹는다, 그 새가 뭐이 새냐 하면 이제 예배보고 나면 이 말씀을 기억하도록 새김질을 해 주든지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지 안하고 벌써 거기 있던 어떤 목사님 하나 떡 예배 마치고 나서 저기 가 가지고 앉았으면서 눈을 감고 이래 있으면 그만 거기 가 있는 사람들이 조심을 해 가지 그 '아. 목사님 눈감고 저래 있는 것 보니까 아마 말씀을 아마 생각하는가 보다. 나도 생각해야 되겠다.' 또 가도 조심을 해서 걸어가는데 그만 목사가 교인들 데리고 이렇고 저렇고 있고, 허허허허 이렇게 저렇게 한바탕 웃어 재끼고 이래 버리면 그 교인들은 십 배나 몇십 배나 그만 그런 방종자가 돼 버리고 맙니다. 이러니까 여기 있는 동안에는 꼭 할 말이 있으면 안해서 안 될 말만 하십시오. 안 하면 안 될 말만하면 옆에 사람보고 살며시 소근소곤소곤소곤, 그 사람만 듣도록 소곤소곤소곤, 그 사람만 들리게 소곤소곤 하면 그것도 양식이 됩니다. '아이구 저 목사님 저렇게 소곤소곤 말하고 장로님이 저렇게 소곤소곤 말하고 권사님이 저렇게 소곤소곤 말하니까 우리도 소곤소곤 말해야 되는구나' 그만 그거 떡 가르쳐 놓으면 이 장면 이 얼마나 조용하겠습니까? 그래도 과거에는 한 삼십 명 저 삼봉산에서 모일 때 삼십 만 모여도 막 왁신왁신 어떻게 떠들어 재끼는지 이랬는데 지금 여기 보면 아마 몇 만 명이 모였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모여도 사람 없는 거 같아요, 조용하게. 엔간히 훈련은 되기는 됐는데 혹 처음으로 온 사람이 오면 그래요.
제가 양산동 그 기도실이 있는데, 양산동 기도실에 오면, 이 시내의 사람이 오면 하나 오면 표가 나요. 어떻게 저 잘났다고 막 왁왁 큰 소리하는 게 왕인듯이 이래 쌓아서 그래 내가 이름을 지어 놨어. '여기서 오면 고함 지르고 큰 소리 내면 이 동리 사람들이 상놈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 상놈이라 해요.
'아. 저 상놈 하나 왔다. 저 왜 저래 떠들어 쌓아. 상놈 하나 왔다.' 거기 사람들은 말이 없어요. ○○○목사님 어디 있어요? ○○○목사님이 소리하면 상놈 소리 나한테 많이 들었지? 큰 소리하면 상놈 소리 듣고 그랬지? 큰 소리하면 상놈 된다 그 소리 많이 했어요 내가, 그래 큰 소리 안 해요. 큰 소리 안 해도 혹 주의해서 큰 소리할까 싶어서 '큰 소리하면 상놈됩니다' 그 동네 사람은 큰 소리하면 상놈으로 알아요. 여기서도 나 잘났다고 막 이래 떠들어 쌓고 이 쌓아면 인기가 올라가는 줄 알아도 '저거는 상놈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는 거 보니까 몰상식한 사람이라. 상놈이다.' 이래 상놈으로 알아요.
떠들고 이라면 상놈으로 알아요. 그 소근소근하고 자꾸 그 사람에게, 말씀이나 새김질하도록 하고, 또 조심하도록 하고 이제 그 사람 보니까 나도 주의해야 되겠다, 이래서 자꾸 이 말씀으로 더 충만해지고, 긴장으로 충만해지고 이래 하면 그 사람의 별명을 뭘로 붙일까요? 양반이라 하겠는데. 그게 성도야. 그게 성도. 그게 성도입니다.
이제 그래 가지고 새김질할 때 새김질도 해 주고 가서 조용히 해 가지고 어쩌든지 금번에 내가 첫 시간 말했지만 하나님과 지금 요만치 밀접해졌습니다.
요만치 밀접해졌으면 더 나가지 말아요. 자꾸 들어 갈라고 애를 쓰고 요라다가 이 집회 마치기 전에 다 이래 해서 주님하고 나하고 둘이가 딱 합작이 돼 버려야 돼요. 합작이 되고, 이래야 되어지지 그만 여기 이리 슬슬 요만치 멀어지고 자꾸 죽자껏 애를 써 가지고 이제 예배 시간에 요만치 가깝게 해 놓으면 나가 가지고 그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뭐 하다 보니까 멀어지고 와 보니 쭉 멀어져 가지고 있지. 또 들어 봤자 또 멀어지지 이래 하다가 그만 나중에 한번 들어붙지도 못하고 만다 그거요. 이라면 안 돼.
한번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는 지극히 큰 능력과 무한한 사랑으로 된 이 생명으로 영생을 얻은 저희들인 것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여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에 현실이라는 현실은 우리의 믿음을 장성케 하며, 우리의 구원을 견고케 하기 위한 주님의 선물인 것을 확실히 믿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현실에서 투쟁할 때에 내가 뭣 때문에 투쟁하는, 투쟁하는 목적을 다시 한번 새롭게 살펴보고. 내가 어디 속하여 있는 것도 심사해 보고, 내가 속한 자와 상대방이 속한 자의 비교로써 어느 것이 크고 작은지 이것도 심사해 보고, 내가 속한 자의 능력을 보아 그 능력을 믿음으로 인해서 강하고 담대하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온유해질 수 있는 실상 있는 저들의 믿음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고, 내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지극히 큰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의 그 심정이 어떠며, 내가 싸우고 있는 그 적으로 더불어 싸우고 있는 그 적에 대해서 주님의 심정이 어떠한 것을 밝히 깨달아 주님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으로 제사장 선지자 왕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분담된 모든 주변에 있는 사망을 다 깨뜨리고 악령과 죄와 사망을 완전히 멸하고 주의 뜻을 이루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 지식이 병들고 지혜가 병들고 중심이 병들고 사랑이 병들고 진실이 병들고 거룩이 병들고 의가 병들고 모든 마음이 병들고 행동이 병들고 영이 심히 빈약하여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고쳐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영의 연약성의 연약병이 고쳐져서 강해지고, 마음의 온갖 이 병든 것이 치료되고, 이러므로 몸의 행동의 병이 치료되고, 이러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볼 수 있는 몸뚱이의 안밖의 온갖 병이 다 치료되어서 보이는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를 보고 알므로 여기 믿음을 크게 자라게 하는 금번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갖 사람들이 다 왔으나, 올 때는 온갖 심신의 병신이 왔으나 심신의 병을 완전히 치료 받아서 완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영광의 찬미로 완전히 고침을 받는 이 시간 되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