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구원에 대해 제일 힘쓸 일


선지자선교회 1988년 3월 2일 수새

 

본문 : 행 20:29-32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는 기본구원인 영육이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 아닙니다.

영과 육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택한 자는 신앙생활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신앙생활을 안 하든지 다 갑니다.

 그 사람이 평생 신앙생활 안 했다 할지라도 택한 자면 영과 육은 갑니다.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안 믿고 죽으면 그 사람은 불택자로 우리가 봐야 하겠고  만일 그 사람이 세상을 뜨게 되는 한 일 분이나 이 분이나 극히 짧은 시간이라도  택한 자는 믿고 갑니다.

 또, 불택자는 일생 동안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이 믿고 목사까지 되고 뭐 별별  그 성직을 가지고 활동해도 마지막 세상 떠날 때에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갑니다. 거기에서 택자와 불택자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라고 이렇게 예수 믿는 신앙생활을 힘쓰고 있느냐?  있는 것은 우리의 그 행위구원 곧 건설구원, 고린도전서 3장10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이 터 위에, 터는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그 사람이 집을 짓는데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사람도 있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그 공력을 불로 가지고서 시험할 터인데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안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상을 받고 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은 불이 올  때에 다 타서 해를 본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거와  같다.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것 같다 그 말은 자기의 소유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다 자기 맨 몸으로 빈 몸으로 그 불에서 구출돼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하나도 구원될 것이 없고 다 자기의 모든 건설, 자기가  건축한 건설, 자기의 행위를 건설한 행위건설이나 또 자기의 무슨 자체를 건설한  것이나 또 자기의 소유를 건설한 것이나 어떤 것이라도 다 그것이 본질과 본성이  불탈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그런 본질과 본성으로 건설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불이 와 가지고서 시험할 때에 다 정죄받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 얻으나 불 가운데서 구원 얻는 사람과 같다 그렇게 말씀을  했고,  그럴 때에 타지 않는 자는 상을 받는다 그 말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은  불에 타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그거 비유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건설된 것, 자기가 피공로를 입었기 때문에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종으로  산 것, 또 영감을 입어서 영감 인도대로 산 것, 또 신구약 성경은 진리인데 성경  진리대로 산 것! 그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피에 합당하게 산 것이나 영감으로 산 것이나 진리로 산 것이나 그것은  꼭 같습니다. 진리로 사는 것이 아니면 주님의 피에 거스리게 되고 영감으로  살지 안하면 피에 거스리게 되고 주님의 피와 상관없는 그 생활은 진리 같고  영감 같지만 다 귀신의 생활이요 그거는 다 인간들의 자유와 주관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행위 구원이라 말이나 건설구원이라 말이나  성화구원이라 말이나 또 영광의 구원이라 말이나 꼭 같은 말입니다. 같은 말을  이렇게, 영광의 구원이라 말은 하나님과 모든 인간과 만물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구원이라 말을 영광스러운 구원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성화구원이라 말은  거룩하게 변화된 구원이라 말이고, 또 행위구원이라 자기의 행동으로서 구원되는  그런 행동을 했다. 또 자기가 건설구원이라 자기가 건설하는 그런 자기가 노력해  가지고 건설하는 그런 건설로 이루어지는 구원이기 때문에 건설구원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기본구원 얻는 것인데  이것은 뭐 우리가 힘쓰고 안 쓰고 아무리 힘을 안 쓴다고해서 이 구원을 해칠  수도 없고 또 우리가 힘을 쓴다고 해 가지고 이 구원을 조그만치라도 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기본구원은 택한 자들은 꼭 같습니다. 사도들이나 성자 성녀들이나 아주  잘못 믿는 제일 잘못 믿은 사람이나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감하지 못하고 순전히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은혜로 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써는 털끝만치도 할 수 없는  하나님과 또 예수님의 대속의 그 공로와 진리 이 셋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요,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그 행위  전부를 다해도 털끝만한 것도 기본구원은 보태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이 그라면 천해서 그렇습니까? 기본구원이 귀중해서  그렇습니까? 아주 천해서 뭐 그거는 공짜배기로 얻지 아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천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기본구원이 아주 귀중해서 너무 가치가 인간으로서는 그 댓가에  털끝만치도 할 수 없는 이 피조물을 탁월한 지극히 존귀한 구원이라, 인간은 그  댓가로서는 털끝만한 것도 낼만한 자격이 없다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그  기본구원이 귀해서 그렇습니까? 천해 그렇습니까? 귀해서, 너무 귀중해서  인간으로서는 털끝만한 가치도 낼 수없는 그런 존귀한 구원이라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네,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거 은혜로  받는 것이지 천해서 그런것 아닙니다.

 어떤 성자가 말하기를 자기가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하신 그 공로의 은혜로  기본구원이 이루어졌지 자기의 수고와 노력이 자기 기본구원 얻는 데에 이  실라끈만한 것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써 다 절단나 버리고 만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큼 기본구원은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건설구원, 성화구원, 행위구원, 그 영광의 차이를 만드는 영광구원  이 구원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만들면 사람 단독이  만드느냐? 단독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 기본구원을 입은 자들이 또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의 은혜에 도움을 입어 가지고 이루는 것이 이  건설구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건설구원은 실상은 이 세 능력이 자기에게 와서 자기를  붙들고 역사해 가지고서 이 세 능력이 자기 마음도 이 세 능력이 감화시켜  인도시키고 뜻도 생각도 하도록 하고 이 세 능력이 또 자기를 돕고 해서, 알리고  돕고 또 결실을 맺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서 하는 것이나 이 세 가지 능력이  자기를 붙들고 역사하실 때에,  그 둔하게 역사를 한다면 '이것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피와  성령과 진리의 도움을 입어서 했다' 이렇게 볼 수 있고, 원청간 그 전지의  능력을 가지고 민첩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 한 사람마다 다 제 힘으로 했다.

'이거는 내 힘으로 내가 이 건설구원은 이루었다. 행위구원은 이루었다.' 이렇게  여길 수 있을 만치 그만치 이 세 가지능력은 우리 속에 들어 와서 은은하게  역사하시고 우리는 그 능력을 힘입어서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양심을 쓰고 심령이 밝은 사람은 모든 일을 건설구원을  이루어 놓고 난 다음에 건설구원 이룬 그것을 다 주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아서  면류관을 주님 앞에 이래 던진다 했어.

 던진다 말은 천해서 던지는 게 아니고 이제 그 면류관은 보니까 승리한 것, 은  전부 다 주님이 승리케 하신 그 은혜로 승리를 했는데 그 주님 앞에 이 땅에  있을 때에는 만만스럽게 그렇지마는 차차차차 눈이 뜨여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고 보니까 그분 근방에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던졌다' 그 말은 가지를  못하고 감히 던지지 손으로 바치지를 못한다. 그 거리가 멀고 자기는 주님 앞에  감히 갈 수 없다는 그것을 깨닫게 된 그 행동인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도 요한이-다를 패에는 예수님의 품에 기대기도 하고 이렇게 아주  만만스럽게 이렇게 했지마는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눈이  뜨이고 보니까 예수님이 두려워서 볼 때에 그 앞에 꺼꾸러져 그만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손으로 안수하시면서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만만스럽게 내 몸에 기대고 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치 않는  하나님인데 네 눈이 그때는 어두워서 그렇고 지금은 밝아서 그런데 그새에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 그 내가 지금도 영원히 긍휼히 여기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면서 위로로써 깨우쳤습니다.

 그런고로, 점점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수록 눈이 밝아지고 눈이 밝아질수록  이 주님은 크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인간과 비교 못 할 무한히 탁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이제 눈이 어두울수록 주님은 만만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이렇게 말한 것은 사도  바울이 죄가 많아 그런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이 눈이 밝아지니까 자기에게 단점을  다 보게 됐고 주님에게 장점을 다 보게 됐고 인간들에게 대해서 바로 보게 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를 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안했고 그저 자기가 죄인 중에 제일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하는 것을 간증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눈이 밝아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잘난 재미로 날뛰고 있는 그것은 눈이 어두운 탓입니다. 자기 잘난 재미로  날뛰고 자기를 뭐를 주장을 세울라고 쌓고 자기를 위주로 할라고 하고 또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높이도록, 섬겨 주도록, 자기를 위해 주도록, 자기를 따르도록  할라 하는 그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면 그렇지  않습니다.

 눈이 밝아지면 누구보다도 자기에게 있는 그 모든 잘못된 점이 찾아지기 때문에  그 일 고치는 데 급급하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말할 시간이 없고 또 모든  사람을 볼 때에 눈이 밝으면 다른 사람은 껍데기만 보지마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에는 다른 사람의 외모만 보지 속에 알맹이는 보지 못하지마는 자기가  자신에게 대해서는 알맹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죄인 중에 자기가 제일 죄인이다  하는 것으로 마지막에 결론 난 것은 그것은 눈이 밝은 연고입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구원은 건설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  것인데 건설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힘쓸 것은 뭐인고? 제일  중요하게 힘쓸 것은 뭐인고? 어데다가 제일 중요하게 힘을 써야 할 것인가? 힘을  써야 하는 것은 아주 에덴동산에서 간단하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들은 이 에덴동산에 살아라. 다른 데 가지 말고 에덴동산에 살아라.'  그렇게 말씀했고, 또 '이 동산을 네가 다스리라. 지키라. 모든 일반 과실은  임의로 먹되 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은 먹지 말아라.'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첫째는 이 동산에 머물러라 하는 것 말했고, 또 두 번째는 동산을  다스리라 말했고, 또 세 번째는 동산을' 지키라 말했고, 네 번째는 일반 과실은  임의로 먹으라 말했고, 다섯 법칙은 선악과는 먹지 말아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요 다섯 가지가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으라는  것은 어떤 곳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자리 있거라. 주님이 있으라 하는  그 현실에 살아야 된다 말입니다. 주님이 있으라는 주님의 명령 주님의 뜻에,  주님이 있으라 하니까 에덴동산에 있는 것은 주님의 뜻에 맞은 곳 아닙니까?  우리가 항상 살 때에 주님의 뚱에 딱맞는 그 자리에 살라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에 맞는 자리에 살라고 하면 주님의 뜻에 맞는 자리가 어떤  자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자리인가? 자기가 현재에 성경 말씀에 비교해 볼 때에  너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는 그 자리를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것은 안 된다 하는 데 있으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인데 내나 그 자리 있으면서, 그 자리 있으면서 주님의 뜻에 맞은 자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 자리 있으면서, 내가 어쨌든지 지금 요 현실, 요 내 현재, 요 현실, 요  현장 요게 와서 부딪혔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나로 살아야 된다 하면은 그것이 에덴동산을 찾아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못된 도적들에게 끌려가 가지고서 쓰리꾼이 됐습니다. 자기는  쓰리하는 사람이, 도적질하는 사람이 됐는데, 도적질해 도적질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됐으면 자기의 현실은 도적질하는 입장에서 사는 그것이 자기  현실입니다.

 그러면, 자기 현실을 에덴동산으로 만들어서 에덴동산에 삭는 것은 어떤 것이  에덴동산에 사는 것인가? 도적질하는 그 자리에서 자기가 깨닫고 '나는 이 시간  이 현재에서 주님이 내게 대한 뜻이 무엇인가? 주님이 내게 대한 뜻이  무엇인가?' 주님의 뜻이 너는 그 도적질하는 것을 회개하라는 뜻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그 자리에서 아무리 동무들이 강권하고 이래 강제해도 네가  거기에서 죽어도 이제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은 네가 행할 수가 없으니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될 내다'  요렇게 자기가 깨달으면 고 깨달은 그 자리가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리든지 에덴동산 되는 자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는 순종해서  살아야 된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순종하면 그것은 자기의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기에 어디서든지 나는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주님의  뜻에서 살아야 된다. 나는 주님의 뜻에서 살아야 되지 주님의 뜻을 떠나지는  못한다. 주님의 뜻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작정하면은 그 사람은 벌써  주님의 그 인도하시는 에덴동산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 사는 것이 뭐이 에덴동산에 사는 것이라는 것은 단단히  기억하고,  그러면, 둘째로 '동산을 다스리라' 그러면 동산을 다스리라 했으니까 이 시간  이 자리에서는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될 내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작정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 할 때에 그것이 곧 에덴동산에 있는  것이요,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것은 뭐이냐?  그러면, 자기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하는 그 현실, 그 현실을 다스린다 그  말입니다. 자기 현실을 다스린다.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할 현실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것이 자기 현실인 것을 깨달은 그럴 때에 그  현실은 에덴동산이 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이 뭐이 에덴동산인가? 주님의 뜻에 따라, 동산에 여기에  있거라 했으니까. 주님이 동산에 있거라 하면 동산에 있는 것이고 빈들판에 가  있으라 하면 빈들판에 있는 것이고 주님이 있으라는 그 뜻, 주님이 있으라는 그  뜻에 자기가 살라고, 뜻에서 살라고 하는 그것이 그 현실이 에덴동산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에덴동산이라는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라 하는 건 주님의 뜻에 따라서  네가 살라고 하는 요 현실을 네가 다스리라. 다스리라했으니까 거기에 지배를  받으라 말입니까 그것을 지배하라 말입니까? 지배하라 말입니까 지배를 받으라  말입니까? 지배를 하라 말이지요.

 그러면, 지배를 하라 말인데 지배를 하라 말은 그 현실에게 피동되라는  말입니까 현실에게 능동이 되라 말입니까? 현실에게 피동되라 말입니까 능동되라  말입니까?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라는 말입니까 네가 현실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네가 하나님의 뜻대로 현실을 네가 움직이라는 말입니까?  현실에게 따라 움직이라는 말입니까 현실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라 하는  자기에게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까? 네, 현실을 자기가 따라서 움직이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자기에게 그 현실이  따라 움직이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을 해야 돼요.

 그러면, 만일 자기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위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 위대한 사람들을 따라서 자기가 움직이는  것이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아무리 위대한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사람들에게 뜻대로 내가 움직이는 그것이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그 사람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사람들에게 대해서 행하는 것이 그것이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좋은 것을 줍니다. 돈을 가져와서 돈을 준다. 또 벼슬을  준다. 좋은 직장을 준다. 또 아주 미남이 있다. 또 미인이 있다. 그럴 때에 아주  좋은 것. 미남도 좋은 거요 미인도 좋은 것이요 지위도 좋은 것이요 권세도 좋은  것이요 돈도 좋은 것이요 직장도 좋은 것이요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따라서, 좋은 그것을 따라서 내가 움직이면, 내가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그것을 좋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따라서 움직이면 나는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동산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요?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까?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시오. 저 뒤에는 손을 안드네. 모르네. 동산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 거기에 피동되지 안해야 된다 말입니다.

 아무리, 만일 어떤 사람이 또 와 가지고서 아주 죽일라고 협박을 합니다. 또  내게 대해서 아주 억울하게 악하게 독하게 못되게 행동을 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그 행동한 그 사람을 인해서 내가 변해지면, 그 사람을 따라서 변해지면,  그 악을 행하는 자를 따라서 내가 악한 자로 변해지고 나를 죽인다고 하니까  죽인다고 하는 거기에 따라서 내가 두려워서 그 죽일라고 하는 거기에 순종을  하고 따라서 움직이게 되면은 그거는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동산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까?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까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동산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저 뒤에.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고 아눈 분들 손 한 번 들어 봅시다. 뒤에도 손을 들기는  바로 드는구만.

 이러니까, 우리가 동산을 다스리라 하는 이 한 마디에도 얼마나 우리가  그만해도 그만 구원 도리를 다 알 수 있어. 전체는 구원 도리를 구구절절이 다  가르치고 있지마는 요대로 행하지 못해서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난 뒤에는 흉악한 이리가 와가지고'  이리는 꼭 여기에 세파트 개와 같이 생겼습니다. 금강원에 가면 거기에 이리가  있습니다. 아주 뭐 개만한 것이 개보다 조금 입이 좀 긴데 굉장한 그게 맹수요,  보기는 개 같지마는 굉장한 맹수라. 이 개를 집에서 길러 그렇지 이 개가 굉장한  맹수입니다. 이것도. 아주 모질고 독한짐승이라 말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와서' '내가 떠난 뒤에는 흉악한 이리가 와서' 이리가  사람입니까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짐승입니까? 이리가 짐승인데 여기에 사람을  비해서 짐승으로 말한 것입니다. 믿는 신앙을 잡아먹는 그 인간을 가리켜서  이리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신앙을 잡아먹는 인간을 가리켜서 이리라고  말합니다.

 '흉악한 이리가 와서 그 양례를 아끼지 아니하며' 양떼를 아끼지 않는다는데  양떼를 아끼지 않는다 말은 양떼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똑똑히 말해.

한목. 양떼는 뭐입니까? 따라합시다, 양떼는! 우리! 양떼는! 우리! 바로 양떼는  여러분들이라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을 삼킬라고 이리떼가 온다 그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그만 그것이 이리에게 삼켰나 안 삼켰나 하는 것을 뒤에 결과를  보면은, 우리는 누구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피의 사람이요 영감의 사람이요  진리의 사람입니다. 이것만 구원 얻습니다. 이런데 그만 피와 성령과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안하고 이리의 사람이 됐습니다.

 이리가 목사가 이리도 되고 장로가 이리도 되고 권사가 이리도 되고 집사가  이리도 되고 사장이 이리도 되고 박사가 이리도 되고 또 이 미남도 이리가 되고  미인도 이리가 되고 사장도 이리가 되고 정권자도 이리가 되고 이리 안 될  인간이 없습니다.

 이리는 뭐가 이리입니까? 이리는 양떼를 삼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이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삼키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이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북돋아 주지 안하고 신앙을 길러 주지 안하고 우리의 신앙을 삼켜서 신앙을  없어지게 만든다 말이오.

 신앙을 없어지게 만들다니? 신앙이라 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 따라 움직이는게  신앙인데 하나님 따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저를 따라 움직이도록 만드는 바로  그자가 이리라 말이오. 그자가 나를 삼킬라고 하는 이리요.

 그러면, 자기에게 달콤한 말을 하더란대도 자기 신앙을 삼켜서 하나님과  진리와, 하나님이라 말하는 거는 성령을 하나님이라 합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따라서 살라고 하는 것을 그걸 따르지 안하고 그 사람을  따르게 했으면 그 뭐입니까? 그게 이리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따르게 돼.

 그 사람이 그러면 예수님의 피공로대로 진리대로 영감대로 인도한다고 하면은  그대로 인도한다고 하면은 그것이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이오. 하나에게 인도하는, 자기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서 중매시키는  중매쟁이오,   그러기 때문에, 은사 기관인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권찰이나 이런  사람들은, 주일학교 반사나 이런 사람들은 이거는 신랑입니까 중매쟁이입니까?  신랑입니까 중매쟁이입니까? 신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봅시다.

중매쟁이, 중매하는 중매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저  뒤에도 들어. 뻐뜩 들어야지. 게을하게 와 가지고 뭐 손도 들기 싫어?  중매쟁이요, 중매쟁이면 신랑은 누굽니까? 저 뒤에 신랑은 누굽니까, 소리로? 큰  소리로. 저 뒤에 사람들. 신랑은 누굽니까? 주님이야, 신랑은 주님.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종들은 주님에게로 우리를 중매한다 말이오. 주님에게로  인도해서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그래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이지 사람을  이끌어 가지고서 주님의 종을 만들지 안하고, 주님으로 더불어 하나 결합을  시키지 안하고 저하고 결합시켜.

 진리와 결합시키는 것보다도 영감과 결합시키는 것보다도 주님의 대속의 공로에  결합시키는 것보다도 이제 이 하나님과 결합시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내나 피  성령 진리, 피와 성령과 진리는 셋입니까 둘입니까 이 셋이 합해서 뭐라  했습니까? 하나라 했습니다. 내나 하나입니다.

 이러니까, 보면 알 수 있어. 이렇츰 배우고도 모르는 그거는 지옥 갈  자식이든지 그거는 불택자든지, 불택자가 아닌데 그런 사람은 뭐 속에든 거  있어. 뭐이 들어 그렇습니까, 뭐이 들어 그렇소? 자, 아는 사람 손 한 번 들어  봐요. 왜 우리 ○장로님 안 듭니까? 모르요? 한 번 대답해봐, 악! 악이 들어  그렇대요, 이 답이 맞아요 안 맞아요? 맞는 사람 손 한 번 들어 봐요. 맞아요.

악이 들어 그렇습니다.

 악이 뭐인데? 자기중심 자기 위주 그놈 들면 자기는 망해 버립니다. 살아날  길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도 이 사람들이 '유혹을 받지 안해야 될 터인데  그것보다도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동산을 다스리라 지키라 또 일반 과실을 임의로  먹고 선악과 먹지 말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을 지켰으면 유혹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유혹을 받을 이런 염려성이 있습니까? 그런  위험성 하나도 없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유혹이나 위험이나  그런 것이 따릅니까? 안 따릅니까? 안 따라.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아예  그런 것이 근방에 오지를 못해요,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만일 해와가 동산을 파스리라 지키라 일반 과실은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그 말씀을 지켰으면 배암이 와 가지고 그 유혹을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준다 그거요. 지키던 것을 지키지 않는 거기에서부터 배암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이 다섯 가지를 지키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고, 둘째로 조심할  것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꾀임을 받지 안하도록 조심해야 돼, 꾀임을 받지  안하도록. 이거 모두 다 낭패되는 것이 꾀임을 받는 데서 실패한다 말이오.

 꾀임받는 사람은 어떻게 꾀우는가 그걸 요 밑에 해 놨어.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들어온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입니까 밖에서 오는 것입니까?  밖에서 오는 것이라.

 여러분들이 이래도 이 밖에는 이단이 가득 찼습니다. 이단이 가득 찼소,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지마는 이단이 가득 찼습니다. 가득 찼어. 바다에 물과 같이 가득  찼어. 이러니까 그게 들어온다 말이오. 그런 사상 저런 사상이 자꾸 들어와  가지고서 아주 뭐 유명한 사람이 들어와 가지고 자꾸,   어떤 교회는 그 강단은 선교사 강단이라 이라는데,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라  하는 선교사는 별별 선교사가 꽉 찼습니다. 그게 뭐 예수 믿는 선교사가 아니오.

그저 돈만 받아먹고 와서 있는 그 뭐 예수 믿는 도리도 모르는 것, 여기  여호와의 증인에도 선교사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말세 그리스도교라 하는 그런  것도 선교사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여기 이단 종파들 선교사가 얼마나 많이 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교사들을 자꾸 강단에 세우고 또 목사 자기는, 강단에 세우는데  영어로 하는 데 통역을 하고 이라면 아따 우리 목사 참 영어 통역도 잘하고  제일이라. 그것이 속에 눈을 딱 뜨고 들여다보면 뭐이라는 거 환하게 볼 수 있다  그 말이요, 환하게 볼 수 있어  그런데, 그걸 잡는 데는 뭘로 잡아야 돼요? 뭘로 잡아요? ○장로님 말해 봐요.

그걸 잡는 데는 뭘로 잡아야 돼요? 말씀, 말씀이라 하면 좀 재미없어. 진리도  그렇고. 좌우에? 좌우에 날선 검으로 찔러야 돼. 검으로 찌르면 죽어요. 하나님  말씀 가지고서 그걸 바른 말을 하게 되면 그게 죽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와 가지고서 강의하는데 '이거 진리에 틀리지 안했느냐? 전부 이거  인본주의 아니냐?' 그라면 그만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 수 있다 말이오. 한  번 꾀이기 시작하면 그만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너희 중에서라 하니까 우리 서부교회라면 서부교회 사람들로 자기를  삼킬라 하는 자가 생긴다 말입니까 딴데서 들어온다 말입니까? 딴데서 들어오는  자 처음에 말했고 그 다음에 우리 가운데서도 그런 자가 일어난다 그 말이오.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제자들을 끌어' 이 제자들은 뭐입니까?  제자들과 양떼와 다릅니까 같습니까? 제자들이나 양떼나 같아. 같은데 제자들은  양떼를 인도하는 아마 반사나 보조 반사나지 권찰이나 권사나 집사나 장로나  목사나 이런 사람들이.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좋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면 방법은 어그러진 말로 방법 삼고,  하나님의 진리에 똑바르지 않는 어그러진 말, 어그러지는 말로 방법을 삼고, 또  목적은 뭐입니까? 끌기는 어데로 끕니까? 끌기는 어데로 끕니까? 하늘나라로  끕니까, 예수님께로 끕니까, 예수님의 피공로로 끕니까, 영감으로 끕니까,  진리로 끕니까, 자기에게로 끕니까, 어데로 끕니까? 자기에게로 끌어! 자기와  합해서 '자기에게 끌어'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좋게 하려고' 자기 좋게 하려고, 자기 따르게 할라고,  진리에 따르지 안하고 영감에도 따르지 안하고 피공로에 따르지 안하고,   그 사람의 하는 것이 그 사람 말 들어 보니까 피와 가까워진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가까워진다. 영감에 가까워진다. 진리에 가까워진다.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렇지 아니하고 자꾸 거기에는 기도할라 하니 기도도 막히고  뭐이 이런데 그런데 그 사람하고만 들어붙어서 재미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들어붙어 가지고 재미가 있어 그 사람 만나고 보면, 만나고 보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자기에게 만나기 전보다도 훨씬 대속의 공로가 자기에게 확실하고  또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자기와 점점 가까워져서 깨달아지고 또 성신의  감화가 자기 마음이 깨끗해서 감동이 자꾸 뭐인가 무슨 성신의 감동 옳은 감동이  오고 이러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안하고 암만 해야 사람하고만 재미있고 그  사람하고만 재미있고 그 사람하고만 정이 들어붙고 그 사람하고만 딱 들어붙고  그 사람에게만 인정받고, 그까짓 게 구주입니까? 그게 구주요? 거기에 붙어  가지고 뭐 할 거라고, 하기를?  거기에 붙어 죽자 살자 하고, 벌써 거기에 붙어 가지고서 그게 번연히 진리  아닌 행동, 영감 아닌 행동,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닌 행동을 그 사람을  따라서 움직이는 그 행동을 하나 둘 봤으면 '아이쿠, 이거 내가 이리에게  삼켜졌구나. 이놈이 이리로구나!' 이걸 알아야 될 터인데, 이걸 알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데 모른다 그 말이오.

 '자기를 좋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어그러진 말은 무슨 말이 어그러진다 말이요? 성경 말씀에 어그러진다 말이오.

성경 말씀에 어그러진 말. 불법이다. 불법이다. 하나 보면 다 알 수 있다  말이오. 어그러진 말, 성경 말씀에 어그러진 말. 그만하면 알 건데 그래도 죽자  살자 하고,   자, 마귀에게 배암이, 배암이 마귀입니까 배암이 배 애입니까? 껍데기는  배암인데 마귀란 놈이 배암을 이용해 가지고 왔더라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껍데기는 사람이지마는 그게 벌써 마귀가 그 사람을 이용해 가지고서 옵니다.

 이러니까, 어그러진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은, 어그러진 말을 성경말씀이 아닌  말씀이라 이라면 안 돼. 자, 성경에 있는 말씀 가지고서, 성경에 있는 말씀을 빼  가지고, 신구약 성경에 있는 그 단어를 째 가지고 예수 믿으면 지옥간다 하는 그  말을 째내 가지고서 연결시켜서 만들 수 있소 없소?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 남반에 없어요 있어요? 성경에 있는 단어를 빼 가지고서 연결시켜서 예수  믿으면 지옥간다 하는 그 말을 만들 수 있어요 없어요?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단어만 성구를 들이대며 성구 말한다고서 그게 아니라. 그러면  어그러진 말이라 말은 무엇이 어그러진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와 가깝게 하지  안하고 피와 멀게 하는 말이 어그러진 말이요, 영감에 어그러진 말이라. 자기  마음을 심령을 어둡게 하는 것이 어그러진 말이라. 또 진리와 멀어지게 하는  말이 어그러진 말이라?  바른 말은 뭐이냐 하면은 피와 성령과 진리와 나와 하나가 되도록 자꾸, 그  사람을 만나니까 예수님의 피공로가 그 만나기 전보다도 피공로에 대해서 더  생각이 더 나고 또 내 마음이 밝아서 옳고 바른 것을 바로 깨닫게 되고 또 성경  말씀이 환하게 이래서 성경 말씀을 자꾸 듣고 싶고 보고 싶고 자꾸 깨닫고 싶고,   그 사람 만나니까 성경 말씀 없어지고 이 세상 말, 뭐 그 사람 만나니까 '나도  부자 돼야 될세'부자 될 마음만, '나도 이거 좀 권세 얻어야 될세' '나도 출세를  해야 될세' 나도 이 세상살이도 좀 잘 살고 해야 될세' 그 사람 만나니까 자꾸  세상과 가까워지고 그 사람 만나니까 세상은 멀어지고 하늘나라만 가까워진다.

 그 사람을 만나니까 아무래도 너희들이 힘을 이라고 저라고 기술도 그라고 뭐  해야 되고 이런데 그 사람하고 가까워지니까 그런 것도 좋지마는 그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지 축복을 안 받으면 안된다. 이 하나님 한 분으로  전부가 되는 것, 만나보면 안다 그 말이오. 만나 보면 알아요. 내가 접해 보니까  어찌 되는 걸 알 수가 있어. 이러니까 자기에게 끌려고 어그러진 말, 어그러진  말을 하는 걸 알 수있어.

 '이 사람과 가까워지면 내가 신앙이 좋아지나 신앙이 더러워지나?' 이만하면 알  건데! 우리는 칼이라요. 가서 말해야 돼. 네가 이러니까 네가 아니까 영감의  성신의 감동이 더 충만해지느냐 네 인간 마음이 더 충만해지느냐? 하나님의  진리가 너에게 더 밝아지느냐? 예수님의 피공로가 더 생각이 되느냐 피공로와  멀어지느냐? 점점 너와 가까워지고 인간과 가까워지고 너와 가까워지고, 네  자신과 가까워지고 인간과 가까워지는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가까워지는지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여기에서도 이  가운데서 일어날 거라 말이오. 내가 떠나면 일어나요. 떠나면 마구 일어나요.

떠나면 중다 됐다 하고서 이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저 밖에서 지금 이단이라 하는  자들이 다 을 거야.

 이단이라 하는 자들이 지금 내가 있으니까 이단이라는 걸 말하다가 나중에  수치를 당하고 모두 자복을 하고 다 말고 모두 각서를 쓰고 다 말고 이랬지마는,  그거 참 이단이라 방송을 어데 했다는데 방송에 했는가 안 했는가 나는 그런 것  들어보지를 안하니까 그런데, 이라지마는 이제 내가 있으니까 못 하고 있지요.

내가 커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역사하니까 못 하지요.

 내가 떡 떠나면 이단이라 하는 자는 쫙 와 가지고 막 와서 이렇고 이렇고 막.

쑤셔 대고 찔러 대고 할 터이니까 넘어진다 말이오. 그럴 때에 알곡이 따로  나타나. 그때에 하나님의 상급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에 빠지지 안하도록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착실히 하는 사람은  그럴 때에 환해 '조게 이거다' 조 장로는 이리다, 저 목사는 이리다, 조 장관은  이리다, 저 사장은 이리다, 또 저거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중매시키는 중매자다  이렇게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끌어 자기를 좋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너희가 깨어서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교훈하던 말이오. '훈계하던' 교훈하고 또 경계하고 또  조심해라 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게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을 너희들이 얻게  하리라' 그러면 우리를 지켜 주실 이는 영입니까? 우리를 지켜 줄이는 몇입니까,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우리를 지켜주실 이는 몇이요? 우리를 지켜 줄 이가  몇이요? 둘, 둘. 둘을 들여야 돼요, 둘. 거기에 있지 안해요?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고 이 진리의 말씀이 지켜 주실 수 있어.

 그러니까, 요한복음 8장에 말씀하시기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를 마귀의 종이 되지 안하고 자유케 할 수 있지 진리 외에는 너를 마귀의 종과  사망의 종과 죄악의 종이 되지 않게 자유하도록, 죄의 종이 되지 안하고 자유,  마귀의 종이 되지 안하고 사망의 종이 되지 안하고 자유자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진리 밖에는 없다.

 그 다음에는 '아들이 너를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주님 밖에라. 주님과 진리  외에는 우리를 지켜 줄 이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점점 제가 그리 됨으로 사람과 가까워지나 진리와 가까워지나? 그  사람과 가까워짐으로 진리와 가까워지나? 그 사람과 가까워짐으로 예수님의  대속에 가까워지나 그 사람을 가까이 함으로써 영감과 가까워지나? 이걸 보면 알  수 있다 말이오. 그 사람을 가까이 함으로 점점 세상과 가까워지고 인간과  가까워지고 이제 구원과는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정신 차려 예수 믿어야 되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 아니요.

순종하면 된다고, 아니요. 그걸 크게 보지 말아요.

 내가 어젠가 언젠가 어떤 사람 들었는데 그 사람은 뭐 참 아주 자녀 많고 층층  시하에 많은데 그 가족들이 다 좋아하고 자녀들도 다 좋아하고 어떻게  봉사하는지 아들네들은 키울 때에 언제든지 그만 그 학교를 업어다 줬습니다.

어북 클 때까지 업어다 줬대. 업어다 주고 업어 오고 이러니까 모든 사람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털끝만치도 흠이 없는 사람이라 이라는데 하나님이 그거  진노하십니다. 축복하지 안해, 그런데 비참하게 해 가지고 죽어. 비참해. 예수도  믿지 안하고 비참하게 해 가지고 죽는다 그거요.

 그거 뭐이냐? 그 사람은, 그렇게 안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제일 잘하는 그 사람은, 안 믿는 사람으로서 인간에게 제일 행동을 잘 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마귀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까 마귀의  종입니까? 그라면 마귀의 새끼 종입니까 마귀의 제일 대장 종입니까? 마귀의  새끼 종입니까 대장 종입니까? 대장 종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망치요.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세상에서 마귀의 일을 선전해서 잘 칭찬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망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도덕가가 잘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또  그 자손이 잘되는 것 아닙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얼마나 바로 깨달아야 될는지 모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 말귀를 알아들어야 돼요. 이 진리의 각도를 알아들어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안해. 이 진리를 배우지 못하고 열심있는 그거는  어데든지 마귀에게도 열심 있고 하나님에게도 열심 있으니까 그 끄는 대로  가니까 소용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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